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임진
임금이, 전 참판 한광조(韓光肇)를 대정현(大靜縣)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는데, 반교(頒敎)에 불참한 것으로써 대계(臺啓)를 인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전 수찬 김화택(金和澤)에게 호조 참의로 발탁하여 제수하라고 특명하였는데, 그가 돌아가 부모 봉양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다.
6월 2일 계사
충청 감사 민백흥(閔百興)의 체직을 허락하고, 전 감사를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정언 이성수(李性遂)가 아뢰기를,
"박문흥(朴文興)이 범한 바는 단지 그 몸을 죽이는 데 그쳐서는 안되니, 청컨대 정법(正法)한 죄인 박문흥에게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쾌히 노적(孥籍)의 율을 시행하게 하소서. 박문흥의 죄가 이미 남김없이 탄로나서, 바야흐로 듣는 자들이 경황(驚惶)해 하고 중외가 절박해 하는 즈음에 그 누군들 들어서 알지 못하겠습니까? 그런데 홀로 무슨 마음으로 양양하게 입궐하여 임의로 사람을 논핵하고서 예(例)에 의해 피혐하기를 일이 없는 평상시처럼 해야 하겠습니까? 그 정상을 따져 보면 참으로 아주 놀랍고 통분하니, 청컨대 전 지평 이재현(李載顯)에게 빨리 원방에 찬배하는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세손(世孫)에게 공제(公除)113) 후에 개강(開講)하라고 명하였으니, 영의정 신만(申晩)의 청을 따른 것이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 공시 당상(貢市堂上)·호조 판서를 소견하고, 각궁(各宮) 및 공시(貢市)의 민전(民錢)을 상환(償還)해 주라고 명하였는데, 대개 여러 만 냥[緡]이 되었다.
6월 4일 을미
명관(命官)에게 용호장(龍虎將) 윤태연(尹泰淵)을 결장(決杖)하라고 명하였는데, 교만한 기습이 있어서였다.
이달해(李達海)를 승지로 삼았다.
약원(藥院)의 윤직(輪直)을 파하라고 명하였다.
신위(申暐)를 승지로 삼았다.
6월 5일 병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반상(頒賞)하였다.
임금이 숭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통제사(統制使) 이태상(李泰祥)을 파직하라고 명하였으니, 그가 고하도(高下島)에 별장(別將)을 설치해야 한다고 장청(狀請)한 때문이었다.
최진해(崔鎭海)를 총융사(摠戎使)로 삼았다.
임금이 《숭문당일기(崇文堂日記)》를 보고, 그때의 영상(領相) 김상로(金尙魯)를 파직하고 말하지 않은 대신(臺臣)은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으니, 중관(中官) 한채(漢采) 때의 일 때문이었다.
임금이 금년 제도(諸道)의 방물(方物)·물선(物膳)을 받아들이지 말라고 명하였으며, 이어서 외방의 궤유(饋遺)를 금하라고 하였는데, 이때에 가뭄의 재변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임금이 여러 대신을 돌아보며 이르기를,
"궤유하지 못하게 한 것은 경들의 마음을 부끄럽게 하고자 해서이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현중(李顯重)의 일은 괴이하다. 대조(大朝)에 입시한 설화(說話)를 비록 구하더라도 승지가 만약 거절하여 막았더라면 어찌 이에 이르렀겠는가? 승지(承旨)와 사관(史官)이 모두 조보(朝報)114) 의 서리(書吏)가 된 셈이다. 그 아비의 일을 조보에 쓰고, 그 아들의 일은 숨기는 것이 옳겠는가? 처음으로 길을 연 승지를 내가 사판(仕版)에서 이름을 삭거(削去)하고자 한다."
하니,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신들이 참으로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하였다.
6월 6일 정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香)을 지영(祗迎)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가뭄을 민망히 여겨 비가 오는가를 바라보았다. 헌납 박치륭(朴致隆)이 아뢰기를,
"신이 지난번 듣건대, 용안 현감(龍安縣監) 이정(李瀞)이 상소를 안고 와서 올리다가 후원(喉院)115) 에서 물리침을 당하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칼을 뽑아 정원 문 밖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다고 합니다. 엄숙하고 깨끗해야 할 궁궐 안에 이처럼 변괴의 일이 있었는데도 끝내 보고하지 않았으니, 거의 옹폐(壅蔽)하는 데 가깝습니다. 청컨대 그때의 정원에 있던 승지(承旨)는 아울러 삭직을 명하소서."
하니, 임금이 죄가 삭직에 그쳐서는 안된다는 것으로써 멀리 찬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그때의 해방(該房) 승지는 바로 김면행(金勉行)이었다. 전교하기를,
"세찬 바람이 불어 보아야 굳센 풀을 알 수가 있고, 나라가 판탕(板蕩)함을 겪어 보아야 충성스런 신하를 알 수가 있다는 것은 바로 이정을 두고 한 말이니, 대각이 판별하지 못한 것을 이정이 능히 판별했다. 이는 한(漢)나라 때의 합관요(蓋寬饒)116) 가 북궐(北闕) 아래에서 스스로 목을 찌른 일이 있는데, 이정은 비록 살아났지만 고인(古人)에게 부끄럽지 않다고 하겠다. 이제 초정(初政)을 당하여 만약 가납(嘉納)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세상을 격려하겠는가? 전 용안 현감 이정에게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특제(特除)하라."
하였다.
이세연(李世演)을 종성부(鍾城府)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는데, 까닭 없이 위패(違牌)해서였다.
