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99권, 영조 38년 1762년 윤5월

싸라리리 2025. 10. 9.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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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5월 1일 계해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면서 중관(中官)을 보내어 문안하였는데, 임금이 답하지 않았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영상과 우상의 입시를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오늘 오는 비는 나를 살리고자 하는 것이니, 내 마음이 반은 이미 돌아왔다. 수표교(水標橋)에 만약 물이 한 자만 넘으면 삼대(三對)100)  를 하고자 한다."
하니,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가 말하기를,
"만약 물이 한 자가 넘으면 도리어 수재(水災)가 있게 되니, 청컨대 삼강(三講)101)  이란 말 위에다 삼대라는 말을 첨가해 쓰는 것이 좋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지난번 죄인과 면질(面質)하기를 청한 것이 어찌 한심하지 않은가?"
하니, 승지 윤동승(尹東昇)이 말하기를,
"이는 그때 분하고 절박한 나머지 한 말입니다. 성상께서 만약 조용히 꾸짖어 가르치시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하였고, 편차인(編次人) 구윤명(具允明)은 말하기를,
"요즈음은 소조(小朝)께서 매우 뉘우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말하기를,
"말도 말라, 말도 말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작년에 공묵합(恭默閤)에서 입시를 명했더니, 발병을 핑계하므로 전의 영상(領相)이 깨우쳐 입시하게 했는데 걸음걸이가 정상이었다. 그의 자품(資品)이 생지(生知)102)  에 가깝기 때문에 내가 처음에 매우 사랑하자, 늙은 환관(宦官) 권성징(權聖徵)이 내가 익애(溺愛)하는 것을 간하였는데, 당시 내 생각은 지나치다고 여겼었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 보니, 그 말을 따르지 않아서 그런 버릇을 키운 것이 후회된다. 옛날 고 상신(相臣) 이항복(李恒福)은 아이 때에는 오활하였으나 마침내 현상(賢相)이 되었지만 이는 여망(餘望)이 전혀 없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영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오늘은 단비가 곧 내릴 것이니,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신령(神靈)의 뜻에 앙답하여 빨리 삼대(三對)하라는 청을 따르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우선은 비가 크게 쏟아지기를 기다려서 행하겠다."
하였다. 이때에 가랑비가 조금씩 내리거늘, 홍봉한 등이 말하기를,
"조금 전 삼대의 청을 승낙하시자 거기에 따라 비가 오니, 역시 신령스럽고 이상합니다. 만약 쾌히 승락하신다면 큰 비가 바로 올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과연 이상한 일이다."
하고, 이어서 여러 신하 및 좌사(左史)·우사(右史)에게 두루 묻기를,
"이 빗방울은 과연 삼대를 승낙한 효험이며, 만약 쾌히 승락한다면 큰 비가 곧바로 쏟아지겠는가?"
하매, 여러 신하들과 사신(史臣)이 모두 대신과 같은 말을 하였다.

 

윤5월 2일 갑자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待命)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갔다. 임금이 말하기를,
"어제의 비는 신령께서 내리신 것이니, 내가 진전(眞殿)에 전배(展拜)하고자 온 것이다."
하였다. 예를 행한 뒤에 진선문(進善門)에 나아가 말하기를,
"내가 비록 지영(祗迎)하지 말라고 명하였으나 지척(咫尺)의 동궁[銅龍]에서 지영하지 않으니, 이것이 무슨 도리인가? 또 내가 이곳에 와 앉아 있으니, 원량(元良)이 반드시 겁을 먹은 것이다."
하고, 이어서 진전(眞殿)에 망배(望拜)하면서 말하기를,
"소자(小子)가 이곳에 머물고자 하나 원량이 반드시 겁을 먹을 것이기 때문에 이제 돌아가겠습니다."
하였다. 돌아올 때에 혜정교(惠政橋)에서 연(輦)을 멈추고, 형조의 죄수를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홍봉한과 우의정 윤동도의 파직을 명하고, 신만(申晩)을 영상(領相)에 제배하였으니, 임금이 홍봉한 등이 동궁의 대명(待命)을 풀어주고자 한 것을 아주 마땅치 않게 여겨서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창의궁(彰義宮)에 들러 전교하기를,
"기강이 문란하니, 나라가 되겠는가? 단지 강개(慷慨)한 마음으로 전배는 하였지만 뜻은 역시 깊다. 행차를 명할 때에 마땅히 대명했어야 하는데, 오늘 정오가 지나서야 비로소 들렸으니 어찌 그리 늦었는가? 두 재상의 나라를 위하는 마음을 내가 깊이 아는데, 이는 마음이 타 녹아서 그런 것인가? 한 가닥의 기강이라도 남아 있어서 칙려(飭礪)해야 한다면 대신을 버려두고 누구이겠는가?"
하고, 모두 재상직을 파직하고, 신만(申晩)을 영의정으로 삼았다.

 

심관(沈鑧)을 대사간으로, 김양행(金亮行)을 장령으로 삼았다.

