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2일 계축
사관(史官)을 보내서 이상(李翔)을 효유(曉諭)하여 불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상(李翔)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데다 재산(財産)을 경영(經營)하는 데 장점이 있고 지론(持論)이 음각(陰刻)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에게 빌붙고 의탁하여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더불어 같이 유현(儒賢)을 선발하는 데 뽑히었다. 형제 세 사람이 귀현(貴顯)하게 되자 세력(勢力)이 조정을 기울일 만하였고, 당시의 재신(宰臣)들이 천거(薦擧)하고 끌어주어 비옥(緋玉)에까지 박탁되었으나, 이상은 또한 스스로 유자(儒者)로 처신하였고, 언론(言論)과 거취(去就)가 송시열에게 영향을 받으니, 기롱(譏弄)하고 조소(嘲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71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 인물(人物)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상(李翔)은 불학무식(不學無識)한데다 재산(財産)을 경영(經營)하는 데 장점이 있고 지론(持論)이 음각(陰刻)하였는데, 송시열(宋時烈)에게 빌붙고 의탁하여 박세채(朴世采)·윤증(尹拯)과 더불어 같이 유현(儒賢)을 선발하는 데 뽑히었다. 형제 세 사람이 귀현(貴顯)하게 되자 세력(勢力)이 조정을 기울일 만하였고, 당시의 재신(宰臣)들이 천거(薦擧)하고 끌어주어 비옥(緋玉)에까지 박탁되었으나, 이상은 또한 스스로 유자(儒者)로 처신하였고, 언론(言論)과 거취(去就)가 송시열에게 영향을 받으니, 기롱(譏弄)하고 조소(嘲笑)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5월 15일 병진
소결(疏決)을 행하고, 김익훈(金益勳)의 삭출(削黜)을 풀어주라고 명하자, 삼사(三司)에서 다투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일은 위에 보인다.】 사신은 말한다. "김익훈(金益勳)은 고(故)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데, 추패(麤悖)하고 행검(行檢)이 없었으며, 글자 한 자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그 백부(伯父) 김집(金集)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너는 처음에 사납고 패려(悖戾)한 것으로 이름을 얻고, 다시 말[馬]을 다루는 것으로 발신(發身)하였으니, 우리 집안의 가풍(家風)이 땅을 쓴듯이 〈자취가〉 없다.’ 하였다. 폐부(肺腑)를 다하는 신하로 위탁됨에 이르러서는 인연(寅緣)하고 의부(依附)해서 백도(白徒)로서 갑자기 현달(顯達)하였는데, 처음에는 허적(許積)에게 빌붙어 허적이 그 재주와 국량(局量)을 천거하였으나, 허적이 패망함에 이르러서는 보사훈(保社勳)에 같이 기록되었다. 김석주(金錫胄)의 응견(鷹犬)031) 이 되어서는 기찰(譏察)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무뢰배(無賴輩)들을 많이 끌어모아 이목(耳目)을 널리 퍼뜨려 놓았으며, 김환(金煥)과 더불어 깊이 서로 체결(締結)하였다. 그때 연좌(緣坐)되어 폐고(廢錮)된 사람들이 한강(漢江)가에 많이 있었는데, 김환을 위하여 집을 사서 이웃에 거처하며 사정을 탐지(探知)하게 하고, 또 역적(逆賊) 허새(許璽)와 사귀어, 몰래 이회(李)·한수만(韓壽萬)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허새의 집에 모여 모의(謀議)케 하였는데, 절간(折簡)032) 하여 맹약(盟約)함에 이르자 드디어 김익훈에게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김익훈이 듣고서 기뻐하여 화약(火藥)과 융기(戎器)를 내어다가 허새가 나간 틈을 타서 그 집에 실어다 놓고서 즉시 이회와 한수만으로 하여금 상변(上變)하게 하고, 또 전익대(全翊戴)를 위협하여 무고(誣告)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스스로 아방(兒房)으로 가서 밀계(密啓)하였기 때문에 이날 연중(筵中)에서 비록 김석주가 김익훈을 비호(庇護)하였을지라도, 화약의 일은 숨길 수가 없었으니, 이로써 그 무고(誣告)하였음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71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031] 응견(鷹犬) : 부하가 되어 분주히 돌아다님.[註 032] 절간(折簡) : 가운데를 접은 짧은 편지.
