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영조실록100권, 영조 38년 1762년 9월

싸라리리 2025. 10. 9. 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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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경신

번개가 쳤다.

 

9월 2일 신유

번개가 쳤다.

 

임금이 대보단(大報壇)에 나아가 향관청(享官廳)의 재실(齋室)에서 유숙하였으니, 위판(位版)을 수개(修改)하는 일 때문이었다.

 

9월 3일 임술

번개가 번쩍이고, 유성이 누성(婁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빚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동궁(東宮)에게 하유하기를,
"내가 재실에서 밤을 지새우며 조금이나마 적은 정성을 펴는 뜻을 본받아 앞날에 지극한 정성으로 명(明)나라를 존중하는 마음을 가져 옛날의 성의(聖意)에 우러러 보답하도록 하라."
하고, 봉안(奉安)한 뒤에 임금이 사배(四拜)를 행하고, 예를 마치자 환궁하였다.

 

9월 4일 계해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고, 밤에 천둥하였다.

 

남태회(南泰會)를 대사헌으로, 민백흥(閔百興)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조강(朝講)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정언 권극(權極)이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금주(禁酒)하라는 영(令)에 엄격하고 명백하게 신칙(申飭)하시고 심지어 태묘(太廟)의 제향(祭享)에도 쓰지 못하게까지 하셨으니, 동토(東土)의 신민(臣民)된 자가 진실로 타고난 본성(本性)이 있다면 반드시 다시는 범하지 않을 것인데, 만일 각별히 금단(禁斷)하지 않는다면 백성은 법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은 경조(京兆)로부터 각도의 영문(營門)에 이르기까지 그 아주 심하게 금주의 영을 범한 자는 적발하는 대로 효시(梟示)하여 일벌 백계(一罰百戒)의 방도로 삼을 것을 청합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바는 체통을 얻었는데, 임금의 명은 삼령 오신(三令五申)하여야 한다. 경중(京中)은 보름을 한정하고 외방(外方)은 영(令)이 도착하는 날로부터 한 달을 한정하여 그중 아주 심한 자는 드러나는 대로 이 율(律)을 시행할 것이니, 우선 중외에 엄히 신칙하라."
하고, 임금이 말하기를,
"여러 신하들의 뜻은 어떠한가?"
하니, 비국 당상 홍계희(洪啓禧)가 말하기를,
"신이 북도에서 감진(監賑)할 때에 금령을 범한 자를 우선 참하고 뒤에 계문(啓聞)하도록 정탈(定奪)하셨기 때문에, 지방에 내려가 그 금령을 범한 자 한 사람을 효시하였는데 뒤에 범하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매, 교리 강필리(姜必履)가 말하기를,
"대간의 말은 진실로 의견이 있습니다."
하였다.

 

9월 5일 갑자

임금이 우레의 이변으로써 하교하여 뭇 신료들에게 계칙하고, 3일 동안 감선하였다.

 

왕세손이 존현각(尊賢閣)에서 조강을 행하였다.

 

도승지 이심원(李心源) 등이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빈대(賓對)를 자주 내리셨으나, 우모(訏謨)의 계책은 혹시 그 요령을 얻지 못하였고, 잇달아서 강연(講筵)을 여시는데 즙희(緝熙)의 공부에 오히려 그 방도를 다하지 못하였으며, 황정(荒政)에 진념(軫念)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불쌍한 백성들은 실제 혜택을 입음이 없고, 신료들에게 경칙(警飭)하지 않는 것은 아닌데 인협(寅協)의 공(功)은 효과를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성상의 마음은 비록 간하는 자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고는 하지만 방축(放逐)되고 폐고(廢錮)된 신하가 간혹 탕척(蕩滌)의 교화를 입지 못하였으며, 성념(聖念)이 비록 어진 이를 구하는 데에 간절하지만 산림(山林)의 독서하는 선비가 끝내 서서히 오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조정으로 말할 것 같으면 사사로운 뜻이 횡류하여 조경(躁競)은 갈수록 심해졌고, 사치의 풍속은 앞다투어 일어나 재용이 이미 고갈되었으며, 염치와 예양의 절차는 땅을 쓸듯 없어져서 헛되이 자랑하여 벼슬을 구하는 습관은 풍속을 이루어, 나랏일은 번잡스럽고 조정의 기강은 해이해져서 크고 작은 일에 게을러지고 하는 일 없이 세월을 보내고 있습니다. 이는 모두 사람이 해야 할 일을 잃어버린 것이니, 그 인애하신 하늘이 경고(警告)를 불러 일으킴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장령 이명환(李明煥)이 상소하여 진면(陳勉)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대사헌 남태회(南泰會)가 아뢰기를,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은 자신이 수신(帥臣)이면서도 나라에서 금하는 것이 지엄함을 염두에 두지 않고 멋대로 범양(犯釀)하여 매일 술에 취한다는 말이 낭자합니다. 이와 같이 법을 능멸하는 무엄한 사람을 변곤(邊閫)의 중요한 자리에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청컨대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과연 들리는 바와 같다면 응당 일률(一律)189)  을 시행해야 한다. 그에게 어찌 파직만으로 그치겠는가?"
하고, 금오랑(金吾郞)에게 명하여 잡아오도록 하였다.

