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2일 무술
동부승지(同副承旨) 송광연(宋光淵)이 응지(應旨)하여 상소(上疏)하였으니, 대략 이르기를,
"사(私)라는 한 글자는 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으로서, 전후(前後)에 여러 신하가 임금께 아뢴 말이 일찍이 이에 권권(眷眷)하지 않음이 없었는데도, 물러가서 그 행실과 처신(處身)을 살펴본다면 마침내 능히 파탈(擺脫)한 바가 없으니, 그 까닭이 무엇입니까? 임금은 신하의 표본(標本)이니, 전하(殿下)께서 인도하여 이끄는 방법이 혹시 다하지 못함이 있어서 그런 것입니까? 그윽이 살피건대, 전하의 제가(齊家)·치국(治國)의 덕화(德化)는 정심(正心)·수신(修身)의 효험(效驗)에 근본하고, 천리(天理)·인욕(人慾)의 분별은 극기 복례(克己復禮)의 공부에서 판단하시니, 조금이라도 치우치는 허물이 없어야 마땅합니다. 신이 해영(海營)001) 에 대죄(待罪)하여서 내수사(內需司)의 공이(公移)를 볼 수 있었는데, 염한(鹽漢)002) 과 전주(箭主)003) 의 일에 왕왕(往往) 성지(聖旨)를 받든다고 일컫는 것이 있었으니, 신은 진실로 이미 적당하지 못함을 견디지 못하였습니다. 일전에 경윤창(慶允昌) 등이 서로 소송(訴訟)한 일에 또 본궁(本宮)에 사문(査門)함을 가지고 판하(判下)하셨는데, 이것이 비록 그 곡절을 자세히 알지 못하고 처분할 뜻이 있는 데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나, 본관(本官)에서 이미 명확하게 핵실(覈實)하고 해조(該曹)에서 또 다시 복계(覆啓)하였으니, 그대로 출급(出給)하게 하여서 성덕(聖德)에 빛이 있는 것이 됨만 같지 못합니다."
하고, 그 끝에 지난날의 기찰(譏察)의 거조(擧措)의 이치에 어긋남을 논하여서 말하기를,
"박태유(朴泰維)가 소(疏)를 올린 뒤에 수사(收司)된 여러 신하들이 편중(偏重)되고, 공의(公議)에 한층 더하여서, 김환(金煥)을 가지고 나라를 위하여 성의(誠意)를 다한 것이라 하고, 역적(逆賊) 허새(許璽)를 구호(救護)한 일로 대각(臺閣)에 돌렸으니, 결단코 무리(無理)가 됩니다. 몇몇 신하를 물리친 뒤로부터 대각(臺閣) 위에 곧은 신하가 있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고 구차하게 남에게 영합(迎合)하는 자가 많으니, 세상의 도리가 걱정스럽습니다. 신완(申琓)이 억지로 천점(天點)004) 을 아끼시어 청로(淸路)을 막음도 이해(理解)할 수 없습니다." 【자세한 것은 위에 보인다.】 하니, 임금이 엄비(嚴批)를 내렸다.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양사(兩司)에서 안세징(安世徵)·성호징(成虎徵)·이굉(李宏)·양중하(梁重厦) 등이 김환의 논의(論議)를 정지함을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고, 조상우(趙相愚) 또한 한 번의 진언(進言)도 없었음을 이유로 인혐(引嫌)하니, 윤홍리(尹弘离)가 처치(處置)하여 모두 내보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한때의 대각(臺閣)이 송광연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송광연의 소(疏)가 시사(時事)를 슬퍼하고 한탄하여 대간(臺諫)의 구용(苟容)과 함묵(含默)을 아울러 배척하였으니, 윤홍리 같은 자도 바로 그 속에 들어서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여러 대신(臺臣)을 처치할 수 없음이 분명하였다. 이때에 오직 조상우가 새로 언지(言地)에 들어가서 다시 김환을 논할 뜻이 있었으므로, 당로(當路)005) 한 여러 사람이 이를 저지하고자 꾀하였으나, 처치(處置)가 옥당(玉堂)으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굉 등이 체차(遞差)되자, 곧 윤홍리를 지휘(指揮)하여 모출(冒出)에 급급(汲汲)하여서 이 처치를 한 것이다. 윤홍리는 자신이 홀로 김환의 논의를 정지하는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앞장서서 일을 담당하고 큰소리를 쳐서 그 처치한 것이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배반하고도 돌아보거나 근심하는 바가 없었다. 윤홍리는 비루한 자이므로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으나, 그 시비(是非)를 전도(顚倒)하여 방자하게 공의를 배척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스럽게 여김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한 자이니, 그 한때의 기세가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성호징은 더욱 혼암(昏暗)하고 용렬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여서 한갓 머리를 굽혀 남을 따랐으므로 아간(亞諫)006) 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성호징은 이미 한결같이 당로(當路)한 사람의 뜻에 따라서 이굉과 더불어 김환의 논의를 정지하자고 주장함을 능사(能事)로 삼았으며, 다시 당언(讜言)007) 이니 풍채(風采)008) 니 하는 말로 도리어 말하는 자를 비방하여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수치가 없음이 심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01] 해영(海營) : 해주 감영(海州監營).[註 002] 염한(鹽漢) : 소금 굽는 사람.[註 003] 전주(箭主) : 화살대를 공급하는 사람.[註 004] 천점(天點) : 임금의 낙점(落點).[註 005] 당로(當路) : 요로(要路)에 있음.[註 006] 아간(亞諫) : 대사간(大司諫)의 버금 지위인 사간(司諫)을 말함.[註 007] 당언(讜言) : 곧은 말.[註 008] 풍채(風采) : 풍문(風聞).
