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5권, 숙종 10년 1684년 4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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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9일 갑인

형조 참의(刑曹參議)        조지겸(趙持謙)이 김만채(金萬埰)의 소척(疏斥)으로 인하여 진소(陳疏)하여서 스스로 변명(辨明)하였으니, 대략 이르기를,
"김익훈이 중하게 감죄(勘罪)되던 날 김만채가 일찍이 일언반구의 송원(訟寃)도 없다가 이제 김익훈이 석방(釋放)되어 나와 다니고 또 다시 서용(敍用)되자, 가론(家論)이 크게 행하여지고 공의(公議)가 이미 사라진 뒤에 자신이 옥서(玉署)027)                  에 통하게 되어서 비로소 입을 열어 부르짖었습니다. 그 말이 비록 아비를 위한 것이라고 의탁(依托)하였으나 그 뜻은 오로지 신을 해치는 데 있으니, 신이 이에 대하여 다시 그 대개(大槪)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당초에 김익훈의 아방(兒房)028)                  의 계품(啓稟)이 조보(朝報)에 나오지 않았고, 신은 국청(鞫廳)에 나아가 참여하는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에 처음에 이를 듣지 못하였으며, 얼마 안되어 외람되게 정원(政院)에 들어가게 되어서 비로소 그 일을 듣고 마음에 저으기 놀랐습니다. 일이 역옥(逆獄)에 관계되어 비록 경솔하고 쉽게 말하기 어려우나, 이같은 일을 만약 색목(色目)의 같고 다름을 가지고 이쪽과 저쪽이 있어서 입을 다물고 말하지 않는다면 매우 공정(公正)한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또 김익훈의 몸가짐과 일을 처리하는 것을 보건대, 결코 등단(登壇)의 중임(重任)에 두어서 완급(緩急)할 때 힘을 얻기를 바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탑전(榻前)에서 추문(推問)을 청하여, 그 허실(虛實)을 살피지 않고 친히 스스로 밀계(密啓)한 일의 전도(顚倒)되고 도리에 어긋나는 정상을 진달(陳達)하였습니다.
이어 성주(聖主)의 시대를 상천(上天)께서 아래에 임(臨)한 것과 같음에 비겨, 하늘에는 해와 달이 있어 이를 비추고 비와 이슬로 이를 적시며, 바람과 우레로 이를 진동하여서, 비록 무지개의 부정(不正)의 기운이 그 사이에 범함이 있어도 스스로 소멸(消滅)되니, 조정은 오직 마땅히 정형(政刑)을 밝히고 덕택(德澤)을 펴며 기강(紀綱)을 엄숙하게 하여서 치화(治化)의 융성(隆盛)을 도모하여야 하고, 기찰(譏察)은 쇠퇴하는 말세(末世)의 일로서 하여서는 안됨이 있음을 말하였습니다. 신의 말이 비록 오활(迂濶)한 것 같으나 뜻이 바로 이와 같은 까닭에 아울러 진술하였으며 성명(聖明)께서도 머리를 끄덕여 옳다는 뜻을 보이셨습니다. 그 후 김익훈은 세력을 떨치어 거리낌이 없고 이익을 좋아하여 염치(廉恥)가 없어서 편안히 공사(公事)를 행하고 스스로 처신(處身)하기에 뜻이 없었습니다. 그때에 김익훈은 사제(私第)를 넓게 지었으며 예전의 시위궁(侍衛宮)을 사들여 그 군관청(軍官廳)으로 만들기에 이르렀으니, 김익훈의 집은 대문이 여섯이라는 말이 한때에 성행(盛行)하였기 때문에, 신이 또 그 탐욕스럽고 사치스러우며 방종(放縱)한 정상을 진달하여 성상(聖上)께서 물리치시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신은 김익훈과 더불어 서로 안 지 이미 오래이며, 또 그 기염(氣焰)이 바야흐로 치성(熾盛)하여 세상 사람들이 곁눈질하여 보고 말을 삼키는 바 되니, 신의 벼슬이 언책(言責)이 아니어서 종적(踪跡)이 외롭고 위태로움을 가지고도 감히 사정(私情)을 돌아보지 않고 강봉(强鋒)을 부딪혀 범하면서 입을 괴롭혀가면서 힘써 다투어 어찌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매양 전 세상에서 탐오 무뢰(貪汚無賴)한 무리를 써서 삼군(三軍)의 우두머리로 삼아 나라의 운명을 걸었다가 마침내 변란(變亂)에 임하여 분패(僨敗)를 초래한 것을 볼 때마다 일찍이 통한(痛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구구(區區)한 간혈(肝血)의 성의(誠意)가 국가 간성(干城)의 임무를 적당하지 않은 자에게 맡기는 것은 크게 근심해야 할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그 후에 대간(臺諫)에서 거리의 떠도는 말과 나라 안의 비등(沸騰)하는 비방의 소리를 일세(一世)의 공공(公共)의 의논으로 하여서 파출(罷黜)을 청하였습니다. 전익대(全翊戴)와 김환(金煥)이 면질한 뒤에 미쳐, 김환의 유인하고 위협한 정상이 크게 드러나서 가릴 수 없었고, 일이 김익훈에게 관련됨이 또한 분명하였으므로 공의(公議)가 이에 대하여 격렬(激烈)해졌습니다. 김환은 국문(鞫問)을 청하고 김익훈은 찬배(竄配)를 청하였으니, 이것은 국청(鞫廳)의 여러 신하가 눈으로 보고 말한 것으로서, 대론(臺論)이 이로 인하여 더하여진 것입니다. 어찌 신이 관여하여서 듣고 관여하여서 아는 것이겠습니까? 그 문외(門外)로 출송(黜送)하게 되어서는 겨우 두 달을 지나서 급작스럽게 석방되었으니, 인심을 만족하게 복종시킬 수 없었습니다. 성상께서 김익훈이 무슨 죄가 있는지를 하문(下問)하시기에, 신은 곧 화약잠투(火藥潛投) 등의 일을 뭇사람의 마음에 옳지 않게 여기는 것을 가지고 솔직하게 대답을 올렸습니다. 김익훈의 죄가 이것을 가지고 마땅히 더하여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진실로 성명(聖明)이 김익훈의 일을 모두 살피지 못하신 듯하여, 지척(咫尺)에서의 물으심에 감히 일찍이 들은 바를 숨기지 못하고 밖에서 말하는 바 뭇사람의 옳지 않게 여기는 점을 들어서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역적 허새(許璽)의 문서(文書)가 낭자(狼藉)하여서 모계(謀計)가 지극히 흉악하니, 무릇 역내(域內)에서 보고 듣는 무리가 마음에 놀라고 뼈아프지 않음이 없어서 시체를 반 토막으로 내어 죽일 것을 생각하였습니다. 대저 허새의 흉적(凶賊)임을 가지고 모반(謀反)의 형적(形跡)이 이미 갖추어졌으니, 그 모아 결탁한 바가 반드시 적지 않아서 응당 다만 고변(告變)한 자 몇 사람과 더불어 꾀한 것만이 아닙니다. 김익훈으로 하여금 염탐을 잘하여서 그 번잡한 무리를 많이 얻게 하였다면, 비록 밀계(密啓)·잠투(潛投) 등 사람의 이목(耳目)을 놀라게 하는 일에다가 모토(茅土)029)                  를 가지고 그 의망(意望)을 일컬음이 있다 하더라도 그 누가 옳지 않다고 말하겠습니까? 김만채의 소(疏)에 기찰(譏察)을 일러 말하기를, ‘상신(相臣)이 실로 비로소 기틀을 세워서 그 아비에게 맡겼으며, 이회(李) 등이 처음에 이미 흉역(凶逆)의 정상(情狀)을 대략 얻어서 김환(金煥)으로 하여금 그 속으로 뚫고 들어가 한 몸이 되어 기찰(譏察)하여 기회를 틈타서 이대온(李大溫)의 전의 일을 유도(誘導)하여 묻게 하였습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역적 허새가 한수만(韓壽萬)의 가계(家計)가 조금 부유함을 가지고 그 도당으로 유인하여 들이고, 그 아비가 정절(情節)을 탐지하기 위하여 은화(銀貨)를 내어 주어서 그 모여 농락하는 비용에 이바지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에 말미암아 본다면 이회·김환·한수만 등은 처음에 허새가 더불어 함께 역모(逆謀)를 한 것이 아니고 뒤에 의도를 고쳐 상변(上變)한 자입니다. 김익훈(金益勳)은 이 무리와 함께 마음을 같이 하여 허새를 정찰(偵察)하면서 세월을 보냈으니, 허새의 사정·종적과 거세(巨細)·완급(緩急)이 모두 눈 안에 있어서, 창졸간에 변(變)을 듣고 황급하게 고발하는 자에 비길 것이 아닙니다. 역적 허새가 유인하여 들인 한 수만을 가지고 역적 허새를 농락하는 사람으로 만들고, 몰래 자금을 주어서 그쪽으로 기울어져 굳게 결탁하게 하였으며, 또 이회·김환 등이 있어서 앞과 뒤가 되게 하였다면, 그 사이의 배치가 물샐 틈 없다고 이를 만합니다. 그 탐구(探鉤)의 방법에 있어 마땅히 먼저 그 당류(黨類)를 물어 빠짐이 없게 하여서 그 수족(手足)을 모두 캐내고 무기를 샅샅이 찾아낸 뒤에 상변한다면, 그 당류로 하여금 변명(辨明)의 말이 없이 취복(就服)하게 할 것이니, 이는 계책을 다하여서 농락한 실지가 되며 오랜 시일을 두고 형찰을 쌓은 이익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김익훈의 기변(機變)은 헤아림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고, 한편으로 급하게 빈집에 무기를 던져 넣어서 그 증거를 이루는 도구로 만들고 한편으로 적인(賊人)을 군문(軍門)에 유도하여 물어서 마치 변(變)이 호흡(呼吸)하는 사이에 있는 것 같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숙문(淑問)030)                  할 때에 이르러서는 얻은 것이 다만 허새 한 사람뿐이고, 인치(引致)한 바가 모두 그 단서(端緖)가 없어서, 한갓 조정이 크게 놀라고 나라 안이 소요(騷擾)하게 만들었을 뿐으로, 그 과장(誇張)하여 크게 만들었던 것이 마침내 보잘것없게 되었습니다. 그 사이의 일의 정상(情狀)은 진실로 다른 사람이 헤아려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나, 죄를 토벌하고 반역(反逆)을 주륙(誅戮)함이 이것이 어떤 일이기에 소홀하고 어긋남이 이같이 심하단 말입니까? 전익대(全翊戴)는 공초(供招)를 받고 구류(拘留)한 것이 여러 번인데도 국청(鞫廳)을 설치한 지 이미 오랜 뒤에야 추후하여 아뢰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일이 이미 비밀에 속하며, 마침내 사실(事實)이 없는 것으로 돌렸으니, 김익훈이 무엇을 가지고 할 말이 있단 말입니까? 김만채가 말하기를, 김익훈이 또한 전익대를 가지고 믿기 어려움이 있다 하여 전익대의 죽음을 면하는 터전을 위하여 아방(兒房)의 계사(啓辭)를 하였다고 하였습니다. 또 그 계사를 끌어대어서 각 아문(衙門) 제조(提調)의 계사에 예(例)에 비겨 은연 중에 흘러내려오는 옛 법도로서 선배(先輩)가 일찍이 행하던 바임을 가지고 구실로 삼으니, 이것이 과연 말이 되겠습니까? 갑신년031)                  의 역옥(逆獄) 때에 고(故) 상신(相臣) 능천 부원군(綾川府院君) 구인구(具仁垕)는 호위(扈衛)하는 곳에 있으면서 무릇 아뢸 것이 있으면 모두 낭청(郞廳)으로 하여금 올리게 하였습니다. 김익훈이 또한 자신이 대장(大將)이 되어 반드시 친히 들어가 아뢰었으니, 이에 군정(群情)의 의혹(疑惑)하여 이를 가리켜서 공(功)을 탐하고 상(賞)을 구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김만채는 말하기를, 그 아비가 계해년032)                  에 여러 신하가 도적을 형찰(詗察)한 것을 들음이 매우 상세하나 애석하게도 유독 구인구의 고사(故事)만 듣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또 김환은 김익훈이 돌아가게 되자 다만 뇌자(牢子)를 반송(伴送)하였을 뿐만 아니라 또 영기(令旗)를 빌렸으니, 비록 유인하고 위협한 계모(計謀)를 알지 못한다고 말하지만, 다만 깊은 밤의 호행(護行)만으로도 거의 눈을 가리고 참새를 잡는 것에 가깝습니다.
