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 1669년 9월

싸라리리 2025. 12. 1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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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일 신묘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가니, 약방(藥房)이 들어와 진찰해 보고 상의 열이 높다며 뜸뜨던 것을 중지시켰다. 도제조 허적(許積)이 나아가 상의 병세를 묻고 여러 의원들에게 진맥해 보도록 하니, 모두들 말하기를
"맥이 뛰는 것이 허약합니다."
하였다. 이때 상이 수라 드시기를 싫어하여 수라상이 앞에 이르면 구역질부터 먼저 하였다. 여러 의원들이 모두들 말하기를
"이는 분명히 담화(痰火)이니 육군자탕(六君子湯)을 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송준길(宋浚吉)에게 수의(收議)한 일을 가지고 하교하기를,
"제주(題主)040)  할 처소로 합당한 별전(別殿)이 없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송준길의 수의 중에 ‘이미 반혼(返魂)041)  된 혼령이니 묘소에 가서 제주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한 말을 신들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인안전(仁安殿)의 터를 이미 찾을 수가 없으니, 의거할 만한 바가 없는 곳보다는 차라리 능소(陵所)에 가서 제주하는 것이 낫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신들이 그렇게 헌의했던 것입니다. 장전(帳殿)에 대한 송준길의 의견은 신들도 그 의견을 말했었습니다. 경복궁은 당일 행행하실 장소이니 그곳에서 거행하는 것이 진정 좋을 것이고, 시어소(時御所)에 이르러서는 불편한 점이 있을 것이니 신들의 생각으로는 그곳에서 거행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인안전의 소재를 모르는 바에야 경복궁에다 장전을 만들고 거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이에 대해서는 이미 하교를 들었습니다만 시책(諡冊)을 의논해 결정한 다음에는 옥(玉)을 캐고 책문(冊文)도 지어야 하는 일들이 있으니, 속히 의논해 결정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처음 시호를 올릴 때 반드시 ‘삼가 신하 아무를 보내 아무 시호를 올립니다.’라고 했을 것인데, 지금의 신덕(神德)이라는 시호는 전일에 올렸던 것이다. 지금 만일 ‘시책이 없어 바꾸어 올립니다.’고 한다면 시책의 법도가 아닐 것이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고사(告辭)처럼 해야 한다고 말한 것도 그런 까닭에서입니다. 시책이 빠진 신실(神室)에 차례로 소급하여 보충시키려면 지금 우선 신덕 왕후(神德王后)에서부터 거행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시책 같지 않은 글을 가지고 억지로 소급하여 보충하려는 것이 어찌 옳은 일이겠느냐. 만일 시책의 규모를 갖추려 한다면 시책이 빠진 여덟 신실에 일시에 거행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렇지 않은 경우 미비된 시책을 신덕 왕후에게만 소급하여 올린다는 것은 옳지 않다."
하였다. 허적이 새로 제수된 경상 병사 민진익(閔震翼)은 늙고 기운이 쇠퇴해져 벼슬을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로 아뢰어 체직시켰다. 홍중보(洪重普)가 병·수사(兵水使)를 감당할 사람이 없음을 아뢰자, 상이 김경(金鏡)·이두진(李斗鎭)·신여철(申汝哲)을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홍중보가 또 전에 품정한 대로 수원의 시재 어사(試才御史)를 차송할 것을 청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행 대사헌 정지화(鄭知和)가 공주의 저택에 관한 일을 아뢸 때 감히 참석치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장령 구음(具崟)이,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자신의 행동을 옳다고 우기는 죄를 논하며 사판(仕版)에서 제거하라 청하고, 또 사간 조성보(趙聖輔)가 여러 말을 허비해가며 인피한 뒤에 단자(單子)를 올려 일을 회피한 잘못을 논하며 파직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으며 이르기를,
"서필원의 일은 그렇게 하는 것이 온당한 줄 모르겠고 말미의 일은 대간의 체면을 잃은 일인 듯하다."
하였다. 조성보의 파직을 청하는 계문(啓文)의 말미에 벼슬과 성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상의 하교가 이렇게 내린 것이다. 이때 논자들은 서필원이 논박을 당한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삭판(削版)이란 형벌은 정경(正卿)에게는 시행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계문도 조어(措語)가 모양을 갖추지 못했으므로 전해가며 비웃지 않는 자가 없었다. 구음이 대청에 출사할 때 곤드레가 되도록 크게 취해 계문을 전달하는 즈음에 곁에서 보는 사람들을 크게 놀라게 하였다. 구음은 이로 인해 벼슬길이 막혔다. 승지 정재숭(鄭載嵩)이 사람들에게 말하기를
"평생에 웃을 일을 경평군(慶平君)과 구음에게서 보았다."
고 했다. 경평군은 미치고 실성하여 행동이 가소로웠기 때문이었다. 듣는 자들이 크게 웃었다.

 

당시에 북병사(北兵使) 이만영(李晩榮)이 행영(行營)042)  의 성지(城池)를 수축할 것을 장계로 청했었다. 이때 이르러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북도(北道)의 참혹한 천재(天災)와 온성(穩城)에 우박이 내린 변고로 인해 계청하기를,
"기왕 시작한 일은 비록 정지시킬 수 없겠지만 단지 헐고 무너진 곳들만을 수리하게 하고, 개축해서 성첩을 마무리 짓는 것은 우선 그만두게 하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아직 미처 들여보내지 않은 군인들은 우선 들여보내지 말고 뒷날 임박해서 징발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9월 2일 임진

훈련 도감 도제조 허적이, 상주 영장(尙州營將) 민섬(閔暹)이 별대(別隊)를 뽑는 일에 마음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이유로 죄주기를 청하자, 상이 일렀다.
"무장(武將)의 몸으로서 군무(軍務)를 소홀히 보고 있다면 다른 일이야 말할 것이 있겠는가. 붙잡아다 신문해서 죄를 정하도록 하라."

 

장령 구음이 대간의 체면을 잃었다는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이어서 장령 어진익과 연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조성보만을 체직하였다.

 

응교 이단하(李端夏) 등이 상차하기를,
"지난번 유현(儒賢)이 조정에 나와 국사를 담당했을 때 상하가 서로 미더워 말을 들어주고 계책을 시행해주었으니, 이는 참으로 천 년에 한 번이나 있는 기회였습니다. 그런데 서필원(徐必遠)의 괴이한 상소로 인해 송시열이 마침내 물러나기를 결행하였습니다. 이에 공의가 일제히 일어나고 양사가 함께 일어나 서필원을 쫓아내라고 논하여 반 년이 지나서야 겨우 멈추었습니다. 서필원의 도리로는 당연히 통절히 자신을 뉘우치고 책망하며 몸둘 곳이 없듯이 해야 할 터인데 그렇지 아니하였습니다. 대론(臺論)이 한창인데도 서울 집에서 편안히 지내다가 서용의 명이 내리자마자 바로 서추(西樞)043)  에 출사하여 사은하였습니다. 그가 제멋대로 행동하며 부끄러움을 모르는 꼴이란 사람들에게 진실로 놀라울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다가 추관(秋官)044)  의 장관에 제수되자 이에 비로소 장황하게 소장을 올려 마치 전연 잘못이 없는 사람처럼 하면서 자신의 분수를 헤아리지 않고 선배들의 일을 엉뚱하게 끌어다 대어, 묘당의 한 마디 말을 빌려 출사의 계책으로 삼으려는 데 급급하였습니다. 그의 잘못을 번드르하게 꾸미고 끝까지 고집하여 조정을 무시하고 공의를 멸시하려는 태도가 갈수록 한층 더 심해지고 있습니다.
서필원이 앞서 도리에 어긋난 짓을 한 것은 한둘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조정은 애써 용서해 주며 깊이 죄를 내린 적이 없어 멋대로 굴고 꺼림이 없도록 하였습니다. 놀라운 일을 볼 때마다 번번이 그 사람은 본래 그런 사람이라고 말하고, 전하께서도 또 그 뒤를 이어 총애하고 신임하기를 꼭 부모가 교만한 자식을 기르는 것과 같이 하셨습니다. 총애를 믿고 교만 방자하다고 송시열이 말한 것은 대체로 이런 데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서필원은 등통(鄧通)과 한언(韓嫣)의 일을 이끌어다 그들과 같지 않음을 스스로 밝히면서 그 말하는 태도가 더욱 거만하여 조금도 공손한 태도가 없었습니다. 아, 또한 놀랍고도 우스운 일입니다.
이런 자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공론이 시행될 길이 없을 것이고 조정이 존엄해질 수가 없으며, 세도에 해가 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속히 그의 벼슬을 삭제한 다음 엄히 벌을 내리도록 명하여 징계의 터전으로 삼으소서."
하였다. 차자가 올려진 지 6일 만에 상이 차자의 내용을 알았다고 답하였다.

