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갑오
임금이 창덕궁(昌德宮)에 거둥하여 진전(眞殿)에 전배하고, 세자를 거느리고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였다.
집의 이의로(李宜老), 헌납 심각(沈殼)이 청대(請對)하여 아뢰기를,
"어가 뒤의 금군(禁軍) 최석겸(崔錫謙)의 종이 위내(衛內)로 돌입해 함부로 호소하였으니, 금군 별장(禁軍別將)에게 마땅히 견파(譴罷)하는 법을 시행해야 하고 최석겸은 해당 영(營)으로 하여금 곤장을 쳐 도태시켜야 하며, 그 호소한 사람도 미쳤다고 핑계하여 완전히 석방해서는 안되니, 형조(刑曹)로 하여금 조율(照律)하여 엄히 처벌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어가가 돌아올 때에 광통교(廣通橋)를 들러 준천(濬川)하는 것을 관람하였다.
5월 2일 을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大學)》을 강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기를,
"문왕(文王)이 아들 노릇을 한 것은 효(孝)에서 그쳤는데 나도 효를 하고자 한다. 어제 진전(眞殿)에 전배하고 높은 곳에 올라 명릉(明陵)083) 을 바라보고 왔다. 옛 말에 이르기를, ‘마음이 바르면 꿈도 바르고, 마음이 복잡하면 꿈도 복잡하다.’고 하였다. 내가 꿈에 뵌 것은 꿈의 소치가 아니라 바로 한(漢)나라 명제(明帝)가 꿈에 선제(先帝)와 태후(太后)를 뵌 것과 꼭 같다."
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말하기를,
"세손의 관대(冠帶)와 의양(衣樣)이 꼭 나와 같으니 참으로 귀엽다. 내가 백성들과 즐거움을 함께 해야 한다는 말로 가르쳤는데, 비록 장래에 학문의 성취함이 어떠할지는 모르겠으나 반드시 후덕(厚德)한 군자(君子)가 될 듯하니, 어찌 기특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왕손(王孫)이 이미 장성하였으니, 마땅히 봉작(封爵)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마땅히 전지(傳旨)를 내리겠다."
하였다. 임금이 왕손 교부(王孫敎傅) 김이안(金履安)에게 말하기를,
"네 아비는 교목 세신(喬木世臣)084) 인데, 어찌 와서 나를 보지 않는가? 네가 모름지기 내 뜻을 가서 전하여 반드시 와서 보게 하라."
하였는데, 김이안은 바로 김원행(金元行)의 아들이었다.
5월 3일 병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병조 판서 김양택(金陽澤)이 노원(蘆原)·청파(靑坡)의 마위전(馬位田)에 제방을 쌓아 논을 만들 것을 앙진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병조 판서가 진달한 바가 훌륭하니, 바로 그 아비의 아들이라 할 만하다. 문한(文翰)에 능숙한 사람은 사무에 소활(疎闊)하기가 쉬운데, 이처럼 직무를 수행하니, 내가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번 단오첩(端午帖) 가운데서 이덕해(李德海)·임성(任珹)은 궁관(宮官)으로서 규간(規諫)을 하지 않고 오로지 찬미(讚美)만 했기 때문에 물리치고 뽑지 않았으며, 권정침(權正忱)이 지은 것은 비록 좋으나 역시 지나치게 찬미한 말이 있기 때문에 내가 몸소 비점(批點)하였다. 질실(質實)을 숭상하는 고장에서 어찌 찬미하는 말을 사용하겠는가마는 권정침을 옥성(玉成)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5월 4일 정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잡과(雜科)에 입격한 사람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율과인(律科人)에게 말하기를,
"《서경(書經)》에 ‘오직 형(刑)을 삼가서 써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느냐? 너의 무리들이 법률을 조종하여 부귀한 집 아들은 죄가 비록 중하더라도 율을 쓰는 것을 도리어 가볍게 하고, 빈궁한 백성은 죄가 비록 가볍더라도 율을 쓰는 것이 도리어 무거우니, 어찌 능히 음덕(陰德)을 누리겠는가? 너희들은 신중히 하라."
하였다.
5월 5일 무술
왕세자가 덕성합(德成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대하였다.
