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기축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간원이 논계하기를,
"전 통제사 황헌(黃瀗)은 용서하기 어려운 죄를 지었는데, 다시 서용하라는 명령이 뜻밖에 나왔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랍게 생각하고 공론이 더욱 격렬하니, 서용하라는 명령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2일 경인
병조 판서 이완이 신병을 이유로 사직 상소를 여러번 올리고 나오지 않았다. 대신이 실제로 병들었음을 진달하고 체직시키기를 청하니, 따랐다.
이전에 호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건의하여 백관의 녹봉에 쌀 1석 씩을 더 줄 것을 요청하였다. 그 뒤 김좌명이 호조 판서가 되어, 세미(稅米)가 경비에 부족하므로 매석의 대가를 명주와 목면 각 1필로 하여 지출을 계산하면, 1년 동안에 주어야 할 명주와 목면의 수량이 4 백 40동이나 된다고 하였다.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으니 모두 계속 주기는 어렵다고 말하였으므로 녹봉을 더 주는 일이 도로 정지되었다.
살펴보건대, 맹자(孟子)가 ‘토지 제도가 균등치 못하며 녹봉이 불평등하다.’고 하였다. 우리 나라는 토지 문서가 병란에 거의 다 불타 없어져 세입이 크게 감소되었는데 여러번 기근을 격으면서 그때마다 녹봉을 줄였다. 그리하여 직위가 높은 자는 북문(北門)의 탄식001) 이 있게 되었고 관직이 낮은 자는 벼슬의 즐거움이 없게 되었다. 사대부들 간에 청렴한 풍조가 점점 쇠퇴해진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으니, 매우 애석하다. 민정중이 이를 개탄하고 옛 제도를 복구시키려 하였는데, 시행된 지 일년 만에 계속 주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마침내 그만두었으니, 참으로 이른바 근본은 헤아리지 않고 끝만 가지런히 하려는 짓이라 하겠다.
정언 유상운(柳尙運)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이 요전에 들으니, 훈련 대장 유혁연(柳赫然)이 개인적으로 자기 휘하의 고향에 내려가는 군병들을 시켜 비밀히 한정(閑丁)을 찾아내어 보고하게 하고는, 각 고을에 공문을 보내 이들을 뽑아 별대(別隊)에 충원시킴으로써 민간에 소요와 원망을 일으켜 사체를 손상시켰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여러 동료들과 상의하여 논계하였던 것입니다. 지금 들으니, 대신이 대간의 계사는 잘못 들은 데서 빚어진 것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신이 어찌 감히 태연히 직에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켜 주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헌납 정중휘(鄭重徽), 정언 홍억(洪億)이 유상운과 일을 함께 했다는 이유로 연달아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켰다.
당시에 좌의정 허적이 경연에서 ‘유혁연이 논핵을 당한 것은 간신(諫臣)들이 살피지 못한 데에서 빚어진 것이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유상운 등이 모두 인피한 것이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보성(寶城)에 사는 정상륜(丁尙倫)이 그의 아비 정사(丁泗)가 본도의 좌수영 우후 최주화(崔柱華)에게 매를 맞아 죽었다는 이유로 본부에 소장을 올려 아비의 원수를 갚을 수 있게 해주기를 원하였습니다. 본도에 조사하였더니 정사가 매를 맞은 지 35일만에 장독(杖毒)으로 인해 죽었다고 하였습니다. 고한(辜限)002) 이 지나기는 했으나 형벌을 남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주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3일 신묘
수어사 김좌명이 아뢰기를,
"영남좌도 경주(慶州)와 청도(淸道)의 접경에서 유황석(硫黃石)이 많이 생산된다고 합니다. 그 근처 두 고을의 산점(山店)을 본청에 이속시켜 유황을 제련하도록 허락하소서. 그리고 그들의 잡역을 견감해 주고 납세를 가벼이 해주면 백성들이 서로 본받아 익혀서 유황을 제련하는 방법을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평안도 이산군(理山郡)에 작년 11월 29일에 흰 무지개가 해를 꿰뚫었으며, 희천군(熙川郡)에서도 같은 날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는데 흰 무지개 세 가닥이 가로로 얽혔으나, 해를 꿰뚫지는 않았다.
