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4권, 숙종 9년 1683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2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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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2일 갑술

지평(持平) 박태유(朴泰維)·유득일(兪得一)등이 김익훈(金益勳)에게 법을 시행하고 멀리 귀양보내도록 발의(發議)하여 아뢰기를,
"김익훈은 간특(奸慝)한 무리로 훈척(勳戚)의 세력을 끼고 외람되게 장수의 직임을 맡았고, 공과 상을 탐하였습니다. 바로 김환(金煥) 등이 염탐할 때에는 상하가 화답하여 응대하여 마침내 고변서(告變書)를 급히 올리기에 이르렀습니다. 허새(許璽)·허영(許瑛) 등의 무리가 비록 흉계를 모의한 것으로 법에 따라 복주(伏誅)되었으나, 증거로 끌어낸 여러 사람들이 모두 사실이 아니었습니다. 전익대(全翊戴)의 실상에 이르러서는 김익훈과 김환이 거짓으로 통하고 지향하는 뜻이 서로 합하여, 처음에는 군뢰(軍牢)를 보내 밤중에 협박하여 무고하게 하였으며, 마침내 김환과 전익대가 함께 그 집에 나아가 사정을 힐문(詰問)하여 공초(供招)를 받아 구류(拘留)시켰으니, 그간의 허실을 김익훈이 어찌 모를 이치가 있겠습니까? 당초 김환이 전익대를 달래고 협박하여 유명견(柳命堅)의 의심할 만한 자취를 염탐해 내려고 하였는데, 이미 모역(謀逆)한 사실을 알고도 함께 고발하지 않았다면, 전익대가 비록 김익훈을 인연해서 남을 무고하여 자기의 공을 세우려고 했더라도, 김익훈으로서는 배척하여 거절했어야 마땅하고, 어쩔 수 없었다면 저로 하여금 상변(上變)하도록 하는 것이 사리에 당연합니다. 그런데 국청(鞫廳)을 설치한 여러 날 뒤에 분명히 허위임을 알고도 고변서를 칭탁하여 비밀리 고발하고 실정을 가렸으니, 그 죄상을 추구해 본다면 전익대와 어찌 멀다고 하겠습니까? 전익대가 이미 승복하였는데 김익훈의 죄를 어찌 관직을 삭탈하여 내쫓는 데 그치겠습니까?…"
하니, 【비답(批答)은 위에 보인다.】 마침내 두 신하를 거제(巨濟)와 진도(珍島)로 내쫓으라는 명이 있었다. 이에 대신과 삼사(三司) 그리고 여러 승지들이 명을 도로 거두도록 힘써 다투었다. 【처음의 사초(史草)와 참고하여 보라.】  대체로 전익대(全翊戴)가 자백함으로써 공론이 다시 격렬하여 이 아룀이 마침내 발의(發議)되었다. 비록 김수항(金壽恒)이라 하더라도 힘써 해명하여 구원할 수 없었으며, 송시열(宋時烈)도 처음에는 대간(臺諫)의 의논을 옳다고 하였고, 청류(淸流)들도 흡족히 그를 따랐다. 그 때 마침 송시열이 병이 있어 외부 손님을 대하지 않았는데, 김만기(金萬基) 형제만이 밤낮으로 곁에서 간호하며 김익훈(金益勳)을 위해 애걸하였다. 대저 송시열을 받드는 자들이 지극한 정성을 다하지 않음이 없어서, 때로는 초피(貂皮) 이불과 해송(海松) 죽(粥)을 주었다는 말이 있었다. 송시열도 이미 기운이 쇠약해서 사정(私情)에 끌리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침내 처음의 견해를 변경하여 젊은 무리들이 김익훈을 죽이려 한다는 말을 퍼뜨리며 유득일(兪得一)을 매우 준엄(峻嚴)하게 배척하였고, 민정중(閔鼎重) 역시 이것으로 소원(疏遠)함을 당하였다.
〈송시열이〉 사람을 대하여 번번이, ‘좌상(左相)이 어찌 분명한 외척이 아니겠는가?’라고 말하므로, 【적(赤)은 방언(方言)에 분명(分明)이라는 말이다.】 민정중이 그 말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빨리 꺾여 들게 되었으며, 젊은 무리들도 많이 앞서의 견해를 변경하여 송시열에게 아부하며 두 마음을 품으므로 대각(臺閣)의 의논이 마침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당목(黨目)이 생겼다. 소론으로 이름한 자는 조지겸(趙持謙)·최석정(崔錫鼎)·오도일(吳道一)·한태동(韓泰東)·박태보(朴泰輔)·박태유(朴泰維)·임영(林泳)·서종태(徐宗泰)·심수량(沈壽亮)·신완(申琓)·유득일(兪得一)등 여러 사람이고, 노론이라고 부르는 자는 이선(李選)·이수언(李秀彦)·이이명(李頤命)·이여(李畬)등 여러 사람이다. 전배(前輩)인 송시열(宋時烈)·김석주(金錫胄)이하 노론을 돕는 자가 많았고, 소론을 돕는 자는 박세채(朴世采)·이상진(李尙眞)·남구만(南九萬)등 여러 사람인데, 노론은 훈척(勳戚)을 끼고 세력으로 억누르며, 청의(淸議)를 가진 자를 많이 말살시켰으므로 이제 송시열을 다시 사류로 여기지 아니하였다.

