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7권, 현종 10년 1669년 11월

싸라리리 2025. 12. 12. 0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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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일 경인

밤 4 경에 유성이 동쪽에서 나타났다. 크기는 병(甁)만 하였다.

 

특별히 임명하여, 유혁연(柳赫然)을 공조 판서로 삼고 윤리(尹理)를 사서로 삼았다. 유혁연은 무장으로서 상의 사랑을 얻었기 때문에 특별히 정경(正卿)에 임명한 것이다.

 

옥당의 차자에 답하기를,
"하늘의 재앙과 사물의 이변이 오늘날에 이르러 극에 이르렀으니 내 비록 민첩치 못하나 어찌 두려움을 모르겠는가. 이제 경계하고 가르치는 말들을 보니 내 마음이 더욱 두렵다. 전후의 차자 내용들을 후일 등대하였을 때 함께 의논해 조처하겠다. 공주의 저택을 짓는 일은 이미 어제 그만두도록 했다."
하였다. 이때 양사가 집 짓는 일을 중지토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다가 우선 중지케 한다는 전교를 옥당의 비답으로 비로소 내렸는데, 언관들의 말 때문에 공사를 중지시킨 것은 아니었다.

 

예조가, 신덕 왕후의 부묘를 진하(陳賀)하는 방물을 기한 내에 봉진치 않았다는 이유로 전남 감사 김징(金澄),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 경상 좌병사 신여철(申汝哲)의 추고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가 이은상(李殷相) 등을 조사하는 문제로 아뢰기를,
"지금 대각의 논계가 이미 정지되었으니, 당초 대간이 아뢴 대로 우선 공함(公緘)을 띄워 추문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장령 정중휘(鄭重徽), 지평 홍만종(洪萬鍾), 정언 이단석(李端錫)·유상운(柳尙運)이, 공주의 저택 짓는 일을 이미 중지시키고서도 이틀 동안의 논계에 명백하게 비답을 내려주지 않았음은 경시당한 소치라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부교리 김석주(金錫胄)가 상소하기를,
"신이 삼가 오늘날 나라 일이 염려스러운 것들을 보자니 하루하루가 심해지고 있습니다. 하늘의 경고가 달마다 빈발하고 있으니 이것이 염러스러운 점이고, 백성들의 원망과 저주로 사방이 들끓고 있으니 이것도 염려스러운 점이며, 인재는 아득히 찾아볼 길 없고 온갖 법도들은 해이해지며 재정과 경비가 고갈되어 있으니 또한 염려스러운 점입니다. 그런데도 인심은 투박해지고 요행을 바라며 안락에 빠져 있는 것이 오늘날 만큼 심할 수가 없습니다. 전일에 일찍이 깜짝 놀라 하늘을 두렵게 여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점점 태연히 거리끼지 않는 지경이고, 전일에 일찍이 어렵고 조심히 여기며 백성들을 진휼치 않을 수 없었던 것들을 지금은 점점 매몰차게 돌아보려 하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진실로 어리석은 신이 말한 바, 하루하루가 심해져 간다는 근심거리입니다. 그리고 얼마 전에 배와 잣을 가지고 갔던 사행의 보고가 마침 또 이럴 즈음에 이르렀는데 북방 소식이 크게 위험스럽습니다.
오늘날의 계책은, 내실있는 덕을 닦으며 은혜로운 정사를 펴 우선 인심을 굳게 뭉치게 하고, 경박한 논의를 억제하며 충실을 숭상하여 우선 인재들을 거두어들이고, 쓸데없는 비용을 줄이고 역사를 일으키는 것을 신중히 하여 우선 인력을 온전하게 기르는 데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상벌을 내릴 즈음에는 더더욱 마음을 써서 상을 반드시 때맞춰 내리고 벌은 친하다고 하여 면제되는 일이 없어야 할 것이며, 한 사람을 등용하고 한 사람을 물리치는 일에서도 다시 전일처럼 고식으로 귀결되는 일이 없게 하신다면 자강의 방법이 반 이상은 이룩될 것입니다. 전하께서 병으로 게을러진다거나 위험을 걱정해 의지가 꺾이는 일이 없이 늘 염두에 두시어 원대한 계획을 펼치신다면, 오늘날의 근심거리들이 나라를 일으키고 성세(聖世)를 여는 일대 전기가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신이 삼가 본관의 신료들이 올린 차자 안에 낱낱이 말씀들인 신초(新抄)와 별대(別隊)에 관한 사항을 보았습니다. 신이 청컨대 다시 한번 말씀드리겠습니다. 신이 듣건대 군정을 닦는 도는, 정선(精選)을 귀히 여기고 많은 것을 귀히 여기지 않으며, 교대로 번서는 것을 편하게 여기지 오랫동안 번드는 것을 편하게 여기지 않는다고 합니다. 얼마 전에 훈국이 의논드린 병제를 바꾸자는 것은 곧 정선에 힘쓰려는 계획이며 바로 교대로 번서는 방법이었습니다. 놀고 먹는 자를 줄여 경상의 비용을 비축하며 늙고 게을러 빠진 자들을 제거하고 용맹스런 자들을 모으는 것을 누가 급선무라 이르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오랫동안 병적에 편입되어 있던 군졸들은 급작스런 감원에 대해 원망하기 쉽고, 새로 모집된 병사들은 보충시키는 군사로 뽑힌 것에 대해 내키지 않아 하는 법이니, 반드시 많은 세월을 두고 차츰 바꾸면서 새롭게 해야 거의 조용하게 잘 변혁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일을 주관하는 신료들이 여러 영문(營門)에 임시로 소속되었던 자들을 찾아내 이속시키는 외에도 또 제도로 하여금 일시에 정장(丁壯)을 찾아내도록 하여, 중외의 소요가 끊이지 않으니 신은 잘못이라 생각합니다. 지금으로서는 이미 얻어진 숫자를 취하여 서서히 단결시키고 차츰 채워나가면서, 정선을 힘쓰고 교대로 번서게 하려던 본의를 잃지만 않는다면 될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이런 강제책을 서둘러 백성들을 못살게 한단 말입니까.
또 신이 일찍이 듣건대, 국가의 경비란 항상 오래 쌓아놓은 것은 점점 축나고 새로 거두어들이는 것은 차츰 적어질까 걱정인데 한번 흉년이라도 만나면 곧장 바닥나는 것을 걱정한다 했습니다. 이것은 꾸어서 생활해야 하는 것을 면치 못하는 중인 이하 가정의 형편과 같은 것입니다. 하물며 약자로서 강자와 이웃하고 작은 나라로서 큰 나라와 이웃해 있으므로 금이나 비단을 갖다 바치느라 힘을 허비치 않을 수 없습니다. 신이 이런 연유에서 일찍이 ‘나라의 재물을 누가 절약치 않겠습니까만 우리 나라가 오늘날에 있어 재물을 더더욱 절약치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런대로 편안한 날이 오래되다 보면 변고란 반드시 생겨납니다. 만에 하나 이웃 나라들끼리 사건이 연달다 보면 명나라 말년에 모수(毛帥)가 주둔한 섬에 군량미를 보냈던 일이나 청나라 사람들에게 을유년 바다로 군량을 운송했던 일076)  들은 또한 우리 나라가 이미 호랑이에게 물려본 것들입니다. 이런 시기에 국가가 어떻게 계책을 세워야할 지 모르겠습니다.
지금 다만 국경의 분쟁이 눈앞에 닥쳐 있지 않고 궁실 안에서의 오락이 마음을 빼앗기에 족하기 때문에 조정을 다스리는 예의가 차츰 번지로워져 가고 궁금의 사용 물품들이 날로 사치로 흐르고 있습니다. 옛 사람이 말한 ‘송 나라 왕실이 남쪽으로 쫓겨간 뒤에 태평을 가장하고 사기를 꺾으면서 사대부들로 하여금 호수며 산에서 노래와 춤을 탐닉하도록 만들었다.’고 한 말에 불행하게도 가깝습니다.
진실로 나라가 이런 것들에 대하여 한결같이 답답하게 굴며 헤맨 채 계획을 바꾸지 않는다면, 신의 생각으로는 백성은 시들고 나라는 파리해져 점차 위태하고 쇠약한 데로 빠져들 것이니, 이른바 인력을 온전하게 길러 자강을 도모하는 계책은 끝내 이루어질 가망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가자 안에 놓아둔 채 내려보내지 않았다.