하니, 임금이 엄비(嚴批)를 내렸다.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양사(兩司)에서 안세징(安世徵)·성호징(成虎徵)·이굉(李宏)·양중하(梁重厦) 등이 김환의 논의(論議)를 정지함을 이유로 모두 인피(引避)하고, 조상우(趙相愚) 또한 한 번의 진언(進言)도 없었음을 이유로 인혐(引嫌)하니, 윤홍리(尹弘离)가 처치(處置)하여 모두 내보냈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한때의 대각(臺閣)이 송광연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송광연의 소(疏)가 시사(時事)를 슬퍼하고 한탄하여 대간(臺諫)의 구용(苟容)과 함묵(含默)을 아울러 배척하였으니, 윤홍리 같은 자도 바로 그 속에 들어서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여러 대신(臺臣)을 처치할 수 없음이 분명하였다. 이때에 오직 조상우가 새로 언지(言地)에 들어가서 다시 김환을 논할 뜻이 있었으므로, 당로(當路)005) 한 여러 사람이 이를 저지하고자 꾀하였으나, 처치(處置)가 옥당(玉堂)으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굉 등이 체차(遞差)되자, 곧 윤홍리를 지휘(指揮)하여 모출(冒出)에 급급(汲汲)하여서 이 처치를 한 것이다. 윤홍리는 자신이 홀로 김환의 논의를 정지하는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앞장서서 일을 담당하고 큰소리를 쳐서 그 처치한 것이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배반하고도 돌아보거나 근심하는 바가 없었다. 윤홍리는 비루한 자이므로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으나, 그 시비(是非)를 전도(顚倒)하여 방자하게 공의를 배척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스럽게 여김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한 자이니, 그 한때의 기세가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성호징은 더욱 혼암(昏暗)하고 용렬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여서 한갓 머리를 굽혀 남을 따랐으므로 아간(亞諫)006) 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성호징은 이미 한결같이 당로(當路)한 사람의 뜻에 따라서 이굉과 더불어 김환의 논의를 정지하자고 주장함을 능사(能事)로 삼았으며, 다시 당언(讜言)007) 이니 풍채(風采)008) 니 하는 말로 도리어 말하는 자를 비방하여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수치가 없음이 심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01] 해영(海營) : 해주 감영(海州監營).[註 002] 염한(鹽漢) : 소금 굽는 사람.[註 003] 전주(箭主) : 화살대를 공급하는 사람.[註 004] 천점(天點) : 임금의 낙점(落點).[註 005] 당로(當路) : 요로(要路)에 있음.[註 006] 아간(亞諫) : 대사간(大司諫)의 버금 지위인 사간(司諫)을 말함.[註 007] 당언(讜言) : 곧은 말.[註 008] 풍채(風采) : 풍문(風聞).
