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4권, 숙종 9년 1683년 윤6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20
반응형

윤6월 6일 병오

공조 참판(工曹參判) 박세채(朴世采)가 향리에 있으면서 말과 계책이 시행되지 않아 다시 나아갈 수 없다고 진소(陳疏)하고 또 월름(月廩)을 사양하니, 우악(優渥)한 비답(批答)으로 허락하지 않았다.

 

윤6월 20일 경신

승지(承旨) 조지겸(趙持謙)이 정(楨)의 딸이 이혼(離婚)하였음과 마땅히 관대(寬大)하게 용서하는 도리가 있어야 함을 진달(陳達)하였다. 【연설(筵說)은 위에 보인다.】 정(楨)은 비록 역옥(逆獄)에 주련(株連)되었으나, 역상(逆狀)이 채 드러나지 않았고, 또 경전(磬甸)035)  의 율(律)에 복주(伏誅)되었으니, 노륙(孥戮)·적몰(籍沒)의 상전(常典)은 마땅히 그와 남(柟)과는 차이가 있어야 할 것이므로, 조지겸이 관대하게 할 것을 청한 것은 뜻이 흠휼(欽恤)에 있는 것인데, 당인(黨人)들이 첨고(瞻顧)하고 함닉(陷溺) 한다는 죄목(罪目)을 뒤집어씌웠다. 그렇다면 정상(情狀)과 법(法)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한갓 심각(深刻)하게만 하는 것이 사론(士論)이란 말인가? 이것이 김수항(金壽恒)이 청류(淸流)들에게 여망(輿望)을 잃은 까닭인데, 고집스럽고 어리석은 자들이 그래도 깨달을 줄을 알지 못하니, 한탄스러움을 견딜 수 있겠는가?

 

윤6월 26일 병인

좌의정(左議政) 김석주(金錫胄)가 청대(請對)하여, 부제학(副提學) 조지겸(趙持謙)과 교리(校理) 한태동(韓泰東)의 관직을 논박(論駁)해 파면(罷免)시키고, 사간(司諫) 오도일(吳道一)을 공척(攻斥)해서 울진 현령(蔚珍縣令)에 보임(補任)시켰으며, 대사간(大司諫) 신완(申琓)을 체임(遞任)시켰다. 【연설(筵說)은 위에 보인다.】  이날 옥당(玉堂)의 남치훈(南致熏)과 이시만(李蓍晩)이 청대(請對)하여 임금께 아뢰기를,
"대신(大臣)이 조정의 논의를 진정(鎭定)시키고자 하여, 조지겸(趙持謙) 등에게 죄를 주었으니, 신은 저으기 개탄합니다."
하고, 이어 여러 사람들이 무고(誣告)를 당했음을 상세히 말하기를,
"조지겸이 관학(館學)의 재임(齋任)을 체차(遞差)한 것은 조제(調劑)하고자 한 것이었지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박태유(朴泰維)를 구해(救解)함에 있어서 어찌 미리 소대(召對)할 줄을 헤아렸겠습니까? 마침 신계화(申啓華)에게 사고(事故)가 있어 대신 들어갔던 것입니다. 이를 죄로 여긴다면 결코 〈사리에〉 가까운 일이 아닙니다. 오도일(吳道一)이 인용한 김광진(金光瑨)은 곧 봉명 사신(奉命使臣)으로 외방(外方)에 있을 때, 이판(吏判) 이민서(李敏敍)가 의차(擬差)한 자이고, 또 오도일과는 상피(相避)가 있으니, 대신(大臣)의 말은 진실로 실정(實情)을 잃은 것입니다. 그리고 한태동(韓泰東)의 죄는 왕언(王言)을 속였다는 것이었으니, 어찌 몹시 억울하지 않겠습니까? 옛날에도 말을 대신하고 기롱(譏弄)하며 풍간(諷諫)하는 일이 있었으니, 진실로 족히 너무 괴이하게 여길 것이 아닙니다. 박태유(朴泰維)가 소(疏)를 올린 것은 욕의(縟儀)가 있기 열흘 전에 있었는데, 뒤의 때에 있었다고 하니, 더욱 지극히 억울합니다. 신완(申琓)의 처치(處置)는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따른 것이었으니, 대신의 이번 거조(擧措)는 지극히 괴이(怪異)하다 하겠습니다."
하여, 반복해 힘써 다투었다. 승지 심수량(沈壽亮) 또한 임금에게 분별(分別)하여 말하였으나, 임금이 끝내 들어주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밤새도록 다투어도 따르지 않을 것이다."
하니, 여러 신하들이 마침내 물러갔는데, 승지 홍만종(洪萬鍾)은 평소에 겁이 많고 나약하여 감히 한 마디 말도 꺼내지 못하였다. 명(命)이 내려지자, 심수량이 동료인 김진귀(金鎭龜)에게 만류당하여 능히 끝내 교환(繳還)하지 못하였는데, 다음날 오도일(吳道一)이 폐사(陛辭)하고 심수량을 책망하여 이르기를,
"나는 죄도 없이 견책(譴責)을 당했는데, 그대는 서로 구해 주는 한 마디 말도 없었으니, 붕우(朋友)의 정의(情誼)가 어디에 있는가?"
하니, 심수량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조지겸(趙持謙) 등의 말과 의논에 비록 간혹 지나친 것이 있다고는 하나, 만약 이와 같이 하지 않는다면, 김익훈(金益勳) 무리들의 무상(無狀)함을 다스려 으슥하고 어두운 소굴(巢窟)을 깨뜨리고 횡류(橫流)하는 세력을 막아, 국세(國勢)와 조정의 기상(氣象)을 윤서(淪胥)에서 벗어나게 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저 김익훈이라고 하는 자는 자신이 훈척(勳戚)이 되어 사류(士類)를 원수처럼 보고 군상(君上)을 협박해 〈사류를〉 내쫓아 그 사사로운 분노(憤怒)를 풀었으며, 관안(官案)을 찾아 어떤 벼슬자리를 지적함에 이르러서는 군부(君父)에게 턱짓으로 가리켜 다시 두려워하고 꺼리는 마음이 없었다. 그 은총을 믿으며 이와 같이 방자하게 굴면서도 집안을 해치고 나라를 망치지 아니한 자는 있지 않았다.

