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기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좌의정 허적이 홍제원(弘濟院)에 가려 하면서 입으로 전하여 아뢰기를,
"신이 권대운(權大運)이 파주에서 보낸 편지를 보니, 칙서를 전할 때 상께서는 전후에 네 번 절하는 예식이 있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상께서는 발가락에 병이 있으니 결코 이 예를 행할 수 없습니다. 신이 지금 홍제원에 가서 기체가 편치 않아 네 번 절을 하는 예를 행할 수 없다는 뜻을 힘써 말해, 결말을 지어 오겠습니다."
하고, 그대로 홍제원으로 가서 통역관을 통해 칙사에게 말하기를,
"상께서 질병이 있어 네 번 절하는 예를 행하기 어려우니, 편전(便殿)에서 접견하게 해 주십시오."
하였는데, 칙사가 허락하였다. 허적이 돌아와 이를 아뢰었다.
동빙고(東氷庫)와 내빙고(內氷庫)의 얼음을 다시 저장하라고 명하였다. 처음 얼음을 저장할 때 날씨가 따뜻했으므로 얇은 얼음으로 구차하게 채웠다. 이때에 이르러 몹시 추워 강의 얼음이 다시 굳게 얼었는데, 상이 동빙고의 얼음은 바로 제사에 쓰일 얼음이라 하여, 이 명이 있게 되었다.
전 판서 조계원(趙啓遠)이 죽었다. 조계원은 여러 도의 감사를 역임하고 벼슬이 육경에 이르렀으며, 나이 칠십이 된 뒤에는 보령(保寧)에 물러가 살다가 죽었으니, 천수(天壽)를 다하였다고 할 만하다. 그러나 조정에 있을 때에는 깨끗하게 재결한 일이 없었고, 고향에 살면서도 근신하지 않았으므로 비방을 받아 대간의 탄핵을 당하기까지 하였다.
2월 2일 경신
청국의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서 접견하였는데 발의 질환 때문에 공손히 맞이하는 4배례는 행하지 않았다. 두 사신과 함께 다례(茶禮)를 행하고, 이를 마친 뒤에 두 사신이 물러나갔다. 인정전에서 조칙(詔勅)을 반포하였다.
청국 사신이 대궐에 들어올 때 전도(前導)가 잘못 인도하여 인정전으로 먼저 들어가게 되어 의식을 잘못하게 하였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놀라워 하였다.
정원이 칙사가 대궐에 나올 때 잘못 인도하여 의식을 잘못되게 하였다는 이유로 도감(都監)의 당상과 해당 낭청을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낭청은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주고, 잘못 인도한 역관(譯官)도 잡아다 추고하였다.
지명 홍만종(洪萬鍾)이 도감 당상이 잘 검칙하지 못한 실수를 논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종중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과 예조 판서 박장원이 모두 도감의 당상관으로서 논핵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들어가 버렸으므로, 접대하는 사무에 애로가 많게 되었다. 대신이 이를 탑전에서 진달하고 외부에서도 말하였다. 그런데 홍만종이 한 번 논계하고는 바로 그쳤으므로, 물의가 비난하였다.
2월 3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청국에서 경축을 반포한 일로 인하여, 중외의 죄수에게 특사를 베풀고 백관에게 가자(加資)하였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이때 강화 유수 김휘(金徽)가 강화 도사(江華都事)를 혁파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대신들에게 물어본 뒤에, 그대로 두되 군무만 관장하게 하고 민간의 일에는 간여하지 못하게 하라고 명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형조의 사무가 많이 적체되어 있다는 이유로 판서 이경억이 겸대한 반송사(伴送使)의 직임을 체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를 정초청(精抄廳)의 제조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2월 4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홍만종이 도감 당상을 파직시키라는 논핵을 한 번 아뢰고 즉시 그침으로써 물의에 비난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대간이 아뢰느냐 그치느냐의 여부는 오직 일이 어떠한가를 살펴서 하면 되는 것이다. 한 번 아뢰었느냐 두 번 아뢰었느냐는 의논할 바가 못된다. 경박스런 물의를 혐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장령 이하가 처치하기를,
"탄핵하는 도리는 당초에 자세히 살펴서 해야 됩니다. 파직하고 추고하는 논죄도 가벼운 벌이 아니니, 발론했다가 그쳤다가 한 것은 모두 경솔한 짓입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 부사 정승명(鄭承明)이 대구(大丘)에 사는데 명화적(明火賊)에게 살해되었다.