사신(史臣)은 말한다. "한때의 대각(臺閣)이 송광연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모두 인피하였다. 송광연의 소(疏)가 시사(時事)를 슬퍼하고 한탄하여 대간(臺諫)의 구용(苟容)과 함묵(含默)을 아울러 배척하였으니, 윤홍리 같은 자도 바로 그 속에 들어서 염치없음을 무릅쓰고 여러 대신(臺臣)을 처치할 수 없음이 분명하였다. 이때에 오직 조상우가 새로 언지(言地)에 들어가서 다시 김환을 논할 뜻이 있었으므로, 당로(當路)005) 한 여러 사람이 이를 저지하고자 꾀하였으나, 처치(處置)가 옥당(玉堂)으로 돌아갈 것을 두려워하였는데, 이굉 등이 체차(遞差)되자, 곧 윤홍리를 지휘(指揮)하여 모출(冒出)에 급급(汲汲)하여서 이 처치를 한 것이다. 윤홍리는 자신이 홀로 김환의 논의를 정지하는 의논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앞장서서 일을 담당하고 큰소리를 쳐서 그 처치한 것이 한결같이 공의(公議)를 배반하고도 돌아보거나 근심하는 바가 없었다. 윤홍리는 비루한 자이므로 진실로 족히 말할 것도 없으나, 그 시비(是非)를 전도(顚倒)하여 방자하게 공의를 배척하여서 사람으로 하여금 수치스럽게 여김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게 한 자이니, 그 한때의 기세가 과연 어떠하였겠는가? 성호징은 더욱 혼암(昏暗)하고 용렬하여 일을 살피지 못하여서 한갓 머리를 굽혀 남을 따랐으므로 아간(亞諫)006) 에 임명되기에 이르렀다. 성호징은 이미 한결같이 당로(當路)한 사람의 뜻에 따라서 이굉과 더불어 김환의 논의를 정지하자고 주장함을 능사(能事)로 삼았으며, 다시 당언(讜言)007) 이니 풍채(風采)008) 니 하는 말로 도리어 말하는 자를 비방하여 배척하였으니, 참으로 수치가 없음이 심한 자라고 이를 만하다."
2월 5일 신축
동부승지(同副承旨) 송광연(宋光淵)이 조상우(趙相愚) 등이 죄를 입은 것을 가지고 맨먼저 분요의 단서를 야기하였는데, 감히 글을 올려 반박하지 못하였다고 인죄(引罪)하여 진소(陳疏)하였으며, 또 윤방(尹昉)·김상헌(金尙憲)·신흠(申欽)이 문회(文晦)를 논한 것과 인조조(仁祖朝)에 훈신(勳臣)을 경계하고 책망한 교시(敎示)를 인용하여 김환을 반드시 죄주어야 함을 거듭 논하고, 이굉·성호징의 무리의 시의(時議)에 부화(附和)하여 물론(物論)을 자취(自取)하는 정상(情狀)을 말하였다. 끝에 또 말하기를,
"윤홍리는 더욱 알지 못할 것이 있습니다. 신의 소(疏)가 대저 대각의 구용(苟容)을 논척(論斥)하였는데, 윤홍리가 무엇을 가지고 과연 그 속에 들지 않음을 알아서 감히 의기양양하게 처치하여서 이런 놀랄 만한 거조(擧措)를 한단 말입니까? 참으로 전연 기탄(忌憚)함이 없는 자라고 이를 만합니다. 조상우는 새로 언지(言地)에 들어가 개연(慨然)히 탁류(濁類)를 물리치고 청류(淸類)를 드날리는 것을 자기의 임무로 삼아서 풍채(風采)가 숭상할 만하니, 성명(聖明)께서 진실로 마땅히 특별히 총애하는 칭찬을 내리시어 언로(言路)를 열어서 넓혀야 하는데, 이제 조금도 용서하지 않으시어 최절(摧折)이 이에 이르렀으니, 이것이 어찌 평소에 성명에 바라던 바이겠습니까? 신계화(申啓華)는 자신이 논사(論思)의 직책을 맡아서 허물이 있음을 말하지 않으니, 무슨 추고(推考)할 일이 있단 말입니까? 신이 생각하건대 이와 같은 일을 그만두지 않으면, 비록 한(漢)나라의 간신(諫臣)인 주운(朱雲)과 급암(汲黯) 같은 충성이 있다 하여도 마침내 하루도 전하의 조정에 설 수 없을 것입니다. 대각(臺閣)에 충만(充滿)한 자가 성호징·윤홍리의 무리에 지나지 않으니, 전하의 국사(國事)가 날로 그릇될까 두렵습니다. 아! 세도(世道)가 어지럽고 와언(訛言)이 날로 일어나서 인심(人心)이 위구(危懼)하여 아침과 저녁을 보전하지 못할 것 같으니, 나라 일을 생각한다면 통곡할 만하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마땅히 인심을 굳게 맺고 공의(公議)를 넓혀서 뽑을 수 없는 터전을 세우기를 생각하여야 하는데도, 이것을 도모하지 않고 만 근의 위세(威勢)를 가지고 갑자기 일을 말한 신하에게 더하시니, 오직 공의가 다시 일어날까 두려워합니다. 신은 실로 성명을 위하여 이 거조를 애석해합니다."
