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4권, 숙종 9년 1683년 6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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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일 임신

우의정(右議政)        김석주(金錫胄)가 소(疏)로써 김익훈(金益勳)을 구(救)하자,          【소(疏)는 위에 보인다.】                부응교(副應敎)        박태손(朴泰遜)이 소(疏)로 공척(攻斥)하였는데,          【소(疏)는 위에 보인다.】         엄(嚴)한 비답(批答)을 받았다.          【비답(批答)은 위에 보인다.】                지평(持平)        유득일(兪得一) 또한 인피(引避)하면서 말하기를,
"김익훈이 뒤이어 아방(兒房)에서 밀계(密啓)하였으니, 마음과 계책은 음험하고 비밀스러우며, 융물(戎物)을 갖추어 주었으니 정절(情節)은 측량(測量)하기 어려워, 위로 조신(朝紳)에서부터 아래로 위포(韋布)와 어리석은 아낙네, 걸어다니는 우마(牛馬)에 이르기까지 깊이 미워하고 질시(嫉視)하지 않음이 없는데, 지금 엎드려 김석주(金錫胄)의 차본(箚本)을 보니, 김익훈을 신구(伸救)하고 대신(臺臣)을 공척(攻斥)하여 그 극(極)을 다 쓰지 아니한 바가 없습니다. 국가(國家)가 의지하고 믿으며 숭신(崇信)하는 바는 대신(大臣)인데, 대신이 이와 같다면 전하의 나라는 끝내 위태로와 망하는 데 이른 뒤에야 그칠 것입니다. 김익훈의 예전부터의 간악함과 오래 묵은 음험스러움을 반드시 자세히 거론할 것은 없겠습니다만, 화약(火藥) 등의 물건에 이르서는, 역적 허새(許璽)가 출타(出他)하였을 때 던져넣었고, 던져넣은 사람은 한수만(韓壽萬)이었으며, 김익훈이 기찰(譏察)하는 것을 담당(擔當)하였으니, 대저 어찌 알지 못할 이치가 있겠습니까? 그 옥사(獄事)를 크게 벌여 공(功)과 상(賞)을 바란 마음은 진실로 길가는 사람도 아는 바입니다. 오늘날 훈척(勳戚)의 권세(權勢)가 날로 더욱 성(盛)해지고, 형정(刑政)이 문란(紊亂)하며 시비(是非)가 어긋나서, 자연히 하늘이 경책(警責)을 보이게 되어 뜨거운 해가 불타는 듯하니,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이것이 어떠한 기상(氣象)인지요? 상신(相臣)의 차자(箚子)는 침척(侵斥)을 크게 더하였고, 전하의 비답(批答)은 드러나게 최절(摧折)됨을 보이셨으니, 한쪽 손과 한 마디 말로는 조정의 기강을 깨끗하게 하고 성세(聖世)를 돕는 가망이 없을 것입니다."
하니, 임금이 비답(批答)이 지극히 엄하였다. 공조 참판(工曹參判)        박세채(朴世采)가 상소(上疏)하기를,
"오늘날 대신(大臣)과 대신(臺臣)이 능히 그 정상(情狀)에 인협(寅協)하는 바가 있음을 두루 알지 못하는데, 이것이 비록 김익훈(金益勳)의 일에서 나온 것이나, 물의(物議)가 떠들썩하게 들끓어, 그 사이에 하수(下手)하려고 하지 않던 사람들도 곧 작처(酌處)의 논의를 내니, 오늘날에 이르러 선비들과 많은 사람들의 매도(罵倒)하는 단서가 되었으며, 지절(支節)이 갈수록 많아져 날로 더욱 괴격(乖激)해지고 있습니다. 더욱이 화약(火藥) 등의 일이 연중(筵中)에서 나오자, 대각(臺閣)의 마음은 ‘이것이 곧 중대한 국론(國論)이니, 결코 버려두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였고, 대신(大臣)의 뜻은 스스로 꺼리는 바가 있으며, 또 속 내용을 두루 알지 못하여 자연히 이 지경에 이르게 된 것입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확연히 크게 공평하게 하시고, 평안한 마음과 온화한 기색으로 쾌히 회오(悔悟)하는 뜻을 보이소서. 그리고 또 대신(大臣)으로 하여금 그 덕(德)과 도량(度量)을 넓히게 하여 선비의 기상을 부양(扶養)하게 하고, 대각(臺閣)은 준격(峻激)한 말을 하여 대체(大體)를 손상함이 없게 하소서."
하였으나, 임금은 우악한 비답을 내렸을 뿐이었다. 박세채가 뒤에 등대(登對)하였을 때, 유득일(兪得一)에게 내린 비답 가운데서 ‘사독(邪毒)’ 두 글자를 고칠 것을 청하였으나, 임금이 따르지 않았다. 박세채가 이어 당초에 진달(陳達)하였던 세 조목(條目)의 말을 거듭 아뢰고, 말하기를,
"추록(追錄)을 환수(還收)할 것을 청한 것은 국체(國體)에 크게 관계됨이 있는데, 아직도 지휘(指揮)하심이 없으니, 민울(悶鬱)함을 견디지 못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물러나 돌아갈 것을 청하니, 임금이 부드러운 말로 면류(勉留)하였다.

