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5권, 숙종 10년 1684년 5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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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11일 병자

좨주(祭酒) 박세채(朴世采)가 현도 진소(縣道陳疏)하여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였으니, 대략에 이르기를,
"그윽이 듣건대, 최신(崔愼)이 전(前) 대사헌(大司憲) 윤증이 신에게 보낸 편지속의 말이 그 스승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일에 미침을 가지고 글을 올려 신변(伸辨)하였다는데, 이 일의 곡절은 자세하게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신이 전에 들은 바로는, 비록 이른바 묘문 찬술(墓文撰述)의 단서(端緖)가 있어 진실로 편안하기가 어렵다고 하나, 그 실상은 처음에 이에 관계되지 않았습니다. 윤증이 일찍이 일로 인하여 송시열에게 간곡하게 물은 바가 있었으나 그 개석(開釋)을 얻지 못하여 드디어 억울함을 이루어서, 매양 긴 글월을 만들어 아울러서 평소에 스승을 위하는 성의를 표시하고자 하였습니다. 신은 그것이 의심나면 마땅히 묻는 의리에서 나오는 것임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나, 혹시 시의(時議)를 촉발 격화(觸發激化)시킴을 인연하여 사생(師生)의 체통을 손상할 듯하여서, 서로 만나는 때에 있어 이를 만류한 적이 두세 번만이 아닙니다. 남과 말함으로 인하여 먼저 대의(大意)를 송시열에게 알렸다는 것을 듣기에 미쳐, 신은 또 그 너무 경솔함을 애석하게 여겨, 글월을 가지고 당시의 사의(辭意)을 상세히 물음을 면치 못하였으며 또 반드시 정중하게 사과(謝過)하게 하였습니다. 무릇 최신이 열거한 여러 설(說)이 모두 윤증의 신에게 답한 글에서, 사람으로 인하여 먼저 알린 말을 되풀이하여 효유(曉諭)하고 또 의리(義理)에 처하는 방도를 알려주기를 구하여서 본말(本末)과 조리(條理)가 모두 말미암는 바가 있음을 가지고 하였습니다. 이는 최신이 윤증이 신과 더불어 몰래 서로 비방하고 의논하여서 송시열을 무함하고 욕하는 것으로 의심하여서 그런 것입니다. 신이 자세히 그 글을 보건대, 이른바 먼저 알렸다는 것은 착오가 없지 않고, 혹 반드시 말하지 않을 것을 말한 것이 있습니다. 이는 비록 당초의 성의(誠意)를 표시하는 뜻에 바탕을 두었으나 그다지 재량(裁量)함이 없고, 또한 지견(知見)이 오히려 주도면밀하지 못한 데에 기인한 듯합니다. 마음을 비워 남의 말을 받아들여 허물을 고치기에 인색하지 아니하여서 만약 다시 서로 개익(開益)하여서 의리(義利)의 권형(權衡)을 다하게 하였다면, 반드시 이 지경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은 잠시 그 글월을 그대로 두어서 조만간 면대하여 논하기를 기다리거나 혹 다시 글로 인하여 절실하게 규간(規諫)하려 하였습니다. 송시열도 그 먼저 알린 말을 듣고 자제(子弟)를 경계하여 말을 내지 못하게 하였으며, 이 글을 가지고 온 자가 있기에 이르러서는 즉시 불을 붙여 버렸으니, 마땅히 모두 그 사이에 깊은 뜻이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최신이 알지도 못하면서 갑자기 등본(謄本)을 보자 마치 기화(奇貨)를 얻은 것처럼 수미(首尾)의 사의(辭意)를 끊어버리고 공척(攻斥)의 계략을 하기에 급급하여, 윤증의 아비 고(故) 집의(執義) 윤선거(尹宣擧)도 아울러 침범하고 모욕하여서 사의(私義)와 국체(國體)를 조금도 돌아보거나 거리낌이 없어, 송시열의 사생(師生)의 사이와 전하(殿下)의 군신(君臣)의 모임이 모두 상도(常道)를 얻지 못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것이 또 신의 어둡고 소홀함으로서, 그 허물이 다만 윤증으로 하여금 그 스승에게 성의를 표시하게 하지 못하고, 억울하게 전패(顚沛)를 취하게 한 것만이 아닙니다. 