정언 신익빈(申益彬)이 아뢰기를,
"전 영부사(領府事) 김상로(金尙魯)는 탐욕스럽고 불법을 저질러 여러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는데, 두루 막아서 옹폐(壅蔽)한 죄에 이르러서는 면하기가 어렵습니다. 금번 15일 반교(頒敎)로 말하더라도 사의(私義)를 돌아볼 때가 아닌데도 문외에서 머뭇거리며 한 번의 차자도 올리지 않고, 이어서 즉시 환향(還鄕)하였으니 신하의 분수를 어그러뜨렸습니다. 한광조(韓光肇)는 이미 섬으로 정배하였는데, 어찌 대신의 벌을 적게 감정(勘定)하는 데 그쳐야 하겠습니까? 삼사(三司)가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비록 첨죄(添罪)하기를 청하지는 못했으나, 신은 못내 개탄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연소한 대신(臺臣)이 강개(慷慨)하게 진달하니 가상하기는 하나 관직이 대관(大官)에 있으니, 한 대신의 소회로 처분할 수는 없다."
하였다. 신익빈이 또 아뢰기를,
"청컨대 전후하여 말 때문에 죄를 입은 언관(言官)과 전 부제학 김시찬(金時粲)을 한결같이 모두 소석(疏釋)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김시찬 이외에 누구를 말하는가?"
하매, 대답하기를,
"서형수(徐逈修)·윤시동(尹蓍東)·유당(柳戇)입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신익빈이 또 청하기를,
"특별히 서지수(徐志修)를 삭직(削職)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니, 임금이 비록 그 아뢴 바를 옳게 여겼으나,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정만순(鄭晩淳)·이인배(李仁培)가 차자를 올렸는데, 대략 이르기를,
"오직 마땅히 엄숙하고 단정히 계시면서 한결같은 마음으로 하늘을 감동시켜 마음 속으로 비가 오기를 빌면 되는 것인데, 하필 스스로 성체(聖體)를 수고롭게 하면서 금문(禁門)에서 몸소 빈 후에야 되겠습니까?"
하였는데, 차자를 들이자 임금이 체차를 명하였다.
6월 7일 무술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승지에게 이르기를,
"노천(露天)에서 밤을 새우며 몰래 단비를 빌었지만 정성이 하늘을 감동시키지 못하였으니, 이는 모두 나의 허물이다."
하였다.
임금이 남교(南郊) 석우(石隅)에 거둥하여 농사 형편을 살폈다. 대가(大駕)가 숭례문(崇禮門) 밖에 이르니, 집의(執義) 이정오(李正吾)가 연(輦) 앞에 나아가 말하기를,
"무더위가 이와 같으니, 청컨대 빨리 거가(車駕)를 돌리소서."
하니, 임금이 노하여 양재역(良才驛)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가, 오래지 않아서 그 명을 정지하였다.
6월 9일 경자
이방엽(李邦燁)을 승지로, 황인검(黃寅儉)을 이조 참판으로, 김양택(金陽澤)을 이조 판서로, 윤급(尹汲)을 홍문 제학으로, 조명채(曹命采)·송형중(宋瑩中)·이언형(李彦衡)·김시영(金時煐)을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헌납 박치륭(朴致隆), 정언 신익빈(申益彬)·곽진순(郭鎭純), 대사간 신위(申暐)가 아뢰기를,
"천극(栫棘)한 죄인 조재호(趙載浩)의 죄상은 전계(前啓)에서 논열하여 남김없이 다 갖추어졌으니, 이는 온 나라의 공공(共公)의 논의입니다. 그런데 오랫동안 유음(兪音)을 아끼시는 것은 온당하지 않으니, 속히 처분을 내리시는 것이 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곽진순이 아뢰기를,
"다시 정사를 보시는 처음에 선악(善惡)을 구별해야 상벌(賞罰)이 분명하게 되는데 구윤옥(具允鈺)이 서본(書本)을 바꾼 죄는 이영휘(李永暉)가 면전에서 오만하게 한 죄와 같습니다. 이영휘에게는 이미 천극의 율을 시행했으니, 구윤옥만이 유독 벗어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일체로 천극하는 율을 시행함이 마땅합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6월 10일 신축
임금이 우단(雩壇)에 거둥하여 기우제(祈雨祭)를 친히 행하였다.
박상덕(朴相德)을 이조 참판으로, 이득종(李得宗)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6월 11일 임인
어가가 돌아올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러 재배례(再拜禮)를 행하였다. 혜정교(惠政橋)에 이르러 금오(金吾)117) 와 추조(秋曹)118) 에서 잡아들인 가벼운 죄수를 아울러 석방하였다.
임금이 회경문(會慶門)에 나아가 나홍(羅弘)·이경좌(李景佐) 등은 절도(絶島)의 노(奴)를 삼으라고 명하였는데, 나홍 등은 금중(禁中)의 친병(親兵)을 빙자하여 어지럽힌 자로, 이때에 임금이 잡아들여 엄문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김상로(金尙魯)를 청주(淸州)에 부처(付處)하라고 명하였다. 김상로가 국정을 맡은 지 이미 오래였는데, 권력을 탐하고 이익을 좋아해 위복(威福)을 마음대로 했었다. 이때에 이르러 대각(臺閣)이 서로 잇달아서 논핵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이은(李溵)·이우(李堣)·정광한(鄭光漢)을 승지로 삼았다.
6월 12일 계묘
임금이 사직단(社稷壇)에 나아가 기우제를 친히 행하였는데, 대사헌 이득종(李得宗)이 편복(便服)차림으로 지영하니, 임금이 변방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막차(幕次)에 나아가 승지에게 어제(御製) 운한편(雲漢篇)119) 을 쓰라고 명하였다.