화약(火藥)의 설(說)에 이르러서는, 김만채가 여러 번 말하기를 그것이 군문(軍門)에서 나온 것이 아니며, 신이 좌상(左相)의          【민정중(閔鼎重)이다.】         하지 않은 말을 만들어내어서 천위(天威) 밑에 속여 진달(陳達)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의 곡절(曲折)은 그때에 이미 열거하여 아뢰었고 원래의 소(疏)가 아직도 있으니, 이제 다시 변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대개 신이 좌상의 말을 그릇 들어 군문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임금의 앞에서 진달하였지만, 신의 본 뜻은 마땅히 변란을 일으키는 이기(利器)를 도적의 손에 빌려주지 말아야 하며, 비어 있는 틈을 타서 남몰래 던져 넣는 것에 이르러서는 극히 어둠침침하여 올바르지 못한 것에 속하는 까닭에 그 소(疏)에 이르기를, ‘세운(世運)은 항상 편안함이 없고 시세(時勢)는 상반(相反)됨이 있으니, 후일에 만일 간인(奸人)이 일을 담당함이 있어 공(功)과 상(賞)을 구하여서 이런 수단을 쓴다면 비록 죄없는 사람이라도 면할 수 없을 것이니, 그 조정의 사리(事理)에 있어 한 번 밝게 분별하여서 재화(災禍)의 근원을 막지 않아서는 안됩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신의 말하고 생각하는 바가 바로 여기에 있으니, 그 군문(軍門)과 사가(私家)에서 나오는 것이 무슨 관긴(關緊)을 달리함이 있기에 반드시 군문의 물건을 내주는 것을 죄로 삼아서 위로 성명(聖明)을 속인단 말입니까? 김만채는 신이 화약(火藥)의 설(說)을 들은 것이 익숙한데도 전후의 계문(啓聞)이 한 번도 이에 미치지 않다가, 그 아비가 석방되는 날에 이르러 비로소 죄안(罪案)을 얽어 만들어서 마치 새로 들은 것이 있어 적발(摘發)한 것처럼 하여서, 사람을 무함하는 솜씨가 교묘하고도 참혹하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거리에 떠도는 말은 들으나, 국청(鞫廳)의 일은 비밀이 되어 자세히 알지 못하다가 대신(大臣)과 수작(酬酢)하기에 미쳐 바야흐로 그 실정을 알아냈습니다. 그러므로 당초의 추문(推問)을 청하는 계품(啓稟)에서 아울러 진달하기에 미치지 못하고, 그 후의 환수(還收)의 계청에서 비로소 앙달(仰達)한 것은 진실로 이것 때문이니, 무슨 교묘하고 참혹한 계략(計略)이 김만채의 말한 바와 같음이 있단 말입니까? 그때에 신이 일찍이 대관(臺官)이 되지 않았으니 대계(臺啓)는 신이 알 바가 아닌데도, 계사(啓辭) 안에서 처음에 이에 미치지 않은 것을 가지고 신을 책함은 그릇된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이르기를, 몇 건(件)의 융물을 구하여 준 것은 다시 정절(情節)을 탐지하려는 데에서 나온 것이라고 하고, 김만채의 말은, 역적 허새가 〈자기에게〉 헤아리기 어려운 일이 있을까 의혹(疑惑)할 듯하여서 준 것이라고 합니다. 만약 그 정절을 탐지하고자 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금방 던져 주고 곧 고발하며, 만약 헤아리기 어려움이 있을까 근심하였다면 무엇 때문에 이기(利器)를 빌린단 말입니까? 이것이 또 여러 사람의 더욱 놀라고 의혹하는 바입니다. 김만채가 비록 그 주고받을 때에 적인(賊人)이 집에 있지 않음은 그 아비가 미리 안 바가 아니라고 말하지만, 김익훈이 이 일을 주관(主管)한 지 오래이고, 지시(指示)와 자급(資給)이 그 손에서 나왔으며, 한수만 등의 하는 바를 알리고 품재(稟裁)하지 않음이 없었는데, 상변하는 때에 임(臨)하여서 까맣게 적인의 간 곳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은 이런 이치가 없을 듯하며, 융물을 던져 준 것은 바로 큰 단서가 되는 일인데 또한 어찌 알지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 김만채가 아비를 위하여 그 말의 허망(虛妄)함을 숨기고자 하는 것은 진실로 족히 괴이할 것 없으니, 일일이 분석(分析)하여 말하고자 하지 않습니다. 신을 일러 들어가서는 성상의 뜻을 탐지하고 시험하며 나와서는 당여(黨與)를 지휘한다고 하는데, 무릇 인주(人主)를 탐지하고 시험하는 것은 바로 뜻에 영합(迎合)하고 아첨하며 순종하여서 스스로 꾀하기를 잘하는 자의 일입니다. 이제 신이 김익훈을 논함은 거실(巨室)에 원한을 맺고 권귀(權貴)의 미움을 받아서 스스로 무한한 전패(顚沛)를 취하는 것인데, 무슨 털끝만치라도 몸에 이로움이 있어서 이를 한단 말입니까? 예로부터 소인(小人)이 어리석은 군주를 만나면 이와 같이 현혹시키는 술법(術法)을 씁니다만, 위에 명철한 임금이 있는데 밑에 탐지하고 시험하는 신하가 있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김만채가 비록 사람을 무함하기에 급하다고 해도 어찌 감히 방자하게 이런 말을 한단 말입니까?
