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0권, 영조 38년 1762년 7월

싸라리리 2025. 10. 9. 1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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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신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신만(申晩)이 말하기를,
"지금은 옥사가 일어난 뒤이니 마땅히 진정시키는 방도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였고,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함께 참여한 형적이 훤한 자는 진실로 죄주는 것이 마땅하지만, 단지 서로 친하게 지낸 사람이라면 묻지 않는 것이 마땅합니다. 어찌 구별하는 방도가 없을 수 있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옳다’ 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옛날에 왕돈(王敦)과 왕도(王導)134)  나 유하혜(柳下惠)와 도척(盜跖)135)  의 관계도 있었는데, 더구나 친구는 말해 무엇하겠는가? 일찍이 전에 서로 친했다면 사세가 당연한 것이고 혹 연인가(連姻家)인 경우에 어찌 누(累)가 될 수 있겠는가? 이번 조재호(趙載浩)의 불측한 말은 미친 사람이 사람을 만나기만 하면 말하여 전혀 거리낌없이 한 것이니, 조재호와 더불어 같은 마음을 품고 있는 자가 아닌데 한때의 소문으로써 조재호의 일당으로 몰아붙인다면, 누가 마음대로 손발을 놀리겠는가?"
하였다.

 

평안 감사가 장문하기를,
"이달 초9일 선사진(宣沙鎭)에 우레하고 비가 내리며 벼락이 내리쳐 진의 동쪽 야차동(夜叉洞)에 불이 옮겨붙어 화약고까지 번져 화약과 유황(硫黃)을 모두 태웠습니다."
하였다.

 

임금이 어제의 전교에 의거하여 조유진(趙維鎭)을 다시 참작하여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양사 【대사헌 정광충(鄭光忠), 대사간 안윤행(安允行)이다.】 에서 조유진을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령을 환수할 것을 청하고, 이어서 왕부(王府)에 명하여 엄히 신문하여 승복을 받아내고 왕법을 바루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7월 2일 임술

정언(正言) 홍응보(洪應輔)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윤광찬(尹光纘)·조재민(趙載敏)의 당초 부범(負犯)은 이미 용서할 수 없는 죄인데, 그 뒤로 형량을 감해 준 것은 지나치게 관대한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윤광찬·조재민은 전대로 절도(絶島)에 천극(栫棘)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또 뜬소문으로 사람들을 미혹하게 하는 것은 그 근본이 조유진에게 있는데, 참작하여 처리하라는 명은 뜻 밖에 내리신 것입니다. 신은 생각건대, 빨리 양사의 청을 윤허해야 합니다."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批答)을 내리고, 윤광찬·조재민·조유진의 일은 모두 따르지 않았다.

 

간원 【정언 유선양(柳善養)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갑빈(趙甲彬)은 조태억(趙泰億)의 아들로서 그 아비의 직첩을 환수한 뒤에 진실로 마땅히 자취를 숨기고 머리를 수그리고 있어야 하는데도 조금도 거리끼거나 두려워함이 없으며, 윤광소(尹光紹)와 더불어 왕래하며 친밀하게 지낸다는 설이 떠들썩하여 은연중에 폐고된 족속(族屬)들의 영수가 되었습니다. 조재호의 흉계는 오로지 빨리 폐고된 족속들을 수습하려는 것이었는데, 엄홍복(嚴弘福)과 결탁했던 윤광소는 이미 멀리 찬배되는 율을 받았으니, 윤광소와 친밀했던 조갑빈을 어찌 연곡(輦轂) 가까이에 두어 바야흐로 끝없는 근심을 불러들이십니까? 청컨대 조갑빈을 변방에 멀리 찬배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윤허하지 않고, 그 당습(黨習)을 의심하고 하교하여 엄히 책(責)하였다.

 

7월 3일 계해

이우(李堣)를 승지로, 이사관(李思觀)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소대(召對)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도당록(都堂錄)136)  을 행하여 강필리(姜必履) 등 9인을 뽑았다.