6월 14일 을사
임금이 태묘(太廟)에 나아가 기우제를 친히 행하였다. 세 대신(大臣)이 대명(待命)하고, 여섯 승지와 대신(臺臣)이 복합(伏閤)하여 청대하니, 임금이 노하여 연달아 미안(未安)한 전지를 내렸다. 수찬(修撰) 이재협(李在協) 역시 차자를 올려 성명(成命)을 중지하기를 청하니, 받아들인 승지를 체차하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희생(犧牲)과 제기(祭器)를 살폈다. 임금이 태묘에 들어가 예를 행하였는데, 11실(室) 준소(樽所)에 이르러 주서 홍경안(洪景顔)에게 명하여 쓰게 하기를,
"지난달 이후 지금 처음으로 전배(展拜)함은 아뢸 말이 있는 때문입니다. 사도(思悼)는 종사(宗社)와 관계되는데 어찌 감히 태묘에 들어오겠습니까?"
하였다.
6월 15일 병오
임금이 돌아올 때에 이어서 육상궁(毓祥宮)에 나아갔다가 세심정(洗心亭)을 들렀다.
이기경(李基敬)을 대사간으로, 이정보(李鼎輔)를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시민(市民)을 소견하였다.
6월 16일 정미
홍자(洪梓)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제학의 권점(圈點)을 이정보(李鼎輔)로 하였다.
정실(鄭實)을 예문 제학으로,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간 이기경이 아뢰기를,
"왕언(王言)의 체모는 간결함을 귀히 여기고 번거로운 것을 싫어하니, 이는 비단 기(氣)를 해치고 정(精)을 손상시켜서 그럴뿐만 아니라 치심(治心)과 양생(養生)은 그 실제가 하나여서입니다. 무릇 기거하고 말씀하시는 중에 ‘신(愼)’ 한 글자에 더 뜻을 두셨으면 하는 것이 신의 구구한 바람입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 허물을 내가 모르겠는가? 이는 정문 일침(頂門一針)이니, 마땅히 더욱 힘쓰겠다."
하였다. 지평 정문주(鄭文柱)가 아뢰기를,
"지난번 강필리(姜必履)가 상서하였는데, 이세효(李世孝)가 음험하다고 배척하였으니, 청컨대 이세효를 멀리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세손(世孫)의 강학(講學)이 가장 급한데, 복색(服色)을 아직 정하지 못하였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일찍이 갑진년120) 인산(因山) 전에 강관(講官)을 선정전(宣政殿) 야대청(夜對廳)에서 소견하였다."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효건(孝巾)121) 으로 궁료(宮僚)를 소견하셨습니까?"
하였고, 우의정 윤동도는 말하기를,
"나이가 어리시니 성인(成人)의 도를 책임지게 해서는 안됩니다. 비록 효건으로 소견하더라도 참으로 해가 될 것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임금이 소대(召對)하였다. 임금이 감선 철악(減膳撤樂)을 명하고 구언(求言)하는 전교를 내렸는데, 가뭄의 재변 때문이었다.
6월 17일 무신
사간 홍술해(洪述海)가 상소하여 조재호의 죄를 논핵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심각(沈殼)이 대론(大論)을 교묘히 피한 것은 이지회(李之晦) 등과 같은데 간신(諫臣)이 유독 거론하지 않았으니, 심각에게 멀리 찬배하는 율을 시행하고, 간신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세효(李世孝)를 정원으로 하여금 함문(緘問)하여 아뢰게 하라고 명하였다.
사간 홍술해가 전생 제조(典牲提調)를 파직하기를 계청하였는데 임금이 그대로 따랐으니, 태묘(太廟) 친제(親祭) 때 염소와 양의 몸통이 작았기 때문이었다.
6월 18일 기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영상과 우상이 어제 대신(臺臣)이 기우제(祈雨祭) 때 모둔(茅芚)에 거처한 관원을 파직하라고 계청하였기 때문에 인구(引咎)하고 명소(命召)122) 를 반납하고 성 밖으로 나가니, 임금이 사관(史官)을 보내어 함께 들어오게 하였다.
임금이 뚝섬[纛島]의 촌부(村婦)가 빚독촉으로 인하여 자살하기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서 해당 청(廳)으로 하여금 각별히 돌보아 주도록 명하고, 추노 징채(推奴徵債)를 풍년이 들 때까지를 한정해서 엄금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였다.
6월 19일 경술
교리 홍낙순 등이 차자를 올려 진계(陳戒)하였는데,
첫째 성궁(聖躬)을 보양(保養)하고,
둘째 더욱 군덕(君德)에 힘쓰며,
셋째 세손을 보도(輔導)하고,
넷째 뭇 신하를 포용(包容)하며,
다섯째 언로를 널리 열라는 것이었는데, 임금이 가납하였다.
집의 임희교(任希敎)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근일 합사한 계사가 실로 공공(共公)의 의논에서 나왔는데 왕장(王章)이 펴지지 않아 상하가 서로 버티고 있으니, 삼가 원하건대 빨리 처분을 내리시어 즉시 여러 신하들의 청을 윤허하소서. 지난번 말로써 죄를 입은 신하들은 이 처음 정사를 당했으니, 마땅히 한결같은 예로 탕척해 주어야 하며, 대각(臺閣)의 선출은 반드시 적임자를 뽑은 연후에야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을 책임지울 수가 있는데 의망(擬望)을 통함이 혼잡되어 실로 모람(冒濫)됨이 많습니다. 용루(庸陋)하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이익보(李益普)와 피잔(疲殘)하여 걸맞지 않은 신이복(愼爾復), 목불 식정(目不識丁)인 한집(韓鏶)에 이르러 극에 달하였으니, 신의 생각에는 모두 개정을 명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전 좌윤(左尹) 한광회(韓光會)는 지난번 관서의 비옥한 고을의 빈 자리가 생기자 일시에 차지하려는 다툼이 동당 형제(同堂兄弟) 사이에서 나와 전관(銓官)으로 하여금 수응하는데 피로하게까지 하였으니 한 세상이 놀라고 탄식하였습니다. 이름이 재신(宰臣)의 반열에 있어 먼저 경계함을 보임이 마땅하니, 견삭(譴削)하는 율을 그만둘 수가 없습니다. 주서(注書) 김화중(金和中)은 실관(實官)인 몸으로서 약원(藥院)이 모두 직숙하는 날에 한번도 사진(仕進)하지 않다가 도정(都政)을 하는 달에야 비로소 공직(供職)하여 염치와 의리가 아주 어둡고, 또 조경(躁競)의 한 단서와 관계되니, 특별히 삭판(削版)의 율을 시행하소서. 주사(籌司)123) 의 여러 당상이 접때 좌기하였는데 단지 몇 사람만 모여 일이 매우 구차하였으니, 신은 그윽이 애석하게 생각합니다.
