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신유
영의정 정태화, 행 판부사 정치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답하였다.
"계사의 내용에 대해서 내가 모르는 것이 아니다. 다만 신중을 기하려는 것이기 때문에 윤허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때 양사가 공주들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연계한 지 3개월이 지났는데, 상이 매번 불윤 비답을 내렸으므로, 사람들이 더욱 답답하게 여겼다.
헌부가 다시 논계하기를,
"충청 병사 이동현은 버림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갑자기 곤수의 직임에 제수되었으며 대간의 논계가 한창 일고 있는데 촉탁을 하려고 하였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재차 아뢰자 체차시키게 하였다. 세 번 아뢰고 정계하였다.
병조 판서 장선징(張善瀓)이 상소하여 사직하면서 이은상 등의 일을 사핵하는 것이 잘못이라고 공척하였는데, 영부사 이경석과 좌의정 허적이 모두 소장을 올려 자신들의 잘못이라고 하자 상이 위로하였다.
호군 이완이 병으로 사직하자 상이 위유하고 어의를 보내어 병을 간호하도록 하였다.
경기 수원(水原) 등지의 일곱 고을에 7월 17일 해일이 있었다.
안동 부사 이동명(李東溟)의 자급을 올려 주고 진주 영장(晋州營將) 권희(權曦)에게 말을 하사하였다. 이동명은 안동 부사로, 권희는 인동 부사(仁同府使)로 있을 때 모두가 진곡(賑穀)을 특별히 비축했다는 것으로 준직(準職)을 제수하라는 명이 있었는데, 이조가 이동명은 이미 준직을 역임했고 권희는 영장으로 제수되어 막 당상관으로 승진했다고 아뢰자, 상이 이동명은 자급을 올려 주고 권희에게는 숙마를 주게 하였다. 이동명은 집이 선산(善山)에 있는데 고을살이를 하면서 온갖 탐욕을 부렸다. 안동에서 선산까지의 거리는 이틀에 갈 수 있는 일정이고 뱃길도 통하였다. 그는 관아의 미곡과 포목, 심지어 간장독에 이르기까지 모든 물건들을 멋대로 실어갔으므로 고을의 백성들이 욕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가 비축한 진곡도 모두가 관아의 곡식을 가져간 것이었다. 아장(亞長)의 벼슬까지 역임했던 사람이 구차스럽게 승진하였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추하게 여겼다. 끝내는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명이 도로 거두어졌다.
8월 2일 임술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행 판부사 정치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에 계청한 것에 대해 다시 아뢰기를,
"이 일은 천리에 합당하고 인정에 순종하는 것임을 전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지체하시며 윤허하지 않으시니 실로 전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여러 신하들이 이미 똑같은 말로 아뢰고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시는 터에 또 무엇을 신중히 할 것이 있어서 이처럼 망설이고 계십니까. 삼가 바라건대 신하들의 소청을 쾌히 따르시어 신명과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고, 경평군(慶平君) 이륵(李肋)이 종친들을 거느리고 와서 아뢰었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헌부가 아뢰기를,
"지금 경상 감사의 장계에 따라 진휼할 곡식을 많이 비축한 영천 군수(永川郡守) 유정(柳頲)에게 가선(嘉善)의 자계를 올려주고 안동 부사 이동명에게도 가자하라고 하셨습니다. 2품의 품계는 바로 덕이 있는 사람에게 주는 것으로서 결코 곡물을 많이 비축했다 하여 함부로 줄 수 없는 것입니다. 이동명이 비축한 곡물의 수량이 작은 고을에 비교하면 약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안동은 큰 고을이므로 잘 마련하여 많은 비축을 했다고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을 가지고 품계를 올려주는 은전을 시행할 수 있겠습니까. 이들의 가자를 모두 환수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번 아뢰자 따랐다.
전라도 부안현에 해일이 있었다.
강화부에 해일이 있었다.
황해도 신계(新溪)·평산(平山)·금천(金川)·토산(兎山) 등지에 우역(牛疫)이 크게 번졌다. 그리고 도내 각 고을에 7월 21일 큰 비바람이 불어 온갖 곡식이 해를 입었고, 서흥부(瑞興府)에서는 불어난 물에 익사한 사람이 4명이었다.
8월 3일 계해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행 판부사 정치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성균관이 경서(經書)를 교정하는 일 때문에 새로 제수한 함경 도사(咸鏡都事) 홍기(洪覩)를 체차시켜 그로 하여금 교정의 직무를 수행하게 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충청도에 해일이 있었고, 또 홍수가 졌다.
8월 4일 갑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는데, 약방이 들어가 진찰하였다. 이때 상이 다리에 마비 증상이 있어 걷기에 불편했는데, 도제조 허적이 여러 위관 및 창성도정(昌城都正) 이필(李佖), 성후룡(成後龍) 등을 데리고 들어가 진찰하였다. 상이 침을 맞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자의 입학 날짜가 멀지 않았고 예행 연습도 해야 하니 박사(博士)를 먼저 차출해야겠습니다. 대제학이 지관사(知館事)를 예겸하기 때문에 으레 박사가 되어야 합니다. 찬선(贊善)의 직임을 맡은 사람도 입학할 때 참여해야 하고 부(傅)도 참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에게 하유하시고 대제학을 먼저 차출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제학을 차출하고, 정원이 문장을 만들어 두 신하에게 하유하도록 하라."
하였다. 상이 세자가 학질을 앓고난 뒤 아직 원기가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학을 9월로 물리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9월은 날짜가 너무 멀 뿐더러 날씨가 매우 추울 것입니다. 신이 예관들과 상의해 보겠습니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재상을 뽑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신들은 소견이 고루하여 국사에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그리고 입학할 때 대신이 모시고 가야 하니 제때에 재상을 뽑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영상의 의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이 아뢰기를,
"요즈음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 삼사가 연계하고 대신이 정청하였으나 늘 윤허하지 않는 비답을 내리시는데, 이것은 매우 온당치 않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영의정 정태화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전에 계청한 것을 다시 아뢰고, 경평군 이륵 등이 종친들을 거느리고 계청을 하고, 대사간 이익 등이 합사하여 재차 아뢰고, 부응교 남이성 등이 열세 번째 차자를 올려 논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상이 편찮아 금년 가을 여러 능침을 전알(展謁)하는 일을 우선 정지하도록 하였다.
예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을 보내어 지릉(智陵)을 봉심하게 하였다.
8월 5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영중추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등이 백관을 거느리고 아뢰기를,
"지금 논쟁하고 있는 일은 백세토록 변하지 않는 떳떳한 도리로서 정당한 의리이고 중대한 인륜임을 전후 계사에 이미 갖추어 아뢰었습니다. 어제 내리신 비답에 또 윤허하지 않는다고 분부하셨으므로 신들은 안타까운 심정 금할 수 없습니다. 당연한 의리이고 모두 동의하는 공론임을 전하께서도 이미 통촉하고 계신데 아직도 신중히 할 것을 주장하시면서 즉시 윤허하시지 않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전하께서 신중히 여기시는 것이, 예전에 있었던 일이므로 함부로 의논할 수 없는 때문이라 하신다면, 능침을 봉축하고 정자각을 중건하신 것도 전대에 거행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부묘하는 일에 대해서만 이처럼 어렵게 여기십니까. 조종들에 관계되는 일이라서 추급하여 의논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신다면, 《실록(實錄)》을 상고해 보더라도 당시 부묘하지 않았던 것이 조종들의 본의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능침의 제도와 부묘의 의식은 본시 달리 할 수 없는 것으로써 순서대로 거행해야 할 예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직도 시비와 가부를 결정지을 수 없는 일처럼 여기시니, 이에 대해서 신들은 의심스럽습니다. 바라건대, 망설이지 마시고 부묘하는 의식을 속히 거행하여 신명과 사람들의 기대에 보답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신중을 기하는 나의 뜻이 끝내 옳다고 자신할 수 없는 것이고 경들의 소청이 이와 같으니, 나의 주장을 버리고 애써 따르겠다. 아뢴 대로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경평군 이륵 등이 올린 계사에 내린 비답도 이러하였다. 대사간 이익 등이 합사하여 계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조정에 내린 비답에 이미 유시하였다."