 

윤5월 3일 을축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윤5월 4일 병인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박지성(朴枝成)과 김인단(金麟端) 등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박지성 등이 무뢰하게 날뛰면서 동궁(東宮)을 사칭(詐稱)하고 밤에 다니며 사람을 벽제(辟除)103)                  하여 종적이 음흉하고 비밀스러우니, 사람들이 헤아리지 못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그 무리들이 산붕(山棚)104)                  을 안암동(安巖洞) 이찰(尼刹)에다 설치한다는 말을 듣고, 그 무리 김인서 등 두 사람과 함께 길을 가다가 민가를 지나가게 되었는데, 부녀(婦女)가 있는 것을 보고는 세 적이 차례로 강간(强姦)하고는 갔다. 그 여자가 형조에 달려와 고하니, 참판        이이장(李彛章)이 발자취를 따라가 붙잡아 추조(秋曹)105)                  에 가두고, 또 본죄(本罪)를 살펴 임금께 아뢰니, 임금이 일률(一律)로 처분하게 하였다.

 

임금이 기백(畿伯) 및 광주(廣州)·수원(水原)·과천(果川)·양천(陽川)의 수령을 소견하였다.

 

석강(夕講)을 행하라고 명하였다.

 

윤5월 5일 정묘

임금이 향을 친히 전하는 예를 행하였다.

 

공시 당상(貢市堂上)을 소견하였다.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윤5월 6일 무진

왕세자가 시민당 뜰에서 대명하였다.

 

수찬 이휘중(李徽中)이 아뢰기를,
"나라를 위해서 한번 죽는 것이 신의 소원입니다. 삼대(三對)를 철폐하고 정사(政事)를 내맡긴 지 오래되어 인순(因循)함이 이에 이르렀습니다. 조정 신하들은 혹 성심(聖心)이 번뇌할까 염려하여 지금까지 아뢰지 못하고 있으나, 신은 죽음을 무릅쓰고 감히 진달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렇게 하여 후일의 공(功)을 세우고자 하는가? 나로 하여금 창의궁(彰義宮)으로 물러가 누워 있게 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고, 이휘중의 파직을 명하였다. 이휘중이 말하기를,
"신이 비록 파직되었으나 바로 전의 유신(儒臣)이니, 청컨대 다 진달하겠습니다."
하니, 임금이 노하여 꾸짖기를,
"참으로 괴이하고, 신절(臣節)이 없다."
하고, 물러가라고 명하니, 이휘중이 두려워서 허둥지둥 물러났다. 임금이 말하기를,
"그가 범안(犯顔)한 것이 가상하다."
하고, 특별히 파직하라는 명을 중지하고 단지 체차만 하였다.

 

옥당(玉堂) 김종정(金鍾正)·박사해(朴師海)·남현로(南玄老)·홍지해(洪趾海)·이득배(李得培)가 함께 연명 차자하여 나경언(羅景彦)에게 노적(拏籍)의 율로 시행하기를 청하고, 헌납 이시건(李蓍建) 역시 차자를 올려 나경언에게 빨리 노적의 율을 시행하라고 청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받아들인 승지 및 여러 승지의 파직을 명하고, 남소(南所)의 위장(衛將) 유장(兪嶈)을 가승지(假承旨)로 삼아 그 차자를 돌려 주게 하고 모두 파직하였으며, 이어서 영남(嶺南) 연해(沿海)로 정배하라는 명을 내렸다. 영의정 신만(申晩) 및 약방 제조를 사현합(思賢閤)으로 입시하라고 명하였는데 이때가 밤 1경(更)이었다. 임금이 연달아 차마 듣지 못할 전교를 내렸다. 임금이 또 전교하기를,
"나경언이 어찌 역적이겠는가? 오늘의 조정의 신하들의 치우친 논의가 도리어 부당(父黨)·자당(子黨)이 되었으니, 조정의 신하가 모두 역적이다."
하고, 사관(史官)을 돌아보면서 이르기를,
"너도 곧바로 쓰지 않으면 역시 역적이다."
하고, 수없이 가슴을 치니, 여러 신하들이 두려워하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물러 나갔다.

 

윤5월 7일 기사

왕세자가 시민당 월대(月臺)에서 대명하였다.

 

한익모(韓翼謨)를 이조 판서로, 홍봉한(洪鳳漢)을 좌의정으로, 윤동도(尹東度)를 우의정으로, 정존겸(鄭存謙)을 부제학으로, 한익모를 예문 제학으로 삼았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적전(籍田)의 맥상(麥箱)을 친히 받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번 삼사(三司)의 괴이한 행동은 후일 곧았다는 말을 듣고자 해서였다."
하고, 이어서 주서(注書)에게 명하여 당리(堂吏)에게 묻게 하기를,
"수창(首倡)한 자가 누구인가?"
하니, 당리가 대답하기를,
"여러 인원이 우연하게 일제히 모여 차자를 올린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진노(震怒)하여 말하기를,
"우연이란 대답을 어찌 감히 내 앞에서 하는가?"
하고, 명하기를,
"당리(堂吏)를 결박해서 엄히 형문하고 정배하라."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시건(李蓍建)이 먼저 올렸다고 하니, 정배하는 데 그쳐서는 안된다. 거제부(巨濟府)에 배도(倍道)로 압송(押送)하고, 역로(歷路)의 도신과 수령은 여덟 사람에게 노자를 주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윤5월 8일 경오

왕세자가 시민당 월대에서 대명하였다. 임금이 영의정 신만에게 이르기를,
"역적 김일경(金一鏡)이 일찍이 백망(白望)에게 압슬(壓膝)과 화형(火刑)을 썼는데, 그후에 그가 또 그 형을 받았다. 추시(追施)하는 율(律)에 이르러서는 내가 더욱 불쌍하게 여긴다. 지난날 삼사(三司)가 나경언에게 시행하기를 청한 것은 반드시 음덕(陰德)에 해롭게 된다."
하였다.

