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경신
평안도 강변에 특히 심하게 재해를 입은 고을의 내노비(內奴婢) 신공(身貢)을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12월 2일 신유
이하(李夏)를 장령으로 삼았다.
12월 3일 임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료들을 인견하겠다고 명하였다. 약방이 접견은 병을 조리하는 데 방해된다며 중지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인견하니, 영상 정태화 좌상 허적이 나아가 상의 병세를 물었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신이 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정성을 다해 봉직하려 했는데, 나이가 이미 70에 이르렀고 고질이 된 다리의 병으로 인하여 참으로 힘을 쓸 수 있는 가망이 없습니다. 지금처럼 천재와 시변이 심한 때를 당해 신의 노병(老病)이 이같은데, 정석(鼎席)을 오랫동안 비우고 있자니 더욱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도 오랫동안 정승을 임명하지 않고 있음을 말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목임기(睦林奇)의 일을 신이 물러나 다시 생각해 보니, 추고에 그쳐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바깥의 논의들이 대부분 군사 선발로 인해 백성들이 동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만일 거듭 규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은 반드시 조정의 명령에서 나온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니, 그냥 그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자, 상이 파직하라고 하였다.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충청 병사 윤천뢰(尹天賚)가 장관(將官)을 시켜 군사를 모집한 것은 목임기의 일과 다름이 없습니다."
하니, 허적이 두 사람의 죄는 다르다고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병사가 장관에게 분부한 것과 영장이 좌수에게 분부한 것이 무엇이 다릅니까?"
하니, 정태화가 윤천뢰의 추고를 청하자, 상이 따랐다.
12월 4일 계해
집의 신명규, 장령 변황, 지평 신정이 인피하며 아뢰기를,
"지난번 이명익(李溟翼)이 멋대로 서필원에 대한 논계를 정지한 것은 참으로 방자한 짓이었기에 신들이 전례에 의거 논핵하였습니다. 대체로 신들의 뜻은, 비록 중대하게 발의된 논의이기는 하지만 여러 달 동안 굳게 논계해 이미 공의(公議)를 보였으니 또한 정계할 때가 없지는 않겠으나, 다만 이명익이 동료들을 기다리지 않고 앞장 서서 홀로 정계시킨 것은 크게 대간의 체통을 어긴 것이며 또 뒷 폐단을 연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이런 의견을 계사 가운데 언급했던 것인데 지금 듣자니 물의가 일어 크게 비난하고 있다 하니, 대각의 자리에 얼굴을 들고 있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모두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장령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대각이 일을 논할 때는 일의 크고 작음에 관계없이 정계하기 전까지는 청하는 말이 관철되기를 기약해야지 정계하고자 하는 뜻을 계사 속에 먼저 비쳐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서필원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논계가 마음대로 정계할 수 없는 것이라면 이명익의 방자한 태도는 통렬히 배척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에 ‘비록 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오래 버틸 필요는 없다.’라는 등의 말로 이명익을 논핵하는 말로 삼았습니다. 이미 정계의 잘못을 배척해 놓고 먼저 정계하고자 하는 뜻을 보이고 있으니 구차스럽고 연약하여 대간의 체통을 크게 잃은 것입니다. 집의 신명규, 장령 변황, 지평 신정을 아울러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5일 갑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이상진(李尙眞)이 신병을 핑계하고 나오지 않아, 체직되었다.
12월 6일 을축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집의로, 이광적(李光迪)을 장령으로, 정중휘(鄭重徽)를 헌납으로, 홍억(洪億)을 정언으로, 홍만종(洪萬鍾)·송기후(宋基厚)를 지평으로 삼았다.