 

11월 3일 임진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김만균(金萬均)을 교리로 삼았다.

 

11월 4일 계사

양사가 다시 공주 저택의 칸수와 터를 정해진 법제대로 한결같이 따르도록 논하는 계를 올렸다.

 

영의정 정태화가 열한 번째 사직소를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 도타이 유시하였다.

 

함경도 온성(穩城)의 세미(稅米)·대두(大豆)·노비 신공(奴婢身貢)과, 홍원(洪原)·명천(明川)·경성(鏡城)의 우황 세폐(牛黃歲幣)와 의사(醫司) 약재가(藥材價)를 모두 감해주고 인삼 가포(人參價布)는 반만 감해주며, 종성(鐘城)·경흥(慶興)·삼수(三水)·갑산(甲山) 등 네 고을의 세미·대두·노비 신공도 반을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이때 북로(北路)에 흉년이 들었는데 본도 감사의 장계로 인해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온성에 귀양가 있던 죄인들을 남도(南道)로 배소를 옮겼다.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의 장계에 북로의 흉년이 든 상황을 갖춰 말하면서 정배 죄인을 모두 북로로 보냄으로써 주객이 함께 곤궁해지는 폐단이 빚어진다고 하자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하게 하였는데, 온성이 더욱 재앙을 입었다고 하여 이 명령이 있게 된 것이다.

 

평안도 위원(渭原)·이산(理山)·벽동(碧潼)·창성(昌城) 등은 거두어 들일 쌀의 본 수량 6 두 중 4두를 감하고, 강계(江界)·삭주(朔州)·삼등(三登)·강동(江東)은 3두를 감하고, 의주(義州)·용천(龍川)·선천(宣川)·곽산(郭山)·정주(定州)·가산(嘉山)·안주(安州)·숙천(肅川)·순안(順安)·평양(平壤)·중화(中和)는 5두 중 반을 감하고, 그 나머지 귀성(龜城) 등 22읍은 6두 중 2두를 감했다. 그들이 재해를 입은 경중에 따라 차등있게 감해준 것이다.

 