 

9월 3일 계사

예조가,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위패를 제주(題主)할 장소 문제로 대신과 유신(儒臣)들에게 의논하였다.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 영상 정태화, 좌상 허적, 판부사(判府事) 정치화는 말하기를,
"입주(立主)045)  할 장소로서 의거하여 시행할 만한 곳이 없으니 아마 능침(陵寢)을 놔두고 다른 곳에서 구하기는 어려울 듯합니다."
하였는데 좌참찬 송준길만 단독으로 말하기를,
"오늘의 예를 《고사촬요(攷事撮要)》에 실린 바와 《실록(實錄)》에 기록된 바에서 고증해 보건대, 태조 대왕이 서울을 옮긴 날짜와, 신덕 왕후의 장례를 끝마치고 인안전(仁安殿)으로 반혼(返魂)하고 3년을 지나 인안전에 영정(影幀)을 모신 일들이 대단히 명백한 듯하고, 인안전의 옛터가 경복궁의 옛날 궁전 자리 안에 있었다는 것도 의심이 없는 듯하니, 신덕 왕후께서 평소 거처하시던 곳을 상상할 수 있습니다. 신이 명(明)나라 제도를 고증해 보니 악전(幄殿)046)  의 전례가 있었습니다. 지금 이 전례대로 경복궁 옛 궁터 안에 악전을 만들어서 신주(神主)를 받들어 쓰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능소(陵所)에 가서 제주한다는 것은 신으로서는 이해를 못하겠습니다."
하였다. 판부사 송시열은 병으로 수의(收議)하지 못하였다. 상이 송준길의 의논대로 하라고 명했는데, 뒤에 강녕전(康寧殿)의 터를 【태조 대왕이 늘 거처하던 곳이었다.】  찾아내 장전을 설치하고 제주하였다.

 

예조가 아뢰기를,
"시책을 소급하여 보충하는 문제를 가지고 전교대로 대신과 유신들에게 물어 의논하였습니다. 영부사 이경석은 말하기를 ‘대수(代數)가 이미 오래된 분을 새롭게 높여 받들려 하니 의장(儀章)이 갖추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그것은 능히 갖출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감히 갖추지 못해서입니다. 그러니 억지로 그것을 갖추려다간 예에 합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고, 영의정 정태화는 말하기를 ‘신덕 왕후에게 처음 시호를 올릴 때 반드시 시책이 있었을 터인데 그 당시의 책문(冊文)을 찾아낼 수가 없습니다. 만일 이제 와서 소급해서 갖추겠다는 뜻으로 새로 글을 짓는다는 것은 실로 시책의 정당한 법도가 아닙니다. 또 생각해 보건대, 임진 왜란 이래로 여러 차례 변란을 겪어 종묘 안의 1실(室)에서 8실까지 옥책(玉冊)이 하나도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신덕 왕후의 시책이 없는 것도 이와 다를 것이 없다고 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이번 부묘 때에는 새로 정한 휘호(徽號)의 책보(冊寶)만을 먼저 받들어 올리고 시책은 종묘 각실에 없는 옥책들과 함께 일시에 조용히 의논해 결정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좌의정 허적은 말하기를 ‘신덕 왕후에게 시호를 올리던 처음에 만일 책문이 있었다면 반드시 태조 대왕의 명에 의해 제체(齊體)047)  라는 말을 썼을 것이며 묘(廟)에 고한 다음 시행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소급하여 갖춘다면 또한 미안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번에 뒤따라 올리는 휘호에는 책문도 있고 보(寶)048)  도 있으니, 의장의 절차가 또한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못할 것입니다. 또 신이 삼가 듣건대, 종묘의 1실에서부터 8실까지 열성(列聖)의 책보가 여러 차례의 변란을 겪어 하나도 남아난 것이 없다고 합니다. 훗날 마땅히 인조(仁祖)의 수교(受敎)를 받들어 의논해 결정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이니, 신덕 왕후의 시책을 소급해서 갖추느냐의 여부도 그때 다시 의논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일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치화는 말하기를 ‘당초 시호를 올렸을 터인데 대수(代數)가 오래되다 보니 옥책(玉冊)이 없어진 것이니, 종묘 각실의 책보가 없는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지금에 와서 소급해서 올리는 것은 온당한 일이 아닌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은 말하기를 ‘개국(開國) 초기에는 문물 제도가 갖추어지지 못했을 터이니 시책 문자(文字)가 있었다고 참으로 단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령 있었는데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수백년 동안 결여되었던 전례(典禮)를 다시 닦아야 하므로 그에 관계된 예절이며 의장들이 일상적 법규와는 모두 다르니, 후하게 해야지 박하게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만일 「종묘 중에도 불행히 미비된 신실(神室)이 많은 터에 하필 신덕 왕후만 갖추어야 한단 말이냐.」 한다면 그것은 사리상 매우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미비된 신실들을 이번 일에서 비롯하여 갖추는 것이 옳은 일이지, 마땅히 갖추어야 할 이번 일을 저쪽 없는 종묘의 일을 따라 갖추지 않는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사신(詞臣)에게 명해 사실을 낱낱이 기록한 글을 지금에라도 짓게 하는 일은 그만둘 수 없을 듯합니다. 그 글 속에 말을 적절히 구사하는 문제는 글짓는 자의 솜씨에 있는 것이니 두루 자상하면서도 원만하게 하여 어색한 말이 없도록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무엇을 걱정하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판부사 송시열에게는 병 때문에 수의(收議)하지 못하였습니다. 대신과 유신들의 의견이 이상과 같으니, 상께서 결정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전교하기를,
"지금은 우선 대신들의 의견에 따라 시행하도록 하라."
하였다.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 경연에서 진달한
"종묘 각실의 잃어버린 책보(冊寶)를 소급해서 보충시키려 한다면 각실의 시책문을 여러 문집에 수록된 바에서 찾아내 의논 결정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고 한 말에 따라, 상이 홍문관더러 상고해 내도록 하니, 응교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각실의 없어진 책보를 자세히 알고난 다음에야 상고해 낼 수 있을 것이고, 문집에 실린 바가 《실록》만큼은 자세치 못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문집과 《실록》에서 아울러 상고해 내도록 하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무릇 부묘할 때에는 묘정(廟庭)에서 부알(祔謁)하는 예절이 있는 법인데 대왕(大王)은 서쪽 뜰에서 하고 왕비는 동쪽 뜰에서 거행합니다. 그러나 지금 신덕 왕후 경우에는 단지 태조(太祖)의 제 1실에만 그 예절을 행해야 됩니다. 그러나 정처(正妻) 신분의 신주(神主)로 뜰에서 부알하는 것 또한 미안한 일입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대(臺) 위에 신좌(神座)를 설치해서 제 1실 앞에서 행하는 것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도 그러합니다. 그러나 이는 큰 예절이니 마땅히 널리 물어보아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제주(題主)할 장소는 의당 하교대로 봉행하겠지만, 제주한 다음에 전(奠)을 드리고 종묘에 들기 전에 처소에 봉안하고 봉안한 뒤에 제사를 드리고 휘호를 먼저 올리고 제주를 뒤에 하는 것은 그 차례에 있어서 당연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불가불 제주를 먼저 하고 책보를 뒤에 올려야 하니, 이런 절목들은 마땅히 빨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예관에게 명해 수의해 품처하라 하였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탑전에서 지난 일을 연이어 아뢰며 여러 공주들의 저택을 정해진 법제에 한결같이 따르게 하고 내관(內官)은 붙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자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내사(內司)가 사들인 농지를 현재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되돌려주도록 빨리 명하여 본업을 잃고 원통해 하는 폐단을 제거하고, 한석중(韓碩重)은 유사(有司)로 하여금 법에 의거해 엄히 다스리도록 하라고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피차의 말을 다 믿을 수 없으니 이런 내용을 조사해 조처토록 하라."
하였다.