5월 6일 기해
박사눌(朴師訥)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고 상신(相臣) 이정귀(李廷龜)의 차자(箚子)를 보건대, 이성량(李成樑)085) 이 항상 우리 나라를 병탄(並呑)할 뜻을 두었으니, 종향(從享)하는 일은 매우 미안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뜻은 오로지 황조(皇朝)를 존중하는 데 있고, 황단(皇壇)이란 우리 황제를 위해서이며, 종향하는 것도 역시 우리 황제를 위해서이니, 어찌 우리 나라의 은원(恩怨)으로써 그 공신을 배척하겠는가?"
하였다.
전라도 어사(御史) 엄인(嚴璘)이 복명하였는데, 무장 현감(茂長縣監) 김교재(金敎材)는 먼저 파직한 후 잡아오라고 명하였으니, 법을 어기고 교자(轎子)를 탔기 때문이었다.
비국 당상 조엄(趙曮)이 영남의 곡식 5천 석과 호남의 곡식 3천 석을 분배해 조치해서 경기(京畿)에서 편리함에 따라서 도내 각 고을에 옮겨두고 조적(糶糴)086) 에 보태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익원(李翼元)을 승지로 삼았다.
5월 7일 경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대학(大學)》을 강하고, 또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이여송전(李如松傳)》을 읽게 하고는 이여송을 신종(神宗)의 위(位)에 종향(從享)하라고 명하였다.
5월 8일 신축
달이 태미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이섭원(李燮元)을 대사간으로, 김양행(金亮行)을 장령으로, 민백흥(閔百興)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남 어사(嶺南御史) 김종정(金鍾正)이 임의로 진주(晉州)와 고성(固城) 두 고을의 곡식을 내어 기민(飢民)을 진구한 것으로써 영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김종정의 일이 비록 옳지만, 급암(汲黯)이 예전에 마음대로 곡식을 내어 〈구제한〉 죄를 청하였으니087) , 김종정에게도 마땅히 파직하는 율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한참 동안 차탄(嗟歎)하다가 말하기를,
"어사의 일은 참으로 옳았지만 후일의 폐단을 막는 방도에 있어서 우선 파직하라."
하였는데, 얼마 후 다시 서용하였다.
충청 감사(忠淸監司) 윤동섬(尹東暹)을 전결(田結)을 잘못 보고한 것으로써 파직하였는데, 대간의 말로 인해서였다.
고성 현령(固城縣令) 정운제(鄭雲濟)가 재결(災結)을 농간해 훔친 것을 살펴 깨닫지 못한 것으로써 먼저 파직한 후 잡아왔는데, 어사의 서계(書啓)로 인해서였다.
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았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여 소대(召對)를 행하니,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5월 9일 임인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지난번 춘방(春坊)의 단오첩(端午帖)을 보건대, ‘수서(手書)를 직려(直廬)에 내렸다.’라는 구절이 있었는데, 원량(元良)에게 어떤 수서가 있었는가?"
하니, 옥당 이미(李瀰)가 대답하기를,
"어제 춘방의 요속(僚屬)을 보았는데, 소조(小朝)에서 수서로써 궁관(宮官)에게 문대(問對)한 바가 있었다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원량의 수서 및 궁관이 대답한 바를 가져와 아뢰라고 명하였다. 세자가 임금이 탈을 잡아 책망할까 두려워하여 궁관으로 하여금 고쳐 쓰느라 지체되었다. 임금이 오래도록 오지 않은 것에 노하여 춘방의 여러 강관(講官)을 파직하였는데, 얼마 후 수서와 문답이 이르렀다. 임금이 승지 박사눌(朴師訥)에게 《주서(朱書)》 복선 화음(福善禍淫)의 문대(問對) 조(條)를 읽게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질문이 좋다."
하고, 또 《주역(周易)》 쾌괘(夬卦)의 문답 조를 읽게 하였는데, 박사눌(朴師訥) 등이 아뢰기를,
"세자의 물음이 아주 훌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까 지체한 것을 내가 알고 있다. 원량이 평소 겁이 많아서 내가 탈을 잡을 것을 두려워하여 정서(正書)해서 가져 온 것이다."
하였다. 이미가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매양 꺾어 누르심이 너무 지나치시고 돈면(敦勉)하심이 부족하시니, 청컨대 온화하게 유시를 내려 예학(睿學)을 흥발(興發)시켜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이에 춘방을 파직하라는 명을 중지하였다.