11월 5일 갑오

장령 정중휘(鄭重徽),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공조 판서 유혁연(柳赫然)을 육경(六卿)에 합당하지 않다고 논하며 체직시킬 것을 청하자, 상이 따르지 않고 대간의 논박을 괴이하고 망녕되다고 배척했다. 정중휘 등이 잇따라 인피하였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자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도제조 허적이 나아가 상의 병세를 묻고 여러 의원들에게 진맥해 보기를 청하였다. 이어 약 쓰기를 중지하였는데, 상이 입에 쓰다며 들기를 싫어해서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신이 연일 서연(書筵)에 드나들고 있는데 세자의 독해력이 날로 진취되고 있습니다. 이때를 놓치지 않는다면 머지않아 크게 통할 것입니다. 찬선(贊善)의 계급은 3품입니다. 이유태(李惟泰)가 시묘살이를 마쳤는데 이 직임에 마땅하고, 다른 사람은 의망할 만한 사람이 없습니다."
하니, 상이 단망(單望)으로 올릴 것을 계하하였다. 상이 옥당과 양사의 차자를 꺼내어 허적에게 보이면서 이르기를,
"대신이며 여러 신료들과 상의하고자 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올해 목화 농사는 참으로 큰 흉년이고 충청도의 양전(量田)이 고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이 적잖습니다. 신이 영상과 함께 후일 등대했을 때 아뢰려 했습니다. 군사를 선발하는 한 가지 일에 있어서는 훈국(訓局)이 비록 백성들을 해치는 일이 없었다고 하지만 받들어 시행하는 사이에 지방의 소요와 원성이 없잖았으니, 옥당의 차자 내용이 옳습니다."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함경 감사의 장계를 보니 육진(六鎭)의 백성과 전가 사변(全家徙邊)된 죄인들이, 주인이나 손이나 함께 곤궁을 면치 못해 어린아이를 버리고 도망치는 자까지 있다 하니, 지극히 놀랍고 참혹스럽습니다. 이 무리들을 관대하게 처분해 주어야 할 것입니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나라에 기강이 없어 변방으로 유배된 자들이 방면받을 심산으로 농사를 짓지 않아 굶주리는 지경에 빠지게 되어 결국 주인과 손이 함께 곤궁해지는 결과를 초래한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년 가을을 기한으로 하여 다른 도로 나누어 보내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이 아뢰기를,
"근래 인심이 좋지 못해 법금(法禁)이 날로 치밀해짐으로써 법망에 걸려든 자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습니다. 원통하고 억울한 사연을 풀어주고 죄수들을 소결하는 것은 참으로 하늘에 복을 빌어 나라의 운명을 영원하게 하는 근본입니다."
하였다. 이때 호적에 누락된 죄로 전가 사변되는 자들이 길에 연달아 근심과 원성이 날로 심해졌기 때문에 조복양이 이같이 말한 것이다. 허적이 아뢰기를,
"재앙과 이변이 근년처럼 심한 적이 없는데, 북로(北路)에 연달아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명령을 감당하지 못하므로 전부터 식자들이 북변을 근심스럽게 생각해 왔습니다. 조복양이 이 때문에 말씀드린 것입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함경도만 소결해야겠는가?"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팔도에 일체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부서를 설치하여 소결하라고 명하였다.

 

11월 6일 을미

사간 신명규 등이 이조 낭관들이 압반(押班)077)  하는 불합리성을 논하며 잘못된 전례를 고칠 것을 청하자, 상이 따랐다.

 

11월 7일 병신

밤 1경에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고 우박이 내렸다.

 

대왕 대비의 탄일이므로 백관들이 진하(陳賀)하였다.

 

헌납 윤심(尹深)이 서필원(徐必遠)에 대한 논계에 이의를 제기하며 구차히 찬동할 수 없다고 인피하자, 정언 유상운(柳尙運)과 이단석(李端錫) 등이 동료에게 무시당했다며 잇따라 인피하였다.

 

예조 정랑 남궁옥(南宮鈺)을 보내, 길재(吉再)와 김장생(金長生)의 서원에 액호(額號)를 내렸다.

 

영의정 정태화가 소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관대한 비답으로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함경도에 흉년이 들었다는 이유로 도내 각 고을과 삼영(三營)의 월과(月課)를 내년 9월까지 정지시켰다.

 

11월 8일 정유

정원이 아뢰기를,
"근래 재앙과 이변의 발생이 거의 없는 달이 없습니다. 지난밤의 천둥 번개가 친 놀라운 변고는 동절기에 발생한 것이니, 하늘의 위엄스런 노여움이 어떻게 이 지경에까지 이를 수 있단 말입니까. 이것을 해소할 방안은 일상적이고 형식적인 것들로서는 결코 해낼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성상의 건강이 안녕치 못한 때이니 비록 정전(正殿)에 나아가 널리 신료들을 맞이할 수는 없겠지만, 의당 침실에서라도 간단한 예절만을 차려 공경이나 시종들로 하여금 돌아가며 입시토록 해 자주 자문의 말씀을 내려야 합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의 이해로부터 시정(時政)의 잘잘못까지를 낱낱이 말하게 해서 채택하신다면 성인의 교화에 도움이 어찌 적다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밤새 일어난 바람과 번개의 이변으로 가슴이 두근대고 혼이 달아나 참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었는데, 지금 계사를 보니 마음에 가상하게 여겨진다.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사간 신명규가, 윤심이 서필원에 대한 일에 이의를 제기한 일로 인해 인피하면서 재앙과 이변의 참혹함과 기강의 무너짐을 극력 말하고, 또 아뢰기를,
"전하에게는 분발하려는 의지가 적고 신료들은 최선을 다하려는 의리를 잊고 있습니다. 간관을 형식적으로만 만들어 놓고 항상 싫증을 내며 박대하는 거조만 있으며, 궁금은 엄숙치 못해 덕에 의해 깨끗이 교화되는 아름다움이 없습니다. 조정에는 사사로운 뜻들이 횡류하고 고관들 사이에는 자신만을 위하려는 생각뿐입니다. 옥후가 미령하신 지가 오래되어 신료들의 접견이 오랫동안 막혀 있고 대신은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있습니다. 성상의 몸을 조섭하고 보호할 방도와 위험을 붙잡고 시대를 구제할 방책들에 대해서 황급해 하며 먹고 잘 겨를이 없어야 할 터인데, 오히려 편안해 하며 두려움을 모르고 있습니다. 이같은 상태로 하늘의 노여움을 돌이킬 수 있겠으며 나라 일을 해볼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어제 바람과 번개의 변고로 마음과 정신이 떠다니는 듯하여 스스로 안정을 찾을 길이 없었는데, 너의 말을 보고 나라를 근심하는 정성을 매우 가상하게 여겼다. 너는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이때 상의 건강이 오랫동안 회복되지 않고 핵환(核患)이 점점 심해졌는데, 조정에는 온갖 법도가 해이해졌다. 백성들은 밑에서 원망하고 하늘은 위에서 노여움을 보여 비상한 재변이 거듭 나타났으므로 사람들이 더욱더 두려워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열두 번째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답하기를,
"아, 어젯밤 천둥과 우박의 변고로 마음과 혼이 달아나, 스스로를 안정치 못하겠다. 이런 시기에는 덕이 높은 대신들과 구제할 방책을 함께 의논해야 하는데 도리어 들어가서 출사하지 않고 있으니, 생각이 이에 미치면 나도 모르게 한심해진다. 경은 속히 출사하여 도를 논함으로써 목마르듯 기다리는 나의 바람에 부응토록 하라."
하고, 사관을 보내 유시하였다. 정태화는 오히려 신병이 중하다며 출사하지 않았다.