지금 호조의 저축을 돌아보건대 이미 믿을 것이 없고, 여러 영군고(營軍庫)의 저축도 또 매우 염려되니, 마땅히 유사인 신하 및 제도의 방백(方伯)에게 신칙하여 곡식을 저축하는 방책을 깊이 강구해야 합니다. 조적(糶糴)은 변란에 대비하는 필수품(必需品)이니, 명색(名色)에 구애하지 말고 차례로 대신 받아들여 민간(民間)의 소요를 늦추어 주어 공사간에 실효를 거두어야 합니다. 진구(賑救)하는 책임은 오로지 제대로 된 수령을 얻는 데 달려 있습니다. 대정(大政)이 가까워서 더욱 잘 선택함이 마땅하니, 전조(銓曹)에 신칙(申飭)해서 반드시 염근(廉謹)하고 법을 지키며 성적(聲績)이 이미 드러난 사람을 상격(常格)에 구애받지 말고 자리 수에 따라 차출해 보내면 진정(賑政)을 책임지울 수가 있고, 이루는 효과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전 한산 군수(韓山郡守) 심해(沈澥)는 평소 청렴하다는 명성이 부족하고 오로지 윗사람을 받들기에만 뜻을 두어 일찍이 문의(文義)를 다스릴 때에는 이웃 고을의 전토를 널리 점유하고 같은 동네에 큰 집을 지었으며, 본군으로 승직되어서는 겸관(兼官)의 위엄을 빙자하여 강제로 백성들을 부려 제도(制度)를 교묘하고 화려하게 꾸몄습니다. 비록 이번 전최(殿最)로 말하더라도 역시 원망과 비방을 많이 받고 있음을 볼 수가 있으니, 마땅히 삭판의 율을 시행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였는데, 세 대신(臺臣)의 일은 따르지 않았고, 한광회(韓光會)는 파직하며, 심해는 잡아다 신문하여 처리하도록 명하고, 김화중(金和中)의 일은 윤허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결(疏決)을 행하여 심익성(沈益聖)·정방(鄭枋)·김한로(金漢老)·정창순(鄭昌順)·이해중(李海重)·이세연(李世演)·이익원(李翼元)·조중회(趙重晦)를 석방하도록 명하였는데, 형조의 살옥(殺獄)에 전활(全活)된 자가 많았다.
대사헌 남태회(南泰會)가 아뢰기를,
"청컨대 전 지평 정문주(鄭文柱)를 영원히 대망(臺望)에서 발거(拔去)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감(末減)하여 삭직하였다. 또 성문(城門)을 잘못 닫은 선전관을 삭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말 때문에 죄를 받은 대신(臺臣)을 석방하고, 서지수(徐志修)를 서용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단지 서지수만 서용하라고 하였다. 대사간 이기경(李基敬)이 아뢰기를,
"서유량(徐有良)이 연중(筵中)에서 조재호(趙載浩)를 기려서 일이 매우 놀라우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윤광소(尹光紹)는 사나운 사람으로서 스스로 폐고(廢錮)의 죄를 범하였고 성문을 출입하여 발자취가 음비(陰秘)하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또 아뢰기를,
"엄홍복(嚴弘福)이 경폐(徑斃)되었는데 유채(柳綵)와 남씨(南氏) 성을 가진 사람 역시 조재호와 친밀하여 엄홍복이 들어가면 두 사람이 모두 일어나 피했다고 합니다. 이는 반드시 엄홍복과 조재호 사이에 은밀한 뜻이 있어서 그런 것이니, 청컨대 남·유 두 사람을 국청(鞫廳)에 잡아들여 엄히 물으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숙(趙)은 서장관(書狀官)으로서 남의 부탁을 받고 연로에서 폐단을 일으켰으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고, 또 청하기를,
"이영휘(李永暉)의 위리(圍籬)를 철폐하라는 일을 다시 중지하소서."
하니, 모두 따랐다.
6월 20일 신해
조엄(趙曮)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정언 윤면동(尹冕東)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천극(栫棘)한 죄인 조재호는 죽임에 마땅하고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니, 전후하여 합사로 청한 것이 이미 다 갖추어져 있습니다. 그의 범죄는 한 마디로 단정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그가 체결하여 음모(陰謀)를 꾸민 것은 비록 진신(搢紳)을 죽이는 데 있었지만 그가 일념으로 경영한 것을 생각하면 어찌 오로지 시원스런 마음으로 살육하는 데 그치려 했겠습니까? 환온(桓溫)124) 의 역절(逆節)은 왕사(王謝)125) 를 죽이고자 한 날에 이미 드러났고, 주전충(朱全忠)126) 의 역모는 참으로 청류(淸流)를 모조리 죽인 후에 이루어졌는데, 조재호의 이번 계획만이 어찌 유독 역절(逆節)·역모(逆謀)가 드러난 것이 아니겠습니까?
