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보궐정오16권, 숙종 11년 1685년 2월

싸라리리 2025. 10. 24. 08:26
반응형

2월 3일 계사

대신과 비국(備局)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引見)하였다. 강화 유수(江華留守)                     윤계(尹堦)가 백마(白馬)의 옛 성(城)을 쌓아서 군향(軍餉)과 군기(軍器)를 저축(儲蓄)하여 위급할 때의 용도(用途)로 삼기를 청하고 이어서 말하기를,
"대흥성(大興城)은 마땅히 버려야 합니다."
하였고, 이민서(李敏叙)도 윤계의 말과 같았다. 신여철(申汝哲)은 ‘대흥성(大興城)을 쌓자마자 곧 버리는 것’은 어렵다고 하니, 임금이 이를 따랐다. 논자(論者)들이 신여철의 말을 옳다고 하였다.

 

2월 4일 갑오

보은(報恩)의 유학(幼學) 이진안(李震顔)이 상소하여 윤증(尹拯)을 무욕(誣辱)하였으므로,                        【상소는 위에 보인다.】                      비답(批答)하였다.                        【위에 보인다.】                      전년(前年)부터 김수항(金壽恒) 등이 송시열(宋時烈)과 윤증의 사사 편지 문제로 옳고 그름을 굳이 정한 뒤에 송시열의 문도(門徒)들이 윤증에 대한 원한(怨恨)이 뼈속까지 사무쳐서 온갖 계책(計策)으로 중상(中傷)을 하였다. 그래서 윤증이 지난해에 그의 아비 윤선거(尹宣擧)를 위하여 사국(史局)에 보낸 편지 가운데의 한 구절의 말을 가지고 선정(先正) 이이(李珥)를 무욕(誣辱)하였다고 하니, 이진안이 때를 타서 소를 올린 것이다. 윤증의 편지는 진실로 실언(失言)한 것이지만, 그의 뜻이 어찌 이이를 무욕하는 데에 있었겠는가? 다만 이를 빙자(憑藉)하여 자기 아비에게 과실(過失)이 없음을 증거대려던 것뿐이었다. 그러나 윤선거가 강도(江都)에서 있었던 한 가지 일은 비록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는 없었다 하더라도 김익겸(金益兼)과 권순장(權順長) 등이 자기 몸을 죽여서 인(仁)을 이루었던 일에 견주어 보면 끝내 서운함이 없을 수 없었다. 그러기에 그 뒤에 그가 자처(自處)한 것과 학문(學問)의 공은 끝내 속일 수 없는 것이 있었다. 그런데 윤증은 어버이를 나타내려는 효심으로 반드시 처음 절조(節操)까지 수연(粹然)하여 하자(瑕疵)가 없는 데로 돌리려 하였으므로, 이것이 당인(黨人)들에게 구실을 대주어서 후래(後來)의 시끄러운 사단(事端)을 불러오게 되었으니 진실로 애석한 일이다. 그러나 윤증이 이미 송시열을 배반하였고 송시열은 사람을 물어뜯기를 좋아하니, 설사 윤증에게 이러한 말이 없었더라도 어찌 그가 독하게 쏘는 것을 면하였겠는가? 아! 송시열은 어찌 그리 심하게 하였는가?

 

2월 6일 병신

정거(停擧)된 이진안(李震顔)을 사관(史官)의 직위(職位)에서 파면시켰으니, 이는 영상(領相) 김수항(金壽恒)의 말을 따른 것이었다.                        【위에 보인다.】                      이에 앞서서 《현종실록(顯宗實錄)》을 개수(改修)할 때에, 이단하(李端夏)가 사람을 시켜 ‘윤선거(尹宣擧)가 강도(江都)에서 한 일의 시말(始末)’을 윤증(尹拯)에게 물었더니, 윤증이 이에 율곡(栗谷)이 입산(入山)하였다는 비방을 끌어다가 증거를 대었는데, 그 편지에 말하기를,
"이제 강도(江都)의 일로써 선인(先人)을 헐뜯는 이가 있으니 이는 곧 율곡(栗谷)의 이망색비(以妄塞悲) 상소를 가리켜 자신의 도리를 다했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그러나 율곡은 참으로 산에 들어갔던 과실(過失)이 있었지마는, 선인(先人)에게는 처음부터 죽어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였다. 참판(參判)                     이선(李選)이 그 편지를 간직하여 두었다가 이때에 와서 처음으로 내놓았다. 윤증을 좋지 않게 여기는 자들이 이를 가지고 선현을 무욕한 것이라고 여기어, 학유(學儒) 김성대(金盛大) 등을 사주(使嗾)하여 팔도(八道)에 통문(通文)을 돌리니 기호(畿湖)의 귀신 같은 무리들이 다투어 이에 부종(附從)하는 의논들을 말하였다. 옥천(沃川)의 금명하(琴鳴夏)와 보은(報恩)의 이명익(李命益) 등이 서로 잇달아 글을 발송하여 윤선거(尹宣擧)를 추욕(醜辱)하는 것이 김성대(金盛大)보다 더 심하였기에, 대교(待敎)                     김홍복(金洪福)·심권(沈權), 검열(檢閱)                     유상재(柳尙載) 등이 통문을 돌려 김성대를 정거시켰었다. 그러한 지 수일 지나서 이진안의 상소가 뒤를 잇달아 나왔는데, 승지(承旨)                     윤이도(尹以道) 등이 이를 품계(稟啓)하고 받들어 들이면서 변석(辨析)한 것이 또한 분명하였다. 임금의 비답이 처음에는 매우 엄하게 물리쳤으나, 김수항이 뒤따라 소대(召對)할 때 따라 들어와서 이 진안을 위하여 분해(分解)한 것이 매우 힘차서 마침내는 정거를 풀게 되었다. 위포(韋布) 간의 일을 조정에까지 밀어올려서 사관(史官)을 죄주라고 청하고 사문(私門)의 일이 조정에까지 올라갔으니 이는 과연 누구의 허물인가? 아! 통탄(痛歎)할 일이다.