5월 10일 계묘
임금이 숭정전에 나아가 망배례(望拜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은 바로 고황제(高皇帝)088) 의 기일(忌日)이다. 고황제는 큰 덕이 있어 72세의 수를 누리셨고, 우리 태조(太祖)의 수 역시 74세이다. 정축년089) 남한 산성에서 항복할 때 숭정 황제(崇禎皇帝)090) 가 우리 나라 사신을 불러 이르기를, ‘듣건대 너희 나라가 항복했다고 하는데, 형세가 본디 그렇다.’ 하고는 이어서 황력(皇曆)을 반사(頒赦)하여 위로하셨으니, 내가 어찌 하루라도 황조의 은혜를 잊겠는가?"
하고, 이어서 한림(翰林) 윤숙(尹塾)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네 오대조(五代祖)가 병자란(丙子亂) 때 순절하였기 때문에 내가 추영(追榮)하는 교지(敎旨)에 청나라의 연호를 쓰지 말고 단지 연월만 쓰라고 명하여 그 절의(節義)를 표하였고, 오늘 하문한 것 역시 뜻이 있는 것이다."
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어제 대조께서 서연(書筵)의 문답을 가져다 보시고, 성상의 마음이 기뻐하셨습니다. 다시 더 학문과 정사에 부지런하여 대조의 권권(眷眷)해 하시는 뜻에 부응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면려한 바가 절실하니, 어찌 유념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5월 11일 갑진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고려(高麗) 태조(太祖)의 능에 치제하면서 제문(祭文)을 친히 지었다.
임금이 유신(儒臣)에게 《명사(明史)》를 읽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헌릉(獻陵)091) 께서 황조(皇朝)에 사신으로 갔을 때 문황제(文皇帝)092) 가 연저(燕邸)에 있어 서로 사이좋게 지냈는데, 대개 기품(氣稟)의 영매함이 서로 비슷하였다."
하니, 이미(李瀰)가 대답하기를,
"그때에 수작한 시편(詩篇)이 아직껏 책에 실려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그 책을 들이라고 명하였다.
5월 13일 병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각도의 제언(堤堰)을 단속하게 하였는데, 이때 가뭄이 매우 심했기 때문이었다. 난전법(亂廛法)093) 을 늦추라고 명하였는데, 영의정 홍봉한 및 경조 당상(堂上) 남태제(南泰齊)의 청으로 인해서였다.
왕세자가 덕성합에 좌정하니, 승지가 공사를 가지고 입대하였다.
5월 14일 정미
강원도 회양(淮陽)과 금성(金城)에 우박이 내렸다.
승지를 보내어 의릉(懿陵)을 봉심하였는데, 무릇 꿈에 경묘(景廟)를 뵈었기 때문이다.
김효대(金孝大)를 승지로 삼았다.
5월 15일 무신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상참(常參)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기력이 쇠하였다는 것으로써 해면(解免)하기를 바랐으나, 왕세자가 허락하지 않았다.
5월 16일 기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여 《심경(心經)》을 읽었다. 임금이 승지 김효대에게 이르기를,
"듣건대 너희 집을 팔려고 한다는데 그런가? 만약 그 집을 팔도록 한다면 내가 자성(慈聖)을 저버림이 크다. 집이 비록 크더라도 반드시 장공예(張公藝)094) 가 구세(九世)토록 함께 산 것을 생각하여 영원히 이 집을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임금이 한성 판관(漢城判官) 이신규(李信圭)에게 묻기를,
"경중의 호구(戶口)를 늘릴 방도가 있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부자(父子)의 호구를 나누면 증가시킬 수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수령이 되어서도 역시 그렇게 하겠는가? 내가 너그러운 법을 써서 너를 죄주지 않지만 너는 나가서 장자(長者)에게 물어봄이 옳다."
하였다.
5월 17일 경술
평안도 영변(寧邊)에 눈이 내리고, 삭녕(朔寧) 등 17개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홍명한(洪名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태학(太學)의 재임(齋任)과 사학(四學)의 재임을 소견하였다. 승지에게 태학의 아침 식당(食堂)의 도기(到記)를 가져오라고 명하였다.
5월 18일 신해
홍인한(洪麟漢)을 이조 참판으로, 한익모(韓翼謨)를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유생(儒生)의 제술(製述)을 행하였는데, 승지 이영휘(李永暉)가 고개를 떨어뜨리고 엎드려 졸고 있으므로 시관 정이환(鄭履煥)이 그 직책을 박정(駁正)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시험을 마친 뒤에 임금이 말하기를,
"정이환은 시관(試官)으로서 유신의 일까지 겸행(兼行)하여 월권(越權)을 했다고 할 수 있으니, 특별히 체직하라."