 

좌의정 허적이 번개가 친 변고로 인해 상차하여 면직(免職)을 청하는 한편 또 수성(修省)하는 도리를 말하자, 상이 답하기를,
"아, 어젯밤 천둥 번개의 변고로 마음이 써늘하고 뼈속까지 놀람이 사무쳐, 밤 늦게까지 잠을 이루지 못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이제 차자를 보니 경계하고 깨우치는 뜻이 간략하면서도 지극하다. 마음에 새겨두지 않을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재앙은 실상 과인에게 말미암은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 지금의 어려움을 구제토록 하라."
하였다.

 

충청도에 소 돌림병이 크게 번졌다.

 

11월 9일 무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교리 김만균(金萬均), 수찬 이규령(李奎齡), 부수찬 김만중(金萬重)이 청대하여 입시하였다. 허적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런 비상한 변고를 만났으니 전하의 염려가 반드시 깊을 것입니다. 의관의 말을 들으니 상께서 잠자리가 편치 못해 열이 높다 하였습니다. 때문에 증상이 어떤가 알고도 싶고 또 속히 품정할 일도 있고 해서 감히 청대하였습니다."
하였다. 또 아뢰기를,
"신같이 보잘것 없는 사람이 외람되이 정승 자리에 끼어, 면직을 빌어도 허락되지 않으니 단지 황송한 마음만 더할 뿐입니다. 또 생각건대, 상께서 대단한 잘못도 없는데 천재가 이다지도 참혹합니다. 전하에게 만일 잘못이 있다면 신이 어찌 어떤 일에 대한 응징이라 지적해 말씀드리지 않겠습니까."
하고, 이어 여러 의원들로 하여금 들어가 진찰하게 한 뒤, 여러 가지 일들을 의논해 결정하기를 청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이 비록 쾌락에 빠진 잘못은 없지만 기강이 퇴폐되어 있는데도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없고, 간관(諫官)을 설치해 두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받아드리는 아름다움이 없고, 어진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혜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해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흩어졌다. 위에서는 도로서 사물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서는 법도를 지킴이 없어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은 진실로 이 점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허적은 정승 자리에 있는 몸으로 부인네며 환관들의 충성에 지나지 않는 충성을 하려 하고 문서를 기한 안에 꾸미는 것에 지나지 못하는 직무나 다하려 하였다. 비상한 재앙을 만나서도 날마다 상의 앞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말하는 바가 이같으니, 애석하다.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41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52면
【분류】왕실-국왕(國王) / 과학-천기(天氣)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상이 비록 쾌락에 빠진 잘못은 없지만 기강이 퇴폐되어 있는데도 진작시키려는 의지가 없고, 간관(諫官)을 설치해 두고 있으면서도 기꺼이 받아드리는 아름다움이 없고, 어진 마음을 가졌으면서도 혜택이 백성에게까지 미치지 못해 나라의 근본이 이미 흩어졌다. 위에서는 도로서 사물을 헤아리지 않고 아래서는 법도를 지킴이 없어 한 가지 일도 믿을 만한 것이 없었으니, 하늘의 노여움은 진실로 이 점에서 연유한 것이었다. 그런데 허적은 정승 자리에 있는 몸으로 부인네며 환관들의 충성에 지나지 않는 충성을 하려 하고 문서를 기한 안에 꾸미는 것에 지나지 못하는 직무나 다하려 하였다. 비상한 재앙을 만나서도 날마다 상의 앞에서 모시고 있으면서 말하는 바가 이같으니, 애석하다.

 

