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일 정해
서울의 각사(各司)로 하여금 경상도에 왕복한 문서를 베껴서 경상 감영에 보내게 하였는데, 이는 감영의 문서가 불탔기 때문이다.
충청도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죽는 자가 연달았다.
황해도에 가뭄이 들었다.
4월 2일 무자
좌참찬 송준길이 소장을 올려 돌아가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김징(金澄)의 일로 인하여 논의가 날이 갈수록 더욱 떠들썩해졌는데, 송준길이 맨 먼저 김징을 구원했었기 때문에 스스로 불안하여 물러가기를 청한 것이다.
4월 3일 기축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갔다.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는데 안질 때문이었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금제조(禁制條)가 아직도 거행되지 않는다는 일을 진달하고, 또 유휘(柳徽)의 일을 진달하기를,
"유휘에게 억울함이 없다면 속히 처단해야 하며, 만약 무고를 당한 것이라면 무고한 자의 죄는 간음한 사람보다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 옥사를 지연시켜 점점 간사한 꾀를 내고 있으니, 반드시 별도로 변통하여 위법의 단서를 적발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복들의 공초에도 어긋난 단서가 있다. 이른바 가짜 언서(諺書)란 진서(眞書)와는 달라 위조하기가 매우 쉽다. 매우 분명하게 조사해야 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삼성 추국의 규례에 의거해서 공초하는 대로 아뢰도록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그렇게 하라고 분부하라."
하였다.
중화(中和)에 침몰한 배의 쌀과 콩 5백 30 석, 양덕(陽德)에 받아들이지 못한 환곡의 쌀과 콩 1백 60석을 모두 탕감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감사의 장계로 인한 것이다.
4월 4일 경인
관원을 보내어 세 번째 기우제를 거행하였다.
금부가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서 이영구(李穎耉)의 아우 이신구(李藎耉)와 그의 누이와 비복들이 한통속이 되어 무함을 꾸몄던 것이라고 죄인 영선(英善)이 공초를 바쳤기 때문에, 연루된 자들을 모두 가두어 문초하고 필적을 감정해서 진위를 증빙할 것을 청하였다. 영선은 이영구의 아내 이름이다.
4월 5일 신묘
제주에 전염병이 크게 번져 사망자가 연달았다.
4월 7일 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평안도 창성(昌城)·선천(宣川)·이산(理山)·박천(博川)·가산(嘉山) 등의 고을에 3월 25일 서리가 내렸다.
4월 8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9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태미 서원(太微西垣) 안으로 들어갔다.
관원을 보내어 네 번째 기우제를 지냈다.
부수찬 신후재(申厚載)를 남원(南原)에 보내어 전사한 장졸들에게 제사지냈다.
이때 팔도에 한 달이 지나도록 비가 오지 않아 밀과 보리가 모두 말라 버렸다. 상이 가뭄을 민망히 여겨 현재 갇혀 있는 죄인들을 너그럽게 처리할 것을 명하였다.
상이 경연에서 왜인들의 왜관을 옮겨 주는 일을 언급하자, 좌우가 모두 웅포(熊浦)를 허가할 수 없는 상황을 말하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웅포는 허가할 수 없다고 하더라도 다른 곳은 허락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입니다."
하였다. 이때 대장 이완(李浣) 등은 결코 허가할 수 없다고 말하였고, 정태화는 허가하지 않을 수 없다고 말하였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아뢰기를,
"호적에 누락된 죄인들의 온 가족을 변방으로 이주시키는 법은 원래 옛법이 아닙니다."
하고, 이어서 옮겨진 백성들의 불쌍한 정상을 진달하였다. 이때 호적법이 매우 엄격하여 호적에 누락되었다가 발각되는 자가 있으면 변방으로 옮겨버려 백성들이 억울하다고 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이민적이 언급한 것이다.
민정중(閔鼎重)을 형조 판서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사인으로 삼았다. 이섬은 대간의 직책에 합당치 않았으며, 김만균도 인망이 없었다. 우의정 홍중보가 김만균을 천거해 놓고는,
"김만균이 꼭 이 직책을 가지려고 하므로 내가 그의 소원을 이루어 주었다."