하였다. 예문관 봉교 조사석(趙師錫) 등도 상차하여 부묘의 예를 거행할 것을 청하였고, 감찰 한공필(韓公佖) 등이 올린 상소와 원양도(原襄道)의 유생 이모(李模) 등이 올린 상소에 대해 내린 비답도 똑같았다. 이때 정청(廷請)한 지 여러 날이 지났으므로 여러 사람들의 마음이 답답해 하였는데, 윤허한다는 분부가 한 번 내려지자 여러 관료들이 기뻐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사관을 보내어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에게 세자가 입학할 무렵에 올라올 것을 특별히 유시하였다.
영의정 정태화를 부묘 도감(祔廟都監) 도제조로, 행 호조 판서 김좌명, 이조 판서 박장원, 형조 판서 정지화, 공조 판서 민정중을 제조로, 사인 이민서(李敏叙)·남이성을 도청(都廳)으로 삼았다.
조복양을 대제학으로, 남이성을 사인으로 삼고, 유비연(柳斐然)을 자급을 뛰어넘어 통제사에 제수하고, 윤천뢰(尹天賚)를 충청 병사로 삼았다. 대제학의 권점(圈點)에 정두경(鄭斗卿)이 최하점을 받았다. 정두경의 문장은 한 시대의 제일이었는데 하점을 받았으므로 식자들이 탄식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 호조 판서 김좌명을 보내어 정릉(靖陵) 정자각의 공사를 시작하게 하였다.
8월 6일 병인
양사가 공주들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쟁집하여 각자가 짓도록 하고 또 정해진 규례에 따라 짓게 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 이르러 각자에게 짓게 하는 한 가지 조항에 대해서는 정계하였다. 그리고 이은상의 일을 사핵하게 한 것에 대해 연계하였는데, 상이 매번 윤허하지 않는다는 비답을 내렸다.
예방 승지 김우형(金宇亨)이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논의에 대해서 이미 윤허하셨습니다. 옥당이 올린 차자를 보건대 ‘고 신 권근(權近)이 지은 흥천사(興天寺)의 기문(記文)을 상고해 보니 「홍무(洪武) 병자년 8월 무술일에 우리 소군(小君) 강씨(康氏)가 승하하였다.」라고 씌여 있다.’ 하였는데, 사관이 지금 베껴 온 《실록(實錄)》에 병자년 8월 초하루가 무자일이라고 하였으니 갑자의 순위로 헤아려 보면 병자년 8월의 무술일은 11일이 됩니다. 그렇다면 정릉의 기신(忌辰)이 멀지 않습니다. 예관으로 하여금 자세히 상고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원의 계사에 대해 윤허하셨습니다.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을 이미 윤허하셨으니 본릉의 기신 및 5명일(五名日)의 제향을 차례로 거행해야 합니다. 당초 사관이 등서해 온 《실록》에 ‘병자년 8월 무자 삭, 무술일에 현비(顯妃)가 승하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그 해 8월 초하루가 무자일이었다면 11일이 무술일인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듯합니다. 이밖에는 본조에 증거해 볼 만한 문서가 없고 정원이 아뢴 내용도 의견이 없지 않습니다.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정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대신들이 모두 의논드리기를,
"《실록》에 기재된 것이 이처럼 명백합니다."
하였다. 이리하여 8월 11일을 정릉의 기신으로 정하였다.
8월 7일 정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다. 침을 맞으려고 했는데 다리의 환부가 조금 나아졌으므로 그만두었다. 약방 도제조 허적이 뵙기를 청해 입시하여 아뢰기를,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을 계청한 것에 대해 오랫동안 윤허하시지 않았으므로 아랫사람들이 몹시 괴로워했는데, 마침내 ‘나의 주장을 버리고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겠다.’는 분부를 내리셨습니다. 이에 온 조정의 관료들이 우레와 같은 환성을 울렸으니 여기에서 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형조에 옥송(獄訟)이 많이 밀렸는데 판서 오정일(吳挺一)은 병으로 직무를 수행하기 어렵습니다. 그리고 도승지 남용익(南龍翼)은 낙마하여 중상을 입었습니다."
하니, 상이 모두 체직시키도록 하였다.
하번(下番)인 검열 이윤조(李潤朝)가 부친이 병이 있다고 핑계대며 소장을 올리고 나갔는데, 정원이 추고하기를 청하였다. 전례에 사관은 제멋대로 나갈 수 없는 것이었지만, 이때 이윤조의 아비 이은상의 이름이 대간의 논계에 올라 있는데 이윤조가 사관으로서 출근을 하자 사람들이 말을 하였기 때문에, 이윤조가 출사하지 않은 것이다.
8월 8일 무진
부묘 도감이 아뢰기를,
"이번 부묘할 때 신주(神主)를 만들고 휘호를 올리는 등의 절목을 미리 강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속히 예조로 하여금 취품하여 조처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훈련 도감이 아뢰기를,
"도감의 천총 윤천뢰가 새로 충청 병사에 제수되어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본도의 훈련 별대를 단속하는 일을 이 사람에게 전임시켜 부대를 편성하게 하는 한편, 또 조정의 본의를 유시하여 자원 응모하는 길을 트게 할 것을 분부하여 보내소서."
하니, 따랐다.
행 대사헌 정지화가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공주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서 하문하였을 때 법에 의거하여 쟁집하지 못했으므로 지금 대간의 논계에 동참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집의 신명규 등이, 경상 좌병사 민응건(閔應騫)이 멋대로 탐학한 짓을 하여 사람들이 도적놈이라고 말한다는 것을 논계하며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세 번째 아뢰자 단지 체차시키게 하였다. 민응건은 사판(仕版)에 다시 낄 수 없는 인물이었는데 곤수의 직임에 다시 제수하였으니 전관(銓官)이 사람을 가리지 못하는 것이 이러하였다.
8월 9일 기사
강백년을 도승지로, 윤집을 대사헌으로, 서필원을 형조 판서로, 이지원(李枝遠)을 북병사(北兵使)로 삼았다. 상이 애초에 형조 판서를 가망(加望)하라고 하자, 이비(吏批)가 조복양을 가망하였다. 이에 상이 이르기를,
"가망하라고 했더니 단지 조복양 한 사람을 가망하여 책임을 때우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해당 당상과 낭청을 무겁게 추고하라."
하고, 의망한 단자를 도로 내려보냈다. 이조가 이완·서필원을 가망하자, 상이 서필원에게 제수하였다. 이때 서필원이 중한 논박을 막 받았으므로 전조가 애초에 의망에 넣지 않았던 것인데 상의 뜻이 서필원에게 있었으므로 특별히 추고, 가망하게 한 것이다.