황해와 충청 양도에 아직 양전을 끝내지 못한 고을은 내년 가을까지 중지토록 명하고, 또 삼남(三南)의 목화밭을 급재(給災)하라 하였으며, 소결청(疏決廳)을 설치하여 서울에 수금된 죄인은 금부(禁府)와 형조로 하여금 우선 소결하라 하고, 또 명하여 경기도에 내년 봄 거둘 대동미(大同米)를 매결(每結)당 2두를 감해주게 하였다. 옥당이 올린 차자로 인해 대신과 의논해서 이런 명이 있었던 것이다.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황해도에 양전(量田)을 다시 실시하는 네 고을의 전삼세(田三稅)는 새로 작성된 결수(結數)대로 거두어들이되 거두는 쌀은 잠시 동안 옛 결수대로 거두어들여 상납하고, 도내 각 고을의 양전이 끝나기를 기다려 새로 작성된 결수에 따라 쌀을 거둘 것을 본도 감사의 장계로 인해 윤허하셨습니다. 다시 양전한 충청도의 고을들도 해서(海西)에서 거두어들이는 것처럼 할 것을 해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이 비록 위에서 덜어내 아래를 보태주는 정사이겠지만 백성들이 으레 그럴 것으로 받아들일 것이고 보면, 양전이 끝날 때까지 한정해 시행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호서(湖西) 선혜청(宣惠廳)의 보유량이 이미 바닥이 났습니다. 무신조(戊申條) 제용감(濟用監)의 정포가미(正布價米) 1천 9백 14석 중 1천 석은 이미 호조로 수송되었으나 기유조(己酉條) 세폐가(歲幣價) 대동목(大同木) 2백 30동(同) 44필(匹)은 전연 수송되지 않았습니다. 올 세폐(歲幣)는 이미 호조가 애써 준비해서 보냈으니, 아직 수송되지 않은 정포 작미(正布作米) 9백 14석과 세폐가 대동목 2백 30동 44필은 아울러 깎아주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주서(注書)를 시켜 옥당의 신하들을 부르도록 하였다. 이민적(李敏迪)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변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오늘날 같은 때는 없었을 것입니다. 10월에 천둥이 이미 두 번씩이나 발생하였고 한겨울에 큰 번개가 쳐 또한 심상치 않습니다. 상께서도 조용히 조섭하시는 중에 두렵고 근심되는 마음이 어찌 한량이 있겠습니까. 암탉이 수탉으로 변화한 것에 이르러선, 이는 전대에 있어 쇠망의 조짐이었습니다. 전하께 어떤 실덕(失德)이 있어 이런 일들이 초래됐는지 알길이 없습니다. 백성의 힘을 두터이 기르고 민폐를 덜어주며, 공상(供上)을 줄이고 정전(正殿)을 피하며, 언로를 넓히고 사기를 진작시키는 것이 참으로 재이를 해소하는 실지의 일입니다. 그런데 지난번 신들이 차자로 말씀드린 일들 가운데서 시행한 바가 어떤 것들인지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좌우에서 채택해 시행한 일들을 하였다. 이민적이 또 별대(別隊)의 군사를 뽑는 폐단을 말하며 중지해야 한다고 거듭 말씀드렸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김만중이 나아가 아뢰기를,
"정치의 방법상 선왕의 제도를 개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지난번에 《대전(大典)》을 바로잡으라는 명령을 내려 관아를 설치하기까지 하자 온 나라가 모두 우러러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뒤 덮어두고 있어 이름만 있고 실상이 없습니다. 공주의 저택에 관한 일에 구애되는 바가 있어 그런 것은 아닙니까? 송(宋)나라희풍(熙豊)078)   연간에 삼부족설(三不足說)이 있어 논자들이 망할 징조라고 했습니다. 지금 공주의 저택에 관한 일로 상하가 서로 버틴 지 이미 여러 달이 지났는데도 한결같이 정해진 법제대로 따르는 일이 없었습니다. 이는 조종(祖宗)도 본받을 것이 없고 사람의 말도 돌아볼 것이 없다라는 말에 불행하게도 가까운 것입니다. 지금처럼 재앙을 만나 크게 놀라워하고 있는 시기에 또 제도를 개정하지 않는다면, 이는 하늘의 변고도 돌아볼 것이 없다라는 것으로 송 나라 말기와 다름이 없는 것이며, 태무(太戊)가 상상(祥桑)의 재변을 만나 선왕의 정사를 닦은 것과 동떨어진 것입니다. 신은 법전(法典)을 수정하여 정비하는 것이 하늘의 노여움에 응하는 최우선의 일이라 생각합니다."
하자, 상이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김좌명이 나아가 아뢰기를,
"김만중의 말은 곧고 절실한 말입니다."
하니, 상이 그제서야 절실한 말이라고 하였다.

 

전 찰방 송형구(宋亨久)가 상소하여 내년 윤달이 잘못되었음을 말하고 또 시헌 역법(時憲曆法)의 오차를 논하자, 상이 그 상소를 예조에 내려 관상감으로 하여금 의논해 아뢰게 하였다. 본감이 송형구로 하여금 본감의 관원 송이영(宋以穎)과 논란토록 하였는데, 송이영이 송형구의 말이 옳지 않다고 해 결국 시행하지 않았다.

 

개성부에 이달 7일에 천둥 번개가 쳤다.

 

11월 10일 기해

영의정 정태화가 상소하여 체직을 빌었으나, 상이 불허하였다.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피혐하였다. 서필원에 대한 논계에 이미 참여하여 간관들로부터 비판받은 것이 장관이나 다름이 없어서였다. 이때 인피한 대관들이 연일 피혐하여 여러날 동안 처치를 할 수 없게 되었다. 전례에 없는 것이어서 많은 사람들이 비난하였다.

 

11월 11일 경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 및 의금부와 형조의 당상을 인견하여 수금된 죄인을 소결(疏決)하였다. 중죄인은 귀양보내고 가벼운 죄인은 석방하였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동료들이 인피하였는데 감히 버젓이 있을 수 없다며 인피하자, 헌부가 처치하여 헌납 윤심(尹深)은 체직시키고 인피했던 양사의 관원은 모두 출사케 하였다.

 

11월 12일 신축

대사헌 유철(兪㯙),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사간 신명규(申命圭), 정언 이단석(李端錫)·유상운(柳尙運), 지평 홍만종(洪萬鍾) 등이 인피하였다. 인피하며 지연시킨다고 대신들로부터 비난을 당하였기 때문이다. 헌부가 처치하여, 유철·신명규·홍만종은 체직시키고 강백년·이단석·유상운은 출사시켰다.

 

소결청(疏決廳)을 설치하고 좌상 허적을 도제조로, 이경억(李慶億)·민희(閔熙)·이만영(李晩榮)·이원정(李元禎)을 당상으로 삼았다. 뒤에 다시 김좌명(金佐明)·조복양(趙復陽)·오정일(吳挺一)·정지화(鄭知和)·권대운(權大運)으로 직임을 살피게 하였는데, 문서가 너무 많아서였다.

 

제도의 감사들에게 하유하여, 죄수를 소결하여 아뢰게 하였다.

 

대마도에서 보낸 차왜(差倭) 귤성진(橘成陳)이 동래에 도착했는데 볼 일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으면서,
"접위관(接慰官)을 만나 말하겠다."
고 하였다. 동래 부사가 보고하자 정화제(鄭華齊)를 접위관으로 삼았다.

 

11월 13일 임인

지평 신정(申晸)이 피혐하여 체직되었다. 관직을 가진 채 시골에 내려갔기 때문이다. 이때 대각이 회피하는 자리가 되어, 체직되고자 하는 자들은 대각에 임명되었다는 말을 들으면 곧장 도성 밖 수십 리 길을 벗어났다가는 관직을 가진 채 고향으로 내려갔다며 곧장 인피하여 체직되기를 꾀했다. 식자들이 한심해 하였다.