사신은 말한다. "김익훈(金益勳)은 고(故)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데, 추패(麤悖)하고 행검(行檢)이 없었으며, 글자 한 자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그 백부(伯父) 김집(金集)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너는 처음에 사납고 패려(悖戾)한 것으로 이름을 얻고, 다시 말[馬]을 다루는 것으로 발신(發身)하였으니, 우리 집안의 가풍(家風)이 땅을 쓴듯이 〈자취가〉 없다.’ 하였다. 폐부(肺腑)를 다하는 신하로 위탁됨에 이르러서는 인연(寅緣)하고 의부(依附)해서 백도(白徒)로서 갑자기 현달(顯達)하였는데, 처음에는 허적(許積)에게 빌붙어 허적이 그 재주와 국량(局量)을 천거하였으나, 허적이 패망함에 이르러서는 보사훈(保社勳)에 같이 기록되었다. 김석주(金錫胄)의 응견(鷹犬)031) 이 되어서는 기찰(譏察)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무뢰배(無賴輩)들을 많이 끌어모아 이목(耳目)을 널리 퍼뜨려 놓았으며, 김환(金煥)과 더불어 깊이 서로 체결(締結)하였다. 그때 연좌(緣坐)되어 폐고(廢錮)된 사람들이 한강(漢江)가에 많이 있었는데, 김환을 위하여 집을 사서 이웃에 거처하며 사정을 탐지(探知)하게 하고, 또 역적(逆賊) 허새(許璽)와 사귀어, 몰래 이회(李)·한수만(韓壽萬)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허새의 집에 모여 모의(謀議)케 하였는데, 절간(折簡)032) 하여 맹약(盟約)함에 이르자 드디어 김익훈에게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김익훈이 듣고서 기뻐하여 화약(火藥)과 융기(戎器)를 내어다가 허새가 나간 틈을 타서 그 집에 실어다 놓고서 즉시 이회와 한수만으로 하여금 상변(上變)하게 하고, 또 전익대(全翊戴)를 위협하여 무고(誣告)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스스로 아방(兒房)으로 가서 밀계(密啓)하였기 때문에 이날 연중(筵中)에서 비록 김석주가 김익훈을 비호(庇護)하였을지라도, 화약의 일은 숨길 수가 없었으니, 이로써 그 무고(誣告)하였음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71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註 031] 응견(鷹犬) : 부하가 되어 분주히 돌아다님.[註 032] 절간(折簡) : 가운데를 접은 짧은 편지.