 

김효대(金孝大)를 승지로 삼았다.

 

주강하여 《중용(中庸)》을 강하였다.

 

9월 6일 을축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사지(巳地)에 나타났고, 밤에 유성(流星)이 삼성(參星) 아래에서 나와 동쪽으로 들어갔는데, 빚깔은 붉은 색이었다.

 

영의정 신만(申晩), 좌의정 홍봉한(洪鳳漢), 우의정 윤동도(尹東度)가 차자를 올려 진면(陳勉)하고, 이어서 해직(解職)을 바랬는데, 임금이 비답을 내리고 위로하여 유시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아뢰기를,
"지난번 대신(臺臣)의 청으로 심약(沈鑰)과 이광사(李匡師)를 절도(絶島)에 옮긴 것은, 대개 심원(深遠)한 염려에서 나온 것이었습니다. 심약을 흑산도에 이배한 것은 진실로 마땅하고, 이광사는 진도에 이배하였는데, 비록 해도(海島)라고 할지라도 본래 좋은 곳이며, 또한 이곳은 관부(官府)가 있는 곳이니 이들 죄인을 옮겨 두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청컨대 죄인 이광사를 다시 머나먼 작은 섬에 옮겨 외부 사람과 교통하는 폐단을 끊도록 하소서."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석강(夕講)을 행하고, 대신과 비국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하였다.

 

9월 7일 병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판윤(判尹)·오부(五部)의 관원·오군문(五軍門) 대장·용호장(龍虎將)을 소견하고, 윤음을 내려 주금(酒禁)을 신칙하였다.

 

9월 8일 정묘

번개가 쳤다.

 

9월 9일 무진

번개가 쳤다.

 

윤봉구(尹鳳九)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원점 유생(圓點儒生)190)  의 전강(殿講)과 제술(製述)을 행하여 으뜸을 차지한 생원 박광순(朴光淳)에게 급제를 내렸다.

 

한림 추소시(翰林追召試)를 행하여 김서구(金敍九)를 뽑았다.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아뢰기를,
"여주 목사 이정철(李廷喆)은 젊어서부터 문명(文名)이 있었고 만년(晩年)에 기과(耆科)에 합격하였는데 나이가 늙어 지방관에 나아갈 때가 아닌데도 본주에 제수된 후로부터 크고 작은 정무(政務)를 모두 하리(下吏)에게 맡기고 있습니다. 청컨대 이정철을 파직하소서. 해남 현감 신윤광(申胤洸)은 조금도 굶주린 백성을 구제할 계책에 뜻을 쓰지 않고, 오직 남형(濫刑)과 남장(濫杖)으로써 위엄을 세우려는 바탕을 삼아 부임한 지 몇 달만에 온 경내에 원망이 자자하니, 청컨대 신윤광을 파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모두 그대로 따랐다.

 

능창군(綾昌君) 이숙(李橚) 등이 상서하여 탄신(誕辰)의 진하를 청하였는데, 임금이 우악하게 비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임금이 주서 윤홍렬(尹弘烈)을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윤홍렬이 입시할 즈음에 행동 거지가 종용(從容)하지 못하였고 전중(殿中)이 지척인데도 감히 남에게 미루었기 때문에 이런 명이 있었다.