신은 들으니, 사생(師生)의 의리는 존엄(尊嚴)하여 순일(純一)을 이룸을 위주로 하나, 《예경(禮經)》에 이미 ‘범함이 있어도 숨김이 없다[有犯無隱]’는 도리로써 후세에 교훈을 남겼으니, 성문(聖門)의 오활(汚濶)하다는 비판071)  과 이락(伊洛)072)  의 또 어디서 도(道)에 따르나 하는 의문은 숭상(崇尙)할 만한 것입니다. 우리 나라에 미쳐, 문경공(文敬公) 김굉필(金宏弼)이 일대(一代)의 대유(大儒)로서 간혹 그 스승 김종직(金宗直)에게 그 잘못을 대략 드러내서 말하였고, 그 후에 박형(朴衡)·황신(黃愼) 등 여러 사람은 일로 인하여 사석(師席)에서 규풍(規諷)을 드려 각각 스스로 옛날의 의리(義理)에 붙였습니다. 그러나 김굉필은 본래 이것을 가지고 도학(道學)으로 서로 전하는 통서(統緖)를 폐하지 않았으며, 나머지 사람들도 모두 아름다운 이름을 잃지 않았으니, 어찌 종시(終始)의 대체(大體)을 손상한단 말입니까? 비록 윤증의 뜻이라 하더라도 진실로 이에서 벗어나지 않습니다. 신은 일찍이 생각건대, 송시열은 이이(李珥)의 유파(流派)이고 윤선거(尹宣擧)는 성혼(成渾)의 외손(外孫)으로서, 스스로 서로 강마(講劘)하여서 함께 사문(斯文)의 종주(宗主)가 되었습니다. 하물며, 신은 송시열에게 대하여 비록 수업(受業)을 청한 일은 없으나 문장(門墻)에 출입한 지 20여 년이고, 윤증에 대해서는 그 선인(先人) 때부터 교유(交遊)하여서 부자(父子)와의 사이에 정의(情義)가 매우 깊었습니다. 근세(近歲)에 서로 막힐 조짐이 없지 않음을 가지고 근심하여, 서로 면려(勉勵)를 더하여 반드시 조화시켜서 피차(彼此)의 사생(師生)의 사이를 보전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곧바로 그 긴 글월을 만류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뜻하지도 않게 오늘날 엎치락뒤치락 일을 그르쳐 별달리 병패(病敗)를 낳아 이 같은 극도의 지경에 이르러서,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럽고 한스러움을 스스로 풀 길이 없게 만들었습니다. 오직 그 최신의 소(疏)에 이른 바, 몰래 서로 기의(譏議)하여 송시열을 무함하고 욕한다는 것은 죄를 도망할 수 없으니, 출척(黜陟)·영욕(榮辱)이 의리가 홀로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임금이 예비(例批)를 내렸다.

 

5월 13일 무인

인견(引見)하였을 때에, 좌의정(左議政) 민정중(閔鼎重)이 윤증(尹拯)의 의리에 처함의 그름을 진달하고, 다시 어진이를 대우하는 예(禮)로써 대우하지 말기를 청하였으며,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 또한 이어 이를 진달하니, 임금이 답하기를,
"세상의 도리가 크게 무너졌으니, 만일 윤증을 위하여 신구(伸救)하는 자가 있어 소란한 단서를 일으킨다면 걱정스럽다."
하였다. 【연주(筵奏)와 비교(批敎)는 위에 보인다.】 윤선거(尹宣擧)의 전후(前後)의 처의(處義)는 송시열이 처음에 이미 지주(砥柱)073)  와 일성(一星)074)  으로 이를 허락하였으니, 비록 그 말이 진실(眞實)로서 실지를 넘지 않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겠지만, 송시열에게 있어 거의 정론(定論)이 되었다. 그 후에 허다한 추욕(醜辱)의 말이 모두 양가(兩家)가 서로 어긋난 나머지 나왔으나, 선배(先輩)가 모두 생존한 자가 없어서 말의 내력을 빙거(憑據)하여 물을 곳이 없으니, 어찌 위기(魏其)의 가서(家書)075)  가 되지 않음을 알겠는가? 윤휴(尹鑴)의 일에 이르러서는 경신년076)  에 역절(逆節)이 드러나기 전에는 당론(黨論) 가운데 화변(禍變)을 좋아하는 무리를 얻을까 근심하는데 불과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형적(形跡)을 드러내어 크게 배척한 것이 아니었다. 평소에 윤휴의 친한 벗이 되었던 자는 오직 준엄(峻嚴)한 말로 이를 책(責)하였을 뿐으로, 어찌 심히 원망하고 미워하여서, 송시열이 친히 그 화변을 일으킴과 같이 하였겠는가? 송시열이 윤휴를 노여워함은 진실로 예론(禮論)에 있었으나, 그 자가(自家)에서 만난 바 사사로운 일에 관계됨을 협의하여 문득 다시 전일의 일을 과장하여서 크게 만들었다. 