1월 4일 임진
우레가 쳤다.
전라도 영암군(靈巖郡)에 작년 12월 12일 밤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창문이 모두 흔들렸다.
1월 5일 계사
함경도 이성(利城)의 역리(驛吏) 박입계(朴立桂)의 아내인 양녀(良女) 월선(月仙)이, 70세된 노모를 봉양하였는데 친히 맛있는 음식을 만들어 봉양하면서 노모의 곁을 떠난 적이 없었다. 어느날 집에 불이 나자 월선이 병든 노모를 부축해 나오려 하다가 함께 불에 타 죽었다. 감사가 이를 계문(啓聞)하였는데 그의 효성을 정표(旌表)하도록 명하였다.
1월 6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중에게 도첩(度牒)을 만들어 주어야 한다는 사헌부의 계사에 대해 아뢰기를,
"고금은 형편이 다르니 지금 갑자기 시행하기는 어렵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잠시 그냥 두라."
하였다. 호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본조의 판별사(版別司)를 번고(反庫)하였는데, 축난 것이 2천여 금(金)이고 남은 것이 3천여 금이었습니다. 남은 것은 필시 문서의 착오일 것이며, 모자라는 것은 담당 하인들에게 징수해야 할 듯합니다. 이 일을 어떻게 처리해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남은 것은 문서의 착오라 하고 모자라는 것은 훔쳐낸 것이라 하여 징수해 받는다면,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없지 않을 것이다. 이번에는 모두 탕감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충의위(忠義衛)의 연로한 자들은 번(番)을 서게 하더라도 숙직하여 지키는 데에는 도움이 없고, 그렇다고 번을 서지 못하게 하고 녹봉을 주지 않는다면 공로에 보답하는 도리에 있어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나이 70이상인 자들에게는 번을 없애고 녹봉만 지급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7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성균관이 지관사(知館事)의 뜻으로 아뢰기를,
"이달 상순의 윤차(輪次)003) 는 대제학에게 사고가 있어 행하지 못하였습니다. 일찍이 대사성 민정중이 올린 상소로 인해 매달 상순에 행하는 윤차와 봄가을로 행하는 과시(課試)에 그날 사고가 있으면, 사고가 없는 날로 물려 행하되 그 달을 벗어나지 못하도록 하였습니다. 그런데 정부와 관각(館閣)이 모두 사고가 없는 날이 매우 적은 데다가 실행할 날짜에 행하지 못하게 되면 그달 내에 비록 사고가 없는 날이 있더라도 그대로 그만두고 행하지 않고 있으니 자못 신칙시킨 본의가 아닙니다. 이번의 윤차는 다시 사고가 없는 날을 가다려 시행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간원이 연계하여 강화 도사 이만휘(李萬輝)를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체차시키라고만 명하였다.
1월 8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 당시 겨울 날씨가 따뜻하여 얼음을 떠낼 수가 없었는데, 이에 이르러서 비로소 얼음의 저장을 명하였다. 그런데 공역이 배나 들고 모집한 일꾼들의 가미(價米)가 태반이나 부족하였으므로, 예조가 진휼청으로 하여금 보조토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는 대개 진휼청에는 저축된 것이 많이 있었고, 일찍이 흉년에 가미를 보조했던 전례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의정 홍중보가 세 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홍중보가 또 청국의 사신이 곧 오게 되어 정세상 불안하다는 이유로 소장을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삼공은 육경과는 다르니 스스로 융통성을 지녀야 한다. 경은 굳이 사직하지 말라."