 

윤5월 9일 신미

왕세자가 시민당 월대에서 대명하였다.

 

윤5월 10일 임신

왕세자가 시민당 월대에서 대명하였다.

 

임금이 인평군(仁平君) 이보혁(李普赫)의 시장(諡狀)을 들여오라고 명하였다. 다 보고 나서 임금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이준휘(李儁徽)가 그 아비의 억울함을 호소하기 위해서 격고(擊鼓)하였으니, 참으로 효자(孝子)이며, 인평군 역시 이를 개의치 않았으니 역시 어질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무신년106)   난적을 토벌할 때에 이보혁이 이정필(李廷弼)의 군공(軍功)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정필의 아들 이준휘가 그 아비를 위해서 격고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44책 10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재판(裁判) / 역사-사학(史學) / 역사-전사(前史)


[註 106] 무신년 : 1728 영조 4년.
사신(史臣)은 말한다. "무신년106)   난적을 토벌할 때에 이보혁이 이정필(李廷弼)의 군공(軍功)을 빼앗았기 때문에 이정필의 아들 이준휘가 그 아비를 위해서 격고하여 억울함을 호소하였다."

 

영남·호남이 크게 가물어서 김응순(金應淳)을 호남 기우 어사(祈雨御史)로, 이경옥(李敬玉)을 영남 기우 어사로 삼아 보내어 두 도의 사직단(社稷壇) 및 산천(山川)에 기우제를 지내고, 또 주현(州縣)으로 하여금 경내의 산천에 각기 기우제를 지내게 하였다.

 

윤5월 11일 계유

임금이 기우제를 행하는 향(香)을 친히 전하였다.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삼남(三南)의 백성을 불러 한재(旱災)를 묻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너희들은 돌아가 너희 고을 수령을 보거든, 내가 백성들을 위해 임문(臨門)하는 뜻을 전하고, 모름지기 정성으로 비를 빌게 하라."
하였다.

 

윤5월 12일 갑술

왕세자가 시민당 월대에서 대명하였다.

 

윤5월 13일 을해

왕세자가 시민당 월대에서 대명하였다.

 