예로부터 지금까지 난역의 무리는 수단이 동일하였으니, 아! 그 독이 참혹하였습니다. 더군다나 그 치밀하게 서로 체결(締結)하고 억측(臆測)한 자취는 참으로 하늘을 보며 땅을 긋고 왕실(王室)을 엿본 것으로 춘추(春秋)의 장심(將心)127) 이라는 것이며, 한(漢)나라 법의 부도(不道)128) 라는 것입니다. 신의 생각에는 빨리 삼사의 논계를 윤허하시어 쾌히 해당되는 율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전 지평 이세효(李世孝)가 헌신(憲臣) 강필리(姜必履)를 논척한 일은 한 세대의 공분(公憤)이 된 지 오래입니다. 헌신(憲臣)의 기묘년129) 의 한 소장은 실로 나라를 위하는 순수한 정성에서 나온 것인데, 오직 저 이세효는 본래 취미(臭味)가 서로 같아서 반세(半世) 동안 친하게 지내다가 한번 그 글이 나온 이후부터 공연히 미워하여 개정(改正)하라고 배척하는 말까지 꺼냈으니, 어찌 크게 괴이(怪異)함이 아닙니까? 더군다나 이세효가 논척(論斥)하는 즈음에 이미 앞서서 한 종류의 물의가 있었으니, 헌신을 흉인이라 지목하고, 헌신을 화태(禍胎)라고 지목하여 혹 절교하기도 하고, 혹은 혼인을 사절하기도 하여 나라 안에 말이 흉흉하였는데 이세효의 논의가 과연 나왔으니, 그의 마음에 있는 바는 길을 가는 사람도 모두 알고 있습니다. 오직 성상께서만 일전에 대언(臺言)을 비로소 들으셨는데, 대신(臺臣)인 자가 역시 명백하게 진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비록 일월처럼 밝음으로도 밝히지 못한 곳이 있어서 오비 이락(烏飛梨落)으로만 아시게 되었고, 또 단지 그 위인을 논한 것으로 아시어 갑자기 멀리 찬배하라는 명을 중지하고 마침내 함문(緘問)하라고 하교하셨으니, 애석함을 금할 수 있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이세효에게 우선 개정하는 율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전 장령 윤재겸(尹在謙)의 지난해의 한 글은 충성이 고금에 뛰어나고 곧은 소리가 조야에 떨쳐졌으니, 생각건대 백수(白首)인 그가 나라를 걱정하여 밤 중에 상소문을 쓴 뜻이 강개하고 우분한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일신과 많은 가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생사를 같이 보며, 화복을 모두 잊은 후에야 마침내 이런 일을 할 수가 있는 것이지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사(私)를 계교(計較)해서 그랬겠습니까? 그러나 전번의 하교에 협잡한 것으로 의심하시니, 온 나라 사람 그 누군들 탄식하고 한탄하면서 그 정상을 슬퍼하지 않았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빨리 개석(開釋)하여 성상의 마음을 명백히 보이시어 아름답게 장려하여 한 세상을 용동(聳動)하게 하심이 마땅하다고 여겨집니다. 어제 삼사에서 번갈아가며 청하여, 죄를 지어 귀양가 있는 여러 사람들이 은유(恩宥)를 입었는데, 유독 우악(優渥)하게 널리 탕척해 주는 것이 막혀 영원히 성명(聖明)의 세대에 버려지고 있습니다. 궁하였다가 통하는 왕복(往復)하는 이치를 지금에 보이지 않는다면 어느 때에 보이겠습까? 참으로 마땅히 시원하게 씻어주는 은전을 베풀어, 함유(涵濡)해 주는 은택을 입도록 해야 합니다.
일전에 위패(違牌)한 여러 대신(臺臣) 가운데 두 장헌(掌憲)의 정세는 헌장(憲長)과 당초부터 다툼이 없었는데 들은즉 그때에 승지가 앙대하는 말이, 사실을 생각하지 않고 자기 마음에 따라 구별하여 유독 헌장의 처지만 위했을 뿐, 두 대간은 까닭 없이 위패한 가운데 혼동시켜 넣도록 맡겨 버렸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전 장령 정운유(鄭運維)·황간(黃榦)을 삭직하라는 명도 역시 마땅히 환수해야 하며, 해당 승지에게는 빨리 파하여 서용하지 않는 율을 시행해야 한다고 여겨집니다."
하였는데,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집의 임희교(任希敎)가 전계(傳啓)하려는 즈음에 소매 속에 계초(啓草)가 없기 때문에 옥당(玉堂) 홍낙순(洪樂純)이 파직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따랐는데, 대개 임희교가 꾀를 써서 대각(臺閣)을 교묘히 피한 때문이었다.
홍준해(洪準海)를 승지(承旨)로 삼았다.