2월 5일 계해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상(李翔)을 진선(進善)으로, 유헌(兪櫶)을 지평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정언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사간으로, 이합(李柙)을 교리로, 신정(申晸)을 수찬으로, 김석주(金錫胄)를 헌납으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좌랑으로, 동평위(東平尉) 정재륜(鄭載崙)을 사은 정사(謝恩正使)로, 이원정(李元楨)을 부사(副使)로, 조세환(趙世煥)을 서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상은 이익의 형인데 비루하고 좀스러워 취할 것이 없었다. 시골에 살면서 벼슬하지 않았다. 또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에게 빌붙었기 때문에 헛된 명성을 얻었었다.
2월 6일 갑자
예조 판서 박장원이 신병으로 사직하였으므로, 형조 판서 이경억을 대신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2월 7일 을축
상이, 칙사가 관소(舘所)에 있어 대응하는 일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로, 호조 판서 권대운을 명패로 불러 직임을 수행하게 하였다.
2월 8일 병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9일 정묘
예조가 아뢰기를,
"예문(禮文) 중에 ‘세자의 관례일(冠禮日)에 필선이 꿇어앉아 밖의 일이 다 준비되었다고 아뢰면 왕세자는 시복(時服)으로 나온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현재 입고 있는 시복은 바로 용포(龍袍)인데, 용포와 익선관(翼善冠)은 처음 더해 입힐 옷입니다. 따라서 일단 시복 차림으로 좌석에 나오면 다시 처음에 입힐 옷이 없게 되니, 의당 원자(元子) 때의 동계옥잠(童髻玉簪)과 아청단령(鴉靑團領)과 흑화(黑靴)의 차림으로 좌석에 나옴으로써 순서대로 세 번 입힐 수 있게 해야 할 듯합니다.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왕세자의 자(字)를 정하는 일을 택일하여 거행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2월 10일 무진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호조 판서 권대운을 인견하였다. 이때 통역관들이, 상이 교외에서 영접을 안하게 된 것은 모두 자신들의 공으로 하고 생색을 내면서 한없이 뇌물을 요구하니, 권대운이 이 때문에 뵙기를 청한 것이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계청으로 인하여 용강(龍岡)·함종(咸從) 두 곳의 둔전을 평양에 떼어 주어 유생들 늠식(廩食)의 밑천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2월 12일 경오
햇무리가 졌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왼쪽 응어리진 곳에 침을 맞고 고름을 뽑아냈는데, 약방의 도제조 이하가 입시하였다. 의관들이 물러가자, 영의정·우의정과 호조 판서 권대운,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을 인견하였다. 권대운이 청국의 사신에게 별도의 선물 제공과 통역관에게 비밀히 선물 제공하는 일을 진달하니, 상이 별도로 은그릇을 제공하고 또 인삼·표피(豹皮)·호초(胡椒) 등의 물품을 제공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청국 상사(上使)가 황제에게 친애를 받는 자라고 자칭하면서 바라는 바가 매우 컸는데, 상당히 불쾌하게 여기는 빛이 있었다. 상이 두 번이나 중사(中使)를 보내 오기를 청하였으나 끝내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은그릇을 선사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명분을 찾기가 어려운데다 또 뒤 폐단이 염려되어 중도에서 몰래 선사하게 하였는데, 그제서야 상사는 크게 기뻐하였다. 네 통역관에게 선사한 은이 2천 수백여 냥에 이르렀다.
