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5권, 숙종 10년 1684년 3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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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6일 임신

교리(校理) 김창협(金昌協)이 부수찬(副修撰) 김만길(金萬吉)과 함께 상차(上箚)하여 윤세기(尹世紀)를 핵파(劾罷)한 뒤에, 물러나와 또 잘못하였음을 이유로 자송(自訟)하여 진소(陳疏)하고, 인혐(引嫌)하여 체직(遞職)을 청하니, 임금이 명하여 사직하지 말게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세기를 논파(論罷)할 때에 김만길이 바야흐로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하였다가 김창협등과 함께 의논하여 진차(陳箚)하였는데, 김만길의 친속(親屬)으로서 김석(金晳)을 미워하고 윤세기를 편드는 자가 김만길이 그 의논을 따라 참여함을 심하게 허물하였으니, 김만길이 물러나와 드디어 투소(投疏)하며 그 전의 생각을 바꾸었으매, 김창협은 지론(持論)이 본래 구차하지 않았으나, 윤세기를 차파(箚罷)함에 있어 또한 그 의논을 주장한 까닭에 스스로 소장(疏章)에 열거(列擧)하여 말이 지극히 명확하고 확실하였으니, 사람이 김만길의 전도(顚倒)를 비웃고 김창협의 정확(精確)함을 칭미(稱美)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사신(史臣)은 말한다. "윤세기를 논파(論罷)할 때에 김만길이 바야흐로 금중(禁中)에 입직(入直)하였다가 김창협등과 함께 의논하여 진차(陳箚)하였는데, 김만길의 친속(親屬)으로서 김석(金晳)을 미워하고 윤세기를 편드는 자가 김만길이 그 의논을 따라 참여함을 심하게 허물하였으니, 김만길이 물러나와 드디어 투소(投疏)하며 그 전의 생각을 바꾸었으매, 김창협은 지론(持論)이 본래 구차하지 않았으나, 윤세기를 차파(箚罷)함에 있어 또한 그 의논을 주장한 까닭에 스스로 소장(疏章)에 열거(列擧)하여 말이 지극히 명확하고 확실하였으니, 사람이 김만길의 전도(顚倒)를 비웃고 김창협의 정확(精確)함을 칭미(稱美)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3월 8일 갑술

정제두(鄭齊斗)를 공조 좌랑(工曹佐郞)으로 삼았다. 정제두는 고(故) 상신(相臣) 정유성(鄭維城)의 손자이니, 소시(少時)에는 학문에 뜻이 있었으나 어머니의 명(命)에 핍박당하여 과거(科擧)에 응시하여서 여러 번 발해(發解)011)  되었다. 나이 스물 네 살에 수정 구도(守靜求道)를 결의(決意)하여서 제우(儕友)의 추중(推重)하는 바 되니, 상신(相臣)이 그 학행(學行)을 천거하여서 곧장 주부(主簿)에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이 벼슬에 임명된 것이다. 사은 숙배(謝恩肅拜)한 뒤에 또한 병으로 면하였다.

 

3월 10일 병자

이세필(李世弼)은 형조 좌랑(刑曹佐郞)으로 삼았다. 이세필은 그(故) 현상(賢相) 이항복(李恒福)의 손자이다. 을묘년012)  에 여러 유생을 거느리고 항소(抗疏)하여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을 위하여 송원(訟寃)하였다가 드디어 죄를 얻어 영광(靈光)으로 귀양갔는데, 뒤에 사(赦)함으로 인하여 돌아올 수 있었다. 이로부터 거자(擧子)의 업(業)을 폐하고 학문에 전심(專心)하였으며 사이에 당세(當世)의 여러 어진이의 문(門)에 놀아서 성명(聲名)이 크게 알려졌다. 여러 번 천장(薦章)에 올라 처음에 교관(敎官)에 임명되었다가, 이때에 이르러 좌랑(佐郞)에 올랐다. 국전(國典)에 사마(司馬)013)  가 되지 않은 자는 삼조(三曹)014)  를 허락하지 않았는데, 이세필과 정제두는 특별히 학행(學行)으로 천거를 받은 까닭에 모두 파격(破格)으로 이 벼슬을 제수한 것이다.

 

3월 12일 무인

사헌부(司憲府)에서 조상우(趙相愚)와 송광연(宋光淵)을 특별히 체직한 명을 도로 거두라는 계청(啓請)을 정지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상우와 송광연은 혹 언책(言責)을 맡고 혹 근밀(近密)에 있어서 공의(公議)를 펴고자 하여 무겁게 시휘(時諱)에 저촉(抵觸)되어 천위(天威)가 거듭 노여워하여 마침내 체직하기에 이르렀으니, 여정(輿情)이 답답해하고 양사(兩司)015)  에서 일제히 일어나 다투어서 달을 넘겼어도 마침내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서로 이어서 정론(停論)한 것이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15] 양사(兩司) : 사헌부와 사간원.
사신(史臣)은 말한다. "조상우와 송광연은 혹 언책(言責)을 맡고 혹 근밀(近密)에 있어서 공의(公議)를 펴고자 하여 무겁게 시휘(時諱)에 저촉(抵觸)되어 천위(天威)가 거듭 노여워하여 마침내 체직하기에 이르렀으니, 여정(輿情)이 답답해하고 양사(兩司)015)  에서 일제히 일어나 다투어서 달을 넘겼어도 마침내 천의(天意)를 돌리지 못하였으므로, 이때에 이르러 서로 이어서 정론(停論)한 것이다."