신은 본래 혈혈(孑孑)한 혼잣몸으로 세상에 고립(孤立)하여서 한유(韓愈)에게 족당(族黨)이 없고 개관요(蓋寬饒)에게 의탁할 데가 없는 것과 같으니, 믿는 것은 오직 성명(聖明)께서 위에 계신 것뿐입니다. 지나간 해에 한두 사람의 대신(臺臣)이 김익훈의 허물을 조금 말하였다가 혹은 여러 해 좌폐(坐廢)되고 혹은 청환(淸宦)의 길이 영구히 막혔습니다. 하물며 지금은 그 형세가 다시 지난날에 비길 바가 아닌데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설령 신이 지휘하고자 함이 있다고 한들 누가 즐겨 신의 말에 따라서 앞에 있는 엎어진 수레바퀴의 자국을 밟아서 반드시 떨어지고야 말 위기(危機)를 범한단 말입니까? 김익훈의 일은 바로 온 나라 사람의 공공(公共)의 의논이니, 대각(臺閣)의 여러 신하가 각각 보고 들은 바를 가지고 항론(抗論)하여서 피하지 않음은 몸이 언로(言路)에 있어서 그 직책을 다하는 데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찌 남의 지휘를 받는 자이겠습니까? 김만채가 또 한태동(韓泰東)·유득일(兪得一)·박태유(朴泰維)의 이름을 들어서 이르기를, 뒤를 이어 일어나 화응(和應)하여서 제멋대로 죄를 얽는다고 합니다. 이 의논이 일어난 지 이미 해를 넘어서, 전후하여 삼사(三司)에 드나든 사람이 진실로 김익훈의 인아 친속(姻婭親屬)이나 서로 앞을 다투고 죽기를 다투는 사람이 아니면 각각 소차(疏箚)와 계주(啓奏)로써 그 죄를 나열(羅列)하여 힘써 다투기를 그치지 않는 자가 없는데, 이것이 모두 신의 지휘를 듣고서 죄를 얽어 만드는 계략을 달갑게 여겨 한 것입니까? 김만채가 단지 세 신하만을 들고 여러 신하에게 두루 미치지 않은 것은, 어찌 성상께서 반드시 그 공론(公論)이 일제히 일어난 데에서 나온 것임을 하촉(下燭)하여 그 말을 의심하여서 믿지 않을 것을 가지고 일부러 생략(省略)하여 버린 것이 아니겠습니까? 중외(中外)의 하인[輿儓]같은 천인(賤人)과 여자나 어린아이 같이 미약(微弱)한 자에 이르기까지도 방방곡곡에서 모여 의논하고 길 위에서 왁자지껄하게 떠드는 것이 김익훈을 가지고 옳지 않다고 여기지 않음이 없는데, 이것이 모두 신이 집집마다 말하고 깨우쳐서 그런 것입니까? 전해에 유득일·박태유 등이 김익훈의 찬배(竄配)를 청한 계사(啓辭)의 말을 만든 것이 마땅치 않음을 책하여 남쪽의 변지(邊地)에 출보(出補)033)                  하였을 때에 대신(大臣)과 정원(政院)·옥당(玉堂)·양사(兩司)가 동시에 청대(請對)하였는데, 성지(聖旨)를 환발(渙發)하여 그대로 원직(原職)으로 되돌리셨으니, 그때에 보고 듣는 자가 성상의 도량의 관대(寬大)하심을 흠앙(欽仰)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그 후 대신이 김익훈의 삭직(削職)을 청하자, 말씀하시기를, ‘다만 한두 사람의 대신(臺臣)의 말만이 아니라, 연소(年少)한 명관(名官)의 의논도 모두 옳지 않음이 없으니, 반드시 참작하여 처리한 연후에야 그 수습을 바랄 수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김익훈을 문출(門黜)에서 석방하기에 미쳐 양사(兩司)에서 쟁집(爭執)하니, 대신도 너무 급작스럽다고 여겨 진언(進言)하기를, ‘당초에 석방의 명이 내린 뒤에 신 등이 만약 물의(物議)의 격화(激化)됨이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다면 진실로 마땅히 정지하시기를 청하기에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대신이 만일 김익훈을 가지고 죄줄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였다면, 처음에 어찌 이것으로써 무죄한 사람에게 더하며 또 어찌 석방의 너무 급작스러움을 가지고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기에 이르렀겠습니까? 김만채는 말하기를, ‘제아비의 한 바는 대신(大臣)에게 품의(稟議)하여 그 지휘를 듣지 않음이 없다.’고 하지만 대신의 김익훈에 대한 것은 더욱 공의(公議)의 있는 바를 볼 수 있습니다.
김만채는 또 신이 망령되고 방자한 말을 하자 그 아비가 듣고서 놀라고 의심하여 친구(親舊) 사이에 말하였는데, 신이 이것을 가지고 크게 원한을 품어 오직 보복할 계책을 하고 있다고 합니다. 김익훈이 신의 무슨 말을 가지고 망령되고 방자하다고 하는지, 어떤 사람에게 말하였는지, 또 어떤 사람이 신의 크게 원한을 품은 것을 보고 이를 김익훈에게 말하였는지를 알지 못하겠습니다. 머리를 감추고 하는 말이 매우 음흉하고 참혹합니다. 신이 들어와 벼슬한 이래로 불행하게도 세변(世變)에 간섭함이 또한 많았으며, 타고난 성품이 오활(汚濶)하고 어리석어 세속(世俗)에 조화(調和)되지 못하며, 남의 입에 씹힘을 당하고 글로 인해 죄에 걸린 적이 여러 번이었으나, 성상께서 구하여 주시고 풀어 주신 은혜를 입어 몸을 보전하여서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신에게 털끝만치라도 사심(私心)을 품어 불화(不和)를 해소할 뜻이 있었다면, 김익훈 등이 고한 바 일찍이 신을 함해(陷害)한 사람이 많은데, 어찌 때를 틈타서 이 무리의 환심을 사지 않고 도리어 김익훈을 배척한단 말입니까? 김만채가 또 어찌 그 아비의 일이 여론(輿論)의 같이하는 바에서 일어난 것임을 알지 못하겠습니까만, 신이 남들이 아직 말하기 전에 먼저 말한 것을 가지고 신을 원수로 삼음이 가장 깊어서 탐지하고 시험하겠다든가, 지휘(指揮)했다는 것을 가지고 죄를 얽고 혐의(嫌疑)를 품어 원한을 보복(報復)함을 가지고 무함(誣陷)하였습니다. 그래서 마치 신이 사의(私意)가 있고 사당(私黨)이 있어 손으로 성총(聖聰)을 가리고 턱으로 조정의 의논을 지시하는 것처럼 하여, 신을 헤아리지 못할 지경에 빠뜨리고 다시 여러 신하에게까지 미쳐서 그 보복의 계략을 이루고자 합니다. 옛날의 허물을 가리는 자에 비하면 어찌 그다지도 다르단 말입니까? 하물며 그 이른바 허새·허영이 어떤 흉역(凶逆)인데, 이를 형찰(詗察)하여 잡은 사람을 매우 미워하니, 그 뜻이 어디에 있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겠다는 말은, 아! 참혹합니다. 만일 흉역(凶逆)을 형찰하여 얻은 이유를 가지고 깊이 그 사람을 미워한다면 그 죄가 마땅히 어떠하겠습니까? 이는 그 계략이 다만 그 아비가 깨끗이 죄에서 벗어나게 하기 위할 뿐만 아니라, 김만채가 이미 신에게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어 분노를 품어 말을 하는 것이니, 진실로 가려서 말해야 함을 책(責)하기는 어려우나, 또한 어찌 이런 지극한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전세(前世)의 현인 군자(賢人君子)의 자손이 비록 혹시 노둔(駑鈍)하여 불초(不肖)한 자가 있어도 그 화(禍)를 전가(轉嫁)하여 해독(害毒)을 흘리는 계략을 한 자는 결코 없었습니다. 전날에 옥천(沃川) 사람 조광한(趙匡趙)의 소(疏)가 신(臣) 자신을 무함하여 끝이 없었으니, 이제 와서 생각하여도 모골(毛骨)이 모두 송연(竦然)합니다. 어떤 사람의 사주(使嗾)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조광한은 선정(先正)034)                  의 후예로서 유택(遺澤)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그 말의 극히 패악(悖惡)함이 이와 같았습니다. 신은 일찍이 이를 말세의 풍기(風氣)의 변(變)에 관계된 것으로 여겨 정상(正常)이라고 말하지 않았는데, 이제 김만채의 소 안의 뜻이 대개 조광한과 서로 비슷하고 또 더욱 혹독하니, 선정(先正)035)                  의 집안에서 또다시 김만채가 말을 함이 있을 줄은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신은 불안 속에 있으면서 슬픔과 탄식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하니, 임금이 사리에 어긋난다고 비답(批答)하여 이를 책(責)하였다. 조지겸(趙持謙)은 청렴한 명망과 곧은 절개로써 사류(士流)의 영수(領袖)가 되고, 청탁(淸濁)을 격심하게 들추어내어서 거듭 훈척(勳戚)의 뜻에 거슬렸으니, 김만채가 그 기세를 믿고 몰래 보복하고자 하여서 〈행동이〉 이미 지극히 옳지 않았다. 조지겸이 대항하는 소(疏)를 올렸는데, 진술이 지극히 자세하고 곧으며 정위(情僞)036)                  의 비유를 들어 분석하여서 거의 남김이 없으니, 공의(公議)가 모두 통쾌하다고 말하였으며 임금도 심하게 물리치지는 않았다.