박장원(朴長遠)이, 왕세자가 관례에 처음 입고 나올 시복(時服)의 색에 대해 여쭈었는데, 상이 이르기를,
"시복이라고 하는 것은 곧 평소에 입는 옷이니, 흑단령(黑團領)은 알맞은 옷이 아닌 듯하다. 일찍이 신묘년005) 에 나는 아청직령(鴉靑直領)에다 조대(絛帶)를 띤 복장을 처음 입고 나오는 옷으로 삼았었다."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신묘년과 같이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관례 때의 주인(主人)은 이조에서 계하할 것입니다마는, 빈찬관(賓贊官)은 아직 초기(草記)가 내리지 않아 미처 계하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빈(賓)은 의당 영의정이 해야 할 것이니, 본조의 계사를 속히 판하(判下)하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오례의(五禮儀)》 중에는 범연히 의정(議政)이라고 칭하였는데 하필 영의정으로 계하할 것이 있겠습니까. 신은 각기병으로 걸음을 잘 걸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에 허적을 빈으로 삼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세자 관례 때에 쓰일 교서(敎書)의 글은 《오례의》에 실려 있습니다. 지금 들으니,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는 빈이 세자에게 읽어 전하고, 또 사신(詞臣)을 시켜 별도로 교서를 짓게 하여 읽지 않고 바로 세자에게 준다고 하는데, 이는 두 개의 교서가 있는 것으로 예문과는 크게 어긋납니다. 그러니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를 빈이 읽어 전한 뒤에 그대로 세자에게 주도록 해야 할 듯합니다. 《오례의》를 상고해 보면 절목(節目)이 매우 분명하니, 별도로 교서를 지어서 거듭 사용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하고, 영의정 정태화, 우의정 홍중보가 모두 《오례의》에 의거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오례의》에 실려 있는 교서의 내용 안에 말을 조금 더 첨가해 넣어 짓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세자 관례 때에 예석(醴席)은 본래 남쪽을 향하여 설치하는 것이며 세자가 자리에 나아가서도 남쪽을 보고 앉는 것입니다. 내려와 절을 할 때에 있어서 《오례의》에는 ‘서쪽을 향해 절을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것은 필시 남(南)자가 서(西)자로 잘못 된 것입니다. 《의례》에 ‘관자(冠者)는 자리 서편에서 절하고 술잔을 받으며, 빈(賓)은 동쪽을 향하여 답배(答拜)한다.’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註釋)에 ‘자리의 서쪽에서 남쪽을 향해 절하는 것이다.’라고 하였습니다. 빈이 서쪽의 위치에 돌아와 절하고 동쪽을 향한다는 것은, 성인과 더불어 예를 하는 것이 주인에게 답배하는 것과 다름을 밝힌 것입니다. 예문의 본뜻이 이렇게 명백한데도 《오례의》의 서(西)자를 따라 한다면 매우 잘못된 일입니다.
일찍이 인조(仁祖) 때에 유신 정경세(鄭經世)가 이에 의거해서 쟁론하여 잘못된 것을 바로잡았는데, 그 뒤에 다시 《오례의》대로 하였습니다. 이번에도 인조 때에 이미 행했던 대로 남쪽을 향해 절하는 예로 결정하여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고, 정태화와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들의 생각도 이와 같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대로 거행하라."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오례의》 안에 ‘빈객의 자리는 관자의 자리 동편이다.’라고 하였는데, 잘못된 동(東)자를 정경세의 말에 따라 남(南)자로 고쳐 표지를 붙여 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세자가 관례를 마친 뒤에 종묘에 알현하는 예가 없을 수 없습니다. 《대명회전(大明會典)》과 《소대전칙(昭代典則)》 등의 책에는 모두 태자가 관례를 마친 뒤에 종묘에 알현하는 예가 있는데, 《오례의》에는 빠졌습니다. 이는 불충분한 예전인 듯합니다."
하고, 정태화와 홍중보가 아뢰기를,
"당연히 중국의 예에 의거해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중국의 예문을 갖다가 상고하니 태자의 관례 뒤에는 백관이 황제와 태자궁에 진하(陳賀)하는 일이 있습니다. 《오례의》에는 이것도 빠졌으니 역시 불충분한 예전입니다."
하고, 정태화와 홍중보가 아뢰기를,
"관례란 큰 일입니다. 예를 마친 뒤에 진하를 행하지 않는다면 진실로 불충분한 예전이 됩니다. 당연히 중국의 예대로 행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옳다고 하였다.
2월 13일 신미
청국 사신이 떠나자 민희(閔熙)를 반송사(伴送使)로 삼았다.
세자의 관례를 행한다는 일로 송시열·송준길·이유태에게 사관을 보내 별도로 유시하였다.