 

3월 14일 경진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청대(請對)하여 임금에게 아뢰어서 수안 군수(遂安郡守) 김도명(金道鳴)이 새 진영(鎭營)의 전결(田結)을 농간을 부려서 속여 보고한 정상(情狀)을 가지고 구안(舊案)에 의거하여서 침점(侵占)을 당하는 폐단을 끊기를 청하니, 임금이 이를 옳게 여겼다. 또 연경(燕京)에 갈 때에 강도(江都)의 은(銀)을 의관(醫官)과 역관(譯官)에게 꾸어준 일로써 인구(引咎)하였다. 이어 별도로 동래(東萊)의 역인(譯人)에게 신칙하여 먼저 그 왜관(倭館)에 넘겨진 물화(物貨)의 값을 받게 하고, 또한 호조(戶曹)로 하여금 다른 세금을 받지 말게 하기를 청하니, 임금이 또 그대로 따랐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석주가 청대하여 말한 것은 이 몇 가지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대저 둔전(屯田)의 폐단됨이 오래되었다. 옛날의 둔전은 군인의 식량이 되는 것인데, 지금의 둔전은 모두 군문(軍門)에서 사사로이하는 바가 되어, 반은 무익(無益)한 용도로 돌아가며, 따로 아문(衙門)을 세워서 죄에서 빠져나가 숨는 숲으로 만든다. 전정(田政)이 현관(縣官)에서 말미암지 않고 군액(軍額)이 사마(司馬)016)  에 관계되지 않아 무릇 정역(征役)017)  이 모두 관여함이 없어서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고 양민(良民)에게 해(害)를 옮기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그때에 대간(臺諫)에서 소장(疏章)을 계속 올려 정파(停罷)를 청하던 것은 대개 또한 일국(一國)의 공론(公論)이다. 김석주는 자신이 묘당(廟堂)에 있으면서 변통(變通)을 생각하지 않고, 또 여러 진(鎭)을 내지(內地)에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넓혀서 본고을로 하여금 감히 말붙이지 못하게 한다. 김도명이 교활하여서 그 빼앗고자 하는 바가 반드시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옴을 알지 못하니, 김석주의 도리를 굽혀 여러 둔전(屯田)을 옹호함이 그 또한 다르겠는가? 더욱이 의관과 역관의 무리의 무판(貿販)은 진실로 사부(士夫)가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바인데도, 김석주는 이미 군수(軍需)를 꾸어 주고 이를 갚지 못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따라서 변명을 하며 임금 앞에 여쭈어서 말이 많기에 이르니, 남의 비방을 면하고자 하여도 어렵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700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16] 사마(司馬) : 병조(兵曹)를 가리킴.[註 017] 정역(征役) : 부세(賦稅)와 요역(徭役).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석주가 청대하여 말한 것은 이 몇 가지 일에 지나지 않을 뿐이다. 대저 둔전(屯田)의 폐단됨이 오래되었다. 옛날의 둔전은 군인의 식량이 되는 것인데, 지금의 둔전은 모두 군문(軍門)에서 사사로이하는 바가 되어, 반은 무익(無益)한 용도로 돌아가며, 따로 아문(衙門)을 세워서 죄에서 빠져나가 숨는 숲으로 만든다. 전정(田政)이 현관(縣官)에서 말미암지 않고 군액(軍額)이 사마(司馬)016)  에 관계되지 않아 무릇 정역(征役)017)  이 모두 관여함이 없어서 여러 고을에 폐를 끼치고 양민(良民)에게 해(害)를 옮기니, 이는 진실로 오늘날의 고질적인 폐단이다. 그때에 대간(臺諫)에서 소장(疏章)을 계속 올려 정파(停罷)를 청하던 것은 대개 또한 일국(一國)의 공론(公論)이다. 김석주는 자신이 묘당(廟堂)에 있으면서 변통(變通)을 생각하지 않고, 또 여러 진(鎭)을 내지(內地)에 설치하고 둔전(屯田)을 넓혀서 본고을로 하여금 감히 말붙이지 못하게 한다. 김도명이 교활하여서 그 빼앗고자 하는 바가 반드시 나라를 위하는 데에서 나옴을 알지 못하니, 김석주의 도리를 굽혀 여러 둔전(屯田)을 옹호함이 그 또한 다르겠는가? 더욱이 의관과 역관의 무리의 무판(貿販)은 진실로 사부(士夫)가 말하기를 부끄럽게 여기는 바인데도, 김석주는 이미 군수(軍需)를 꾸어 주고 이를 갚지 못하기에 이르러서는 또 따라서 변명을 하며 임금 앞에 여쭈어서 말이 많기에 이르니, 남의 비방을 면하고자 하여도 어렵다."