지평 이후징(李厚徵)이 대사헌 윤집과 상피 관계라는 이유로 인피하자, 체직시켰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의 기신제에 대해서 정원이 아뢴 대로 대신들과 의논하여 8월 11일로 정했습니다. 신들이 《실록》의 초고를 다시 상고해 보았더니 ‘병자034) 추 팔월 무자’라고 기록된 아래에 ‘삭(朔)’ 자가 씌어 있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래 기록한 9월 병진일과 크게 틀려 여러 사람들의 의논이 있게 되었습니다. 즉시 관상감으로 하여금 날짜를 소급하여 계산해 보게 하였더니 그 해 8월 초하루는 바로 병술일이었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무술일의 기신은 13일이 틀림없습니다. 그리고 《실록》에 경인년035) 8월 을미일에 ‘삭’ 자를 썼고 그 아래 갑진일에 ‘기신제를 파하고 정조(停朝)하였다.’ 하였고, 정미일에 ‘정(正) 윤흥제(尹興濟)를 흥천사에 보내어 기신의 재를 올리게 하였다.’ 하였습니다. 을미일에서 정미일까지가 13일이 되니, 더욱 확실한 증거가 될 듯합니다. 오랫동안 지내지 않았던 제사이므로 본조에는 고증할 것이 없습니다. 지금 관상감으로 하여금 날짜를 다시 계산해 보게 하였으니, 내일 향축(香祝)을 받드는 일을 우선 정지하고 완전히 결정된 뒤에 보내게 하소서. 그러나 이 일은 중대한 것이니 속히 대신들에게 의논하여 결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자세히 고증해 보지 않고 무술일을 11일이라고 한 것도 이미 잘못이었는데, 정원이 잘못된 것을 그대로 따르면서 다시 고증해 보지 않고 ‘삭(朔)’ 자를 덧붙였는가 하면, 해조의 대신도 자세히 살피지 아니하여 막중한 사전(祀典)을 잘못 거행할 뻔하였으므로, 듣는 이들이 한심스럽게 여겼다. 부교리 김석주, 수찬 홍주국, 부수찬 김만중, 해방 승지 김우형, 예조 참의 이준구(李俊耉) 등이 이 문제로 소를 올리고 대죄하였다. 예조가 대신들에게 수의(收議)하여 8월 13일을 신덕 왕후의 기신으로 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앞으로 부묘할 때 휘호를 올리는 절목에 대해서는 신묘년036) 에 부묘할 때 인열 왕후(仁烈王后)에게 휘호를 소급하여 올린 전례가 있으므로 그 예에 따라 거행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신주를 만드는 절목에 대해서는 신들이 《오례의(五禮儀)》를 가져다 입주의(立主儀)를 상고해 보건대 ‘우제(虞祭) 때에는 산릉에서 입주하고 연제(練祭) 때에는 혼전(魂殿)에서 제주(題主)한다.’고 하였는데, 이것은 모두가 초상과 관계되는 절목으로서 고증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번에 신덕 왕후를 부묘하는 일은 수백 년 뒤에 소급하여 거행하는 것이므로 신주를 만드는 처소를 미리 결정하기가 실로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의논은 산릉에 가서 시행해야 한다고 하는데, 사체가 중대할 뿐만 아니라 신들이 평소 예문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므로 마음대로 결단할 수 없습니다. 대신 및 유신들에게 의논하여 속히 강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세 번째 정사(呈辭)한 뒤 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대제학 조복양이 사직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1일 신미
밤 1경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삼았다.
집의 신명규, 장령 경최 등이, 전 통제사 구문치(具文治)가 태연히 소를 올린 죄를 논핵하며 파직시킬 것을 청했다. 여러 번 아뢰었는데,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담당 승지가 당장 배척하지 아니한 잘못을 논핵하며 추고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또 선산 부사(善山府使)에 새로 제수된 채지연(蔡之沇)은 극심한 직무를 결단하여 처리하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은 데다가 그의 집이 매우 가까운 곳에 있다는 것을 논계하며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익, 사간 조성보, 정언 김덕원(金德遠) 등이, 내관이 자기 식솔을 들여보내주지 아니한 선인문(宣仁門)의 수졸(守卒)을 잡아다가 매를 때린 것을 논핵하며 나문 정죄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고 하였다. 10여 차례를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전교하기를,
"지난번 기쁜 경사로 인하여 여러 부마들에게 가자해 준 일이 있었는데 세상을 떠난 사람들에게는 아직 해주지 못하였다. 지난 날을 회상하건대 매우 슬픈 생각이 드니, 해조로 하여금 추증하게 하여 나의 마음을 위로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에 앞서 자전(慈殿)이 온천에 거둥했을 적에 여러 부마들에게 모두 가자하라는 분부가 있었는데, 인평위(寅平尉) 정제현(鄭齊賢)만 참여하지 못했다. 이때 이르러 한 자계를 추가하였다.
8월 13일 계유
관원을 신덕 왕후의 능소에 보내어 기신제를 거행하게 하였다. 이때 신덕 왕후의 제사를 빠뜨린 지 2백여 년이었는데 하루 아침에 비로소 거행하자 사람들이 모두 기뻐하며 눈물을 흘렸다.
8월 14일 갑술
대사간 이익, 사간 조성보 등이, 회령 부사(會寧府使) 이익형(李益亨)은 경력이 많지 않은 데다가 기록할 만한 공로도 없으므로 발탁하여 제수하기에 합당치 않다는 것을 논핵하여 개정할 것을 청했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시강원이 아뢰기를,
"세자가 문묘에 작헌례를 올릴 때 찬인(贊引)은 으레 필선으로 삼는다는 것이 《오례의》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을유년·임진년의 본원 일기 및 성균관 홀기(笏記)에도 모두 필선을 찬인으로 삼은 것으로 되어 있는데 이번에 예조가 작성한 의주에는 상례를 찬인으로 삼았습니다. 이는 증거가 없는 것이고 또한 전례에 어긋나는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부표(付標)하여 들이게 해야겠으나, 형세로 보아 겨를이 없으니 우선 《오례의》에 따라 거행하고 나중에 의주를 고쳐 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을유년·임진년의 전례에 따라 하도록 하라."
하였다.
이조 판서 이경억이 상소하여 병의 정상을 아뢰고 비국에 내려 처치하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비국에 내렸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잇따라 대간의 논핵을 받았다는 이유로 세 번이나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평양에 지진이 있었다. 동쪽에서 일어나 서쪽에서 멈추었는데 소리가 천둥치듯 하여 가옥이 모두 흔들렸다. 순안(順安)·영유(永柔)·중화(中和)·숙천(肅川)·강서(江西)·은산(殷山) 등지에도 같은 날 지진이 있었다.
평안도에 7월 27일 초경에 말[斗]만한 큰 별이 동북쪽에서 떨어져 서남쪽으로 흘러 갔다. 모양은 횃불 같았고 번쩍이는 빛이 땅을 비추어 밝은 대낮과 같았는데, 한참 후에야 사라졌다. 잇따라 소리가 났는데, 큰 북을 치는 듯한 소리가 세 번 났고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한 번 났다.
전라도 옥구(沃溝)·임피(臨陂)·영광(靈光)·장흥(長興)·함평(咸平)·영암(靈巖)·순천(順天)·강진(康津)·해남(海南)·나주(羅州) 등지에 해일이 있었다.
