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무오
좌부승지 이지익(李之翼)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고, 인하여 김좌명과 장선징 등을 논척하였는데, 그 대략에,
"장오(贓汚)의 죄를 범한 사람을 형추하라는 윤허가 내린 뒤에 갑자기 그명을 도로 거둘 것을 아뢰었으니, 이는 후일의 폐단에 관계될 뿐만이 아닙니다. 또한 의도는 저쪽에 있으면서 들어가 진찰한다고 칭탁했으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박이명(朴而㫥)이 공초한 내용 중에는 다 실토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추문하는 것은 마땅한 일입니다. 그런데 집무를 그만두고 죄인을 구호하기에 급급하였으니, 신은 임금의 세력이 펴지지 못하고 권세가 아래에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인가 염려됩니다. 아, 기쁨과 슬픔을 국가와 함께 해야 할 신하가 오히려 사사로움을 앞세우고 공적인 일을 뒤로 한다면, 그 나머지야 다시 말할 것조차 있겠습니까."
하였다,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으나, 이지익은 끝내 사직하여 체직되었다.
3월 2일 기미
헌납 이하(李夏)가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고향으로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3월 3일 경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차왜(差倭)의 사정을 물으니,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왜관을 옮기는 일이 저들에게 있어서는 절박한 일입니다. 대체로 배를 정박시키는 곳이 그 전과는 틀려서 뱃길이 순탄하지 못하기 때문에 고민하고 있습니다. 허락을 받지 못하면 이들이 잇따라 나올 것이니, 접대할 즈음에 물력의 소비가 클 것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들이 바라는 곳이 어디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웅포(熊浦)라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만약 웅포로 옮긴다면 접대하는 일을 어느 고을이 주관하게 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왜관을 옮긴다면 웅천(熊川)이 부사(府使)가 되어야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어서 왜인들이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한지의 여부를 묻고, 또 묻기를,
"대마도 근처의 살기 어려운 형편이 마도(馬島)와 같은가?"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살기가 모두 어려워 토란을 칡잎으로 싸서 먹습니다. 이 때문에 경술년010) 에 강화(講和)할 때 마도의 사람들이 두 나라 사이에 서서 화친하기를 주도하였다고 합니다."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마도는 우리 나라가 아니면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왜국은 사치가 매우 심하여 남경(南京)에서 무역해 온 백사(白絲)가 모두 왜국으로 들어갑니다. 비단을 짤 뿐만 아니라 배의 닻줄 같은 것도 모두 백사를 쓰기 때문에, 아무리 수만 근(斤)이라도 모두 팔 수 있습니다. 필시 쓰이는 데가 무궁할 것입니다."
하였다. 민정중이 아뢰기를,
"북경(北京)에 주둔시킨 군사가 10여만 명입니다. 이로써 천하에 무적이지마는, 산해관(山海關) 밖은 무인지경과 같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산해관 안은 가득 찼던가?"
하자, 민정중이 아뢰기를,
"그렇지 않았습니다. 명나라는 병력을 모두 이곳에 두었기 때문에 태평 시대에는 북경보다 번성했다고 합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요동(遼東) 이후에는 연대(烟臺)가 별같이 벌려 있었는데, 천하의 물력이 아니면 이같이 할 수 없을 정도였지만, 오히려 적을 제어하지 못했습니다. 이로써 살펴본다면 국경의 방비만으로 적을 방어할 수 없다는 것이 명백합니다."
하였다. 상이 또 왈가(曰可)의 일로써 【왈가는 북방 오랑캐의 한 종족 이름이다.】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군병을 징발할 근심은 없겠는가?"
하니, 정태화는 그럴 것이라고 아뢰었고, 민정중은 아뢰기를
"이들은 나선(羅先)입니다."
하였다. 이때 북방 오랑캐인 왈가가 북방을 어지럽혔는데, 청인들이 가서 공격하였으나 5백 명의 군사가 모두 몰살당하였기 때문에 상이 이를 걱정한 것이다. 상이 또 이르기를,
"갇힌 몽고왕(蒙古王)이라는 자는 보고 들은 사건으로 살펴본다면 이주(伊州) 부락 사람이 아니다."