했는데, 듣는 자들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4월 10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서울에 있는 죄수들을 너그럽게 처결하였다. 상이 판의금 김좌명(金佐明)을 시켜 죄인들의 문안(文案)을 읽게 하였는데, 영선(英善)의 일에 이르러 의금부 당상들이 각자의 소견을 진달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다. 영의정 정태화가 아뢰기를,
"유휘 첩의 어미가 밤낮없이 올라와 뇌물을 주었다는 말을 사람들이 모두 들어서 알고 있습니다. 만약 서찰을 서로 주고받은 일이 없었다면 무엇 때문에 올라와 뇌물을 쓰겠습니까. 신의 생각에는 남녀가 서로 간음했는지는 비록 알 수 없으나 서찰을 서로 주고받은 일은 있다고 여겨집니다. 선비의 아내로서 어찌 얼숙모(孼叔母)의 남편과 서로 서찰을 주고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사족의 부녀로서 음란한 행실이 있는데 요행히 죄를 면하였다면 이는 형법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한 것이며, 그런 일이 없는데 악명을 받았다면 이는 지극히 억울한 일입니다. 명백하게 처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다. 상이 영선의 사람됨을 물으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사족의 부녀같지 않다고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가 영선의 사람됨을 물은 것은 그 사람이 필시 단정치 못하기 때문에 남에게 의심을 받아 이런 근심을 초래했을 것이라고 여겨서이다. 진실로 음란한 행실이 있었다면 반드시 남에게 발각되었을 것인데 간음한 현장을 직접 본 자가 없으니, 이것을 알 수가 없다."
하였다. 한광(韓洸)의일에 이르러 상이 대신들에게 물었는데, 이경석(李景奭)이 아뢰기를,
"죽은 자의 사인은 한광에게서 말미암은 것이나, 그 실정을 살펴보면 죽이려고 했던 것은 아닙니다. 이 때문에 목숨으로 보상케 한다면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하였다. 정태화와 정치화의 뜻은 이경석과 같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의도가 있었든 없었든 살인한 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법으로 논한다면 의당 살인한 죄로 죄주어야 하지만 사형을 감해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입니다."
하니, 송준길이 아뢰기를,
"영선의 옥사에 대해서는 허적이 진달한 것이 신의 생각과 같고, 한광의 일에 대해서는 정치화가 진달한 것이 신의 생각과 같습니다."
하였다. 상이 금부 당상과 삼사에게 물으니 모두 죽이는 것은 부당하다고 아뢰었다. 상이 사형을 감하여 정배시키라고 명하였다. 김징의 일에 대해 이경석이 아뢰기를,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자가 장죄(贓罪)를 받기까지 한다면 지나친 일입니다만, 신의 생각에는 김징이 반드시 하늘의 재앙을 받은 것이라고 여깁니다. 전하께서 위로 두 자전(慈殿)을 위해 잔치를 열려고 할 때에 그가 발론하여 정지시켰습니다. 그런데 지금 자기 어미의 수연은 크게 베풀었으니, 어찌 신명이 벌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하고,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징이 부모를 위해 잔치를 베푼 것으로 죄를 받는다면 부당한 일입니다만, 그렇다고 조금도 과실이 없다고 한다면 불가한 일입니다."
하였다. 송준길이 극구 김징을 구원하였는데, 심지어 말하기를,
"설령 김징에게 범죄가 있더라도 효도로 세상을 다스리는 것으로 말한다면, 차라리 한 장리(贓吏)를 놓아주고 말지 어버이의 수연을 베푼 사람을 죄주어 관대한 정치를 손상시켜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과연 김징이 두 짐의 군목(軍木)을 받고 많은 은화를 썼다면 어찌 죄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어버이를 가진 자들은 앞으로 못할 짓이 없게 될 것입니다. 어찌 옳은 일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논의가 이와 같으니 진실로 판별하기가 어렵다."