8월 15일 을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입진하였다.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인견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문안드리고 아뢰기를,
"상께서 다리가 당기는 증세는 감소된 듯하지만 다른 증세가 오래도록 낫지 않고 있습니다. 의관들이 입진한 뒤에야 침을 놓을 것인지 뜸을 뜰 것인지 의논하여 결정할 수 있다고 하기에 감히 입진할 것을 청했습니다. 응어리의 환부는 전보다 덜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덜한 듯하다."
하고, 의관들에게 진맥하도록 하니, 모두 말하기를,
"맥박이 전보다 조금 나아진 듯합니다."
하고, 우선 삼리혈(三里穴)의 절골 부위에 뜸을 뜨기로 하였다. 이어 대신과 비국의 재신(宰臣)들을 불러 들였다. 영상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세자가 입학할 때 《소학》의 제사를 진강하라고 하교하셨습니다. 조종조 때에도 《소학》을 강론한 전례가 있기에 시행하는 것이 무방하다고 의논드렸습니다. 그리고 조복양·박장원의 의논도 신의 의견과 같았으나 민정중은 《대학》을 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의논드렸는데 상께서 신들의 의논을 따르셨습니다. 그러나 지금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대학》을 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니, 신들이 어떻게 자기 의견만을 옳다고 고집하겠습니까. 매우 중대한 일이므로 다시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종(文宗)께서 8세 때 입학하셨는데 역시 《소학》을 강하였다. 지금 세자는 9세이니 8세와 다를 것이 무엇이 있겠는가. 조종조 때 이미 행한 규례가 있어서 나는 그대로 시행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12세 때 입학하였으므로 《대학》을 강했던 것이다. 세자는 지금 《소학》을 배우고 있는데, 현재 배우고 있는 것을 강하지 않고 기어이 《대학》을 강할 필요가 있겠는가. 나는 그렇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모르겠다. 의논한 대로 하라."
하였다. 상이 세자의 원기가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입학을 그믐날로 미루려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외부의 의논이 그믐날에 행사하는 것을 꺼림칙하게 여기는데, 그것은 달이 끝나는 날이라서 기피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국가의 행사는 여염집의 일과 달라 먼저 상의 명운(命運)이 좋은 날을 점쳐 택일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찌 그럴 필요가 있겠는가. 단지 세자에게 좋은 날을 가리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세자가 출궁할 때 가까운 선인문(宣仁門)으로 나가게 하라."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환궁할 때에는 도성 백성들이 우러러 볼 수 있도록 큰길로 환궁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또 아뢰기를,
"이조 판서 이경억의 사직소를 비국에 내리셨습니다. 이경억은 본디 병이 많은 사람으로서 근래 약간 차도가 있었는데 지난번에 동기간의 상을 당하여 전에 앓던 병이 다시 도졌습니다. 도목 대정을 해야 하므로 부득이 출사했지만 직무를 수행할 수 없는 형편이니, 지금 개차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완의 병이 위중한 것을 아뢰며, 포도 대장의 직임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이에 따르고 이완에게 약물을 지급하도록 하였다. 또 삼공의 자리가 빈 것에 대해 말하며 복상(卜相)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부묘 도감이 취품하여 결정해야 할 일이 있는데 당상이 정릉(靖陵)을 수리하는 일로 나가 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뢰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휘호를 올리고 나면 옥책문(玉冊文)을 지어야 하는데 옥책문을 지은 뒤에야 공사 규모의 대소를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엇을 휘호라고 하는가?"
하자, 정태화가 아뢰기를,
"태조 대왕으로 말할 것 같으면 태조는 묘호(廟號)이고 그 위의 네 글자가 휘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신덕의 위에 있었던 네 글자에 대해서는 상고해 낼 수 없겠는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나온 데가 없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신덕이란 내용으로 소급하여 시책(諡冊)을 지어 올려야 한다.’고 합니다. 신의 생각에는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그 당시 휘호를 올릴 때 이미 시책이 있었을 것이니, 지금 추급하여 시책문을 짓는 것은 난처합니다."
하자, 상이 그러하다고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예조가 날짜를 계상하여 무자일이 초하루가 아닌 것을 알게 되었는데, 이는 《실록》에 잘못 기록된 것인가, 사관이 등서할 때 잘못 쓴 것인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그것에 대해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자일이 초하루가 아닌 것은 분명합니다."
하였다. 허적이 어영 대장 이여발(李汝發)을 비국 당상에 차임하기를 청했는데,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대관이 민응건의 일을 논계할 때 도적놈이란 말을 썼는데, 아무리 무신(武臣)일지라도 대간이 계를 올리면서 그런 말을 사용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웃었다. 훈련 대장 유혁연이, 도감의 군사들 중 늙어서 병사 노릇을 할 수 없는 자들을 내보낼 것을 청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보고서 윤허하였다. 허적이 윤비경(尹飛卿)이 병조 참의로 있을 때 간리(奸吏)의 속임수에 빠져 본읍에 공문을 보내어 낙강한 유생들을 포보(砲保)에서 빼주게 한 것에 대해서 규칙을 위반하고 체모를 실추시켰다 하며 죄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먼저 파직시키고 나중에 추고하라 하고, 간리에 대해서는 형조로 하여금 엄중한 형벌로 다스리게 하였다.
경평군 이륵이 영동(嶺東)의 산수를 구경하고 싶어 고성(高城)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고 올 것을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옛 왕자들 중 경 한 사람만이 생존해 있다. 지금 경의 나이가 70세이고 가을 날씨가 벌써 차가워졌으니, 이때 목욕을 하는 것은 기력만 더 손상시킬 것이다. 사관을 보내어 경에게 타이르니 나의 뜻을 헤아려 떠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이륵은 선조의 왕자로서 정신병이 있는 데다가 휴가를 받아 외지로 다니면서 폐를 끼치는 일이 많았는데, 상이 이러한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가 가는 것을 말렸던 것이다. 이륵이 다시 상소하여 가게 해 줄 것을 청하자 상이 할 수 없어 윤허하고 휴가에 쓸 말을 지급하였다.
8월 16일 병자
조복양을 이조 판서로, 이경억을 우참찬으로, 서필원을 총융사로, 홍억(洪億)을 지평으로, 이여발(李汝發)을 우포도 대장으로 삼았다.
집의 신명규, 장령 구음(具崟)·경최 등이, 민응건의 일을 논핵한 계사에서 도적놈이란 말을 사용하여서 대신에게 논척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모두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이 사직소를 올렸는데, 상이 답하였다.
"사송(詞訟)을 담당한 중요한 자리가 빈 지 이미 오래되었다. 경이 사면하려고 해도 되지 않을 것이니, 사직하지 말라."