 

4월 24일 기미

이유태(李惟泰)의 문인(門人) 유생(儒生) 이지갑(李之甲)등이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익(李翊)의 소(疏)로 인하여 다시 송변(訟辨)의 소(疏)를 올리니, 임금이 엄비(嚴批)로 이를 책하고, 돌려주도록 명하였다.          【원래의 소(疏)와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처음에 이유태(李惟泰)가 예설(禮說)을 지어 송시열(宋時烈)에게 보이니, 송시열이 손에 붓을 잡아 수십 자를 고쳐 주었다. 뒤에 송시열의 집에서 말하기를, "이유태가 그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여 예설을 고쳐 지어서 등본(謄本)을 사람에게 보이는데, 곧 전의 책에다 붓으로 덧붙이고 고쳐 넣었던 것과 본래 한 글자의 틀림도 없어서 전일(前日)에 고친 것을 잊었다."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송시열과 이유태가 서로 미워하여 여러 번 편지로 서로 욕하였다.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형의 손자가 문정(門庭)에 이르러 이 늙은 물건을 욕하여서 하지 못하는 말이 없으며 모두 어른의 말을 구실로 말하였습니다. 중간에 전하여진 말을 어찌 모두 믿겠습니까만, 그러나 그 아비가 원수로 갚는데, 그 자식이 겁박(劫迫)을 행한다는 것이 그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 ‘아경(亞卿)이 어찌 사람마다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한 것은 참으로 절실하고 지극한 말입니다. ‘옛 친구는 큰 연고가 아니면 버리지 않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대우함이 너무 야박한 듯합니다. 또 이르기를, 안면을 바꾸어서 면하기를 꾀한다.’라고 하는데, 어찌 서로 의심함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여산(礪山)의 남씨(南氏)의 말은 내가 친히 들은 것이기 때문에 초장(草場)037)                  의 잠자리 위에서 약간 말이 미친 바가 있으나, 다만 들은 바를 전하였을 뿐으로, 다시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현손(賢孫)038)                  에게 노여움을 만나서 벗을 팔아 벼슬을 얻었다고 말하며 이르는 곳마다 이름을 불러 욕하니, 이 늙은 물건이 피곤함이 심하며 진실로 달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형의 집안의 기세(氣勢)도 이미 지극하였으니, 신명(神明)이 시기하는 바 될까 두렵습니다.          【송시열의 손자가 남유두(南有斗)의 전지(田地)를 강매(强賣)하게 하여서 올바르지 못하다는 거조가 있었기 때문에 이유태가 이를 송시열에게 말하였다. 송시열은 또 이유태의 아들은 다만 전지를 빼앗은 일만이 아님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집의 아들이 서로 미워하며 어른에게 참소하여서 드디어 틈이 벌어져 이것이 두 사람이 서로 잃게 된 근본 원인이 되었다.】         형은 지나치게 엄격할 때에는 영기(英氣)가 발함에 있어 물건을 해침을 면치 못합니다. 학문으로 남에게 교만한 것이 또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겠습니까?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號)이다.】        은 일생동안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어찌 오늘날 늙어서도 죽지 않고 또 이 지경을 볼 줄 알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 있어, 소(疏)가 있어 비답을 받았는데 성지(聖旨)가 매우 지성스럽고 절실하였습니다. 수태(受台)           【민정중(閔鼎重)의 자(字)이다.】        가 이것을 가지고 민례(閔禮)039)                  에 다른 의견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여서 마음속으로 혼자 웃고 우연히 지태(持台)           【민유중(閔維重)의 자(字)이다.】        에게 글을 보냈더니, 형이 이를 듣고 욕하였습니다. 민가(閔家)의 체천(遞遷)은 형도 또한 이르기를, ‘사람의 집안에 3대(代)가 미친 병에 걸리면 사당(祠堂)이 빌 것이니, 이런 까닭에 나도 또한 이를 의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뒤에 와서 무슨 까닭으로 허물을 여기로 돌립니까? 윤증(尹拯)이 추천(推薦)한 여러 사람이 낙점(落點)을 받기에 이르러, 모두 민례(閔禮)에 다른 의견을 세운 까닭으로 임금의 마음에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이르며, 또 정리(情理) 밖의 말을 가지고 억지로 남에게 더하고 따라서 각박하게 대하니, 사람이 어찌 견디겠습니까? ‘늙으면 가업(家業)을 전하지만 사판(祠板)을 갈아 바꾸는 것은 행하기 어렵다.’라는 설은 나의 말이 아니고 곧 주자(朱子)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히 자인(子仁)           【윤증(尹拯)의 자(字)이다.】        과 더불어 집안에서 사담(私談)하다가 좌우의 사람에게 미친 것인데, 무엇을 가지고 구중(九重)의 깊은 곳에 통할 수 있어서 온화(溫和)한 성비(聖批)를 받았단 말입니까? 일찍이 뜻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상(代喪)의 1절(節)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사관례(士冠禮)040)                  의 정주(鄭注)를 상고하건대, ‘예(禮)는 80세가 되면 자최(齊衰)·참최(斬衰)의 일에 미치지 못하니, 이같은 자는 아들이 아비를 대신하여 종자(宗子)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증거가 매우 뚜렷합니다. 주자(朱子)의 행하기 어렵다는 설명을, 나는 반드시 체천(遞遷)의 이치가 있으나 인정(人情)과 사세(事勢)를 참작하여서 행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는 말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양 사람을 대하여 입이 아프도록 변명(辨明)하여 말하여서 혹시 납득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스승          【두 송씨(宋氏)이다.】        의 문도(門徒)는 내가 범휘(犯諱)한 망발을 가지고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다.】        에게 전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가지고 화근(禍根)의 큰 것으로 여기니, 오늘날 성교(聖敎)의 이른바 절치(切齒)라는 말이 반드시 이를 편드는 데에 말미암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의 여장(驪章)          【송시열이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소(疏)를 올려 영릉(寧陵)을 옮기는 일을 말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불러 일으켰다.】        과 죽행(竹行)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 송시열이 죽산(竹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거듭 임금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 또 어찌 장자후(章子厚)041)                  가 하던 바입니까? 모두 명(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다만 마땅히 스스로 안정하여서 후명(後命)을 기다릴 뿐이니, 무엇 때문에 도리어 서로 의심하고 노여워하며 또 더불어서 헐뜯어 비방한단 말입니까? 춘손(春孫)          【동춘(同春)의 손자이다.】        이 나를 일컬어 원수라고 한다 하니, 이미 괴이한 일입니다. 기성(杞城)042)                   사람이 형을 유배지(流配地)로 찾아뵈었으며, 김익견(金益熞)이 이르기에 미쳐 초당(草黨)          【이유태의 호가 초려(草廬)이다.】         이라 하여 물리쳐서 무료(無聊)하게 물러갔다니, 초려도 또한 당이 있단 말입니까? 경솔하고 추잡한 말이 향리(鄕里)에 자자(藉藉)합니다. 나는 이 곳에 있어서 나쁜 소리를 들음이 드무니, 매우 편안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오직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감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동춘(同春)이 일찍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모두 기관(機關)이며 형이 심한 것이 된다고 하기에, 나는 동춘의 말을 가지고 한때의 촉격(觸激)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 웃어 넘겼는데, 내가 다시 이말을 하니, 동춘의 고사(故事)를 면치 못합니다. 바라건대 형은 한 번 웃고 이 종이를 불태워 버리십시오." 하였으니, 송시열은 더불어 변론(辯論)하여 밝히지 않고 다만 ‘한 번 웃고 두 번 웃었다.’고 이에 답하였다. 이유태가 다시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대저 예설(禮說)은 부득이 한 것이니, 충고(忠告)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죽음을 가지고 이를 구(救)하지 못하여서 그 험난함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은 이와 같음을 알았으며 또한 인심(人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경자년043)                  에 ‘〈효종이〉 적자(嫡子)에 올랐다.’ 하였고, 갑인년044)                  에도 또한 ‘적자다’라고 하여서, 전후(前後)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의사(萬義寺)로 전인(專人)했을 때045)                  도 자필(自筆)로 8, 90자(字)를 덧붙여 넣었으며, 강교 의소(江郊擬疏)의 자기 말도 또한 ‘적통(嫡統)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고 하여 피차(彼此)가 서로 비슷하였으니, 무슨 의도를 씀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시켜 할아비를 무함하여 소장(訴狀)을 바쳐서 거의 형(刑)에 빠지게 하고, 그 숙부(叔父)의 죄는 고향을 떠나 멀리 가기를 권하여 싼 값으로 좋은 전지(田地)를 사들이고도 잘못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藉藉)하였으므로, 그 듣고 본 바를 가지고 초장(草場)의 잠자리 위에서 말이 미쳤을 뿐인데, 그 손자가 시켜 욕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은(銀)이 몇 냥쭝[兩]이고 전지가 얼마인지는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오면 자기를 따름을 가지고 이를 대우함이 후하고, 그 친족이 원망하면 항상 위협하고 겁박하는 말을 꺼내고, 이어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의 곤장을 때림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장자(長者)의 자손을 가르치는 도리입니까?          【이것은 모두 송시열의 손자가 세력을 빙자하여 전지를 빼앗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린 손자가 품에 있으면서 어른을 믿어 노인의 이름을 불러도 금하지 않고, 절교(絶交)를 청하기에 이르면 ‘옛 친구는 큰 연고가 없으면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여서 교만이 가득함이 이미 지극하니, 신명(神明)의 시기(猜忌)함이 있어 마땅합니다. 경자년이 갑인년에서의 거리가 15년이고, 갑인년이 병진년046)                  과의 거리가 3년입니다. 저의 말이 예법(禮法)에 맞지 않거나 혹시 그 사이에 의도(意圖)를 씀이 있었다면, 어찌 전인(專人)하여 왕래하던 때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 비로소 말을 꺼내어서, 일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듣기를 즐거워하여 그 한두 귀절을 집어 내고 그 머리와 꼬리를 떼어 버려서 안팎에 전파(傳播)하게 한단 말입니까? 