사간 이단석, 헌납 김석주가 아뢰기를,
"작년 가을에 전라 감사 김징(金澄)이 그의 모친을 위해 회갑 잔치를 베풀었는데, 온 도의 재력을 고갈시켜 풍성하게 준비했고 두루 영남의 수령들에게까지 구걸하였으니, 지위를 빙자하여 탐욕을 부린 짓을 이루 말 할 수 없습니다. 잔치하는 날의 행사가 지극히 사치스러웠는데, 또한 도내 수십 명의 수령들로 하여금 주렴을 향해 뜰에서 절하게 하였으니, 관리들에게 치욕을 심하게 준 것입니다. 이처럼 흉년으로 재정이 고갈된 때를 만나 진상하는 풍정(豊呈)도 없앤 터에, 지방 장관이 감히 방종하고 탐욕을 부려 무엄한 짓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는 교동(膠東)의 색부(嗇夫)가 어버이 때문에 오명을 받았던 일006) 과는 달라, 조정에서 옛 허물을 염두에 두지 않은 은전을 크게 저버린 것입니다. 그의 죄는 실로 징계하지 않을 수 없으니,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영광 군수(靈光郡守) 홍석기(洪錫箕)를 탄핵하기를,
"김징이 잔치를 열었을 때 도내의 병사(兵使)·수사(水使) 및 각 고을의 수령들을 모두 불렀는데 감영에 모인 수령이 무려 30여 명에 이르렀고, 비단과 선물 상자를 실은 말이 혼잡스러웠습니다. 그 중에서도 영광 군수 홍석기는 가져온 것이 더욱 많았고 그 밖에 아첨을 부린 자취도 매우 놀라웠습니다. 파직하소서."
하고, 또 금산 군수(錦山郡守) 정재후(鄭載厚)를 탄핵하기를,
"대청에 올라가 헌수(獻壽)하는 것이 물론 잔치 자리에서의 일반적 절차입니다만, 뜰에서 절하고 꿇어앉기까지 하였으니, 이는 곧 하인들이나 하는 예로서 이를 행한 자도 수치스런 일이고 이 예를 받은 자도 분수에 어두운 짓입니다. 요전 호남의 수령들이 감사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였을 때, 지식이 있는 약간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주렴을 향하여 술잔을 올렸으며 뜰에 엎드려 몸을 굽히고 조심스럽게 굽신거렸으니, 두려워하며 받들고 서로 다투어 아첨을 부린 실상이 실로 놀라운 일입니다. 많은 수령들을 일시에 논죄하여 다스릴 수는 없겠습니다만, 남쪽에서 올라온 인사들이 전하는 말로는, 모두 정재후가 앞장서서 주장하였다 하여 나무라는 말이 자자합니다. 파직시키소서."
하고, 또 전라 우수사 이간(李旰)을 탄핵하기를,
"이간은 부안(扶安)의 전선(戰船)을 살피러 왔다는 핑계로 감영의 잔치 자리에 참여하였고, 화폐를 가지고 와서 뜰에서 절하였습니다. 곤수(閫帥)의 몸으로 하인들과 같은 짓을 하였으니, 무식한 무부(武夫)라고 하여 덮어둘 수는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였다. 두 번째 아뢰니, 상이 모두 따랐다.
집의 이단하, 장령 이하가 남포 현감(藍浦縣監) 최양필(崔良弼)이 거문고 만들 재목으로 향교의 오동나무를 벤 죄를 논핵하여 파직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양사가 서필원을 논핵하였으나 오래도록 받아들여지지 않았는데, 이때에 와서 논핵을 그쳤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려 빈(賓)의 직임을 사양하였는데, 영의정의 각기병을 이유로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2월 14일 임신
햇무리가 졌다. 햇무리 가에 배(背)가 있었는데, 안쪽은 붉은색, 바깥쪽은 청색이었다.
이정기(李廷夔)를 우부빈객(右副賓客)으로, 김우형(金宇亨)을 대사간으로, 이혜(李嵆)를 부교리로 삼았다.
상이 집상전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는데, 삼사는 입시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상이 별시(別試)의 무과 초시(初試)에서 경외를 통틀어 8백 명을 뽑으라고 명하였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문순공(文純公) 이황(李滉)의 봉사손(奉祀孫)이 후사가 없이 부부가 다 죽었다는 이유로 후사를 세워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해조에서 품지(稟旨)하여 시행하라고 명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헌부의 금란(禁亂)이 난잡하므로 일찍이 헌부에 금제(禁制)의 조목을 묘당과 함께 상의하여 법식을 정하라고 명하였다. 그런데 지금 3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거행되지 않고 있으니, 즉시 헌부를 신칙하여 장관이 있을 때는 3명을 갖출 필요가 없고 장관이 없을 때는 3명을 갖추어 속히 거행토록 해서 전날과 같이 지연시키지 말라."
