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9권, 영조 38년 1762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9. 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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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갑자

임금이 금상문(金商門) 밖에 나아가 조참(朝參)을 행하고, 김치인(金致仁)을 이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대소 신하에게 특별히 유시하기를,
"70세의 임금은 위에서 홀로 수고하는데, 아! 여러 신하들은 안일(安逸)만을 일삼고 머뭇거리는 데에 능할 뿐, 관의 일은 초(楚)나라와 월(越)나라 사이처럼 〈서로 상관없는 듯〉 여기며 각근(恪勤)한 사람을 가리켜 비웃고 있으니, 나랏일이 떨어지겠는가, 떨어지지 않겠는가? 각자 면려하라."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4월 2일 을축

윤태연(尹泰淵)을 우포장으로, 조엄(趙曮)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였다.

 

지평 임관주(任觀周)가 아뢰기를,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요즈음보다 더 심한 적이 없습니다. 전하의 묻기를 좋아하는 정성으로 이처럼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이 풍습을 이루게 된 것은, 혹은 뜻을 거슬리다가 꺾이거나 혹은 사람을 논핵하다가 폐고(廢錮)를 당한 때문입니다. 처음에는 나라를 위해서 말을 다하고자 했지만 마침내는 한결같이 배척받아 떨치지 못하고 있으니, 소석(疏釋)하여 진용(進用)하는 것이 신의 소망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근래에 대신(臺臣)이 오로지 머뭇거리는 풍습만 일삼아 관사(官師)의 규정을 듣지 못하였으며, 제지(除旨)가 한번 나오면 문득 재외(在外)라고 일컫는데, 이와 같아서야 어떻게 나라의 구실을 하겠는가? 오늘이 말할 수 있는 기회이니, 다 진달하고 숨기지 말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금위 대장(禁衛大將) 이장오(李章吾)는 평상시에 부오(部伍)를 검속하지 못하여 대장(隊長)들은 수렴(收斂)을 하고, 향군(鄕軍)은 원망하여 대궐문에 괘서(掛書)의 변을 일으키게 하였으니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이장오는 파직의 형전을 시행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그 군사들은 교만하고 사나우며, 그 장수는 지나치다. 평상시에도 이러하니 다른 때에는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군율을 엄히 하는 도리에 있어서 마땅히 그 군율을 시행해야 하나 대제(大祭)와 서로 겹쳐서 비록 그렇게 하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파직에 그쳐서는 안된다. 금위 대장 이장오는 영종진(永宗鎭)에 투비(投畀)하도록 하라."
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을 금위 대장(禁衛大將)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니 왕세손이 시좌(侍坐)하였는데, 임금이 문의(文義)를 물었다. 세손이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제(齊)나라 선왕(宣王)이 좌우를 돌아보며 다른 말을 하였다.[顧左右言他]’는 장(章)을 외니, 임금이 말하기를,
"제나라 선왕이 좌우를 돌아본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이는 자기의 죄(罪)를 인정하고 부끄럽기 때문에 대답을 못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돌아보며 다른 말을 한 것은 무슨 뜻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만약 돌아보지 않는다면 다시 물을까 두려워서 그런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 생(栍)070)  은 순통(純通)이라고 할 만하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임금이 어찌 부족하겠는가?’라는 뜻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니, 답하기를,
"백성이 풍족하면 나라는 저절로 풍족하게 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왕도(王道)를 행하는 것이 쉬운가?"
하니, 답하기를,
"선왕(宣王)처럼 좌우를 돌아보지 않고 오직 인정(仁政)을 행한다면 왕도(王道)를 행할 수가 있습니다."
하였다. 세손이 〈《맹자》 양혜왕(梁惠王)편의〉 호화장(好貨章)을 외우매, 임금이 말하기를,
"호색(好色)하지 않는 자는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현자(賢者)는 호색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강관(講官)이 말하기를,
"여색을 좋아하지 않고, 재물을 좋아하지 않은 임금은 누구입니까?"
하니, 대답하기를,
"우(禹)임금과 탕(湯)임금입니다."
하매, 말하기를,
"호색하고 호화(好貨)하는 임금은 누구입니까?"
하니, 답하기를,
"걸주(桀紂)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숭현전 월대(月臺)에 나아가 수계(受戒)하였다.