하니, 홍중보가 출사하였다. 대체로 홍중보의 아비 홍명구(洪命耉)가 평안 감사로 있다가 정축004) 호란에 전사했기 때문에 홍중보가 늘 청국 사신이 올 때마다 현관례(見官禮)에 참여하지 않았었다.
1월 10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유성이 하고성(河鼓星) 위에서 나왔는데 꼬리가 길고 색깔이 붉었다.
헌부가 목임기(睦林奇)를 잡아다 문초할 것과 윤천뢰(尹天賚)를 파직시킬 것을 연계하였으나 오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정지하였다.
대사헌 이정기(李廷夔), 지평 송기후(宋基厚)가 신병으로 인하여 사직하였는데, 체직하였다.
1월 11일 기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조한영(曺漢英)을 예조 참판으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삼았다. 조한영은 청현직을 두루 역임하였으나 사람이 단정치 못했으므로, 청의가 천하게 여겼다.
1월 13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황해도 장연(長連)과 문화(文化)에서 이달 9일에 큰 우레가 쳤다.
1월 14일 임인
평안도 중화(中和)에서 이달 9일에 별똥별이 떨어졌는데 대포를 쏘는 듯한 소리가 났다.
1월 15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부호군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겸임하고 있는 총융사와 평시서 제조를 면직시켜 줄 것을 요청하면서 아뢰기를,
"신은 천성이 경솔하여 일이 닥칠 때마다 감정대로 합니다. 망령되이 소장을 진달하여 스스로를 해명하려 하였으니, 많은 사람들이 갈수록 더욱 심하게 미워하고 노여워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근래 이상진(李尙眞)과 박세당(朴世堂) 등이 신 때문에 비방을 당하고 모두 물러갔습니다. 그런데 신은 죄를 먼저 짓고서 아직도 머물러 있으니, 그들이 개인적인 원수를 갚듯이 일제히 분격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옥당의 차자와 양사의 계사는 실정 밖의 논척이 많지만, 물러가야 할 몸이 변명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무 심한 논박을 지나치게 혐의할 필요는 없다. 경은 굳이 사직하지 말고 속히 공무를 보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에 이상진과 박세당이 물러가 출사하지 않았다. 박세당은 서필원의 일에 대해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서 떠났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민시중(閔蓍重)에게 논척을 당하여 물러간 것이었으며, 이상진은 서필원의 일과 관련이 없는데 서필원이 끌어들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다. 또 상소의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2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57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이때에 이상진과 박세당이 물러가 출사하지 않았다. 박세당은 서필원의 일에 대해 논의가 합치되지 않아서 떠났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민시중(閔蓍重)에게 논척을 당하여 물러간 것이었으며, 이상진은 서필원의 일과 관련이 없는데 서필원이 끌어들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비웃었다. 또 상소의 내용이 불손하다는 이유로 탄핵을 당하였다.
집의 이단하(李端夏)가 피혐하기를,
"신이 서필원의 소장을 보니, ‘중인들이 미워하고 노여워함이 갈수록 더욱 심하다.’고 하였으며, 또 ‘때를 틈타 꼭 개인적인 원수를 갚듯이 일제히 분격한다.’고 하였는데, 신은 놀라움을 금할 수 없습니다. 서필원의 행동과 처사는, 윤리를 거스르고 의리를 무시한 데다가 또 어진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했으므로 여론에 죄를 얻었습니다. 양사에서 번갈아 소장을 올려 한 해가 다가도록 간쟁해 마지않고 있으니, 만약 서필원이 조금이라도 식견이 있다면 통렬하게 참회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도 감히 상소를 올려 스스로 변명하며 공론과 힘써 싸우고 있으니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신은 일찍이 옥당에 있을 때에 제일 먼저 차자를 올려 논박하였고, 또 대각(臺閣)에 있게 되어서도 시종 논박하였으니, 서필원에게 당한 반격은 여러 동료들보다 더 심한 바가 있습니다. 그리고 전하께서 서필원의 상소에 대한 비답에 ‘너무 심한 논박에 지나치게 혐의할 필요가 없다.’고 하교하셨으니, 더욱 그대로 대간의 자리에 무릅쓰고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대사간 강백년(姜栢年), 사간 이단석(李端錫), 헌납 정중휘(鄭重徽), 정언 유상운(柳尙運)·홍억(洪億), 장령 이하(李夏) 등이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는데, 모두 출사시키라는 것으로 처치하였다.