 

7월 4일 갑자

헌부 【지평 이적보(李迪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통제사 김성우(金聖遇)는 평소에 탐학하다는 소문이 나있고 윗사람에게 아첨함으로써 발신(發身)하여 견책받아 유배된 지 얼마 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외람되게 이 직책을 받았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단지 체차만 하도록 하라."
하였다.

 

7월 5일 을축

임금이 각사에 묘사 유파(卯仕酉罷)137)  의 법을 거듭 밝히도록 명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응교(應敎) 이미(李瀰)가 어제 유선양(柳善養)에게 처분을 내렸을 때의 전교를 환수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장령(掌令) 김양심(金養心)이 전계를 거듭 아뢰고, 또 황경원(黃景源)을 앞으로 문임(文任)의 망(望)에서 개정(改正)할 것을 계청하였으나, 모두 윤허하지 않았다. 지평(持平) 이적보(李迪輔)가 아뢰기를,
"황경원은 지금 파직하여 삭탈한 가운데 있으니, 문임의 망을 정지시키는 것은 논할 바가 못됩니다. 청컨대 김양심을 파직하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임금이 제주의 표류한 사람을 부르라 명하여 쌀과 포를 하사하였다.

 

김상복(金相福)을 이조 판서로, 김치인(金致仁)을 호조 판서로, 심수(沈鏽)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6일 병인

임금이 경현당 월대(月臺)에 나아가 친히 향(香)을 전하고, 태묘(太廟)에 나아가 가을 전알(展謁)을 행하였다. 이어서 영희전(永禧殿)에 나아가 전알하고 저경궁(儲慶宮)에 들러 전배(展拜)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의안군(義安君)의 집에 치제하도록 하였다.

 

7월 7일 정묘

밤에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흰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헌부 【지평 이진항(李鎭恒)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김양심을 대간(臺諫)의 망(望)에서 영구히 간삭(刊削)하기를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그리고 이진항이 협잡(挾雜)으로 계사(啓辭)를 꾸몄다 하여 삭직하도록 명하였다.

 

윤시동(尹蓍東)을 홍문록(弘文錄)138)  에서 삭제하도록 명하였으니, 홍봉한(洪鳳漢)의 아룀으로 인한 것인데, 을해년139)  에 구두(口頭) 주청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또 석강을 행하였다.

 

심수(沈鏽)를 대사헌으로, 홍약수(洪若水)를 회령 부사로 삼았다.

 

7월 8일 무진

헌부 【지평 이적보(李迪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지난번 국청(鞫廳) 때에 포교(捕校)가 민가에 난입하여 유부녀를 강간하였습니다. 청컨대 추조(秋曹)로 하여금 율에 따라 정죄하고 포장(捕將)은 검칙(檢飭)하지 못한 잘못이 있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송형중(宋瑩中)을 승지로 삼았다.

 

7월 9일 기사

임금이 미령(靡寧)하시니, 약방(藥房)에서 여러 의원을 데리고 하루에 세 번 진찰하였다.

 

임금이 사현합(思賢閤)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入診)하였다. 유신(儒臣)에게 명하여 《한사(漢史)》를 읽게 하였다.

 

7월 10일 경오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니, 약방에서 입진하였다. 유신을 불러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읽게 하였다. 저녁에 다시 입진하였다. 승지에게 명하여 《숙흥야매잠(夙興夜寐箴)》을 읽게 하였다. 임금이 금년에 경외에 혼기를 넘긴 자가 얼마나 되는지 곧바로 문계(問啓)할 것을 명하였다.

 

7월 11일 신미

임금이 사현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임금이 한광조(韓光肇)를 도배(島配)한 것이 지나치다 하여 홍산(鴻山)에 정배(定配)하라고 명하였다.

 

양사에서 조유진(趙維鎭)에 관한 전계를 정지하였는데, 그가 물고(物故)되었기 때문이었다.