임금이 창덕궁에 나아가 세자(世子)를 폐하여 서인(庶人)을 삼고, 안에다 엄히 가두었다. 처음에 효장 세자(孝章世子)가 이미 훙(薨)하였는데, 임금에게는 오랫동안 후사(後嗣)가 없다가, 세자가 탄생하기에 미쳤다. 천자(天資)가 탁월하여 임금이 매우 사랑하였는데, 10여 세 이후에는 점차 학문에 태만하게 되었고, 대리(代理)한 후부터 질병이 생겨 천성을 잃었다. 처음에는 대단치 않았기 때문에 신민(臣民)들이 낫기를 바랐었다. 정축년107)  ·무인년108)   이후부터 병의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병이 발작할 때에는 궁비(宮婢)와 환시(宦侍)를 죽이고, 죽인 후에는 문득 후회하곤 하였다. 임금이 매양 엄한 하교로 절실하게 책망하니, 세자가 의구심에서 질병이 더하게 되었다. 임금이 경희궁(慶熙宮)으로 이어하자 두 궁(宮) 사이에 서로 막히게 되고, 또 환관(宦官)·기녀(妓女)와 함께 절도 없이 유희하면서 하루 세 차례의 문안(問安)을 모두 폐하였으니, 임금의 뜻에 맞지 않았으나 이미 다른 후사가 없었으므로 임금이 매양 종국(宗國)을 위해 근심하였다.
한번 나경언(羅景彦)이 고변(告變)한 후부터 임금이 폐하기로 결심하였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갑자기 유언 비어가 안에서부터 일어나서 임금의 마음이 놀랐다. 이에 창덕궁에 나아가 선원전(璿源殿)에 전배하고, 이어서 동궁의 대명(待命)을 풀어주고 동행하여 휘령전(徽寧殿)에 예를 행하도록 하였으나 세자가 병을 일컬으면서 가지 않으니, 임금이 도승지 조영진(趙榮進)을 특파(特罷)하고 다시 세자에게 행례(行禮)하기를 재촉하였다. 임금이 이어서 휘령전(徽寧殿)으로 향하여 세자궁(世子宮)을 지나면서 차비관(差備官)을 시켜 자세히 살폈으나 보이는 바가 없었다. 세자가 집영문(集英門) 밖에서 지영(祗迎)하고 이어서 어가를 따라 휘령전으로 나아갔다. 임금이 행례를 마치고, 세자가 뜰 가운데서 사배례(四拜禮)를 마치자, 임금이 갑자기 손뼉을 치면서 하교하기를,
"여러 신하들 역시 신(神)의 말을 들었는가? 정성 왕후(貞聖王后)께서 정녕하게 나에게 이르기를, ‘변란이 호흡 사이에 달려 있다.’고 하였다."
하고, 이어서 협련군(挾輦軍)에게 명하여 전문(殿門)을 4, 5겹으로 굳게 막도록 하고, 또 총관(摠管) 등으로 하여금 배열하여 시위(侍衛)하게 하면서 궁의 담쪽을 향하여 칼을 뽑아들게 하였다. 궁성문을 막고 각(角)을 불어 군사를 모아 호위하고, 사람의 출입을 금하였으니, 비록 경재(卿宰)라도 한 사람도 들어온 자가 없었는데, 영의정 신만(申晩)만 홀로 들어왔다. 임금이 세자에게 명하여 땅에 엎드려 관(冠)을 벗게 하고, 맨발로 머리를 땅에 조아리게[扣頭] 하고 이어서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자결할 것을 재촉하니, 세자가 조아린 이마에서 피가 나왔다. 신만과 좌의정 홍봉한, 판부사 정휘량(鄭翬良), 도승지 이이장(李彛章), 승지 한광조(韓光肇) 등이 들어왔으나 미처 진언(陳言)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세 대신 및 한 광조 네 사람의 파직을 명하니, 모두 물러갔다. 세손이 들어와 관(冠)과 포(袍)를 벗고 세자의 뒤에 엎드리니, 임금이 안아다가 시강원으로 보내고 김성응(金聖應) 부자(父子)에게 수위(守衛)하여 다시는 들어오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칼을 들고 연달아 차마 들을 수 없는 전교를 내려 동궁의 자결을 재촉하니, 세자가 자결하고자 하였는데 춘방(春坊)의 여러 신하들이 말렸다. 임금이 이어서 폐하여 서인을 삼는다는 명을 내렸다. 이때 신만·홍봉한·정휘량이 다시 들어왔으나 감히 간하지 못하였고, 여러 신하들 역시 감히 간쟁하지 못했다. 임금이 시위하는 군병을 시켜 춘방의 여러 신하들을 내쫓게 하였는데 한림(翰林) 임덕제(林德躋)만이 굳게 엎드려서 떠나지 않으니, 임금이 엄교하기를,
"세자를 폐하였는데, 어찌 사관(史官)이 있겠는가?"
하고, 사람을 시켜 붙들어 내보내게 하니, 세자가 임덕제의 옷자락을 붙잡고 곡하면서 따라나오며 말하기를,
"너 역시 나가버리면 나는 장차 누구를 의지하란 말이냐?"
하고, 이에 전문(殿門)에서 나와 춘방의 여러 관원에게 어떻게 해야 좋은가를 물었다. 사서(司書) 임성(任晠)이 말하기를,
"일이 마땅히 다시 전정(殿庭)으로 들어가 처분을 기다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니, 세자가 곡하면서 다시 들어가 땅에 엎드려 애걸하며 개과 천선(改過遷善)하기를 청하였다. 임금의 전교는 더욱 엄해지고 영빈(暎嬪)이 고한 바를 대략 진술하였는데, 영빈은 바로 세자의 탄생모(誕生母) 이씨(李氏)로서 임금에게 밀고(密告)한 자였다. 도승지 이이장(李彛章)이 말하기를,
"전하께서 깊은 궁궐에 있는 한 여자의 말로 인해서 국본(國本)을 흔들려 하십니까?"
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라고 명하였다가 곧 그 명을 중지하였다. 드디어 세자를 깊이 가두라고 명하였는데, 세손(世孫)이 황급히 들어왔다. 임금이 빈궁(嬪宮)·세손(世孫) 및 여러 왕손(王孫)을 좌의정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하였는데, 이때에 밤이 이미 반이 지났었다. 임금이 이에 전교를 내려 중외에 반시(頒示)하였는데, 전교는 사관(史官)이 꺼려하여 감히 쓰지 못하였다.

 

윤5월 14일 병자

환자(宦者) 박필수(朴弼秀)와 여승(女僧) 가선(假仙) 등이 복주(伏誅)되었다. 처음에 박필수가 세자를 따라 유연(遊宴)하면서 세자를 종용하여 좋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여승 가선이란 자는 바로 안암동(安巖洞)의 여승인데, 머리를 기르고 입궁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임금이 박필수와 가선 및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을 참(斬)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홍봉한이 아뢰기를,
"한림(翰林) 윤숙(尹塾)은 어제 신들을 꾸짖었고 또 울부짖으며 거조를 잃었으니, 인심을 진정시키고자 한다면 엄히 처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고, 영의정 신만 및 신회(申晦)·김성응(金聖應) 등이 모두 같은 말로 죄주기를 청하니, 임금이 진노하여 말하기를,
"국문해야 한다."
하였다. 승지 정광한(鄭光漢)이 국문하기를 청하니, 홍봉한이 말하기를,
"이는 국문할 죄가 아니니, 지나치고 지나칩니다."
하매, 임금이 윤숙을 해남(海南)으로, 임덕제(林德躋)를 강진(康津)으로 찬배(竄配)하라고 명하였다. 구 동궁(舊東宮)의 잡물(雜物)을 선인문(宣仁門) 밖에서 불태우라 명하였는데, 유희하는 기괴한 물건이 많았으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러고도 나라가 망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임금이 연달아 창덕궁(昌德宮)에 있었다.