전라 감사 김징(金澄)이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를 조사한 일로 인해 상소를 올려 사직하였는데, 그 내용에,
"대신이 후원해 주어 두 신하가 스스로를 변명했는데, 유사의 조사가 뒤따라 이를 올바르게 만들었습니다."
라고 하고, 또
"만약 두 신하가 원인을 자신에게 구하여 반성하고 더욱 자신을 수양하여 공론이 허락하고 사론이 믿어 복종하도록 했다면, 신도 진실로 앞의 일을 뉘우치고 부끄럽게 여겨 문을 닫아걸고 혀를 깨물었을 것이며, 회초리를 지고 가서 머리가 진흙에 닿도록 절을 하며 사죄하는 일도 기꺼운 마음으로 했을 것입니다. 누구와 더불어 많은 말로 힘써 다투면서 한 때의 승리를 얻으려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을 병조 판서로, 오정일(吳挺一)을 호조 판서로 삼았다.
전농(典農) 김태인(金太仁)이, 그의 동생 김태순(金太順)을 죽였는데, 그의 어미가 이 변고를 당하자 목을 매어 죽었다. 김태인이 도주했는데, 형조가 좌우 포도청에 엄밀히 살펴 붙잡도록 하였으나, 끝내 체포하지 못했다.
1월 16일 갑진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사직하기를,
"삼가 전라 감사 김징의 상소를 보건대, 그 내용에 ‘대신이 후원해 주었다.’고 하였는데, 신은 실로 놀랐습니다. 신이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에 대해 구원해 주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 아닙니다. 당초 대간의 논계가 풍문에서 빚어진 것이었는데, 오래도록 산관(散官)에 두고 있으므로 사람들이 억울하다고 말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 두 신하가 범한 것이 진실로 대간의 계사와 같다면 깊이 죄주는 것이 옳지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애매하게 폐기되어서는 부당하다고 여겨졌기 때문에 지난번 원임 대신이 이은상 등을 서용하기를 청하던 날, 신도 사실을 조사하여 처리할 것을 청하였던 것입니다. 신이 여기에서 두 신하를 위해 곡진히 두둔해 준 것이 뭐가 있습니까. 또 그가 ‘원인을 자신에게 구하여 반성하고 더욱 자신을 수양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과연 두 신하가 이같이 한다면 진실로 좋은 일입니다. 그러나 자신을 수양하여 비방을 없앤 경우는 세상에 흔치 않으며, 옥리(獄吏)와 맞대고 자신의 무죄를 해명하는 사람도 또한 있습니다. 김징이 두 신하에게 요구한 것이 너무 지나치지 않습니까.
신이 비록 노둔하고 용렬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신의 반열에 있는데, 일개 지방관에게 이와 같이 능멸을 당했으니, 조정의 체통이 무너지도록 한 것은 신이 실로 초래한 것입니다. 어찌 감히 뻔뻔스럽게 정승의 자리에 그대로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두서없고 망령스러운 말을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김징이 일찍이 어천 찰방(魚川察訪)으로 있을 때 장오죄(贓汚罪)를 범하여 심리를 받았는데, 역리와 얼굴을 맞대고 대질했던 흠이 있었기 때문에 대신이 차자 안에서 언급한 것이다.
청국의 사신이 나왔을 때 역관 현덕우(玄德宇) 등이, 몽고 왕이 옥에 갇힌 사건을 통역관 장효례(張孝禮)에게 물어보았는데, 그의 말이 전에 최길(崔吉) 등이 전한 것과 대략 같았다.