하였다. 송준길이 아뢰기를,
"상께서 사정(邪正)을 이와 같이 판별하지 않으신다면, 이 일이 비록 작은 일이지만 다른 일이 염려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시비(是非)라고 한다면 그래도 괜찮지만 사정(邪正)이라고 한다면 신은 그것이 옳은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불쾌하게 여기면서 이르기를,
"그렇다면 파직시켜 놓아 보내고 조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떠한가?"
하니, 정태화가 아뢰기를,
"성상의 하교가 마땅합니다."
하고, 정치화의 말도 역시 이와 같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에는 그대로 가두어둔 채 조사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옳겠으나, 재변을 당한 이때 우선 너그러이 처결하여 조사를 기다리는 것도 무방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파직시켜 놓아 보내고 조사한 보고서가 올라온 뒤에 회계하라."
하였다. 박이명(朴而㫥)의 일에 이르자 상이 김징과 마찬가지로 논죄할 것을 명하고, 그 나머지는 파직시키기도 하고 삭직시켜 놓아 보내기도 하였다. 의금부의 당상이 물러나자 형조의 당상을 입시하도록 명하였다. 형조의 죄인 중에 죄가 가벼워 방면된 자가 30여 명이었고, 죄가 중한 자는 정배시켰다. 이민적(李敏迪)이 강석규(姜錫圭)의 일을 말하니, 특별히 별전(別典)을 적용하여 방면시켰다. 송준길(宋浚吉)이 송지렴(宋之濂)의 일을 말하니, 상이 형벌을 감등시키도록 명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죄인 비희(非喜)와 그의 남편 유씨(柳氏)의 일을 말하니, 상이 마찬가지로 석방시키라고 명하였다.
대사간 이만영(李晩榮)이 서울의 각 아문과 외방의 감영·통영에 비축되어 있는 각 곡물을 묘당으로 하여금 시급히 방법을 강구하여 즉시 방출시켜서, 곤궁한 백성들이 농사를 그르쳐 굶어죽는 시체가 구렁을 메우게 될 근심이 없도록 할 것을 계청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서 처리하라고 하였다. 또 아뢰기를,
"호서의 양전(量田)한 여러 고을이 낼 대동미(大同米)를 우선 예전 결수(結數)에 따라 거둬들이게 한 것은, 실로 위를 덜어 아래에 더해주려는 아름다운 정치에서 나온 것이므로 수령된 자는 의당 백성을 위하려는 조정의 뜻을 체득하여 신중히 이행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 들으니, 새로 양전한 여러 고을에 간혹 새 결수에 따라 거둬들인 자가 있다고 합니다. 법을 어기고 마음대로 한 죄를,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명확하게 조사하여 보고하게 한 뒤 무겁게 죄를 결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박이명(朴而㫥)이 마음대로 군목(軍木)을 꺼내어 김징(金澄)에게 보낸 일을 이미 자복하였으니, 국법으로 논죄한다면 큰 장죄(贓罪)일 뿐만이 아닙니다. 이는 받은 자와 죄질이 아주 다르니, 완전히 용서해 줄 수 없습니다. 박이명은 다시 율문을 상고하여 죄를 결정하소서."
하니,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비록 대간의 말이지만 잘못되었습니다. 받은 자가 명분이 있었다면 준 자만 유독 명분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미 김징을 장률로 죄주지 않았는데 박이명만 장률로 다스린단 말인가? 법에 주고받은 자는 죄가 같다는 조문이 있다. 박이명의 죄가 김징보다 무겁다고 말하는 것은 크게 오활한 짓이다."
하였다. 인견을 마친 뒤에 상이 이르기를,
"대사간 이만영이 박이명의 일에 대하여 괴이하게 논의했다. 일의 체모로 헤아리건대 놀라울 뿐만 아니라, 앞으로의 폐단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체차시키라."