 

집의 윤변(尹抃)이 재이로 인한 상소에서, 삼남(三南)의 수전(水田)에는 분수(分數)에 따라 급재(給災)하고 목화밭에도 급재하며, 호서의 양전이 끝난 고을에 그대로 구결(舊結)을 쓰도록 해줄 것을 청하고, 또 훈국의 별대가 가진 폐단, 각 고을들의 조적(糶糴)을 감해 줄 것, 안민창(安民倉)의 역사가 백성들에게 해를 끼치는 점, 산골과 바다 근처 여러 고을들을 일체 쌀로 거두는 것의 편리함, 내탕(內帑)과 각 관아의 은포(銀布)를 꺼내 백성의 부담을 보조해야 하는 마땅함을 말하였다. 소가 올라간 지 여러날 만에 상이 그 소를 묘당에 내렸는데, 시행된 것도 있고 시행되지 않은 것도 있었다.

 

11월 14일 계묘

도승지 권대운(權大運), 우승지 이정(李程), 우부승지 박세견(朴世堅), 동부승지 이지익(李之翼) 등이 상소하여 체직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헌부가 유혁연(柳赫然)을 체직하라고 논계했을 때 상이 괴이하고 망령스럽다고 배척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언 유상운이 상소하여 정원이 복역(覆逆)하지 않은 잘못을 논했기 때문에 권대운 등이 사직한 것이다.

 

경상도 하양(河陽)·칠원(漆原)에 사나운 호랑이가 횡행하고 다니며 사람을 물어 죽였다.

 

전라도에 10월 28일에 천둥 번개가 쳤다.

 

11월 15일 갑진

신시(申時)에 겹햇무리가 졌다.

 

동지춘추 강백년, 봉교 조사석(趙師錫)을 강화에 보내 각조(各朝)의 시책(諡冊)을 베끼게 하였다.

 

대사성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여 부묘는 큰 경사이니 별도로 한번 과거를 열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또 군사를 긁어모으는 일을 빨리 중지하고 베를 징수하는 것을 헤아려 감해주도록 청하였다. 소가 들어간 지 4개월이 지나서야 상이 답하였다.
"과거는 사체가 중대한 것이다. 어찌 아무 사람이나 증설(增設)을 청하여 후세에 무궁한 폐단을 끼쳐서야 되겠는가."

 

11월 16일 을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니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이때 상의 오른쪽 턱 밑 종기가 자리잡은 부분에 고름이 잡힌 지 이미 오래되어 곧 저절로 터져나올 기세였는데, 의관들은 여전히 혹인가 의심하고 있었다. 도제조 허적이 침의(鍼醫)와 약의(藥醫) 여러 의원들을 거느리고 입시하였다. 상이 여러 의원들에게 차례로 들어와 진찰해 보도록 하였다. 약의(藥醫)들은 모두가 침으로 건드려선 안된다고 하였고, 침의(鍼醫) 중 어떤 의원은 고름이 아니고 담수(痰水)라 하였고, 어떤 의원은 고름이 잡힌 것이니 바로 따버려야 한다고 말해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에 허적이 큰소리로 말하기를,
"의관(醫官)들이 의원이라는 이름만 지녔지 무슨 소견이 있습니까. 담핵(痰核)은 침으로 건드려선 안 된다고 하지만 이미 고름이 잡혔으니, 어찌 따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며칠 더 살펴보다 침으로 따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다고 하였다. 행 도승지 권대운(權大運)이 나아가 아뢰기를,
"이미 대각의 신하들에게 배척을 받았으니, 참으로 감히 버젓하게 공무를 볼 수가 없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대각의 논계에 대하여 괴이하고 망녕되다고까지 한 것은 잘못이었습니다만, 그러나 이제 와서 대각의 신하들이 또한 봉환하지 않았다고 허물하는 것도 온당한 것인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권대운이 근일 형옥(刑獄)의 문서가 대부분 지체되고 내려지지 않고 있음을 말하고 물러났다.

 

경상 좌병사 이상경(李尙敬)을 파직하였다. 도망친 군사를 붙잡아 먼저 목을 베고 나서 보고하였기 때문이다.

 

이상진(李尙眞)을 대사헌으로, 유하익(兪夏益)·이명익(李溟翼)을 지평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삼았다.

 

이유태(李惟泰)를 찬선(贊善)으로 삼았다. 이유태는 비록 송준길 등과 함께 소명을 받았으나 세상에서는 대부분 그를 인정하지 않았는데, 송시열(宋時烈)만 매우 크게 기대하며 이유태의 말만을 믿어주었다. 이유태는 송준길 등과 김장생(金長生)에게 함께 수업하여 정분이 매우 깊었다. 이유태가 일찍이 송준길에게 혼사를 맺자고 하자 송준길이
"혼사를 맺는 것은 벗을 정하는 것과는 다르다."
고 했다. 이는 대개 이유태의 문벌이 대등하지 못해서였다. 이유태가 이로 인해 감정을 품어 겉으로는 친한 척하면서도 내심으로는 미워하며 날마다 송시열에게 송준길의 흠을 말하니, 송시열이 이유태를 두둔하고 송준길을 멀리하였다. 송준길이 매번 탄식하기를
"우리 두 사람을 어울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어찌 윤선도(尹善道)만 못하겠는가."
하였다. 송시열 등이 하루는 모여 얘기하다가 인물의 고하를 언급하게 되었는데, 송준길이 이유태에게 묻기를
"나는 어느 정도의 사람인가?"
하니, 이유태가 말하기를
"공은 이름난 사람이지 학자는 아니네."
하자, 송시열이 웃었다. 송준길이 말하기를
"이름난 사람이 된 것만도 충분하네."
하였다.