하니, 민정중이 아뢰기를,
"청인은 이주 부락이라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몽고 40개 종족 중에 이들이 통솔하는 영수라고 하는데 이 말이 옳은 듯합니다. 평양 사람으로 포로가 되어 중이 된 자가 와서 매우 자세하게 전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갇힌 자가 두려워하거나 겁내지 않았다고 한 말은 중이 전하였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중 뿐만 아니라 전하는 자들이 모두 그랬습니다. 대체로 이 사람은 호걸인 듯합니다. 역관 조동립(趙東立)이 심양에 갔더니 그곳에서는 흉흉하게 두려워 하면서 ‘몽고인이 조석에 도착할 것이다.’ 했는데, 북경에 들어가니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저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서량(西涼)의 서쪽 지역의 몽고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서량의 몽고에게는 청인들이 금과 비단을 뇌물로 많이 준다고 합니다. 그리고 혜성(彗星)이 서방에서 나타났는데, 저들은 역시 이 때문에 염려한다고 합니다."
하였다.
이만영(李晩榮)을 대사간으로, 이익(李翊)을 이조 참의로, 김석주(金錫胄)를 이조 좌랑으로, 홍주삼(洪柱三)을 응교로, 이혜(李嵆)를 부교리로, 신정(申晸)을 수찬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설서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정유악은 정뇌경(鄭雷卿)의 아들이다. 정뇌경은 필선으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들어갔는데,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꾀하다가 【정명수가 우리 나라 일을 주관하면서 여러 가지로 침해하고 욕보였으므로 사람들이 결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로(朴𥶇)에게 누설되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비통하게 여긴다. 정뇌경이 죽으려 할 적에 한 구절의 대구(對句)를 지어 부채에 써서 아들 정유악에게 전해주게 하였는데, 대체로 아들이 행세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었다. 정유악이 장성하여 모친의 뜻이라 핑계하고 과거를 폐하지 않더니, 급기야 벼슬길에 올라서는 출세하기에 급급하여 경솔하고 천박한 짓을 반복하므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62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인물(人物)
사신은 논한다. 정유악은 정뇌경(鄭雷卿)의 아들이다. 정뇌경은 필선으로 소현 세자(昭顯世子)를 모시고 심양(瀋陽)에 들어갔는데, 정명수(鄭命壽)를 죽이려고 꾀하다가 【정명수가 우리 나라 일을 주관하면서 여러 가지로 침해하고 욕보였으므로 사람들이 결딜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박로(朴𥶇)에게 누설되어 참혹하게 죽음을 당했기 때문에, 나라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비통하게 여긴다. 정뇌경이 죽으려 할 적에 한 구절의 대구(對句)를 지어 부채에 써서 아들 정유악에게 전해주게 하였는데, 대체로 아들이 행세하기를 원치 않는 것이었다. 정유악이 장성하여 모친의 뜻이라 핑계하고 과거를 폐하지 않더니, 급기야 벼슬길에 올라서는 출세하기에 급급하여 경솔하고 천박한 짓을 반복하므로, 사람들이 천하게 여겼다.
정언 김덕원(金德遠)이 동료가 상회례(相會禮)를 약속하고도 나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홍수하(洪受河)가 신병으로 상회례에 나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김덕원은 출사시키고, 홍수하는 체직시켰다.
양사가 공주의 집짓는 일을 쟁론하였으나, 상이 끝내 따르지 않았다 대간의 논계가 한창 일고 있는데도 공사가 끝나려 하였으므로, 식자들이 한심하게 여겼다.
3월 4일 신유
예조가 아뢰기를,
"본조의 계사에 ‘왕세자가 관례 뒤에 종묘에 알현하는 일과 백관이 하례드리는 일을 탑전에서 이미 여쭙고 결정하였습니다. 종묘 알현은 전례대로 택일하여 거행할 것입니다만, 이튿날 하례드리는 한가지 일은, 중국의 전례(典禮)를 상고해 보니 「황태자의 관례가 끝나면 백관들은 조복(朝服)을 갖춰 입고 봉천전(奉天殿)에 나아가 하례를 행한다. 예가 끝나면 공복(公服)으로 갈아 입고 동궁에 나아가 하례를 행한다.」고 하였습니다. 이로써 살펴보면 이것은 명나라에서 하례드리던 규례인 듯합니다만, 우리 나라의 고사(故事)는 《중종실록(中宗實錄)》 가운데 인종(仁宗)이 세자가 되어 관례를 행할 때 백관이 권정례(權停例)011) 로써 하례하고 특사(特赦)를 반포하였다고 하였을 뿐이고, 그 동안의 절목을 결정한 문서는 지금 상고할 수가 없습니다. 또 정미(丁未)012) ·무신(戊申) 두 해의 문서를 상고해 보니 왕세자의 책봉례(冊封禮)와 상의 병환이 회복된 뒤의 하례에 대전(大殿)·대왕 대비전(大王大妃殿)·왕 대비전(王大妃殿)·중궁전(中宮殿)에 모두 예를 행하고 세자궁에는 전교로 인하여 임시로 정지하였습니다. 지금 의당 근례대로 네 궁과 세자궁에 하례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마는, 대신들도 확실하게 어떤 전례를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고 합니다. 어찌해야 되겠습니까?’ 하였더니, 전교하시기를 ‘그때 가서 다시 아뢰는 것이 좋겠다.’ 하셨습니다. 지금 관례일이 임박하였으므로 감히 다시 여쭙니다."