12월 7일 병인
장령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훈련 별대(訓鍊別隊)를 새로 둔 것은 군정(軍政)을 변통시키자는 데서 나온 것으로서 당초의 본 뜻은 단지 편의에 따라 모집하여 차츰 채워가고자 한 것이었지 원래 기한을 정하거나 숫자를 정해 급급하게 뽑으라는 명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받들어 시행하는 사람들이, 한갓 능력을 내보이려고 갑작스럽게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하는 계산을 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신의를 잃고 국가에 원망이 돌아오게 하였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전 경주 영장 목임기는 각 고을을 돌며 향소(鄕所)의 장관(將官)들을 불러 놓고 등급을 나눠 숫자를 정해서 억지로 뽑도록 하였습니다. 조정의 뜻을 묻지도 않고 멋대로 긁어모았으니, 그 죄를 논하건대 파직에만 그칠 수 없습니다. 또 충청 병사 윤천뢰도 장관들로 하여금 정한 숫자를 모집하게 하여 온 도내가 야단법석입니다. 모집한다고 한 바에야 어떻게 정한 숫자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들이 조정의 본뜻을 본받지 않고 백성에게 소요를 일으켜 원망이 돌아오게 한 죄는, 결코 추고라는 가벼운 벌로 징계해 단속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경주 영장 목임기는 잡아들여 죄를 정하고 충청 병사 윤천뢰는 파직하소서."
하였다. 여러번 아뢰었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함경도 안변(安邊)과 문천(文川)에 11월 22일 지진이 발생했다.
12월 8일 정묘
밤 1경에 금성과 목성이 서로금성과 목성079-1)
【태백산사고본】 17책 17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55면
【분류】과학-천기(天氣)
承政院日記 217冊, 현종 10년 12월 8일기사에는 ‘金星與土星相犯’이라 되어 있음
12월 9일 무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1일 경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구미혈(鳩尾穴)에 뜸을 떴다. 가슴에 담이 막혀 먹고 마시는 것이 소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2월 12일 신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구미혈에 뜸을 떴다.
희천(熙川) 백성 세 사람이 국경을 넘다 붙잡혔는데, 엄히 형장을 가하고 귀양보냈다. 그 죄가 영이 내리기 전에 있었기 때문이다.
12월 13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풍지혈(風池穴) 곁 종기가 난 곳을 침으로 땄다. 약방의 도제조 이하가 입시하였다.
도당(都堂)이 홍문록(弘文錄)에 권점(圈點)을 행했는데, 윤경교(尹敬敎)·최후상(崔後尙)·신정(申晸)·이훤(李藼)·윤진(尹搢)·이하(李夏)·이합(李柙)·신후재(申厚載)·조위봉(趙威鳳)·신명규(申命圭)·민종도(閔宗道)·이민채(李敏采)·이당규(李堂揆) 등 13명이 참여되었다. 이합의 권점이 가장 적었다. 신후재는 선비다운 모습이 없었는데 김만기(金萬基) 형제가, 허적이 자신들의 숙부인 김익훈(金益勳)의 서용을 청해 준 것에 감격해 신후재를 과장되게 천거하여 옥당을 차지케 한 것이다. 신후재는 바로 허적 누이의 아들이었다. 식자들이 비루하게 여겼다.
12월 14일 계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이단하(李端夏) 등이 아뢰기를,
"오늘 본부의 자리에 해남(海南)에 사는 학생 윤선언(尹善言)의 처 원씨(元氏)가 직접 찾아와 정장(呈狀)하기에 그 소장 내용을 보니 이러하였습니다.
‘윤선언이 살았을 때 그의 아우인 윤선도(尹善道)의 둘째 아들 윤의미(尹義美)로 양자를 삼았는데, 윤의미가 일찍 죽고 두 아들만을 남기니 윤이구(尹爾久)와 윤이후(尹爾厚)였다. 윤이구가 또 아들이 없이 죽으니 윤이후가 선조의 제사를 받들어야 했다. 그런데 윤선도의 세째 아들인 윤예미(尹禮美)가 윤이후를 자신의 양자를 삼으로 하기에 원씨가 윤선도에게 편지로 물었더니 그의 답서에서 천지와 귀신을 들먹이며 윤예미의 뜻을 허락하지 않겠다고 맹세했기 때문에 다시 의심하지 않았다. 지난 겨울 윤예미가 과거를 보러 서울에 올라온 길에 윤이후를 양자를 삼으려는 심산을 가지고, 온천에 거둥하실 때 거짓으로 상언하기를 의미가 살았을 때 이미 양자를 삼기로 정했다고 말하며 입안(立案)을 작성해 냈다. 윤이후는 유복자로서 태어난 지 며칠 만에 그 어미마져 또 죽었는데, 그때 윤예미의 나이는 경우 18세로 아직 장가도 들지 않았었다. 어떻게 아들이 없을 줄을 미리 알고 양자를 상의 했겠는가. 법을 무시하고 양자로 삼은 것을 고쳐주기 바란다.’고 하였습니다.