1월 17일 을사
양사가 서필원을 탄핵하였다. 집의 이단하와 장령 이하가 아뢰기를,
"서필원은 윤리를 거스르고 의리를 무시하며 어진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했기 때문에, 양사가 번갈아 상소를 올려 한 해가 다가도록 논쟁하여 마지않고 있으니, 공론의 소재를 성명께서도 반드시 통촉하고 계실 것입니다. 거듭된 논척이 겨우 그쳤는데 조금도 반성하는 뜻은 없고 감히 상소를 올려 변명하면서 대간들을 비방하였습니다. 또 두 신하의 이름을 거론하여 자신의 후원으로 삼았는데, 남의 흠을 들추어 내는 듯한 점이 있었습니다. 종전의 죄상은 덮어두고 논하지 않더라도, 이 한 가지 일만 가지고도 매우 놀랄 만합니다. 서필원을 파직시키고 다시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대사간 강백년, 사간 이단석, 헌납 정중휘, 정언 유상운·홍억 등이 아뢰기를,
"지난번에 서필원이 어진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한 죄상과 윤리를 거스르고 의리를 무시한 사실을 가지고 한 해가 다 가도록 간쟁하여 마지않았으니, 서필원이 스스로 처신할 도리는 당연히 원인을 자신에게 구하여 참회해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직하는 상소를 올리면서 감히 옳지 못한 일을 끝까지 밀고 나가려는 꾀를 내었습니다. 그리고 두 신하가 물러간 것은 아무 상관이 없는 데도 은연중 이름을 집어넣어 끌어다 증인을 삼았으니, 그의 마음 소재를 진실로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1월 18일 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태미원에 들어갔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자신의 병권(兵權)이 너무 많다는 말이 대간들의 자리에서 발의되었다는 이유로 상소를 올려, 본직과 겸대한 직책을 해직시켜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비록 공론이라고 하지만, 그 말이 온당한지를 모르겠다. 경은 지나치게 혐의하지 말고 속히 나와 공무를 수행하라."
하였다. 김좌명이 수어사로서 병조 판서 겸 정초 대장에 제수되었기 때문에, 정언 유상운이 탄핵하려고 대석(臺席)에서 발의하였는데 좌우에서 호응하지 않았다. 동료가 이것을 김좌명에게 누설하였으므로 김좌명이 듣고 이렇게 사직한 것이다.
1월 19일 정미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밤에 화성이 방성(房星)을 범하였다.
정언 유상운이 병조 판서 김좌명의 상소로 인하여, 말이 누설되어 실상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사간 이단석, 헌납 정중휘, 정언 홍억, 대사간 강백년 등도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사헌부가, 경솔하여 잘못하였다는 이유로 유상운은 체직시키고, 이단석 등은 출사시키라는 것으로 처치하였다.
1월 20일 무신
형조가 이은상(李殷相)과 오정위(吳挺緯)의 일로 형조·한성부·평시서의 문서를 조사했는데 그들이 사취한 흔적이 없고, 개성부에서 옥사를 다스릴 때 별로 옥사를 지연시킨 일이 없으며, 공금을 대출해서 토지를 점유한 일, 관청의 곡식을 많이 가져다 먹고는 강제로 견감시키게 한 일 등도 아무 흔적이 없다고 하며 이밖에 다시 더 조사할 단서가 없다는 것을 아뢰니,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조사하였으나 그러한 사실을 잡지 못하였다면 이는 사실이 아닌 것이다. 이로써 시행하라."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두 사람의 일이 이에 해명되었으나, 그들의 몸가짐이 신중하지 못하며 잗달고 비루한 행실은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그 때문에 다시 거두어 등용하기로 의논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올바르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58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두 사람의 일이 이에 해명되었으나, 그들의 몸가짐이 신중하지 못하며 잗달고 비루한 행실은 사람들이 모두 더럽게 여겼다. 그 때문에 다시 거두어 등용하기로 의논이 되었지만, 사람들은 올바르게 여기지 아니하였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하(李夏), 지평 이옥(李沃)이 논계하기를,
"해운 판관(海運判官) 민종도(閔宗道)가 사명을 받들고 외방에 있으면서, 상의 병환이 아직도 쾌차하지 못한 때에 음악과 술을 즐긴 잘못이 있습니다. 추고하소서."