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세자의 관례 때에 2품 이상이 예를 행하면 세자가 답배를 하고, 백부와 숙부에게는 한 계단을 내려와서 답배를 하는데, 대군(大君)이라야 이 예에 해당됩니다. 그러나 대군이 없을 경우 왕자군(王子君)에게 이 예를 행한 때가 혹 있었는데, 이번에는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번에는 대군이 없으니, 현재 있는 왕자군에게 예를 행하게 하라."
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리기를,
"제왕가의 예법이 사서인과는 다르나, 성인의 혈기는 보통 사람과 같은 것입니다. 왕세자가 타고난 자질이 숙성하고 드높으나 나이로 말하면 겨우 10세인데, 어찌 아내를 둘 나이라고 하겠습니까? 신들도 대례(大禮)의 차례와 절목을 알고 있으므로 왕세자의 화려한 합방(合房)의 기일이 올해가 아니라는 것은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명호(名號)가 일단 정해져 절차를 진행시킨다면 2, 3년을 벗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송(宋)나라 철종(哲宗) 때에 유모 10명을 구하였는데, 범조우(范祖禹)가 태황태후(太皇太后)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천금의 재산이 있는 집안도 13세 된 아들이 있으면 오히려 여색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하는데, 더구나 만승(萬乘)의 임금에 있어서이겠습니까.’라고 하였습니다. 어릴 때의 혈기는 장년이 되어서야 성하게 되는 것이니, 범조우의 말은 장구한 앞을 내다본 염려라고 하겠습니다. 13세에 여색을 가까이 하는 것도 경계로 삼았는데, 왕세자의 춘추가 얼마나 되었기에 별안간 이런 의논을 한단 말입니까?
신들은 감히 고사를 멀리 인용하지 않겠습니다. 삼가 선조 대왕과 인조 대왕을 두고 보더라도, 모두 잠저(潛邸)에서 들어와 왕통을 이었으므로 혼인을 모두 어린 나이에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나라를 다스린 지가 40년이 되기도 했고, 혹은 30년이 되기도 했습니다. 채침(蔡沈)의 무일편(無逸篇) 서문에 ‘문왕(文王)을 상세히 말한 것은 눈과 귀로 직접 보고 들었기 때문입니다.’ 하였는데, 신들도 삼가 이 뜻을 붙여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너희들이 걱정하는 것을 내가 어찌 생각하지 않았겠느냐. 너희들은 지나치게 염려하지 말라."
하였다.
2월 15일 계유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경최(慶㝡)를 장령으로, 오시수(吳始壽)를 전라 감사로 삼았다.
헌납 김석주가 통제사 유비연(柳斐然)이 전라 감사 김징의 부모 회갑 잔치 때 해물을 요청한 일로 인하여 비단·목면 및 기타 완구품들을 실어 보낸 일을 논핵하면서 파직시킬 것을 청하고, 또 전라 병사 박이명(朴而㫥)은 실어 보낸 폐물과 비단 외에도 수십 필의 모시와 두 바리의 군목(軍木)이 있었다는 것을 논핵하면서 잡아다 문초하고 죄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아뢰자 모두 따랐다.
충청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은 자가 80여 명이었다.
정원이 아뢰기를,
"왕세자의 관례 때에 교서안(敎書案)을 들고 가는 집사를 충찬위(忠贊衛)로 차출한다고 《오례의》에 실려 있습니다만, 오늘날의 충찬위는 옛날과는 달리 모두 비천한 자들입니다. 신이 어제 예행 연습을 보았는데, 궁전 안의 지엄한 곳에 출입할 집사의 임무는 이런 자들이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조정의 관원으로 가려서 차출하게 하소서. 그리고 교서를 읽을 때는 전교관(展敎官)이 있어야 하는데, 이번에 빈(賓)이 왕세자에게 교서를 읽을 때의 전교관이 《오례의》에는 실려 있지 않습니다. 해조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6일 갑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하교하기를,
"인평위(寅平尉)의 묘소에 물이 고인 곳이 있으니, 역군 1백 명을 8일을 기한으로 부역케 할 일을 분부하라."