 

6월 12일 계미

태조(太祖)와 태종(太宗)의 휘호(徽號)를 추상(追上)하였다. 【위에 보인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휘호를 가상(加上)하는 것은 옛스런 일이 아니다. 당시에도 도리어 그러했거늘, 하물며 3백 년이 지난 뒤임에랴. 유자(儒者)들은 걸핏하면 삼고(三古)033)  의 ‘문(文)’·‘무(武)’의 시호(諡號)가 한 글자를 넘지 않았음을 인용하는데, 우리 조정에서는 이에 여덟 글자를 쓰니, 높이 찬양하는 것이 극도(極度)에 이른 것이다. 당시 왕의 제도를 비록 요약하여 삼고(三古)로 돌이킬 수는 없을 것이나, 여덟 자 이외에다 더 할 수 있겠는가? 송시열(宋時烈)은 유자(儒者)로 자부(自負)하였는데, 나이 80이 되도록 조정에 나아가 자주 말한 바가 척리(戚里)를 부추기고 사론(士論)을 억누르는 데 있었으며, 늘어놓은 바는 번잡한 글을 숭상하고 종묘(宗廟)에 아첨하는 데 있었다. 그리고 황조(皇朝)의 잘못된 전례(典禮)를 주(周)나라를 따르는 의리로 여겼으니, 한(漢)·당(唐)을 비루하게 여기고 삼고(三古)를 회복하며, 요순(堯舜)의 일이 아니면 진달(陳達)하지 아니하는 자가 과연 이와 같은가? 의논하는 사람들은 효묘(孝廟)를 세실(世室)로 하는 것은 진실로 뜻과 사업을 천양(闡揚)하는 데서 나왔다고 생각하였으나, 그래도 그것이 갑인년034)   이전에 있지 않고, 폄박(貶薄)으로 참소와 무고를 당하여 거의 죽을 뻔했다가 돌아온 뒤에 있었음을 의심하였다. 그리고 태조(太祖)를 추륭(追隆)한 일과 같은 것은 그 의탁한 바는 비록 대의(大義)에 있었으나, 실제로 도모하고자 한 것은 효묘를 세실로 하자는 그릇된 자취인 것이었다. 하물며 이른바 대의(大義)라는 것을 마땅히 제기(提起)할 수 없음이 실로 박세채(朴世采)의 논의와 같음이 있음에랴. 그러나 일이 종묘에 관계되므로 사람들이 정직하게 말하지 아니하였으나, 성학(聖學)의 고명(高明)하심으로 처음에는 자못 신중하게 하셨는데, 송시열이 한 번의 차자(箚子)에 이어 거듭 차자를 올려 물러간다고 임금을 을러대고, 마침내 세 번째의 차자에 이르러는 힘써 말하여 독촉해 성사시키고야 말았으니, 그 거조(擧措)는 거의 상성(常性)을 잃은 듯하였다. 아깝다! 그 능히 영남(嶺南)의 천극(荐棘) 가운데서 종신(終身)하지 못했음이여!

 

6월 16일 정해

처음에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謙)이 고(故) 상신(相臣) 정철(鄭澈)의 시호(諡號)를 문강(文剛)이라 의논하고, 증(贈) 참찬(參贊) 송시영(宋時榮)의 시호를 충수(忠修)라고 의논하였는데, 정부(政府)에서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고 하여, 태상시(太常寺)로 보내서 다시 의논하게 하였다. 조지겸이 이 때문에 진소(陳疏)하면서 송시열(宋時烈)의 말을 끌어대어 증거로 삼고, 겸하여 ‘박태손(朴泰遜)이 사당(私黨)을 비호(庇護)하였다고 무거운 견책(譴責)을 당하였는데, 자신만 요행히 모면한 정상’을 붙였다. 이는 대개 송시열이 일찍이 선정신(先正臣) 이이(李珥)가 ‘충청 강개(忠淸剛介)’한 것으로 정철에게 허여(許與)한 일을 들어 조지겸에게 ‘강(剛)자가 마땅할 듯하다’고 말하였기 때문이었다. 임금이 답하기를,
"시법(諡法)이 무너진 지가 오래 되어, 수십 년 동안 더욱 문식(文飾)이 지나치고 사실이 아님을 근심해 왔고, 단지 형세를 따라 저앙(低仰)을 더하도록 맡겨두었으므로, 식자(識者)들이 오랫동안 이미 잘못이라 여겨왔다. 정철과 송시영은 모두 맑은 이름과 큰 절개가 있는데도 ‘강개(剛介)’·‘충의(忠義)’ 두 글자가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다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인가?"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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