하니, 상이 정미년의 전례대로 하도록 하였다. 예조가 또, 시강원이 아뢴 궁관(宮官)의 하례드릴 일로 인하여, 별도로 반열을 만들어 행례할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역시 정미년의 전례대로 하라고 명하였다.
3월 5일 임술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이 들어왔는데, 상이 양심합(養心閤)에서 인견하였다. 송준길이 상의 안부를 묻고, 이어서 아뢰기를,
"신이 사는 곳이 전라도와 충청도 사이에 있어 그 곳의 여론을 모두 들어 알고 있는데, 김징(金澄)의 일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지금 한창 심리를 받고 있는 일을 말한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그렇습니다. 대각이 듣는 풍문은 으레 대부분 사실과 다른데, 이번 대간의 계사는 사실이 8, 9할이나 틀린 것입니다. 자고로 어미를 위해 수연을 베푼 일을 장률(贓律)로 처리한 일이 있었습니까. 이같은 처리는 실로 효도에 손상되므로 식자들이 걱정하고 있습니다. 정온(鄭蘊)이 감사가 되어 그의 어버이 회갑연을 열었을 적에 수령 중에 성의있는 예물을 바치지 않은 자가 있었는데, 정온이 그의 색리(色吏)를 죄로 다스렸다고 합니다. 그의 의도는 수량을 많이 받고자 한 것이 아니라, 부하의 도리로서 이같이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김징이 베푼 잔치는 원두표(元斗杓)·이경여(李敬輿)·이태연(李泰淵) 등에게 비교할 것 같으면 훨씬 적은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로써 죄를 받게 되었으므로 마음이 공평한 자는 모두 한심하게 여깁니다. 지금의 의논하는 자들이 야박하니, 지금 만약 상께서 먼저 마음을 결정하시기를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이 어째서 장죄가 되는가?’ 하신다면, 경박한 의논들이 안정될 수 있을 것입니다만, 만약 그렇게 하지 않으시면 매우 시끄러운 근심이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지 않았다.
삼가 살피건대, 김징은 본래 일개 장리(贓吏)이다. 일찍이 어천 찰방(魚川察訪)이 되어 은(銀)을 착복하여 폐고되는 죄를 받았으므로, 사람들은 ‘은징(銀澄)’이라고 하였다. 그 뒤 당시의 권세가에 빌붙어 그들의 주구가 되었다가 드디어 현직(顯職)에 쓰이게 되었는데, 대각에 오래 있으면서 날마다 탄핵을 일삼았다. 장오(贓汚)의 사건을 논핵하기를 더욱 좋아하였므로, 사람들이 모두 ‘은징도 남의 청렴치 못한 점을 잘 말하네.’라고 하였다. 급기야 전라 감사가 되자 한없는 욕심을 마음껏 부리면서 탐욕을 자행하였다. 수연을 핑계로 각읍에 요구하니 재화를 수레로 실어 비치지 않는 자가 없었는데, 본도의 병사 박이명(朴而㫥)과 통제사 유비연(柳斐然)이 갖다 바친 것이 더욱 많았다. 불법으로 재물을 탐하는 것이 낭자하여 몹시 미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송준길이 여러번 소명(召命)을 사양하다가 이때에 올라와서 극력으로 구원하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크게 놀라워하였다.
행 부호군 오정일(吳挺一)이 금오(金吾)의 직임을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오정일은 호조 판서로 논핵을 당한 뒤에 갖고 있던 직임을 모두 사직하였다.
3월 6일 계해
김만기(金萬基)를 대사성으로, 윤리(尹理)를 지평으로, 이후(李煦)를 정언으로 삼았다. 김만기는 상당히 침착하고 논의를 좋아하였는데, 당시 당론하는 자들의 영수였다.
경상도 안음(安陰)과 거창(居昌)에 윤2월 16일에 지진이 있었다.
3월 7일 갑자
경상도에 전염병자가 1천 명이었다.
3월 8일 을축
예조가 왕세자의 조알(朝謁)에 관해 계품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신묘년(辛卯年)의 전례에 의거해서 하라."
하였다.