 

4월 4일 정묘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는 옥당관(玉堂官)을 벗으로 삼으니, 세손 역시 강관(講官)으로 벗을 삼는 것이 가장 좋다. 마땅히 〈《시경》 소아(小雅)편의〉 녹명장(鹿鳴章)처럼 정과 뜻이 유통된다면 어찌 의롭지 않겠는가?"
하였다.

 

사간 이수덕(李壽德)이 청하기를,
"절제(節製)의 시권(試券)에 모두 부명(父名)과 거주(居住)·성관(姓貫)을 쓰게 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지평 이정렬(李廷烈)이 아뢰어 청하기를,
"그 강방(剛方)한 사람을 나오게 하여 격려하여 권장하고, 그 아첨하는 사람을 물러가게 하여 징계하고 격려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가 애매하고 모호하다."
하매, 부교리 윤득맹(尹得孟)이 말하기를,
"이정렬의 아뢴 바가 분명치 못하니, 파직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은 파직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이정렬에게 묻기를,
"내가 만약 간사한 자를 안다면 어찌 등용하겠는가? 지금의 조정에서 누가 간사한 자인가? 모름지기 지적하여 진달하라."
하니, 이정렬이 말하기를,
"간사한 사람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간사한 습성을 말한 것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간사한 사람이 있은 연후에야 간사한 습성이 있는 것이니, 모름지기 지적하여 아뢰라. 알고도 아뢰지 않으면 대신(臺臣)이 바로 간사한 사람이다. 온 조정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강방(剛方)한가?"
하니, 이정렬이 말하기를,
"모두 강방한 사람입니다."
하매, 임금이 이정렬에게 서용하지 않는 법을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잠저(潛邸)에 있을 때에 이정렬의 아비가 와서 보았는데, 나에게 말하기를, ‘조태구(趙泰耉)의 차자는 해괴한 데에 관계된다.’라고 하였다가 말을 다 마치기도 전에 안색이 변하기에 내가 웃으면서 답하기를, ‘이 말은 나에게 할 말이 아니다.’라고 하니 안색이 위축(萎縮)되어 갔는데 역적 목호룡(睦虎龍)이 이로 인해서 망측(罔測)한 말을 한 것이다. 이제 이정렬의 거조를 보건대, 그 아비에 그 아들이 있다고 하겠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임금이 숭현당에 나아가 석강(夕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에게 말하기를,
"오늘의 하교는 바로 가슴에 버티고 있었기 때문에 마음 속에서 우러나와 하교한 것이다. 망측한 말은 바로 역적 목호룡의 말인데, 지금 어찌 입술에 올리겠는가? 이미 유시한 후에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인데, 그 아들로 인해서 그 아비를 죄주는 것은 왕정(王政)이 아니니, 내가 단지 이것만 유시하는 데서 그치겠다. 혹 불량(不良)한 무리들이 잘못 듣거나 잘못 알면 관계되는 바가 적지 않으므로 밤을 새울 수 없어 이제 경을 불러서 유시하는 바이다."
하였다.

 

4월 5일 무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교리 이재협(李在協)이 말하기를,
"장령 유수(柳脩)는 갑작스레 들어왔다고 핑계하면서 입을 다물고 한마디도 하지 않으니, 체차해야 마땅합니다."
하매,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가 말하기를,
"체차에 그쳐서는 안되니, 파직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6일 기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일소(一所)·이소(二所)071)  에서 합격한 유생(儒生)과 어제 정사(政事)에서 제수한 수령을 소견하였다.

 

4월 9일 임신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제기(祭器)를 살피고 희생(犧牲)을 살핀 다음 재실(齋室)로 돌아왔다.

 

왕세자가 휘령전(徽寧殿) 재실에 나아갔다.

 

4월 10일 계유

임금이 태묘에 친제한 후, 망묘루(望廟樓)를 들러 친히 기문(記文)을 베껴 썼다. 이어서 창덕궁에 나아가 진전(眞展)에 전배하고, 여러 신하에게 찬(饌)을 내렸다. 세손을 데리고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한 후 환궁하였다.