사신은 말한다. "김익훈(金益勳)은 고(故) 유신(儒臣) 김장생(金長生)의 손자인데, 추패(麤悖)하고 행검(行檢)이 없었으며, 글자 한 자 모르는 까막눈이었다. 그 백부(伯父) 김집(金集)이 일찍이 편지를 보내어 이르기를, ‘너는 처음에 사납고 패려(悖戾)한 것으로 이름을 얻고, 다시 말[馬]을 다루는 것으로 발신(發身)하였으니, 우리 집안의 가풍(家風)이 땅을 쓴듯이 〈자취가〉 없다.’ 하였다. 폐부(肺腑)를 다하는 신하로 위탁됨에 이르러서는 인연(寅緣)하고 의부(依附)해서 백도(白徒)로서 갑자기 현달(顯達)하였는데, 처음에는 허적(許積)에게 빌붙어 허적이 그 재주와 국량(局量)을 천거하였으나, 허적이 패망함에 이르러서는 보사훈(保社勳)에 같이 기록되었다. 김석주(金錫胄)의 응견(鷹犬)031) 이 되어서는 기찰(譏察)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아, 무뢰배(無賴輩)들을 많이 끌어모아 이목(耳目)을 널리 퍼뜨려 놓았으며, 김환(金煥)과 더불어 깊이 서로 체결(締結)하였다. 그때 연좌(緣坐)되어 폐고(廢錮)된 사람들이 한강(漢江)가에 많이 있었는데, 김환을 위하여 집을 사서 이웃에 거처하며 사정을 탐지(探知)하게 하고, 또 역적(逆賊) 허새(許璽)와 사귀어, 몰래 이회(李)·한수만(韓壽萬)으로 하여금 밤낮으로 허새의 집에 모여 모의(謀議)케 하였는데, 절간(折簡)032) 하여 맹약(盟約)함에 이르자 드디어 김익훈에게 달려가서 보고하였다. 김익훈이 듣고서 기뻐하여 화약(火藥)과 융기(戎器)를 내어다가 허새가 나간 틈을 타서 그 집에 실어다 놓고서 즉시 이회와 한수만으로 하여금 상변(上變)하게 하고, 또 전익대(全翊戴)를 위협하여 무고(誣告)하게 하였다. 그리고 또 스스로 아방(兒房)으로 가서 밀계(密啓)하였기 때문에 이날 연중(筵中)에서 비록 김석주가 김익훈을 비호(庇護)하였을지라도, 화약의 일은 숨길 수가 없었으니, 이로써 그 무고(誣告)하였음을 단정할 수 있는 것이다."
5월 18일 기미
그 때 사람을 천거(薦擧)하라는 명(命)이 있었는데, 무장(武將)을 모두 유사(儒士)로 천거하였으므로, 추고(推考)하라 명하고 다시 무인(武人)을 천거해 올리도록 하였다.
5월 21일 임술
간원(諫院)에서 아뢰기를,
"전(前) 지평(持平) 김만길(金萬吉)은 김익훈(金益勳)의 조카로서 집의(執義) 신양(申懹)을 처치(處置)하였는데, 전의 일을 삽입(揷入)하여 제멋대로 공척(攻斥)하였으니, 그 친혐(親嫌)을 돌아보지 아니하고 때를 타서 유감을 드러낸 정상이 정말로 몹시 놀랍습니다. 청컨대, 파직(罷職)을 명하소서."
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소결(疏決)하였을 때, 신양(申懹)이 이미 힘써 김익훈(金益勳)은 죄가 중대(重大)하여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또 다른 일을 논하다가 사실을 잃었으므로 인피(引避)하였는데, 김만길이 처치하여 체차(遞差)시킬 것을 청하여 말하기를,
"일을 논한 것이 사실을 잃었고, 지난날의 피사(避辭)에서는 스스로 이기기를 좋아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였으므로, 물의(物議)가 떠들썩하였다. 김만길이 스스로 불안하게 여겨 인피하여 체차되었는데, 이에 이르러 간원의 탄핵(彈劾)을 받게 된 것이었다.
5월 29일 경오
장령(掌令) 심극(沈極)이 권지(權持)를 처치(處置)하였는데, 【계사(啓辭)는 위에 보인다.】 엄(嚴)한 비답(批答)을 받고 밤이 깊어서야 인피(引避)하였다. 승지(承旨) 김진귀(金鎭龜)와 심유(沈攸)가 같이 직숙(直宿)하고 있었는데, 김진귀가 인혐(引嫌)하여 나가지 않고 심유를 사주(使嗾)하여 밤이 깊었다고 핑계를 대면서 봉입(捧入)하지 않으며, 갔다가 왔다가 서로 버티다가 날이 밝을 무렵에야 비로소 봉입(捧入)하니, 사람들이 모두 놀랍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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