윤이후의 부모가 이미 모두 죽었고 원씨와 윤선도도 모두 허락해 준 일이 없다면, 윤예미가 애비와 임금을 속이고 종가의 제사를 받들 독자를 몰래 빼앗아 자기의 아들로 삼으려 한 것입니다. 윤예미가 지금 이미 죽어 그의 죄를 소급하여 바로잡을 수는 없지만, 이같은 윤상(倫常)의 큰 변고를 때맞춰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처리케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몸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계복(啓覆)을 중지토록 명하였다.
12월 15일 갑술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양심과욕잠(養心寡欲箴)을 지어 올리니, 상이 관대하게 비답을 내렸다.
12월 16일 을해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12월 17일 병자
이때 서필원(徐必遠)의 관작을 삭탈하자는 논의가 이미 넉 달에 이르렀는데도 상이 따르지 않고 있었다. 이때 이르러 집의 이단하가 다시 그의 죄상을 열거하여 아뢰기를,
"서필원이 전후로 소장을 올려 어진이를 방해하고 나라를 병들게 한 일은 우선 차치하여 논의하지 않기로 하고, 다른 행동과 일들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그가 아내의 상을 당해서 10 일도 안 되어 장사를 지냈고 혼백(魂帛)으로 반혼(返魂)080) 하였습니다. 그가 예법을 무시하고 의리를 거스리는 것들이 대부분 이같습니다. 지금도 공의에 죄를 얻었으므로 양사가 번갈아 소장을 올리는 것인데 버젓이 집에 있으면서 군관청(軍官廳)을 자기 집 곁에 지어 놓고는 공사를 생각나는 대로 수응하며 아무런 거리낌이 없습니다. 공의를 돌아보지 않는 그의 방자함이 이같으니 장래의 폐단이 어느 곳인들 이르지 않겠습니까. 예(禮)·의(義)·염(廉)·치(恥)는 사유(四維)081) 라 일컬어지는 것으로 사유가 펼쳐지지 못하면 나라가 멸망하는 것입니다. 전하께서 이같은 사람을 높이 등용시켜 나랏사람들의 본보기로 삼고 계시는데, 사람들의 마음이 상실되어 나라가 나라꼴이 안 될까 두렵습니다. 삭탈 관작하소서."
하니, 상이 여전히 따르지 않았으며 이 글을 본 사람들은 너무 심한 논의라고 하였다. 이단하 등이, 《대전(大典)》대로 수령의 강서 취재법(講書取才法)을 거행하여 해조로 하여금 시행케 하라고 또 청하자 상이 해조에 명하여 품처하라 하였으며, 재임 중 상을 만나082) 까닭없이 산관이 된 자나 언관으로서 공죄(公罪)로 인해 산관이 된 자는 근무 일수를 모두 계산해 주던 법이 폐지되어 시행되지 않으니 해조로 하여금 법전대로 거행케 하라고 또 논의하여, 상이 따랐다.
형조가 죄인 이이백(李爾栢)이 신문 중 갑자기 죽은 것을 가지고 옥관(獄官) 및 의관(醫官)과 옥졸(獄卒)을 죄줄 것을 청하자, 상이 해당 관리들은 파직시킨 다음 추고하고 의관과 옥졸은 가두어 죄를 다스리라 명하였다.