 

집의 윤변, 장령 이하(李夏)가 논계하여 아뢰기를,
"죄인 유흘(劉忔)은 토병(土兵)을 위협하여 죄없는 사람을 생매장하였으니, 용서할 수 없는 죄를 범한 것입니다. 소결(疏決)해서는 안 되니 사형을 감하여 정배하도록 한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달 동안 굳게 논계하였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또 논계하여 아뢰기를,
"온성 부사(穩城府使) 최관(崔寬)은 국경을 넘나드는 죄를 엄하게 금지하지 않았으니 잡아들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누차 논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논계하여 아뢰기를,
"전라 우수사 이간(李旰)은 일찍이 온성 부사(穩城府使) 시절 탐학한 자취가 낭자하고 직사(職事)를 돌보지 않은 죄를 졌으니, 잡아들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누차 아뢰었으나 역시 따르지 않았다.

 

11월 17일 병오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 종기를 터뜨렸는데, 도제조 이하가 숙직하였다. 이날 상의 종기가 난 부분의 증세가 더욱 악화되자 약방에 명하여 침으로 따버릴 것인가를 의논하게 하였다. 약방이 여러 의원들과 들어가서 진찰해 보고 결정할 것을 청하자, 상이 허락하여 허적 등이 입시하였다. 상의 종기는 크기가 작은 병만하였는데, 여문 부분은 색이 몹시 붉었으며 상의 신색도 매우 좋지 못했다. 약의(藥醫) 등은 하루 이틀 더 기다리자고 하고 침의(鍼醫) 등은 고름을 따버리자고 하는 등 의견이 일치되지 않자, 상이 큰 소리로 이르기를,
"길가에 집을 지으면 삼년이 되어도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의원들이 이렇게 많으니 의논이 어떻게 일치되겠느냐. 고름따는 것을 지체하다가 만일 두통이나 오한이 있게 되면 어쩔려고 하느냐. 속히 침놓을 기구를 갖추고 오도록 하라."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물러나 여러 대신들에게 이 의논을 통지하는 한편 여러 기구들을 갖추어 다시 입시하겠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그러다가는 시간이 늦어질까 염려된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막중한 일을 어찌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알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지금 온 머리가 지끈거리는 데다가 또 정수리 부위가 가끔 통증이 오는데, 날씨가 추워서 그러는 것인가?"
하였다. 허적이 물러가기를 청하자, 도승지 권대운이 아뢰기를,
"군부의 병환은 밖에 있는 대신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하고, 마침내 물러났다.
이때 상의 핵환(核患)이 갑자기 심해졌는데, 여러 의원들이 증세를 파악해내지 못했다. 조정의 의논은 모두들 의원들의 말을 가벼이 믿고서 경솔하게 침을 댈 수 없다고 하며 의논들이 구구했으므로 인심이 흉흉하였으며, 약방의 여러 신하들도 얼굴에 핏기가 없었다. 다시 입시하여 침반(鍼盤)을 올리자, 상이 겉옷을 벗었다. 침으로 따려하자 얼굴색이 변했는데, 대개 그것은 여러 의원들이 이에 앞서 혹에는 침을 대선 안 된다고 말하여 상의 마음에 의심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 침을 대자 고름이 거의 한 되 가량 나왔다. 상의 낯빛이 비로소 온화해지며 시원하다고 하자, 도제조 이하가 기뻐 자신들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상이 이르기를,
"오늘 몹시 땡겼기 때문에 기어코 침으로 따려 했다. 종기를 따버리고 나니 마음이 아주 시원하다."
하며, 매우 기뻐하였다. 허적이, 약방이 숙직해야 할 것을 아뢰고 물러나오니, 여러 신하들이 모두 매우 기뻐하였다.

 

경상도 합천(陜川)에 10월 28일 지진이 발생했다. 경주에 이달 3일 오시(午時)에 태풍이 불어 모래가 날리고 돌맹이가 구르더니, 미시(未時)에 안개같기도 하고 먼지같기도 한 기운이 천지를 꽉 메워 햇빛이 점점 어두워져 사람을 분별할 수 없었고, 신시(申時)에 검은 기운이 태양을 가린 채 날이 저물었다.

 

11월 18일 정미

사시(巳時)에 햇무리가 지며 양이(兩珥)가 있었다. 햇무리 위에 관(冠)이 있고 관 위에 배(背)가 있었는데 좌우에는 극(戟)이 있었다. 그 빛이 모두 안쪽은 붉고 바깥쪽은 퍼랬다. 무지개와 같은 흰 기운이 양이로부터 나와 비스듬히 북쪽을 가리켰는데, 길이는 각기 수십 장(丈)이고 너비는 각기 한 자쯤이었다.

 

날씨가 추워졌으므로 해조로 하여금 빈 가마니를 숙위하는 군사들에게 지급하게 하고 옷이 얇은 자들에게는 동옷을 지급하게 했다.

 

집의 윤변과 장령 이하(李夏)가 법 적용을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자 정언 이단석(李端錫)이 처치하여 출사시키자고 청하였는데, 윤변 등이 또 구차하게 출사를 청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이단석도 처치가 잘못되었다고 인피하니 모두 체직되었다.

 

평안도에 이달 7일에 번개가 쳤다.

 

11월 19일 무신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가 침을 맞았다. 결분(缺盆)079)   근처에 종기가 자리잡아 곪았기 때문에 침으로 딴 것이다.

 

어의를 보내 영의정 정태화의 병을 살피도록 하였다.

 

형조가 아뢰기를,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 등이 세 번이나 항거하였으니 직첩을 거두고 출두시켜야 하겠으나, 모두들 재신(宰臣)이니 의금부로 옮겨 처치케 하소서."
하니, 상이 조사해서 조처하라고 하였다.

