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4일 병자
주강(晝講)에서 정언(正言) 이동욱(李東郁)이 생각한 바를 진달(陳達)하기를,
"김중하(金重夏)·김환(金煥)의 사건을 양사(兩司)에서 해를 넘기면서 다투어 논집(論執)했는데도, 오히려 윤허하지 않으셨습니다. 대저 전익대(全翊戴)는 다만 유명견(柳命堅) 한 사람을 고발했는데도 벌써 법에 따라 복주되었습니다. 김중하는 여러 사람을 나열하여 고발했으니, 그가 무고한 것이 전익대보다 심한데도 전익대는 죽고 김중하는 살아 있습니다. 형벌과 정사(政事)가 이와 같이 어그러지니, 어떻게 나라를 다스리겠습니까?"
하고, 바로 입시(入侍)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에게 내리어 묻도록 청하였는데, 집의(執義) 신양(申懹)·교리(校理) 오도일(吳道一) 등이 대답한 것도 이동욱과 똑같이 반복하여 힘써 다투었다. 사직(司直) 박세채(朴世采)가 말하기를,
"삼사(三司)에서 입이 아프도록 힘써 다투는데도 성상께서 시종 어렵게 여기시니, 국가의 대체(大體)는 대각(臺閣)에서 다투는 바는 대신에게 물어서 결단하시되, 대신에게 만일 이해 득실이 있어 대각에서 또 따라서 다투는 것은 임금된 이가 절충하여 재단(裁斷)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영부사(領府事) 김수흥(金壽興)등은 모두 말하기를,
"그를 죽이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였고, 이동욱이 다시 변서(變書) 중에 청밀(淸密)030) 을 제거해야 큰일을 이룰 수 있으며, ‘남아가 공을 세울 때’라는 등의 말로 그가 무고(誣告)한 것을 밝혔다. 박세채가 말하기를,
"지금 대신(臺臣)의 말을 들으니, ‘큰일을 이룰 만하며 남아가 공을 세울 때’라는 등의 말은 그가 무고한 것이 분명합니다. 통쾌하게 그의 의논을 따라 법을 바로 잡으소서."
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 뒤에 임금이 송시열(宋時烈)을 대하여 김중하(金重夏)의 사건을 세 번 물었는데, 마침내 대답하지 않았다. 송시열이 아무리 옥안(獄案)을 상고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옥안의 내용을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모른다고 핑계대었고, 임금이 대간(臺諫)의 계문(啓聞)으로 물었으나, 오히려 입을 굳게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대개 그 뜻은 가만히 김익훈(金益勳)을 보호하기 때문에 임금의 물음이 세 번에 이르렀어도 한 마디의 대답이 없었다. 그가 김익훈의 처지를 위한 것은 주밀하다고 하겠으나 임금을 섬기는 데에는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그가 평일에 어떻게 자처(自處)하였기에 이와 같이 하는가?
4월 10일 임오
주강(晝講)에서 사직(司直) 박세채(朴世采)가 진달하기를,
"태조 대왕(太祖大王)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는 것을 상세하게 살펴야 합니다."