 

3월 15일 신사

이조 참판(吏曹參判) 박세채(朴世采)가 현도 사직소(縣道辭職疏)를 올리니, 임금이 전례(前例)대로 비답(批答)을 내려 허락하지 않았다. 이때에 추시(追諡)의 의논이 이미 형식적인 문장에 속하고, 재생(裁省)의 의논이 크게 민원(民怨)을 초래하였으며, 김익훈(金益勳)의 무고(誣告)가 거듭 공의(公議)에 죄를 지었으니, 박세채가 송시열(宋時烈)과 어긋남은 진실로 사사로움이 없는 뜻에서 나온 것이고, ‘문호(門戶)를 이룸이 고질적인 폐단에 기초를 두었다.’는 것은 처음에 박세채가 알 바가 아니며, 일가인(一家人)의 문답(問答)이라는 것은 그 말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요사스러운 무당이 죄를 나무라도록 청한 소(疏)는 대의(大義)를 지키고 법을 잡아서 양전(兩殿)에 저촉되어 거슬림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참으로 도(道)로써 임금을 섬기는 의리(義理)를 얻었다. 권우(眷遇)가 전과 같을 수 없음은 곧 세상 도리의 불행인 것이다. 명실(名實)이 서로 맞지 않는다는 말이 무엇 때문에 나왔는가? 신익상(申翼相)의 ‘나오지 말게 하라.’는 말에 이르러서는 속유(俗儒)가 자신의 졸렬함을 감추는 계교에 지나지 않아서 군자(君子)의 출처(出處)의 바름을 논하는 것은 아니다.

 

3월 25일 신묘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청대(請對)하여, 계해년018)   정월에 국청(鞫廳)에서 여러 신하를 인견(引見)하였을 때 주서(注書)의 일기(日記)가 실지를 잃은 정상(情狀)을 임금에게 아뢰고, 이어 소맷속에서 소초(小草)를 꺼내어 임금 앞에서 펴 읽었으니, 곧 일기의 착오(錯誤) 있는 곳을 손수 초록(抄錄)한 것이다. 임금이 말하기를,
"이제 대신의 말을 듣건대 어긋남이 이와 같으니, 후세에서 믿을 수 없다. 좌상(左相)의 전날의 말과 오늘 말한 것을 갖추 일기에 기록하여서 참고(參攷)의 터전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제 일기(日記)를 보건대, 주서(注書)가 진실로 잘못된 것이 있다. 그러나 김수항(金壽恒)의 김환(金煥)에 대한 도리가 과연 형법(刑法)의 중정(中正)을 얻어 의언(議讞)019)  의 바름을 잃지 않았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외우며 아름답게 여겨 모두 말하기를, ‘이는 아무 정승이 우리 임금께 건명(建明)한 것이다.’라고 하게 할 것이니, 변명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주서의 잘못을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김수항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이 수상(首相)이 되어서 언옥(讞獄)이 밝지 못하여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대대(大憝)020)  에 이르게 하여서 실형(失刑)을 받게 하였다. 또 그 말이 혹시 전후(前後)가 다를 것을 두려워하여 손수 일기를 베껴 가지고 임금 앞에 나아가 소리 내어 읽어 스스로 밝혀서 사기(辭氣)의 온화함을 매우 잃었다. 또한 지금의 주서(注書)가 전의 오록(誤錄)에 말미암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대신에게 물어 스스로 기주(記注)하여서 주서에게 보내기를 청하여 이것을 국가의 신사(信史)로 삼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생각하지 않음이 심하다. 하물며 좌사(左史)·우사(右史)의 기록한 바가 분명히 명백할 뿐만 아니라 진실로 선악(善惡)이 있다면 또한 전신(傳信)하기에 족한데, 일기(日記)의 오록(誤錄)이 또 어찌 수사(修史)할 때에 해가 되겠는가? 그런데도 김수항 등이 급급(汲汲)하여서 스스로 기탄(忌憚)함이 없는 죄에 빠짐을 알지 못한다. 대개 김수항은 비록 문아(文雅)를 일컬을 만하나 그 기량과 식견이 짧고도 얕은 까닭에 이 옳지 않은 거조가 있어서 끝없는 폐단을 열었으니, 탄식이 나옴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3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1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18] 계해년 : 1683 숙종 9년.[註 019] 의언(議讞) : 죄를 평정(評定)하는 것.[註 020] 대대(大憝) : 대악(大惡).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제 일기(日記)를 보건대, 주서(注書)가 진실로 잘못된 것이 있다. 그러나 김수항(金壽恒)의 김환(金煥)에 대한 도리가 과연 형법(刑法)의 중정(中正)을 얻어 의언(議讞)019)  의 바름을 잃지 않았다면, 사람들로 하여금 그 말을 외우며 아름답게 여겨 모두 말하기를, ‘이는 아무 정승이 우리 임금께 건명(建明)한 것이다.’라고 하게 할 것이니, 변명의 말을 기다리지 않고도 주서의 잘못을 스스로 가릴 수 없는 것이다. 김수항은 그렇지 못하여 자신이 수상(首相)이 되어서 언옥(讞獄)이 밝지 못하여 사람을 무고(誣告)하여 대대(大憝)020)  에 이르게 하여서 실형(失刑)을 받게 하였다. 또 그 말이 혹시 전후(前後)가 다를 것을 두려워하여 손수 일기를 베껴 가지고 임금 앞에 나아가 소리 내어 읽어 스스로 밝혀서 사기(辭氣)의 온화함을 매우 잃었다. 또한 지금의 주서(注書)가 전의 오록(誤錄)에 말미암을 것을 염려하여, 다시 대신에게 물어 스스로 기주(記注)하여서 주서에게 보내기를 청하여 이것을 국가의 신사(信史)로 삼고자 하기에 이르렀으니, 그 또한 생각하지 않음이 심하다. 하물며 좌사(左史)·우사(右史)의 기록한 바가 분명히 명백할 뿐만 아니라 진실로 선악(善惡)이 있다면 또한 전신(傳信)하기에 족한데, 일기(日記)의 오록(誤錄)이 또 어찌 수사(修史)할 때에 해가 되겠는가? 그런데도 김수항 등이 급급(汲汲)하여서 스스로 기탄(忌憚)함이 없는 죄에 빠짐을 알지 못한다. 대개 김수항은 비록 문아(文雅)를 일컬을 만하나 그 기량과 식견이 짧고도 얕은 까닭에 이 옳지 않은 거조가 있어서 끝없는 폐단을 열었으니, 탄식이 나옴을 견딜 수 있겠는가?"