 

4월 11일 갑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이산(尼山)의 구포미(舊逋米) 4백 60석, 콩[太] 1백 석을 탕감하고 전후의 도신을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서명철(徐命喆)을 장흥(長興)으로 정배하고, 김적기(金迪基)를 거제로 정배하며, 홍형보(洪亨輔)는 형조로 하여금 3차 형문(刑問)한 뒤에 종성부(鍾城府)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이때에 전라도에 사는 홍형보가 양향청(粮餉廳)에 소속된 금당도(金塘島)의 소나무를 작벌(斫伐)할 것을 도모하여 인하여 선공감(繕工監)의 공문을 얻어내려 했는데, 김적기가 감역(監役) 서명철(徐命喆)과 사이에서 농간을 부려 임의로 공문을 만들어 준 때문이었다.

 

임금이 윤음(綸音)을 내려 신하들을 권면하고 신칙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4월 12일 을해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문과 전시(文科殿試)를 행하고,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무과 전시에 친림하여 문과에서 조진형(趙鎭衡) 등 37인을 뽑았다.

 

4월 13일 병자

김범로(金範魯)를 경상 좌병사(慶尙左兵使)로, 이방엽(李邦燁)을 경상 우병사(慶尙右兵使)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회환 사신(回還使臣)을 소견하였다.

 

4월 14일 정축

남태회(南泰會)를 대사간으로, 심인희(沈仁希)를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4월 15일 무인

김시묵(金時默)·이수득(李秀得)·김상구(金尙耉)를 승지로 삼았다.

 

4월 16일 기묘

장령 조태명(趙台命)이 상서하여, 함부로 거느리는 것을 금하여 과장(科場)을 엄히 하기를 청하였고, 또 말하기를,
"교동 수사(喬桐水使) 조제태(趙濟泰)는 성품이 광패(狂悖)하고 탐욕을 부려 서쪽 요새와 경기 고을에 추악한 비난이 낭자하고, 전후 탄핵하는 글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얼마 되지 않아서 또 이처럼 초승(招陞)하였으니 물정이 오랫동안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삭직의 율을 시행하고 해당 전관(銓官) 역시 중추(重推)하소서."
하니, 왕세자가 가납(嘉納)하고, 조제태의 일은 너무 지나치다고 답하였다.

 

임금이 의소묘(懿昭墓)에 거둥하였다. 환궁할 때에 농민으로 하여금 전지(田地)를 갈게 하고, 이어서 술을 내리고 그 가는 것을 살폈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수가(隨駕)하는 군병(軍兵)을 본영(本營)에 명하여 활쏘고 총쏘는 것을 시험하게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예조 판서·병조 판서·경기 감사를 소견하고, 이어서 소대(召對)를 행하였다.

 

제주(濟州)에 표해(漂海)한 사람을 소견하고, 돌아갈 양식과 의자(衣資)를 하사하였다.

 

임금이 숭례문(崇禮門) 밖에 늘어서 있는 홍문(紅門) 가운데 ‘효자 삼세(孝子三世)’라는 네 글자의 각판(刻板)이 거의 퇴락한 것을 보고는 해조로 하여금 특별히 수리하라고 명하였다.

 

4월 19일 임오

이한응(李漢膺)을 경기 수사(京畿水使)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문신 제술(文臣製述)을 행하여 수석을 차지한 전 정언 김상집(金尙集)에게 숙마(熟馬)를 내리고, 시관에게는 찬(饌)을 내렸다.

 

4월 20일 계미

정언 신익빈(申益彬)이 상서하여 정항령(鄭恒齡)·구선행(具善行)·남태기(南泰耆)가 공사(供辭)하여 발명(發明)한 데 대하여 변석(卞釋)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引接)하였다.

 