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맹자가 ‘농사 때를 빼앗지 않는다.’ 하였고, 대무년(大戊年)이 조숙후(趙肅侯)에게 간하기를 ‘농사 일이 한창 급할 때 하루를 밭갈지 못하면 백일을 먹지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시기라는 것은 농사에 있어서 가장 급한 것으로 하루도 잃게 해서는 안 된다. 옛날에 부역을 반드시 농사 일이 없는 틈에 시켜서 백성을 해롭히지 않았던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대체로 중춘(仲春)의 달이란 곧 얼었던 땅이 녹아 경작이 막 시작되는 시기이다. 궁가(宮家)의 묘소에 물이 고인 곳에 대한 역사는 시급하여 그만 둘 수 없는 일도 아니니, 천천히 농사 일이 수월한 때를 기다려서 해도 무엇이 불가하겠는가. 그런데도 백 명의 일꾼을 징발하여 8일 동안의 역사에 나아가게 하였으니, 이 어찌 성인이 백성을 알맞은 때에 부린다는 도리이겠는가.
2월 17일 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18일 병자
태백성에 낮에 나타났다.
집의 이단하(李端夏), 지평 이휴징(李休徵)이 아뢰기를,
"이번에 칙사가 서울에 들어올 때 가마를 타고 구경하는 부녀자가 거리에 북적거려 보기에 놀랍고 이상하였습니다. 지나간 일이라 검칙할 수 없으나 앞으로는 금지시켜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사신이 올 때에 만약 또 다시 구경하는 사족의 부녀자가 있으면 해당 부서를 시켜 적발하여 본부에 보고하게 하여, 그 가장을 논죄할 수 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응교 이민서(李敏叙)가 질병으로 체직되었다. 이민서가 옥당에 입직하면서 스스로 자신의 목을 칼로 찔렀는데, 조금 상처가 낫자 소장을 올려 형편을 진달하고 사적(仕籍)에서 삭제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상이 그의 직임을 체직시키도록 윤허하였다.
2월 19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지화(鄭知和)를 형조 판서로, 어진익(魚震翼)을 정언으로 삼았다.
대신·원임 대신·정부의 서벽(西壁)007) 관각의 당상, 육조의 참판 이상이 빈청에 모여 왕세자의 표자(表字)를 의논하여 정하였는데, 명보(明普)로 낙점되었다.
전 부제학 이민구(李敏求)가 죽었다. 이민구의 자는 자시(子時)인데 이조 판서 이수광(李晬光)의 아들이다. 젊어서 뛰어난 재능이 있어 사마시와 문과에 모두 장원하였다. 병자 호란 때는 검찰 부사(檢察副使)로 먼저 강도(江都)에 들어갔는데, 검찰사 김경징(金慶徵)은 평소부터 강화 유수 장신(張紳)과 잘 지내지 못한 데다가 수상의 세력을 믿고서 【김경징의 아비 김류(金璧)가 이 당시 수상이었다.】 자주 장신과 더불어 병권을 다툰 바람에 어긋난 일이 많았으므로 남한 산성에서 두 번이나 교지를 내려 그치게 하였다. 그리고 강도에 들어갈 때도 빈궁과 원손이 미처 물을 건너지 못하였는데도 김경징은 먼저 그의 처자들을 건너게 하였다. 강도가 함몰된 뒤 조정이 앞뒤에 죄상을 성토하여 장신과 함께 사사(賜死)하였다. 검찰은 애당초 전쟁하는 장수가 아니었고 보면 이민구에게는 김경징과 같은 죄도 없었는데, 어찌 김경징과 같은 부류로 논죄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대간의 논계가 여러 달 그치지 않았으니, 그 또한 너무 각박하다고 하겠다. 인조(仁祖)는 끝내 윤허하지 않고 변방에 귀양보냈다가 정해년008) 에 방면하고 기축년에 직첩을 돌려주도록 명령하였는데, 대간에서 힘써 다투었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그뒤 양조(兩朝)009) 에서 서용하라는 은전이 있었으나, 그때마다 대간의 논계로 인하여 명령을 도로 거두었다. 묻혀 지낸지 30년에 마침내 불행하게 죽었는데, 세상 사람들이 많이 그의 문장을 아깝게 여겼다.
2월 20일 무인
상이 요즘들어 기체가 매우 불편하였다. 세자의 관례 때에 상이 수레타는 곳에 나아가 빈(賓)을 전송하는 절차가 있는데 친히 임하기가 어렵게 되어, 연기시킬 것을 명하였다. 예조에서 3월 9일로 택일하였다.