진실로 의심스럽습니다. 또 들으니, 이하경(李夏卿)           【이름은 담(橝)이다.】         이 전(專)한 말이 있어서 집사(執事)께서 의심과 노여움을 더욱 더함을 초래했다고 하는데, 이번 길의 초정(初程)에 과연 이하경을 예관에서 만났습니다. 말이 우연히 선왕(先王)047)                  이 천신(賤臣)의 소(疏)에 온비(溫批)를 내리신 일과 집사의 여장(驪章)이 전후(前後)하여 천심(天心)을 매우 괴롭힌 일에 미쳤는데, 이것은 특히 그 천노(天怒)가 집사에게 치우쳐서 곡경(曲徑)048)                  으로 화해시키실 뜻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헤어지기에 임(臨)하여 또 말하기를, ‘어느 재상(宰相)의 주창(主唱)하는 말을 들으니, 말하기를, 「3년의 복제(服制)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적자(嫡子)가 없는 것이다. 훗날 대왕 대비(大王大妃)049)                  의 천추(千秋) 뒤에는 적손부(適孫婦)의 복(服)을 누가 이에 감당하겠는가?」하여서 말이 극히 음험하고 편파적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禮)에,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고 다시 서자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는다는 말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태자란 적자(嫡子)를 이름이 아닙니까? 이런 까닭에 정자(程子)가 팽중승(彭中丞)을 대신한 차자(箚子)에 이르기를, ‘폐하(陛下)는 인종(仁宗)의 적자(適子)050)                  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어느 재상의 말을 명백히 하였을 뿐이고, 다시 다른 뜻은 없는 것입니다. 이하경이 무슨 말을 하여서 또 이처럼 분부한 것입니까? 만약 비인(鄙人)051)                  이 적자(嫡子)의 설(說)에 의도(意圖)를 두었다고 말한다면, 만의사(萬儀寺)로 왕복한 글월이 이미 이와 같고 강교 의소(江郊擬疏)의 설이 또 저와 같아서 피차의 논의가 조금도 다름없으니, 무슨 의도를 둠이 있단 말입니까? 또 성서탈적(聖庶奪嫡)의 설을 내가 일찍이 집사에게서 들었으며, 강교의소의 초본(草本)도 일찍이 이를 보았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을 대하여 집사의 설을 부연(敷演)하여서 말하기를, ‘성(聖)이란 성인(聖人)이고, 서(庶)란 문왕(文王)의 서자(庶子)이며, 탈적(奪嫡)이란 백읍고(伯邑考)의 적통(嫡統)을 빼앗은 것052)                  이다. 통서(統緖)란 두 적(嫡)이 없으니, 무왕의 아직 서기 전에는 적통이 백읍고에게 있고 무왕이 이미 선 뒤에는 적통이 무왕에게 있다. 만약 무왕이 이미 선 뒤에도 적통이 오히려 백읍고에게 있다고 한다면, 무왕이 빼앗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통전(通典)》에, 유울지(庾蔚之)053)                  가 말하기를, ‘이제 서자를 세워 태자로 삼았으면 높음[尊]054)                  을 가지고 이를 내림[降]055)                  을 얻음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정적(正嫡)이 아니면 다만 가숭(加崇)이 없을 뿐이니, 스스로 마땅히 그 본래 복인 1주년을 복(服)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한다면, 그 서자도 또한 태자(太子)라고 이르고 복이 1주년이 됨을 알 수 있으며, 이 의리(義理)를 알면 어느 대상이 이른바 대왕 대비의 천추(千秋)의 설은 말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집사의 의논을 발휘(發揮)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나에게 뜻을 씀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의도를 두면서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이를 미워할 것입니다. 의도를 두지 않는데도 둔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이 반드시 이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는 화(禍)056)                  를 만난 이래로 정상(正常)을 잃은 말이 많으니, 죽음의 시기가 장차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또 영상(領相)          【허적(許積)이다.】        의 말을 들었습니까? 말하기를, ‘윤휴(尹鑴)가 말하기를, 「복제(服制)에 대하여 중간에 두 송(宋)057)                  이 스스로 그 잘못을 알아서 그 설(說)을 고치고자 하였는데, 모(某)058)                  가 남에게 굽힐 수 없다고 하여 그릇된 생각을 고집하여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니, 이것이 죄의 괴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더니, 내가 처음에 듣고 웃었으며, 윤휴가 스스로 만든 말로 여겼습니다. 이제 말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두 문(門)          【두 송씨(宋氏)이다.】        의 제자가 전부터 다른 문에 서로 왕래한 것은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을 가리킨다.】         반드시 그 스승을 벗어나게 하여서 허물을 이리로 돌리고자 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있어서는 손상(損傷)이 없고 더욱 광화(光華)가 있기 때문에 다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소배(少輩)의 소위(所爲)를 본다면 교활하고 음험하기가 헤아릴 수 없음이 도리어 저쪽 사람[彼人]059)                   보다도 심함이 있으니, 무슨 말을 만들지 못하여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우리들이 죽을 시기가 장차 박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문(師門)060)                  의 운기(運氣)가 다함이 있어 그런가 두렵습니다. 어찌하여 집사는 이것을 보고 반드시 ‘도리어 심함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지나친 말로 여깁니까? 그러나 집사가 효종조(孝宗祖)에 있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폄박(貶薄)의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월(越)나라 사람이 활을 당기는 것이고, 비인(鄙人)이 집사에게 대하여 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도를 둘 뜻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 형(兄)이 활을 당기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이니, 또한 친하다고 이를 만합니다.061)                  " 하였으나, 송시열은 다시 답이 없었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사귀는 정의(情義)가 크게 어긋났다. 이런 까닭에 경화(更化)의 뒤에 예론(禮論)으로 견벌(譴罰)을 입은 자가 모두 수록(收錄)되었는데도 이유태는 홀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존중(尊重)을 받음이 그보다 나을 수 없었는데, 한 번 그 뜻에 거슬리자 이를 버리기를 폐물(廢物)처럼 하였으니, 비록 가슬 추연(加膝墜淵)062)                          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유태는 평소에 사람의 교제를 잘 이간(離間)하여서, 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 등 여러 사람이 송시열과 종시(終始)를 보전할 수 없었던 것이 모두 이유태에게 말미암았으니, 그 언행(言行)과 심술(心術)이 이를 이루기에 족함이 있으며, 송시열과 서로 잘못된 것도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송시열이 이유태의 비방을 초래한 것 역시 이를 이르게 할 만한 단서(端緖)가 없지 않은데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경솔하게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서 군자(君子)의 스스로 수양(修養)하는 도리에 있어 미진(未盡)한 바가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註 037]          초장(草場) : 이유태의 거처를 말함.[註 038]          현손(賢孫) : 송시열의 손자를 가리킴.[註 039]          민례(閔禮) : 민신(閔愼)이 대복(代服)한 예.[註 040]          사관례(士冠禮) : 《의례(儀禮)》의 편명.[註 041]          장자후(章子厚) : 장돈(章惇).[註 042]          기성(杞城) : 기계(杞溪) 유씨(兪氏)를 가리킴.[註 043]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註 044]          갑인년 : 1674 현종 15년.[註 045]          만의사(萬義寺)로 전인(專人)했을 때 : 현종 15년(갑인년)에 복제설을 정하고 나서 송시열에게 보이기 위하여 송시열이 거처하던 만의사(萬儀寺)로 일부러 사람을 보낸 일임.[註 046]          병진년 : 1676 숙종 2년.[註 047]          선왕(先王) : 현종을 이름.[註 048]          곡경(曲徑) : 지름길.[註 049]          대왕 대비(大王大妃) : 인조의 비인 자의 대비(慈懿大妃)를 가리킴.[註 050]          적자(適子) : 송나라 영종(英宗)은 태조(太祖)의 증손으로서 제종숙(再從叔)되는 인종의 태자로 봉하여져 그 뒤를 이었음.[註 051]          비인(鄙人) : 자기의 겸칭(謙稱).[註 052]          백읍고(伯邑考)의 적통(嫡統)을 빼앗은 것 :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의 둘째아들이고 백읍고(伯邑考)가 장자인데, 무왕이 섰으므로 백읍고의 적통을 빼앗은 것이라고 하였음.[註 053]          유울지(庾蔚之) : 수(隋)나라 사람으로 예론(禮論)에 밝았음.[註 054]          높음[尊] : 존속(尊屬)임을 뜻함.[註 055]          내림[降] : 예절(禮節)을 강등(降等)함을 뜻함.[註 056]          화(禍) : 남인과의 복제(服制) 다툼으로 유배(流配) 당한 일을 말함.[註 057]          두 송(宋) : 송시열과 송준길.[註 058]          모(某) : 이유태를 가리킴.[註 059]          사람[彼人] : 남인을 가리킴.[註 060]          사문(師門) : 김장생(金長生)을 말함.[註 061]          그 형(兄)이 활을 당기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이니, 또한 친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어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월나라 사람이 활을 당겨 쏘면 자기가 웃으면서 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소원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자기 형이 활을 당겨 쏘면 눈물을 흘리며 말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친애하기 때문이다."하는 말이 있음.[註 062]              가슬 추연(加膝墜淵) : 무릎 위에 올려 놓아서 사랑하고, 연못에 떨어뜨려서 미워하는 것이니, 애증(愛憎)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말함.
처음에 이유태(李惟泰)가 예설(禮說)을 지어 송시열(宋時烈)에게 보이니, 송시열이 손에 붓을 잡아 수십 자를 고쳐 주었다. 뒤에 송시열의 집에서 말하기를,
"이유태가 그 당시 사람들이 좋아하는 것에 영합하여 예설을 고쳐 지어서 등본(謄本)을 사람에게 보이는데, 곧 전의 책에다 붓으로 덧붙이고 고쳐 넣었던 것과 본래 한 글자의 틀림도 없어서 전일(前日)에 고친 것을 잊었다."