8월 17일 정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호조가 아뢰기를,
"공주 저택의 칸수를 정해진 제도에 따라 지어줄 것을 양사가 현재 논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집터에 대해서는 전에 상께서 ‘해조가 매입하여 주도록 하라.’고 분부를 하였습니다. 때문에 담당 중관(中官)이 본조의 색리를 불러 말하기를 ‘연석(筵席)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대로 거행하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지금 값을 지급하여 터를 사도록 해야겠는데, 터의 칸수에 대해서 많고 적은 것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집터가 1천 5, 6백 칸이 될지라도 궁가가 말한대로 사서 주어야 합니까? 앞으로 또 궁가들에게 집터를 사서 주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니, 일정한 제도를 만들어 훗날 준행할 근거를 마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이 초기(草記)에 기록된 숫자로 정식을 삼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좌참찬 송준길이 병으로 소명에 나오지 못한다고 소를 올려 논열하고 아울러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답하기를,
"경의 상소 내용이 처음 약속한 말과 틀리는데 어쩌면 이럴 수 있는가. 동궁의 입학할 날이 멀지 않았다. 경이 찬선·좨주의 직임을 겸하고 있으므로 참여하지 않을 수 없는데 지금 냉정히 거절하며 오지 않는다면 어찌하란 말인가. 아, 경의 마음을 내가 어찌 모를 것이며 내 또한 어찌 경이 근력을 다하여 직무를 수행하기를 바라는 것이겠는가. 가을 날씨가 선선하고 시원한 바람도 불고 있으니, 경은 나의 뜻을 헤아려 속히 길을 떠나, 나와 동궁의 기대를 저버리지 말라."
하고, 이어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했으나, 송준길은 끝내 오지 않았다.
병조 판서 홍중보가 네 번째 소를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8월 18일 무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정릉(貞陵)의 수호군 40명을 추가 배정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정릉의 수호군 30명을 떼어 줄 것을 전에 이미 계하하여 병조가 거행하였습니다. 지금 부묘하는 예를 거행하기로 이미 결정하였으니, 불천지위(不遷之位)의 예에 따라 능침의 수호군 40명을 추가 배정하여 70명의 정원 수를 채워야겠습니다. 그러나 이 일은 처음 시행하는 것이니, 병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병조가 회계하기를,
"부족한 40명에 대해서 반절은 가까운 고을의 보병을 옮겨 배정하고, 반절은 본도로 하여금 부근의 각 고을에서 배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헌 윤집, 집의 신명규, 장령 경최·구음 등이 아뢰기를,
"저택의 칸수에 대해서는 본시 정해진 제도가 있으므로 공주의 집이더라도 결코 제도를 어길 수 없는 것입니다. 반드시 옛법을 준수하여 조종들의 훌륭한 뜻을 따르고 후대에 교훈을 남겨야 하는 것입니다. 신들이 당초 거행하도록 한 조항을 보건대, 상께서 하교하신 말씀이 실로 합당한 것으로서 그대로 시행하면 사치스럽거나 제도에 지나치는 잘못이 없고 조종들이 법을 만든 뜻에도 부합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전날에 하교하신 것을 버려 두고 절감하시려는 의도가 아예 없으십니까.
그리고 신들이 호조의 계사를 보건대 ‘대지의 칸수가 1천 5, 6백 칸이 되더라도 궁가가 말한 대로 모두 사서 주어야 합니까.’ 하였는데, 상께서 ‘초기에 기록한 숫자대로 정식을 삼으라.’ 하셨으니, 신들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것으로 미루어 본다면 단지 제도에 벗어날 뿐만 아니라 집을 지을 칸수도 헤아릴 수 없이 많을 것입니다. 법전에는 집터에 대해서도 정해놓은 제도가 있는데, 어느 궁가가 이런 말을 하였는지 모르겠습니다만 매우 한심스럽습니다. 칸수를 제도에 벗어나게 할 수 없는 것이라면 집터를 어떻게 그들 멋대로 많이 차지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여러 공주의 저택의 칸수와 집터를 한결같이 법전을 따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오늘날 집을 옮겨 짓게 한 것은 나의 명령이었다. ‘어느 궁가가 이런 말을 하였는가.’라고 한 것은 매우 근거없는 말이다."
하였다. 이때 양사가 날마다 공주의 집짓는 일에 대해서 쟁집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고, 또 초기대로 정식을 삼으라는 하교가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매우 놀라와하였다. 헌부가 계사에 집터의 조항을 첨가하여 쟁논하였는데, 상이 또 근거없다는 말로 거절하였다.
정언 김덕원(金德遠)이 상소하여, 노산(魯山)·연산(燕山)·광해(光海) 세 폐군(廢君)에 대해서 입후하고, 성삼문(成三問) 등 6신을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할 것을 청했는데, 소를 들인 지 몇 달이 지났으나 상이 비답을 내리지 않다가, 그를 특명으로 체직시켰다.
사신은 논한다. 노산군은 우리 임금의 적자로서 죄없이 자리에서 물러났으므로 충신 열사들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입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연산의 포악한 짓은 걸(桀)과 주(紂)보다 더하였고, 광해의 죄는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노산과 더불어 입후할 것을 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삼문 등은 성사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하였으니, 그 충절이 지극하고 뜻이 비장하다. 중국의 고사에 따라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면 충분한 것이다.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는 문제는 본조에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김덕원이 함부로 말하였으니,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41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가족-가족(家族) / 왕실-종친(宗親) / 윤리-강상(綱常)
사신은 논한다. 노산군은 우리 임금의 적자로서 죄없이 자리에서 물러났으므로 충신 열사들이 지금도 눈물을 흘리고 있으니, 입후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는 것이 실로 옳은 것이다. 그러나 연산의 포악한 짓은 걸(桀)과 주(紂)보다 더하였고, 광해의 죄는 윤기(倫紀)에 관계되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노산과 더불어 입후할 것을 청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성삼문 등은 성사시키지 못할 것을 알면서도 하였으니, 그 충절이 지극하고 뜻이 비장하다. 중국의 고사에 따라 그들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면 충분한 것이다. 정표하고 사당을 세우게 하는 문제는 본조에서 거론할 수 없는 것인데 김덕원이 함부로 말하였으니, 식자들이 그르다고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 좌참찬 송준길이 병을 핑계대고 모두 오지 않았다.