이조 좌랑 김석주(金錫胄)가 김징(金澄)을 논핵한 뒤에 김징을 구원하는 의논이 봉기하였으므로, 김석주가 마침내 소장을 올려 춘방(春坊)의 겸직을 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그 대략에,
"신이 삼가 의금부에 있는 김징과 박이명 두 사람의 공초 문서를 보니, 비록 꾸며대어 부인한 내용이 있었지만 그의 최종 자백서 역시 낭자한 자취를 감추기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대체로 잔치 자리의 소용과 주식(酒食)의 비용으로 비록 백 동이의 술과 천 마리의 쇠고기가 들더라도 이는 남과 함께 즐긴 자료이니, 과장하기에 힘쓰는 사람은 혹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바로 공공의 비축물을 꺼내어 서울 집에 실어 보냈다고 한 말에 있어서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집으로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그는 시장에서 무역하였다고 했습니다. 설사 김징이 말한 것처럼 2동(同) 9필(疋)의 영목(營木)013) 외에는 터럭만큼도 나머지가 없다 하더라도, 선조(先朝) 때에 죄를 받은 윤책(尹策)·한기(韓墍) 등이 범했던 것에 비교한다면 어찌 배나 많은 것이 아니겠습니까. 게다가 김징이 본래 잔치에 참여하지 않은 병사(兵使)가 실어 보낸 선물 상자의 수량이 헤아릴 수 없었는데, 이것은 사체에 다른 바가 있다고 말하면서 받았으며, 자기의 관할이 아닌 통제사가 보낸 명주·목면·목화 등의 선물은 명분이 없는데도 이것은 높은 사람에게 예물로 주는 것이다 하면서 받았습니다. 이런 것도 모두 받았으니, 그가 어떤 것인들 받지 않았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신이 다시 남쪽에서 온 사람들이 김징을 공박한 말을 자세히 들었는데, 진실로 무고가 아니었습니다. 그가 은쟁반 작은 것 한 쌍을 만든 외에도 주발·수저·젓가락이 있었는데, 그 제조를 감독한 색리(色吏)의 성은 백씨(白氏)인데 늙은 사람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계사 중에 추가로 넣었었는데, 지금 김징이 공초한 내용을 살펴보니 은그릇에 관한 일은 완전히 숨겼습니다. 또 비단에 관한 것을 근거없는 말이라고 하였는데, 김징 스스로 하는 말은 이같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만, 속담에 ‘아니 땐 굴뚝에 연기나랴’고 하였습니다. 하인들이 전하는 말이 어찌 전연 근거가 없이 한 것이겠습니까."
하고, 또 말하기를,
"지금 한두 친우들이 애석히 여기는 논의를 전개하면서 심지어 박이명과 유비연을 지균(指囷)의 의리014) 에 견주고, 김징을 채미(採薇)의 절개015) 에 비교하려고 하면서, ‘선물을 준 것도 예의이며 받은 것도 예의이다.’라고 하며 서로 옥과 얼음을 비추듯이 깨끗이 설욕해 주려고 하는데 신의 생각에는 그것이 옳은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박이명의 공초에 있어서는 더욱 간사합니다. 그가 범연히 말한 10여 가지의 물건이란 어떤 물건이며 어떤 종류인지 알 수가 없지만, 이미 의심할 만한 것입니다. 또 군목(軍木)이라는 명칭을 고쳐 본색(本色)이라고 말하면서 종종 농간을 부린 것이 이루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두 짐의 군목이라고 한 것은 바로 여러 달 떠들썩했던 말이며, 연달아 싣고 갔다고 역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마지막에 박이명의 공초에 나왔는데, 그가 스스로 공초한 것이 명주·백목(白木) 및 본색의 목(木)이라고 한 것을 합하며 50여 필에 이르는데, 이 밖에 별도로 이보다 더 많은 진짜 수량이 있는지 어찌 알겠습니까.
그리고 박이명의 일만 그러할 뿐이 아닙니다. 김징이 유비연의 편지를 장선징에게 보내어, 자기가 구걸한 사실이 없었음을 스스로 밝히고 또 보낸 목필(木匹)이 매우 적었다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유비연이 그의 종형인 유혁연(柳赫然)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사실 김징이 편지를 보냈으나 수연의 기일만을 통고했을 뿐이었다.’ 하면서 그가 보낸 것은 정목(正木) 30필과 목화(木花) 50근 및 기타 몇가지의 물건일 따름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이렇듯 앞뒤의 수효가 그대로 있지 않고 변하니, 피차의 실상이 천리를 한 길로 가듯 마찬가지입니다. 아, 이것이 김징이 말한 바 난삽한 것을 꺼려서 스스로 간소하게 치루었으므로 도리어 이경여(李敬輿) 등 여러 사람의 정도에는 이르지 않았다는 것입니까."