 

지평 곽진순(郭鎭純)이 상소하기를,
"지금 종사(宗社)의 계책은 단지 전하의 몸을 보호하는 데 있으니, 전하의 몸은 스스로 가볍게 여기는 것이 용납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더위와 비와 큰 추위에 마음 내키는 대로 하시어 쇠약해지는 기운을 스스로 절제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비록 여러 가지 정사(政事)가 있다 해도 진실로 크고 긴요한 일이 아니라면 마땅히 묘당(廟堂)에 맡기어 그 성과와 효험을 책임지게 하신다면, 정신과 기운을 적게 쓸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날의 모든 일은 오직 세손을 보양(輔養)하는 데 있으니, 단지 산림(山林)을 초치(招致)할 뿐 아니라 궁료(宮僚)를 가려 뽑아 아침 저녁으로 가르침의 방도를 다하고 전하께서도 일에 따라 인도하여 주신다면, 억만년의 무궁한 아름다움이 실로 이에 기본할 것입니다.
지금 조정을 돌아보면 시정(市井)의 습관을 따르는 것이 많아 사대부의 풍도를 볼 수 없습니다. 분경(奔競)이 세상에 가득하고 탐오함이 풍속이 되어 염치가 어떠한 것인지를 다시 알지 못하니, 어찌 예의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함경 감사 조영진(趙榮進)은 음관(蔭官) 출신으로 본래 비루하다는 소리가 많았는데, 갑자기 은대(銀臺)에 들어갔지만 멍청함을 드러냈고, 잠깐 서쪽의 방백(方伯)을 맡겨보았으나 또한 염치가 부족했습니다. 북도의 감영은 중요한 곳인데 어찌 또 이런 사람에게 맡길 필요가 있겠습니까? 생각건대 마땅히 개차(改差)해야 합니다. 옥당(玉堂)은 청현직(淸顯職)이니, 반드시 문학(文學)에 바탕이 있고 공의(公議)가 허락한 뒤에라야 가히 이 선발에 응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심욱지(沈勗之)는 평소 문학이 부족하고 인망도 얻지 못했으니, 생각건대 개정해야 합니다.
또 무부(武夫)에 대해 논할 것 같으면 재물을 탐내지 않는 자가 누가 있겠습니까마는, 그 중 더욱 심한 자들이 반드시 좋은 관직을 얻게 됩니다. 예컨대 이희원(李禧遠)은 대간의 탄핵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안연히 부유(富裕)한 고을을 맡아 거의 임기가 다 찼으며, 이관상(李觀祥)은 남곤(南閫)으로 있을 때 무고한 기녀(妓女)를 때려 죽이고 진주(晉州)의 부자의 돈을 겁탈했다는 소문이 낭자하여 사람들이 모두 욕하고 있는데, 겨우 남곤(南閫)에서 체차되어 바로 북병사(北兵使)의 임무가 주어졌으니, 신은 그윽이 통탄하게 여깁니다. 이희원은 마땅히 삭탈 파직의 율을 시행하시고, 이관상은 빨리 조사할 것을 명하시어 중률(重律)로써 처단하소서."
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리고, 조영진·심욱지·이희원의 일은 따르지 않았으며, 이관상의 일은 바로 해부(該府)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여 구초(口招)140)  를 받아서 등대(登對)하여 아뢰게 하였다.

 

사예(司藝) 장한봉(張翰鳳)이 상소하여, 먼저 임금의 몸을 보전할 것을 진계하고, 또 아뢰기를,
"세손을 가르치는 좌우 익선(翊善)과 찬독(贊讀)은 또한 산림으로서 차출하시고 상번·하번으로 나누어 아침 저녁으로 권강(勸講)하게 하소서. 그리고 궁인과 내시는 또한 나이 40이상의 온순하고 과묵한 사람을 뽑아서 우제(虞祭)가 끝날 때를 기다려 매일 신료들을 접하게 하고 때맞춰 보양하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가납(嘉納)하고, 특별히 표리(表裏)141)  를 하사하였다.

 

7월 12일 임신

헌부 【장령 이운해(李運海)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민가의 다리[髢髻]를 금할 것을 계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경조(京兆)의 당상(堂上)과 오부관(五部官)을 파직하고 아울러 잡아다 신문할 것을 명하였다. 나홍(羅弘)의 전계를 정지하였다.