 

3월 27일 계사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이 김만채(金萬埰)의 소(疏)로 인하여 진소(陳疏)하여서 스스로 변명(辨明)하였으니, 대략 이르기를,
"그 소(疏)의 상하 수천 마디 말을 진실로 일일이 나열할 수 없습니다만, 그 큰 뜻은 이렇습니다. 그때의 형찰(詗察)을 가지고 비록 미세(微細)한 일이라도 모두 김환(金煥)의 무리에게서 듣고 대신(大臣)에게 품의(稟議)하여서, 그 근본 지휘가 대신에게 나온 것으로 하고, 김환이 전익대(全翊戴)를 유인하여 위협하고 한수만(韓壽萬) 등이 병기(兵器)를 던져준 것 같은 것은 모두 그 아랫사람에게로 돌려서 마치 모두 주장하고 아는 것이 없는 것같이 하였으니, 그 편의대로 벗어나려는 계책이 참으로 교묘(巧妙)합니다.
아! 그 흉역(凶逆)을 형찰(詗察)함이 얼마나 중대한 일입니까? 그런데도 대신이 이미 그것을 오로지 김익훈(金益勳)에게 맡겨, 그 기회를 틈타서 교묘한 수단을 쓰며, 은밀할 일을 유도(誘導)하여 알아내고 잠복한 것을 탐지하였습니다. 사람을 조종하여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섬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와서 계책이 정해진 뒤에 대신과 의논하여, 김익훈이 ‘은화(銀貨)를 주어야 합니다.’하면 대신도 ‘주어야 한다.’하고 김익훈이 ‘융물(戎物)을 주어야 합니다.’하면 대신도 ‘주어야 한다.’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이제 와서 말하기를, ‘이는 모두 대신에게 품(稟)하였으니, 내가 오로지 한 바가 아니다.’ 한다면 되겠습니까? 김익훈이 이미 김환 등과 형찰의 일을 맡았으면, 이는 반드시 심간(心肝)021)                  이 서로 의지하고 이목(耳目)이 서로 통하여 비밀스럽고 절실하게 계모(計謀)하며 정녕(丁寧)하게 부탁하여서, 비록 한번의 동정(動靜)과 한 번의 시위(施爲) 사이에서도 서로 알고 서로 의논하지 않음이 없은 연후에는 기회를 잃거나 일을 그리침이 없을 수 있습니다. 남의 은밀한 일을 얼마나 유도하여 물음이 얼마나 긴밀한 모임이며, 남에게 융기(戎器)를 주는 것이 얼마나 위태로운 일인데, 김익훈이 모두 관리하지 않고 살피지 아니하여서, 어느날 누구를 만나고 어느 때에 어떤 물건을 주는지 알지 못한다는 것이 과연 이치에 가깝단 말입니까? 김환이 이미 전익대의 의심스러움을 알아서 장차 유인하고 위협하고자 이 날 김익훈과 함께 깊은 밤에 모였으니, 그 의심스러운 형적(形跡)과 장차 유인하고 위협하려는 정상(情狀)을 김환이 반드시 혼자 알아서 혼자 행한 것이 아닙니다. 뜻이 맞고 계교가 정하여져 군뢰(軍牢) 1인을 주어 보냈으니, 서로 모여 계획을 세웠음이 어찌 확실하게 모두 드러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도 말하기를, ‘그 날 만난 것은 생각했던 바가 아니다.’라고 하니, 옳습니까? 그 유인하고 위협하며 밝혀내기에 미쳐 여러 날 구류(拘留)하고, 처음에 그로 하여금 상변(上變)하게 하지 않고 마침내 친히 스스로 밀계(密啓)하였습니다. 이미 끌어넣은 여러 사람이 모두 정실(情實)이 없게 되자, 그때에는 마치 전익대의 다른 날의 증언(證言)에 핍박당하여 어쩔 수 없이 이를 한 것처럼 하였으니, 비록 음밀(陰密)하다는 일컬음을 면하고자 한들 어찌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병기를 주는 것이 과연 적정(賊情)을 탐지하고자 하는 것이라면, 또한 장차 주고받는 시기(時期)를 밀의(密議)하고 정형(情形)의 실상을 확실하게 얻은 연후에 탐시(探試)를 말함이 옳습니다. 어찌 막연하게 응답(應答)하기를 ‘준다.’고 하여서 본래 그 사이에는 아는 바가 없었단 말입니까? 이것은 비록 평소 세상일에 어둡고 허탄하다고 일컬어지는 자라 하더라도 반드시 이렇게 하지 않는데, 어찌 김익훈처럼 간사하고 교활한 자가 이렇게 하겠습니까? 마침내 내려다 보아도 손을 댈 만한 어두운 곳이 없게 되기에 이르자 이어서 즉시 고발(告發)한 것인데, 오늘에 와서 주고받을 때에 미리 안 바가 아니라고 함은 그 기만(欺瞞)함이 또한 심한 것입니다. 그 융물(戎物)의 공유(公有)가 되고 사유(私有)가 되는 것 같은 것은 또한 논할 바가 아닙니다. 김만채의 소(疏) 안의 이른바 그 아비를 구함(構陷)한 4관(欵)이라는 것은 기찰(譏察)과 은화(銀貨)와 이 두 가지 일입니다. 기찰을 진실로 잘하였다면 다시 어찌 미워하겠으며, 은화를 내줄 만하였다면 또 어찌 거리끼겠습니까? 어찌 오로지 이것으로써 그 아비의 죄를 삼는단 말입니까? 융물을 밀계(密啓)한 것은 비록 꾸밈을 교묘하게 하고 가려 덮음을 잘한다 하여도 신은 그 파탄을 가리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난신 적자는 사람마다 죽음을 당하여서 무릇 혈기(血氣) 있는 무리가 모두 피를 흘려 토죄(討罪)를 청할 마음이 있으니, 허새(許璽)·허영(許瑛)의 반역(叛逆)함을 누가 통분(痛憤)하게 여기지 아니하여서 김익훈의 형찰하여 얻음을 도리어 미워한단 말입니까? 만약 김만채의 이 말을 제목(題目)을 만들어서 평의(評議)하는 데 들인다면 과연 무슨 죄명이 되겠습니까? 김만채가 폭로하는 데 급급하여 사람에게 이같은 죄와 이같은 이름을 더하고자 하니, 아! 차마 할 수 있었겠습니까? 