 

9월 11일 경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고, 겸하여 주강을 하였다. 임금이 동궁에게 시좌(侍坐)하도록 명하고 《맹자(孟子)》를 강하였다. 대신과 여러 신하들이 차례로 하례를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정언 조석목(趙錫穆)이 상소하여 진계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수서(手書)로 전 영부사 김상로(金尙魯)에게 도타이 유시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9월 12일 신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3일 임신

이 날은 곧 대전(大殿)의 탄신일이었는데, 2품 이상이 뜰에서 문후(問候)하였다.

 

9월 14일 계유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특별히 전 영부사         김상로(金尙魯)의 직첩(職牒)을 주라고 명하고, 이어서 봉조청(奉朝請)191)                  을 허락하였으며 임금이 금상문(金商門)에 나아가 선마(宣麻)192)                  하였다. 김상로는 오랫동안 상직(相職)에 있었는데 탐욕스럽고 음휼함을 지목하는 자가 많았다. 그러나 그의 흉역의 심장은 밝게 드러나지 않았는데, 당저(當宁)께서 하교한 뒤에 미쳐서 국인(國人)들이, 문녀(文女)193)                  와 비밀히 결탁(結托)하여 국본(國本)을 위태롭게 하려는 흉악한 모의를 비로소 알고서 생전(生前)에 정법(正法)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유신(儒臣) 이명환(李明煥)이, 장령 한필수(韓必壽)가 피혐할 데에 조처할 바를 잃었다고 파직을 청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좌의정 홍봉한(洪鳳漢)이 말하기를,
"대간(臺諫)이 크게 그릇되지 않으면 옥당(玉堂)이 일찍이 곧바로 파직을 청하지 않았는데, 지금 이 대신(臺臣)이 잘못한 것은 비록 규경(規警)해야 마땅하지만 유신이 청한 바는 크게 지나치니, 추고(推考)해야 마땅합니다."
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황인검(黃仁儉)·정존겸(鄭存謙)·윤득우(尹得雨)·윤동승(尹東昇)을 승지로 삼았다.

 

9월 15일 갑술

도승지 황인검 등이 아뢰었는데, 대략 이르기를,
"왕정(王政)은 사람을 쓰는 것보다 우선할 것이 없는데 특비(特批)는 어렵고도 신중한 것에 결흠이 있으며, 국계(國計)는 재용(財用)을 절약함보다 긴급한 것이 없는데 상뢰(賞賚)는 혹 남전(濫典)에 돌아가고, 사령(辭令)은 너무 위곡(委曲)에 힘써서 간엄(簡嚴)한 체통에 혹 흠결이 되며, 동작하심에 반드시 진려(振勵)시키고자 하시나 도리어 소홀한 한탄이 있으니, 성상의 뜻을 기대하지 못하게 되어 치효(治效)는 더욱 아득한 데에 이르렀습니다. 묘모(廟謨)는 부서 기회(簿書期會)194)  에 지나지 않았고, 전주(銓注)는 단지 구례를 따라 행하며, 논사(論思)하는 자리에서는 소패(召牌)를 되돌림으로써 일을 삼았고, 이목(耳目)의 책임에 있는 자들은 인혐(引嫌)으로써 묘책을 삼으니, 크던 작던 직무에 게을리하여 하나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만일 가생(賈生)으로 하여금 오늘날을 보게 된다면 어찌 눈물을 흘리며 크게 탄식195)  만 할 뿐이겠습니까?"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교리 강필리(姜必履) 등이 또 차자를 올려 진계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편집청(編輯廳)에서 《봉교엄변록(奉敎嚴卞錄)》을 올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재호(趙載浩)가 복법(伏法)된 뒤에 《엄변록(嚴卞錄)》을 만들었는데, 대개 변란(變亂)의 단계를 변론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조재호의 가탁(假托)하고 배포(排布)한 것은 원래 그 근본이 있었는데, 지금 이 《엄변록》은 그 근본은 상세하지 아니하고 단지 역적(逆賊)의 초사(招辭)만을 등재(謄載)했으니, 엄변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편집한 여러 신하들이 깊은 식견과 장원(長遠)한 사려(思慮)가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68책 100권 16장 B면【국편영인본】 44책 11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왕실-종친(宗親) / 변란-정변(政變)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재호(趙載浩)가 복법(伏法)된 뒤에 《엄변록(嚴卞錄)》을 만들었는데, 대개 변란(變亂)의 단계를 변론하여 뒷날의 폐단을 막고자 함이었다. 그러나 조재호의 가탁(假托)하고 배포(排布)한 것은 원래 그 근본이 있었는데, 지금 이 《엄변록》은 그 근본은 상세하지 아니하고 단지 역적(逆賊)의 초사(招辭)만을 등재(謄載)했으니, 엄변하는 뜻이 어디에 있겠는가? 편집한 여러 신하들이 깊은 식견과 장원(長遠)한 사려(思慮)가 없는 것이 애석한 일이다."