하고, 이어서 사인 이단하(李端夏)와 문학 윤계 등 여러 사람들을 들어 증인으로 삼으면서 직임을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사직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여러 신료들이 각자 소장을 올려, 의논이 더욱 어지럽게 되었다.
경상도 초계(草溪)에 윤2월 28일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새알만하였다.
3월 9일 병인
상이 인정전(仁政殿)에 나아가 빈(賓)과 찬(贊)에게 세자의 관례를 시민당(時敏堂)에서 의식대로 행하라고 명하였다. 빈은 좌의정 허적(許積), 찬은 예조 판서 박장원(朴長遠)이었다. 사(師) 영의정 정태화(鄭太和)·찬선 송준길(宋浚吉), 빈객 민정중(閔鼎重)·이경억(李慶億)·조복양(趙復陽), 주인(主人) 낙선군(樂善君) 이숙(李淑)이 먼저 시민당에 나아가 각자의 위치로 들어가 있었다. 빈이 교서를 받들고 동궁에 나아가 교서를 읽었다. 교서의 내용에,
"왕은 이른다. 세자 이돈(李焞)에게 교시하노라. 길일에 관례를 행하는 것은 대개 옛 법식을 따르는 것이다. 이에 좌의정 허적에게 명하여 동궁에 나아가 예식을 행하게 하노라.
나는 생각건대, 예는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이요, 관례는 예를 행하는 시초이다. 하늘을 본뜬 것이 관의 제도이고 성인이 되게 하는 것은 관례의 의식이다. 관례를 행한 뒤에야 인도가 갖추어지고 인도가 갖추어진 뒤라야 예의가 확립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옛날에 성왕들이 관례를 중요시하였다. 더구나 너는 임금의 후사로 종묘를 받들 것이므로 만백성들의 기대 속에서 관례를 행하게 되었으니 그 예가 중대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아, 너 세자 이돈은 천성이 순수하고 기질이 청명하였다. 어릴 때부터 늠름하기가 장성한 자 같아 힘써 가르쳐 주는 스승이 없었지만 행동은 반드시 법도를 따랐다. 겨우 옷을 지탱할 만한 때에 세자로 정하였더니, 공부가 날로 진보되고 글 솜씨도 날로 빛났다. 나를 따라 종묘에 알현케 하였더니 몸가짐을 스스로 엄숙하게 하였고, 나아가 배움에 있어서는 예의에 어긋남이 없었다. 나이는 비록 어리나 덕기(德器)가 이미 드러났기에, 너의 관을 갖추고 너의 의복을 갖추었다. 너에게 술을 내리고 자(字)를 내려 아름다운 일을 이루니, 나의 기쁨 매우 깊지만, 너의 책임은 더욱 커졌다. 이것을 성인이라고 하는 것이니, 어찌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체로 사람에겐 여러 가지 행실이 있으나 효제(孝悌)보다 앞서는 것은 없나니, 지극한 덕과 긴요한 도리를 성현이 밝게 가르쳤다. 너는 이미 능한 것을 바탕으로 삼아 힘써 행하여, 군친(君親)에게 사랑과 공경을 독실히 하고 동기(同氣)에게 화락을 다하라. 이를 온 나라에 미루어 나가면 인륜의 기강이 설 것이니, 요순의 도도 이것이었을 따름이다. 그러나 반드시 배워서 밝혀야만 능히 행하여 실천할 수 있다. 배우는 방법의 요점은 이치를 궁구하여 성품을 다하고 공경을 주로 삼아 성심을 보존하는 데 있는 것이다. 심법(心法)으로 서로 전한 것이 책 속에 갖추어져 있으니, 너는 힘써 처음부터 끝까지 학문에 종사하라.
《전(傳)》에 ‘대인은 어린아이 때의 마음을 잃지 않는다.’고 하였고, 《주역(周易)》에 ‘대인은 천지와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밝음이 합치된다.’고 하였다. 대인이 천지 일월과 합치될 수 있는 것은 어린아이 때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네 이제 어린 나이로 수양이 벌써 올바라서, 천리가 완전하고 외부의 유혹이 섞이지 않았다. 이런 근본을 바탕으로 굳게 지켜 확충해 나가면, 지행(知行)이 서로 이루어지고 습성(習性)이 함께 이룩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그 조예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아, 우뚝한 관으로 머리를 장엄하게 하고 옷을 갖춰 몸을 감싸는 것은, 화려하게 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실행을 책임지우려는 것이다. 예식만 행하고 그 도리를 행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너는 유념해야 할 것이다. 이 가르침을 마음에 새기고 이 예의를 공경히 하여 의관을 단정히 하고 시선을 바로 가지며, 공경의 예와 훌륭한 덕으로 성인의 학문에 몰두하되, 밤낮으로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안일과 나태가 없게 하라. 그러면 하늘의 축복을 받아 길이길이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렇게 교시하노니, 다 알아들었을 것으로 생각하노라."