하였다. 여러 번 아뢰니, 상이 따랐다.
1월 21일 기유
정언 홍억이 호조 판서 오정일(吳綎一)을 논핵하려고 하였는데, 사간 이단석은 따르고, 대사간 강백년과 헌납 정중휘는 따르지 않았다. 홍억이 인피하기를,
"호조의 장관은 직임이 매우 중대하니, 흉년이 들어 재정이 바닥난 오늘날에는 더욱더 가벼이 제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새로 제수된 판서 오정일은 본디 국량이 모자라 여망에 흡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일찍이 형조 판서가 되었을 때도 사람들의 말이 많았습니다. 신이 오늘 이를 논핵하여 체차하려고 하였는데, 여러 동료들의 의논이 서로 어긋남을 면치 못하였습니다. 이는 신의 말이 신용을 받지 못한 소치가 아닐 수 없습니다. 신을 체직시키도록 명하소서."
하였다. 강백년 등도 인피하였는데, 상이 강백년에게 답하기를,
"요즈음 공도가 상실된 지 오래되어 내가 매우 놀랍게 여긴다. 홍억의 말도 역시 이런 습관에서 말미암은 것이니, 경이 무슨 사직할 일이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세 번째 소장을 올려 체직시켜 주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지 않자 출사하였다.
1월 22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집상전(集祥殿)에 나아가 뜸을 떴는데, 영의정 정태화 등이 입시하였다. 정태화가 나아가 아뢰기를,
"호조 판서를 차출할 때에 신도 참여하였는데, 물의가 흡족하게 여기지 않아 매우 황공합니다."
하니,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호조 판서의 추천은 신이 의망에 넣었던 것입니다. 홍억이 인피한 내용에 말한 형조의 일이란, 곧 김익렴(金益廉)이 탄핵했던 것인데, 그 뒤에 다시 제수되었으나 별로 다른 의논이 없었습니다. 이번 대간이 한 말은 그전 김익렴의 논핵 내용을 주워 모은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말이 과연 공론인지 모르겠다. 그리고 서필원의 상소가 비록 온당하지는 못하나 파직시키고 서용하지 말아야 할 죄가 뭐가 있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서필원이 과격한 점이 있었으나 어진이를 방해하고 국가를 병들게 했다는 등의 말에 있어서는 온당한 것인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상의 하교는 진실로 당연하다 하겠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조정이 사람을 등용할 때 만약 연소배들의 말을 듣고 진퇴시킨다면 일의 체통에 있어 진실로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일단 논척을 당하였으니 그대로 본직에 두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그리고 인재를 천거하는 것은 신들의 책임입니다만, 인재의 부족이 오늘날처럼 심한 때는 없었습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어찌 인재가 없겠습니까. 다만 일시의 여망에 부합하지 않으면 쓰지 않기 때문에 이렇게 인재가 모자라는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오정일의 본직을 체직시키라고 명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탑전에서 자신이 정승 자리에 합당치 못한 정상을 진달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사직하는 상소에 대한 비답에서 다 말하였다. 경의 재덕은 진실로 정승에 합당하다. 어찌 굳이 사양하는가."
하였다. 상이 이어서 정초청에, 훈련원과 어영청의 규례대로 대신을 도제조로 차출하라고 명한 뒤에 홍중보를 임명하였다.
이경억(李慶億)을 형조 판서로, 권대운(權大運)을 발탁하여 호조 판서로, 이흥발(李興浡)을 정언으로 삼았다.