 

장령 어진익(魚震翼)이 삭판(削版)049)  의 형률(刑律)을 재상에게 시행하자고 한 것이 물의를 빚었다는 이유로 장령 구음과 같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소통사(小通事) 김건(金建)을 국경에서 효시(梟示)하였다. 귀양지에서 도망쳐 본토로 되돌아와서는 다른 사람을 대신 귀양살게 한 죄 때문이었다.

 

9월 4일 갑오

윤문거(尹文擧)를 대사헌으로, 김경(金鏡)을 경상 좌병사로 삼았다. 윤문거는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고, 김경은 훈국(訓局)의 계사로 인해서 체직되었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서필원(徐必遠)을 논박하지 않았다고 여론에 비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예조가 아뢰기를,
"왕세자가 이미 입학례(入學禮)를 거행했습니다. 이는 한 나라의 막대한 경사에 관계된 일이니, 과거를 보여 선비들을 뽑아 온 나라와 경사를 함께하는 뜻을 보이소서."
하니, 내년 봄 관례(冠禮)를 한 다음 거행하라고 명하였다.

 

9월 6일 병신

밤 삼경부터 오경까지 번개가 쳤다.

 

9월 7일 정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거둥하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상의 병세를 묻고 또 식사의 정도를 물으니, 상이 이르기를
"먹는 것이 하루에 불과 두어 홉이다."
하였다. 이때 상이 수라를 싫어한 지 이미 넉 달째여서 옥체가 수척해 있었다. 허적이 의관(醫官)으로 하여금 들어와 맥을 짚어보게 할 것을 청했다. 의관들이 물러가자 허적이 능풍군(綾豊君) 구인기(具仁墍)의 병이 중함을 아뢰자 상이 이르기를,
"구인기는 훈신(勳臣)으로 아들이 하나뿐이다. 그 아들 구일(具鎰)을 홍주 영장(洪州營將)에서 체직시켜 죽기 전에 서로 만나보도록 하라."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구인기의 신병이 이같으니 구일을 영장에서 체직시킨다 하더라도 교대하는 시일이 걸려 생전에 서로 보기가 어려울 듯합니다. 일찍이 인조조(仁祖朝)에 이수광(李睟光)이 병을 앓을 때 그 아들 이성구(李聖求)가 전라 감사였는데, 인조가 그로 하여금 올라와 병을 돌보게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그 일처럼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형조의 일이 염려스럽습니다. 서필원을 삭판하자는 논의는 극히 놀라우니, 육경(六卿)에게 이러한 벌을 적용시킨 적이 언제 있었습니까. 그러나 서필원의 상소에 대해서는 사람들이 모두 대각의 논계가 없을 수 없다고 말하니, 속히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필원을 지금 우선 체차하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상소를 올리고 들어앉아 버렸습니다. 전일 조복양이 대답을 잘못한 잘못이 있었기 때문에 신의 생각에 벌이 없을 수 없다고 여겼는데, 과연 이조 판서의 후보에 한번도 의망(擬望)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복양의 인망이 원래 부적합한 것은 아니니, 이로 인해 영원히 버리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상소에 대한 비답을 속히 내려 공무를 집행하게 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였다.

 

병조가 아뢰기를,
"평안도 무사(武士)들을 시재(試才)할 길일로 이달 17일이 좋다고 합니다. 때문에 규구 단자(規矩單子)를 17일로 써 올리겠다는 뜻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전교하기를,
"알았다. 유생의 정시(庭試)도 물려 거행토록 하라."
하였다.

 

부묘 도감(祔廟都監)이 아뢰었다.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할 처소를 이미 경복궁 안으로 결정하였습니다. 오늘 제조 김좌명(金佐明)과 정지화(鄭知和)가 도감의 낭청들과 함께 가서 살펴보았더니, 강녕전(康寧殿)의 궁터는 사정전(思政殿)의 북쪽에 있었다는 것을 명백히 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곳에 악전(幄殿)을 설치해야 되니, 신연(神輦)050)  이 드나들 길을 해당 관사에 분부하여 닦게 하소서."

 

9월 8일 무술

대사간 이민적(李敏迪)이 추고를 받고 있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9일 기해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상소를 올려 체직을 빌었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전라 감사가 보성 군수(寶城郡守)와 광양 현감(光陽縣監)을 장계를 올려 파직시켰다. 이는 해일의 변고를 애초에 알리지 않았고 조사에 착수하자 또 속였기 때문이다.

 

9월 10일 경자

초저녁에 청적색의 한 가닥 기운이 서쪽에서부터 생겨나 곧바로 하늘 중앙쪽을 향해 뻗쳤다. 길이는 3, 4척, 너비는 1척 쯤이었다. 한참을 지나서야 사라졌다.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박증휘(朴增輝)를 집의로, 정화제(鄭華齊)·변황(卞㨪)을 장령으로, 이민서(李敏叙)를 부응교로, 이규령(李奎齡)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박증휘는 간쟁할 자품이 못되었는데도 항상 아장에서 떠나지 않았고 변황은 어리석고 둔한 자로 숫자나 채우는 사람이었으니, 간관의 적임자를 가리지 않는 것이 이같았다.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전 판서 서필원은 어진이를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했다는 죄목으로 삭출해야 한다는 논박을 거듭 당했습니다. 양사가 굳게 간쟁하고 공의가 지엄했으니 서필원의 도리로서는 당연히 잘못을 성찰하고 새로워지기를 생각해야 할 터인데, 벼슬이 제수된 뒤에 염치를 돌아보지 않고 서추(西樞)에 임명하는 명에 바로 사은하였고, 추조(秋曹)에 제수됨에 미쳐서는 거만스레 상소를 올려 인용에 부당한 고사를 인용하며 장황한 말을 늘어 놓아 자신의 죄를 합리화하고 변명하는 계기로 삼았습니다. 심지어는 묘당에 물어볼 것을 청하여 마치 유현(儒賢)이나 대각(臺閣)과 서로 겨루며 승부를 다투듯이 하였습니다. 조정을 가볍게 보고 공의를 무시한 그의 죄는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과거를 열어 사람을 뽑는 것은 관계된 바가 매우 중대합니다. 구차하고 공평하지 않는 일을 거행해 거자(擧子)들로 하여금 국가를 원망하게 해선 안 됩니다. 이번 세자가 입학할 때 많은 선비들이 모여든 것을 인해서 특별히 정시(庭試)를 보여 그들을 위로하는 터전으로 삼는 것은 매우 성대한 뜻입니다. 그런데 단지 서로(西路)의 무사들만을 유생의 대거(對擧)로 과거를 보인다면 사체로 헤아려볼 때 절대 잘못일 것입니다. 더구나 지난 겨울 파방(罷榜)한 뒤 그들의 낙심을 상상할 수 있는데 이번 선비들을 시험보일 때 경외(京外) 무사들에게 또 아울러 응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실망이 또 어떻겠습니까. 날짜를 조금 물려 서로는 물론 서울에 모여 있는 무사들에게 일체 응시를 허락하는 것이 참으로 사리에 합당할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다시 묘당에 의논하여 아뢰고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대로 따랐다.