 

임금이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7월 13일 계유

겸유선(兼諭善) 황인검(黃仁儉)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예조에 내린 거조(擧條)를 보건대, 금번 발인(發靷)하고 반우(返虞)하는 날에 세손이 대궐 문밖에서 봉사(奉辭)하고 봉영(奉迎)하는 절차를 그만두라는 분부가 있었습니다. 옛 성인이 이르기를, ‘장례야말로 가장 큰 일이다.’ 하였습니다. 왕가(王家)의 예는 사서인(士庶人)의 예와는 다른 것이니, 비록 능히 최복(衰服)을 입고 발인(發靷)을 따르며 훈폐(纁幣)를 받들고 수도(隧道)에 임하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영구(靈柩)가 나가고 상여가 돌아올 때에 국문(國門) 밖에서 곡을 하며 전송을 하고 맞이하는 것은 역대의 사전(事典)에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의 가법(家法)에도 만들어져 있습니다. 각하(閣下)께서 이제 영원히 이별하는 날에 만약 성 밖 지척지간에서 한번 배사(拜辭)하는 정리를 펴지 못한다면, 이 어찌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편안한 일이겠습니까?
아! 3백 년 종사(宗社)의 의탁(依托)이 오직 세손의 한 몸에 있으니, 어리신 몸을 보호하는 방도를 다해야 마땅합니다. 돌아보건대 이제 가을이 겨우 시작되고 남은 더위가 아직 물러가지 않았으니, 힘쓰고 움직이는 즈음에 몸이 상하기 쉬우므로 성상의 염려도 진실로 병이 생기지나 않을까 하는 데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억누를 수 없는 것은 지극한 정리이며 폐할 수 없는 것은 상례(常禮)입니다. 더구나 우리 각하께서는 비록 어린 나이라 하지만 맡은 책임은 성인(成人)이나 같으니, 슬픈 빛을 띠고 곡을 하면 반드시 사방에서 와서 우러러볼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예절에 비추어 그만 둘 수 없는 것이니, 마땅히 버리고 지나칠 수 없음이 분명한 것입니다. 성상께서 보도(補導)하는 방도 역시 어찌 예절을 다하여 유감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빨리 명하시어 전례대로 거행하도록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장례의 절차는 예법의 가장 큰 것이니, 제왕가(帝王家)의 예가 필부(匹夫)나 서인(庶人)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 폐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세손이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효성(孝誠)은 마땅히 어른과 차이가 없으니, 황인검의 상소는 가히 예의 바른 도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성상께서 한 번 곡하고 영결하는 것도 허락지 않아 지극한 정리를 조금도 펴지 못하게 했으니, 그 흠결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68책 100권 2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07면
【분류】왕실-의식(儀式) / 왕실-종친(宗親) / 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장례의 절차는 예법의 가장 큰 것이니, 제왕가(帝王家)의 예가 필부(匹夫)나 서인(庶人)과는 다르다고 하지만 그 폐하여 버릴 수 없는 것은 분명하다. 세손이 비록 어린 나이이지만 천성(天性)에서 우러난 효성(孝誠)은 마땅히 어른과 차이가 없으니, 황인검의 상소는 가히 예의 바른 도리를 얻은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성상께서 한 번 곡하고 영결하는 것도 허락지 않아 지극한 정리를 조금도 펴지 못하게 했으니, 그 흠결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7월 14일 갑술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조영진(趙榮進)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헌부 【지평 곽진순(郭鎭純)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아뢰었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조영진을 탄핵한 글이 먹도 채 마르기 전에 특제(特除)한다는 명을 갑자기 내렸으니, 청컨대 특제의 명을 환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남양 어사(南陽御史) 강필리가 백성들이 먹는 해홍채(海紅菜)를 바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런 것을 먹고 산다니 매우 측은하다."
하고, 봉(封)하여 정원에 두라고 명하였다. 남양 부사 김치귀(金致龜)를 잡아 오도록 명하였는데, 어사의 아룀으로 인한 것이니, 기우제(祈雨祭) 때에 재실(齋室)에서 사사로이 간음(奸淫)했으며, 악형(惡刑)을 가하여 백성들이 많이 이산(離散)한 때문이었다.