허새(許璽)·허영(許瑛)의 복주(伏誅)된 것이 비록 김익훈에게서 말미암는다고 하지만, 그들은 곧 죽은 역적을 믿고 구실로 삼았는데, 비록 별다른 허물과 다른 악(惡)이라도 사람의 입에 재갈을 물리어 논하지 못하게 함은 어찌된 것입니까? 훗날 입을 빌어서 사람을 어육(魚肉)으로 만드는 것이 반드시 이에 말미암지 않음이 없을 것이니, 이는 그 계책이 다만 이비를 송원(訟寃)하는 데 있을 뿐만이 아닙니다. 신의 인피(引避)하는 글 속의 말을 가지고 신변(伸辨)하는 바가 있기에 이르렀는데, 그 중에서 유독 세금을 견감(蠲減)해          【세금을 감하여 주는 것이니 김익훈은 나라에서 감하여 준 백성의 세금을 사사로이 거두어서 자기 집으로 옮겼다.】         주는 한 항목만을 들어서 말을 하고, 정승이 타는 말에 제손으로 가철(加鐵)022)                  한 것과 역적(逆賊)의 부인을 버젓하게 데리고 사는 것같은 일들은 일언 반구도 자백도 없이 단지 ‘모두 이것과 비슷하다.[擧皆類此]’라는 한 귀절을 가지고 모든 조목을 모두 가리워버림은 어찌된 것입니까? 어찌 앞의 몇 가지 일이 과연 탄핵하는 글에 올라 여송(輿誦)023)                  에 전파(傳播)되면 비록 김만채를 가지고도 고칠 수 없고 홀로 이것만이 신변할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홀로 그 ‘종당(宗黨)이 반거(盤據)하여 세력이 이루어지고 위엄이 선다.[宗黨盤居 勢成威立]’라는 여덟 글자를 가지고 신이 그은 온집안을 주륙(誅戮)할 뜻이 있다고 말하니, 이것이 가소롭습니다. 김만채의 집안에 대하여 신이 무슨 원한이 있기에 이같은 주륙(誅戮)할 계책을 한단 말입니까? 김익훈으로 하여금 과연 종당(宗黨)·위세(威勢) 등의 말한 만할 것이 없게 하였다면, 신의 말이 망녕될 뿐입니다. 온 집안이 무슨 병에 걸렸는지, 그렇지 않으면 혹시 여기에 가까운 것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비록 신의 말이 없다 한들 어찌 또 낫겠습니까? 시험삼아 김익훈의 평생을 가지고 말하여 보겠습니다. 변변치 못한 백도(白徒)024)                  가 경박하고 비루하기 짝이 없어서 전후(前後)하여 논한 자가 혹은 그 재앙을 입으니, 온 세상 사람이 눈흘겨 보며 말을 삼켜서 감히 말하지 못합니다. 이와 같으면서 종당(宗黨)이 강성(强盛)하여 위세(威勢)가 이루어졌다는 비방이 없고자 한들 되겠습니까? 이것은 마땅히 조금이라도 스스로 반성함이 있어야 하고 오로지 말하는 자를 탓하여서는 안 됩니다."          【자세한 것은 위에 보인다.】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니, 임금이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익훈은 자신이 형찰의 일을 맡아 마침내 전익대(全翊戴)의 무고(誣告)를 주장하여서 인심(人心)이 놀라고 분개하여 그와 더불어 반열(班列)을 함께함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찬배(竄配)의 계청(啓請)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처음에 형찰할 때 이미 참여하여 들었으며, 대계(臺啓)가 이미 발(發)한 뒤에는 차마 김익훈에게 죄를 돌리지 못하고 또 인책(引責)하여 스스로 담당하려들지 못하여서 공의(公議)를 깊이 배격하고 위로 천청(天聽)을 현혹하였다. 그래서 김익훈을 비호(庇護)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 것 같이하여 한때의 청의(淸議)를 견지(堅持)하는 자로 하여금 조정(朝廷) 위에서 불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묘당의 허물이다. 그 이른바 청의(淸議)도 또한 어찌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저 김익훈의 악(惡)은 무옥(誣獄)을 기다리지 않고도 드러난지 이미 오래이니, 묘당에서 장수(將帥)의 임무에 발탁하여 둔 것이 실로 사람들의 기대 밖에서 나왔다. 비록 ‘때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기를 당하여서 병권(兵權)을 외부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조정으로 하여금 처치(處置)가 마땅할 수 있게 하였다면, 왕승종(王承宗)같은 흉포(凶暴)한 자도 손을 거두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김익훈은 본래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니니, 또 어찌 이를 맡기기에 족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청의가 이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바야흐로 척리(戚里)의 권력을 빌어서 그 세력을 굳히고자 하였다. 조지겸(趙持謙)의 무리는 또 따라서 척리의 자제(子弟)를 천진(薦進)하여 한원(翰苑)025)                          과 천관(天官)026)                          에서 수(數)가 많기로 으뜸이 되어서 그 성세(聲勢)를 더하였으니, 종족(宗族)이 강성하고 세력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청의를 하는 자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평소에 그를 대우함이 이와 같으면서도 이에 묘당에 통의(通議)한 일을 홀로 김익훈의 죄로 삼아 이를 주장함이 매우 급하니, 이것은 한갓 원독(怨毒)을 취하여서 스스로 전패(顚沛)를 초래하는 것이다. 