 

2월 4일 병자

행 사직(行司直) 박세채(朴世采)가 조정에 나가 경연(經筵) 석상에서 차자(箚子)로 아뢰었는데, 그 조목이 세 가지가 있었다. 그 첫째는 《주역(周易)》 건괘(乾卦)의 ‘하늘의 운행이 건전하다[天行健]’는 것을 인용(引用)하여 말하기를,
"하늘의 운행이 하루 한 번 주회(周回)하는데, 지극히 건전(健全)하지 않으면 이뤄지지 못합니다. 군자(君子)가 이것을 본받아 사람의 욕심으로 자연 이치의 강건(剛健)함를 해치지 아니하면 스스로 힘쓰면서 쉬지 않를 것입니다. 왜냐하면 강(剛)이란 것은 양(陽)의 덕(德)이고 건(健)의 근본이니, 오직 임금이 그것을 잘 체득하면, 도(道)는 충족되고 천리(天理)는 보존되어 사람의 욕심에 굴복당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래서 반드시 그것을 굳게 가지고 오래 행하면, 마침내는 한 마음으로 만사(萬事)를 바로잡고, 한 몸으로 만민(萬民)을 바로잡아, 곧 천덕(天德)010)  을 잡을 수 있어 이상적인 정치를 기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의 욕심이 방해됨도 그 단서(端緖)가 하나뿐이 아니니, 아무리 총명하고 밝은 지혜의 자질이 있더라도 반드시 먼저 큰 뜻을 세워서 그칠 때를 알고 덕(德)에 나아간 뒤에야 건(乾)의 강건함을 비로소 알아 체득(體得)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른바 그칠 데를 알아서 덕(德)에 나아가야 된다는 것도 별다른 기술이 없습니다. 성학(聖學)의 정도(程度)를 삼가고 미언(微言)의 귀착점을 완미(玩味)하며, 선왕(先王)의 덕업(德業)을 모아서 마음속으로 잘 분변하고 선악(善惡)의 시초[萌]를 우려할 때는 인물(人物)과 사정(邪正)의 찰나에서 살피고, 하는 일을 시비(是非)의 나뉨에서 징험하여, 마칠 때나 시작할 때나 부지런히 하여 이르지 않음이 없으면, 지혜는 이르고 인(仁)은 지켜지게 되어 건강(乾剛)에 미치지 않으려고 하더라도 스스로 그만두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임금의 도리는 다만 건강(乾剛)을 체득하여 쉬지 않은 데 달려 있으며, 그것을 체득하는 방법도 다만 그칠 줄을 알고 덕(德)에 나아가 배워서 모으고 물어서 분변하는 공부를 거둬들여 중정(中正)하고 순수(純粹)한 융성함을 다하는 데 달려 있으니, 이렇게 하는데도 자연의 이치를 밝히지 못하고 사람의 욕심을 버리지 못하는 자는 없습니다. 가만히 살피건대, 전하께서는 영단(英斷)이 뛰어나고 총명과 예지가 옛사람보다 우뚝하신데, 신이 우려하면서 오히려 두려워하는 것은 성상(聖上)의 자질이 비록 고매하시나 본원(本源)을 주재(主宰)하는 공이 완전히 수립되지 못했으며, 성상(聖上)의 뜻이 비록 크나 강유(綱維)를 잡아서 이끌 방법이 완전히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이 때문에 하시는 일에 나타나는 것과 정치 명령에 발로되는 것이 가끔 허심탄회하게 받아들여 재단하여 채택하는 아름다움이 부족하고, 사사로이 아끼며 휘어서 고치는 단서를 이루게 되니, 비록 공론이라고는 하나 국가 체모가 관계됨이 매우 큽니다.
지난날 훈적(勳籍)에 추록(追錄)하는 일 같은 것은 일찍이 빨리 개정(改正)하도록 하지 않으셨으면, 그 밖에 다른 것은 미루어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왕자(王者)가 삼무사(三無私)011)  를 받들어 천하의 뜻을 위로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의 욕심으로 천덕(天德)의 강건(剛健)함을 해친다고 말하더라도 아마 사양 하지 못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삼가 원하건대 전하께서는 확연(廓然)히 크게 깨우치소서."
