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6일 기묘
정언(正言) 윤세희(尹世喜)가 아뢰어 이조 판서(吏曹判書) 이익(李翊)을 탄핵하고, 파직할 것을 청하니, 임금의 비답(批答)에 공평하지 못하다는 것으로 꾸짖었다. 【원계(原啓)와 임금의 비답은 위에 보인다.】 이익이 그 형 이숙(李䎘)과 더불어 번갈아 전조(銓曹)에 있으면서 권세를 부르고 뇌물을 받아들여 남의 말을 많이 불러 일으켰으나, 대각(臺閣)에 있는 자가 그 기세(氣勢)를 두려워하여 말하는 자가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 윤세희가 새로 대각에 들어가서 맨 먼저 이를 탄핵하니, 공의(公義)가 이를 쾌하게 여겨서 과감하게 말하는 기풍을 칭찬하였다.
9월 20일 계미
청성 부원군(淸城府院君) 김석주(金錫胄)가 졸(卒)하였다. 김석주는 바로 명성 왕후(名聖王后)091) 의 종부제(從父弟)인데, 침의(沈毅)하고 과감(果敢)하여 기도(器度)092) 가 있었으나, 권모 술수(權謀術數)를 숭상하였다. 임금이 어린 나이에 사복(嗣服)하여 자성(慈聖)에게 도움을 받아 이루었는데, 탁룡(濯龍)의 근친(近親)으로 청현(淸顯)한 자리에 있는 자는 오로지 김석주 한 사람뿐이므로, 드디어 차례를 밟지 아니하고 뛰어 올라서 조정 정사에 참여해 들었다. 김석주가 본래 사류(士流)와 화목하지 못하여 갑인년093) 의 번복(飜覆)에 혹은 몰래 알선(斡旋)한 바가 있음을 의심하였으나, 흉당(凶黨)의 세력이 이루어지자, 김석주가 그 사이에 끼어 이미 서로 알력(軋轢)의 혐의로움이 없지 아니하였고, 이남(李柟)·허견(許堅) 등의 역모(逆謀)가 처음 싹틀 때에 김석주가 또 그 정상을 정탐해 얻어서 묵묵히 심기(心機)를 운용하며 은밀히 형찰(詗察)을 일삼다가, 마침내 예단(睿斷)을 도와 흉얼(凶孼)을 소탕(掃蕩)하니, 종사(宗社)를 보존한 공을 사류(士類)가 모두 인정하였다. 그러나 역적을 토벌하고 공을 논할 즈음에 김석주가 임의로 올리고 낮춘 것이 많이 있어서 청의(淸議)가 진실로 이미 이를 병통으로 여겼다. 또 김석주가 처음에는 비록 흉당을 제거하는 데 급급하여 한결같이 정도(正道)로 나가지 못하였다 하나, 성공한 뒤에는 오로지 옛자취를 일변(一變)시키고 물러가서 본분(本分)을 지켰어야 마땅한데, 도리어 자기의 공을 과대(夸大)하여 조정의 권한을 장악하고, 유음(幽陰)한 길과 밀고(密告)하는 문을 만들어 농간을 부리는 것이 이미 익숙해졌고, 수단이 더욱 교활해져 은연중(隱然中)에 한편을 제거[草薙]할 뜻이 있었다. 그러나 덕망이 높은 구신(舊臣) 송시열(宋時烈)·김수항(金壽恒)과 같은 여러 사람도 바야흐로 인진(引進)한 것을 이롭게 여겨 농락을 받으면서도 걸핏하면 그 사직(社稷)의 공을 칭도하였고, 오로지 후기(喉氣)도 우러러 감히 한 마디의 말조차 서로 어기지 못하였다. 산을 옮기고 바다도 메우는 힘은 세상에서 꺽을 자가 없으니, 이 일대(一隊)의 청의(淸議)가 화복(禍福)을 헤아리지 아니하고 그 공을 인정하면서도 그 죄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김석주는 또 스스로 반성하지 아니하고 힘써 공의(公議)와 다투어 드디어 당론(黨論)의 분열을 이루게 하였으니, 그 세도(世道)의 불행함이 진실로 컸는데, 일종의 의발(衣鉢)을 서로 전수(傳授)하면서 곡경(曲逕)094) 을 크게 열고 행문(倖門)095) 을 막지 못하였으니, 이사명(李師命)과 김춘택(金春澤)에 이르러 지극하였다. 이미 스스로 그 집을 보전하지 못하고, 마침내 국가의 무궁한 화(禍)가 되었는데, 세상에서 공의(公議)를 가진 자가 화의 근본을 추론(追論)하면서 공괴(功魁)·죄수(罪首)로 김석주를 결정하였다. 그런데 복식(服飾)의 사치함과 제택(第宅)의 굉장함과 비용(費用)의 과람함과 제치(制置)의 그릇됨은 족히 책할 것이 못되는데 이에 이르러 졸하였다. 처음에 사초(史草)를 닦은 자가 송시열·김수항의 여론(餘論)을 조술(祖述)하여 조여우(趙汝愚)·심의겸(沈義謙)의 경우로써 김석주를 허여(許與)하고, 스스로 주자(朱子)와 이이(李珥)가 부호(扶護)한 데에 가탁하였다. ‘무릇 역적은 물고기나 자라처럼 생산되는 것이 아니다.’고 한 것은 진실로 이항복(李恒福)의 말과 같은 바가 있으니, 경신년096) 토역(討逆)한 뒤에 오히려 무슨 근심할 만한 것이 있었겠는가마는, 인연(因緣)하고 장대(張大)하며 그 사사로움을 이루었으며, 조정에서는 또 일찍이 큰공이 있다고 하여 일체 이를 종용(慫慂)하였으니, 이것이 심조(沈趙)097) 의 일에 대하여 어찌 의(義)·이(利)·공(公)·사(私)의 구별이 없겠는가? 인용한 여러 현인(賢人)들도 차중(借重)098) 하고 문과(文過)099) 한 한 단서에 지나지 아니하였으니, 식자(識者)가 이를 비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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