 

예조가, 대간이 아뢴 무과의 일을 가지고 묘당에 의논하여 이달 17일로 무과 초시를 실시하기로 정하였다. 병조가 계품하여 을미년051)  의 전례대로 정시, 초시 두 곳에서 각기 백 명씩을 뽑기로 하였다.

 

9월 11일 신축

밤 사경에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쪽에서 나와 삼성(參星) 아래쪽으로 들어갔다. 모양은 주먹처럼 생겼고 꼬리 길이는 4,5척쯤 되었으며 색은 붉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장령 정화제(鄭華齊)가, 서필원을 삭탈하라는 논계가 과중하므로 구차하게 찬동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집의 박증휘와 장령 변황은 정화제가 물의를 일으켰다는 이유로 인피했다. 간원이 처치하여 정화제는 체직하고 박증휘와 변황은 출사시켰다.

 

평안도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사람이 전후 47명이었고, 소도 돌림병으로 죽은 숫자가 1백 45두(頭)였다.

 

9월 12일 임인

집의 박증휘와 장령 변황이 서필원의 삭탈 관작을 연이어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서필원은 우직한 사람으로 자처하면서 생각나는 대로 바로 행동에 옮긴 까닭에 좋은 점도 있었지만 단점도 또한 많았으므로 인정하는 자는 적고 인정하지 않는 자는 많았다. 그러나 시기하고 미워한다는 것은 그의 본 마음이 아니며 나라를 병들게 한다는 것도 그의 마음이 아니었다. 양사가 굳게 논계한 말들이 경중에 맞지 않아 끝내는 서필원의 마음을 감동시키지 못하였고, 서필원을 배척하는 자들도 또한 마음속으로는 과격하다는 것을 알았었으나 자유롭게 할 수 없었다. 양사가 탄핵하는 글은 옥당의 차자를 베껴낸 것이어서, 사람들이 대부분 비웃었다.

 

경평군 이륵이 고성(高城)에 갔던 길에 금강산을 유람하며 매우 많은 폐단을 끼쳤는데, 원양 감사(原襄監司) 정익(鄭榏)이 치계하여 소환시켜 줄 것을 청하자, 상이 일렀다.
"비록 폐단이 있다 하더라도 번신(藩臣)의 도리상 어떻게 감히 바로 소환을 청한단 말인가. 감사 정익을 무겁게 추고토록 하라."

 

9월 13일 계묘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판부사 정치화(鄭致和)와 형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등에게 명해 평안도 무사들을 시재(試才)하게 하였다.

 

예조가 신덕 왕후를 부묘할 길일(吉日)에 상께서 친히 제사할 것인가를 가려 계하하여 달라고 하자, 상께서 몸이 좋지 않으므로 친히 행하기는 어렵다고 답하였다.

 

9월 15일 을사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거둥하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의관들이 물러가자 허적이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 길일을 20일로 당겨 정한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휘호(徽號)를 올리는 일이 제주한 다음에 있다면 제주한 다음에 바로 휘호를 올리는 것이 옳을 터인데, 제주하고서 4일을 지난 뒤에 비로소 휘호를 올린다면 온당하지 못하지 않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제주한 뒤 휘호를 올리기 전에 청시(請諡)와 고묘(告廟)의 절차가 있기 때문에 영의정이 ‘부득불 당겨 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휘호를 올리는 날에 청시해야 한다면 같은 날 시행하는 것이 옳을 듯하고, 그렇지 않다면 28일 사이에 청시의 예를 행한다 해도 어찌 안될 것이 있겠느냐."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보책(寶冊)이 들어온 뒤에 승전색(承傳色)이 받들고 나가 승지에게 전해주고, 승지가 영의정에게 전해주면 영의정이 받들어 행하기 때문에 한나절에 제사를 드려야 할 듯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청시를 제주하기 전에 행해야 합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는 청하는 것이 아니고 고하는 것이다. 휘호를 올리는 일과 제주하는 일을 같은 날 행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하였다. 강백년(姜栢年)이 아뢰기를,
"지평 홍억(洪億)의 상소는 단지 신병의 증세만을 아뢴 것인데 지금까지 비답을 내리지 않고 있습니다. 체직하든 말든 간에 속히 처분하는 것이 옳을 것입니다."
하자, 허적이 또 김덕원(金德遠)의 상소에 대한 비답도 아직 내리지 않고 있음을 말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헌납 이휴징(李休徵),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전 군수 허각(許恪)은 일찍이 흥해(興海)의 수령으로 있을 때 날마다 탐학을 일삼아 백성들이 그 재앙을 입었으며, 고을의 여종을 범해 데리고 살면서 많은 추악한 짓들을 저질렀습니다. 그러다 인사 고과에서 아랫 등급을 받자 원망하고 화를 내며 관아 안의 집들을 부수는가 하면 심지어는 차원(差員)이 봉해 놓은 창고를 멋대로 열어 곡식을 훔쳐 내기까지 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고 비방하는 말이 길에 널려 있습니다. 이를 다스리지 않는다면 교활한 짓들을 앞으로 징계해 바로잡을 길이 없을 것입니다. 기왕에 있었던 일이라 하여 용서할 수 없으니, 붙잡아다 신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집의 박증휘(朴增輝) 등이, 영변 부사(寧邊府使) 김익후(金益厚)는 늙고 병들었으며 사리에 어둡고 치밀하지 못해 변경의 수령에 적합하지 않다고 논계하며 체직할 것을 청했는데, 두 번째 아뢰자 따랐다.

 