하였으니, 이것을 가지고 송시열과 이유태가 서로 미워하여 여러 번 편지로 서로 욕하였다.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보낸 글에 이르기를,
"형의 손자가 문정(門庭)에 이르러 이 늙은 물건을 욕하여서 하지 못하는 말이 없으며 모두 어른의 말을 구실로 말하였습니다. 중간에 전하여진 말을 어찌 모두 믿겠습니까만, 그러나 그 아비가 원수로 갚는데, 그 자식이 겁박(劫迫)을 행한다는 것이 그 이치가 없지 않습니다. ‘아경(亞卿)이 어찌 사람마다 얻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라고 한 것은 참으로 절실하고 지극한 말입니다. ‘옛 친구는 큰 연고가 아니면 버리지 않는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사람을 대우함이 너무 야박한 듯합니다. 또 이르기를, 안면을 바꾸어서 면하기를 꾀한다.’라고 하는데, 어찌 서로 의심함이 이 지경에 이른단 말입니까? 여산(礪山)의 남씨(南氏)의 말은 내가 친히 들은 것이기 때문에 초장(草場)037)                  의 잠자리 위에서 약간 말이 미친 바가 있으나, 다만 들은 바를 전하였을 뿐으로, 다시 다른 뜻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현손(賢孫)038)                  에게 노여움을 만나서 벗을 팔아 벼슬을 얻었다고 말하며 이르는 곳마다 이름을 불러 욕하니, 이 늙은 물건이 피곤함이 심하며 진실로 달게 여기는 바입니다. 그러나 형의 집안의 기세(氣勢)도 이미 지극하였으니, 신명(神明)이 시기하는 바 될까 두렵습니다.          【송시열의 손자가 남유두(南有斗)의 전지(田地)를 강매(强賣)하게 하여서 올바르지 못하다는 거조가 있었기 때문에 이유태가 이를 송시열에게 말하였다. 송시열은 또 이유태의 아들은 다만 전지를 빼앗은 일만이 아님을 말하였다. 그리하여 두 집의 아들이 서로 미워하며 어른에게 참소하여서 드디어 틈이 벌어져 이것이 두 사람이 서로 잃게 된 근본 원인이 되었다.】         형은 지나치게 엄격할 때에는 영기(英氣)가 발함에 있어 물건을 해침을 면치 못합니다. 학문으로 남에게 교만한 것이 또 어찌 성덕(聖德)의 일이겠습니까? 동춘(同春)           【송준길(宋浚吉)의 호(號)이다.】        은 일생동안 그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어찌 오늘날 늙어서도 죽지 않고 또 이 지경을 볼 줄 알았겠는가?’라고 하였습니다. 일찍이 선조(先朝)에 있어, 소(疏)가 있어 비답을 받았는데 성지(聖旨)가 매우 지성스럽고 절실하였습니다. 수태(受台)           【민정중(閔鼎重)의 자(字)이다.】        가 이것을 가지고 민례(閔禮)039)                  에 다른 의견을 세웠기 때문이라고 하여서 마음속으로 혼자 웃고 우연히 지태(持台)           【민유중(閔維重)의 자(字)이다.】        에게 글을 보냈더니, 형이 이를 듣고 욕하였습니다. 민가(閔家)의 체천(遞遷)은 형도 또한 이르기를, ‘사람의 집안에 3대(代)가 미친 병에 걸리면 사당(祠堂)이 빌 것이니, 이런 까닭에 나도 또한 이를 의심한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뒤에 와서 무슨 까닭으로 허물을 여기로 돌립니까? 윤증(尹拯)이 추천(推薦)한 여러 사람이 낙점(落點)을 받기에 이르러, 모두 민례(閔禮)에 다른 의견을 세운 까닭으로 임금의 마음에 맞아서 그런 것이라고 이르며, 또 정리(情理) 밖의 말을 가지고 억지로 남에게 더하고 따라서 각박하게 대하니, 사람이 어찌 견디겠습니까? ‘늙으면 가업(家業)을 전하지만 사판(祠板)을 갈아 바꾸는 것은 행하기 어렵다.’라는 설은 나의 말이 아니고 곧 주자(朱子)의 말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연히 자인(子仁)           【윤증(尹拯)의 자(字)이다.】        과 더불어 집안에서 사담(私談)하다가 좌우의 사람에게 미친 것인데, 무엇을 가지고 구중(九重)의 깊은 곳에 통할 수 있어서 온화(溫和)한 성비(聖批)를 받았단 말입니까? 일찍이 뜻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대상(代喪)의 1절(節)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사관례(士冠禮)040)                  의 정주(鄭注)를 상고하건대, ‘예(禮)는 80세가 되면 자최(齊衰)·참최(斬衰)의 일에 미치지 못하니, 이같은 자는 아들이 아비를 대신하여 종자(宗子)가 된다.’라고 하였으니, 그 증거가 매우 뚜렷합니다. 주자(朱子)의 행하기 어렵다는 설명을, 나는 반드시 체천(遞遷)의 이치가 있으나 인정(人情)과 사세(事勢)를 참작하여서 행하기 어려운 바가 있다는 말로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매양 사람을 대하여 입이 아프도록 변명(辨明)하여 말하여서 혹시 납득하는 자가 있습니다. 그러나 두 스승          【두 송씨(宋氏)이다.】        의 문도(門徒)는 내가 범휘(犯諱)한 망발을 가지고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다.】        에게 전하여 사람들이 모두 이것을 가지고 화근(禍根)의 큰 것으로 여기니, 오늘날 성교(聖敎)의 이른바 절치(切齒)라는 말이 반드시 이를 편드는 데에 말미암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형의 여장(驪章)          【송시열이 여주(驪州)에 있으면서 소(疏)를 올려 영릉(寧陵)을 옮기는 일을 말하여 임금의 노여움을 불러 일으켰다.】        과 죽행(竹行)          【인선 왕후(仁宣王后)의 상(喪)에 송시열이 죽산(竹山)에 이르렀다가 돌아와서 거듭 임금의 마음에 거슬렸다.】         이 또 어찌 장자후(章子厚)041)                  가 하던 바입니까? 모두 명(命)이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때에 이르러 다만 마땅히 스스로 안정하여서 후명(後命)을 기다릴 뿐이니, 무엇 때문에 도리어 서로 의심하고 노여워하며 또 더불어서 헐뜯어 비방한단 말입니까? 춘손(春孫)          【동춘(同春)의 손자이다.】        이 나를 일컬어 원수라고 한다 하니, 이미 괴이한 일입니다. 기성(杞城)042)                   사람이 형을 유배지(流配地)로 찾아뵈었으며, 김익견(金益熞)이 이르기에 미쳐 초당(草黨)          【이유태의 호가 초려(草廬)이다.】         이라 하여 물리쳐서 무료(無聊)하게 물러갔다니, 초려도 또한 당이 있단 말입니까? 경솔하고 추잡한 말이 향리(鄕里)에 자자(藉藉)합니다. 나는 이 곳에 있어서 나쁜 소리를 들음이 드무니, 매우 편안하게 여겨 아침저녁으로 오직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감을 두려워할 뿐입니다. 동춘(同春)이 일찍이 우리 두 사람을 보고 이르기를 모두 기관(機關)이며 형이 심한 것이 된다고 하기에, 나는 동춘의 말을 가지고 한때의 촉격(觸激)에서 나온 것으로 여겨 웃어 넘겼는데, 내가 다시 이말을 하니, 동춘의 고사(故事)를 면치 못합니다. 바라건대 형은 한 번 웃고 이 종이를 불태워 버리십시오."
하였으니, 송시열은 더불어 변론(辯論)하여 밝히지 않고 다만 ‘한 번 웃고 두 번 웃었다.’고 이에 답하였다. 이유태가 다시 편지를 송시열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대저 예설(禮說)은 부득이 한 것이니, 충고(忠告)는 매우 어리석은 것입니다. 죽음을 가지고 이를 구(救)하지 못하여서 그 험난함을 스스로 초래하는 것은 이와 같음을 알았으며 또한 인심(人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경자년043)                  에 ‘〈효종이〉 적자(嫡子)에 올랐다.’ 하였고, 갑인년044)                  에도 또한 ‘적자다’라고 하여서, 전후(前後)가 다르지 않았습니다. 만의사(萬義寺)로 전인(專人)했을 때045)                  도 자필(自筆)로 8, 90자(字)를 덧붙여 넣었으며, 강교 의소(江郊擬疏)의 자기 말도 또한 ‘적통(嫡統)이 어디로 돌아가겠는가?’라고 하여 피차(彼此)가 서로 비슷하였으니, 무슨 의도를 씀이 있겠습니까? 사람을 시켜 할아비를 무함하여 소장(訴狀)을 바쳐서 거의 형(刑)에 빠지게 하고, 그 숙부(叔父)의 죄는 고향을 떠나 멀리 가기를 권하여 싼 값으로 좋은 전지(田地)를 사들이고도 잘못으로 여기지 아니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藉藉)하였으므로, 그 듣고 본 바를 가지고 초장(草場)의 잠자리 위에서 말이 미쳤을 뿐인데, 그 손자가 시켜 욕하게 하니 이것이 무슨 도리입니까? 은(銀)이 몇 냥쭝[兩]이고 전지가 얼마인지는 가릴 수 없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오면 자기를 따름을 가지고 이를 대우함이 후하고, 그 친족이 원망하면 항상 위협하고 겁박하는 말을 꺼내고, 이어 병사(兵使)와 영장(營將)의 곤장을 때림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장자(長者)의 자손을 가르치는 도리입니까?          【이것은 모두 송시열의 손자가 세력을 빙자하여 전지를 빼앗는 일을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어린 손자가 품에 있으면서 어른을 믿어 노인의 이름을 불러도 금하지 않고, 절교(絶交)를 청하기에 이르면 ‘옛 친구는 큰 연고가 없으면 버리지 않는다.’라고 하여서 교만이 가득함이 이미 지극하니, 신명(神明)의 시기(猜忌)함이 있어 마땅합니다. 경자년이 갑인년에서의 거리가 15년이고, 갑인년이 병진년046)                  과의 거리가 3년입니다. 저의 말이 예법(禮法)에 맞지 않거나 혹시 그 사이에 의도(意圖)를 씀이 있었다면, 어찌 전인(專人)하여 왕래하던 때에는 한 마디 말도 하지 않다가 이제 비로소 말을 꺼내어서, 일을 좋아하는 자로 하여금 듣기를 즐거워하여 그 한두 귀절을 집어 내고 그 머리와 꼬리를 떼어 버려서 안팎에 전파(傳播)하게 한단 말입니까? 진실로 의심스럽습니다. 또 들으니, 이하경(李夏卿)           【이름은 담(橝)이다.】         이 전(專)한 말이 있어서 집사(執事)께서 의심과 노여움을 더욱 더함을 초래했다고 하는데, 이번 길의 초정(初程)에 과연 이하경을 예관에서 만났습니다. 말이 우연히 선왕(先王)047)                  이 천신(賤臣)의 소(疏)에 온비(溫批)를 내리신 일과 집사의 여장(驪章)이 전후(前後)하여 천심(天心)을 매우 괴롭힌 일에 미쳤는데, 이것은 특히 그 천노(天怒)가 집사에게 치우쳐서 곡경(曲徑)048)                  으로 화해시키실 뜻이 없음을 말한 것입니다. 헤어지기에 임(臨)하여 또 말하기를, ‘어느 재상(宰相)의 주창(主唱)하는 말을 들으니, 말하기를, 「3년의 복제(服制)를 행하지 않는다면 이는 적자(嫡子)가 없는 것이다. 훗날 대왕 대비(大王大妃)049)                  의 천추(千秋) 뒤에는 적손부(適孫婦)의 복(服)을 누가 이에 감당하겠는가?」하여서 말이 극히 음험하고 편파적이었다.’라고 하였습니다. 예(禮)에, 서자(庶子)를 세워 후사(後嗣)로 삼고 다시 서자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는다는 말을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데, 태자란 적자(嫡子)를 이름이 아닙니까? 이런 까닭에 정자(程子)가 팽중승(彭中丞)을 대신한 차자(箚子)에 이르기를, ‘폐하(陛下)는 인종(仁宗)의 적자(適子)050)                  입니다.’ 하였으니, 이것은 어느 재상의 말을 명백히 하였을 뿐이고, 다시 다른 뜻은 없는 것입니다. 이하경이 무슨 말을 하여서 또 이처럼 분부한 것입니까? 만약 비인(鄙人)051)                  이 적자(嫡子)의 설(說)에 의도(意圖)를 두었다고 말한다면, 만의사(萬儀寺)로 왕복한 글월이 이미 이와 같고 강교 의소(江郊擬疏)의 설이 또 저와 같아서 피차의 논의가 조금도 다름없으니, 무슨 의도를 둠이 있단 말입니까? 또 성서탈적(聖庶奪嫡)의 설을 내가 일찍이 집사에게서 들었으며, 강교의소의 초본(草本)도 일찍이 이를 보았기 때문에, 일찍이 사람을 대하여 집사의 설을 부연(敷演)하여서 말하기를, ‘성(聖)이란 성인(聖人)이고, 서(庶)란 문왕(文王)의 서자(庶子)이며, 탈적(奪嫡)이란 백읍고(伯邑考)의 적통(嫡統)을 빼앗은 것052)                  이다. 통서(統緖)란 두 적(嫡)이 없으니, 무왕의 아직 서기 전에는 적통이 백읍고에게 있고 무왕이 이미 선 뒤에는 적통이 무왕에게 있다. 만약 무왕이 이미 선 뒤에도 적통이 오히려 백읍고에게 있다고 한다면, 무왕이 빼앗은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라고 하였습니다. 《통전(通典)》에, 유울지(庾蔚之)053)                  가 말하기를, ‘이제 서자를 세워 태자로 삼았으면 높음[尊]054)                  을 가지고 이를 내림[降]055)                  을 얻음이 용납되지 않는다. 이미 정적(正嫡)이 아니면 다만 가숭(加崇)이 없을 뿐이니, 스스로 마땅히 그 본래 복인 1주년을 복(服)하여야 한다.’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한다면, 그 서자도 또한 태자(太子)라고 이르고 복이 1주년이 됨을 알 수 있으며, 이 의리(義理)를 알면 어느 대상이 이른바 대왕 대비의 천추(千秋)의 설은 말하지 아니하여도 스스로 얻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이 말을 함은 집사의 의논을 발휘(發揮)하는 데 지나지 않으니, 나에게 뜻을 씀이 깊다고 하겠습니다. 의도를 두면서 두지 않는다고 말한다면 하늘이 반드시 이를 미워할 것입니다. 의도를 두지 않는데도 둔다고 말하는 것은 하늘이 반드시 이를 미워하지 않겠습니까? 집사는 화(禍)056)                  를 만난 이래로 정상(正常)을 잃은 말이 많으니, 죽음의 시기가 장차 이름이 아니겠습니까? 또 영상(領相)          【허적(許積)이다.】        의 말을 들었습니까? 말하기를, ‘윤휴(尹鑴)가 말하기를, 「복제(服制)에 대하여 중간에 두 송(宋)057)                  이 스스로 그 잘못을 알아서 그 설(說)을 고치고자 하였는데, 모(某)058)                  가 남에게 굽힐 수 없다고 하여 그릇된 생각을 고집하여서 이 지경에 이르렀다.」라고 하니, 이것이 죄의 괴수가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더니, 내가 처음에 듣고 웃었으며, 윤휴가 스스로 만든 말로 여겼습니다.