 

9월 16일 을해

월식(月食)하였다. 유성(流星)이 유성(柳星) 아래에서 나와 손방(巽方)으로 들어갔는데, 빛깔은 붉은 색이었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상참(常參)을 행하고, 이어서 조강(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내가 실지에 힘쓰지 않으면, 경 등은 광구(匡救)하여 서로 면려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주강(晝講)을 행하고 각사(各司) 관원 및 새로 제수된 수령을 소견하였다.

 

또 석강(夕講)을 행하였다.

 

9월 17일 병자

임금이 숭례문(崇禮門)에 나아가 남병사(南兵使) 윤구연(尹九淵)을 참(斬)하였다. 이보다 앞서 임금이 금오랑(金吾郞)에 명하여 윤구연을 잡아오게 하였고, 또 선전관 조성(趙峸)에게 명하여 배도(倍道)로 빨리 가서 양주(釀酒)한 진장(眞贓)을 적발하도록 하였다. 이에 이르러 조성이 술 냄새가 나는 빈 항아리를 가지고 임금 앞에 드리자, 임금이 크게 노하여 친히 남문(南門)에 나아가 윤구연을 참하였던 것이다. 영의정 신만·좌의정 홍봉한·우의정 윤동도가 차자를 올려 구원하려 하였으나, 임금이 비답을 내리지 않고, 모두 상직(相職)을 파하였다.

 

사간 여선응(呂善應)·교리 강필리(姜必履)·지평 최민(崔)이 아뢰기를,
"윤구연은 진실로 죽을 만한 죄가 있지만 인명은 지극히 중한 것이니, 원컨대 다시 널리 순문(詢問)하여 처리하소서."
하니, 임금이 크게 노하여 모두 삭직을 명하였다.

 

9월 18일 정축

정광한(鄭光漢)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부수찬 이재간(李在簡)이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대료(大僚)의 연명 차자와 삼사(三司)의 주대(奏對)는 단지 조심하고 삼가하려는 뜻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어찌 한낱 법을 범한 윤구연을 돌아보아 애석하게 여겨서 그런 것이겠습니까? 중벽(重辟)196)  으로서 재단(裁斷)하는 것은 실로 국가의 대정(大政)이니, 가부(可否)에 대하여 서로 논란(論難)하는 것이 또한 조정의 아름다운 일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한마디 말이 마음에 거슬린다고 하여 파직하거나 삭직한다면 끝내는 포용하시는 큰 도량에 결흠이 있으니, 그윽이 성조(聖朝)를 위하여 이 거조를 애석하게 여깁니다."
하니, 임금이 엄교(嚴敎)를 내려 성환 찰방(成歡察訪)에 보임(補任)하게 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여러 승지가 공사(公事)를 가지고 입시하였다. 한성 판윤(漢城判尹)과 오부 관원(五部官員) 및 삼군문 대장(三軍門大將)·용호장(龍虎將)과 일찍이 병·수사(兵水使)를 지낸 사람을 와서 대기(待期)하라고 명하였으니, 주금(酒禁)을 신칙하려는 때문이었다.