하고, 수석을 차지한 진사(進士) 이계(李溎)에게 급제를 내렸다.
이기경(李基敬)을 승지로 삼았다.
5월 19일 임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진위(振威) 양전 어사(量田御史) 홍낙순(洪樂純)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민전(民田)의 복수(卜數)095) 가 높은 것을 낮추어 주면 백성들이 원망을 하지 않으나 낮은 것을 높이면 백성들이 반드시 원망하게 된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위의 것을 덜어서 아래에 더하는 것을 익(益)이라 하고 아래 것을 덜어서 위에다 보태는 것을 손(損)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지금 진위의 전부(田賦)를 6등에서 5등으로 하였으니, 백성들이 원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홍낙순이 대답하기를,
"모두 부로(父老)들의 공언(公言)을 따라서 등(等)을 정했기 때문에 원망하는 말이 없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어사는 비록 나라를 위해서 복의 수를 더했으나 내 뜻은 그렇게 하고자 하지 않는다."
하였다.
5월 20일 계축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시신(侍臣)에게 이르기를,
"명(明)나라 고황제(高皇帝)가 철비(鐵碑)를 세워 환시(宦侍)의 용사(用事)를 경계하였는데, 영락(永樂) 이후에 태감(太監)이 용사하여 우리 나라에 사명(使命)을 띠고 많이 왔었다. 우리 나라의 환시는 본디 동학(東學)·서학(西學)에서 글에 능한 향유(鄕儒)가 가르치는데, 그 책은 《대학(大學)》과 《사략(史略)》에 불과하다. 대저 외방 사람이 중관(中官)과 통하는 것이 가장 큰 금법(禁法)인데, 또 들은즉 교관(敎官)의 생일(生日)에 중관이 음식을 만들어 가지고 가서 먹인다고 하니, 내가 매우 기쁘지 않다. 또 내원(內苑)에서 말[馬]을 조련할 때에 무인(武人)들이 쉽게 중관과 서로 친압(親狎)하니, 이 역시 금해야 한다. 허적(許積)이 최상악(崔尙岳)과 교통하였고, 심익창(沈益昌)과 이진유(李眞儒)가 문유도(文有道)·박상검(朴尙儉)과 교통하였으니, 어찌 염려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후에는 외인과 교통하지 못하게 하고 또 여염(閭閻)에서 글을 배우지 못하는 일은 엄명하여 신칙하라."
하였다.
양천 현감(陽川縣監) 권극(權極)을 입시하라 명하고 농사 형편을 물으니, 권극이 대답하기를,
"신이 봄부터 몸소 전준(田畯)096) 이 되어 농사를 권장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네 얼굴이 아주 희니 나는 네가 전준이 되었다고 믿지 않는다."
하매, 권극이 부끄러운 기색이 있었다.
왕세자가 시민당에 좌정하여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접하였다. 비국 당상 이정보(李鼎輔)가 말하기를,
"《주역》에 이르기를, ‘망할까 망할까 하여 무더기로 난 뽕나무에 매듯 한다.’고 하였으니, 저하께서는 유념하시어 이로써 경계하소서."
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명심하여 경계하겠다."
하였다.
황경원(黃景源)·서지수(徐志修)를 방면하고 직첩(職牒)을 주어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5월 21일 갑인
김상철(金尙喆)을 경상 감사(慶尙監司)로, 황인검(黃仁儉)을 우유선(右諭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영의정과 예조 판서를 소견하고 남한(南漢)의 쌀 3백 석을 기영(畿營)에 조치해 주라고 명하였으니, 대개 기백(畿伯) 홍계희(洪啓禧)가 굶주린 백성에게 나누어 주기를 청한 때문이었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영부사(領府事) 김상로(金尙魯)가 여러 해 동안 향리에 있는데, 청컨대 돈소(敦召)하여 국사를 의논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영부사의 일은 내가 매우 유감으로 생각하는데, 지나간 일은 아주 잘못이어서 내가 엄히 막고자 하였으나 김 봉조하(金奉朝賀)를 생각하여 곡진히 옹호한 것이다."
하매, 홍봉한이 대답하기를,
"신 역시 알고 있습니다. 영부사가 이 말을 들으면 반드시 감읍(感泣)할 것입니다."
하였다.
5월 22일 을묘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엄인(嚴璘)을 보내어 강가를 암행(暗行)하면서 가뭄을 이르게 한 것을 살피게 하였는데, 이때 가뭄이 아주 심해서였다.