6월 21일 임자
남태회(南泰會)를 승지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경상 감사 김상철(金尙喆)이 입시하고, 삼사가 뒤따라 입시할 때에 헌납 이흥종(李興宗)이 아뢰기를,
"평양 서윤(平壤庶尹) 정극순(鄭克淳)은 조태구(趙泰耉)의 사위로서 전임지인 회덕에 있을 때에 그 장인의 묘소에 가서 절하기를 마치 소분(掃墳)하는 의식처럼 하여 조금도 거리낌이 없었으니, 세변(世變)에 관계됩니다. 또 오랫동안 기름진 고을에 재임하면서 오로지 불법(不法)만을 일삼았으니, 이런 사람은 엄히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평양 서윤 정극순을 멀리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찬배에 그쳐서는 안되니, 잡아다 신문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궁성을 호위할 때에 비록 한사(閑司)·만직(漫職)이라 하더라도 잠시도 자리에서 뜨지 못하였습니다. 바야흐로 약원(藥院)의 직임을 띠고 있으면서 보호하는 중임을 생각하지 않고 생기(省記)130) 한 후에 마음대로 금문(禁門)을 나가 대명소(待命所)에서 조재호(趙載浩)를 만났으니 거조가 괴이해 듣기에 놀라웠습니다. 나라의 체통에 있어 그대로 두고 논하지 않아서는 안되니, 청컨대 호조 판서 김상복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함경 감사 조명정(趙明鼎)은 일찍이 호서에 재임하면서 탐오한 일을 많이 저질렀고, 저장중인 군향미(軍餉米)를 판매(販賣)·취리(取利)하여 심지어 찬적(竄謫)의 율을 입었습니다. 현임에 있게 되어서도 또 청렴하다는 소리가 부족하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사람을 암매(暗昧)한 가운데 두어서는 안되니, 의금부에 내려 추고(推考)하라."
하였다. 장령 김시구(金蓍耉)가 아뢰기를,
"지난번 건명문에 친림하시어 노문(勞問)할 때에 금군 별장 윤태연(尹泰淵)은 무변(武弁)의 신분으로서 편할 대로 집에 누워 있었으며, 진하(陳賀)하기에 미쳐서는 병을 일컬어 참석하지 않고 곧장 성외(城外)로 향하여 사사로이 문후(問候)하는 걸음을 했으니, 청컨대 사판에서 영원히 삭제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듣자니 매우 놀랍다.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6월 22일 계축
좌의정 홍봉한이 차자를 올려, 그가 김상복(金相福)을 권하여 조재호(趙載浩)가 대명하고 있는 곳에 보낸 일을 열거하니,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여 사관(史官)과 함께 들어오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유채(柳綵)·남경용(南景容)을 친국하니, 차례로 취복(就服)하였는데, 서판장(書判狀)에 ‘요언(妖言)으로 대중을 미혹시켜 함께 부도죄(不道罪)를 범하였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여러 차례 유채와 남경용 등을 신문하니, 남경용이 말하기를,
"조재호가 항상 말하기를, ‘한쪽 사람들이 모두 소조(小朝)에 불충하였으나 나는 동궁을 보호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하고, 유채는 말하기를,
"조재호가 항상 말하기를, ‘동궁을 보호한다.’고 하기에 제 마음도 그러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남인(南人)이 7, 80년 굶주렸으니, 하늘의 이치로 보아 반드시 남인이 득지(得志)할 것이요, 노론(老論)은 반드시 그들 손에 죽을 것이다.’라고 하고, 또 ‘세도(世道)를 조제(調劑)하고자 하나 할 수 없기 때문에 세상을 개탄하며 이곳에 왔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정광충(鄭光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천극(栫棘)한 죄인 조재호(趙載浩)를 사사(賜死)하였다. 임금이 승지 정광한(鄭光漢)에게 전지를 쓰게 하기를,
"한번 엄홍복(嚴弘福)의 일이 드러난 후로부터, 조재호의 죄상이 이미 탄로났었는데 이번 두 죄수의 공초와는 다름이 있었다. 그의 천극은 의리를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고, 또 장물(贓物)도 없어 합사의 청을 윤허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더욱 남김없이 탄로가 되었다. 아! 조재호는 누구의 아들인가? 임금을 잊고 아비를 배반하여 이런 기슬(蟣虱) 같은 무리들과 나랏일을 들추어 냈으니 이미 무상하기 짝이 없다. 그리고 몰래 기사년131) 의 여당(餘黨)과 합쳐 감히 지난해에 했던 일을 서술했으니, 더욱 음참하다. 아! 무신년132) 과 을해년133) 의 일을 양성(釀成)한 그 근본은 그에게 있는데 그가 감히 무슨 마음으로 그 아비의 공훈(功勳)을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이런 무리들과 더불어 체결하여 이런 음험한 모의를 하였는가? 비록 기사년의 여당은 아니지만 지위가 삼사(三事)의 반열에 있는 자가 이처럼 방자하니, 할 말이 없다. 더군다나 그 말의 불측함이 이처럼 극에 이르렀으니, 이런 일을 차마 한다면 무슨 일을 못하겠는가? 또 ‘장차 기회를 탈 것이다.’라는 등의 말을 어찌 오늘날 신하로서 차마 할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일각이라도 천지 사이에서 먹고 숨쉬며 살게 해서는 안되기 때문에 승선(承宣)을 불러서 하교하고자 한 것이다. 반나절 동안 소차(小次)에 머뭇거리다가 불러 쓰게 한 것은 음참한 조재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 아비의 뜻을 생각해서이다. 을해년 역적 심악(沈)의 일이 있은 후, 조재호가 나에게 말하기를, ‘이제는 핵심(核心)을 제거했다.’라고 하였었다. 심악은 관직이 한 수령에 불과했는데도 오히려 그러했는데 더군다나 조재호이겠는가? 하늘의 도(道)가 밝다 하겠고, 하늘의 그물이 넓음을 볼 수 있다. 부동(符同)하였던 하찮은 무리들은 모두 법을 바루었으니 조재호에게도 해당하는 율을 시행함이 마땅하다. 재위(在位)한 지 30여 년에 처음 이런 일을 판결하게 되었는데, 한갓 옛사람이 ‘반수(盤水)에 칼을 가한다.’라고 한 것만이 아니라 국조(國朝)에서도 많이 있는 일이 아니다. 심기원(沈器遠)·김자점(金自點)과 차이가 없지 않으니, 국조에서 상행(常行)하는 법을 따름이 마땅하다. 해조로 하여금 도사(都事)를 보내 배도(倍道)하여 그 곳에서 즉시 특별히 사사(賜死)하라."
