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4권, 숙종 9년 1683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23. 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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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일 갑진

김익훈(金益勳)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4대문 밖으로 내치도록 명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은 비록 김익훈을 위하여 매우 힘썼으나, 박세채(朴世采)가 묘당(廟堂)에서 짐작하여 그 죄를 결단해야 할 것이라고 하니, 김수항이 마지못해 그것을 따르고 마침내 경연(經筵)중에 계달하였다. 김익훈의 죄상은 전후 대간(臺諫)의 계달에 빠뜨림 없이 나열하였는데, 대저 일자 무식으로 행실도 없고 부끄러움도 없으니, 사대부(士大夫)의 반열(班列)에 끼게 할 수 없는 것이다. 김수항의 천거로 장수(將帥)의 직임에 제수된 것도 이미 공론에 비난을 받았으며, 또 그 밀계(密啓)에 김환(金煥)과 전익대(全翊戴)의 괴수가 되었으니, 비록 대간의 말이 아니라도 대신으로서 통렬하게 억압하기에 겨를이 없었어야 했다. 그런데 김수항은 송시열(宋時烈)과 바야흐로 또 비호하며 아끼어 한마디도 그를 죄주자고 하지 아니하니, 이것이 대간의 의논이 격렬하게 된 이유이다.
송시열은 50년 동안 유학자들의 영수였으며, 김수항도 문장과 풍체와 인망을 사류(士類)들이 기대하였는데, 어찌 비밀히 고발하는 풍토를 열고 외척의 집안에 아첨해서야 되겠는가? 그리고 송시열은 여러 번 위태로운 화를 겪으면서 감정과 분노가 마음속에 가득 차고 혈기(血氣)가 발로함이 점점 심술(心術)을 더렵혀 조정에 나온 뒤로 언행(言行)이 판연히 딴 사람이 되었고, 김수항 역시 무르고 나약하여 스스로 견지하지 못하고 외척의 제압을 받기를 곽광(霍光)이 양창(楊敞)에게 한 것과 같았으니, 이것이 사류(士流)가 남들보다 뛰어나게 자립하여 그들과 함께 돌아가게 되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는 이유이다.
박세채(朴世采)는 한 세대의 큰 선비로 역시 송시열에게 불만을 가지고 그 둘로 나뉘게 했다는 지목을 피하지 못하는데, 사류들의 종주(宗主)가 되었으니, 공의(公義)가 있는 곳은 백대(百代)후라도 속일 수 없다. 당인(黨人)들이 송시열을 배척하여 물리치기를 간사한 당에 빠져들었다고 말을 하는데, 아! 김익훈 같은 무뢰자를 보호하며, 여러 외척들의 한창 치솟는 세력을 도와 선비들의 격동해 일어나는 의논을 깍는 자가 간사한 무리인가? 무고(誣告)하여 남을 해치는 것을 통박(痛駁)하고, 권세 있고 지위가 높은 사람들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것을 미워하여 그렇게 하는 것 때문에 뇌정(雷霆)025)  을 범하여 배척당해 내침을 당해도 후회하지 않는 자가 간사한 무리인가?
천하의 시비(是非)는 그 근원을 관찰함이 마땅하다. 이미 김익훈을 위하는 자들을 노당(老黨)이라 하고, 김익훈을 공격하는 자들을 소론(少論)이라고 하니, 김익훈의 시비가 정해지면 노론과 소론의 시비도 정해질 것이다. 송시열이 아무리 삼조(三朝)를 역임한 원로(元老)라 할지라도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해야 군자(君子)라 하겠는데, 의논이 송시열에게서 나오면 시비를 따지지도 않고 구차하게 억지로 따르도록 하며, 함께 훈척(勳戚)의 문에 붙따르게 하는데 이런 이치가 있을 수 있겠는가? 당인(黨人)들이 또 소론(少論)을 남인(南人)에게 아첨하여 잘 보임으로써 후일의 계교를 삼았다고 하니, 아! 10년 뒤에 있을 일을 10년 앞에 보는 그런 이치가 과연 있을 수 있겠는가? 더구나 눈앞의 영리(榮利)를 버리고 세력가가 미워하고 원망함을 감수하면서 스스로 꺼꾸러짐을 취하는 것이 어찌 인정(人情)이겠는가? 당인(黨人)인 자가 이치에 굴하면 공의(公議)에 항거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 알것인데, 걸핏하면 이런 식으로 남을 터무니 없이 얽어매니, 그렇다면 군자(君子)가 후일에 혐의가 있을까 염려하여 착한 일 하기를 꺼린단 말인가?
이것 역시 만족스럽게 분변하지 못하겠다. 그리고 이상(李翔)의 한 차례 욕설한 것을 명언(名言)이라고 하는데는 더욱 가소롭다. 갑인년026)   뒤에 송시열을 얽어매던 자들은 지금은 모두 귀향을 갔거나 다 없어졌는데, 무슨 보복이 부족하여 감히 무고(誣告)로 죄를 주며, 다른 뜻이 있다고 하는가? 이상 같은 무리야 그 말을 책할 것이 무엇이며, 또 무슨 칭찬할 것이 있다고 경중(輕重)이 있는 듯이 논의하는가? 그러나 김익훈을 삭출(削黜)한 것이 비록 그 죄가 충분하다고는 못하겠으나 역시 다소 징계가 될 만하니, 대간(臺諫)의 의논도 참작해서 해야 하는데, 오히려 다시 힘껏 쟁론함으로써 원한이 뼈끝에 들어가고 당화(黨禍)가 더욱 심하게 하였다. 정백자(程伯子)027)  가 이른바 ‘우리 무리가 그 책망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고 한 것 역시 오늘 일을 이른 것이니, 너무 심하게 불인(不仁)을 미워하는 것도 경계할 줄 알아야겠다.