 

윤6월 28일 무진

판중추(判中樞)        이상진(李尙眞)이 차자(箚子)로써 조지겸(趙持謙) 등을 구(救)하였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지금 여러 신하들을 척출(斥黜)한 일은 실로 국가 존망(存亡)의 기틀에 관계되니, 신이 어찌 차마 입을 다물고 한 마디의 말도 하지 않아 성은(聖恩)을 저버릴 수가 있겠습니까? 그저께 비로소 성상의 지나친 거조(擧措)를 들었는데, 견책(譴責)을 당한 신하들은 거조(擧措)와 의논 사이에 괴격(乖激)한 병통이 없지는 않으나, 그 기휘(忌諱)함을 피하지 아니하고 풍재(風裁)를 가지기에 힘쓴 것은 도리어 앞뒤를 쳐다보고 돌아보며 승순(承順)에 분주한 것보다야 나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불행하게도 김익훈(金益勳)의 한 가지 일이 점차 더 풍파(風波)를 일으키고 뜬소문이 떠들썩하여 분운(紛紜)함을 누르지 못하니, 대신(大臣)의 책무(責務)로서는 마땅히 그 횡류(橫流)를 진정시키고 그 곧은 기운을 장려하여 언로(言路)를 넓게 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일찍이 우상(右相)의 공(功)에 사직(社稷)의 보존(保存)과 휴척(休戚)의 의리가 있다고 했는데, 이에 도리어 오늘날에 전에 없던 거조(擧措)를 한단 말입니까? 설혹 군상(君上)에게 지나친 거조가 있다 하더라도 대신의 처치로서는 마땅히 광구(匡救)하기에 겨를이 없어야 할 것인데, 이번에 대신이 힘써 청한 것은 실로 상정(常情)으로 헤아리지 못할 바였습니다. 신은 머리터럭이 하얗게 세어 죽음을 기다리는 나이라, 이미 응당 물러날 사람이니, 다시금 어찌 편파적으로 비호(庇護)하는 마음이 있겠습니까? 조정의 논의가 점차 더 괴격(乖激)해지고 인정(人情)이 더욱더 불울(拂鬱)해져 마침내 수습(收拾)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를까 진실로 두렵습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쾌히 해와 달이 바뀌듯 함을 보이시어 그 광간(狂簡)함을 재단(裁斷)하시고 화협(和協)할 것을 책려(責勵)하신다면, 이 또한 어찌 국사(國事)에 보탬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끝에 후사(喉司)가 나약하여 교환(繳還)하지 못한 실책을 논하였는데, ‘미안(未安)한 비답을 받았습니다’ 하고 이상진이 또 차자를 올려 물러날 것을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삼가 살펴보건대, 사류(士類)와 훈척(勳戚)이 예전부터 서로 용납하지 않았지만, 어찌 고의로 괴리(乖離)하였겠는가? 