하였다. 읽기를 마치자 세자가 의식대로 예를 행하였다. 상방관(尙方官)이 익선관(翼善冠)을 받들고 서편 계단으로 오르니, 빈이 받아서 세자의 자리 앞에 올리고, 동쪽을 향하고 서서 축원하기를,
"좋은 달 좋은 날에 처음으로 관을 씌우니, 어릴 때의 뜻을 버리고 어른의 덕을 삼가소서. 오래오래 장수하시어 큰 복을 받으소서."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웠다. 세자가 관을 쓰고 일어서니,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동서(東序)의 장막 안으로 들어가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나오니, 빈이 또 읍하였다. 세자가 자리에 앉으니, 빈과 찬이 꿇어앉아 처음에 씌웠던 관을 벗기었다. 상방관이 원유관(遠遊冠)을 올리니, 빈이 받아서 앞에 올리고, 서서 축원하기를,
"좋은 달 좋은 때에 아름다운 관(冠)을 다시 올리오니, 위의를 공경하고 덕을 밝히소서. 만년토록 장수하고 길이 행복을 받으소서."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우고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들어가 강사포(絳紗袍)을 입고 나오니, 빈이 읍하고, 세자는 자리에 앉았다. 빈과 찬이 꿇어앉아 두 번째 씌웠던 관을 벗겼다. 상방관이 평천관(平天冠)을 올리니, 빈이 받아 앞에 올리고, 서서 축원하기를,
"좋은 해 좋은 달에 관복을 모두 입히오니, 그 덕을 이루소서. 만수 무강하시고 하늘의 축복을 받으소서."
하고, 꿇어앉아 관을 씌우고 빈이 읍하였다. 세자가 들어가니, 보덕(輔德)이 술자리를 마련하였다. 세자가 면복(冕服)을 입고 나와 자리에 나아가 남쪽을 향하고 앉았다. 빈이 술을 받아 세자의 자리 앞에 나아가, 북쪽을 향해 서서 축원하기를,
"맛좋은 술을 정성껏 올리니 향기롭습니다. 절하고 받아 제사지내어 상서로움을 정하소서. 하늘의 아름다움을 받들어 노년이 되도록 잊지 마소서."
하고, 꿇어앉아 술잔을 올렸다. 세자가 술잔을 받아 제사지내고 술을 마셨다. 필선(弼善)이 세자를 인도하여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서, 서편 계단의 동쪽을 향하였다. 빈이 조금 앞으로 나가 자(字)를 전하면서 말하기를,
"관례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좋은 달 좋은 날에 자(字)를 고하옵니다. 군자에게 마땅한 바이고 복받기에 마땅하오니, 받아서 길이 보존하소서. 교지를 받들어 자를 명보(明普)라 하옵니다."
하니, 세자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내 비록 어리석으나 감히 공경히 받들지 않으리오."
하였다. 세자가 관례를 마치니, 빈 허적과 찬 박장원이 대궐에 나아가 복명하였다.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일찍이 김징(金澄)이 수연 때에 지나치게 선물을 받은 것과 잘못된 행동을 논핵하였습니다. 그런데 삼가 들으니, 송준길이 대간의 계사가 사실을 잃은 것이 십분의 팔구라고 하였다 합니다. 신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고, 인피하며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지평 윤리(尹理)도 이를 이유로 인피하고, 장령 경최(慶㝡)는 법을 무릅쓰고 사사로이 나간 일로 인피하였다. 헌부가 처치하여, 이단석과 윤리는 출사시키고 경최는 체직시켰다.
대마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차왜(差倭) 평성상(平成尙) 등을 보내 서계(書契)를 가지고 와서 경접위관(京接尉官)을 보내 줄 것을 청했는데, 왜관을 옮기기 위해서였다. 그 세계의 대략에,
"일본 대마주 태수(日本對馬州太守) 평의진은 조선국 예조 참판 대인(禮曹參判大人) 합하(閤下)에게 서장을 받들어 올립니다. 배를 타고 돌아온 심부름꾼 편에 회답 서한을 받아보니, 내용이 정중하여 기대에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습니다. 우리 고을의 악포(鰐浦)는 나루터가 협소하고 파도가 거세어서 험난함이 앞에 가로놓여 있으므로, 부득이 재차 심부름꾼을 차송합니다. 화목을 다지는 방법은 정성스러움에 있을 따름이니, 속히 의논하여 사정을 회답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였다. 조정이 신정(申晸)을 접위관으로 차출하여 보냈다.