 

9월 19일 무인

지평 정택(鄭擇)이 상소하기를,
"수령이 자주 바뀌어 영송(迎送)하는 즈음에 피해가 백성들에게 미치고 있으니, 다만 〈주벽(酒癖)이〉 심한 자만을 태거(汰去)시키고 마십시오. 대신이 일에 따라서 말을 다하는 것은 소회(所懷)를 숨김이 없는 것으로 이는 성조(聖朝)의 좋은 기상(氣象)이온데, 지금 전하께서 대신에게 처리하신 것은 우불(吁咈)197)  의 뜻과는 다름이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가납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9월 20일 기묘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다시 신만을 영의정으로, 홍봉한을 좌의정으로, 윤동도를 우의정으로 제배하였다.

 

9월 21일 경진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문신 전강(文臣殿講)을 행하고, 으뜸을 차지한 학록(學錄) 강정하(康正夏) 등에게 각기 숙마(熟馬)를 내렸다. 또 무신 전강(武臣殿講)을 행하고, 으뜸을 차지한 훈련 주부 이완기(李完基)에게 반숙마(半熟馬)를 내렸다.

 

9월 23일 임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동몽 교관(童蒙敎官)에게 명하여 동몽을 거느리고 입시하도록 하였고, 동궁에게 시좌(侍坐)하여 문의(文義)를 문난(問難)하라고 명하였다. 이강(李絳)이 《소학(小學)》을 읽자, 세손이 묻기를,
"‘너는 간록(干祿)198)  을 배우는 것을 경계하라.[戒爾學干祿]’ 하였는데, 간록(干祿)은 이것이 좋은 도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매, 세손이 말하기를,
"모름지기 ‘계이(戒爾)’ 두 글자를 자세히 보아야 한다."
하였다. 신천금(申天金)이 나와서 읽자, 세손이 묻기를,
"무엇을 천명(天命)의 성(性)이라고 하는가?"
하니, 신천금이 대답하지 못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성(性) 자는 성(姓) 자와 더불어 같은가?"
하니, 신천금이 말하기를,
"그렇습니다."
하매, 세손이 말하기를,
"아니다. 이 성(性) 자는 단지 하늘로부터 품부(稟賦)한 좋은 개성이다."
하였다. 이희(李喜)가 나와서 읽자, 세손이 말하기를,
"밤에 맹인(盲人)으로 하여금 시(詩)를 외우게 한 것은 무엇 때문인가?"
하니, 이희가 대답하지 못하매, 세손이 말하기를,
"맹인(盲人)은 보이는 것이 없으니 반드시 사악한 생각이 없고, 밤은 또 조용하기 때문이다."
하였다. 임금이 동몽들에게 지(紙)·필(筆)·묵(墨)을 차등 있게 내렸다.

 

9월 24일 계미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문신 제술(文臣製述)을 행하였다.

 

9월 25일 갑신

건명문(建明門)에 나아가 무신 당하(堂下)에게 삭시사(朔試射)를 행하였는데, 4시(矢)를 넘지 못한 이들에게는 각각 그 청사(廳舍)에 입직(入直)하게 하고, 10순(巡)199)  에서 20시를 맞춘 후에 체직(替直)하도록 명하였다.

 

