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경자
대교(待敎) 김홍복(金洪福)의 관작(官爵)을 삭탈(削奪)하고 문외 출송(門外黜送)시키라고 명하였는데, 김석주(金錫胄)가 소(疏)로 관안(官案)의 일을 변명하였기 때문이었다. 【소(疏)와 비답(批答)은 위에 보인다.】 사신은 말한다. "조지겸(趙持謙)을 파직(罷職)함에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였는데, 김석주가 괴롭게 군 뒤에야 비로소 ‘단지 오도일(吳道一)만 파출(罷黜)하라.’ 하였으니, 단지 김석주가 ‘관안(官案)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다.’고 한 말만 들었을 뿐이지, 임금이 지적하여 가져오라는 하교(下敎)는 듣지 못하였다. 그날 여러 신하들이 들은 바가 모두 이와 같았고, 김홍복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인 바는 대략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있었으나, 김석주가 스스로 진달한 바 또한 크게 다름이 없었다. 또 공두칙(空頭勅)으로 임수충(任守忠)을 찬축(竄逐)한 일을 끌어대면서 자부하였으니, 관안을 찾아오게 한 일은 도리어 작은 일이라 할 것이나, 오직 그 전횡(專橫)·방자(放恣)하고 협박한 자취는 뒷날의 죄안(罪案)이 됨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들어가 아뢰고 소(疏)를 내어놓고 대단한 기세로 스스로 변명하였던 것이고, 반드시 임금의 하교를 얻어 중계(重計)의 구실로 삼아서 마침내는 김홍복이 무거운 견책(譴責)을 받게 만들었으니, 물정(物情)이 떠들썩하며 곁눈질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석주의 집안은 처음에 수도(隧道)의 일로 인하여 송시열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갑인년043) 의 나아오고 물러날 때 사람들은 척리(戚里)로써 참여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갑인년 뒤 5, 6년 동안은 남인(南人)과 구별이 없었으며, 예(禮)를 논함에 있어서는 사종(四鍾)044) 을 깊이 배척하였으나, 다만 괴란(乖亂)·폄박(貶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또 송시열에게 투합(投合)하고자 하여, 이미 명류(名流)를 배척하여 내쫓고 ‘다른 사람에게 배신당할 것이다.’라고 하며 박세채를 욕하고 꾸짖었다. 또 대신(大臣)을 배착(排窄)해서 어인(御人)의 노순(櫓盾)과 세력(勢力)에 압제(壓制)당하는 바 되게 하였으니, 비록 능히 사류(士類)를 짓밟고 유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전후의 감추거나 드러난 술수가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 뒤에 이단하(李端夏)가 소(疏)에서 억지로 오늘날의 척완(戚畹)을 심의겸(沈義謙)에다 견주었는데, 심의겸이 사류(士類)를 부호(扶護)한 것은 애시당초 여러 김씨(金氏)들이 태아(太阿)를 조롱한 것과는 같지 않았다. 만약 여러 김씨들로 하여금 간흉(奸凶)을 토벌(討伐)하고 사류를 끌어올리기를 한결같이 심의겸이 했던 것과 같이 하게 하였다면, 경신년045) 의 분수에 넘치고 외람된 추록(追錄)도 없었을 것이고, 임술년046) 터무니없이 과장된 무고도 없었을 것이니, 청의(淸議)가 어디로부터 격렬하게 일어났을 것이며, 조정의 기상(氣象)이 어찌 괴리(乖離)하는 데 이르렀겠는가? 아! 심의경이 사류를 부호(扶護)하였으나 당론(黨論)에 지나침이 있어 선정(先正) 이이(李珥)가 도리어 또 비난하고 배척한 것이 자못 엄하였는데, 만약 이이로 하여금 오늘날의 척리(戚里)에다 보게 한다면 그 감단(勘斷)하는 바를 마땅히 어느 명목(名目)에 두었겠는가? 이단하(李端夏)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갑인년 뒤에는 시배(時輩)들에게 빌붙어 추장(推奬)되고 천거(薦擧)되었으며, 예론(禮論)을 공격하여 구차하게 순종하였는데, 때를 따라 겁을 내고 꺼리어 명절(名節)이 모두 무너졌으니,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또 감히 심의겸을 빙자해 사론(士論)을 배척하며 스스로 송시열의 문하(門下)에 속죄(贖罪)하고자 하였으니, 그 또한 서글프게 여길 뿐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73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註 043]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註 044] 사종(四鍾) :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의 주(註)에 이른바 승중(承重)하였더라도 그 숭중한 아들을 위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입을 수 없는 경우 네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 정체(正體)이나 전중(傳重:가통을 전함)하지 못한 경우(그 세주(細註)에 ‘적자(嫡子)가 폐질이 있거나 그 밖의 까닭으로 일찍 죽고 승중할 아들도 없는 경우라 하였고, 또 그 안(按)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체(體)라 하며, 적자·적손(嫡孫)을 정(正)이라 하고, 서자(庶子)·서손을 부정(不正)이라 한다.’ 하였음), 둘째 정체가 아닌데에 전중한 것, 곧 서손을 후사(後嗣)로 세운 경우, 셋째 체이나 부정한 것 곧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 넷째 정이나 불체(不體)인 것 곧 적손을 후사로 세운 경우임.[註 045]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046] 임술년 : 1682 숙종 8년.