 

이이장(李彛章)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7월 15일 을해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천극(栫棘) 죄인 엄인(嚴璘)을 가시울타리를 거두고 석방할 것을 명하였는데, 임금이 그 원통함을 통촉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말하기를,
"한(漢)나라에서 어진 관리를 임용할 때 이천 석(二千石)142)  으로 하여 치국(治國)의 근본을 얻었고, 태종(太宗)은 기둥에 어진 관리의 이름을 써서 능히 정관(政觀)의 다스림을 이루었다. 옛날에 이 서첩(書帖)을 본따 옆자리에 두고 대주첩(代柱帖)143)  이라 이름하였는데, 이는 어제(御製)에 실려 있다. 늙은 나이에 다시 정사를 맡아 밤낮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직 백성에게 있다. 전조(銓曹)에 명하여 문음(文蔭) 수령 가운데 십고 십상(十考十上)144)  에 오른 자와 순포(純褒)한 사람을 작은 첩(帖)으로 만들어 수정(修整)하여 들이라."
하였다.

 

봉조하(奉朝賀) 서종급(徐宗伋)이 졸(卒)하니, 하교하기를,
"기로소(耆老所) 신하의 예에 따라 거행하여 내 뜻을 보이라."
하였다.
삼가 살펴보건대, 서종급의 자(字)는 여사(汝思)이고, 달성(達城) 사람이다. 문과로 발신(發身)하여 청현직(淸顯職)을 두루 거쳤으나 정관(政官)의 직을 사양하고 충청 감사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양관(兩館)145)  의 제학과 이조 판서가 되었다. 70세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 인년(引年)하여 치사(致仕)를 바라자, 임금이 허락하고 봉조하를 제수하였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사람됨이 단아하여 분수를 지켰고 문안에 잡스런 손님을 들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로써 칭송하였다.

 

7월 16일 병자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이어서 소대를 행하고, 《심경(心經)》을 강하였다.

 

7월 17일 정축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김치귀(金致龜)를 친히 신문하였는데, 김치귀가 승복하지 않으니, 특별히 일률(一律)146)  을 감하여 대정현(大靜縣)에 충군(充軍)토록 하였다.

 

7월 18일 무인

조돈(趙暾)을 함경 감사로, 이은춘(李殷春)을 통제사로, 이경열(李景說)을 북병사로 삼았다.

 

7월 19일 기묘

임금이 태복시(太僕寺)에 나아갔으나, 죄인이 곧바로 오지 않았기 때문에 판의금(判義禁)과 좌포도 대장, 우포도 대장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였다. 김성응(金聖應)을 판의금으로, 정여직(鄭汝稷)·김성우(金聖遇)를 좌포도 대장,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죄인 이홍범(李弘範)·송석은(宋錫殷)·송문현(宋文鉉)·이상필(李商弼)·이창거(李昌擧)·이세호(李世壕)·이세진(李世珍)·신대원(申大源)·황택중(黃宅中) 9인을 잡아 오도록 하고, 이홍범에게 묻기를,
"‘증유(曾有)’ 아래 두 글자를 어떤 마음으로 하였는가?"
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다. 송석은 등 8인에게도 평문(平問)하였으나, 모두 승복하지 않았기 때문에 차례대로 엄히 심문할 것을 명하니, 혹은 자백하고 혹은 바른 대로 고하였는데, 홀로 이홍범만은 저항하였다. 임금이 명하여 송석은은 흑산도(黑山島)에 정배하고, 송문현은 종성부(鍾城府)에 정배하며, 이세호는 온성부(穩城府)에 정배하고, 신대원은 낭천현(狼川縣)에 정배하였다. 대사간 이규채(李奎采)가 간쟁(諫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7월 20일 경진

임금이 태복시에 나아가 친히 국문하였다. 이홍범은 대역 부도(大逆不道)로 지만(遲晩)147)  하고, 이창거는 윗사람을 능멸한 죄로 지만하였으며, 이상필·이세진은 정상을 알고도 신고하지 않았다고 지만하였다. 임금이 죄인을 남문 밖에서 대령하라 명하고 나머지 죄인은 참작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다.

