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4일 임술
영의정(領議政) 김수항(金壽恒)이 면직(免職)되었다. 김수항은 6년 동안 권축(權軸)을 잡았으면서도 한가지도 건명(建明)한 것이 없이 오로지 당의(黨議)만을 일삼았다. 처음에는 옥사(獄事)를 다스린 것이 심각하였었고, 중간에는 또 김익훈(金益勳)에게 편을 들어서 조정의 의논이 분열되게 하였으며, 끝에는 또 사림(士林)들의 분쟁(紛爭)을 선창(先唱)하여 화(禍)를 퍼뜨린 것이 한정이 없었는데도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이제야 비로소 해면(解免)되었으니 또한 늦었다고 이르겠다. 그런데 초사(初史)를 수찬(修撰)한 자가 사류(士類)들을 원수로 보아서 문득 윤휴(尹鑴)와 허목(許穆)을 몰래 도와주었다는 이유로, 공공연히 무욕(誣辱)을 가하고는 김수항(金壽恒)을 지주(砥柱) 같은 중진으로 돌리려 하였으나, 어찌 백대(百代)의 공안(公眼)을 속이겠는가?
전 홍문관 부제학(弘文館副提學) 조지겸(趙持謙)이 졸(卒)하였다. 조지겸의 자(字)는 광보(光甫)이니 문효공(文孝公) 조익(趙翼)의 손자요, 판서(判書) 복양(復陽)의 아들이다. 곧은 절개와 맑은 지조는 동료들보다 월등하게 뛰어났으며 문학(文學)과 언론(言論)은 한 시대 유명한 선비들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갑인년008) 뒤에 오랫동안 빈척(擯斥)을 당하고 있다가 경신년009) 의 개기(改紀)로부터 청관 화직(淸官華職)을 역임(歷任)하였다. 그러나 훈척(勳戚)과 귀족(貴族)들이 권세를 마음대로 부려 옥사(獄事)를 다스림이 참람함이 많은 것을 눈으로 보았으며 김익훈(金益勳)의 무고(誣告)의 사건이 일어났는데도 송시열(宋時烈)과 김수항(金壽恒) 등이 기구(耆舊)의 사류(士流)로서 그 사건에게 꺾여 들여가서 편들게 되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조지겸은 보잘것없는 작은 후진(後進)이지마는 이에 능히 특립(特立)하여 흔들리지 않고서 청의(淸議)를 제창하니, 제몸을 스스로 사랑하는 선비들이 바람에 쓸리듯이 따라 왔었다. 돌아보건대 그의 세력이 저들을 대적할 수 없어서 자칫하면 억누르고 좌절(挫折)됨을 당하지마는 그가 공평 정대(公平正大)하게 일을 처리하여 흐르는 흙탕물이 하늘에까지 창일하지 못하게 한 것은 백대(百代)에 할 말이 있을 것이다. 조지겸은 또 치사(治事)에도 뛰어났다. 그가 국자감(國子監)을 관장하였을 적에는 교적(敎迪)을 부지런히 하고 폐정(弊政)을 바로잡았으니 반궁(泮宮)의 하인(下人)들이 지금까지 사향(祠享)하기를 마치 자기의 부모(父母)를 제사하듯 하여, 매양 그가 죽은 날만 되면 문득 그의 집에 제사를 도왔다. 그가 고성(高城)을 다스렸을 적에 어진 은혜가 사람들에게 들어갔기에 고을의 자제(子弟)들이 추모(追慕)하기를 그치지 않아서 생사당(生祠堂)을 짓고 이내 제사를 지내었다. 대개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이 분당(分黨)하게 된 것은 조지겸이 격탁 양청(激濁揚淸)을 주장하였었고 박세채(朴世采)와 윤증(尹拯)이 모두 그의 영수(領袖)가 된 데 근원하였다. 윤증은 또 송시열(宋時烈)과 틀렸기 때문에 당인(黨人)들이 그를 보기를 원수처럼 대하여 무릇 사류(士類)를 속이는 자들은 문득 윤증을 끌어다가 교묘하게 헐뜯어 욕하게 되었다. 그런데 마침 조지겸이 윤증과 더불어 증직(贈職)되거나 관직(官職)을 받았다. 그래서 기사년010) 이후에는 이를 빙자하여 사류(士類)의 청의(請議)라 하면서 몰래 뒷날의 계획을 삼았다. 그런데 초사(初史)를 수찬한 자가 윤증이 조지겸을 지휘(指揮)하였다고 말을 만들어서 공연히 사람을 모함하고서는 이를 비사(秘史)에 기재하게 되었으니 비록 국사(國史)는 엄비(嚴秘)된 기록이므로 사람들이 함부로 엿보지 못하는 것이지마는 홀로 천일(天日)과 귀신(鬼神)을 속일 수 없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는가? 아! 윤증이 진실로 절개를 지키고 동강(東岡)에서 죽었다면 한 세상의 화복(禍福)이 어찌 자기의 몸에 관여되었겠는가? 또 조지겸 한 무리는 시귀(蓍龜)처럼 영험(靈驗)스럽지 않았으니, 10년 뒤 궁위(宮闈)의 총폐(寵嬖)의 화(禍)가 장차 그렇게 될 것을 어찌 미리 알아서 분당하여 스스로 보전하려는 계획을 삼았겠는가? 다만 이것뿐 아니다. 무진년011) 에 김우항(金宇杭)을 죄주자는 바른 의논을 도리어 김우항과 서로 결탁하였다고 일컬었으며, 계사년012) 에 존호(尊號)에 대한 이론(異論)을 또한 심궁(深宮)의 도움이 있음을 믿었기 때문이라고 지어낸 말이 흉악하고 도리에 거슬려서 감히 말할 수 없는 처지에까지 무욕(誣辱)하게 되었다. 아! 김우항과 서로 결탁하고 심궁의 원조를 믿는 것은 당인(黨人)들의 재능인데도 그러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사류(士類)들을 도리어 오욕(汚辱)하기를 도모하였으니, 천하(天下)에 어찌 이러한 일이 있겠는가? 슬프고 슬픈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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