간원(諫院) 【사간 이수덕(李壽德)이다.】 에서 전달(前達)을 거듭 상달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상달하기를,
"청컨대 죄인 배윤현(裵胤玄)은 도배(島配)에 그쳐서는 안되니, 대조께 품하여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엄히 국문하여 실정을 알아내어 왕법을 바르게 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은 대조께서 살리기를 좋아하시는 덕에서 나온 것이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4월 21일 갑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우의정 윤동도(尹東度)를 소견하고 하교하기를,
"지금 대리(代理)하고 있고 또 고례(古例)가 있으니, 추모(追慕)함이 아니면 어찌 주강(晝講)을 하겠으며, 백성을 위하지 않는다면 어찌 삼대(三對)072)  를 하겠는가? 비록 그러하나 지금 바야흐로 스스로 힘써야 할 것은 학문이 아니고 무엇이겠으며, 나랏일이 위태로우니 또한 어찌 그냥 보고만 있겠는가? 《중용》과 《대학》을 번갈아 읽고 있으나 책은 책대로이고 나는 나대로여서 한 달에 몇 번 대하는 것도 부서 기회(簿書期會)073)  에 불과하니, 자강하는 데에 무슨 도움이 되겠으며, 나랏일엔들 무슨 도움이 되겠는가? 마음이 스스로 부끄러워 거의 먹기를 잊을 정도이다. 그 이유를 따져보니, 허물이 나 한 사람에게 있다. 마음에 개탄스러운 것은 한 방안에서 싸우기를 일삼고 부효 조경(浮囂躁競)하여 어제는 얼음처럼 하다가 오늘은 숯불처럼074)   한다. 거기다가 기강(紀綱)이 해이해져 관원을 가리지 않고, 탐관 오리(貪官汚吏)가 백성을 박탈하는 것을 일삼으니, 궁벽한 시골 가난한 집에서는 하늘의 해를 보지 못한다.
과로(科路)는 너무 넓고 임용하는 길은 너무 좁아 경향(京鄕)에 홍패(紅牌)를 끌어안고 집안에서 늙어가는 자가 많이 있는데도 전조(銓曹)에서는 단지 문벌(門閥)만을 취하고 군문(軍門)에서는 또 사사로이 안면(顔面)이 있는 자를 먼저 등용하여 먼 지방의 경적(經籍)을 궁구(窮究)한 선비들은 경화(京華) 자제들의 아래에 들고, 늙어서 기어다니는 무리들을 천백부(千百夫)의 장(長)에 충당시키고 있다. 아! 옛날 도잠(陶潛)075)  이 팽택 령(彭澤令)이 되었는데, 하인 하나를 그 아들에게 보내면서 편지에 쓰기를, ‘이 역시 사람의 아들이니 잘 대우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도연명은 한 고을의 수령(守令)이 되어서도 동포(同胞)라는 마음을 두었는데, 아! 우리 백성들은 바로 옛날에 애휼(愛恤)하던 적자(赤子)들이다. 적자를 받아서 돌보지 않으면 효(孝)라고 할 수 있겠는가? 대소 신료(臣僚)들은 모두 이 뜻을 본받아서 구습을 쾌히 씻어버리고, 그 효제(孝悌)를 잘하는 사람 및 재능을 품고서 침체되어 있는 사람을 철저히 찾아서 아뢰라."
하였다. 임금이 우의정 윤동도(尹東度)에게 말하기를,
"경이 바야흐로 시골로 내려가니 혹 이수창(李壽昌)처럼 효제(孝悌)하는 자가 향곡(鄕曲)에 숨어 있으면 채방(採訪)하여 아뢰라."
하니, 윤동도가 말하기를,
"성교(聖敎)가 이러하니, 감히 힘을 다하여 거행하지 않겠습니까? 이번에 내린 하교로 거의 팔도가 용동(聳動)할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사찬(賜饌)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윤동도가 소분(掃墳)하는 것으로 말미를 얻어 시골로 내려가게 되었기 때문이다.

 