 

2월 9일 기해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이 상소로 윤증(尹拯)을 신구(伸救)하였기에,                        【상소는 위에 보인다.】                      특히 그의 파직(罷職)을 명하였다. 옥당(玉堂)에서 청대(請對)하여 힘써 이를 간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삼가 상고해 보건대, 윤선거(尹宣擧)는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 등의 여러 사람과 더불어 도의(道義)를 서로 탁마(琢磨)하여 명성(名聲)과 덕망(德望)이 본래 무거웠기에 후학(後學)들이 존경하여 섬기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죽은 뒤 수십년이 되도록 사람들은 색다른 비평이 없었다. 그런데도 이 때에 와서 서울과 지방의 귀신같은 무리들이 윤증에게 원한을 풀려고 하여 그의 부형(父兄)을 욕(辱)하여 추잡하고 거슬리는 말이 차례가 없었으니, 김창협(金昌協)이 그들의 형편없음을 말한 것은 실로 공심(公心)에서 나온 것이었는데, 신엽(申曅)이 이를 들어 증거로 삼은 것은 그가 들은 것을 이야기하는 데에 지나지 아니하였다. 그런데 초사(初史)에서 이를 ‘요인 협지(拗引脅持)001)                                             ’로 지목(指目)한 것은 어찌 송시열의 쇄록(瑣錄)이 한 번 나옴이겠는가? 그런데 윤선거(尹宣擧)가 추한 욕을 듣게 된 것이 송시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김창협의 한마디 말은 실은 송시열에게 핍박된 것이기 때문인가? 여기서 또한 세상을 논(論)할 수 있겠다.

 

2월 15일 을사

집의(執義)                     이선부(李善溥)가 전일의 계청(啓請)을 거듭 아뢰고 부제학(副提學)                     최석정(崔錫鼎)을 파직(罷職)시킨 명을 도로 거두어들이라고 청하기를,
"세도(世道)가 크게 변하고 사람들의 마음이 나쁜 데 빠져서 치우치고 간사한 말이 아래에서 겹쳐나와 김성대(金盛大)와 이진안(李震顔)에 이르러 극도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그러기에 사관(四館)에서 이들에게 벌을 베풀었으며 후사(喉司)002)                                             에서 이를 계품하여 옳음과 그름이 바르게 되어 각기 그의 마땅함을 얻었던 것은 전하의 명성(明聖)003)                                             으로 정상(情狀)을 통촉(洞燭)하시어 좋아함과 미워함을 명백히 보이셨기 때문이었는데 문득 대신의 진달(陳達)로 인하여 갑자기 반한(反汗)004)                                             의 명령이 있었습니다. 최석정은 경악(經幄)의 장관(長官)으로서 깊이 광구(匡救)하려는 마음을 품고서 한 장의 상소를 올려서 자세한 곡절(曲折)을 대략 진달하였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뜻밖의 전교가 그를 의심하기를 너무 심히 하였고 그를 물리치기를 너무 지나치게 하였으니 이 무슨 거조(擧措)입니까? 아! 군주와 재상이 비록 지위가 높지마는 말을 발표하고 일을 행하는 데는 혹시라도 과실(過失)이 없을 수가 없는데 옳고 그름 찬성과 반대는 나라를 보유(保有)하는 아름다운 일입니다. 더구나 최석정의 상소에는 침핍(侵逼)하는 뜻을 볼 수가 없었는데 성명(聖明)께서 무슨 격뇌(激惱)가 있었는지는 알지 못하겠습니다만, 그에게 문득 높은 음성과 엄한 얼굴빛을 더하시어 반드시 조정에 있는 신하들로 하여금 감히 말을 내어 그릇된 것을 바로잡지 못하게 하고자 함이니, 이것이 어찌 평일(平日)에 여러 신하들이 성명께 바랬던 것이겠습니까?"
하니, 비답하였다.                        【위에 보인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6권 1장 B면【국편영인본】 39책 5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註 002]                        후사(喉司) : 승정원.[註 003]                        명성(明聖) : 지덕(智德)이 겸비함.[註 004]                        반한(反汗) : 앞서 내린 명을 취소함.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