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5권, 숙종 10년 1684년 8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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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1일 갑인

관학 유생(館學儒生) 조정만(趙正萬) 등이 상소하여 윤증(尹拯)을 배척하고 송시열(宋時烈)을 변송(辨訟)하니, 임금이 우악한 비답을 내렸다. 【원소(原疏)와 비지(批旨)는 위에 보인다.】  이 양가(兩家)의 왕복한 서찰을 보건대, 아버지와 스승 사이에 처하여 애통하고도 절박한 정상은 존비(尊卑)의 형세를 끼고서 능가(凌駕)하고 조절(操切)한 말은 누가 옳고 그른지 알지 못하겠으나, 공안(公眼)을 가진 자라면 스스로 마땅히 알 것이니, 처음 사초(史草)를 닦은 자의 본 바가 달랐던 것을 애석하게 여긴다. 송시열이 윤증을 협박한 것은 매양 한 마음을 둘로 쓴다는 데 있었으나, 윤증은 자기 집의소조(所遭)084)  가 점점 심해지니, 정리(情理)가 진실로 아주 절실(切實)하였을 것인데, 억양(抑揚)을 조절(操切)한 것을 보면 본원(本源)이 도(道)에서 멀리 어긋남을 밝게 알 수 있다. 이미 정리를 호소하고 또 본원을 질문하였으니, 어찌 마음을 둘로 씀이 있겠는가? 그러나 윤증이 송시열에게 답한 것도 매우 공손하게 순종하지는 않았으니, ‘이미 지우고도 볼 수 있게 하였다.’는 등의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대저 윤증의 두 번째 편지에 송시열은 마땅히 개시(開示)하는 바가 있었어야 할 것인데, 송시열의 두 번째 편지에 사기(辭氣)가 더욱 불평(不平)하였으면, 윤증은 이에서 또한 그쳤어야 옳은 것이다. 그런데 피차 편지를 왕복하여 점점 더욱 격렬해져서 득실(得失)은 물론하고, 요컨대, 사문(斯文)의 큰 변괴(變怪)가 되었으니, 또한 그 허물을 평등하게 나누지 않을 수 없다. 이는 대개 송시열은 이미 측달(惻怛)하는 바가 모자라고 윤증도 밝게 결단하는 바가 부족한 것으로 말미암아 그러했던 것이니, 세도(世道)를 위해 매우 불행한 일이었다. 세상에서 양가(兩家)를 논하는 자들이 각각 그 사사로이 좋아하는 데 따라 부지(扶持)하고 억제(抑制)하는 바가 너무 편벽되어 다른 한편으로 떨어져 있는데, 오로지 박세채(朴世采)만 공평한 마음으로 감단(勘斷)하여 일찍이 편기(偏倚)085)  하지 않았다. 이에 한두 편지를 밑에 붙여서 백세(百世)로 하여금 공청병관(公廳並觀)의 의논이 있었음을 알게 한다. 박세채가 이희조(李喜朝)에게 보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오늘날 분분(紛紛)한 까닭은 단지 노장(魯丈)  【윤선거(尹宣擧)이다.】 이 강도(江都)에서 죽지 않은 것과 흑수(黑水)  【윤휴(尹鑴)를 가리킨 것이다.】 를 절교하지 않은 두 가지 때문이다. 강도의 일은 노장의 소조(所遭)가 낭패(狼狽)라고 이를 만한데, 뒤에 자정(自靖)086)  한 바가 진실로 명백하니, 우장(尤丈) 【송시열(宋時烈)이다.】 이 이미 친구로 여겨 허여하였으면 지금에 와서 추구(追咎)하는 것은 마땅하지 못하다. 절교하지 않은 일은 노장이, ‘주자(朱子)와 우리 나라 제현(諸賢)을 능가한다.’는 데 대해 주제넘다[過越]고만 말하였고, 복제(服制)의 의논에서 단지 경솔하다고만 말하였으니, 모두 그 의리(義理)에 미진(未盡)한 듯하다. 비록 당시에 우장(尤丈)이 배척하였다 하더라도 또한 괴이할 것은 없으나, 반드시 한 딴 사람으로 만들어 세도(世道)의 해(害)가 되는 것으로 단정하려고 저 〈윤휴에게〉 붙여서 주자를 배반한 것과 같은 바가 있다고까지 하였으니, 이는 우장의 논의가 너무 지나친 것이다. 