 

윤5월 15일 정축

임금이 경화문(景化門)에 나아가 반교(頒敎)에 친림하였다. 임금이 반교문(頒敎文)은 사신(詞臣)이 지을 바가 아니라는 것으로써 어제의 두 건(件)의 하교(下敎)로써 반교문을 삼고, 복정(復政)하는 이유를 첨가해 써 넣었다. 이익원(李翼元)을 중도 부처(中途付處)하라고 명하였는데, 반교할 때 소리를 내어 울면서 눈물을 흘렸기 때문이다.

 

죄인 서필보(徐必普)·정중유(鄭重維)를 모두 효시(梟示)하라 명하였는데, 구 동궁 때에 범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헌부(憲府)에서 전계(前啓)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이관(李爟)109)  과 이당(李爣)110)  의 일에 이르러서는 답하기를,
"관과 당의 여러 아들들의 일을 아직까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역시 지나치다고 할 수 있다. 육지나 섬을 막론하고 정배(定配)는 같다. 그 등전(謄傳)한 바를 내가 오늘에 어찌 예(例)를 따르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간원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윤5월 16일 무인

전교하기를,
"헌부와 간원의 비답은, 바로 내가 처음하는 정사이기 때문에 따를 만한 것은 따르겠으나 말을 만들어 하교하는 것은 이후에 생각하겠다. 아! 비록 만고에 없는 일을 만났지만 지금은 내가 그 보좌(寶座)에 나갔으니, 조선(朝鮮)을 중흥해야 하는데, 오늘 대신(臺臣)이 어찌 감히 복정(復政)하는 처음에 연달아 아뢰는가? 어제 헌부와 간원에 내린 비답을 모두 시행하지 말라. 그리고 대리(代理)할 때 청한 바를 등전(謄傳)한 대신(臺臣)은 모두 삭직하는 율을 시행하라."
하였다.

 

윤5월 17일 기묘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가 죄인 엄홍복(嚴弘福)을 친국하였다. 이때에 엄홍복이 조재호(趙載浩)의 불령(不逞)한 말을 듣고서 이미(李瀰)에게 전하였고, 이미는 홍봉한에게 전하였으며, 홍봉한은 임금에게 아뢰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판부사 조재호와 응교 이미를 모두 삭직(削職)하라고 명하였다. 전교하기를,
"그 일은 엄홍복이 허황되게 한 난언(亂言)에 불과하다. 조 판부사가 이 사람을 만나본 것은 ‘예(禮)가 아니면 보지 말라.’는 뜻이 아니며, 이미가 이 말을 들은 것 역시 ‘예가 아니면 듣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비록 향리에 있다지만 그 이름을 생각하면 재상인데 은근한 편지를 보냈으니, 이미 재상의 체면을 잃은 것이다. 후에 엄홍복의 초사(招辭) 가운데 ‘좌우(左右) 삼현(三絃)’이라는 말이 있었으니, 이 말을 듣고서 내 얼굴이 부끄러웠다. 이미는 그 아비의 아들로서 어찌 이처럼 교악(巧惡)한 무리와 친했는가? 귀로는 비록 들었더라도 입으로 어찌 말할 수 있는가? 비록 나라를 위한 고심(苦心)에서라고는 하지만, 만약 엄홍복과 친하지 않았다면 그런 말이 어찌 귀에 들어왔겠는가? 처음 정사의 여신(勵新)하는 도리에 있어 끝내 모른 체하기 어려우니, 모두 파직하라."
하였다.

 

대사간 심관(沈鑧)이 아뢰기를,
"어제 참작하여 처리한 궁노(宮奴) 무리들은 중간에서 빙자하여 민간에서 폐단을 일으킨 죄를 그들이 비록 자복(自服)은 했다 하더라도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청컨대 율에 의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5월 18일 경진

죄인 엄홍복을 수구문(水口門) 밖에서 참하였다. 결안(結案)하기를,
"본디 부탄(浮誕)한 사람으로 세상의 지목을 받아왔는데, 4월 사이에 만나서 긴요치 않은 수작을 나누었고, 이로 인해서 무상(無狀)하고 망측한 말을 만들어 내어 세상을 어지럽게 하고자 하였으니, 만번 죽어도 아깝지 않은 죄입니다."
하였다.