12월 18일 정축
정언 유상운(柳尙運)이 상소하여 일을 말했는데 소가 들어간 지 여러 달이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상이 답하기를,
"너의 근심하고 사랑하는 정성을 가상히 여긴다. 마음에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유상운의 상소에
"연신(筵臣)이 말씀을 올리면 상의 기색이 심각해지고, 무장(武將)이 일을 아뢰면 메아리처럼 즉시 응한다"
라는 말이 있었다. 이는 상이 경연 중 여러 신료들이 나라에 대한 계책이나 백성의 근심을 언급하면 대부분 대답이 없고, 유혁연(柳赫然) 같은 보잘것없는 무리들의 말에 대해서는 응답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래서 유상운이 이같이 말한 것이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에 이달 11일에 긴 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12월 19일 무인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오른쪽 결분(缺盆) 위의 결핵(結核) 처에 침으로 고름을 땄다. 이때 상의 핵환(核患)이 곳곳에 고름이 잡혔으나 의관들의 의술이 정통하지 못하고 상이 약을 드시지 못했으므로 곪기를 기다렸다 침으로 딸 뿐이었다. 여러 신하들이 우려하였다.
12월 20일 기묘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 4경에 달이 태미원(太微垣)의 단문(端門) 안으로 들어갔다.
집의 이단하 등이 아뢰기를,
"국가의 대비(大比)083) 규정에, 문과 복시(文科覆試)의 초장(初場)에는 사서 삼경을 강하고 중장(中場)과 종장(終場)에는 부·표·책(賦表策) 등의 글을 시험하고 또 《대전(大典)》과 《가례(家禮)》를 강하고서야 비로소 녹명(錄名)을 허락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개 경술(經術)에 근본하고 문사(文詞)를 겸하고 법례(法例)에 밝게 하려는 것이니, 사람을 뽑는 방법에 있어서 법제가 잘 갖추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후세로 내려오면서 잘못 거행해 경을 공부하는 자들은 단지 구두만을 일삼게 하고 문장을 닦는 자들은 경술에 근본하지 않게 함으로써 학문이 거칠어지고 인재가 소모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스럽습니다.
대체로 구두와 훈석(訓釋)에 모두 틀리지 않고 강론이 소통되지 않더라도 한 장(章)의 대의를 잃지 않은 자는 조(粗)가 주어지고, 구두와 훈석 모두 분명하고 비록 대의에 통하고 있으나 융회 관통에는 이르지 못한 자는 약(略)이 주어지고, 구두와 훈석 모두 정밀 익숙하고 대의를 융회 관통하고 변설에 의심할 것이 없는 자는 통(通)이 주어집니다. 만일 이 규정을 시행하게 되면 능통한 자들이 드물 것이지만 연이어 점수[連畫]를 얻은 자를 뽑아 문사(文辭)로 점수를 보탠다면, 경을 공부하고 문장을 익히는 것이 하나로 합쳐지고 본말이 아울러 갖춰져 인재를 만드는 데 효과가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성균관과 함께 의논해 품처케 하여 중외에 반포하여 착실히 거행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문무과를 시취한 이듬해에는, 종친의 명선 대부(明善大夫) 이하에게 사서 삼경을 강하여 점수를 문과와 똑같이 주어 네 사람만을 뽑되, 1등 1명, 2등 1명, 3등 2명으로 하여 1등은 세 품계를 승진시키고 2등은 두 품계를 가자하고 3등은 한 품계를 가자한 뒤 연회를 베풀고 경하하는 것이, 《전속록(前續錄)》에 실려 있습니다. 조종조에서 종친을 권장한 뜻이 심상한 것이 아니건만 이 법이 폐기되어 시행되지 않은 지 오래입니다. 국가의 반석인 종친과 영명한 제왕의 자손들이 권장되는 바가 없어 모두 자포 자기하고 있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해조로 하여금 품지하여 거행하게 하소서, 그러나 내년이 바로 이를 시행해야 할 해입니다. 시험 기한이 박두해 있어 경서를 모두 외우게 하기 어려우니, 임진난(壬辰亂) 뒤 문무과의 식년시에 단지 사서와 하나의 경만을 강하게 했던 규정에 의거하여 시행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토록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관료들이 옛 풍습이라 핑계하고서 잘못된 전례를 굳게 지키려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이른바 옛 풍습이란 대부분 중세의 기강이 해이해진 뒤 사사로이 편해 보고자 한 풍조에서 나온 것들입니다. 