〈윤증이〉 낭패한 것을 가지고 죽을 만한 의리(義理)가 없다고 말한 데 이르러서는 도리어 노장(魯丈)의 자정(自靖)한 의리에 어긋나고, 미진(未盡)한 것을 가지고 모두 도리에 합당하다고 말하여 선견(先見)이 있는 우장과 더불어 서로 겨루려고 하였으니, 이는 자인(子仁)  【윤증의 자(字)이다.】 의 논의가 의혹이 심한 것이다. 세상에서 모두 각각 사사로운 뜻을 품었다고 의심하는 데, 두 집에서는 스스로 도(道)가 있고 의(義)가 있다고 생각하여 문생(門生)과 친구를 좌우에 부식(扶植)하고, 반드시 사정(邪正)으로써 서로 명령하니, 이는 오늘날 사문(斯文)과 국사(國事)가 또한 패괴(敗壞)되어 수습하지 못하니, 나한(羅韓) 【나양좌(羅良佐)·한성보(韓聖輔)인데, 소장(疏章)은 아래에 보인다.】 의 두 상소에 이르러 극진해진 것이다.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노장의 실수는 비록 조금 가벼운 듯하나 미진한 데로 돌리고, 우장은 너무 지나치는 데로 돌리고, 자인은 이미 의혹한 데로 돌렸는데, 또 반드시 사정(邪正)의 논설을 타파하여 득실이 있는 데로 돌린 뒤에야 단정할 수 있을 것이니, 알지 못하거니와 어떠한가.?"
하였고, 또 이희조(李喜朝)에게 보낸 편지에 대략 이르기를,
"대저 명우(明友)  【윤증의 호(號)이다.】 의 처한 한 바가 비록 혹시 크게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안으로는 부자(父子)의 사정(私情)이 박절하고, 밖으로는 식견(識見)이 투철하지 못한데서 연유한 것이며, 본래 이(利)를 보고 스승을 배반할 무리는 아니니, 정상(情狀)이 용서할 만한 바가 있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참여해 들은 사람인데, 어찌 감히 뭇 사람이 공격하여 배척하는 데 따라 비방(誹謗)하는 단서를 더하겠는가? 우장(尤丈)에게 이르러서는 먼저 붕우(朋友) 사이에 실수하고, 후에 사생(師生) 사이에 실수하였으니, 이른바 노장(魯丈)의 부부(夫婦)를 아울러 배척한 것은 비록 위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하나도 옳은 것을 보지 못하겠다. 기타의 병통도 깨달을 수 없는 것이 많이 있어서 사람으로 하여금 부끄러워 탄식하게 하여 마음삼을 바가 없다. 그러나 평일의 학문과 기절(氣節)과 출처(出處)의 대치(大致)도 비록 온전히 아름답다고 하지는 못하더라도 또한 다 폐하기는 어려우니, 다만 마땅히 힘써서 그 처음의 정의(正誼)를 보전해야 할 것이다. 그 일을 논하면 모두 잘못이나, 그 사람을 보면 모두 버릴 수 없으니, 이는 바로 구구(區區)한 나의 요즈음 ‘자정(自靖)의 의(義)’라는 것이다. 그런데 듣건대 두 집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옳고 그름이 분명하지 못하다.’고 한다 하니, 그 뜻은 각각 나로 하여금 이쪽을 부지(扶持)하고 저쪽을 억제(抑制)하게 하려는 것이다. 대저 반드시 이산(尼山)087)  의 논의와 같이 그 은미(隱微)한 심사를 안 연후에 우장을 배척할 수 있고, 반드시 회덕(懷德)088)  의 논의와 같이 그것이 오로지 사사로운 뜻에서 나온 것임을 안 후에야 명우를 배척할 수 있을 것인데, 나의 혼미한 소견으로 남을 따라서 음양(陰陽) 좌우(左右)의 분별을 하지 못할 것은 결정적이다."
하였는데, 이희조는 송시열의 문인으로 박세채의 문하에서도 배운 자이다. 상론(尙論)089)  하는 자는 오히려 첫 편지를 말하는 사이에 장자(長者)에게 고자(顧藉)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뒤에 송시열의 글이 모두 나오자, 그 패출(悖出)090)  한 바가 다시 여지가 없으니, 식자(識者)가 이르기를, ‘박세채로 하여금 보게 하였더라면 반드시 다시 대처함이 있었을 것이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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