예조가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를 부묘할 때 당연히 청시와 종묘에 고유(告由)하는 의례가 있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례의》를 가져다 상고해 보니 이 절차는 초상 때 거행하는 절목에 속해 있으므로 그때 반드시 거행했을 터인데, 오래 전의 일이라서 찾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 의거해 찾아볼 수 있는 길은 인조 대왕의 조정에서 원종 대왕(元宗大王)과 인헌 왕후(仁獻王后)를 추숭할 때의 예절입니다. 이것을 상고해 보는 일이 있어야 하는데 도감의 의궤(儀軌)052)  가 난리 뒤에 흩어졌거나 유실되어 춘추관(春秋館)과 여러 관아에 나누어 갈무리한 것들이 모두 남아난 것이 없습니다. 오직 강화의 사각(史閣)에만 남아있다 하니 가져다가 상고해 보아야겠습니다. 대신들에게 물어보았더니 속히 사관을 보내 거행하는 것이 마땅할 것이라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부묘할 때 알묘(謁廟)053)  하는 절목, 제주한 다음 전(奠)을 지내는 일, 종묘에 들이기 전 봉안할 처소, 봉안한 뒤 제사를 드리는 일, 제주와 보책(寶冊)을 올리는 선후 문제들을 대신과 유신(儒臣)에게 의논해 보았더니, 영부사(領府事) 이경석(李景奭)은 말하기를 ‘대(臺) 위에 신좌(神座)를 설치해서 제 1실 앞에서 행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겠으나, 제주한 뒤 전(奠)이 있어야 할 듯하고, 종묘에 들이기 전 봉안할 처소로는 대궐 안의 전각 중 빈 곳에 봉안하는 것이 마땅할 듯하며 봉안한 뒤 제사를 지내는 일은 늦추어서는 안 될 듯합니다. 또 제주를 먼저 하고 책보를 뒤에 하는 것이 또한 사세상 당연할 것입니다.’ 하였고, 판부사 정치화의 의논도 똑같았습니다. 좌참찬 송준길은 말하기를 ‘지금 이 변례(變禮)의 절차에 대해서 여러 대신들이 갖추어 모두 진달했으니 신은 더 아뢸 것이 없습니다. 오직 임시로 봉안하는 처소에 있어서는, 신이 일찍이 듣건대 병자년054)   뒤에 종묘 열성의 여러 신주들을 대궐 안 빈 전각에서 고쳐 제주하였다 하니 그때 반드시 임시로 봉안한 처소가 있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그곳을 사용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대신들의 의논대로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덕 왕후의 부묘 때 거행할 절목들을 모두 섭행하는 것으로 마련했으니, 친히 제사지낼 때 백관들이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과는 같지 않습니다. 지금의 부묘 의절은 막중한 일이니, 각각 제사를 지낼 때 백관들이 나아가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이를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9월 16일 병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이단하(李端夏)를 사간으로, 이세화(李世華)를 장령으로, 송기후(宋基厚)를 지평으로 삼았다.

 

예조가 신덕 왕후의 위패를 제주한 뒤 임시로 봉안할 처소를 여쭙자, 경덕궁(慶德宮)의 읍화당(浥華堂)으로 하라고 계하하였다.

 

9월 17일 정미

진시(辰時)에 목성(木星)이 서남쪽에 나타났다. 밤 1경에 유성이 왕량성(王良星) 아래에서 나왔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중완(中腕)에 뜸을 떴다.

 

예조가 아뢰기를,
"삼명일(三名日)의 방물(方物) 물선(物膳)을 흉년으로 인하여 임시로 줄인 지 벌써 10여년이란 긴 세월이 흘렀습니다. 올해는 각도의 농사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옛날대로 환원해야 할 것입니다. 올 동지부터 대전(大殿)·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왕대비전(王大妃殿)·세자궁(世子宮)의 삼명일 방물 물선을 옛날대로 봉진(封進)할 것을 각도와 개성부(開城府)에 알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잠시 동안 옛날대로 줄이라고 하였다.

 

지춘추(知春秋) 조복양(趙復陽)을 강화부(江華府)에 보내 임신년055)  의 추숭 도감(追崇都監) 의궤(儀軌)를 가져오게 하였다. 사관이 가야 하는데 이때 단지 하번(下番) 사관 한 사람만 있었던 까닭에 춘추관이 아뢰어 본관의 당상을 보낸 것이다.

 

집의 박증휘(朴增輝)가, 공주들이 집을 지으면서 칸수가 정해진 제도를 휠씬 벗어났는데 한 마디도 쟁론하지 않고 단지 전에 아뢰었던 내용들만 연이어 아뢴 것으로 인해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했는데, 처치하여 출사케 하였다. 이때 양사가 공주의 저택 문제에 대해 논계해 마지않았으나 상이 매번 불윤한다 비답하고 두 공주의 집을 일시에 지으니, 사람들이 더욱 놀랐다.

 

사간 이단하(李端夏)가 아뢰기를,
"여러 공주들의 저택에 관한 일을 양사가 굳게 간쟁한 지가 이미 여러 달이 되었는데 전하의 허락이 막연하여 따라주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금 듣자니 이미 건축한 집의 칸수가 법전(法典)에 비춰볼 때 두세 배 정도가 아니라고 합니다. 신은 놀라움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조종(祖宗)들께서 법을 만들고 제도를 정해 후세에 드리운 것은 금석(金石)처럼 따라 지키라는 뜻에서입니다. 그런데 지금 전하께서는 조종의 뜻을 본받지 않고 조종의 법을 따르지 않으신 채 단지 사사로운 은혜를 위해 이러한 지나친 일을 행하시는데, 신은 진정 전하의 마음이 우애에서 나왔다는 점을 알지만 우애의 방법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법제를 준수하여 국가가 다스려지게 되면 왕실의 지친(至親)들에게 저절로 안락과 영화의 즐거움이 안겨지겠지만, 법제가 땅에 떨어지거나 상실되어 난리가 뒤따르게 된다면 최고의 저택이며 널직한 집이 있다 한들 또한 어떻게 그 즐거움을 혼자서만 누릴 수 있겠습니까. 더구나 대각의 논계가 한창 일어나고 있는 데도 한쪽에서는 집을 지어 법제를 준수하지 않고 간쟁을 돌볼려 하지 않으니 이같이 하면서 능히 그 나라를 다스린 자는 있지 않습니다.
이미 건축한 공주들의 집들에 대해서 법제를 넘는 칸수는 다시 철거하고, 아직 짓지 않은 집들은 법제를 한결같이 준수하여 사치스럽고 분수에 넘치는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9월 18일 무신

밤 2경에 연기 같은 흰구름 한 줄기가 동쪽으로 일어나 곧게 서쪽을 가리켰는데, 길이가 하늘 끝까지 이르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상이, 사관에게 명해 영의정 정태화를 불러 입시케 하였다. 상이, 좌참찬 송준길이 부알(祔謁) 제주할 때 친히 상께서 참석하시고 시책을 소급하여 보충시키며 그리고 부묘(祔廟) 때 친히 제사드려야 한다고 논한 소장을 내보이며 읽어보도록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평상시의 예의를 가지고 말한다면 왕비는 왕과 대등한 예가 있으니 군신의 예를 써서는 안 될 것이다. 송준길의 소장 안에 부알할 때 열성들의 마음이 불안할 것이란 말은 그럴 듯하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소장의 뜻으로 말하자면 부알을 시행치 않는다 하더라도 예에 무방하겠습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만일 이 예를 뺀다면 부알이라고 칭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알(謁)자를 고쳐 승부(陞祔)로 하라고 명하고, 이어 대(臺) 위에서 부알하는 예는 행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비록 섭행하는 제사지만 집사하는 관원은 내가 친히 임해 거행하는 것처럼 하라."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구애되는 점이 있어 안 됩니다."
하였다.

 

사간 이단하(李端夏)가 서필원(徐必遠)의 죄상을 낱낱이 들어 말하며 삭탈 관작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전라도 해남(海南) 사람 김유남(金有男) 등 남녀 14인이 표류하다가 일본 살마주(薩摩州)에 도착하였는데, 이때 이르러 대마 도주가 차왜(差倭)를 정해 서계(書啓)를 지니고 동래에 호송해 왔다. 예조가 아뢰기를,
"전라도 해남에서 표류된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호송되어 왔으니 그들을 데려 온 차왜를 후대해서 조정이 가상하게 여기는 뜻을 보여야 할 것입니다. 두 차례의 잔치에 드는 예단(禮單)을 전례대로 해조에서 준비해 내려보내도록 하고, 회답 서계도 승문원으로 하여금 짓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9일 기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뜸을 떴다.