하니, 【경연(經筵)의 말은 위에 보인다.】 임금이 말하기를,
"상세하게 살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옳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당시에 박세채(朴世采)가 이것을 여러 번 송시열(宋時烈)에게 말하기를, ‘회군(回軍) 한 가지 일은 이것이 원수(元帥) 때의 일이니 임금의 휘호와 관계가 없고, 또 주자(朱子)도 평소에 일찍이 송조(宋朝) 개국시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혁명(革命) 때의 일을 제기하여 후세 사람들의 말썽을 야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하니, 송시열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박세채가 상언(上言)하였다. 또 김중하(金重夏)의 사건을 진달하여 빨리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함이 마땅하고, 서로 버티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당시에 조정 의논이 모두 존호하는 일을 미안하게 여겨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지평(持平) 박태유(朴泰維)가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로 논란하니 보는 이들이 다투어 만류하였으므로, 박태유가 소를 가져다 이 단락을 삭제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문인(門人)으로 〈삭제하기 전의〉 원소(原疏)를 얻어 보고 전파한 자가 있어서, 박익무(朴益茂)가 소로 〈송시열의 허물을〉 들추어 내게 되자, 송시열이 또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이 때문에 박태유가 마침내 배척을 당하여 〈외직(外職)〉에 보임되어 졸(卒)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6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643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당시에 박세채(朴世采)가 이것을 여러 번 송시열(宋時烈)에게 말하기를, ‘회군(回軍) 한 가지 일은 이것이 원수(元帥) 때의 일이니 임금의 휘호와 관계가 없고, 또 주자(朱子)도 평소에 일찍이 송조(宋朝) 개국시의 일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으니, 지금 혁명(革命) 때의 일을 제기하여 후세 사람들의 말썽을 야기시킬 필요는 없다.’고 하니, 송시열이 따르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박세채가 상언(上言)하였다. 또 김중하(金重夏)의 사건을 진달하여 빨리 삼사(三司)의 청을 윤허함이 마땅하고, 서로 버티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고 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당시에 조정 의논이 모두 존호하는 일을 미안하게 여겨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지평(持平) 박태유(朴泰維)가 시골에 있으면서 상소로 논란하니 보는 이들이 다투어 만류하였으므로, 박태유가 소를 가져다 이 단락을 삭제하였다. 그런데 송시열의 문인(門人)으로 〈삭제하기 전의〉 원소(原疏)를 얻어 보고 전파한 자가 있어서, 박익무(朴益茂)가 소로 〈송시열의 허물을〉 들추어 내게 되자, 송시열이 또 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였다. 이 때문에 박태유가 마침내 배척을 당하여 〈외직(外職)〉에 보임되어 졸(卒)하였다."
4월 14일 병술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이 관동(關東) 지방에 놀러 가면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는데, 좌상(左相) 민정중(閔鼎重)이 그 사실을 아뢰자, 의원을 보내어 호행(護行)하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조정의 의논에 불평이 쌓여서 누이의 문병을 핑계로 그대로 관동 지방을 유람하였다. 아! 성상(聖上)의 기대가 이와 같고, 시사(時事)의 근심됨이 이와 같은데, 이미 분명한 말과 바른 의논으로 국가의 일에 언급함도 없었고, 또 현실을 도피하는 행동을 일으켰으니, 그가 일컬는 바 ‘종국(宗國)이 장차 망할까 걱정되어 차마 종국을 멀리 떠나지 못한다’ 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3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조정의 의논에 불평이 쌓여서 누이의 문병을 핑계로 그대로 관동 지방을 유람하였다. 아! 성상(聖上)의 기대가 이와 같고, 시사(時事)의 근심됨이 이와 같은데, 이미 분명한 말과 바른 의논으로 국가의 일에 언급함도 없었고, 또 현실을 도피하는 행동을 일으켰으니, 그가 일컬는 바 ‘종국(宗國)이 장차 망할까 걱정되어 차마 종국을 멀리 떠나지 못한다’ 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4월 16일 무자
추시(追諡)하는 일로 시임(時任)과 원임(原任)의 대신 및 예조(禮曹)와 옥당(玉堂)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고, 【경연(經筵)의 말은 위에 보인다.】 다만 추시를 행하되 신주(神主)를 고쳐 쓰지는 않은 것으로 결정하였다. 삼사(三司)에서 이어 김중하(金重夏)의 사건을 대신(大臣)에게 내려 묻도록 청하였는데,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이 처음 견해의 잘못을 허물하여 말하기를,
"김중하가 이미 무고(誣告)를 하였으니, 대간(臺諫)들이 다투어 고집함은 참으로 옳습니다."
