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9일 병인
인경궁(仁慶宮)의 옛터에 사인(士人) 두서너 집들이 들어와 살고 있으므로, 유사(攸司)로 하여금 그 집들을 헐어 없애고 그들에게 죄를 과(科)하였다.
9월 25일 임오
좌의정(左議政) 남구만(南九萬)이 정사(呈辭)한 것이 17번에 이르렀으나, 【청나라에서 온 자문(咨文)이 나라를 욕되게 하였기 때문이다.】 임금이 위유(慰諭)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남구만이 또 차자를 올리기를,
"사사(謝使)들이 오히려 그 사이에서 주선(周旋)하지 못했기 때문에 논핵(論劾)당하고 있으니 신은 이 일을 시작한 사람으로 더욱 죄를 도피할 수가 없습니다. 대간(臺諫)의 의논들이 모두 신에게 미치지 않는 것은 신이 스스로 처리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하니, 답하기를,
"전일(前日)의 일은 진실로 국가를 위하고 백성들의 폐해를 염려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다. 더구나 대간(臺諫)들의 계청(啓請)이 이미 거두어졌으니 더욱 편하기 어려울 단서가 없어졌다. 이 때의 난국(難局)을 생각하여 속히 나와서 정승의 일[道]을 의논하라."
하였다.
9월 30일 정해
봉조하(奉朝賀) 송시열(宋時烈)의 상소 【상소는 위에 보인다.】 로 인하여 하교(下敎)하기를,
"권순장(權順長) 등의 일은 그들이 반드시 죽어야 할 의리가 없다는 것으로 말한 이가 있다 하니, 무엇을 이른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승정원(承政院)에서 상고(詳考)하여 아뢰라."
하니, 승정원에서는 윤증(尹拯)이 사국(史局)에 보냈던 편지로서 주대(奏對)하였다. 【이 일은 위에 보인다.】 그런데 인물을 논평하는 도리는 마땅히 그의 마음을 관찰(觀察)하여서 마음에 다른 뜻이 없으면 말한 것이 비록 과실이 있더라도 그를 심하게 비난할 것은 못된다. 윤증의 편지 가운데에 말이 선정(先正)에 미쳤던 것은 진실로 그의 말 표현이 잘못된 것이고 그의 뜻이 선정을 헐뜯고 비방하는 데는 있지 않았었다. 그러니 유생(儒生)들이 같은 때에 일어나서 장소(章疏)를 올려서 자의(恣意)로 무욕(誣辱)한 것은 모두 송시열이 넌지시 말한 뜻에서 나온 것이다. 그런데도 송시열은 또한 장황(張皇)하게 상소하였으니, 이는 비록 유도(儒道)를 보위(保衛)한다고 스스로 핑계를 대지마는, 실지로는 윤증에게 원한을 풀려는 까닭이다. 홍수주(洪受疇)의 상소 가운데 장유(張維)의 상소를 끌어다 쓴 것은 비록 윤증의 한 말이 다른 뜻이 없었음을 밝히려고 한 것이지마는, 선정이 머리를 깎았다는 증거가 됨을 면하지 못하였으니 즉 그가 너무 망령되고 경솔한 잘못이 있다 하겠는데 그의 뜻을 구명(究明)한다면 어찌 선정을 무욕하기를 남인(南人)들과 같게 하였겠는가? 그런데 그를 삭직(削職)하여 내쫓은 것도 부족(不足)하여서 북쪽 변경(邊境)으로 멀리 귀양보내게 되었으니 처분(處分)이 또한 너무 지나침이 없다 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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