8월 19일 기묘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대사헌 윤집, 집의 신명규, 장령 경최·구음 등이 피혐하며 아뢰기를,
"신들이 어제 조방(朝房)에 모두 모여 이전에 아뢰던 일에 대해서 상의할 때 문득 해조가 품계한 것을 보았는데, ‘대지가 1천 5, 6백 칸이 되더라도 궁가가 말한 대로 모두 사서 주어야 합니까.’ 하였습니다. 신들은 이것을 보고 놀라면서 생각하기를 ‘이것은 필시 궁가가 말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궁가들이 말을 하지 않았다면 해조가 어떻게 이런 품계를 하였겠는가.’ 하였습니다. 현재 칸수가 제도에 벗어나는 것에 대해서 양사가 4개월 동안 쟁집하고 있으나 아직 윤허를 받지 못했는데 또 이처럼 많은 대지를 차지하게 한다면,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들 놀라지 않겠습니까. 이에 몇 마디 말을 대략 첨가하여 경계하는 뜻을 표시하고 아울러 법대로 제도를 정할 것을 청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신들의 말을 들어주시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집을 옮겨 짓게 한 것은 나의 명령이었는데 근거없는 말을 하였다.’고 하교하셨습니다. 신들은 매우 황공스럽고 의심스러울 뿐더러 석연치 않은 점이 있습니다. 신들이 언제 집을 옮겨 짓게 한 일이 상께서 하교하신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까. 그러나 대지의 칸수에 있어서는 ‘한결같이 궁가가 말한 대로 하라’고 하신 말로 보건대 그 말은 궁가들이 한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신들이 어떻게 그 말이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이고 궁가들이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까. 설사 대지의 한계 문제가 전하께서 명령하신 것이라 하더라도 이처럼 지나친 것이라면, 언관의 직책을 맡고 있으면서 입 다물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들은 조금이나마 법을 받들어 시행하려고 한 것에 불과할 뿐인데,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갑자기 미안스러운 분부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신들이 어떻게 태연히 자리에 그대로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어제 내린 계사의 비답에 무슨 분명히 알 수 없는 것이 있단 말인가. 집을 옮겨 짓는 것은 시종 모두가 관가의 호령이었고, 해조의 초기에서 궁가의 말이라고 한 것은 진실이 아닌 것이다. 어제의 논계에 경들이 그 말을 믿고 있으므로 대략 말하여 의심을 풀어주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진실이 아닌 말을 믿고 있으니, 나는 몹시 부끄럽다. 다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간원이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사간 조성보가 아뢰기를,
"간사스럽고 교활한 무리들이 남의 토지와 노비를 탈취하려고 할 때에는 반드시 내수사를 빙자하여 그들의 계책을 부려, 먼 지방의 백성들로 하여금 생업을 잃게 하고 원한을 품게 하니, 이것이야말로 매우 가증스러운 것입니다. 고(故) 청원위(淸原尉) 한경록(韓景祿)의 후손인 한석중(韓碩重)이란 자가 전주 옥야현(沃野縣) 회룡평(回龍坪)의 밭 석달 갈이와 논 2백 섬지기를 청원위의 사패지(賜牌地)라고 하여 전주의 백성들과 송사를 하였습니다. 그의 사패 문서는 바로 내수사가 작성한 것으로서 문정 왕후(文定王后)의 유교(遺敎)에 의해 절수(折受)한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절수 문권에 자호(字號)·사표(四標)·결수(結數)도 쓰지 않았고 그저 옥야면 회룡평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계묘(癸卯), 갑술양안(甲戌量案)에는 옥야 일대가 모두 민전으로 되어 있고 청원위 집이 절수받은 곳은 아예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까마득한 평야지의 수많은 논밭 가운데에서 어느 곳을 지적하여 정확히 청원위가 절수받은 곳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한석중이 두 번 송사에 지고 난 뒤에 세력에 의지하여 기어이 이기려는 계책을 꾸며 절수 문권을 새로 태어난 공주집에 팔았습니다. 이리하여 내수사가 호조에 계하하여 사실 여부를 묻지도 않고 곧바로 측량을 하게 하였으므로, 백여 명의 백성들이 대대로 전해온 생업을 빼앗기게 되어 그들의 원망이 그지없습니다. 더구나 두 번 송사에 진 자에 대해서는 그 소송을 다시 심리하지 않는 것이 수교 사목(受敎事目)에 기재되어 있는데, 내수사가 어떻게 두 번 송사에 진 농지를 사들여 정해진 법을 혼란시키고, 한석중을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원망을 살 수 있단 말입니까. 바라건대 내수사가 매입한 농지를 현재의 소유자에게 빨리 돌려주도록 하여 생업을 잃고 원망하는 폐단을 제거하도록 하소서. 한석중에 대해서는 유사로 하여금 율법에 의거하여 엄중히 다스려서 농간을 부리고 국가에 원망이 돌아가게 한 죄를 징계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한석중의 일은 대간의 논계에 따라 본도로 하여금 사핵하여 처치하게 하였는데, 몇 년이 지났으나 아직도 깜깜 무소식이다. 대관이 조정의 명령을 봉행하지 않는 관리들을 거론 탄핵하였다면 어찌 이제까지 지연되는 일이 있겠는가."
하였다. 조성보가 사핵하라고 한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거론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를 부묘할 때의 옥책문을 예문관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게 할 것을 이미 의논하여 계하하였습니다. 신들이 외부의 의논을 듣건대 혹자는 ‘이번 부묘할 때에 시책문도 갖추지 않을 수 없다.’고 합니다. 당초의 시책문은 태조 대왕께서 명하여 지은 것인데 그때 지은 시책문을 지금 찾아낼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책보(冊寶)를 소급하여 올리는 데 있어서도 또한 난처한 것입니다. 지난 신묘년037) 에 ‘난리 때 잃어버린 종묘 각실(各室)의 책보를 물력이 조금 나아진 뒤에 만들어 보충해 놓아야 한다.’고 하교하셨는데, 이 일은 훗날에 하는 것이 옳은 듯합니다만, 신덕 왕후의 책보는 부묘할 때 먼저 추보(追補)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신들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습니다. 이 일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속히 대신 및 유신들에게 의논하여 정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그날 탑전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말들을 거행조(擧行條)에 상세히 써내게 하였다.
원양도 유생 이모(李模) 등이 상소하여, 송나라의 양시(楊時)·나종언(羅從彦)·이통(李侗)과 우리 나라의 선정신 이이(李珥)·성혼(成渾)을 문묘에 종사할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8월 20일 경진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대신, 정부의 서벽(西壁), 관각의 당상(堂上), 6조의 참판 이상이 빈청에 모여 신덕 왕후의 시호를 ‘순원 현경(順元顯敬)’으로 의논하여 정하였다. 시법(諡法)에 자애롭고 온화하여 두루 복종하는[慈和遍服] 것을 순(順)이라 하고, 의리를 주장하여 덕을 실천하는[主義行德] 것을 원(元)이라 하고, 어진 행실이 세상에 알려진[行見中外] 것을 현(顯)이라 하고, 밤낮으로 조심하여 섬기는[夙夜恭事] 것을 경(敬)이라고 한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삼가 듣건대, 예조가 신덕 왕후의 시책보(諡冊寶)를 마련해야 하는지의 여부를 대신 및 유신들에게 물을 것을 초기(草記)로 아뢰자, 성상의 비답에 정원으로 하여금 그날 탑전에서 의논하여 결정한 말들을 써내라고 하셨다 하는데, 신은 송구스럽기 그지없습니다. 이달 15일 등대했을 때 신덕 왕후의 시책을 추후 마련하는 데 있어 난처하다는 이유를 대략 아뢰었는데 그 뒤에 도감의 여러 당상들과 함께 비국에 모여 이 일에 대해서 언급하자 모두가 말하기를 ‘해조가 품계하여 결정할 일이지 도감이 먼저 입계할 일이 아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예조 판서에게 말하여 품계하여 결정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애초 생각은 시책을 마련하지 말 것을 곧이곧대로 청한 것이 아니었고, 또한 성상께서 갖추지 말 것으로 즉시 정하여 거행조가 되어버릴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일을 아뢸 때 말 뜻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여 성상께서 잘못 들으시게 하였으니, 이것은 실로 신의 죄입니다. 이처럼 중대한 예절을 신 개인의 의견으로 갑자기 단정지을 수 없으니, 예조의 계사대로 대신 및 유신들에게 널리 묻고 충분히 강론, 결정하게 하여 미진한 후회가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예조의 계사대로 시행하게 하라."
하였다.