승지에게 명하여 《심경(心經)》을 윤독(輪讀)하게 하였고, 영의정과 판의금(判義禁)의 입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심일진(沈一鎭)의 공사(供辭)를 보건대, 심일진의 마음이 어찌 이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한번 두루 읽기를 명했는데 나도 모르는 사이에 감동하였다. 이는 심일진 부자(父子)를 위해서가 아니라 이번의 처분은 소중한 바가 있으며, 또 한갓 청평 도위(靑平都尉)와 숙명 공주(淑明公主)의 제사를 받드는 것뿐만 아니라 하약(夏禴)076)   이후에 갑절이나 더 추모(追慕)해서 그런 것이다. 비록 전례(前例)가 없으나 임금의 지위에 있으면서 처분하지 않는다면 무슨 얼굴로 영릉(寧陵)을 뵙겠으며, 지금에 이르러서 하지 않는다면 다시 어느 때를 기다리겠는가? 또 일찍이 이런 예가 많이 있었으니, 지난해에 고 판서 이만성(李晩成)의 처(妻)가 곧 등문(登聞)함을 당해 처분이 있은 후에는 다시 감히 그 사이에 의논함이 용납되지 않았었다. 심일진에 대한 지난번 처분이 엄중하고 곡진(曲盡)하였으며, 심일진 역시 본생부(本生父)를 따라, 청평 위(靑平尉)와 공주(公主)를 봉사(奉祀)하면 인륜(人倫)이 원만하게 된다. 내가 이미 심일진을 위한 것이 아니니, 심일진의 도리에 있어서는 다만 영릉(寧陵)을 바라보고 생부(生父)의 뒤를 따라 귀주(貴主)의 제사를 받들어야 할 것이다. 왜 생부를 따라야 하느냐 하면, 지금 계후(繼後)한 자는 심중은(沈重殷)이며 심중은이 이미 그 제사를 받들었으니 그 아들 된 자가 어찌 그 뒤를 이음을 사양할 수 있겠는가? 국가의 체모에 있어서도 다른 규례가 없으니, 이 공사(供辭)를 시행하지 말고 심일진을 석방하여 예사(禮斜)077)  를 즉시 거행하라."
하였다. 이때에 심일진이 격쟁(擊錚)078)  한 일이 있어서 금부(禁府)로 하여금 공사를 바치게 하였는데, 심일진의 양부(養父)는 바로 역적 심익창(沈益昌)의 아들이기 때문에 영의정 홍봉한, 호조 판서 김상복(金相福)이 심일진의 아들 심상운(沈翔雲) 형제의 처지를 위해서 임금께 아뢰어 심일진의 죽은 아버지로 하여금 청평 위의 제사를 받들게 했었다. 심일진이 그의 양모(養母)가 아직 생존해 있어서 차마 파양(罷養)할 수 없다는 것으로 이번에 격쟁하였으니, 남의 집 윤상(倫常)의 근본을 어지럽힌 잘못은 홍봉한의 무리에게 있다 하겠다.

 

이장오(李章吾)를 특별히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을 소견하니, 홍봉한이 청하기를,
"유청 군관(有廳軍官)은 번포(番布)를 거두고 방번(防番)은 전대로 그만두게 하였는데, 경중(京中)의 대정(代定)한 자는 이름을 반드시 유청 군관패(有廳軍管牌)라 칭하고 지모(紙帽)·혁대(革帶)·흑목단령(黑木團領)을 착용하는데, 복색의 참람(僭濫)함을 엄금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4월 23일 병술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이 졸(卒)하였다. 이보혁의 자(字)는 성원(聲遠)이니 용인(龍仁) 사람이다. 젊어서 음사(蔭仕)로 진출하여 무신년079)  에 성주 목사(星州牧使)로서 조성좌(曹聖佐)가 합천군(陜川郡)을 함락시킬 때를 당해 감사 황선(黃璿)이 우방장(右防將)으로 차출하여 고령(高靈)·지례(知禮)·거창(居昌) 세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토벌하게 하였는데, 해인사(海印寺)에 적을 따르는 두 중이 있어, 철묵(哲墨)은 적승(賊僧)의 대장(大將)이 되어 승군(僧軍)을 수습해 장차 그 후원이 되려 했으며, 해림(海琳)은 적 조성좌와 친밀해서 군장(軍裝)을 모아 거창의 적에게 바친 자라는 정보(情報)를 들었다. 이런 것을 상세히 염탐하고 10여 리를 행군하였는데, 두 중이 와서 보기를 청하였다. 그래서 진중(陣中)에 두었더니, 두 중이 공을 세워 속죄하기를 애걸하였다. 이보혁이 해림을 적진으로 보내어 전령(傳令)을 주어 적(賊)에 빠진 장교(將校)들에게 두루 보여 그들의 마음을 두렵게 하였다. 마침내 금양역(金陽驛)으로 진군하여 적과 강을 사이에 두고 대진(對陣)하였는데, 밤에 여러 장교들이 적괴(賊魁) 조성좌 등을 사로잡으니, 합천이 평정되었다. 책훈(策勳)하기에 이르러 인평군에 봉해졌는데, 그때 이준휘(李儁徽)란 자가 그 아비를 위해 공(功)을 호소했으나 조정에서 그대로 두고 묻지 않았다. 광주 부윤(廣州府尹)·양도(兩道) 관찰사(觀察使)를 거쳤고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발탁되어 관위가 1품(品) 판서(判書)에 이르러 병으로 졸하니, 이때 나이 79세였으며 시호는 충정(忠貞)이다. 전교하기를,
"이보혁은 대려(帶礪)080)  의 훈신(勳臣)으로 충근(忠謹)한 마음을 내가 평소에 알고 있었다. 복록(福祿)을 후세에 전해야 하니, 두 아들과 두 손자를 임용하라. 또 시반(侍班)에 있었고 팔순(八旬)이 명년인데 비록 보단(報單)은 없었지만 문득 그 아들이 부(符)를 바친 것을 들었다. 아! 중신은 관대하고 온화했으며 이제 임종(臨終)하였는데 정말이 아닌 것으로 의심되니 아픈 마음을 어찌 다 유시하겠는가? 제문(祭文)을 마땅히 지어 내려 4일째 날에 예관(禮官)을 보내 특별히 치제(致祭)하고, 관재(棺材)는 해조로 하여금 가려 보내게 하며, 무릇 제반 범절은 한결같이 영성군(靈城君)081)  의 예에 의해 거행하라."
하였다.