 

사간 이단하가 피혐하며 아뢰기를,
"신은 이미 건축한 공주들의 집 중에서 제도를 넘는 칸수는 도로 철거해 한다는 말을 앞서의 계사 속에 첨가시켰습니다. 듣자니 숙안 공주(淑安公主)056)  의 집은 이미 세운 정침(正寢)의 칸수가 27, 숙명 공주(淑明公主)057)  의 집은 정침과 딸린 집들이 33칸이라 합니다. 앞으로 계속 세울 것이 몇 칸이 될는지 모르겠으나, 현재 이미 세운 칸수를 법전과 비교한다면 몇 곱절 정도가 아니라고 한 말은 사실과 어긋남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신이 그릇된 소문을 경망하게 논한 실수가 이에 드러났으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고, 집의 박증휘도 이 문제로 인피하였다.
사신은 논하다. 공주의 저택을 한결같이 정해진 법제에 따를 것을 양사가 날이면 날마다 굳게 논계한 지 이미 넉 달이 지났다.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은 이미 치세(治世)의 일이 아닐 터인데 한쪽에서는 대각이 논계하고 한쪽에서는 집을 지어갔으니, 대각을 둔 이후로 없었던 일이다. 대각의 관원으로서도 마땅히 이를 바르게 말씀드리고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매번 전에 아뢴 것을 가지고 와서 승정원에 전함으로써 정계도 않고 윤허도 안 되어 국가의 체면만을 손상시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식자들이 애석해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2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46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주생활-가옥(家屋) / 왕실-종친(宗親) / 역사-편사(編史)


[註 056] 숙안 공주(淑安公主) : 효종의 둘째 공주.[註 057] 숙명 공주(淑明公主) : 효종의 세째 공주.
사신은 논하다. 공주의 저택을 한결같이 정해진 법제에 따를 것을 양사가 날이면 날마다 굳게 논계한 지 이미 넉 달이 지났다. 상하가 서로 버티는 것은 이미 치세(治世)의 일이 아닐 터인데 한쪽에서는 대각이 논계하고 한쪽에서는 집을 지어갔으니, 대각을 둔 이후로 없었던 일이다. 대각의 관원으로서도 마땅히 이를 바르게 말씀드리고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벼슬에서 물러나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고서 매번 전에 아뢴 것을 가지고 와서 승정원에 전함으로써 정계도 않고 윤허도 안 되어 국가의 체면만을 손상시키니,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식자들이 애석해 하였다.

 

전 부제학 이단상(李端相)이 죽었다. 이단상은 판서 이명한(李明漢)의 아들이다. 젊어서 과거에 올라 좋은 벼슬들을 두루 역임했으며 깨끗하다는 명성이 있어 동료들로부터 추앙받았다. 신병을 이유로 사직하고 양주(楊州)에 물러나 살면서 여러 차례 불러도 벼슬을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으니, 사람들이 명리에 담박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대체로 운명을 말하는 자가 이단상을 두고 말하기를 ‘만일 당상관에 오르게 되면 수명이 반드시 길지 못할 것이다.’라고 말했기 때문에 그가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아서이다. 송준길이 경연에서 아뢰어, 부제학에 승진 임명되었는데, 이단상이 은명(恩命)을 사은하고자 왔다가 서울에서 병을 치료하던 중 며칠 만에 죽었다. 이단상은 본시 송시열과 송준길에게 빌붙었다. 송준길이 일찍이 상 앞에서 호남 선비 정개청(鄭介淸)의 서원을 철거할 것을 청했는데 이단상도 상소하여 정개청을 헐뜯었다. 윤선도(尹善道)가 소장을 올려 개청을 신구(伸救)하고 이단상을 배척하면서 그의 아비 이명한이 이이첨(李爾瞻) 부자에게 아첨하여 ‘문성이 지금 덕성과 함께 있다.[文星今與德星俱]’라는 시를 지었음을 거론해 온 세상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이단상이 또 일찍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송시열의 예에 대한 논의는 정정 당당하여 백세(百世) 이후에 성인이 나온다 하더라도 의혹될 게 없을 것이다."
하였으니, 임금을 속인 그의 죄가 여기에서 극에 이르렀다. 이것이 어찌 이른바 소인의 거리낌없는 짓이 아니겠는가.

 

9월 20일 경술

목성(木星)이 낮에 나타났다. 밤 4경에 연기 같은 검은 구름 한 줄기가 서북쪽으로부터 일어나 곧게 동남쪽을 가리켰다. 길이가 20여 장(丈)이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 때 예관(禮官)이 책보(冊寶)를 올리지도 않고 먼저 순원 현경(順元顯敬)이란 휘호를 쓰기로 정했다 합니다. 이는 참으로 앞뒤의 차례를 크게 잃은 것입니다. 《오례의(五禮儀)》에 실린 바를 가지고 말한다 하더라도 대행(大行)058)   전에 시호를 올리고 그 다음에 우주(虞主)059)  를 쓰니, 이것이 행해야 할 차례임을 명백히 알 수 있습니다. 상례(喪禮)와 추존(追尊)이 절목이 같지 않은 점이 있겠지만 먼저 책보를 올리고 뒤에 신주를 쓰는 것은 선후의 차례에 있어 바꿀 수 없는 것입니다.
신들의 어리석은 견해로는, 먼저 길일(吉日)을 가려 신덕(神德)이란 시호 두 글자를 제주한 뒤 별전으로 옮겨 봉안하였다가, 또다시 다른 날짜를 잡아 책보를 받들어 올리고 이어 고쳐 제주한다면 선후도 문란해지지 않고 인정과 예문(禮文)도 갖추어질 것으로 여깁니다. 또 의논하는 자들 가운데 혹 제주를 바꾸는 것을 중대한 일인 것처럼 생각하는 자가 있으나 예전부터 부묘 때 각실의 제주를 바꾼 예(禮)가 있었습니다. 왜 유독 지금의 일만 중대한 것으로 의심한단 말입니까. 또 혹 제주한 뒤 별전에 오랫동안 봉안하는 것을 미안스럽게 생각하기도 하나, 며칠 동안 임시로 봉안한 것과 벼락치기로 예를 행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미안하겠습니까? 대신과 예관(禮官)들로 하여금 다시 상고한 다음 결정하게 하여 큰 예절에 미진한 점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 차자를 부묘 도감에 내렸다.

 

옥당이 처치한 내용에 사간 이단하(李端夏)와 집의 박증휘(朴增輝)를 출사시키라고 청하자, 상이 답하기를,
"이 처치를 보자니 더없이 놀랍고 이상하다. 만일 소회를 말하고 싶으면 끄트머리에다 말을 하는 것이 또한 옳을 것이며, 처치한 내용에 이르러서도 인피한 말들에 대해서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어떻게 감히 멋대로 결정을 내리기를 이같이 방자하고 거리낌없이 한단 말이냐. 아울러 체직토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특별히 체직시키도록 한 명을 빨리 중지하고 온당하지 못한 비답을 회수하라고 청했다. 두 번이나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자 부교리 김석주(金錫胄), 부수찬 김만중(金萬重) 등이 죄를 청하며 사직했는데, 상이 불허했다.

 

9월 21일 신해

부묘도감이 아뢰기를,
"이번 신덕 왕후의 제주(題主)는 우주와 연주(練主)060)  가 있는 절차와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올릴 휘호(徽號)를 신주에 먼저 써 두고서 바로 책보를 올리는 것은 실로 사세상 부득이한 데서 나온 것입니다. 당초 예조가 절목을 마련해 올릴 때 신들도 더불어 함께 의논했습니다. 지금 옥당이 차자를 올려 선후의 차례를 잃고 있다고 말하며 ‘우선 길일을 택해 신덕이란 시호 두 글자를 제주하고서 또다시 다른 날짜를 잡아 책보를 받들어 올리고, 이어 다시 제주하는 것이 그 선후의 차례에 맞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제주의 예는 매우 중대한 일입니다. 절차를 만들어 내고자 하여 금방 제주했다 금방 바꾸는 것과, 휘호를 먼저 제주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온당한지 모르겠습니다. 신들도 감히 억견으로 경솔히 논의하지 못하겠으니 예관으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널리 물어 품처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개성부(開城府)에서 호랑이가 인물(人物)들을 물어 죽였다.