 

임금이 숭례문(崇禮門)에 나아가 이홍범·이창거·이상필·이세진은 모두 정법하고 이홍범의 처자(妻子)는 노적(孥籍)148)  하며 이홍범의 아들 이능학(李能學)은 교형(絞刑)에 처하라고 명하였다. 이보다 앞서 담양 좌수(潭陽座首) 이홍범이 성상(聖上)을 향하여 부도한 설을 발하니 이창거가 더불어 화응하여 수창(酬唱)하였고, 맹인(盲人) 송석은(宋錫殷)도 참여하여 들었는데, 3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고발하였다. 이는 대개 향전(鄕戰)149)  으로 인해 일어난 것인데 도신(道臣)이 장문(狀聞)하니, 원악(元惡) 4인은 잡아다 정법하고 나머지는 혹은 유배시키고 혹은 석방하라고 명하였다. 대저 호남(湖南)의 풍속은 좌도(左道)150)  로써 진출하는 자가 많았고 속임수가 백출(百出)하여 을해년151)  으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흉적(凶賊)들이 연달아 나왔으니, 국가의 근심을 이루 말할 수 있겠는가?

 

7월 21일 신사

각도의 향전을 금할 것을 명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윤대관(輪對官)을 소견하였다.

 

임금이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윤득양(尹得養)을 개성 유수(開城留守)로 삼았다.

 

대제학을 반중(泮中)152)  에 보내어 시사(試士)하라 명하고, 으뜸을 차지한 유생 신응삼(辛應三)에게 급제를 내렸다.

 

7월 22일 임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정시(庭試)의 회시(會試)에 응한 선비들을 입시하게 하였다. 임금이 강필리(姜必履)에게 말하기를,
"《명사(明史)》를 보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황명(皇明)이 황태손(皇太孫)을 세웠습니다."
하매, 임금이 말하기를,
"그렇다. 이는 곧 만고의 없던 일이고 한 세대(世代)가 끊어졌으니, 어려운 일이다."
하였다. 대사성 서명응(徐命膺)이 말하기를,
"영락제(永樂帝) 이전을 상고해 본 뒤라야 가히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큰 의리이다. 유생이 지금 입시해 있으니, 알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였다.

 

7월 23일 계미

임금이 사도 세자(思悼世子) 묘에 거둥하였는데, 이 날은 사도 세자의 장례일이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친히 가서 둘러 보고, 경기 감사(京畿監司) 홍계희(洪啓禧)를 잡아들이라고 명하였는데, 경기 고을의 백성들이 올라오는 것을 본 까닭에 이런 명이 있었다. 임금이 정자각(丁字閣)에 들어가 곡림(哭臨)하고 나서 임금이 말하기를,
"상묘(上墓)는 언제인가?"
하니, 좌의정 홍봉한이 말하기를,
"미시(未時)에 상묘하고 현실(玄室)을 내리는 것은 신시(申時) 초 일각입니다."
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13일의 일은 종사에 관계된 것이다. 그때에 비로소 아버지라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오늘은 아버지를 부르는 마음에 보답하려 한다. 하나는 내가 20년 부자지은(父子之恩)을 마치려 온 것이고 하나는 내가 친히 제주(題主)하고자 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친히 제주하면 다른날에 반드시 신주를 묻어버리자는 논의가 없을 것이다. 뒷일은 비록 경들이라 해도 어찌 알 수 있겠는가? 내가 계빈전(啓殯奠)에 참여하고자 하니, 대축(大祝)은 옥당(玉堂)에서 하고 봉작(奉爵)은 승지가 하도록 하라."
하였다. 홍봉한이 말하기를,
"신들도 또한 곡하는 예에 참여해야 합니까?"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참여하라. 또한 백관도 참여하라."
하였다. 신여(神輿)가 묘 위에 오르자 현실(玄室)을 퇴광(退壙)에 받들었고, 홍준한(洪駿漢)·홍낙신(洪樂信)·홍낙임(洪樂任) 등이 관의 줄을 끌었다. 임금이 친히 제주(題主)하고, 환궁할 때에 관왕묘(關王廟)를 들렀다.