 

11월 20일 기유

지평 이명익(李溟翼)이 논계하여 아뢰기를,
"부호군 권집(權諿)은 전임 안동 부사 시절에 가까이 지내는 장사치에게 물금체(勿禁帖)를 만들어 주어 많은 황장목(黃腸木)을 베게 했습니다. 대간의 논계로 인해 조사받던 중 그의 아들을 보내 사사로이 청탁하였으니, 잡아들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논계하여 아뢰기를,
"안동 부사 이동명(李東溟)은 그의 사사로운 청탁을 받고 실상대로 적발하지 않았으니, 파직하고 서용치 마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서필원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논계와 유혁연(柳赫然)을 체직하라는 논계를 정지하였다.

 

11월 21일 경술

옥당이 지평 이명익이 혼자서 서필원에 대한 논계를 정지시킨 것을 논하여 차자로 파직을 청하며 아뢰기를,
"양사가 한꺼번에 빈 때를 엿보아, 양사가 같이 발의한 논의를 앞장 서서 혼자 정지시켰으니, 기회를 틈탔다는 혐의가 있을 뿐 아니라 또한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조짐이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체직을 명하였다.

 

11월 22일 신해

약방이 약을 상의해서 들였다. 약방이 여러 의원들과 선비들 중 약에 대해서 알고 있는 자들과 더불어 상의하니, 모두들
"크게 보(補)가 될 효험으로는 지금 드시고 계시는 황기 인삼차(黃茋人蔘茶)보다 더 좋은 것이 없겠으나, 만일 탕제(湯劑)를 겸해 드신다면 효험이 반드시 배로 나타날 것이다."
고 해서, 마침내 보중 익기탕(補中益氣湯)을 지어 올린 것이다.

 

11월 23일 임자

밤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약방에 명하여 도제조로 하여금 입직하지 말라 하였다.

 

지평 유하익(兪夏益)이 권집(權諿)과 이동명(李東溟)의 일을 연계하니, 상이 일체 잡아들여 신문하라고 명하였다.

 

11월 24일 계축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변황(卞㨪)을 장령으로, 신정(申晸)을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정언으로, 정영(鄭韺)을 경상 우병사로, 권도경(權道經)을 충청 수사로 삼았다.

 

조성보(趙聖輔)는 사람됨이 바르지 못하였는데 승진하는 데에 조급하여 요로를 분주하게 쏘다니므로 사람들이 대부분 비루하게 여겼다. 조성보는, 민정중(閔鼎重)에게 미움을 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서, 민정중이 고향으로부터 돌아오자 중로에까지 마중을 나가 아첨하여 빌붙으려는 심산을 가졌다. 이에 청렴한 여론을 지닌 자들이 더욱 그를 미워하였다. 서필원을 논박하지 않은 것으로 탄핵을 당했는데 이조 참의 김만기(金萬基)가 그의 청선(淸選)의 길을 막자, 조성보는 청렴한 여론에 용납되지 못할 것을 스스로 알고서는 외직에 보임되기를 애써 구해 평산 부사(平山府使)로 나갔다.

 

11월 25일 갑인

영의정 정태화가 출사하였다. 상의 건강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왼쪽 턱 밑 고름이 잡힌 곳을 침으로 땄다. 도제조 허적이 그대로 입직하겠다고 청했다. 병조 판서 홍중보(洪重普)가 상에게 아뢰기를,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자원병으로 모집하란 명이 이미 내렸는데, 경주 영장(慶州營將) 목임기(睦林奇)는 소속 각 고을들로 하여금 성쇠에 따라 억지로 정원을 정해 그 수를 채우게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어찌 소란치 않을 수 있겠습니까. 치죄하여 민심을 위로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허적이 그를 구원하는 말을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충청도의 백성들이 이 일로 인해 한창 소란스럽습니다. 옥당의 여러 신료들도 모두들 말하고 있으니, 이같은 무리들은 보이는 대로 중죄로 다스려 나머지 사람들을 격려해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은 너무 지나치니 무겁게 추고토록 하고, 별대를 채우는 일은 정지케 하라."
하였다. 이때 상주 영장(尙州營將) 민섬(閔暹)은 신중히 봉행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붙잡혀 신문을 당하였는데, 목임기는 백성을 소란스럽게 했으면서도 단지 추고만 당했으므로 인심이 더욱 심복하지 않았다.

 

11월 26일 을묘

집의 신명규(申命圭) 등이 아뢰기를,
"서필원에게 죄를 주라고 아뢴 것이 이미 여러 달이 지났으니, 비록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는 않았지만 공의(公議)는 이미 펴진 것이므로 한결같이 오랫동안 버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명익(李溟翼)은 양사가 함께 발의한 논계를 혼자서 정지시켜 뒤 폐단을 열었으니 파직하소서."
하며, 여러번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그런데 계사가 체모를 잃었으므로 크게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 또 논계하여 아뢰기를,
"지평 유하익(兪夏益)은 이명익이 멋대로 정계한 뒤 끝내 다시 논계하지 않았으니, 체차하소서."
하며, 여러번 아뢰었으나 상이 역시 따르지 않았다. 다시 서필원의 관작 삭탈을 논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1월 28일 정사

장령 정중휘(鄭重徽)가 사직소를 올리면서, 뭇 벼슬아치들을 면려시키고 언로를 널리 열며, 가까운 시종신들을 자주 접견하여 묻고 강론하며, 양전(量田)과 군사 충원을 시기를 헤아려 천천히 거행함으로써 인심을 위로하며, 어사를 파견하여 벼슬아치들의 승진과 좌천을 분명히 할 것을 청하였다. 사직소가 들어간 지 한 달 남짓이 되어서야 상이 답하였다.
"너의 진언한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사직하지 말라."

 

행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사직소를 올리면서 공구 수성하여 하늘의 견책에 답할 것을 청하자, 상이 답하였다.
"군주를 사랑하는 정성을 내 가상히 여긴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공조 판서 유혁연(柳赫然)이 탄핵당한 뒤 사직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박한 논의를 혐의할 필요가 없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정중휘가 이 때문에 인피하는 한편 또 법 적용이 잘못되었음을 가지고 스스로를 허물하자, 헌부가 처치하여 체직시켰다.

 

11월 29일 무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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