 

3월 7일 기유

송시열(宋時烈)이 휴치(休致)028)  를 청하였다. 【상세한 것은 위에 보인다.】 송시열의 휴치를 사사로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말하면 비록 곡진히 그의 소원을 이루려고 한 것이라고 할 수 있으나, 조정의 입장에서 말하면 휴치를 허락하지 않는 것이 곧 조종조(祖宗朝)의 옛법이다. 간혹 다행히 이룬 자는 특별한 은혜에서 나온 것이지, 연고 때문에 언제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박세채(朴世采)·조지겸(趙持謙)등 여러 사람이 휴치(休致)를 허락하지 말도록 청한 것은 특별히 사체(事體)로서 말한 것인데, 처음 역사를 편찬한 자들이 ‘겉으로 높이면서 가만히 곤궁하게 한다.’고 말하였으니, 이는 사실과 다르다. 그러나 이때에 송시열의 행위를 공의(公議)가 만족하게 여기지 않았는데, 선비들이 오히려 내속(內屬)되어 드러나게 배척하지 못한 것은 단지 숭상한 지가 특별히 오래 되었으므로 차마 하루아침에 잘라버리지 못해서였다. 그러니 가부를 결정짓지 못하고 우물쭈물하는 병통이 있다고 말하는 것은 가하겠지만, 심술이 아름답지 못하다고 말한다면, 역시 당인(黨人)의 참소하여 얽어 매는 수단이니, 이는 분변하지 않을 수 없다. 김수항(金壽恒)이 본 직임의 평소의 늠료(廩料) 외에 또 주육(酒肉)과 늠속을 더 주도록 청한 것은 비록 넉넉히 예우(禮優)하라는 뜻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녹봉은 그 수고에 대한 보상으로, 이미 정사를 그만두고 벼슬을 쉰다면, 다시 직임을 맡지 않는 것이며, 이미 직임을 맡지 않는다면 또 어찌 그 책임의 녹을 주어야겠는가? 그 직임의 녹뿐만이 아니고 평소의 늠료 외에 더 준다면, 이는 명색만 휴치(休致)하고 식록(食祿)은 도리어 그 직책을 맡은 사람보다 우대하는 것이다. 사양하거나 받는 예절은 구차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데, 송시열은 단지 전문(箋文)을 올리고 머리를 조아려 사례했을 뿐, 끝내 힘써 사양함이 없이 편안하게 받았으니, 예의를 분변하지 않고 만종(萬鍾)029)  을 받는 자가 바로 송시열을 이름인가?

 

3월 23일 을축

임금이 수찰(手札)을 내려 윤증(尹拯)을 돈독한 말로 불렀는데, 김수항(金壽恒)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윤증이 사양하고 오지 않음을 사관(史官)이 복명하니, 또 수찰을 내리고 가서 유시(諭示)하게 하였는데, 윤증이 수찰을 대하여 종일토록 감읍(感泣)하여 밤새도록 벽을 감싸며 절대로 명을 받들 길이 없으니, 빨리 형벌을 받기를 바란다는 것으로 대답했다. 임금이 또 유시를 내리고 사관을 보내 함께 오도록 하였는데, 윤증이 글을 올려 극력 사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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