하였다. 그 둘째는 홍범(洪範)012)  의 무당 무편(無黨無偏)013)  의 뜻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대저 황극(皇極)014)  의 도(道)는 인륜(人倫)같이 큰 것으로부터 사물(事物)의 소리와 동작에 이르기까지 그 의리(義理)의 중도(中道)가 지극하지 않은 것이 없어서 천하 사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올바른 것을 취할 데가 있게 하면,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제자리에 있으면 여러 별이 옹위하는 것과 같이 서민으로부터 군자(君子)에 이르기까지 치우치거나 공정하지 못할 근심이 없게 됩니다. 우리 나라 동인(東人)·서인(西人)의 당목(黨目)은 선묘조(宣廟朝)에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처음에는 군자·소인의 분별이 심하게 있지는 않았고, 그 때문에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일찍이 세척(洗滌)하여 진정시키려는 생각에서 선조[宣廟]께 진달한 것이 지금 벌써 백여 년이 넘었습니다.
그러나 이 뒤로 양당(兩黨)의 실수는 다시 서로 가리우지 못하여 사건만 꼽더라도 첫째는 정여립(鄭汝立)의 모역(謀逆)에 의한 패몰(敗沒)이고, 둘째는 이이첨(李爾瞻)의 난정(亂政)에 의한 패몰이며, 셋째는 지난날 권간(權奸)의 당에 의한 패몰이니, 모두 동인(東人)의 일변(一邊)에서 나왔습니다. 그러나 그 사이에 남인(南人)이라고 일컫는 것은 조금 구별되어 역시 이름난 선비와 큰 보필(輔弼)이 많았으며, 광해군(光海君)이 인륜을 무너뜨린 날에 이르러서는 모두 임야(林野)에 물러나거나 혹은 대항하여 말하거나 직간(直諫)하는 이도 많았습니다. 이러므로 인조(仁祖)가 즉위하자 등용(登庸)의 왕성함이 서인(西人)과 별다름이 없었으며, 거듭 열성(列聖)께서 다스리는 방도가 있어서 오래 지나간 뒤에야 허물어지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대옥(大獄)015)  이 완전히 마무리 되자 간당(奸黨)은 파출(罷黜)되고 성지(聖志)가 굳어져 조정 의논이 화목해지니, 사정(邪正)이 뚜렷이 밝혀지고 다스리는 교화가 날로 상승해야 하는데, 도리어 곧 혼동되고 시끄러워져서 위란(危亂)의 조짐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대체로 세상의 도덕이 타락하고 인심(人心)이 빠져들어, 다시 들어온 자는 실로 명확하게 현부(賢否)를 분별하지 못하게 되고, 공정한 도리를 행하다가 패몰한 자 역시 각박하고 지나친 폐단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대체로 권간이 죄를 받았을 때는 주벌(誅罰)된 자는 당여(黨與)와 복심(腹心)이었을 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 색목(色目)이 미친 한쪽 사람들을 거의 다 의심하며, 귀양보내고 파직 삭탈하는 데 있어서 반드시 이것으로 구실을 삼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도리에 있어 어찌 한결같이 이를 견지하면서 지난날의 잘못된 궤도를 변경하지 않음이 마땅하겠습니까? 신은 청컨대, 역옥(逆獄)의 간당(奸黨) 및 다른 죄에 관련되어 크게 용납하지 못할 것은 더욱 명백하게 처리하기를, 고려 말엽 정몽주(鄭夢周)가 정한 오죄(五罪)의 예(例)016)  와 같이 하소서.
이러한 유에 해당되지 않고 어질고 능력이 있어 쓸만한 자는 실로 탕척(湯滌)하여 깨끗이 씻어주어 그로 하여금 스스로 새롭게 하도록 함으로써, 원통함을 품거나 인재를 빠뜨리는 탄식이 없게 해야 합니다. 비록 다시 들어온 자가 털끝만큼이라도 편중(偏重)될 근심이 있을 경우 더욱 징계하고 격려한다면 거의 공경하는 아름다움이 이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대체는 참으로 전하께서 우뚝하게 자립하여 인륜을 살피시고 본성을 다하는 것이 아니면, 황극(皇極)의 도를 세워 그것으로 비춰보며, 옳고 그름과 맑고 사특한 것으로 하여금 형감(衡鑑)017)  의 아래에서 도망할 수 없게 할 수 있겠습니까? 피차를 의논할 것 없이 어진 자는 반드시 나아가게 하고 어질지 못한 자는 반드시 물러나게 하여 평이하고 명확한 이치를 밝히소서."