지평 이옥(李沃)이 아뢰기를,
"동료가 간원의 처치 문제로 간통을 보내왔는데, 결말지은 내용의 주된 뜻이 신과 서로 어긋났습니다. 호조 판서 오정일은 그 전부터 재능과 인망이 남에게 뒤지지 않았고, 내외의 관직을 역임하면서도 직임을 감당하지 못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다만 형조에 있으면서 한 번 탄핵을 당했는데, 그것도 사람들의 말이 많다고 범범히 칭하는 것이었으며, 그 뒤에도 다시 직임에 제수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 공론의 의심이 환히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번에 호조 판서에 제수된 것도 사실 여러 사람의 천거를 따른 것인데 지레 논핵하였으니, 자못 가능한지를 시험하는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내용으로 회답하였습니다. 그런데 간통을 보낸 동료가 방금 복제(服制)를 당했으므로 신이 처치해야 됩니다만 논의가 서로 모순되니, 어찌 감히 혼자만의 소견으로 태연하게 처치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며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부응교 이민서(李敏叙)가 밤에 숙직하던 곳에서 칼을 빼어 자신의 목을 찔렀는데, 동료의 구원으로 죽지는 않았다. 이민서가 연일 술을 지나치게 마시고는 이어서 미친병이 일어나 갑자기 헛소리를 하다가 옥당에서 스스로 목을 찔렀는데 유혈이 낭자하였다. 전에 없던 일이어서 듣는 사람들이 크게 놀라워했다.
1월 23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뜸을 떴다.
헌부가 간원을 처치하여, 홍억과 이단석은 출사케 하고, 정중휘와 이옥은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근래 공도가 없어진 지 오래되었다. 구차하게 사사로이 옹호하는 말은 더더욱 알 수가 없다. 홍억·이단석은 체직시키고 정중휘·이옥은 출사케 하라."
하였다. 정원이 비답의 내용이 준엄한데다 또 특별히 출사케 하고 체직시키라는 명이 내렸다는 이유로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준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1월 24일 임자
밤에 달이 심성(心星)을 범하였다.
집의 이단하가 인피하였는데, 서필원을 논계한 일에 대하여 온당하지 못한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처치하여 출사케 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이, 호조 판서로 발탁 제수된 것에 대하여 상소를 올려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1월 25일 계축
김우형(金宇亨)을 대사간으로 삼았는데, 인망이 없었다.
장령 이하(李夏)가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케 하였다. 이는 사헌부가 처치한 뜻이 이미 서로 부합했었고, 서필원을 논계할 때에도 함께 했었기 때문이다.
이조가 아뢰기를,
"신덕 왕후(神德王后) 모친의 성씨와 관향(貫鄕)을 상고해 볼 곳이 없어서 추증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상산 부원군(象山府院君) 강윤성(康允成)의 9대손 강천익(康天翊)이함경도 덕원(德源)에 살고 있다는 것을 듣고 찾아가 묻게 했습니다. 방금 회답 공문을 보니, 강천익에게 물은 결과 강윤성의 부인은 곧 진주 강씨(晋州姜氏)로서 강여(姜閭)의 딸이며 묘소는 안변(安邊)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에 의거하여 추증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상이 재가하였다. 이에 강씨를 진산 부부인(晋山府夫人)으로 봉하였다.
1월 26일 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홍만종(洪萬鍾)이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출사케 하였다. 이는 서필원(徐必遠)을 논계한 일에 대하여 거북스러운 하교가 있었기 때문이다.
1월 27일 을묘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1월 28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윤변(尹抃)을 사간으로, 정적(鄭樍)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간 김우형이 죄를 조사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시켰다.
1월 29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언 정적이 죄를 조사받고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시켰다.
1월 30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일렀다.
"날씨가 이같이 추우니 옷이 얇은 군사들에게 해조로 하여금 유의(襦衣)를 지급하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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