 

4월 24일 정해

김원택(金元澤)을 공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김원택은 바로 김상복(金相福)의 아버지로서 음관(蔭官)으로 진용된 것이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강서원(講書院) 관원을 소견하였다. 하교하기를,
"정중하지 않으면 존귀하지 않게 되니, 반드시 명분을 바로해야 한다. 이번 회강(會講)을 시작으로 해서 예절을 한결같이 빈객(賓客)의 예(例)에 의해서 하되, 단지 세손 유선(世孫諭善)이라고만 일컫고, 상견례(相見禮)는 새로 제수된 자가 거행하며 대회강(大會講) 때의 의문(儀文)을 갖추지 않을 수가 없으니, 산선(繖扇)을 뜰 위에 열지어 세우고, 무겸 차비(武兼差備)는 대령(待令)하지 말아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문(景賢門)에 나아가 경조 당상(京兆堂上)으로 하여금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다가 다른 사람이 길러 다른 성씨(姓氏)를 모칭(冒稱)한 자는 본래의 성으로 회복하게 하고, 혹 어려서 부모를 잃어 그 성을 모르는 자는 그 부모를 찾아주도록 하였다.

 

4월 25일 무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왕세손의 회강(會講)을 하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69세에 이처럼 3백 년 후에 〈처음〉 이런 일을 보게 되니, 참으로 뜻밖이다. 이번의 연교(筵敎)는 한림(翰林)과 주서(注書) 역시 강관(講官)과 함께 상확(商確)하여 1통을 만들어 1건(件)은 대내(大內)에 들이고 1건은 강서원에 걸어두어야 한다."
하였다. 임금이 세손에게 말하기를,
"태왕(太王)이 거빈(去邠)한 것082)  이 우리 시조(始祖)의 일과 서로 부합되어, 기산(岐山)에서 봉황(鳳凰)이 운 것과 〈태조(太祖)의 꿈에〉 신인(神人)이 금척(金尺)을 준 것은 모두 저절로 상서(祥瑞)가 이르렀으니, 하늘에 순종하는 임금은 바로 이런 상서가 있게 된다. 대저 나라를 세우기 어려움은 하늘을 오르는 것과 같고, 망하기 쉬움은 털을 태우는 것과 같다. 시험삼아 3백 년의 종사(宗社)를 생각건대, 네가 만약 부지런히 힘쓰기를 그만두지 않는다면 어찌 다만 4백 년뿐이겠는가? 주(周)나라 8백 년의 복조(福祚)에 거의 가깝게 될 것이다. 《맹자(孟子)》의 ‘인욕(人慾)을 막아야 한다.’는 말과 《예기(禮記)》의 ‘공경하지 않음이 없어야 한다.[無不敬]’는 말은 그 근본이 모두 ‘인의(仁義)’ 두 글자에 있는 것이다. 조선(祖先)의 마음은 자손이 현명하기를 바라기 때문에 너에게 바라는 것이 깊다. 조선(朝鮮)은 제(齊)·초(楚)와 달라서 삼한(三韓)을 통합하여 하나가 되어 혹시라도 강역(疆域)에 일이 있게 되면 본토(本土)를 지키는 이외에는 다른 방도가 없다. 내가 반드시 수성(守城)하고자 한 것은 우리 적자(赤子)를 버리고 다시 어디로 가겠는가? 일찍이 《남한일기(南漢日記)》를 보건대 성(城)에서 항복할 때 백성들이 울부짖으며 말하기를, ‘우리 임금이 어찌하여 우리를 버리는가?’라고 하였는데, 내가 매양 이 구절을 읽고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눈물을 흘렸다. 지금 비록 금성 탕지(金城湯池)가 있다 하더라도 가서는 안되는데, 만약 뜻밖의 일이 있으면 지켜야 하겠는가? 그렇지 않아야 하겠는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데에는 무슨 뜻이 있는가?"