사신은 말한다. "조지겸(趙持謙)을 파직(罷職)함에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였는데, 김석주가 괴롭게 군 뒤에야 비로소 ‘단지 오도일(吳道一)만 파출(罷黜)하라.’ 하였으니, 단지 김석주가 ‘관안(官案)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다.’고 한 말만 들었을 뿐이지, 임금이 지적하여 가져오라는 하교(下敎)는 듣지 못하였다. 그날 여러 신하들이 들은 바가 모두 이와 같았고, 김홍복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인 바는 대략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있었으나, 김석주가 스스로 진달한 바 또한 크게 다름이 없었다. 또 공두칙(空頭勅)으로 임수충(任守忠)을 찬축(竄逐)한 일을 끌어대면서 자부하였으니, 관안을 찾아오게 한 일은 도리어 작은 일이라 할 것이나, 오직 그 전횡(專橫)·방자(放恣)하고 협박한 자취는 뒷날의 죄안(罪案)이 됨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들어가 아뢰고 소(疏)를 내어놓고 대단한 기세로 스스로 변명하였던 것이고, 반드시 임금의 하교를 얻어 중계(重計)의 구실로 삼아서 마침내는 김홍복이 무거운 견책(譴責)을 받게 만들었으니, 물정(物情)이 떠들썩하며 곁눈질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석주의 집안은 처음에 수도(隧道)의 일로 인하여 송시열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갑인년043) 의 나아오고 물러날 때 사람들은 척리(戚里)로써 참여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갑인년 뒤 5, 6년 동안은 남인(南人)과 구별이 없었으며, 예(禮)를 논함에 있어서는 사종(四鍾)044) 을 깊이 배척하였으나, 다만 괴란(乖亂)·폄박(貶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또 송시열에게 투합(投合)하고자 하여, 이미 명류(名流)를 배척하여 내쫓고 ‘다른 사람에게 배신당할 것이다.’라고 하며 박세채를 욕하고 꾸짖었다. 또 대신(大臣)을 배착(排窄)해서 어인(御人)의 노순(櫓盾)과 세력(勢力)에 압제(壓制)당하는 바 되게 하였으니, 비록 능히 사류(士類)를 짓밟고 유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전후의 감추거나 드러난 술수가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 뒤에 이단하(李端夏)가 소(疏)에서 억지로 오늘날의 척완(戚畹)을 심의겸(沈義謙)에다 견주었는데, 심의겸이 사류(士類)를 부호(扶護)한 것은 애시당초 여러 김씨(金氏)들이 태아(太阿)를 조롱한 것과는 같지 않았다. 만약 여러 김씨들로 하여금 간흉(奸凶)을 토벌(討伐)하고 사류를 끌어올리기를 한결같이 심의겸이 했던 것과 같이 하게 하였다면, 경신년045) 의 분수에 넘치고 외람된 추록(追錄)도 없었을 것이고, 임술년046) 터무니없이 과장된 무고도 없었을 것이니, 청의(淸議)가 어디로부터 격렬하게 일어났을 것이며, 조정의 기상(氣象)이 어찌 괴리(乖離)하는 데 이르렀겠는가? 아! 심의경이 사류를 부호(扶護)하였으나 당론(黨論)에 지나침이 있어 선정(先正) 이이(李珥)가 도리어 또 비난하고 배척한 것이 자못 엄하였는데, 만약 이이로 하여금 오늘날의 척리(戚里)에다 보게 한다면 그 감단(勘斷)하는 바를 마땅히 어느 명목(名目)에 두었겠는가? 이단하(李端夏)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갑인년 뒤에는 시배(時輩)들에게 빌붙어 추장(推奬)되고 천거(薦擧)되었으며, 예론(禮論)을 공격하여 구차하게 순종하였는데, 때를 따라 겁을 내고 꺼리어 명절(名節)이 모두 무너졌으니,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또 감히 심의겸을 빙자해 사론(士論)을 배척하며 스스로 송시열의 문하(門下)에 속죄(贖罪)하고자 하였으니, 그 또한 서글프게 여길 뿐이다.
【태백산사고본】 15책 14권 4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673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註 043] 갑인년 : 1674 숙종 즉위년.[註 044] 사종(四鍾) : 《의례(儀禮)》 상복편(喪服篇)의 주(註)에 이른바 승중(承重)하였더라도 그 숭중한 아들을 위하여 삼년상(三年喪)을 입을 수 없는 경우 네 가지를 말하는 것으로, 첫째 정체(正體)이나 전중(傳重:가통을 전함)하지 못한 경우(그 세주(細註)에 ‘적자(嫡子)가 폐질이 있거나 그 밖의 까닭으로 일찍 죽고 승중할 아들도 없는 경우라 하였고, 또 그 안(按)에 ‘아버지와 아들 사이를 체(體)라 하며, 적자·적손(嫡孫)을 정(正)이라 하고, 서자(庶子)·서손을 부정(不正)이라 한다.’ 하였음), 둘째 정체가 아닌데에 전중한 것, 곧 서손을 후사(後嗣)로 세운 경우, 셋째 체이나 부정한 것 곧 서자를 후사로 세운 경우, 넷째 정이나 불체(不體)인 것 곧 적손을 후사로 세운 경우임.[註 045] 경신년 : 1680 숙종 6년.[註 046] 임술년 : 1682 숙종 8년.