하였다. 그 셋째는 《춘추(春秋)》에 화이지변(華夷之辨)018)  을 인용하여 말하기를,
"남한 산성(南漢山城)에서 나온 수치를 지금껏 씻지 못하고, 옥백(玉帛) 바치기를 목덜미와 등을 서로 바라보듯 하고,019)  오히려 또 그럭저럭 편안하고 기쁘게 여기며, 떳떳한 도리로 그만두지 못할 것같이 보니, 이것이 어찌 우리 신민(臣民)의 편안하게 여길 바이겠습니까? 주자(朱子)가 융흥(隆興)020)   초에 용병(用兵)의 계책을 역설하였고, 무신 봉사(戊申封事)021)  에 이르러서는 수년 동안 내려오면서 기강이 해이해지고 재앙이 싹터서 구구한 동쪽 남쪽의 일도 오히려 이루 다 염려하지 못하는데 어찌 회복을 도모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마침내 대본(大本)과 급무(急務)를 원수인 오랑캐를 멸망시켜 중원(中原)을 회복하는 규모(規模)로 만들었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지금부터 척연(惕然)히 분발하시어 한결같이 효묘(孝廟)의 마음을 마음으로 삼아 힘를 기르고 기미를 살펴서 거의 조만간에 대의(大義)를 밝힐 수 있을 것이니, 뒷날의 계책을 훌륭하게 하소서."
하였고, 또 추록(追錄)한 훈신(勳臣)의 문적에 첩황(貼黃)022)  을 내리라고 한 것에 대해서 이르기를,
"중묘조(中廟朝)에 정국 공신(靖國功臣)이 위훈(爲勳)이 너무 심해서, 문정공(文貞公) 조광조(趙光祖)가 ‘이익의 근원을 한 번 열면 사직(社稷)을 어떻게 할 수 없다.’ 하고, 마침내 개정을 청하자, 간신 남곤(南袞)이 이 기회를 틈타 조광조를 참소하여 죽였습니다. 이번 일이 비록 정국(靖國) 때의 일과 비교하여 어떠한지 알지 못하나, 실로 국조(國朝)에 없었던 폐단입니다. 다만 이익의 근원을 여는 근심일 뿐만 아니라 세상 인정이 더욱 답답해 하고 격렬한데, 하물며 약간 주선한 자들에게 어찌 달리 그 공로에 상주는 방법이 없겠습니까? 가만히 바라건대, 참작하시어 끝내 성덕(聖德)에 누(累)가 되지 않도록 하소서."
하였고, 오죄(五罪)의 예(例)에 의해 첩황(貼黃)을 내리라고 하는 것은 이르기를,
"공양조(恭讓朝)에 정도전(鄭道傳)이 이색(李穡) 등 여러 사람들을 죽이려고 귀양을 많이 보내자 국론이 분열되었는데, 정몽주(鄭夢周)가 임금에게 기록을 살펴서 아울러 내치거나 용서하되, 이 뒤에 다시 전일의 죄를 들추어 내는 자는 무거운 법으로 논죄(論罪)하도록 청하였습니다. 대체로 이번 일은 고려조[前朝]의 일과는 저절로 구별이 되나, 그 죄안(罪案)의 경중을 정하여 국론을 안정시키고 인심을 수렴한 것은 증거나 되니, 성상께서 밝게 살피소서."
하였고, 다시 뒤의 계책을 잘 하는 첩황(貼黃)을 내리라고 하는 것은 이르기를,
"신의 이 말도 전하께서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주린 호랑이의 길목을 감당하도록 바라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 나라가 황조(皇朝)의 은혜를 받은 것이 참으로 다른 나라와 다르니, 대의(大義)를 밝혀서 이 마음을 확립할 수 없다면, 이는 천하가 모두 이적(夷狄)이 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밝게 살피소서."
하였다. 박세채가 당시 바야흐로 사론(士論)을 주장하여 공신 추록(追錄)한 일을 논하였는데, 말이 엄하고 뜻이 정당하였으며, 붕당(朋黨)을 의논한 것도 공정한 마음에서 발로된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수를 갚는 일은 비록 유자(儒者)의 계책이라 할지라도, 이미 심원한 계책이 없으니, 상투적인 말을 면하지 못할 듯하다.