이제 말하는 자가 있어 말하기를, ‘두 문(門)          【두 송씨(宋氏)이다.】        의 제자가 전부터 다른 문에 서로 왕래한 것은          【허목(許穆)·윤휴(尹鑴) 등을 가리킨다.】         반드시 그 스승을 벗어나게 하여서 허물을 이리로 돌리고자 함이 있었다. 그러나 이 곳에 있어서는 손상(損傷)이 없고 더욱 광화(光華)가 있기 때문에 다시 입을 열지 못하였다.’라고 하였습니다. 근래에 소배(少輩)의 소위(所爲)를 본다면 교활하고 음험하기가 헤아릴 수 없음이 도리어 저쪽 사람[彼人]059)                   보다도 심함이 있으니, 무슨 말을 만들지 못하여 무슨 일을 하지 못하겠습니까? 이것은 다만 우리들이 죽을 시기가 장차 박두하였을 뿐만 아니라 사문(師門)060)                  의 운기(運氣)가 다함이 있어 그런가 두렵습니다. 어찌하여 집사는 이것을 보고 반드시 ‘도리어 심함이 있다’는 것을 가지고 지나친 말로 여깁니까? 그러나 집사가 효종조(孝宗祖)에 있어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폄박(貶薄)의 뜻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것은 월(越)나라 사람이 활을 당기는 것이고, 비인(鄙人)이 집사에게 대하여 또 어찌 털끝만큼이라도 의도를 둘 뜻이 있겠습니까? 이것은 그 형(兄)이 활을 당기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이니, 또한 친하다고 이를 만합니다.061)                  "
하였으나, 송시열은 다시 답이 없었다. 이로부터 두 사람은 사귀는 정의(情義)가 크게 어긋났다. 이런 까닭에 경화(更化)의 뒤에 예론(禮論)으로 견벌(譴罰)을 입은 자가 모두 수록(收錄)되었는데도 이유태는 홀로 참여하지 못하였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존중(尊重)을 받음이 그보다 나을 수 없었는데, 한 번 그 뜻에 거슬리자 이를 버리기를 폐물(廢物)처럼 하였으니, 비록 가슬 추연(加膝墜淵)062)                          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유태는 평소에 사람의 교제를 잘 이간(離間)하여서, 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 등 여러 사람이 송시열과 종시(終始)를 보전할 수 없었던 것이 모두 이유태에게 말미암았으니, 그 언행(言行)과 심술(心術)이 이를 이루기에 족함이 있으며, 송시열과 서로 잘못된 것도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송시열이 이유태의 비방을 초래한 것 역시 이를 이르게 할 만한 단서(端緖)가 없지 않은데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경솔하게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서 군자(君子)의 스스로 수양(修養)하는 도리에 있어 미진(未盡)한 바가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16책 15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8책 70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정론-간쟁(諫諍)


[註 037]          초장(草場) : 이유태의 거처를 말함.[註 038]          현손(賢孫) : 송시열의 손자를 가리킴.[註 039]          민례(閔禮) : 민신(閔愼)이 대복(代服)한 예.[註 040]          사관례(士冠禮) : 《의례(儀禮)》의 편명.[註 041]          장자후(章子厚) : 장돈(章惇).[註 042]          기성(杞城) : 기계(杞溪) 유씨(兪氏)를 가리킴.[註 043]          경자년 : 1660 현종 원년.[註 044]          갑인년 : 1674 현종 15년.[註 045]          만의사(萬義寺)로 전인(專人)했을 때 : 현종 15년(갑인년)에 복제설을 정하고 나서 송시열에게 보이기 위하여 송시열이 거처하던 만의사(萬儀寺)로 일부러 사람을 보낸 일임.[註 046]          병진년 : 1676 숙종 2년.[註 047]          선왕(先王) : 현종을 이름.[註 048]          곡경(曲徑) : 지름길.[註 049]          대왕 대비(大王大妃) : 인조의 비인 자의 대비(慈懿大妃)를 가리킴.[註 050]          적자(適子) : 송나라 영종(英宗)은 태조(太祖)의 증손으로서 제종숙(再從叔)되는 인종의 태자로 봉하여져 그 뒤를 이었음.[註 051]          비인(鄙人) : 자기의 겸칭(謙稱).[註 052]          백읍고(伯邑考)의 적통(嫡統)을 빼앗은 것 : 무왕(武王)은 문왕(文王)의 둘째아들이고 백읍고(伯邑考)가 장자인데, 무왕이 섰으므로 백읍고의 적통을 빼앗은 것이라고 하였음.[註 053]          유울지(庾蔚之) : 수(隋)나라 사람으로 예론(禮論)에 밝았음.[註 054]          높음[尊] : 존속(尊屬)임을 뜻함.[註 055]          내림[降] : 예절(禮節)을 강등(降等)함을 뜻함.[註 056]          화(禍) : 남인과의 복제(服制) 다툼으로 유배(流配) 당한 일을 말함.[註 057]          두 송(宋) : 송시열과 송준길.[註 058]          모(某) : 이유태를 가리킴.[註 059]          사람[彼人] : 남인을 가리킴.[註 060]          사문(師門) : 김장생(金長生)을 말함.[註 061]          그 형(兄)이 활을 당기매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는 것이니, 또한 친하다고 이를 만합니다. :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어떤 사람이 여기 있는데, 월나라 사람이 활을 당겨 쏘면 자기가 웃으면서 말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소원하게 여기기 때문이고, 자기 형이 활을 당겨 쏘면 눈물을 흘리며 말리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친애하기 때문이다."하는 말이 있음.[註 062]              가슬 추연(加膝墜淵) : 무릎 위에 올려 놓아서 사랑하고, 연못에 떨어뜨려서 미워하는 것이니, 애증(愛憎)을 제멋대로 하는 것을 말함.
사신(史臣)은 말한다. "이유태가 송시열에게 존중(尊重)을 받음이 그보다 나을 수 없었는데, 한 번 그 뜻에 거슬리자 이를 버리기를 폐물(廢物)처럼 하였으니, 비록 가슬 추연(加膝墜淵)062)                          이라고 말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러나 이유태는 평소에 사람의 교제를 잘 이간(離間)하여서, 송준길(宋浚吉)·윤선거(尹宣擧) 등 여러 사람이 송시열과 종시(終始)를 보전할 수 없었던 것이 모두 이유태에게 말미암았으니, 그 언행(言行)과 심술(心術)이 이를 이루기에 족함이 있으며, 송시열과 서로 잘못된 것도 족히 괴이할 것이 없다. 그러나 송시열이 이유태의 비방을 초래한 것 역시 이를 이르게 할 만한 단서(端緖)가 없지 않은데도 스스로 반성하지 않고 경솔하게 의심과 노여움을 더하여서 군자(君子)의 스스로 수양(修養)하는 도리에 있어 미진(未盡)한 바가 있었다."

 

4월 29일 갑자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 사옹원 직장(司饔院直長) 최신(崔愼)이 상소(上疏)하여 윤증(尹拯)을 공격하니, 임금이 우비(優批)로 이에 답하였다. 【원래의 소(疏)와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송윤(宋尹)063)  의 득실(得失)은 이미 피차(彼此)의 서(書)와 소(疏)가 있으니, 공정(公正)한 눈을 가진 자는 스스로 마땅히 이를 알게 마련이다. 유문(儒門)에서 그 학도(學徒)를 조종(操縱)하여 분연(紛然)히 투소(投疏)하여 사람을 헐뜯어 욕하는 것을 일삼는 것은 본래 아름다운 풍습(風習)이 아닌데도 송시열이 이를 금하지 아니하여, 이로부터 괴이한 무리가 걸핏 하면 스승을 소송한다고 일컬어 소장(疏章)을 공거(公事)에 바쳐서 한판의 싸움을 이루었으니 군자(君子)가 이를 부끄럽게 여긴다.