그래서 윤휴가 주자(朱子)의 주(注)에 등을 돌려 이의(異議)를 세우는 말을 준렬(峻烈)하게 논하여 죄를 성토(聲討)하는 명목으로 삼아서 은연 중에 오도(吾道)를 보위(保衛)하고 이단(異端)을 물리침을 가지고 자처(自處)하였다. 비록 여덟 자급(資級)의 초승(超陞)077)  과 산송(山訟)의 직결(直決)이 모두 《중용(中庸)》의 개주(改注)의 뒤에 있었는지를 알지 못한다 하더라도, 말과 행실의 결렬(決裂)만으로 이미 식자(識者)의 의논을 면치 못한다. 또 윤선거의 기유년078)  의 글월 속에서 보전하고 화합하기를 권면(勸勉)한 것 때문에 윤휴를 배척하여 끊는 것이 자기가 심하게 하는 것만 같지 못하다 하여 곧장 편당(偏黨)을 이루어 보호한다는 죄를 더하였으니, 더욱 군자(君子)의 공평한 마음으로 한 의논이 아니다. 윤증의 글월 속에 왕패(王霸)와 기관(機關) 등의 설이 반드시 송시열의 실제 병통이 되지 않은 것이 아니다. 더구나 윤증이 박세채(朴世采)에게 글월을 보낸 것도 그 글월로써 물음으로 인하여 스스로 권생(權生)과 수작(酬酢)한 말을 숨기지 못하고, 피차(彼此)의 도의(道義)의 사귐에 있어서 그 선처(善處)의 의리(義理)를 논한 데 지나지 않을 뿐이다. 처음에 다른 사람과 더불어 단서도 없이 기의(譏議)한 것이 아니니, 또 어찌 곧장 서로 끊음을 가지고 논할 수 있겠는가? 양가(兩家)에서 대처한 바의 득실(得失)을 논할 것 없이 〈일이〉 사사(私事)에 관계되니, 다만 마땅히 사림(士林)의 공의(公議)에 붙일 뿐이지, 원래 조정(朝廷) 위에 밀어 올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가령 말을 그만둘 수 없다면, 윤증의 일도 진실로 반드시 십분 마땅치 않고, 송시열이 붕우(朋友)·사생(師生)의 사이에 처함도 잃은 바가 없지 않으니, 또한 그 과실(過失)을 똑같이 나누지 않을 수 없다. 공변된 마음으로 선처(善處)함은 마땅히 박세채의 이른바 그 사람을 논하면 모두 버릴 수 없고, 그 일을 논하면 하나도 옳은 것이 없다는 것과 같이 하여야 한다. 애석하다! 대신(大臣)이 앉아서 뜬소문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그 기세(氣勢)로 인하여 붙들어 주고 억누름이 매우 편벽되었다. 송시열의 한때의 과격한 말을 마치 전모(典謨)처럼 믿어서 경솔하게 남의 부자(父子)를 논하여 옳고 그름을 일방적으로 정해서 기꺼이 송시열에게 복종하는 신하가 되어 백세(百世) 공의(公議)의 속이기 어려움도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 선비의 취향(趨向)이 분렬(分裂)되고 세도(世道)가 무너져 어지러워서 마침내 국가의 무궁한 폐해(弊害)가 됨이 마땅하다. 그러나 화란(禍亂)의 수괴(首魁)을 추론(追論)한다면 죄가 돌아갈 바가 있을 것이다. 처음에 수사(修史)하는 자가 당사(黨私)에 이끌리어 그 공심(公心)을 잃어서 참된 시비(是非)의 소재(所在)를 깊이 살피지 못하고 문득 다시 편계(偏係)의 말을 조술(祖述)하여, 말과 자구(字句)의 사이에서 찾아내어 더욱 마음대로 무망(誣罔)하고 패리(悖理)하였으니, 이른바 문정(門庭)을 나누어서 스스로 온전히 한다는 것은 더욱 말이 되지 않는다. 그때를 당하여 사람의 향함이 있는 바가 있고 성세(聲勢)가 바야흐로 커졌으니 오히려 어찌 훗날의 근심이 있겠으며, 윤증은 이미 시의(時議)에 죄를 얻어서 몸을 보전하기에 겨를이 없는데, 또 어찌 반드시 아득히 멀어서 기약할 수 없는 곳에서 온전히 하기를 구하겠는가? 이때를 지나 4, 5년 뒤에 간당(奸黨)이 뜻을 얻고 곤궁(坤宮)079)  이 손위(遜位)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세도(世道)의 지극한 불행이 되며 처음에 미리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더욱 산림(山林)에서 스스로 도(道)를 지키는 사람과는 관련이 없는데도 이것을 가지고 더럽혀 손상함은 참으로 한 벗 웃음거리에도 차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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