2월 21일 기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2월 23일 신사
의금부 도사 한광(韓洸)이 의금부 주위에 사는 사람을 때려 죽였다. 판의금 김좌명(金佐明)이 이 때문에 소장을 올려 본직과 겸대한 직임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낭관의 일이 비록 관하의 일이라고는 하지만, 미련하고 사나운 습관을 경이 바로잡을 수는 없는 일이다. 경은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2월 25일 계미
집의 이단하(李端夏), 장령 이하(李夏)가 문서를 살피지 못한 일로 인피하였다. 지평 이후징(李厚徵)이 혐의가 있으므로 감히 처치할 수 없다고 인피하였다. 간원이 처치하여, 이후징은 출사시키고 이단하 등은 체직시켰다.
사간 이단석, 헌납 김석주가 인피하여 아뢰기를,
"전 전라 감사 김징이 사치스런 잔치를 베풀어 선물이 푹주하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오래될수록 더욱 들끓었습니다. 그런데도 신들은 그 죄를 가볍게 적용하여 파직시킬 것만을 청해서 윤허를 받았습니다. 통제사 유비연(柳斐然)은 보낸 물건이 박이명(朴而㫥)에 비하여 조금 적었으므로 죄를 청할 때에도 박이명보다 조금 가볍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금방 대석상에서 장관이 말하기를 ‘이미 주어서는 안 될 것을 주었다면 많고 적음을 논할 것 없이, 남에게 증여한 죄를 범한 것은 다름이 없다. 그리고 증여한 자는 당연히 죄주어야 하지만, 받은 자도 유독 가벼이 할 수는 없다.’고 하였습니다. 신들이 당초에 적용시킨 법률이 너무 가볍게 한 실수가 드러났습니다. 신들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이 때 대사간 김우형(金宇亨)이 또 죄를 더 주어야 한다고 발론하였는데, 이단석 등이 인피하고는 물러가 물론을 기다리지 않은 채, 드디어 연명으로 모두 잡아다 문초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26일 갑신
임유후(任有後)를 병조 참판으로, 신정(申晸)을 수찬으로, 신석번(申碩蕃)을 장령으로, 윤리(尹理)를 정언으로 삼았다.
2월 27일 을유
대사간 김우형, 헌납 김석주가, 유비연(柳斐然) 등을 모두 잡아다 문초할 것을 계청하고, 또 아뢰기를,
"김징이 범한 죄는 매우 외람되고 문란한 짓입니다. 신도 그가 어버이를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비록 논핵을 하였으나 오히려 그의 죄를 가볍게 하여 파직시킬 것만을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 사람들의 말이 그치지 않고 죄상이 더욱 더 드러났으니 실로 파직만으로 그칠 수 없는 점이 있습니다. 김징이 부임할 당초에, 벌써 그의 내행(內行)을 위하여 짐바리를 싣고 귀가하였기 때문에, 자못 검소하지 못하다는 소문이 있었습니다. 급기야 잔치 자리를 베풀었을 때 모든 차비와 의복 및 노리개를 마련하느라 은자와 비단을 많이 썼고 공장(工匠)을 한 달이 넘도록 그치지 않고 사역시켜, 감영의 저축을 탕진하고 온 도의 재력을 허비하였습니다. 갖가지 하는 일이 사치스러웠는데다가, 또 격서를 보내 부르고 서찰을 보내 요구한 것이 수십 고을일 뿐만 아니라 곤수(閫帥)·영장·무인·유생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오도록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사람마다 빈손으로 오는 자가 없고 물건마다 하찮은 것이 없어 비단과 화폐를 실은 수레가 많이 들어오도록 하였습니다. 심지어 지난 겨울 전최(殿最)를 매길 때 중과 하의 고과를 받은 고을 수령들은 대부분 선물이 적었기 때문이었는데 서로 공공연히 지목하게 되어 온 도에 비웃음 거리가 되었습니다. 김징은 평소에도 이미 역참(驛站)의 돈 사건으로 한바탕 오욕을 당하였는데, 지금껏 조금도 자제하지 않은 채 방종하고 교활함이 여전했습니다. 그의 허다한 탐욕스런 실상이 매우 놀랍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박이명과 김징을 모두 잡아다 문초하라고 명하였다.
2월 29일 정해
경상 감사가 치계하여, 왜관(倭館)의 선창(船倉)을 수축하여 왜인들이 왜관을 옮겨 주기를 바라는 뜻을 끊기를 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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