5월 22일 을묘
나경언(羅景彦)이 복주(伏誅)되었다. 나경언 이란 자는 액정 별감(掖庭別監) 나상언(羅尙彦)의 형이니, 사람됨이 불량하고 남을 잘 꾀어냈다. 가산(家産)이 탕패되어 자립(自立)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춘궁(春宮)097) 을 제거할 계책을 내어 형조에 글을 올려, 환시(宦侍)가 장차 불궤(不軌)한 모의를 한다고 고하였다. 참의 이해중(李海重)이 영의정 홍봉한에게 달려가 고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청대(請對)하여 계품하지 않을 수 없다."
하매, 이해중이 이에 세 차례나 청대하였다. 임금의 마음이 놀라 이해중의 입시를 명하니, 이해중이 드디어 그 글을 아뢰었다. 임금이 상(床)을 치면서 크게 놀라 말하기를,
"변란이 주액(肘腋)에서 있게 되었으니, 마땅히 친국(親鞫)하겠다."
하였다. 경기 감사 홍계희(洪啓禧)가 마침 입시하고 있다가 임금에게 호위(護衛)하게 하기를 권하니, 임금이 이에 성문 및 아래 대궐의 여러 문을 닫으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즉시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국청(鞫廳)을 설치하니, 시임 대신 홍봉한·윤동도와 원임 대신 신만(申晩) 등이 입시하였다. 남태제(南泰齊)를 지의금(知義禁)으로 삼아 판의금(判義禁) 한익모(韓翼謨)·동의금(同義禁) 윤득양(尹得養), 문랑(問郞) 홍낙순(洪樂純) 등 8인과 함께 죄인을 국문하였다. 나경언이 옷솔기에서 흉서(凶書)를 내놓으면서 말하기를,
"이 글을 구중(九重)의 천폐(天陛)에 올리고자 했으나 올릴 길이 없기 때문에 우선 형조에 원서(原書)를 올려 계제(階梯)를 삼았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다 읽지 못하고서 손으로 문미(門楣)를 치면서 말하기를,
"이런 변이 있을 줄 염려하였었다."
하고, 그 글을 영의정에게 주어 보도록 했다. 홍봉한이 울면서 보고는 말하기를,
"신이 청컨대 먼저 죽고자 합니다."
하였고, 윤동도가 나아가 말하기를,
"신 역시 보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경 또한 보라."
하였다. 윤동도가 보기를 마치자,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오늘날 조정에서 사모(紗帽)를 쓰고, 띠를 맨 자는 모두 죄인 중에 죄인이다. 나경언이 이런 글을 올려서 나로 하여금 원량(元良)의 과실을 알게 하였는데, 여러 신하 가운데는 이런 일을 나에게 고한 자가 한 사람도 없었으니, 나경언에 비해 부끄럼이 없겠는가?"
하였다. 대개 나경언이 동궁(東宮)의 허물 10여 조(條)를 낱낱이 들었는데 말이 매우 패란(悖亂)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 글을 두어서 어디에 쓰겠습니까? 청컨대 불태우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판의금 한익모가 나아가 말하기를,
"친국할 때에 금오랑(金吾郞)이 철저히 조사하지 않아서 이런 흉서를 장전(帳殿)으로 들어오게 했으니, 도태하고 잡아다 처리하기를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지 않았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국청의 체면은 마땅히 판금오의 말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추고만 하고 도태하지는 말며, 한익모 역시 중추(重推)하라."
하였다. 임금이 춘방(春坊)에 하교하여 준절히 책망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께서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는데, 이런 말을 들으면 반드시 편안히 있지 못할 것입니다. 청컨대 이유수(李惟秀)와 함께 가서 성교를 전하고, 또 진정하게 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허락하였다. 홍봉한이 급히 창덕궁(昌德宮)으로 나아가 세자에게 보고하매, 세자가 크게 놀라 보련(步輦)을 타고 대궐로 나오니 이때가 바야흐로 2경(更)이었는데, 홍화문(弘化門)에 나아가 엎드려 대죄(待罪)하였다. 임금이 이에 문랑(問郞)으로 하여금 죄인에게 묻기를,
"네가 나라를 위해 이처럼 진달하였으니, 그 정성은 가상하다. 그러나 처음 올린 글에 부언(浮言)을 만들어 사람을 악역(惡逆)의 죄과로 모함하였고, 또 ‘변란이 호흡 사이에 있다.’는 등의 말로 임금을 공동(恐動)시켜 궐문을 호위까지 하게 하고 도성이 들끓게 하였으니, 이후 불궤한 무리들이 다시 네 버릇을 본받게 될 것이다."