한태동(韓泰東)의 소(疏)같은 것은 또한 격분(激忿)함이 있어 발(發)한 것이니, 그 김익훈의 일을 논함이 정상(情狀)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성명(聖明)을 계도(啓導)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비록 머리를 부순들 또 어찌 나라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개탄(慨嘆)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701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21]          심간(心肝) : 마음.[註 022]          가철(加鐵) : 말굽에 편자를 박는 것.[註 023]          여송(輿誦) : 사람들이 외어 전함.[註 024]          백도(白徒) : 식견(識見)이 없는 사람.[註 025]              한원(翰苑) : 예문관(藝文館)의 별칭.[註 026]              천관(天官) : 이조(吏曹).
하였다. 소(疏)가 들어가니, 임금이 체차(遞差)하도록 명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익훈은 자신이 형찰의 일을 맡아 마침내 전익대(全翊戴)의 무고(誣告)를 주장하여서 인심(人心)이 놀라고 분개하여 그와 더불어 반열(班列)을 함께함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찬배(竄配)의 계청(啓請)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처음에 형찰할 때 이미 참여하여 들었으며, 대계(臺啓)가 이미 발(發)한 뒤에는 차마 김익훈에게 죄를 돌리지 못하고 또 인책(引責)하여 스스로 담당하려들지 못하여서 공의(公議)를 깊이 배격하고 위로 천청(天聽)을 현혹하였다. 그래서 김익훈을 비호(庇護)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 것 같이하여 한때의 청의(淸議)를 견지(堅持)하는 자로 하여금 조정(朝廷) 위에서 불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묘당의 허물이다. 그 이른바 청의(淸議)도 또한 어찌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저 김익훈의 악(惡)은 무옥(誣獄)을 기다리지 않고도 드러난지 이미 오래이니, 묘당에서 장수(將帥)의 임무에 발탁하여 둔 것이 실로 사람들의 기대 밖에서 나왔다. 비록 ‘때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기를 당하여서 병권(兵權)을 외부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조정으로 하여금 처치(處置)가 마땅할 수 있게 하였다면, 왕승종(王承宗)같은 흉포(凶暴)한 자도 손을 거두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김익훈은 본래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니니, 또 어찌 이를 맡기기에 족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청의가 이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바야흐로 척리(戚里)의 권력을 빌어서 그 세력을 굳히고자 하였다. 조지겸(趙持謙)의 무리는 또 따라서 척리의 자제(子弟)를 천진(薦進)하여 한원(翰苑)025)                          과 천관(天官)026)                          에서 수(數)가 많기로 으뜸이 되어서 그 성세(聲勢)를 더하였으니, 종족(宗族)이 강성하고 세력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청의를 하는 자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평소에 그를 대우함이 이와 같으면서도 이에 묘당에 통의(通議)한 일을 홀로 김익훈의 죄로 삼아 이를 주장함이 매우 급하니, 이것은 한갓 원독(怨毒)을 취하여서 스스로 전패(顚沛)를 초래하는 것이다. 한태동(韓泰東)의 소(疏)같은 것은 또한 격분(激忿)함이 있어 발(發)한 것이니, 그 김익훈의 일을 논함이 정상(情狀)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성명(聖明)을 계도(啓導)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비록 머리를 부순들 또 어찌 나라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개탄(慨嘆)할 만하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8책 701면
【분류】역사-사학(史學) / 역사-편사(編史)