3월 10일 정묘
상이 선정전(宣政殿)에 나아가 세자의 조알(朝謁)을 의식대로 받았다. 세자가 동편 뜰 절할 자리에 나아가 북쪽을 향하여 예를 행하였다. 예방 승지(禮房承旨) 정익(鄭榏)이 앞으로 나가 꿇어앉아 교서를 읽겠다고 상에게 아뢴 다음 세자의 자리 앞에 나가 서쪽을 향하고 섰다. 교서를 읽기를,
"어버이를 효로써 섬기고 아랫사람을 인으로써 대하라. 사람을 의로써 부리고 은혜로써 기르라."
하니, 세자가 네 번 절하고 조금 나아가 아뢰기를,
"신이 비록 명민하지 못하나 감히 정성껏 받들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예를 마치자 대왕 대비전·왕 대비전·중궁전이 안에서 조알을 받았는데, 신묘년의 예대로 행하였다.
중외에 교시하여 사면령을 반포하고, 백관에게 한 품계씩 더 올려 주었다.
3월 11일 무진
햇무리가 졌는데, 묘시부터 유시까지 계속되었다.
이하(李夏)를 장령으로 삼았다.
장령 이휴징(李休徵), 지평 윤리(尹理)가, 포도 대장이 심숙(沈璛) 집에 칩입한 도적을 잡지 못한 죄를 다스릴 것을 청하고, 또 종사관을 파면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그뒤 이 일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이유로 이휴징 등이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정언 김덕원(金德遠)·이후(李煦)가 아뢰기를,
"가산 군수(嘉山郡守) 유휘(柳徽)가, 첩의 친정 큰 조카 이씨 성을 가진 사인(士人)의 아내를 몰래 간통하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다가 본 남편에게 발각되어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사실을 조사하여 죄를 바로잡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강도(江都)의 쌀 8천 석을 경기의 고을에 방출하였는데 미곡이 썩었기 때문이었다. 백성들이 괴롭게 여겼다.
3월 12일 기사
정언 김덕원(金德遠)·이후(李煦)가, 병조 정랑 신경윤(愼景尹)을 곧바로 정랑에 제수한 잘못을 논핵하고 개정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3월 13일 경오
세자가 종묘와 영녕전(永寧殿)에 배알하였다.
정언 김덕원·이후 등이, 유휘(柳徽)만 논핵하고 간음한 여자는 논핵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한 뒤에 아뢰기를,
"사족의 부녀가 남과 간음하면 적용하는 국법이 있습니다. 유휘가 간음한 여자 이영구(李穎耉)의 아내도 아울러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영구의 아내가 유휘와 편지를 주고받은 일이 있었는데, 간음한 자취는 드러나지 않았다. 여러 달 갇혀있었으나 끝내 일이 밝혀지지 않았다. 좌의정 허적은 억울한 일이라 하고, 영의정 정태화는 남녀가 절친한 사이도 아닌데 편지를 주고받았으니 의심할 만하다고 하였다.
3월 14일 신미
행 부호군 서필원(徐必遠)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기를,
"고금의 천하에 어찌 신과 같이 논척을 당하고도 공무를 본 자가 있었겠습니까. 가령 신이 대간의 논핵처럼 벼슬에 연연하며 탐욕을 부리고 염치없이 임금의 총애를 믿었다면, 결코 다시 조정에 들어설 수가 없습니다. 성상의 하교가 비록 군사를 거느리는 직임을 중요하게 여기셨으나, 스스로가 함몰된 뒤에 논죄당하는 것보다 일찌감치 신의 처지를 생각하여 목숨을 보전하게 해 주는 것이 어찌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에게 총융사(摠戎使)의 직임을 맡긴 것은 그 의도가 범연한 것이 아니다, 젊은 사람들의 경박한 논핵을 꼭 혐의할 필요는 없으며, 국가의 어려운 일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다. 속히 공무를 보아 군정(軍政)이 허술해지는 폐단이 없게 하라."
하였다.