하고, 이에 엄형하기를 명하였다. 신장(訊杖)을 네 차례를 치고 우선 중지해 문사 낭청으로 하여금 죄인에게 묻게 하기를,
"네 글 가운데 서(徐)·김(金)·이(李) 세 사람은 누구인가?"
하니, 죄인이 공초하기를,
"서는 서명응(徐命膺)이요, 김은 바로 호리(戶吏)의 아들 김유성(金有星)인데, 전년에 정배(定配)되어 물에 빠져 죽었으며, 이(李)는 모릅니다."
하니, 오위 장(五衛將) 조덕상(趙德常)이 말하기를,
"김유성은 본래 물에 빠져 죽은 것이 아닙니다. 작년 진주(晉州)에서 돌아올 때에 보았습니다."
하매,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국청은 체모가 지극히 엄한데, 한낱 위장(衛將)이 어찌 감히 잡스런 말을 하는가? 이는 스스로 공을 세우려는 뜻이다."
하고, 빨리 남해(南海)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죄인의 글 가운데 이르기를 김시찬(金時粲)·이보관(李普觀)이 상서하여 극진히 간쟁하였다고 하였으니, 그 서본(書本)을 가져오라."
하였다. 임금이 다 읽고 나서 말하기를,
"역시 대단치 않다."
하였다. 임금이 동궁의 입시를 명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동궁을 죄인과 같은 뜰에 있게 해서는 안되니, 마땅히 죄인을 내보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한참 후에 세자가 입(笠)과 포(袍) 차림으로 들어와 뜰에 엎드렸는데 임금이 문을 닫고 한참 동안 보지 않으므로, 승지가 문 밖에서 아뢰었다. 임금이 창문을 밀치고 크게 책망하기를,
"네가 왕손(王孫)의 어미를 때려 죽이고, 여승(女僧)을 궁으로 들였으며, 서로(西路)에 행역(行役)하고, 북성(北城)으로 나가 유람했는데, 이것이 어찌 세자로서 행할 일이냐? 사모를 쓴 자들은 모두 나를 속였으니 나경언이 없었더라면 내가 어찌 알았겠는가? 왕손의 어미를 네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여 우물에 빠진 듯한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찌하여 마침내는 죽였느냐? 그 사람이 아주 강직하였으니, 반드시 네 행실과 일을 간(諫)하다가 이로 말미암아서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또 장래에 여승의 아들을 반드시 왕손이라고 일컬어 데리고 들어와 문안할 것이다. 이렇게 하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니, 세자가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나경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이 책망하기를,
"이 역시 나라를 망칠 말이다. 대리(代理)하는 저군(儲君)이 어찌 죄인과 면질해야 하겠는가?"
하니, 세자가 울면서 대답하기를,
"이는 과연 신의 본래 있었던 화증(火症)입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차라리 발광(發狂)을 하는 것이 어찌 낫지 않겠는가?"
하고, 물러가기를 명하니, 세자가 밖으로 나와 금천교(禁川橋) 위에서 대죄하였다. 홍봉한이 나와서 아뢰기를,
"대조(大朝)께 충성하는 자는 소조(小朝)에도 충성하는 것입니다. 나경언의 불충(不忠)은 이미 논할 것도 없으니, 마땅히 해당되는 율로 논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홍봉한의 파직을 명하였는데, 윤동도가 구해(救解)하매, 이에 다시 영상(領相)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죄인을 용서하고자 하였는데, 여러 신하들이 굳이 가형(加刑)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부득이 이에 하교하기를,
"네가 이미 여러 신하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였으니, 그 정성이 비길 바가 없다. 그러나 남을 악역(惡逆)으로 무함했으니 죄 역시 가볍지 않다."
하고, 형장(刑杖) 6도(度)를 시행하라고 명하니, 나경언이 ‘동궁을 무함하였으니, 그 죄는 죽어야 마땅합니다.’라고 공초하였다. 임금이 그래도 살리고자 하니, 남태제(南泰齊)가 말하기를,
"나경언은 하찮은 사람으로서 이미 ‘동궁을 무함하였다.[誣陷東宮]’라는 공초가 나왔으니, 전하께서 온전히 살려주어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대역 부도(大逆不道)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고, 문랑(問郞) 홍낙순(洪樂純) 역시 같은 말로 청하였다. 윤동도가 말하기를,
"참으로 두 사람의 말과 같습니다."