[註 021]          심간(心肝) : 마음.[註 022]          가철(加鐵) : 말굽에 편자를 박는 것.[註 023]          여송(輿誦) : 사람들이 외어 전함.[註 024]          백도(白徒) : 식견(識見)이 없는 사람.[註 025]              한원(翰苑) : 예문관(藝文館)의 별칭.[註 026]              천관(天官) : 이조(吏曹).
사신(史臣)은 말한다. "김익훈은 자신이 형찰의 일을 맡아 마침내 전익대(全翊戴)의 무고(誣告)를 주장하여서 인심(人心)이 놀라고 분개하여 그와 더불어 반열(班列)을 함께함을 부끄럽게 여겼으니, 찬배(竄配)의 계청(啓請)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하겠는가? 묘당(廟堂)에서는 처음에 형찰할 때 이미 참여하여 들었으며, 대계(臺啓)가 이미 발(發)한 뒤에는 차마 김익훈에게 죄를 돌리지 못하고 또 인책(引責)하여 스스로 담당하려들지 못하여서 공의(公議)를 깊이 배격하고 위로 천청(天聽)을 현혹하였다. 그래서 김익훈을 비호(庇護)하기를 마치 미치지 못할 것 같이하여 한때의 청의(淸議)를 견지(堅持)하는 자로 하여금 조정(朝廷) 위에서 불안하게 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묘당의 허물이다. 그 이른바 청의(淸議)도 또한 어찌 과실이 없다고 할 수 있겠는가? 대저 김익훈의 악(惡)은 무옥(誣獄)을 기다리지 않고도 드러난지 이미 오래이니, 묘당에서 장수(將帥)의 임무에 발탁하여 둔 것이 실로 사람들의 기대 밖에서 나왔다. 비록 ‘때가 위태롭고 의심스러운 시기를 당하여서 병권(兵權)을 외부 사람에게 맡길 수 없다.’고 말하지만, 조정으로 하여금 처치(處置)가 마땅할 수 있게 하였다면, 왕승종(王承宗)같은 흉포(凶暴)한 자도 손을 거두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물며 김익훈은 본래 장수가 될 만한 재목이 아니니, 또 어찌 이를 맡기기에 족하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청의가 이것을 옳지 않다고 하였다는 것을 듣지 못하였으며, 바야흐로 척리(戚里)의 권력을 빌어서 그 세력을 굳히고자 하였다. 조지겸(趙持謙)의 무리는 또 따라서 척리의 자제(子弟)를 천진(薦進)하여 한원(翰苑)025)                          과 천관(天官)026)                          에서 수(數)가 많기로 으뜸이 되어서 그 성세(聲勢)를 더하였으니, 종족(宗族)이 강성하고 세력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청의를 하는 자가 이렇게 만든 것이다. 평소에 그를 대우함이 이와 같으면서도 이에 묘당에 통의(通議)한 일을 홀로 김익훈의 죄로 삼아 이를 주장함이 매우 급하니, 이것은 한갓 원독(怨毒)을 취하여서 스스로 전패(顚沛)를 초래하는 것이다. 한태동(韓泰東)의 소(疏)같은 것은 또한 격분(激忿)함이 있어 발(發)한 것이니, 그 김익훈의 일을 논함이 정상(情狀)을 다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처음에 성명(聖明)을 계도(啓導)하지 못하고 이제 와서 비록 머리를 부순들 또 어찌 나라 일에 도움이 되겠는가? 개탄(慨嘆)할 만하다."