그 중에서도 상관이 자기 일을 일로 생각치 않은 채 낮으로는 공무와 밤으로는 숙직을 모두 조사(曹司)에게 맡기는 것은 더욱 잘못된 풍조입니다. 온갖 벼슬아치들이 관청 일에 태만한 것과 벼슬아치들의 일이 거행되지 않는 것은 모두 여기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지난번 이조의 완결된 의논으로써 각사를 단단히 경계시켜 돌아가며 숙직하는 규정을 정하도록 하였습니다. 준행해 온 지 반년이 되어 이미 정식(定式)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듣건대 각사의 상관이 혹 편하려는 생각에서 폐습을 다시 답습하려 한다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모든 관아를 단단히 경계시켜 상관이 스스로 편하고자 모든 일을 조사에게 맡기는 풍조를 금하게 하소서. 그리고 이 뒤로 다시 전날의 폐습을 따르는 자가 있으면 적발해 죄를 내리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유흘(劉忔)의 정배를 환수하라는 논계가 오랫동안 받아드려지지 않자, 이때 이르러 정계하였다.
홍원(洪原)·명천(明川)·경성(鏡城) 세 고을의 세미(稅米)·대두(大豆)와 각종 노비들의 신공(身貢)을 종성(鍾城) 등 네 고을의 예에 따라 아울러 반을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1일 경진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이조가 아뢰기를,
"수령에게 사서(四書)·일경(一經)·《대명률(大明律)》·《경국대전(經國大典)》을 강하게 하는 것이 《대전(大典)》의 취재(取才) 조항에 실려 있으나, 이 법이 시행되지 않은 지 이미 오래입니다. 또 도목정(都目政) 때도 각사(各司)의 6품 이상 관원들에게 본조가 《대전》을 고강(考講)하여 그들의 능력 여부를 시험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이번 대간의 논계에서 이 법의 시행을 청한 것은 참으로 근거가 있는 바이니 당연히 법전대로 거행해야겠지만 또한 한계가 없을 수 없습니다. 문무관·생원·진사로서 일찍이 수령을 지낸 자 및 별천(別薦)으로 바로 6품에 오른 자는 물론 학생(學生)이나 음사자(蔭仕者)를 본조가 개좌할 때마다 사서·일경·《대명률》·《경국대전》을 차례로 고강하여, 그 중 문의(文義)에 능통하고 법의(法義)를 깨닫고 있는 자는 수령에 주의(注擬)하도록 하고 그 중 연달아 세 차례 불통한 자는 도태 제거시키는 것으로 법을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2일 신사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간원이 논계하여 아뢰기를,
"고산 현감(高山縣監) 이박(李煿)은 임지에 도착한 뒤로 정사를 구실아치에게 맡겨버렸으며, 가속들로 하여금 향교를 구경하게까지 하였습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덕산 현감(德山縣監) 염진명(廉振名)이 정사를 돌보지 않은 정황을 논하며 파직을 청하고, 또 논계하여 아뢰기를,
"강화 도사(江華都事) 이만휘(李晩輝)는 형장(刑杖)을 오로지 숭상해 많은 백성들로부터 원성을 초래했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여러 차례 아뢰자 이에 따랐는데 이만휘에 대해서는 체차만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법전(法典)에 ‘중이 되려고 하는 자에게는 정전(丁錢)을 받고 도첩(度牒)을 발급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정전은 정포(正布) 20필이 법으로 정해져 있는데, 중이 된 지 석 달 안에 도첩을 받지 않는 자에 대해서는 친족이나 이웃이 관아에 아뢰어 환속시키고 아뢰지 않는 자는 아울러 죄를 묻도록 되어 있습니다. 「전속록(前續錄)」에 ‘군액(軍額)이 충분해 질 때까지는 중에게 도첩을 주지 않는다.’라는 영이 있는데, 이는 대개 이 시기에는 도첩을 받지 않으면 감히 중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이같이 영을 만든 것이었습니다.