 

7월 24일 갑신

조명정(趙明鼎)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하교하기를,
"반드시 이름을 바로잡아야 한다. 지난번에 하교(下敎)했어야 마땅하나 고사(故事)를 알지 못하여 아직까지도 지체하였는데, 이제 석 달이 지났다. 어제 묘에 갔을 때의 제문에도 이미 내 뜻을 유시하였고 제주도 친히 썼으니, 그 뜻이 매우 깊었다. 지금은 저사(儲嗣)가 소중하니, 한결같이 명나라의 고사에 의거하여 세손을 동궁(東宮)이라 칭하고 강서원(講書院)을 춘방(春坊)153)  이라 하며, 위종사(衛從司)를 계방(桂坊)154)  으로 삼아 의식과 절차의 모든 일을 다 전례에 의거하여 거행하라.
하고, 도감 당상(都監堂上)과 낭청 이하에게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

 

간원 【정언 강지준(姜趾埈)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전 장령 이양원(李養源)의 비루하고 패악한 거조는 하나뿐만이 아니어서 정도에 지나칩니다. 안씨(安氏) 성 가진 사람의 양역(良役)을 청촉하여 없애주어 집터를 강제로 점거하였고, 해마다 환곡(還穀)을 받아 청탁하여 미봉(彌逢)하고 갚을 생각도 하지 않으며, 시골에 있으면서 행패를 부려 오로지 전횡(專橫)을 일삼으니, 세상에 어찌 이런 자를 초선(抄選)에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이양원을 영구히 초선에서 삭거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산 부사(理山府使) 이달해(李達海)는 탄핵했던 소장의 먹도 채 마르기 전에 갑자기 외읍(外邑)에 제배되었는데 방자하게 염의를 무릅쓰고 부임하였으니,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7월 25일 을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헌부 【지평 윤면동(尹冕東)이다.】 에서 전계를 거듭 올렸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이번에 여러 흉적들이 다 담양부(潭陽府) 한 곳에서 나왔는데, 심유현(沈維賢)이 일찍이 그 곳의 수령을 지내어 사람들의 마음을 속여 꾀었기에 그 해독이 지금에 이르도록 그치지 않았습니다. 요즘 들으니, 이광사(李匡師)·심약(沈鑰)이 북쪽 변방에서 목숨을 붙이고 있어, 지방인들을 많이 모아서 글과 글씨를 가르치고 있다 합니다. 변방의 어리석은 풍속이라 어찌 선동하여 어지러운 데에 빠져드는 근심이 없을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청컨대 회령부(會寧府)에 안치한 죄인 이광사와 갑산부(甲山府)의 노비로 삼은 죄인 심약을 모두 절도로 이배하시고 또한 본도로 하여금 양읍의 사민(士民)들을 밝게 깨우쳐 흉적들과 서로 연결되거나 통할 수 없음을 알게 하고, 그 중 친밀한 자들은 적발하여 법에 따라 다스려 뒷날의 폐단을 막게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이광사는 진도(珍島)에 안치하고 그 학도들은 부사(府使)로 하여금 곤장을 치게 하였으며, 심약은 도신으로 하여금 한 차례 엄한 형장을 가하여 흑산도의 종으로 삼고 그 학도들은 부사로 하여금 형추(刑推)를 한 차례 가하도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흉년에 진휼할 때 부자(富者)에게서 거두어 들이는 것은 비록 급박하여 부득이한 데서 나왔다고 하지만, 서천(舒川) 같은 경우는 한 사람에게서 돈 8백여 냥을 억지로 거두었는데 2백 냥은 이미 자기 주머니로 들어갔으며, 연산(連山)도 역시 백성에게 돈 3백여 냥을 거두었다는 소문이 거리에 파다하여 듣는 자들이 놀라고 해괴하게 여겼습니다. 해당 도신을 종중 추고(從重推考)하시고, 서천 군수 이찬징(李纘徵)은 빨리 왕부(王府)로 하여금 잡아다 신문하여 엄히 처리하여 장율(贓律)로 시행하며, 연산 현감 권정택(權正宅)은 삭직의 율을 시행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해부로 하여금 엄히 신문하게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정언 변득양(邊得讓)이 지난 가을에 호서의 과거 시험을 주관할 때 공정하지 못했다는 설이 먼저 시험장에 파다하게 전하여, 뜰에 서있는 많은 선비들이 삿대질을 하며 욕하여 거의 과거가 이루어지지 않을 뻔 했습니다. 청컨대 변득양을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르고, 수창(首唱)한 선비는 엄하게 한 차례 형신(刑訊)하여 해도(海島)에 충군(充軍)하게 하였다.