 

9월 22일 임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중건하던 정릉(靖陵)의 정자각(丁字閣)이 낙성되었다.

 

대사헌 윤문거(尹文擧)가 신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9월 24일 갑인

유철(兪㯙)을 대사헌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사간으로, 윤변(尹抃)을 집의로, 이규령(李奎齡)을 수찬으로 삼았다.

 

예조가 아뢰기를,
"도감의 계사를 대신들에게 의논했더니, 영부사 이경석은 말하기를 ‘먼저 아뢰고 뒤에 책보를 올리는 것이 절차로는 옳은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은 변례(變禮)에서 나온 것이니, 변례에 변통이 없을 수 없음은 부득이 한 것입니다. 절목이 이미 우주와 연주가 있는 예절과는 다르니 비록 앞서 고하고자 하더라도 어디에다 의거할 곳이 없으며, 억지로 안배한다면 비록 다른 날짜를 잡는다 하더라도 금방 제주했다 금방 바꾸어야 하니, 유독 미안한 일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였습니다.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판부사 정치화의 의논도 이경석과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의논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지춘추 조복양의 장계를 보았더니, 강화 사고(江華史庫) 안에 임신년061)  의 추숭 의궤(追崇儀軌)가 없으며 실록을 상고해 보아도 역시 청시(請諡)와 고묘(告廟)에 대한 절목이 수록된 곳이 없다 하였습니다. 이번 신덕 왕후의 청시와 고묘의 의절은 근거할 만한 것이 없어 결정짓기 어렵습니다. 신들의 의견으로는 흐릿하게 절차를 무시하고 빠뜨리기 보다는 차라리 청시와 휘호를 소급해 올린다는 뜻을 종묘 예고제(預告祭)062)  의 축문 안에 첨가시키는 것이 낫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중대한 일이니 여러 대신들에게 속히 의논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부사 이경석, 영의정 정태화, 좌의정 허적, 판부사 정치화 등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의거해 시행할 수 있는 전례가 없으니 예조가 아뢴 말대로 행해야 합니다. 다만 신덕이란 시호 두 글자는 바로 초상 때 올린 바이니, 지금의 고사(告辭)에 ‘청(請)’ 자를 쓰는 것은 부당합니다. 전일의 시호와 소급해서 올리는 휘호로 제주해서 부묘한다는 뜻을 내용에 넣어 짓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상차하여 공주들의 집을 짓는 일에 대해 아뢰기를,
"분명한 교지를 빨리 내려 《대전(大典)》의 옛 법제대로 칸수를 따르되, 대간의 논계가 그치기 전에는 우선 공사를 중지시켜 나라의 체면을 유지시키소서."
하니,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상이, 내달 초이튿날에 한원 부원군(漢原府院君)의 집에서 영시연(迎諡宴)을 여는 일로 인해 해조로 하여금 선온(宣醞)하고 일등 풍악(一等風樂)을 하사하도록 하였다. 한원 부원군 조창원(趙昌遠)은 바로 대왕 대비의 아비여서 이 명령이 있었던 것이다.

 

평안도 평양부(平壤府)에 이달 14일 밤에 지진이 발생했다. 큰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가 났으며 집들이 흔들흔들 곧 넘어질 듯했는데 이렇게 세 차례나 일어났다. 순안(順安)과 숙천(肅川)에도 같은 날 지진이 발생했다. 평양·함종(咸從)·영유(永柔)에 13일 우박이 내려 곡식들이 손상을 입었다.

 

9월 25일 을묘

재신(宰臣)을 보내 신덕 왕후 부묘 고유제(祔廟告由祭)를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지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사간 남이성(南二星)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공주 저택의 칸수에 대한 논계에 감히 동참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장령 이세화(李世華)가 연계하여 아뢰기를,
"공주의 저택을 《대전(大典)》대로 지을 것을 결정하기 전에는 우선 짓는 일을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공주 저택에 대해선 나의 뜻이 굳어진 지 이미 오래다. 결코 허락할 수 없으니 시끄럽게 굴지 말라."
하였다. 상이 대간의 논계를 따르지 않으면서 한편으로는 집을 지어나갔는데 대관이 물러나지도 못하고 또 피혐하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일의 중지만을 청하며 매번 전에 중지하자고 청했던 논의만을 그대로 전했는데, 그것도 옥당이 차자를 올린 뒤에야 그말을 꺼냈으므로 끝내 곤욕을 당하였다.

 

9월 26일 병진

밤새 번개가 쳤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뜸을 떴다.

 

양근(楊根)의 유생 채시경(蔡時鏡) 등이 문정공(文正公) 조광조(趙光祖)와 고 대사성 김식(金湜)의 서원에 사액(賜額)해 줄 것을 청하자, 해조에 내렸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사직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9월 27일 정사

진시(辰時)에 신덕 왕후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희정당(熙政堂)에 봉안하였다. 도제조 정태화 이하가 조복(朝服)을 의식대로 갖추어 입고 인정전(仁政殿)의 뜰까지 모시고 나아가 중사(中使)에게 청하였다. 도제조가 꿇어앉아 금보를 받드니 중사가 꿇어앉아 받들어 상서원(尙瑞院)의 관원에게 전해주었다. 상서원의 관원이 이를 받들고 앞서서 가고, 옥책을 모신 채연(彩輦)이 뒤따라 가 희정당에 봉안하였다.

 

상이 옥책(玉冊)의 장환(粧環)063)  이 단단치 못하다고 해서 도감에 내려보내 바꾸어 올리게 하라고 명하자, 정원이 아뢰기를,
"도감에 되돌려보내는 것은 온당하지 못합니다. 도제조로 하여금 봉심한 뒤에 바꾸어 만든 장환을 봉안소로 가지고 가 바꾸어 매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도감의 당상으로 하여금 봉심한 뒤 바꾸어 만들어서 내일 새벽에 다시 매게 하라."
하였다. 도제조 정태화 이하가 빈청으로 나와 대죄(待罪)한다는 것을 구두로 전하고 봉심하기를 청했다. 도제조 이하 승지와 사관이 희정당의 봉안소로 나아가 봉심하고 바꾸어 맸다.

 

9월 28일 무오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신덕 왕후의 옥책과 금보를 받들어 경덕궁 읍화당 중문 밖 악차(幄次)064)  에 모셨다. 비로 인해 춘추관(春秋館)으로 옮겨 모셨다가 다음날 비가 개자 다시 악차에 봉안하였다.

 

남이성(南二星)을 응교로, 신명규(申命圭)를 사간으로 삼았다.