사신(史臣)은 말한다. "처음에 윤증이 송시열을 스승으로 섬겨서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훗날 도(道)를 전하는 것은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다.’라고 하였었다. 비문(碑文)의 일에 미쳐 송시열이 조금도 가차(假借)가 없고, 또 목천(木川)의 부로(俘虜)의 설(說)로 인하여 윤증이 또한 송시열의 문하(門下)됨에 의심이 없지 않아064)  서 늘 통박(痛迫)의 뜻을 품어 반드시 글을 만들어 〈사제(師弟)의 의(義)〉를 끊음을 고히고자 하였으나, 박세채(朴世采)가 그 옳지 않음을 극진히 말하였다. 뒤에 윤증이 내질(內姪)인 권생(權生)이라는 자와 더불어 말한 바가 있었는데, 권생이 또한 송시열의 외손(外孫)이 되므로 곧 이 말을 송시열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그리하여 사림(士林)이 떠들썩하게 서로 전하여 말하기를 윤증이 그 스승을 끊었다고 하였으니, 박세채가 이를 듣고 여러 번 글을 보내어 묻고 이어 속히 나아가 사과(謝過)하게 하였다. 윤증이 드디어 정의(情義)가 간격을 두어 막히게 된 까닭을 서술하여 글을 만들어서 박세채에게 보내고, 박세채는 글을 받았으나 비밀로 하여 발설하지 않았다. 송시열의 손자에 박세채의 사위되는 자가 있어, 이를 박세채의 상자 속에서 얻고 이어 중외에 전파하였으니, 드디어 한 세상의 큰 시비거리가 되었다. 윤증이 송시열과 간찰(簡札)을 왕래한 후에 이르러, 송시열은 윤증의 아비 윤선거(尹宣擧)가 도적 윤휴(尹鑴)를 끊지 않은 것을 가지고 지론(持論)이 매우 긴박(緊迫)하였고, 또 윤증의 어미의 죽음이 윤선거에게서 말미암은 것을 말하여서 투부(妬婦)065)  의 비명(非命)의 죽음에 비기기에 이르렀으니, 이에 있어 사류(士流)가 모두 송시열의 말에 불평하였다. 김익훈(金益勳)의 도당이 이로 인하여 사류를 기울여서 죄에 빠뜨리고자 하여 이르기를, 사류가 대로(大老)066)  에 대하여 겉으로는 높이면서 뒤로 배척한다고 하며, 뜬소문을 선동하여서 크게 공격과 배척을 일삼아 의혹과 노여움이 날로 깊어지고 간극(間隙)이 날로 생겨 종전의 분렬(分裂)의 형세로 하여금 더욱 다시 합칠 수 없게 만들어서 끝없는 재앙의 터전을 만드니, 식자(識者)가 이것을 가지고 둘다 그르다는 의논이 있었다. 윤증이 박세채에게 보낸 글의 대략에 이르기를, ‘이 말이 새로 나가면 서울안이 분분해질 것입니다. 또다시 시끄러우면 일에 무익(無益)하니, 다만 볼과 혀를 그대로 두어서 고요히 논변(論辨)하지 말라는 경계하심을 지켜 서서히 조금 안정되기를 기다리는 것만 못할 듯합니다. 작년에 받은 글월에는 더욱 경계하고 두려워하라고 하셨으나, 감히 회답을 드리지 못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날을 두고 반복하여 이를 생각하였는데, 제가 오늘날 마음을 열고 뜻을 털어 놓아 질의(質疑)하여서 의혹을 푸는 것은 오직 고명(高明)께서만이 믿을 수 있습니다. 이 일이 다만 한 몸의 화복(禍福)만이 아니라고 하시고 또 선인(先人)에게 추후(追後)로 누(累)를 끼침을 가지고 가르치심을 받았으니, 아무 말없이 조용히 있으면서 일을 모두 고명 앞에 털어 놓아서 다시 의리(義理)에 처하는 방도(方道)을 청하지 않는다면 미혹(迷惑)함이 심한 것이라고 이를 말합니다. 비로소 척연(惕然)히 살피고 깨달아서 감히 전후(前後)의 곡절(曲折)을 아래와 같이 갖추 진술하여 감히 털끝만큼의 숨김도 없어서 고명의 경계와 가르치심을 들으려 합니다. 금년 정월 보름 사이에 권생(權生)이 찾아와서 하룻밤 묵고 갔습니다. 그때에 새로 목천(木川)의 일을 당하여 제가 그와 더불어 말하기를, 「목천의 일이 이와 같은데, 이는 반드시 함장(凾丈)067)  의 문하에서 나온 것일게다. 그러나 함장께서는 들은 곳을 설파(說破)하려 들지 않으시고 곧 끌어서 스스로 담당하셨으니, 이것 때문에 다시 감히 묻지 못하였다. 또 나로 하여금 스스로 허황(許璜)이라는 자에게 묻게 하셨으나, 또한 함장의 뜻을 알지 못하는 까닭에 오래도록 대답을 하지 못하였다.」하고, 또 이르기를, 「의(義)와 이(利)를 둘 다 행한다[義利雙行]·왕도(王道)와 패도(伯道)를 아울러 쓴다[王伯並用]함은 《대학(大學)》의 성의(誠意)·정심(正心)의 학(學)과 같지 않다. 동춘(同春)이 말한 바 모두 기관(機關)이며, 초려(草廬)068)  의 이른바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전용(專用)하는 것으로서, 이것이 함장의 실병(實病)인 듯하여 나는 한 번 의심나는 바를 묻고자 하나 정의(情義)가 이미 막혀서 감히 말하지 못한다. 이제 이 목천(木川)의 일로 거듭 죄를 얻었으니, 이로부터 말하지 못할 듯하다.」 하였는데, 권생이 함장에게 여쭌 것이 바로 이 말입니다. 어제 권생을 불러 물었더니, 말하기를, 「이미 이 말을 들었으니 감히 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하고, 함장께서 갑자기 말씀하시기를, 「만약 그 선인(先人)을 말할 일을 가지고 나를 끊는다면 옳을 수도 있으나, 만약 초려의 말을 믿고 나를 친다면 옳지 않다.」고 하시더랍니다. 아마도 대답을 올리지 못한 것과 감히 의심나는 것을 묻지 못한 것을 가지고 서로 끊은 것으로 여기신 듯합니다. 그러므로 지금의 이른바 서로 끊었다는 말과 초려와 서로 맞는다는 말이 이로 인하여 나온 듯합니다. 초려와 따로 무슨 서로 맞는 일이 있겠습니까? 다만 당초에 저의 생각은 두 집[兩家]069)  이 서로 잃은 것으로 여겼습니다. 왕년에 함장께서 해상(海上)으로 돌아오셨을 때에 소재(蘇堤)로 가서 문후(問候)하였었는데, 그때에 초려도 금방 공주(公州)로 돌아왔으므로, 돌아오는 길에 또한 찾아가 문후하였을 뿐입니다. 금년 여름에 초려가 이 곳을 지나다가 집으로 찾아왔다가 갔기 때문에 교하(交河)에서 돌아오는 길에 또한 그 문을 두드렸을 뿐이니, 무슨 그와 서로 맞아서 함장을 공격하고 배척한 일이 있단 말입니까? 두 가지 일의 곡절이 위와 같은 데에 지나지 않을 뿐입니다. 갈명(碣銘)이 매우 훌륭하지 못한 까닭에 유감이 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함장의 당초의 말씀이지 불초(不肖)에게 이 마음이 없었던 것은 고명의 살피시는 바입니다. 주자(朱子)의 여동래(呂東萊)의 일을 말함도 함장의 중간의 말씀으로서 고명이 이미 도리(道理)의 말이 아님을 알고 계시니, 다시 무슨 말이 있겠습니까? 선인〈先人〉께서 이 말씀을 하셨던 것은 도무지 기억하지 못하며, 하물며 〈말이〉 금년에 나왔으니 어떤 사람을 향하여 말씀하신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으며, 매우 괴이하다 하겠습니다. 보내 주신 가르침에 이른바 글을 만들어서 정중하게 사과하라는 말씀은, 비루(鄙陋)한 생각이 의혹(疑惑)을 열어서 문득 감히 가슴속을 모두 〈함장께〉 펴지 못합니다. 함장이 선인에게 대하여 갈명(碣銘)의 일이 있으면서부터 이래로 실로 한 가지 말씀 한가지 일만이 아니며 목천(木川)의 일에 이르러서 극에 달하였으니, 자식된 마음이 어찌 편안하여서 다른 날과 같을 수 있겠습니까? 이로 말미암아 정리(情理)가 전과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윤증은 함장에게 대하여 실로 본원(本源)과 언행(言行)의 사이에 의심이 없지 않으나 전일에 논한 바와 같음이 있어서 감히 강질(講質)070)  하지 못하니, 옛 사람이 이른바 사생(師生)은 실로 이같은 의리(義理)가 없으므로, 이로 말미암아 의리가 전과 다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정리로나 의리로나 모두 전과 같지 못하면서 스스로 그 옳지 않음을 알지 못하니, 비록 정중히 사과하고자 한들 무엇을 가지고 그 말을 만든단 말입니까? 만약 솔직하게 이 뜻으로 자수(自首)하여서 다만 서로 끊은 말이 없음을 분소(分疏)한다고 한다면, 권생의 여쭌 바가 또한 다만 이 뜻인데도 함장께서 이미 서로 끊은 것으로 인정(認定)하셨으니, 어찌 환연(渙然)히 풀리실 리가 있겠습니까? 심상(尋常)한 문후(問候)의 예절같은 것은 비록 전처럼 자주하지는 못하지만, 진실로 감히 폐(廢)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나를 아는 것도 나를 죄주는 것도 다만 여기에 있습니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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