하였다.
전 목사(牧使) 김유행(金由行)의 직(職)을 추삭(追削)하였다. 남경용(南景容)이 공초하기를,
"김유행이 죽을 때에 조재호에게 편지를 썼는데 이르기를, ‘장래에 대감(大監)이 반드시 당국(當國)하게 될 것이니, 여러 아들을 부탁한다.’라고 하였는데, 조재호가 이를 매양 남들에게 자랑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이 때문에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다.
6월 23일 갑인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조명채(曹命采)·박창윤(朴昌潤)·이만회(李萬恢) 등을 친문하였는데, 모두 남경용의 초사에서 나온 자들이다. 조명채가 공초하기를,
"별달리 수작한 바는 없고, 신이 조정에 출입하고 있었기 때문에 말을 전파할까 염려해서 말을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는 조재호가 기(氣)가 많기 때문에 수작하지 않은 것이냐?"
하니, 공초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매, 특방(特放)을 명하였다. 박창윤은 수작한 말을 직고(直告)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곧고 정미하다."
하고, 특방을 명하였다. 이만회는 공초하기를,
"작년 2월에 춘천(春川)에 가서 조재호를 만나 보고, 부사(府使) 심관(沈鑧)을 보고 들어가 하룻밤 자고 왔으니, 물어 보면 아실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심관에게 함문(緘問)하도록 명하고 전교하기를,
"네 초사가 과연 옳다."
하고, 특방을 명하였다.
죄인 유채(柳綵)와 남경용(南景容)을 정법(正法)하였다.
6월 24일 을묘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도정(都政)을 행하여 안윤행(安允行)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지평 임해(任瑎)가 아뢰기를,
"부처(付處)한 죄인 한광조(韓光肇)는 조재호의 가까운 인척으로서 복정(復政)의 진하 때 멋대로 집에 있으면서 병을 핑계하고 참석하지 않았으니, 청컨대 절도(絶島)에 위리 안치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또 아뢰기를,
"조재호의 부범(負犯)이 남김없이 탄로나서 온 조정의 신하들이 다 토벌하기를 청하였으나 장지항(張志恒)만은 명백하게 앙대(仰對)하지 않았으니, 놀라운 정적(情跡)이 뚜렷하였습니다. 청컨대 삭출한 죄인 장지항을 먼 곳으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정언 김상집(金相集)이 아뢰기를,
"심관(沈鑧)·김상숙(金相肅)·유한길(兪漢吉)은 이미 죄인의 초사에서 나왔으니, 전연 견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심관·김상숙·유한길을 파직하소서. 전 승지 이달해(李達海)는 다 마치기 전에 원례(院例)를 따르지 않고 억지로 물러가고자 하여 마침내 진장(陳章)하고 지레 먼저 나왔으니, 그의 교만하고 이기기를 좋아하는 습성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됩니다. 청컨대 이달해를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따랐다.
6월 25일 병진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목중도(睦重道)·목조술(睦祖述)·황면(黃冕)·박수유(朴垂裕)를 친국하니, 차례로 취복(就服)하였다. 목중도·박수유는 대역 부도로 판결문(判決文)을 쓰고, 목조술은 요언(妖言)으로 대중을 미혹시켜 부도죄를 함께 범한 것으로 지만(遲晩)하였으며, 황면 만은 불복하였다. 박수유에게 묻기를,
"너는 박징빈(朴徵賓)의 아들로서 김일경(金一鏡)의 당처럼 대역(大逆)으로 지만하고자 하는가?"
하니, 박수유가 공초하기를,
"마땅히 하겠습니다."
하였다. 묻기를,
"너와 마음을 같이 한 자는 누구인가?"
하니, 박수유가 심발(沈墢)과 심관(沈鑧)을 끌어들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만약 남을 무함하면 마땅히 네 삼족(三族)을 멸하겠다."
하니, 박수유가 공초하기를,
"벼슬을 하고자 하였으나 두 사람이 막았기 때문에 과연 무함했습니다."
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아뢰기를,
"청컨대 조재호의 전 심복(心服)인 전 현감(縣監) 안이(安履)와 전 만호(萬戶) 강위열(姜渭說)을 모두 절도에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대사간 안윤행(安允行)이 아뢰기를,
"청컨대 이만회를 아주 먼 변방으로 찬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죄인 목중도와 목조술을 정법(正法)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황해 감사로 삼았다.
6월 26일 정사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정언 정경서(鄭景瑞)가 아뢰기를,
"도배(島配)한 죄인 윤광소(尹光紹)는 성품이 본디 사납고 독하며, 행실이 또 교힐(巧黠)합니다. 엄홍복의 문서 가운데서 윤광소와 왕래한 편지를 난만하게 찾아냈는데, 치밀하게 서로 연관된 정상이 분명하여 감출 수가 없습니다. 청컨대 윤광소에게 빨리 천극(栫棘)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멀리 찬배 한 죄인 남옥(南玉)은 역적 유채(柳綵)의 사위이며 역적 엄홍복의 친구입니다. 역적 유채에게 양육(養育)을 받았고 역적 엄홍복에게 물들었으니, 그 아주 흉한 정절(情節)과 음모(陰謀)·비계(秘計)를 결코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청컨대 남옥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 추국하여 엄문해 실정을 알아내기를 기하소서."