 

9월 29일 기미

묘시(卯時)에 종묘에 모실 순원 현경 신덕 왕후(順元顯敬神德王后)의 신주를 경복궁(景福宮)의 강령전 악차에서 썼다. 좌상 허적을 보내 제주전(題主奠)을 지내게 하고, 도승지 강백년(姜栢年), 우승지 홍만용(洪萬容), 사관 강석창(姜碩昌)·조사석(趙師錫)을 보내 모시고 호위케 했다. 사시(巳時)에 읍화당에 봉안하고 봉안제(奉安祭)를 지냈다. 신시(申時)에 책보(冊寶)를 올렸다.
제주 축문(題主祝文)은 다음과 같다.
태사에 나란히 하련 생각
성신의 짝이 되셨소
건국에 공이 있으시니
주나라의 난신065)   같소이다.
예야 의당 병향하여
영원히 불천해야건만
의논드린 신하의 잘못으로
성스런 의절 빠졌소이다
조종이 남기신 뜻
소자 이에 행하오사
이제 올려 부묘하니
사당 모습 이루어졌네
하늘에 계신 밝은 영령
내려오사 여기에 의지하옵소서
좋은 날 가려 삼가 고하오니
이에 이르실 것 바라오이다
옥책문(玉冊文)은 다음과 같다.
"유세차(維歲次) 기유 9월 신묘 삭(朔) 29일 기미에 효증손(孝曾孫) 사왕(嗣王) 신 모(某)는 삼가 재배하고 머리 조아려 말씀 올리나이다. 떳떳한 의전 오랫동안 빠뜨려졌기에 이에 올려 배향하는 의전 닦나이다. 고귀한 옥책으로 소급해 높이오니 진실로 양양한 드문 예전 거행하며, 선왕의 뜻 이에 이으니 우리 왕가의 예절에도 마땅합니다. 삼가 생각건대 황조비(皇祖妃) 신덕 왕후께옵서는, 복록이 무궁한 귀한 문벌에서 나 성조와 짝 이루시어 가까이서 용비(龍飛)의 왕업을 도우셨으니 난신(亂臣) 속에 부인이 계심이로이다. 일찍 존귀한 왕비로 결정되시어 천자로부터 고명(誥命) 받으셨네. 모두들 도산(塗山)의 덕화066)   우러렀더니 어느덧 소릉(昭陵)의 슬픔067)  이 맺히셨구려. 이에 덕(德) 빛낼 명호(名號)를 바꾸니 모든 일 이미 끝남이라. 의당 사당에 오르시어 궤연(几筵) 함께 해 백세(百世)토록 불천위(不遷位)되어야 하건만, 순(舜)임금 순수 길에 돌아가심에 미쳐 끝내 주(周)나라처럼 함께 제사 잡수시지 못하셨습니다.068)   의논드린 신하의 잘못으로 길이 짝이 되신 깊은 생각 본받지 못함이거늘 여러 조종조 이어받아 답습한 채 효성 빛낼 승부(陞袝)를 미처 못해 마침내 신도(神道)의 억울함 빚어내니, 실로 모든 백성들이 탄식하던 바이었오. 그래도 서책들에 증거가 있어 덕스런 말씀 없어지지 않았오. 제향드릴 곳 없었으니 애당초의 잘못으로 생각되나 떳떳한 도리의 흠결이었으니 이어받은 자로서 감히 소홀히하리이까. 이에 옛 역사에서 고증하고 인정과 예문(禮文)을 참작해서 능소 새롭게 모양 갖추니, 감춰졌던 빛 비로소 빛나고 종묘에 돌아가신 분들 모두 모이시니 밝으신 영혼 위로가 되시리이다. 백성들의 마음에서 찾아볼 수 있으니 진실로 만백성의 바람에 부응함이오, 천도는 반드시 다시 돌아오는 것이기에 3백년 지나서야 겨우 행해졌소이다. 훌륭한 의식 처음처럼 벌려 휘호 올리오니 감회가 더하오이다. 삼가 신하 의정부 영의정 정태화를 보내 옥책문 받들어 휘호를 올리오니 순원 현경 왕후(順元顯敬王后)라 했습니다. 바라오니 돌아오시사 밝게 보시고서 굽어 가녀린 정성을 보살피소서. 보배로운 옥첩(玉牒) 꽃답게 드리워져 하늘과 땅처럼 오래하고, 아름다운 글 넘쳐나는 경사 자손들을 더욱 번창케 하리이다. 아, 슬픕니다. 삼가 말씀드리오이다."
금보(金寶)는 전서(篆書)로 순원 현경 신덕 왕후지장(順元顯敬神德王后之章)이라고 썼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의관이 물러가자 허적이 이어 나아가 아뢰기를,
"평안도 무사들의 시재 단자(試才單子)를 아직까지 계하(啓下)치 않고 계시는데, 정시(庭試) 때 명을 내리시고자 해서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합격한 사람이 60인인가?"
하자, 답하기를,
"73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명관(命官)을 보내 시재(試才)해 놓고 만일 보통 때의 상격(賞格)으로 시상한다면 반드시 낙망할 것이므로, 정시 때 모두를 급제시키고자 하는 것이다."
하니, 답하기를,
"신의 생각도 그와 같았으나 그것은 은전이기에 감히 청하지 못했습니다."
하고, 또 정언 김덕원(金德遠)의 상소에 대한 비답이 오랫동안 내리지 않고 있음을 아뢰었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예조가, 부묘한 뒤 음복연(飮福宴)을 열 것인지 물어 왔다. 음복(飮福)의 의미는 친히 제사를 지낸 뒤 복을 받고 다시 여러 신료들과 경사를 함께한다는 뜻이다. 친히 제사지내지 못하고 섭행시켰는데, 음복의 예를 어디에 근거해 묻는단 말인가. 해조에 물으라."
하였다. 파할 무렵에 허적이 아뢰기를,
"전일 정시를 품정한 뒤 합문(閤門)을 나서자마자 탑전에서 한 말들이 벌써 중외의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있었습니다. 이번 서로(西路) 무사를 시재하여 급제시키는 일은 특별 분부에서 나온 것인데 만일 신이 아뢴 것이라고 전파된다면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입니다. 승지로 하여금 사관에게 분부케 하여 절대로 말을 전파하지 못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승지 이정(李程)이 전교를 받고 물러갔다.

 

사간 신명규(申命圭)가 추고받는 중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30일 경신

사시(巳時)에 신덕 왕후(神德王后)의 신주를 받들어 읍화당으로부터 종묘의 신문(神門) 밖 악차로 봉안하였다. 모시고 호위하는 일은 의식대로 하였다.

 

도망쳐 돌아온 사람인 최길(崔吉)이 몽고(蒙古)로부터 와서 말하기를,
"몽고의 왕은 심양(瀋陽)에 붙잡혀 있고 태자는 북경(北京)에 나가 있어 금령(禁令)이 해이하였다. 그래서 기회를 틈타 도망쳐 왔다."
하고, 또 저들의 사정을 말하기를,
"몽고의 왕은 바로 순치 황제(順治皇帝)의 매부이다. 그의 처가 살아 생전에 왕에게 이르기를 ‘내가 죽은 뒤에는 심양에 가지 마십시오. 가셨다간 반드시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했다. 처가 죽자 왕이 그 말을 생각하고 한번도 심양을 찾지 않자, 청나라가 사람을 보내 꾸짖기를 ‘심양에는 그대 조상의 무덤이 있는데 어찌해서 한번 와 성묘하지도 않는가.’ 하니 왕이 부득이해서 찾아갔다. 청나라 사람들이 덫을 놓아 사로잡아 구류시키고서는 그 아들을 세워 왕을 삼게 하였다. 그 아들의 나이는 16세였는데 당당하게 말하기를 ‘죄도 아닌 것으로 부왕(父王)을 구류하고 있는 것은 불가한 것이며, 아비에게 죄를 주고 자식을 세우는 것도 불가한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청나라의 서울로 달려갔다. 몽고의 12부(部) 중 이 왕의 부가 가장 어른인데 12부가 각기 정병 수십만을 거느리고서 ‘일이 잘 끝난다면 우리들도 일을 벌이지 않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군사를 일으키겠다.’고 말하고 있다. 몽고 왕의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헌걸참이 출중하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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