 

지평(持平) 박태유(朴泰維)·유득일(兪得一)등이 〈외방에〉 내쫓아 보임(補任)하였다가 환수(還收)하라는 것으로 인하여 인피(引避)하기를,
"신이 김익훈(金益勳)의 사건에 대해 그가 공을 탐하고 상을 바라며 고변(告變)을 가탁하여 비밀히 아뢴 실상은 대강 진달하였으니, 지금 조목별로 열거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러나 김환이 전익대(全翊戴)를 달래고 협박할 적에 군뢰(軍牢)를 주어 보낸 것과, 전익대가 군문(軍門)에 와서 보고하자 공초(供招)를 받아 구류(拘留)시켰던 것은 모두 증거가 확실한 말입니다. 가사 김익훈이 비록 무고(誣告)할 마음은 없었다고 하더라도, 유명견(柳命堅)의 의심할 만한 흔적을 군문에 보고한 자는 전익대이며, 전익대의 말을 믿고 전하께 아뢴 자는 김익훈입니다. 전익대가 지금 벌써 법에 따라 복주(伏誅)되었으니, 김익훈을 멀리 귀양보내도록 논하는 것은 실로 과중한 것이 아닙니다."
하였는데, 정언(正言) 김구(金構)가 처치(處置)하기를,
"일에 따라 말을 다했으니 직책을 저버리지 않았는데, 엄한 비답(批答)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그러나 견책(譴責)의 명을 중지시키고 도로 옛반열에 임명하시니, 일식과 월식이 고쳐지듯 하여 흠앙(欽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대간(臺諫)의 체통으로 헤아려 보면 다시 혐의할 것이 없으나 정세가 편안하기 어려운 것은 지금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소패(召牌)023)  를 어겼으니 전례로 보아 체임시키는 것이 합당합니다. 박태유는 출사(出仕)시키고 유득일은 체임하도록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대간이 계달(啓達)한 내용이 실정에 맞지 않은 것이 많은데 박태유를 출사시키도록 함은 참으로 그 뜻을 깨닫지 못하겠다."
하였다. 김구(金構)가 곧 처치가 적당한 데서 어긋났다고 하여 인피(引避)하자, 헌부(憲府)에서 처치하여 출사하도록 청하였다.