근세에 이르러서는 중에게 도첩을 발급하는 영이 온통 폐기되었으므로 마음대로 중이 되려는 자들에 대해서 또한 금지하는 일이 없어 백성들이 부역을 피해 연이어 머리를 깎게 만들었습니다. 그리하여 양정(良丁)이 날로 감축되어 군액을 충원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이미 지난날 중이 된 자들에게 모조리 정전을 거두어들일 수 없겠지만 도첩을 소급해서라도 발급해야만 앞으로의 폐단을 그래도 금지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해조로 하여금 내년부터 옛 법을 닦아 거행케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품처케 하였다. 그뒤 고금이 서로 다르고 일에 장애가 많다 해서 시행하지 않았다.
12월 24일 계미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밤 4경에 화성이 저성(氐星) 안으로 들어갔다.
12월 25일 갑신
의례적인 세초(歲抄)의 은전을 내려 파산 중인 벼슬아치들을 서용하였다. 세초(歲抄)가 들어가면 다음날 계하하는 것이 전례였다. 인조조에서는 시기를 넘기지 않았고 효종조에서도 열흘을 넘지 않았는데, 지금의 조정에서는 바로 계하한 적이 없고 거의 한 달이 되어서야 비로서 계하하였다. 이는 대개 상의 건강이 좋지 못한 것에서 발단된 것이 전례로 굳어졌기 때문이었다. 논자들은 여기에서 세 조정의 부지런한 정도를 알 수 있다고 했다.
황해도 연안(延安)·배천(白川)에 본원 11일 안개가 사방에 좍 끼었으며 우박이 번갈아 내렸고, 사시(巳時)에는 천둥까지 있었다.
12월 26일 을유
도목정을 실시해 이단석(李端錫)을 사간으로, 이헌을 부교리로, 최후상(崔後尙)을 부수찬으로, 신후재(申厚載)를 수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전교하였다.
"내일 아침에 영상과 좌상을 조정에 들라하여 정승을 뽑게 하라."
헌부가, 경상〔전라〕 좌수 우후 최주화(崔柱華)가 사람을 잘못 죽인 죄를 논하여 잡아들여 다스릴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요사이 별대(別隊)를 채우는 일로 인해 민간에서 이는 소요의 폐단이 끝이 없습니다. 병사(兵使)와 영장(營將)들이 신중히 봉행하지 않는 죄도 이미 더없이 놀라운 터에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은 고향에 내려가는 휘하의 군사들에게 한정(閑丁)을 은밀히 찾아내 이름을 적어 보고하게 한 다음 바로바로 한정이 살고 있는 고을에 통보해서 그 사람의 신역(身役) 유무를 조사케 하였습니다. 백성들의 놀라움과 소요가 이로 인해 더욱 높아가고 있으며 조정의 사체 또한 이같아선 안 됩니다. 유혁연을 무겁게 추고토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시 아뢰자 따랐다. 또 황헌(黃瀗)의 죄를 논하여 서용토록 한 명을 환수하라고 청했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한 달이 지나서야 따랐다.
양사가 서필원의 관작을 삭탈하라는 논계를 넉 달이 지나도 상이 따르지 않자, 이때 이르러 정계하였다.
12월 27일 병술
진시(辰時)에 겹 햇무리가 졌다.