하니, 답하기를,
"버려서는 안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나라를 세운 것은 임금을 위해서인가, 백성을 위해서인가?"
하니, 세손이 말하기를,
"임금도 위하고 또 조선(朝鮮)을 위해서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 대답이 좋으나 오히려 통창(通暢)하지 못함이 있다. 그 본뜻은 백성을 위해서 세운 것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너의 학문은 바로 박성원(朴聖源)의 힘이다. 스승을 존경하고 벗과 친하는 것은 《소학(小學)》의 도리이며, ‘어진 이를 어질게 여기되 색(色)을 좋아하는 마음과 바꾸어 하라.[賢賢易色]’는 것은 공문(孔門)의 가르침이다. 네가 후일 박성원을 경애(敬愛)하겠는가?"
하고, 또 하교하기를,
"하늘이 임금을 세우는 것은 자봉(自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양민(養民)하기 위해서이다. 민심을 한번 잃으면 비록 임금이 되고자 하더라도 되지 못하니, 너는 백성 두려워하기를 사부(師傅)보다 더 해야 한다."
하였다. 세손이 안으로 돌아가니, 박성원이 말하기를,
"신은 세손이 점차 성취됨을 알고 있으나 언제나 사람의 마음은 칭찬하는 말을 들으면 자만심(自滿心)이 생기기가 쉽고, 자만하게 되면 게을러지니 그것이 매우 두렵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좋은 점은 반드시 지나치게 추장(推奬)할 필요가 없고 부족한 점만 매양 계칙(戒飭)을 가해야 하니, 이것이 성취하는 방도입니다."
하니, 임금이 찬(饌)을 들라고 명하였다.

 

4월 26일 기축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세손(世孫)을 수가(隨駕)하는 군병(軍兵)의 시방(試放)을 행하였다.

 

4월 30일 계사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대조(大朝)께서 엄칙(嚴飭)을 내렸는데도 돈녕부(敦寧府)에서 까닭 없이 백성을 가두었으니, 해당 당상을 파직함이 마땅합니다."
하니, 아뢴 대로 하라고 하령하였다

 

하교하기를,
"추모하는 가운데 꿈 속에서 자성(慈聖)을 뵈었으므로 이번에 이로써 기록해 장락전(長樂殿)에 부쳤다. 옛날 한(漢)나라 명제(明帝)는 이튿날 능(陵)에 올라갔는데, 이튿날 비록 장락전을 봉심(奉審)하더라도 남은 회포는 그래도 경경(耿耿)할 것이다. 내일이 바로 초하루이니, 마땅히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 이어서 경복전(景福殿)을 바라보면서 조금이나마 정성을 펴고자 한다. 원량(元良)은 집영문(集英門)에서 지영(祗迎)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휘령전(徽寧殿)에 작헌례(酌獻禮)를 행하고자 하였는데, 오늘 첫새벽에 삭제(朔祭)를 지냈으니, 하루에 두 번 제사하는 것은 예(禮)에 맞지 않으므로, 단지 배례(拜禮)만 행하겠다. 원량(元良)과 백관(百官)을 예에 의해서 진참(進參)하라."
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을 불러 《심경(心經)》을 읽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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