 

행 호군 윤증(尹拯)이 소(疏)를 올려 부르는 명을 사양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아! 개와 말도 주인을 생각하고 해바라기도 태양(太陽)을 따라 기우는데, 신이 비록 사리에 어둡고 꽉 막혔으나 어찌 유독 이 정성이 없겠습니까? 다만 심사(心事)가 위태롭고 괴로와서 차마 스스로 일반인들과 함께 하지 못하고, 근본과 실상이 텅비고 성기어서 원래 실용에 적합하지 않은데, 오직 이 두 단서가 신의 실상입니다. 한(恨)을 먹음고 고통을 삼키며 일생 동안 기약해도 은혜는 사례할 수 없고 명령은 따를 수 없으니, 한결같이 황송하고 위축되어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하니, 우악하게 비답하고 즉시 벼슬길에 나오도록 하였다.

 

2월 10일 임오

임금이 수찰(手札)을 내리고 사관(史官)을 보내어 윤증에게 전유(傳諭)하게 하기를,
"지난날 사관에게 전유(傳諭)한 비답에 간략하게나마 은근한 뜻을 폈으니, 번연(幡然)히 마음을 돌릴 날을 아침저녁으로 기다렸다. 그러나 성례(誠禮)가 돈독하지 못하여 멀리 떠나려는 뜻을 돌이킬 수 없으니, 깜짝 놀라 계책을 잃는 줄도 깨닫지 못하겠고 잇달아 부끄럽기만 하다. 아! 자리를 비워놓고 생각하는 마음과 휴척(休戚)을 함께 해야 한다는 의리는 앞서의 비답에 다 갖추었으니, 지금 거듭 반복할 필요는 없다. 다만 전후의 부름에 번번이 사정(私情)이 급박하다는 것으로 나오기 어려운 첫째의 의리로 삼는데, 이는 전연 그렇지 않은 것이다. 아! 지금이 어떤 시기인가? 나라의 형세가 대단히 위태롭고 재앙과 이변이 계속 일어나 상하(上下)가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잠시도 편안하지 못하다. 이런 때를 당하여 영부사(領府事)024)  같이 나가고 물러감이 정대(正大)한 이도 오히려 번연히 조정에 나와 몸이 수척하도록 정성을 다하는데, 그대 역시 대대로 녹(祿)을 받는 신하로 어찌 그렇게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은 없어, 한갓 절개만을 지키고자 물러가 향촌(鄕村)에만 누워 있으면서 나라 일을 조금도 걱정없이 보기를 이렇게 매정하게 하는가? 다시 사관을 보내어 거듭 지극한 뜻을 알리니, 빨리 목마르게 기다리는 뜻을 깊이 체득하여 속히 와서 나의 바람을 저버리지 말도록 하라."
하니, 윤증이 자리를 펴고 주벌(誅罰)을 기다리겠으며, 감히 문자로써 다시 우러러 더럽혀서는 안된다는 것으로 답하였다.

 