 

임금이 비망기(備忘記)를 내려 전(前) 집의(執義) 한태동(韓泰東)을 절책(切責)하고 이어 삭직(削職)을 명하였다.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주상(主上)이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오로지 한쪽의 사람에게 〈국정(國政)을〉 맡겼는데, 얼마 안되어 역변(逆變)이 급작스럽게 이 무리에서 나오고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함이 모두 외척(外戚)의 손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외척이 주상께서 기울어 의지하는 바가 되었으며, 김익훈도 척리(戚里)인 까닭에 대장(大將)에 임명되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의 비호(庇護)하는 바가 진실로 이미 지극하였다. 하물며 송시열(宋時烈) 같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진 이나 김수항(金壽恒) 같이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을 받은 자가 김익훈을 위하여 영구(營救)의 기치(旗幟)를 세웠다. 그러므로 비록 주상의 영명(英明)이 예전보다 뛰어나다 하여도 김익훈에게 사정(私情)이 없을 수 없으며, 또 여러 대신의 말에 뜻이 현혹됨이 있어서 매번 김익훈의 일에 대하여 준렬(峻烈)하게 배척하여서 말한 자로서 죄를 얻은 자가 한두 사람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으나 견벌(譴罰)의 말이 일찍이 이와 같이 지나치지는 않았다. 신하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죄명(罪名)을 더하여서 한 세상의 감히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기에 이르렀다. 크게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나 구(救)하여 바로잡을 수 없으니, 탄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2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주상(主上)이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오로지 한쪽의 사람에게 〈국정(國政)을〉 맡겼는데, 얼마 안되어 역변(逆變)이 급작스럽게 이 무리에서 나오고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함이 모두 외척(外戚)의 손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외척이 주상께서 기울어 의지하는 바가 되었으며, 김익훈도 척리(戚里)인 까닭에 대장(大將)에 임명되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의 비호(庇護)하는 바가 진실로 이미 지극하였다. 하물며 송시열(宋時烈) 같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진 이나 김수항(金壽恒) 같이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을 받은 자가 김익훈을 위하여 영구(營救)의 기치(旗幟)를 세웠다. 그러므로 비록 주상의 영명(英明)이 예전보다 뛰어나다 하여도 김익훈에게 사정(私情)이 없을 수 없으며, 또 여러 대신의 말에 뜻이 현혹됨이 있어서 매번 김익훈의 일에 대하여 준렬(峻烈)하게 배척하여서 말한 자로서 죄를 얻은 자가 한두 사람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으나 견벌(譴罰)의 말이 일찍이 이와 같이 지나치지는 않았다. 신하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죄명(罪名)을 더하여서 한 세상의 감히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기에 이르렀다. 크게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나 구(救)하여 바로잡을 수 없으니, 탄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5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2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역사-사학(史學)
사신(史臣)은 말한다. "주상(主上)이 어린 나이로 왕위(王位)를 계승하여 오로지 한쪽의 사람에게 〈국정(國政)을〉 맡겼는데, 얼마 안되어 역변(逆變)이 급작스럽게 이 무리에서 나오고 화란(禍亂)을 평정(平定)함이 모두 외척(外戚)의 손에서 나왔다. 이로부터 외척이 주상께서 기울어 의지하는 바가 되었으며, 김익훈도 척리(戚里)인 까닭에 대장(大將)에 임명되기에 이르렀으니, 임금의 비호(庇護)하는 바가 진실로 이미 지극하였다. 하물며 송시열(宋時烈) 같이 사림(士林)의 중망(重望)을 진 이나 김수항(金壽恒) 같이 선왕(先王)의 유명(遺命)을 받은 자가 김익훈을 위하여 영구(營救)의 기치(旗幟)를 세웠다. 그러므로 비록 주상의 영명(英明)이 예전보다 뛰어나다 하여도 김익훈에게 사정(私情)이 없을 수 없으며, 또 여러 대신의 말에 뜻이 현혹됨이 있어서 매번 김익훈의 일에 대하여 준렬(峻烈)하게 배척하여서 말한 자로서 죄를 얻은 자가 한두 사람에 그칠 뿐만이 아니었으나 견벌(譴罰)의 말이 일찍이 이와 같이 지나치지는 않았다. 신하에게 차마 들을 수 없는 죄명(罪名)을 더하여서 한 세상의 감히 말하는 기풍(氣風)을 꺾기에 이르렀다. 크게 성덕(聖德)의 누(累)가 되나 구(救)하여 바로잡을 수 없으니, 탄식함을 견딜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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