 

사간 박기채(朴起采), 장령 조태상(趙台祥), 지평 심욱지(沈勗之)·정언섬(鄭彦暹), 헌납 박필수(朴弼燧), 정언 강지환(姜趾煥)이 합계하기를,
"조재호는 이미 정법(正法)111)  한 죄인 엄홍복의 초사에서 나왔고, 또 상신(相臣)의 몸으로서 요얼(妖孼)과 친근해 은근한 편지를 보내기까지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엄히 국문하는 도리에 있어 결코 삭직하는 데 그쳐서는 안되니, 청컨대 조재호를 먼 변방에 안치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첫머리의 말은 그에게 스스로 해당되니, 누가 지나치다고 하겠는가? 끝의 감률(勘律)은 바로 내가 하교한 것이요, 복정(復政)한 때에 대체(臺體)를 얻었으니,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강지환이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엄홍복의 초사가 나온 후에 쟁집(爭執)하지 않은 양사의 대사간 심관(沈鑧), 장령 정운유(鄭運維)는 모두 파직하고, 오늘 합계에 이의를 제기한 정언 임희효는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끝의 두 가지 일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이언형(李彦衡)을 승지로 삼았다.

 

전교하기를,
"바야흐로 처음 정사를 당해서 ‘소인(小人)을 멀리하라.’는 제갈양(諸葛亮)의 말을 생각하지 않으면 어떻게 처음 정사를 칙려하겠는가? 지난번의 승지 이현중(李顯重)을 강진현(康津縣)으로 정배하고, 조재호(趙載浩)는 단천부(端川府)에 안치하라."
하였다.

 

윤5월 19일 신사

김치인(金致仁)을 이조 판서로, 황인검(黃仁儉)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3일에 따라서 들어온 시강원과 익위사의 관원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가 전배하였다.

 

영의정 신만, 좌의정 홍봉한, 우의정 윤동도가 복정(復政)을 하례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한 장의 치사(致詞)를 어찌 사양하겠는가?"
하였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선교(宣敎)하기를 명했더니, 승지 조중회(趙重晦)가 끝내 하지 않으면서 감히 말하기를, ‘14년 동안 신하로서 섬겨 왔다.’라고 하였는데, ‘신(臣)’이란 한 자를 마치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다.[君君臣臣]’의 말처럼 했으니 어찌 감히 이렇게 할 수 있는가? 이는 이익원(李翼元)보다 더하니, 빨리 원방(遠方)에 찬배하라."
하였다.

 

장령 조태명(趙台命), 지평 심욱지(沈勗之)·정언섬(鄭彦暹), 헌납 박필수(朴弼燧), 정언 강지환(姜趾煥)이 아뢰기를,
"좋지 않은 무리와 체결하여 난언(亂言)을 수작하였으니, 나라의 법으로 헤아리면 스스로 해당되는 율이 있습니다. 안치한 죄인 조재호는 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고 처지가 더욱 다른데 요얼과 친근하여 먼 길에 편지를 보내어 산만하게 대화를 나누었으니, 듣기에 놀라운 정상이 이미 엄홍복의 초사에서 나왔습니다. 엄홍복의 결안(結案)에 또 한 자도 속임이 없다고 명백히 지만(遲晩)하였는데, 말을 전파한 엄홍복은 이미 왕법(王法)에 죽었으니, 말을 꺼낸 조재호에게 어찌 가벼운 율이 합당하겠습니까? 청컨대 안치한 죄인 조재호를 아주 먼 변방에 위리 안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조재호가 이런 무리와 가깝게 지낸 것은 엄홍복의 초사로 보건대 말하지 않아도 알 수가 있다. 그 아버지의 아들로서 이름이 국초(鞫招)에 올라 이런 거조가 있게 된 것이다. 지금의 첫 정사에 어찌 서로 버티겠는가?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윤5월 20일 임오

임금이 문에 임하여 군사를 위로하고, 이어서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윤5월 21일 계미

구윤명(具允明)·유건(柳楗)·박도원(朴道源)을 승지로 삼았다.

 

사도 세자(思悼世子)가 훙서(薨逝)하였다. 전교하기를,
"이미 이 보고를 들은 후이니, 어찌 30년에 가까운 부자간의 은의(恩義)를 생각하지 않겠는가? 세손(世孫)의 마음을 생각하고 대신(大臣)의 뜻을 헤아려 단지 그 호(號)를 회복하고, 겸하여 시호(諡號)를 사도 세자(思悼世子)라 한다. 복제(服制)의 개월 수가 비록 있으나 성복(成服)은 제하고 오모(烏帽)·참포(黲袍)로 하며 백관은 천담복(淺淡服)으로 한 달에 마치라. 세손은 비록 3년을 마쳐야 하나 진현(進見)할 때와 장례 후에는 담복(淡服)으로 하라."
하였다. 또 전교하기를,
"이제 이미 처분하였은즉 빈궁(嬪宮)은 효순(孝純)과 같으니, 구인(舊印)을 사용해서는 안된다. 혜빈(惠嬪)이란 호를 내려 일체로 옥인(玉印)을 내리고, 조정은 정후(庭候)하라."
하였다.

 

홍봉한을 예장 도감 도제조(禮葬都監都提調)로, 신회(申晦)·김상복(金相福)을 빈궁 도감 당상(嬪宮都監堂上)으로, 이이장(李彛章)·심수(沈鏽)를 묘소 도감 당상(墓所都監堂上)으로 삼았다.