도목정을 시행하여 허적(許積)을 세자부(世子傅)로, 홍중보(洪重普)를 우의정으로, 이완(李浣)을 병조 판서로, 남용익(南龍翼)을 경기 감사로, 이합(李柙)을 수찬으로 삼았다. 홍중보가 오랫동안 경(卿)의 반열에 있어서 지위가 1품에 이르렀으나, 세상으로부터 가볍게 취급당해 정승의 명망이 없었다. 그런데 직질이 가장 높다는 이유로 박장원(朴長遠)·김좌명(金佐明)과 동시에 정승에 추천되었던 것이다. 민정중(閔鼎重)이 홍중보가 정승 자리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웃으며,
"홍중보(洪重普)이 정승이 된다면 누가 정승이 못되랴. 이렇게 해서 김좌명이 정승되는 것을 막고자 하는데, 될 인인가."
하였다. 김좌명의 재주와 명망이 홍중보 보다 나았는데 청의를 지닌 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했으므로 민정중이 이같이 말한 것이다.
청나라가 전각을 중수한 일로 인해 반사(頒赦)하며 내대신(內大臣) 파앙방소(巴昂邦霄) 등을 보내오자, 이경억(李慶億)을 원접사로, 김덕원(金德遠)을 문례관(問禮官)으로 삼았다.
원양도(原襄道) 금성(金城)과 평강(平康)에 이달 18일 번개와 천둥이 쳤다.
형조 참판 윤집(尹鏶)이 죽었다. 윤집은 윤지경(尹知敬)의 아들이다. 윤지경은 계해년 인조 반정 때 절의를 세웠기 때문에 사론이 훌륭하게 여겼다. 윤집이 명망있는 아비의 자식으로서 청렴하고 소탈하게 몸가짐을 하고 마음씀이 구차스럽지 않았으며 일을 하는 데 꾸밈이 없었다. 유철(兪㯙)이 형벌을 받을 때 항거했었는데 사람들이 그 때문에 그를 칭찬했다. 마침내 발탁되어서는 술로 인해 실수가 있고 실속이 없었으므로 크게 쓰이지 못하다 이때 와 죽은 것이다.
평안도 박천(博川) 사람 김경선(金景先)의 처 예옥(禮玉)이 한 번에 세 사내 쌍둥이를 낳았고, 평양 김준일(金俊逸)의 처는 한 번에 2남 1녀를 낳았다.
12월 28일 정해
진시(辰時)에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왼쪽의 결핵처(結核處)에 침을 맞았다.
접위관 동래 부사의 장계에 따라 왜관을 옮기도록 하고, 권현당(權現堂)에 이전과 같이 공목(公木)으로 작미(作米)하는 것을 엄하게 막는 일은 3년 기한으로 허락하였다.
공조 판서 유혁연이 여러 차례 상소하여 면직되었다.
12월 29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삼동의 날씨가 봄 날씨 같았다.
호조가 아뢰기를,
"금년 춘등(春等)부터 백관의 녹봉을 정1품은 정해진 봉록 이외에 쌀과 대두(大豆)를 각각 2섬씩 더 주고, 종1품 이하 종9품까지는 쌀과 대두를 1섬씩 더 주어 왔습니다. 그런데 금년 세입(稅入)과 전에 남아왔던 것을 가지고 내년 정월부터 10월까지 주어야 할 녹봉 수량을 계산해 보니 쌀은 2천여 석이 부족하고 대두는 2만 5천여 석이 남으니, 수입을 헤아려 보고 지출을 계획하여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방법을 도모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내년 춘등부터 더 지급하던 녹미(祿米)를 다시 감해야 할 것인데, 전날 더 지급하게 된 것이 아랫사람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려는 훌륭한 뜻에서 나온 바이니, 지금에 와서 바로 바꾸는 것은 역시 온당치 않은 것 같습니다. 조종조에서 녹봉을 나누어 주던 제도에 혹 목면·정포(正布)·면주(綿紬)들을 섞어서 지급하기도 했는데, 지금 본조에 남아 있는 것 중 면주와 목면은 몇 차례의 녹을 지급할 수 있으니, 내년 춘등에 더 지급해 주는 녹미 대신 면포(綿布)로 참작하여 나누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 해 서울과 지방의 호수(戶數)는 도합 1백 34만 2천 2백 74호로 인구는 5백 16만 4천 5백 24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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