사간 조성보가 아뢰기를,
"한석중이 내수사에 판 민전에 대해서 작년 봄 헌부의 논계로 인하여 본도로 하여금 사핵하여 계문하게 하였는데, 벌써 1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사핵 계문하지 않고 있습니다. 태만스럽고 잘못을 덮어주려는 정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전라도의 전후 감사 및 조사관을 모두 중벌로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21일 신사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허적이 나아가 상의 안부를 묻고 의관들로 하여금 응어리의 환부를 차례로 진찰하여 뜸을 뜰 혈을 의논 결정하게 하여, 상이 뜸을 떴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만경 현감(萬頃縣監) 강윤형(姜允亨)의 일에 대해서 의심스러운 점이 없지 않다. 감사의 장계에, 재읍(災邑)의 수령을 염피(厭避)하는 자는 변쉬염피율(邊倅厭避律)로 논죄한다는 신축년038) 사목을 인용하여 강윤형을 죄줄 것을 청했는데, 이조·형조는 모두 사목이라 칭하면서 금부로 이송했고, 금부는 또 잡아올 것을 청하였다. 그 당시 사목에 영원히 규칙으로 정한다는 말이 있었다면 그럴 수 있는 것이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그 해에만 적용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강윤형을 잡아올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감사와 해조·해부는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하고, 이어 입시 승지에게 사핵하여 계문하게 하였다. 허적이 황해 감사가 해주 목사 정시성(鄭始成)을 파직시킬 것을 청한 것에 대해 아뢰기를,
"관하의 백성이 25대의 매를 맞고 죽었는데 인명을 함부로 살해하였다고 하면서 파직시킬 것을 청하고, 또 처치하기를 청했습니다. 그 죄목이 이렇게 중하다면 수령들이 어떻게 고을 백성들을 호령할 수 있겠습니까. 또 듣건대 정시성은 오래 전부터 체직되기를 도모하였다고 하는데, 감사가 그를 파출시키려는 것이 그의 뜻을 따르기 위한 것이라면 매우 그른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법률에, 법에 따라 벌을 주었다가 우연히 죽은 것은 논죄하지 않는다는 조문이 있다. 그리고 감사가 올린 장계의 끝부분 말은 매우 온당치 않다. 감사는 추고하고 정시성은 파직시키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아뢰기를,
"신축년의 전라 감사가 올린 장계와 비변사가 회계한 것을 가져다 조사해 보았습니다. 재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들이 구황(救荒)하기를 싫어하여 병을 핑계대고 면직되기를 도모하거나 또는 고의로 어떠한 사단을 일으킨 경우는 모두 변쉬모피율을 적용 시행하기를 청하여 윤허를 받았는데, 영원히 규칙으로 정한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매우 근거없는 일이다. 전의 사목을 잘못 인용한 감사와 사목에 따라 시행하기를 청한 해사는 책임을 면할 수 없는 것이니, 중벌로 추고하라."
하였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세 번째 상소하여 체직시켜 주기를 청했는데, 그 소에,
"당초에 판부사 송시열이 상차하여 신을 ‘임금의 총애를 받아 멋대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다.’고 공척하였는데, 이른바 임금의 총애를 받는다는 것은, 반드시 한(漢)나라 문제(文帝)가 등통(鄧通)을 총애하듯, 무제(武帝)가, 한언(韓嫣)039) 을 총애하듯 한 뒤에야 그러한 것이라고 지목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은 형편없는 인물이지만 과거에 급제하여 출신하였고 순서에 따라 승진하였을 뿐, 분수에 지나친 동산(銅山)이나 전포(錢布)를 하사받은 적이 없고, 또한 자개로 장식한 띠를 두르고 연지분을 바르고서 임금을 친근히 하려고 한 일도 없는데, 그런 말을 하였으니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유현(儒賢)의 한 마디 말은 태산보다 중한 것이니, 신이 어떻게 자신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하여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 뒤를 이어 대간들이, 간사스럽고 음흉하며 현자의 진출을 저지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등의 말로 온 힘을 다해 신을 공척하였습니다. 신이 비록 자신의 의견만을 고집하고 시세에 따라 부합할 줄은 모르지만 현인의 진출을 저해하는 일에 있어서는 원래 그런 마음을 가져본 적이 없으며, 신의 재주와 지혜가 부족하여 나라 일에 도움이 되지는 못해도 나라를 병들게 하는 데 있어서는 그런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비난하는 소리가 온 나라에 시끄럽게 퍼지고 있습니다. 아, 현인의 진출을 저지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것은 당(唐)나라 이임보(李林甫)와 같은 인물이 해당된다고 선유가 말했는데, 이임보의 죄를 지고 경(卿)의 반열에 서 있을 수 있겠습니까. 신의 처지로 보아 불안할 뿐만 아니라 성스러운 조정에 있어서 또한 어떻겠습니까.
지난날 인조조 때 연평 부원군(延平府院君) 이귀(李貴)가, 강화(講和)하는 일 때문에 대간의 논핵을 당하자, 강외(江外)에 가 있으면서 소명을 계속 사양하다가, 나중에는 상차하여 선조조 때의 전례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할 것을 청했습니다. 이에 인조께서 그의 소장을 묘당에 내렸는데 당시 상신(相臣)인 윤방(尹昉)·신흠(申欽) 등이 서로 의논하고 회계하여 이귀의 마음을 환히 밝혔습니다. 이귀는 이 일로 인하여 또다시 대간의 논의를 겸제(箝制)하였다는 비난을 받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뒤에야 출사하였습니다.
지금 신을 이귀에 비교하면 천양지차가 나지만 자신의 명예를 아끼고 나아가고 물러나는 것을 함부로 하지 않으려는 마음이야 어찌 오늘날이라 하고 다를 수 있겠습니까. 삼가 바라건대 인조조 때의 전례에 따라 묘당으로 하여금 신의 죄상을 의논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신의 정상이 용서해 줄 수 있다고 한다면 신은 아침에 출사하여 저녁에 쓰러져 죽는다 하더라도 감히 명을 받들 것이고, 만약에 그렇게 해주시지 않는다면 신은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결코 출사할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소를 비국에 내리자 회계하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은 장주(章奏)할 때 간혹 말을 가려하지 않는 것이 그의 병통입니다. 그러나 전번에 올린 상소에 대해서 현인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본정이 아닙니다. 조정에서 그를 수용하는 것은 범연한 뜻이 아니니, 지나치게 인혐하는 것은 부당합니다. 그로 하여금 속히 출사하여 직무를 수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8월 22일 임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8월 23일 계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뜸이 끝난 뒤에 수라 드시기를 싫어하고 다리가 편치 않은 것에 대해 약을 처방하여 들였다. 이때 상의 건강이 한 달이 넘도록 편찮았는데, 턱 아래 좌우에 난 응어리가 점점 커지고 피부가 수척해져 탕약도 잘 드시지 못했으므로 신하들이 걱정하였다.
부묘 도감이 아뢰어, 신덕 왕후의 신주 만드는 장소를 경덕궁(慶德宮)의 읍화당(浥華堂)으로 정하였다.
병조 참판 장선징(張善瀓)이 여러 차례 소를 올려 사직하자 상이 윤허하였다. 장선징은 그가 논핵한 이은상 등의 일이 결국 사핵을 받게 되었는데, 대간이 한 달이 넘도록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으므로 불안하게 여겨 사직하였다.
8월 24일 갑신
이경억을 동지경연으로, 남구만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이조 판서 김인후(金麟厚)에게 문정(文靖)이란 시호를, 능창대군(綾昌大君) 이전(李佺)에게 효민(孝愍)이란 시호를, 고 금산군(錦山君) 이성윤(李誠胤)에게 충정(忠貞)이란 시호를 내렸다. 김인후는 인종조의 명현(名賢)이었는데 조정에 있을 때 절의를 지켰고, 이전은 인조 대왕의 아우였는데 광해 때 억울하게 죽었다. 그리고 이성윤은 종척(宗戚)으로서 광해가 모후를 폐위시킬 때 상소하여 간신들을 벨 것을 청하여 절의를 세우고 윤기(倫紀)를 부식하였는데 끝내 유배되어 죽었다. 논자들이 이들을 훌륭하게 여겼는데, 이때 이들 모두에게 시호를 내렸다.