2월 20일 임진

정언(正言) 유득일(兪得一)이 시골에 있으면서 사연(辭緣)을 진달하여, 거듭 김익훈(金益勳)의 죄상을 논하였다. 그리고 또 처음 아뢴 소(疏) 중에 ‘상하가 화답하고 응종하였다[上下和應]’는 네 글자가 임금을 핍박한 무고라고 논집(論執)한 데에 대하여 변론하였는데, 이미 지나간 일을 다시 제기(提起)할 것이 없다는 것으로 비답하고 조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체로 유득일(兪得一)이 김익훈(金益勳)의 죄를 더하라고 한 뒤로부터 김익훈의 일가붙이들이 떠들썩하게 무리로 일어나서, 역적을 비호한 그 말을 숨은 것까지 들추어내겠다고 하고, 허새(許璽)의 옥사(獄事)가 무위(無爲)로 돌아갔다고 말하였으며, 또 상하가 화답하고 응하였다는 한 글귀를 지적하여 지존(至尊)을 핍박했다고 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김수항 등이 그것을 힘껏 지지하였으며, 송시열이 유득일을 만나 힐책하기를,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않으면 내가 상소하여 임금을 무고한 말을 분변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득일이 다시 이 소(疏)를 올렸는데, 내용이 끝내 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송시열이 더욱 노여워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2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대체로 유득일(兪得一)이 김익훈(金益勳)의 죄를 더하라고 한 뒤로부터 김익훈의 일가붙이들이 떠들썩하게 무리로 일어나서, 역적을 비호한 그 말을 숨은 것까지 들추어내겠다고 하고, 허새(許璽)의 옥사(獄事)가 무위(無爲)로 돌아갔다고 말하였으며, 또 상하가 화답하고 응하였다는 한 글귀를 지적하여 지존(至尊)을 핍박했다고 하였다. 이에 송시열(宋時烈)·김수항 등이 그것을 힘껏 지지하였으며, 송시열이 유득일을 만나 힐책하기를, ‘만약 스스로 변명하지 않으면 내가 상소하여 임금을 무고한 말을 분변할 것이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유득일이 다시 이 소(疏)를 올렸는데, 내용이 끝내 굴하지 아니하였으므로 송시열이 더욱 노여워하였다."

 

2월 27일 기해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김익훈(金益勳)을 신구(伸救)한 것은 잘못 전파된 말이라 돌렸다. 【원소(原疏)는 위에 보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우선 김익훈(金益勳)의 일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니, 보는 이들이 많이들 그것을 말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잘못 전파된 말이라고 두려워하는 것같이 하여 감히 구원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일을 담당한 대신을 증거로 삼았으니, 그가 김익훈을 구원에 더욱 힘썼으며, 그것이 지난날 조목(趙穆)의 일을 끌어서 말한 것과 서로 반대가 되므로 보는 이들이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박세채(朴世采)가 과감하게 김익훈을 논죄(論罪)할 적에 그 지나치게 중하게 할 것을 염려하여 진정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가 이것을 소(疏)로 진달하여 스스로 변명하자, 여기에서 틈이 생겼고 서로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이 많이 행하여졌다. 이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더욱 송시열에게 붙어서 김익훈을 위하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2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우선 김익훈(金益勳)의 일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니, 보는 이들이 많이들 그것을 말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잘못 전파된 말이라고 두려워하는 것같이 하여 감히 구원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일을 담당한 대신을 증거로 삼았으니, 그가 김익훈을 구원에 더욱 힘썼으며, 그것이 지난날 조목(趙穆)의 일을 끌어서 말한 것과 서로 반대가 되므로 보는 이들이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박세채(朴世采)가 과감하게 김익훈을 논죄(論罪)할 적에 그 지나치게 중하게 할 것을 염려하여 진정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가 이것을 소(疏)로 진달하여 스스로 변명하자, 여기에서 틈이 생겼고 서로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이 많이 행하여졌다. 이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더욱 송시열에게 붙어서 김익훈을 위하게 되었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2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우선 김익훈(金益勳)의 일을 분명히 말하고자 하니, 보는 이들이 많이들 그것을 말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잘못 전파된 말이라고 두려워하는 것같이 하여 감히 구원하지 않는 것처럼 하였다. 그러나 가만히 일을 담당한 대신을 증거로 삼았으니, 그가 김익훈을 구원에 더욱 힘썼으며, 그것이 지난날 조목(趙穆)의 일을 끌어서 말한 것과 서로 반대가 되므로 보는 이들이 놀라고 이상스럽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또 박세채(朴世采)가 과감하게 김익훈을 논죄(論罪)할 적에 그 지나치게 중하게 할 것을 염려하여 진정시켰다고 하였다. 그러나 박세채가 이것을 소(疏)로 진달하여 스스로 변명하자, 여기에서 틈이 생겼고 서로 교묘하게 꾸며대는 말이 많이 행하여졌다. 이 때문에 조정의 의논이 더욱 송시열에게 붙어서 김익훈을 위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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