3월 15일 임신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갔는데, 약방이 들어와 진맥하였다. 송준길(宋浚吉)과 이유태(李惟泰)를 인견하였다. 이유태가 물러날 것을 힘써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송준길이 공주의 저택이 규모가 지나치다는 것을 말하고, 또 김징(金澄)을 매우 힘써 구원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김석주(金錫胄)가 상소 중에서 실정을 참작해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그런 의논이 많이 있을 뿐만 아니라, 신의 생각도 역시 그렇습니다만 원래 죄가 없다고 하는 말에 있어서도 옳지 못한 것입니다. 만약 대간의 계사대로 두 짐의 군목(軍木)과 많은 은화를 썼다면 실로 죄가 있는 것입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신이 비록 들은 바가 있으나 대신이 이같이 진달하니, 어찌 다시 말해서 사체를 손상시킬 수야 있겠습니까. 구원하려는 의도가 있다면 어찌 신이 형편없는 사람이 아니겠습니까."
하였다.
3월 17일 갑술
밤에 달이 심성의 큰별을 범하였다.
3월 18일 을해
김수항(金壽恒)을 지경연으로, 신명규(申命奎)를 부수찬으로, 유연(柳㝚)을 지평으로 삼았다. 김수항은 40세도 안 되어 총재(冢宰)의 직위에 오르고 문형(文衡)을 맡았다. 김수항같이 일찍 현달한 사람이 근세에 없었으므로, 이 당시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그러나 조정에 있으면서 꿋꿋한 절개가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것을 부족하게 여겼다. 부친상을 당해서는 상례를 신중히 지키지 않았다는 비방도 있었는데, 이 때에 와서 상복을 벗었다.
3월 19일 병자
지평 윤리(尹理)가 추고 전지(推考傳旨)를 받을 때에 하리(下吏)가 법을 어기고 대청에 올라감으로써 옥에 같혀 추문을 당하기까지 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3월 20일 정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의 여러 재신들 및 강화 유수 김휘(金徽)를 인견하였다. 김휘가 갑진년 이전의 환곡을 탕감해 줄 것을 청하니, 상이 각 창고의 환곡에 대하여 각 연도에 받아들이지 못한 수량을 상세히 계문(啓聞)하라고 명하였다.
예조가 가뭄으로 인해 기우제(祈雨祭)를 지내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1일 무인
최후상(崔後尙)을 지평으로, 신석번(申碩蕃)을 사업(司業)으로 삼았다.
3월 22일 기묘
경상 감영 영리청(營吏廳)에 불이 나서 오래된 문서가 모두 탔다.
3월 23일 경진
삼각산·백악산·목멱산·한강·풍운 뇌우단(風雲雷雨壇) 및 국내의 산천, 성황단(城隍壇), 우사단(雩祀壇)에 관원을 보내어 기우제를 지냈다.
3월 25일 임오
지평 유연(柳㝚)이 가뭄으로 인하여 진주(晋州)·남원(南原) 금산(錦山)·달천(㺚川) 등지의 임진 왜란 때 장사들이 전사한 곳에 특별히 근신을 보내서 택일하여 제사지낼 것을 계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김징(金澄)의 일이 낭자하게 전파되었으니, 대간들이 그것을 논계한 것은 곧 그들의 직분입니다. 이조 좌랑 김석주가 일찍이 간관이 되어 홀로 앞장서서 탄핵하였으니, 직절한 풍도는 정말 가상합니다. 그러나 자기 말을 실증하려고 여러 사람들을 끌어들였는데, 이것은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사체를 크게 손상시켜 물의가 비난하고 있으니, 김석주를 체직하도록 명하소서."
하고, 또 논핵하기를,
"원용(援用)된 신하들이 소장을 올려 다투어 변명하기를 꼭 송사하듯 하였는데, 정원이 흐리멍덩하게 받아들였으니 매우 부당합니다. 해당 승지를 추고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별세초(別歲抄)016) 를 내려, 파직되었거나 산관(散官)이 된 사람들을 서용하였다.
3월 26일 계미
우의정 홍중보, 예조 판서 박장원을 보내어 순릉(純陵)의 봉분을 다시 만들게 하였다. 【도조(度祖)의 비(妣) 경순 왕후(敬順王后) 박씨(朴氏)의 능으로 함흥부(咸興府)의 동쪽 30리에 있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1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65면
【분류】왕실-종사(宗社)
지평 유연(柳㝚)이 상소를 올린 사람들의 죄를 청하지 않은 일로 물의에 비난을 당하자 인피한 뒤에, 도승지 장선징(張善瀓), 사인 이단하(李端夏), 문학 윤계(尹堦) 등이 서로 소장을 올려 다투어 변명한 잘못을 논핵하면서 추고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3월 28일 을유
종묘·사직·북교(北郊)에 관원을 보내어 다시 기우제를 지냈다.
3월 29일 병술
도둑이 명정전(明政殿)의 어탑(御榻)을 가로막는 장막을 훔쳐 갔다. 수직한 군사들이 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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