 

중관(中官) 구흥삼(具興三) 등을 모두 노(奴)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윤급(尹汲)을 예문 제학으로, 김성응(金聖應)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에게 말하기를,
"영상과 우상이 복제(服制)의 일을 경에게 말하던가?"
하니, 대답하기를,
"막 들어서 경솔히 의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한 달로 마치라는 전교를 시행하지 말고 단지 성복(成服) 발인(發靷)만 하고, 반우(返虞)·연상일(練祥日)에는 백관이 담복으로 예를 행해야 한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위호(位號)를 회복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회복하였으니 13개월의 나라 예를 폐지해서는 안되는데, 유척기 같은 기구(耆舊) 대신도 바로잡지 못했으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24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02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왕실-의식(儀式)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위호(位號)를 회복하지 않았으면 그만이지만, 이미 회복하였으니 13개월의 나라 예를 폐지해서는 안되는데, 유척기 같은 기구(耆舊) 대신도 바로잡지 못했으니, 애석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

 

임금이 이날 경희궁(慶熙宮)으로 다시 이어(移御)하였다.

 

윤5월 23일 을유

임금이 담체(痰滯)의 징후가 있어 약원(藥院)에서 유직(留直)하였다.

 

임금이 전후에 피살된 환시(宦寺)들에게 휼전(恤典)을 거행하도록 명하고 이르기를,
"참혹하다. 내가 일찍이 차마 미물(微物)을 밟지 못하여 개미같이 하찮은 것 역시 밟지 않았었고, 밤 등불에 나방이 날아들면 손으로 휘저었다."
하였다.

 

윤5월 24일 병술

임금이 지관(地官) 안재경(安載經)에게 가서 묘지를 잘 선정(選定)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좌의정 홍봉한에게 말하기를,
"오릉(五陵)에 들어가서는 안된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보순(金普淳)은 강서원(講書院)의 초기(草記)로서 보건대, 또한 한낱 간사한 무리이니 홍문록(弘文錄)112)  에서 빼버리고, 이현중(李顯重)과 함께 시종안(侍從案)에서 제외하라."
하였다.

 

윤5월 25일 정해

김기대(金器大)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헌납 이진항(李鎭恒)이 아뢰기를,
"동의금(同義禁) 이응협(李應協)이 엄홍복(嚴弘福)의 문서를 불태웠으니, 청컨대 멀리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왕세손(王世孫)이 강서원(講書院) 관원을 보내어 문안하니, 임금이 승지를 보내어 유시하기를,
"처분한 후에 답이 없었으니, 네 마음이 어떠하였겠느냐? 한쪽 청구(靑丘)에 단지 나와 너 뿐이니 인사(人事)를 닦아 너를 돕겠다는 자를 너는 모름지기 물리치고 네 할아버지를 생각하여 마음을 편히 해 잘 조처하라."
하였다.

 

임금이 대각(臺閣)에서 신계(新啓)가 없다는 것으로써 엄지(嚴旨)를 내려 외방에 있는 대신(臺臣) 및 전계(傳啓)한 대신(臺臣)을 모두 파직하라 명하였다.

 

윤5월 26일 무자

이정보(李鼎輔)를 대제학으로 삼았다.

 

헌납 황간(黃榦), 정언 임관주(任觀周)가 아뢰기를,
"죄인 수인(守仁)·이재(二才)와 요무(妖巫) 연이(連伊) 등을 청컨대 빨리 방형(邦刑)을 바루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 이택징(李澤徵), 지평 박상로(朴相老)가 수인(守仁) 등의 일로써 아뢰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위패(違牌)하고 외방에 있다고 일컬으면서 대론(大論)에 이의를 제기한 대사헌 김기대(金器大), 집의 이정오(李正吾), 사간 여선응(呂善應), 장령 이운해(李運海), 정언 이시정(李蓍廷), 수찬 김노진(金魯鎭)에게 모두 삭출(削黜)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응교 김응순(金應淳), 장령 이택징(李澤徵), 지평 박상로(朴相老)·윤면동(尹冕東), 헌납 황간(黃榦), 교리 홍낙순(洪樂純)·홍수보(洪秀輔)·이성규(李聖圭), 정언 임관주(任觀周), 수찬 김상익(金相翊)·이명환(李明煥)·이상지(李商芝)가 계청하기를,
"조재호를 잡아다 추국하여 엄문해 실정을 알아내기를 기하소서."
하니, 임금이 대관(大官)을 잡아다 신문하는 것은 《속전(續典)》에 어긋난다는 것으로써 합사(合辭)한 삼사의 신하들을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기대는 사람됨을 내가 알고 있다. 사람됨이 본디 근신(謹愼)하기 때문에 이렇게 되었지 규피(規避)하느라 그런 것이 아닌 듯싶다."
하고, 김기대는 삭직(削職)하고, 김노진·이시정(李蓍廷)은 남쪽 연안으로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다. 승지 윤동승(尹東昇)이 말하기를,
"김기대와 김노진 등은 위패(違牌)한 것은 같은데 죄명은 다릅니다. 성의(聖意)는 비록 지공(至公)한 데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신은 외간에서 그것이 이러한 줄을 모르고서 의논하는 자가 있을까 두렵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은 말이다. 승지는 이렇게 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였다.