하니, 임금이 부득이 허락하였다. 남태제 등이 율관(律官) 전상우(田相雨)로 하여금 부대시 처참(不待時處斬)으로 조율(照律)하여 아뢰었다. 대사간 이심원(李心源)·장령 이지회(李之晦)가 죄인에게 노륙(孥戮)의 율로 시행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매우 꾸짖기를,
"이심원은 일찍이 춘방(春坊)을 역임했는데 어찌 얼굴이 부끄럽지 않은가? 파직하고, 이지회는 체차하라."
하였다. 판의금 한익모가 아뢰기를,
"죄인을 이미 결안(結案)하였으니, 청컨대 사주(使嗾)한 사람을 물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한익모의 파직을 명하였다. 제일 늦게 판부사 정휘량(鄭翬良)이 들어와 말하기를,
"신은 전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이제야 들어왔습니다. 이런 흉인을 어찌 일각이라도 머물러 두겠습니까? 빨리 참형에 처하라고 명하소서."
하였다.
5월 23일 병진
윤광승(尹光昇)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친국(親鞫)을 파한 후, 걸어서 문안청(問安廳)에 나아가 도제조(都提調) 신만(申晩)의 손을 베고 굳게 누워서 일어나지 않았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대내로 돌아가기를 굳이 청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고, 또 탕제(湯劑)를 올렸으나 임금이 들지 않았다. 오후가 되어서 임금이 대내(大內)로 돌아갔다. 세자가 밤을 새우고 아침에 이르기까지 금천교(禁川橋) 가에서 대명(待命)하고, 늦은 후에야 보련(步輦)으로 창덕궁에 돌아왔다. 임금이 명하기를,
"창덕궁의 전후 입직한 기성 당랑(騎省堂郞)을 파직하라."
하였는데, 잡인의 출입을 금하지 못한 때문이었다.
5월 24일 정사
왕세자가 시민당(時敏堂) 뜰에서 대명하였다.
임금이 흥화문(興化門)에 나아가 각전(各廛)의 시민(市民)을 불러 하유하기를,
"어제 내가 본 바가 있어서 【나경언(羅景彦)의 글이다.】 내사(內司)와 사궁(四宮)에서 시인들에게 빚이 많은 것을 알았다. 또 너희들이 억울함을 품은 일이 있을 것이니, 숨기지 말고 다 진달하라."
하였는데, 대개 세자의 본병(本病)이 날로 심해져 주야로 액속(掖屬)의 호한(豪悍)한 무리들과 더불어 유희함이 법도를 잃었고, 상사(賞賜)가 한정이 없어 내사(內司)가 모조리 비어 시인(市人)의 물건을 거두어 올렸으며, 액속들이 위세를 빙자하여 시인의 것을 빼앗아 원망하는 말이 길에 가득하였다. 임금이 이때에 이르러서 비로소 알고는 시인들에게 각기 빚으로 준 것을 말하도록 명해 호조·혜청(惠廳) 및 기조(騎曹)098) 로 하여금 갚아주라 명하였다.
임금이 삼군문(三軍門)의 대장 구선행(具善行) 등을 불러 창덕궁 입직 군사의 3분의 1을 감하라 하였는데, 구선행 등이 다투었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왕세자가 영의정 홍봉한을 접견하고 말하기를,
"듣건대 우의정이 피혐하고 있다 하기 때문에 필선(弼善) 이만회(李萬恢)를 보내 구두로 우의정에게 유시해 의임(倚任)하는 뜻을 보였다."
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저하의 처분이 좋습니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왕세자가 포청(捕廳)으로 하여금 나경언(羅景彦)의 처자를 국문하여 사주한 자를 알고자 하였더니, ‘안성(安城)의 저인(邸人)이다.’라고 공초하였기 때문에 안성의 저인을 붙잡아다 물었더니, ‘친지(親知) 윤광유(尹光裕)이다.’라고 공초하였는데, 윤광유는 바로 윤동도의 아들이었다. 후에야 그것이 거짓 공초임을 알았기 때문에 사람을 시켜 우상(右相)에게 유시하여 개석(開釋)하고, 또 수서(手書)를 내려 위유(慰諭)하였다.
삼강 어사(三江御史) 엄인(嚴璘)이 복명하였다. 엄인이 삼사(三司)에서 풍문(風聞)으로 강상(江上)의 부인(富人)들을 침탈하는 폐단을 진달하니, 임금이 엄금하라고 명하였다.