사신은 말한다. "조지겸(趙持謙)을 파직(罷職)함에 있어서 임금이 난처하게 생각하였는데, 김석주가 괴롭게 군 뒤에야 비로소 ‘단지 오도일(吳道一)만 파출(罷黜)하라.’ 하였으니, 단지 김석주가 ‘관안(官案)이 없는 것이 한탄스럽다.’고 한 말만 들었을 뿐이지, 임금이 지적하여 가져오라는 하교(下敎)는 듣지 못하였다. 그날 여러 신하들이 들은 바가 모두 이와 같았고, 김홍복이 다른 사람에게 전하여 보인 바는 대략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있었으나, 김석주가 스스로 진달한 바 또한 크게 다름이 없었다. 또 공두칙(空頭勅)으로 임수충(任守忠)을 찬축(竄逐)한 일을 끌어대면서 자부하였으니, 관안을 찾아오게 한 일은 도리어 작은 일이라 할 것이나, 오직 그 전횡(專橫)·방자(放恣)하고 협박한 자취는 뒷날의 죄안(罪案)이 됨을 면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므로, 들어가 아뢰고 소(疏)를 내어놓고 대단한 기세로 스스로 변명하였던 것이고, 반드시 임금의 하교를 얻어 중계(重計)의 구실로 삼아서 마침내는 김홍복이 무거운 견책(譴責)을 받게 만들었으니, 물정(物情)이 떠들썩하며 곁눈질하지 아니함이 없었다."
삼가 살펴보건대, 김석주의 집안은 처음에 수도(隧道)의 일로 인하여 송시열을 깊이 원망하고 있었으므로, 갑인년043) 의 나아오고 물러날 때 사람들은 척리(戚里)로써 참여한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갑인년 뒤 5, 6년 동안은 남인(南人)과 구별이 없었으며, 예(禮)를 논함에 있어서는 사종(四鍾)044) 을 깊이 배척하였으나, 다만 괴란(乖亂)·폄박(貶薄)한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에 이르러 또 송시열에게 투합(投合)하고자 하여, 이미 명류(名流)를 배척하여 내쫓고 ‘다른 사람에게 배신당할 것이다.’라고 하며 박세채를 욕하고 꾸짖었다. 또 대신(大臣)을 배착(排窄)해서 어인(御人)의 노순(櫓盾)과 세력(勢力)에 압제(壓制)당하는 바 되게 하였으니, 비록 능히 사류(士類)를 짓밟고 유린할 수 있다 하더라도, 전후의 감추거나 드러난 술수가 유독 마음에 부끄럽지 아니한가? 이 뒤에 이단하(李端夏)가 소(疏)에서 억지로 오늘날의 척완(戚畹)을 심의겸(沈義謙)에다 견주었는데, 심의겸이 사류(士類)를 부호(扶護)한 것은 애시당초 여러 김씨(金氏)들이 태아(太阿)를 조롱한 것과는 같지 않았다. 만약 여러 김씨들로 하여금 간흉(奸凶)을 토벌(討伐)하고 사류를 끌어올리기를 한결같이 심의겸이 했던 것과 같이 하게 하였다면, 경신년045) 의 분수에 넘치고 외람된 추록(追錄)도 없었을 것이고, 임술년046) 터무니없이 과장된 무고도 없었을 것이니, 청의(淸議)가 어디로부터 격렬하게 일어났을 것이며, 조정의 기상(氣象)이 어찌 괴리(乖離)하는 데 이르렀겠는가? 아! 심의경이 사류를 부호(扶護)하였으나 당론(黨論)에 지나침이 있어 선정(先正) 이이(李珥)가 도리어 또 비난하고 배척한 것이 자못 엄하였는데, 만약 이이로 하여금 오늘날의 척리(戚里)에다 보게 한다면 그 감단(勘斷)하는 바를 마땅히 어느 명목(名目)에 두었겠는가? 이단하(李端夏)는 겁이 많은 사람이다. 갑인년 뒤에는 시배(時輩)들에게 빌붙어 추장(推奬)되고 천거(薦擧)되었으며, 예론(禮論)을 공격하여 구차하게 순종하였는데, 때를 따라 겁을 내고 꺼리어 명절(名節)이 모두 무너졌으니, 그래도 부끄러운 줄을 알지 못하였다. 또 감히 심의겸을 빙자해 사론(士論)을 배척하며 스스로 송시열의 문하(門下)에 속죄(贖罪)하고자 하였으니, 그 또한 서글프게 여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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