 

윤5월 27일 기축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의 환후(患候)가 점차 조금씩 건강을 회복하였으므로, 약원(藥院)에 윤직(輪直)을 명하였다.

 

대사헌 남태회 등이 아뢰기를,
"조재호를 잡아다 추국하여 엄문해 실정을 알아내기를 기하소서."
하고, 장령 조중명(趙重明)이 아뢰기를,
"새로 제수한 여러 대신(臺臣)들은 외방에 있다고 일컬은 자가 많고, 옥서(玉署)의 신하 역시 위패(違牌)하였으니, 청컨대 집의 이기덕(李基德), 장령 박해윤(朴海潤), 지평 강필리(姜必履)·원계영(元啓英), 정언 홍양한(洪亮漢), 수찬 조숙(趙)은 모두 빨리 삭출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다. 정언 이행원(李行源)이 아뢰기를,
"어제 삼사에서 합사한 청은 실로 공공(共公)의 의논인데, 비단 윤허를 입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한결같이 견책하여 파직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대각을 너그러이 용납하여 언로(言路)를 넓히는 도리에 있어서 이렇게 꺾어서는 마땅치 않습니다. 청컨대 삼사의 여러 신하를 파직하라는 명을 중지하소서."
하였다.

 

윤5월 28일 경인

이규채(李奎采)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좌의정 홍봉한이 임금에게 아뢰기를,
"이번의 일로 말하면 전하가 아니셨으면 어떻게 처치하였겠습니까? 외간에서는 전하께서 결판을 짓지 못하실까 염려하였는데, 필경에는 결판을 지어 혈기가 장성(壯盛)할 때와 다름이 없었으니, 신은 흠앙(欽仰)하여 마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말한다. "13일의 일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홍봉한은 사부(師傅)인 몸이고 또 인아(姻婭)의 처지에 있으면서 이미 정성을 다하여 보도(輔導)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처분한 후에 마땅히 사과하고 죄를 이끌어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연석(筵席)에서 면대하는 즈음에 감히 ‘외간 사람이 결판 짓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전석(前席)에서 할 말인가? 무엄함이 심하다."


【태백산사고본】 68책 99권 25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02면
【분류】왕실-종친(宗親) / 사법-탄핵(彈劾) / 변란-정변(政變) / 역사-사학(史學)
사신은 말한다. "13일의 일은 바로 성상께서 종사(宗社)를 위한 부득이한 일이었으나, 홍봉한은 사부(師傅)인 몸이고 또 인아(姻婭)의 처지에 있으면서 이미 정성을 다하여 보도(輔導)하여 신하의 절조(節操)를 다하지 못하였으니, 처분한 후에 마땅히 사과하고 죄를 이끌어 오직 빨리 죽기를 원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했다. 그런데 연석(筵席)에서 면대하는 즈음에 감히 ‘외간 사람이 결판 짓지 못할까 염려했습니다.’고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전석(前席)에서 할 말인가? 무엄함이 심하다."

 

대사간 이규채(李奎采)가 차자를 올리기를,
"오늘 합사(合辭)한 의논은 실로 나라 사람들이 다같이 분통해하는 바인데, 장령 노성중(盧聖中), 사간 이덕해(李德海), 헌납 심각(沈殼)은 안연(晏然)히 집에 있으면서 까닭 없이 소패(召牌)를 어겼으니, 규피하는 자취가 드러나 대론(大論)을 아뢰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세 대신(臺臣)에게 삭직(削職)하는 율을 결단코 그만둘 수 없다고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가상히 받아들인다는 비답을 내리고, 특별히 그 청을 윤허하였다.

 

윤5월 29일 신묘

대사헌 이규채, 사간 송덕중(宋德中), 장령 김양심(金養心), 지평 임해(任瑎), 헌납 박치륭(朴致隆), 부교리 정만순(鄭晩淳), 정언 이성수(李性遂) 등 삼사에서 합사하여 조재호(趙載浩)를 안율(按律)하여 처단하기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홍봉한에게 이르기를,
"지금의 대계(臺啓)는 대체(大體)를 얻은 것이다."
하였으니, 이때 삼사에서 합사하여 안율하여 처단하라는 것으로 고쳤기 때문이다. 지평 임해가 계청하기를,
"외방에 있으면서 규피한 사람과 위패하고 참석하지 않은 집의 이기덕(李基德), 장령 박해윤(朴海潤), 지평 강필리(姜必履)·원계영(元啓英), 정언 홍양한(洪亮漢), 수찬 조숙(趙)에게 아울러 삭직의 율을 시행하고, 교묘히 피하고 곡진(曲盡)히 옹호한 사람인 집의 심익성(沈益聖), 장령 이지회(李之晦), 지평 정창순(鄭昌順), 정언 이중해(李重海)는 하나같이 삭직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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