하니, 임금이 명하여 그 소를 돌려주고 엄비(嚴批)를 내려 절책(切責)하였으며 특별히 그 벼슬을 파면(罷免)하였다. 【원소(原疏)와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편사(編史)
2월 30일 병인
장령(掌令)은 윤세기(尹世紀)가 지평(持平) 김석(金晳)과 장령 남필성(南弼星)과 더불어 동렬(同列)이 되기가 부끄러우며, 김환(金煥)의 국문(鞫問)에 대한 논의를 구차하게 같이할 수 없다 하여 진계(陳啓)하고 인피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직(辭職)하지 말게 하였다. 【계사(啓辭)는 위에 보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세기는 술주정을 하고 여색(女色)을 탐하여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나며 행실이 나빠서 평소에 사람들이 천하고 더럽게 여겼다. 그 아비 윤계(尹堦)는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비루(鄙陋)하여 여러 번 번얼(蕃臬)009) 을 지내서 문득 청렴하지 못한 것으로 일컬어졌으나, 이재(吏才)가 있고 또 대신(大臣)을 잘 받들어 섬겨서 탁지(度支)010) 의 장관(長官)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탐오(貪汚)한 것으로 비방을 입으니, 박태유(朴泰維)가 언관(言官)이 되어 그 불법(不法)의 일을 논하였으나, 또한 실지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던 까닭에 대신이 신구(伸救)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명류(名流)가 윤세기를 배척하여 함께 하지 않으니, 윤세기는 울분(鬱憤)과 유감(遺憾)을 쌓아서 그 패악(悖惡)을 마음껏 부림이 있기를 생각하였다. 김석은 본래 인망(人望)이 없었으며 일찍이 오도일(吳道一)이 천인(薦引)한 바 되었는데, 김만채(金萬埰)를 논하기에 미쳐 말이 자못 시휘(時諱)에 저촉(抵觸)되었으니, 한 편의 사람이 이를 원망하여 뼈에 사무쳤다. 윤세기가 바야흐로 김만채를 편들어 이 의논을 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09] 번얼(蕃臬) :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을 말함.[註 010] 탁지(度支) : 호조(戶曺)를 가리킴.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세기는 술주정을 하고 여색(女色)을 탐하여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나며 행실이 나빠서 평소에 사람들이 천하고 더럽게 여겼다. 그 아비 윤계(尹堦)는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비루(鄙陋)하여 여러 번 번얼(蕃臬)009) 을 지내서 문득 청렴하지 못한 것으로 일컬어졌으나, 이재(吏才)가 있고 또 대신(大臣)을 잘 받들어 섬겨서 탁지(度支)010) 의 장관(長官)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탐오(貪汚)한 것으로 비방을 입으니, 박태유(朴泰維)가 언관(言官)이 되어 그 불법(不法)의 일을 논하였으나, 또한 실지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던 까닭에 대신이 신구(伸救)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명류(名流)가 윤세기를 배척하여 함께 하지 않으니, 윤세기는 울분(鬱憤)과 유감(遺憾)을 쌓아서 그 패악(悖惡)을 마음껏 부림이 있기를 생각하였다. 김석은 본래 인망(人望)이 없었으며 일찍이 오도일(吳道一)이 천인(薦引)한 바 되었는데, 김만채(金萬埰)를 논하기에 미쳐 말이 자못 시휘(時諱)에 저촉(抵觸)되었으니, 한 편의 사람이 이를 원망하여 뼈에 사무쳤다. 윤세기가 바야흐로 김만채를 편들어 이 의논을 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09] 번얼(蕃臬) : 도(道)의 관찰사(觀察使)을 말함.[註 010] 탁지(度支) : 호조(戶曺)를 가리킴.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세기는 술주정을 하고 여색(女色)을 탐하여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나며 행실이 나빠서 평소에 사람들이 천하고 더럽게 여겼다. 그 아비 윤계(尹堦)는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비루(鄙陋)하여 여러 번 번얼(蕃臬)009) 을 지내서 문득 청렴하지 못한 것으로 일컬어졌으나, 이재(吏才)가 있고 또 대신(大臣)을 잘 받들어 섬겨서 탁지(度支)010) 의 장관(長官)으로 발탁될 수 있었다. 탐오(貪汚)한 것으로 비방을 입으니, 박태유(朴泰維)가 언관(言官)이 되어 그 불법(不法)의 일을 논하였으나, 또한 실지에 어긋나는 것이 있었던 까닭에 대신이 신구(伸救)하여 벗어날 수 있었다. 이것을 가지고 명류(名流)가 윤세기를 배척하여 함께 하지 않으니, 윤세기는 울분(鬱憤)과 유감(遺憾)을 쌓아서 그 패악(悖惡)을 마음껏 부림이 있기를 생각하였다. 김석은 본래 인망(人望)이 없었으며 일찍이 오도일(吳道一)이 천인(薦引)한 바 되었는데, 김만채(金萬埰)를 논하기에 미쳐 말이 자못 시휘(時諱)에 저촉(抵觸)되었으니, 한 편의 사람이 이를 원망하여 뼈에 사무쳤다. 윤세기가 바야흐로 김만채를 편들어 이 의논을 하니, 놀라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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