5월 25일 무오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5월 26일 기미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면서 궁관(宮官)을 보내어 문안하니,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기백(畿伯)에게 명하여, 양주(楊州)·고양(高陽) 등의 고을 수령으로 하여금 백성을 거느리고 입시하게 하여 보리 농사의 풍흉(豊凶)과 가뭄의 고헐(苦歇) 여부를 묻고, 친히 제문을 지어 승지를 보내어 목멱산(木覓山)과 인왕산(仁旺山) 및 한강(漢江)에서 기우제(祈雨祭)를 지내게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병조의 순감군(巡監軍) 단자(單子)에 낙점(落點)을 하지 않고 황첨(黃簽)을 붙여 내리셨습니다. 이 일은 중요한데 어찌 이렇게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찌 국사에 관여하겠는가? 마땅히 원량에게서 수점(受點)하라."
하매, 판부사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군국(軍國)의 일은 성상께서 직접 처결해야 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홍봉한이 또 정홍순(鄭弘淳)을 비국(備局)의 유사(有司)로 삼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지금 이후부터는 국사를 보지 않을 것이니, 비국 당상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하고, 이어서 큰소리로 말하기를,
"중관(中官)의 무리들조차도 공을 세워 후일에 잘 보이려고 하여 모두 승전색(承傳色)099) 을 모면하고, 이목의 관원은 오로지 머뭇거리면서 위패(違牌)를 능사로 삼고 있다. 근일에 승지가 언사소(言事疏)를 받지 않고 있는데, 전의 영상이 나에게 말하기를, ‘언사소를 받아들이는 것이 전하께서는 좋다고 여기십니까, 좋지 않다고 생각하십니까?’ 하였는데, 이 역시 의심하여 머뭇거리는 신하이다."
하였는데, 전의 영상은 바로 김상로(金尙魯)로서 동궁의 일 때문에 임금에게 미움을 받아 이런 하교가 있게 된 것이었다.
5월 27일 경신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5월 28일 신유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임금이 교동 어사(喬桐御史) 홍지해(洪趾海)를 소견하였다. 도제조 신만(申晩)과 제조 김상복(金相福)이 탕제(湯劑) 들기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허락하지 않았다.
5월 29일 임술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적간(摘奸) 선전관(宣傳官)을 소견하여 동교(東郊)·서교(西郊)에 비가 내린 형지(形止)를 물었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오로지 전하의 정성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마음으로 비를 오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작은 악차(幄次)를 설치하게 하고, 밤새도록 비를 빌었다.
영의정 홍봉한 등이 비국의 여러 당상과 함께 구대(求對)하니, 왕세자가 시민당 월랑(月廊)에서 인접하였다. 홍봉한 등이 문후하니, 세자가 말하기를,
"바야흐로 황공하게 대죄(待罪) 중인데 기후를 어느 겨를에 논하겠는가?"
하였다. 여러 신하들이 통박(痛迫)한 뜻을 진달하고 또 더욱 힘쓰기를 청하니, 하령하기를,
"마땅히 명심(銘心)하고 깊이 유념하겠다."
하였다. 우의정 윤동도가 감읍(感泣)한다는 뜻을 진달하니, 하령하기를,
"내가 이미 경의 마음을 깊이 알고 있으니, 인혐(引嫌)하지 말라."
하였다.
임금이 건명문 작은 악차에 나아가 영상과 우상을 소견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들이 동궁에 나아가 구대(求對)하였더니, 동궁이 승전색(承傳色)을 통해 하령(下令)하기를, ‘이럴 때의 차대(次對)는 아주 도리가 아니다. 하교하신 후에 거행하지 않은 것도 매우 송구스러운데, 대신과 여러 신하의 뜻은 어떤가?’라고 하였습니다. 소신이 우상과 함께 먼저 접대하기를 청했더니, 하령하기를, ‘바야흐로 대죄 중이니, 차대(次對)는 결코 할 수 없다.’라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가 이미 모였으니, 비록 차대는 하지 않더라도 소견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어느 곳에서 대죄하고 있는가?"
하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시민당 월랑(月廊)에서 대죄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춘방(春坊)의 관원 역시 알고 있는가?"
하니, 우의정 윤동도가 말하기를,
"날마다 새벽에 일제히 모여 문한(門限)에 이르러서 나가고 있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이목(耳目)의 관원이 참으로 아주 개탄스럽구나. 나는 그가 대명하고 있는지 몰랐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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