훈척이란 자는 대려(帶礪)036)                  의 맹세를 빙자하고 일월(日月)이 바뀌는 즈음에 의탁하여 공(功)을 자부(自負)하고 은총(恩寵)을 믿어서 왕왕 분수에 넘치도록 외람되게 굴었는데, 경신년037)                   이후 삼척(三戚)의 방자함이 김익훈에 이르러 극도에 달하였다. 이것이 바로 박세채(朴世采)가 세 조목의 차자(箚子) 가운데서 맨먼저 ‘훈척을 마땅히 파(罷)하여야 한다.’고 한 것과 조지겸 등이 격렬하게 드러내어 논의한 것을 아울러 일대(一代)의 사류(士類)들이 종주(宗主)로 삼게 된 까닭이다. 서인(西人)·남인(南人)의 붕당(朋黨)의 폐단과 같은 것에 이르러서는 실로 망국(亡國)의 근원이 될 것이니, 이것은 한때의 과격한 말과 의논이 아니며, 실로 백여 년 이래 조손(祖孫)과 부자(父子)가 대대로 전수(傳守)하던 논의이니, 남인에게 당적(黨籍)을 두었다고 해서 나라의 절반에 해당하는 사람들을 폐고(廢錮)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저 노당(老黨)이란 자들은 대대로 국명(國命)을 잡고서 동당벌이(同黨伐異)하는 데 용감하였기 때문에, 매번 조정의 국면(局面)이 바뀔 때마다 가장 혹독한 화(禍)를 당했으므로 사사로운 원한이 외곬로만 깊어지고 공정한 마음은 아주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걸핏하면 음양(陰陽)과 흑백(黑白)을 가린다고 핑계대면서 몰래 보복(報復)하고 제함(擠陷)할 계책을 세워, 죄가 없는 자로 하여금 뒤섞여 폐고(廢錮)당하게 하였고, 혹시 함닉(陷溺)하여 잘못을 저지르는 경우라도 있으면 곧 스스로 선견지명(先見之明)이 있다고 자부(自負)하였다. 이것이 바로 송시열(宋時烈)이 나라를 병들게 하고 화(禍)를 끼친 근원이며, 박세채가 깊이 우려하고 길이 탄식하며 황극(皇極)·탕평(蕩平)의 도리로써 시종일관 규면(規勉)하되, 송시열과 갈라서는 것을 꺼리지 않았던 까닭이다. 더욱이 경신년 이후의 송시열은 갑인년038)                   이전의 송시열이 아니었으니, 박세채가 비록 명백하게 말하고 허물을 드러내어 풍파(風波)를 불러 일으키지 않고자 하였더라도, 그 마음에 또 어찌 그 잘못을 알면서도 구차히 영합(迎合)하여 즐거이 영신(佞臣)이 되고자 했겠는가? 처음 역사를 편수(編修)한 자가 이해(利害)를 살핀다는 것으로 조지겸(趙持謙)과 한태동(韓泰東)을 무함(誣陷)한 것도 부족하여, 심지어 흉당(凶黨)을 모으고 훈척을 물리치며 아름다운 이름을 빼앗아 편의(便宜)를 점유(占有)하였다고 몰래 박세채를 조롱하였는데, 기울어진 것을 재단(裁斷)하고 치우친 것을 돕는 데 대신의 역량(力量)이 있다고 하면서 김석주(金錫胄)를 높이고 아름다움을 돌렸으니, 그 주고 빼앗는 것의 어긋남은 진실로 족히 말할 수 없는 것이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