9월 26일 을유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하여 《중용》을 강하였다. 정언 서유원(徐有元)이 아뢰기를,
"성상(聖上)께서 복정(復政)하신 초두에 언로(言路)를 열기에 힘쓰셨으니, 성의(聖意)는 아주 성대합니다. 그러나 지난번 주대(奏對)한 삼사(三司)와 진소(陳疏)한 유신을 진실로 의당 포용하셔야 하는데 너그럽게 용서를 내리지 않고 지나치게 억제를 가하여 혹은 삭직하고 혹은 보직하였으니 모양이 근심스럽고 서글픕니다. 다른 날 전하께서 혹시 중도에 지나친 거조가 있더라도 누가 전하를 위하여 한마디 말인들 올리겠습니까? 청컨대 삼사를 삭직하고 유신을 외방에 보직하라는 명을 일체 모두 회수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 지평 최민(崔)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미련해서 전혀 아는 것이라고는 없습니다. 저번날 두 수령을 석방하라는 영(令)을 환수하라고 청한 것은 말도 되지 않으니, 청컨대 삭직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아뢴 대로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윤득우(尹得雨)는 결흠이 있는 몸으로서 동료들에게 버림을 받았고 당초에 의망(擬望)에서 뽑아 버렸으니, 공의(公議)가 매우 엄중함을 볼 수 있습니다. 동래 부사(東萊府使)는 한 변방의 수령에 지나지 않았으나, 오히려 박정(駁正)하는 논의가 있었는데, 더구나 근밀(近密)한 청현(淸顯)의 직(職)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청컨대 우부승지 윤득우를 개정하소서."
하니, 임금이 윤허하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금주(禁酒)의 영(令)은 얼마나 지엄(至嚴)한 것인데도 백성들이 법을 두려워하지 않고 있으니 서로 이어서 금령을 범하여 양주(釀酒)하는 자는 죽어도 진실로 아까울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대저 이 금령은 우리 성상께서 백성을 사랑하고 살리고자 하시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대신(臺臣)이 된 자가 바로 대벽(大辟)으로 다스려야 한다고 논청하였으니, 이미 뜻을 받들어 대양(對揚)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더구나 착한 데로 인도하고 허물을 씻어주어 받은 은혜가 어떠한데 새로 대각(臺閣)의 자리에 들어가 임금의 결흠과 관원의 잘못에 대하여 한마디 말이 없었고, 국전(國典)에도 없는 법을 처음 만들어 내어 엄중(嚴重)한 법과 혹독한 형벌로서 인주(人主)를 인도하였으니, 진실로 후손(後孫)을 위하여 좋은 계책을 너그러이 전하는 도리가 아닙니다. 이와 같이 보잘것없는 사람을 의관(衣冠)의 반열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청컨대 전 정언 권극(權極)을 사판(仕版)에서 삭거하시고 대망(臺望)을 개정(改正)하소서."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이는 두 두건덕(竇建德)200)  을 위하여 원수(怨讎)를 갚는 것이니 대정현(大靜縣)으로 투비하라."
하였다.

 

9월 27일 병술

번개가 쳤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다.

 

조엄(趙曮)을 대사간으로 삼았고, 권극(權極)을 개정하는 일을 정계하였다.

 

동궁이 회강(會講)을 행하였다.

 

9월 28일 정해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정홍순(鄭弘淳)을 평안 감사로 삼았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동궁이 시좌(侍坐)하고 춘방(春坊)에서 입시하도록 명하고 임금이 세손에게 이르기를,
"나는 단지 세신(世臣)과 군민(軍民)만을 위하였으니 이 마음은 네가 배울 수 있겠으나, 다만 ‘성(誠)’ 자의 공부가 없으니 너는 더욱 ‘성’ 자에 힘쓰는 것이 옳다."
하였다.

 

또 석강을 행하였다.

 

임금이 우레의 이변으로써 윤음을 내려 뭇 신하에게 면칙(勉飭)하였다. 승지 윤동승(尹東昇)이 말하기를,
"그윽이 보건대, 전하께서 요즈음의 사명(辭命)은 혹 중도에 지나친 곳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법이 세워지지 못한 까닭에 사기(辭氣)가 중도에 지나친 점이 있었으니, 아뢴 바가 참으로 옳다."
하였다.

 

9월 29일 무자

천둥하고 우박이 내렸다. 금성(金星)이 남두성(南斗星) 괴(魁) 속으로 들어갔는데, 정원과 옥당에서 간략히 면계(勉戒)를 진달하였다.

 

9월 30일 기축

금성(金星)이 남두(南斗)의 세 번째 별을 범하였으며, 천둥하고 번개가 쳤다.

 

임금이 숭현문(崇賢門)에 나아가 동궁을 거느리고 향을 지영하는 예를 행하였다.

 

임금이 경현당(景賢堂)에 나아가 주강(晝講)하여 《대학》을 강하였다. 대신과 비국 당상을 인견하였는데, 세손이 시좌하였다. 임금이 호남의 재결(災結)에 대해 2만 결을 기준하여 지급하고, 윤득우(尹得雨)를 개정(改正)하는 일은 정계하도록 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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