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4일 계미
금부(禁府)의 죄인 이원성(李元成) 등을 감죄(勘罪)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김석주(金錫胄)가 이미 소(疏)로 박세채(朴世采)를 공격하자, 때마침 이원성의 소(疏)에 전익대(全翊戴)·김환(金煥)의 일을 말한 것이 많았고, 그 사람이 허황(虛謊)되게 명사(名士)들이 많이 보았다는 말로 김석주에게 고하니, 김석주가 몰래 이를 빙자해 사류(士類)를 무함(誣陷)하려고 급히 입대(入對)할 것을 청하였는데, 박세채 등의 이름을 거론함에 미쳐서는 이원성의 소의 ‘사류의 풍지(風旨)를 받들었다’고 한 것과 같음이 있어 임금에게 옥사(獄事)를 성사시키기를 권하고 그 사주(使嗾)한 자를 끌어넣고자 하였으나, 일이 끝내 성사됨이 없었다. 그 당시 사람들이 도리어 김석주를 깊이 다스리고자 하였으나, 도리어 그 만연(蔓延)될 것을 두려워하여 차자(箚子)로 감죄(勘罪)할 것을 청하였던 것이다.
7월 22일 신묘
우윤(右尹) 윤증(尹拯)이 사직소(辭職疏)를 올렸는데, 대략에 이르기를,
"은혜에 한 번도 사례하지 못하고 명을 한 번도 따른 적이 없는데도, 해마다 제수(除授)되고 해마다 천전(遷轉)되며 차례를 넘어 자급(資級)이 뛰어올랐으니, 규두(圭竇)039) 를 나가지 않고도 이름이 재신(宰臣)의 반열(班列)에 올랐습니다. 징소(徵召)하는 일이 있었던 이래로 일찍이 이러한 경우는 있지 않았습니다."
하니,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7월 27일 병신
태학생(太學生) 황위(黃蔚) 등이 소(疏)로 박세채(朴世采)가 무함당했음을 변명(辯明)하고 김석주(金錫胄)의 죄상을 극력 논하자, 【소(疏)는 위에 보인다.】 변방에 정배(定配)하라 명하였다가 곧 대신(大臣)과 여러 신하들이 힘써 다툼으로 인하여 정거(停擧)의 벌을 내렸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또 정거를 풀었다. 【일은 위에 보인다.】 그때 당목(黨目)이 처음 나뉘어지자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이 김석주의 세력을 끼고 조정을 기울였는데, 은총과 대우가 날로 높아지니,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김석주가 명류(名流)를 배척해 쫓아내고 박세채를 무함하여 욕함에 이르러서, 사론(士論)이 격렬히 끊어올랐으므로 태학(太學)에서 소론(疏論)을 내자, 식견(識見)이 있는 위포(韋布)로서 연달아 서명(署名)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으니, 진실로 일대(一代)의 공론(公論)이었다. 그러니 처음 역사에서 이른바 하재생(下齋生)040) 으로 그 수를 채웠다고 한 것은 이미 허망(虛罔)한 것이고, 송시열에 이르러서도 비록 마음에 불만이 있기는 하였지만, 그래도 일찍이 드러나게 기롱과 모욕을 더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배척(排斥)하고 추욕(醜辱)했다는 것은 무엇을 지적하여 한 말인가? 만약 송시열에게 허물이 있다면 비록 처음에는 존앙(尊仰)하였다 하더라도 마땅히 서로 도우며 잘못을 숨겨 주는 것이 당인(黨人)과 같아서는 아니될 것인데, 하물며 침범하여 추욕(醜辱)한 일이 없음에랴! 당인(黨人)들이 스스로 이 일이 능히 공의(公議)를 이기지 못할 줄 알고, 이에 송시열을 배척(排斥)한다고 터무니없게도 도리어 욕하며 꾸짖었으니, 그 또한 피사(詖辭)041) ·둔사(遁辭)042) 로 말이 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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