 

장령 박필규(朴弼逵)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동래 부사 윤득우(尹得雨)는 흠과 잘못이 매우 중한데도 다행히 폐고됨을 모면하고 지난번 서쪽 고을에 차견(差遣)되었으니, 진실로 불식(拂拭)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지만, 치적도 없는데 갑자기 변방의 중요한 자리를 주어서 여론에 어긋남이 있습니다. 신은 생각건대 빨리 개차(改差)를 명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교자(轎子)를 타는 것을 금한 것은 한두 번 밝힌 것이 아닌데, 전 병사(兵使) 이명준(李命峻)은 지난번 영남 우병영에서 군사를 점검하는 길에 거만하게 교자를 탔는데, 교자와 말을 책출(責出)하여 역읍(驛邑)이 소란했습니다. 또 사람됨이 용렬하고 잔약하며 관직에 있었을 때 탐학(貪虐)하였으니, 신은 생각건대 이명준을 사판에서 삭거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윤득우의 일은 따르지 않았으나, 이명준은 형률이 너무 가볍다 하여 잡아다 추문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하교하기를,
"비록 명(明)나라의 고사(故事)가 있다고 하나 우리 나라는 3백 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고 보면, 반드시 고하는 것이 예절에 마땅하나 또한 크게 떠벌릴 수는 없다. 초하루 삭제(朔祭)에 태실(太室)에 고유(告由)를 겸행하고 그날 몸소 반교(頒敎)하겠으니, 예조에 분부하라. 제문(祭文)과 반교문은 마땅히 지어 내리겠다."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정만순(鄭晩淳)·김응순(金應淳)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6일 병술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대신을 소견하였다.

 

이세택(李世澤)을 승지로 삼았다.

 

7월 27일 정해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해흥군(海興君)의 처 고씨(高氏)에게 정려(旌閭)를 명하였는데, 예조 판서 신회(申晦)가 절행이 있다고 아룀으로 인한 것이었다.

 

임금이 해춘군(海春君) 이영(李栐)에게 말하기를,
"초3일에 보첩(譜牒)을 마땅히 고쳐 정리해야 하는데, 한 항(行)이 없으니, ‘사 왕세손 저하(嗣王世孫邸下)’라고 쓰는 것이 옳다."
하였는데, 이때 영이 종부시 제조(宗簿寺提調)였었다.

 

임금이 금오(金吾)의 수도안(囚徒案)을 들이라 명하고, 이때 죄수를 특별히 석방하였다.

 

7월 28일 무자

임금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문과(文科)의 전시(殿試)를 행하였고, 이어서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무과(武科)의 거자(擧子)들을 시험하였다.

 

7월 29일 기축

임금이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과차(科次)하여 신상권(申尙權) 등 15인을 뽑았다.

 

정존겸(鄭存謙)을 이조 참의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정시(庭試)에 입격(入格)된 사람을 소견하였다.

 

7월 30일 경인

임금이 경현당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서지수(徐志修)를 대사헌으로, 김기대(金器大)를 경기 감사로, 이지억(李之億)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임금이 말하기를,
"궁방(宮房)과 부중(府中)은 일체(一體)이다."
하고, 오부(五部) 관원에게 명하여 내수사(內需司)와 여러 궁가(宮家)의 이문(里門) 안을 조사하여 모두 술을 수색(搜索)해 오도록 하였다.

 

또 석강을 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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