하였고, 민정중(閔鼎重)은 말하기를,
"신은 전익대(全翊戴)가 사건을 하문(下問)하실 적에도 김중하를 죽여야 한다는 상황을 진달하였습니다."
하였으며,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謙)은 강력하게 말하기를,
"김환(金煥)만 죄를 면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하니, 김수항 등은 모두 국문하면 부당하다고 말하였다. 임금이 말하기를,
"김중하는 벌써 참작하여 처리하였으니 내가 윤허할 리가 없고, 김환은 원래 국문할 일이 없음이 분명하다."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지난날 경연(經筵) 석상에서 생각한 바를 말하지 않고, 그가 영동(嶺東)으로 갈 적에 민정중에게 말하기를, ‘당일 삼사(三司)의 잘못을 김수항(金壽恒)이 분변하여 논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량이 있으나, 삼사에서 하문하도록 강청한 것은 크게 체통을 상하였다.’ 하였다. 대체로 일을 논란하는 도리는 다만 옳고 그름을 볼 뿐인데, 진실로 다투어야 할 것이라면 비록 임금의 높은 위엄 앞에서 쟁론(爭論)하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터인데, 어찌 체통으로 그 사건의 옳고 그름을 결단할 것인가?"
【태백산사고본】 14책 14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43면
【분류】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송시열(宋時烈)이 지난날 경연(經筵) 석상에서 생각한 바를 말하지 않고, 그가 영동(嶺東)으로 갈 적에 민정중에게 말하기를, ‘당일 삼사(三司)의 잘못을 김수항(金壽恒)이 분변하여 논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아량이 있으나, 삼사에서 하문하도록 강청한 것은 크게 체통을 상하였다.’ 하였다. 대체로 일을 논란하는 도리는 다만 옳고 그름을 볼 뿐인데, 진실로 다투어야 할 것이라면 비록 임금의 높은 위엄 앞에서 쟁론(爭論)하는 것도 불가함이 없을 터인데, 어찌 체통으로 그 사건의 옳고 그름을 결단할 것인가?"
4월 17일 기축
행 사직(行司直) 박세채(朴世采)가 상소하였는데, 대략 이르기를,
"어제 대신(大臣)과 유신(儒臣)을 불러서 다시 시호(諡號)를 추상(追上)하는 일을 의논하도록 명하셨는데, 이미 앞서의 의논에 의하여 거행을 하되 다시 신주(神主)를 고쳐 쓰지는 않는 것으로 결정하셨다고 하니, 신은 지극히 두려움을 이기지 못하겠습니다. 대체로 신의 아룀이 조정 의논이 정해진 뒤에 있었으니, 필경에는 참람하다는 죄로 벌을 받아야 된다는 점은 실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 본래의 뜻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종묘(宗廟)의 대체는 조그마한 경솔도 용납되지 않으며, 신자(臣子)의 정성과 예(禮)를 스스로 다해야 하기 때문에 감히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지금 조정 의논은 어리석은 신이 아뢴 뜻에 대하여 분명히 변론하여 통렬히 배척하였으니, 마음속에 남겨둔 것은 없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그 청을 들어 완전히 결정된 것이 마침내 여기에서 그쳤고, 그 전후의 두 설(說) 중에서 【송시열의 추호(追號) 및 김석주가 개제(改題)하지 않아야 한다는 양론(兩論)을 가리킨 것이다.】 일진 일퇴하다가 동쪽으로도 못하고 서쪽으로도 못가서 끝내는 여러 군하(群下)의 바람과 사방의 기대에 모두 적합하게 못하였습니다."
하였고, 인하여 경연(經筵) 석상에서 김중하(金重夏)의 일을 대신들에게 묻도록 청한 것이 매우 체통에 어그러졌다는 의논이 있음을 허물하여 진달하니, 답하기를,
"두 건의 일은 그대가 실수한 것이 없으니 뜻을 편안히 하고 사퇴하지 말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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