하였는데,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부교리 홍수보(洪秀輔)가 아뢰기를,
"신이 바야흐로 문랑(問郞)으로 있는데, 조유진(趙維鎭)의 명자(名字)가 여러 차례 역적 박수유의 초사에서 긴하게 나왔으나, 성상께서 포졸을 보내어 잡아와서 캐어 물은 후에 처리해야 한다고 전교하셨습니다. 옥(獄)의 체모의 차례로 헤아린다면 참으로 마땅하지만 만약 옥사로 논하자면 조유진은 이미 탈공(脫空)한 일이 없으니 마침내는 마땅히 물어야 할 사람입니다. 국청이 비록 엄비(嚴秘)하다고는 할 수 있으나 포졸을 보내 죄인을 잡아오는 사이에 많은 날짜가 걸려서 만일 조유진으로 하여금 이런 소식을 들어 미리 가다듬고 상량(商量)하게 한다면 옥정(獄情)을 엄히 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신의 뜻에는 조유진을 우선 잡아다 가두어 죄인이 오기를 기다리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새로 제수한 수령을 소견하였다.
죄인 박수유(朴垂裕)를 정법하였다.
6월 28일 기미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황해 감사의 장계를 보고서 명하기를,
"전 황주 목사(黃州牧使) 임준(任㻐)을 해부로 하여금 잡아다 처리하고, 강령 현감(康翎縣監) 이해문(李海文)을 해조로 하여금 승서(陞敍)하여 조용(調用)하게 하라."
하였다.
임금이 제릉 참봉(齊陵參奉) 안형(安衡)을 소견하였다. 이보다 앞서 안형이 성균관 유생으로서 상서하여 사도 세자(思悼世子)를 간하였기 때문에 임금이 특명하여 참봉을 제수하였다.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조유진(趙維鎭)·이현섭(李賢涉)을 친문하였는데, 이들은 역적 박수유의 초사에서 나온 자이다. 이현섭이 이어서 아뢰기를,
"조유진이 동궁의 수찰(手札)을 받아 춘천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조유진에게 물었다. 조유진이 공초하기를,
"대신이 누워 있으면서 오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동궁이 미안한 하교를 내리셔서 그 때의 춘방 이창임(李昌任)이 거취(去就)를 묻는 말을 했기 때문에 겁이 나서 찾아가 보고 나오게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매, 임금이 이현섭에게 물으니, 공초하기를,
"조내진(趙來鎭) 역시 ‘조유진이 편지를 받아가지고 갔다.’고 말하였습니다."
하자, 조내진과 이현섭을 면질(面質)하라고 명하였다. 이현섭이 말하기를,
"너에게서 이 말이 나온 것을 목만중(睦萬中) 역시 알고 있다."
하니, 임금이 포졸을 보내어 목만중을 잡아다 이현섭과 면질하게 하였다. 이현섭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조내진의 말을 하면서 ‘이처럼 두려운 사람이니 교제해서는 안된다.’라고 하지 않았는가?"
하니, 목만중이 말하기를,
"과연 말하였다."
하였다. 목만중과 조내진을 면질시키니, 목만중이 말하기를,
"네가 어찌 감히 장전(帳殿)에서 속이려 드는가?"
하니, 여러 대신이 말하기를,
"목만중이 조내진에게서 들은 것이 확실합니다."
하니, 임금이 조내진을 엄히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조내진이 공초하기를,
"조유진이 춘천에 갈 때 집안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기 때문에 집 사람들이 와서 찾았습니다. 그 후에 듣건대 춘천에 갔었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조유진에게 물으니, 승복(承服)하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이창임(李昌任)이 이 일을 알았고, 이미(李瀰)·이한(李瀚) 역시 알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이한을 미워하기 때문에 시종 그렇게 헐뜯는 것이다."
하고, 다시 조내진에게 물었으나, 조내진이 불복하였다.
임금이 제주의 공마(貢馬)를 금년에 한하여 받지 말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경신
임금이 숭현문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禮)를 행하였다.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죄인 조유진을 친국하였다. 조내진을 삼척부(三陟府)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조내진이 공초하기를,
"과연 장난말로 언급한 바가 있었습니다."
하니, 임금이 전석(全釋)시키고자 하였으나, 삼사에서 간쟁하여 마침내 이런 명이 있게 된 것이었다. 이현섭은 범상 부도(犯上不道)로 판장(判狀)에 쓰라고 명하였다. 임금이 처음에는 용서하고자 하였으나 이미 역적 박수유의 초사에서 나왔고, 또 이는 이성지(李聖至)의 아들이기 때문에 임금이 형신을 가하여 참작하여 처리하고자 하였는데, 이현섭이 연달아 참형(慘刑)이라는 등의 말을 해서 대신과 삼사의 여러 신하들이 번갈아 법대로 처치하기를 청하여 마침내 판장(判狀)을 명하게 된 것이다. 임금이 조유진(趙維鎭)을 대정현(大靜縣)에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설령 서찰을 받은 일이 있다 하더라도 당초 정법(正法)할 죄가 아닙니다."
하니, 임금이 마침내 이런 명을 내린 것이다. 임금이 목만중을 이성현(利城縣)으로 정배하라고 명하였다.
윤득우(尹得雨)를 동래 부사(東萊府使)로 삼았다.
죄인 이현섭을 정법하였다.
대사간 안윤행(安允行)이 아뢰기를,
"청컨대 이현섭의 형 이현급(李賢伋)을 절도로 정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조명채(曹命采)를 삭출하고, 이창임(李昌任)은 삭직하라고 명하였다.
대사헌 정광충(鄭光忠)이 아뢰기를,
"청컨대 도배(島配)한 죄인 조유진(趙維鎭)을 다시 더 엄히 신문하여 쾌히 왕법을 바루소서."
하고, 대사간 안윤행은 아뢰기를,
"청컨대 도배한 죄인 조유진을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 추국하여 실정을 알아내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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