8월 25일 을유
왕세자가 문묘에 작헌례를 올리고 이어 입학례를 거행하였다. 이때 세자의 나이가 9세였는데 기질이 청명하고 행동이 의젓한 데다가 강독하는 소리도 낭랑하였으므로, 교문(橋門) 밖에 둘러 모여 구경하는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며 기뻐하였다.
8월 26일 병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호조 판서 김좌명을 옥책문 서사관(玉冊文書寫官)으로, 행 호군 오정일(吳挺一)을 제주관(題主官)으로, 우윤 이정영(李正英)을 보전문 서사관(寶篆文書寫官)으로 삼았다.
10월 1일에 부묘례를 거행하기로 결정하였다.
온천에 거둥할 때 배행했던 약방의 도제조 이하에게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사간 조성보가 피혐하며 아뢰기를,
"형조 판서 서필원이 지난번에 한 짓이 꼭 현자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에 해가 되게 하려는 마음에서 한 것인지는 알 수 없는 노릇이지만, 유현(儒賢)이 서울을 떠나가고 조정의 일이 그르쳐진 것이 참으로 그의 상소에서 연유한 것이라면, 그러한 짓을 했지만 그러한 마음은 갖지 않았다 누가 장담하겠습니까. 그를 삭직시키고 문외 출송할 것을 양사가 함께 논계하며 반년이나 쟁집하였으니 공의가 엄하다는 것을 대체로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서필원이 다시 서용되자마자 즉시 서추(西樞)의 임명에 사은하였으니 염치를 상실한 것이 심하다고 할 수 있으며, 본직에 제수되고 나서는 염치란 말을 인용하여 기세를 부리며 소를 올려 묘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심사를 밝혀주기를 청하였는가 하면, 현자의 진출을 저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했다는 말에 대해서 장황하게 변명하며 자신은 전혀 그런 일이 없는 것처럼 하였습니다. 자신의 잘못을 꾸며대고 공의를 무시하며 조정을 경시하고 거리낌없는 이러한 행위가 어찌 매우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신이 여름에 헌부에 있으면서 그를 삭출시키라는 논계에 참여했는데 서필원의 상소 내용이 모두가 당시의 대간을 비난하는 말이었습니다. 대간의 체모로 보아 그대로 자리에 있을 수 없으나, 신이 그때 그의 상소 원문을 보지 못했기에 지금에 와서야 피혐하게 되었으니, 잘못이 더욱 큽니다. 체척하소서."
하였다. 이때 서필원이 소를 올려 묘당으로 하여금 자신의 시비를 밝혀주도록 할 것을 청했는데 사람들이 대부분 그르다고 하였다. 조성보가 애초에 욕을 입었다고 인피하였다가 출사한 뒤에 또 정사(呈辭)하여 인피하자 사람들이 비웃었는데, 끝내는 이 일로 논핵을 받았다.
대사간 이익(李翊)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이익이 김익렴(金益廉)의 사건이 있은 뒤로부터 비난하는 말이 끊이지 않자, 직위에 있는 것을 불안하게 여겨 제수의 명이 있을 때마다 사직하였다.
우윤 이정영(李正英)이 사직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이정영이 논핵을 받은 뒤 사직하며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 또 사직하였다.
평안도 창성(昌城)에 이달 9일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주먹만 하고 작은 것은 계란만 하여 온갖 곡식이 손상되었다.
8월 27일 정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았다.
왕세자가 입학하여 작헌례를 올렸을 때 사(師) 영의정 정태화, 좌빈객 박장원, 좌부빈객 민정중, 대사성 남구만에게 모두 호피 한 벌씩을 하사하고, 박사인 대제학 조복양에게 숙마(熟馬)를 하사하고, 보덕 박세견(朴世堅)은 가자하고, 필선 이휴징(李休徵)에게는 아마(兒馬)를 하사하였다. 그 밖의 사람들에게도 차등있게 상을 내렸다.
장령 경최, 대사헌 윤집이 체직되었다. 헌부가 제때에 시위(侍衛)하지 않은 병관(兵官)들을 논핵하기 위하여 계초(啓草)를 지으려고 대각에 나아갔는데, 시강원이 먼저 병관들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다. 윤집·경최가
"추고하는 하찮은 벌을 중복으로 논계할 수는 없으니, 전계(傳啓)할 필요가 없다."
고 하자, 신명규가
"대각에 나온 이상 중지할 수 없다."
고 하였다. 이때 경최가 성상소(城上所)로서 신명규의 회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지레 뽑아버리고 전계하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소요가 일어나 모두 인피하였다. 옥당이 윤집·경최는 체직시키고 신명규는 출사하도록 처치하였다.
8월 28일 무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이민적(李敏迪)을 대사간으로, 박세당을 교리로 삼았다. 박세당은 누차 시종관에 제수되었으나 끝내 출사하지 않았다.
우참찬 이경억이 해직하고서 목욕갔다 올 것을 청하고, 공조 판서 민정중도 해직하고서 부모 산소에 성묘하고 올 것을 청했는데, 상이 체직을 윤허하지 않으며 안심하고 다녀오라고 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상소하여 본직 및 겸직을 체직시켜주기를 청했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조복양은 당시 명망을 지녀 청요직에 있었는데 당론(黨論)에 대해서 매우 준엄하였으므로 허적이 증오하였다. 이경억이 이조 판서가 될 때 허적이 조복양을 의망하지 않았고, 또 그에 대해 비평하는 말을 하였으므로, 조복양이 이 때문에 누차 사직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지금 수어사 김좌명이 올린 계본(啓本)을 보건대, 남한 산성의 창고 곡식을 여러 해 동안 받아들이지 못하여 고질적인 폐단이 되고 있습니다. 변통시키는 방도를 강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또한 경솔하게 허락할 수 없습니다. 무인년부터 기축년까지의 미수분은 성 안팎의 마을을 막론하고 모두 계본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고, 경인년 이후의 미수분은 성안의 마을만 계본대로 시행하고 성 밖의 마을은 거론하지 말게 하여, 매번 요행을 바라는 마음을 갖지 못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이때 김좌명이 미수분에 대해서 전부 탕감해 주기를 계청하였는데, 상이 비국에 내려 의논하게 하여 반절만 시행하게 하였다.
8월 29일 기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8월 30일 경인
정지화를 대사헌으로, 어진익(魚震翼)을 장령으로, 이휴징을 헌납으로 삼았다.
함경도 홍원현(洪原縣)에 이달 18일 심한 비바람이 불어 곡식이 손상되었고, 명천부(明川府)에는 11일 우박이 내려 나뭇잎이 죄다 떨어지고 밭곡식이 모두 손상되었으며 새들도 죽었다. 그리고 경성(鏡城)·경흥(慶興)에는 수재가 났고, 종성(鍾城)에는 5일 바람과 우박의 재해가 있었으며, 온성(穩城)에는 9일 천둥·지진·바람·우박의 재변이 크게 일어 천지가 캄캄하였는데, 우박이 큰 것은 주발만한 것이 있는가 하면 주먹만하기도 하고 오리알만하기도 하였으며 2, 3척까지 쌓였으므로, 사람과 가축이 맞으면 모두 죽었고 산과 들에 나무와 풀들이 남아나지 못하여 땅에는 거둘 것이 아주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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