하였다. 정원이 그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하였으나, 상이 번거롭게 하지 말라고 일렀다. 이경석(李景奭)도 차자를 올려 이를 말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이날 경도 함께 그의 말을 들었다. 그것을 과감히 말하는 것이라고 하겠는가? 체차시키는 것은 진실로 가벼운 벌이다."
하였다.
응교 홍주삼(洪柱三)을 충주(忠州)에, 교리 이훤(李藼)을 금산(錦山)에 보내 전사한 장졸들에게 제사지냈다.
지평 이옥(李沃)이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예조가 다섯 번째 기우제를 지내자고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가뭄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일반적 규례만 지킬 수 없다. 종묘와 사직에 대신을 보내어 시행하고, 북교(北郊)에도 똑같이 거행하라."
하였다.
4월 11일 정유
비가 올 듯한 형세가 그치지 않으므로 기우제의 연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윤변(尹抃),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이번 김징과 박이명의 죄는 의당 그 허실을 살펴서 명백하게 처리해야 했는데, 어제 죄수를 너그러이 처리하는 자리에서 파직시켜 내보내라는 명이 있기까지 하였습니다. 조사 보고서가 올라오지 않아 죄명이 명백하지 않은데, 지레 먼저 감옥에서 내보내는 것은 실로 옥사를 처리하는 체모가 아닙니다. 조처가 마땅함을 잃었고 뒤 폐단에 관계되니, 김징과 박이명을 파직시켜 내보내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또 다시 대사간 이만영을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모두 받아들이지 않았다.
4월 12일 무술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윤리(尹理)를 지평으로 삼았다.
장단(長湍)의 유생 김광적(金光績) 등이 상소하여,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문정공(文靖公) 이색(李穡), 문경공(文敬公) 김안국(金安國), 고 참판 김정국(金正國) 등을 함께 향사하는 서원의 액호(額號)를 청하였는데, 상이 그 일을 해조에 내렸다.
4월 13일 기해
사간 윤변이 대사간 이만영(李晩榮)을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계청했던 일로 물의의 비난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김덕원(金德遠) 등도 서로 잇따라 인피하기를,
"김징과 박이명 등을 지레 먼저 석방시키고 조사의 결말을 기다리도록 하였는데, 조정의 처리가 이같이 구차하면 안 되겠습니다. 대사간 이만영의 논의에 있어서는 비록 취사(取捨)가 적당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특별히 언관을 체직시킨다는 것은 뒤 폐단에 관계되므로 신들이 동료들과 상의하여 명을 도로 거둘 것을 함께 청하였습니다. 방금 윤변이 물의에 비난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내용이 명확치 않아 주제를 알기 어렵습니다. 이른바 물의의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말인지 신들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동료가 인피하였으니, 신들이 어찌 태연히 있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논의가 옳치 않은데도 구차하게 동조하였으니, 대간의 체통으로 헤아려 볼 때 그대로 있기는 어려운 형편입니다. 【윤변을 지목한 것이다.】 동료의 인피한 내용이 물의로 인한 것이었으니, 자기의 견해를 고집하려는 것은 모두 윤당하지 못합니다. 【정화제와 김덕원을 지목한 것이다.】 모두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각의 처치가 어찌 이럴 수가 있느냐? 매우 놀랍고 괴이하다."
하였다. 이에 지평 유연(柳㝚), 장령 이섬(李暹)·이하(李夏) 등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서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권지 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 이수언(李秀彦)이 사관(史官)으로 뽑히었다. 이수언이 급제한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인재가 모자랐기 때문에 단망으로 천거된 것이다.
4월 14일 경자
예조가 비가 온다는 이유로 기우제를 연기시킬 것을 또 청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교리 이합(李柙), 부수찬 김만중(金萬重) 등이 차자를 올려 헌부를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킬 것을 청하고, 또 간원의 여러 신료를 교체시킬 것인지 출사시킬 것인지가 분명치 않아 아직도 명백한 결말이 나지 않고 있으니 이것도 속히 지휘하시기 바란다고 말하니, 상이 답하였다.
"지금 일은 진실로 한심하다. 김징과 박이명은 두 죄수일 뿐인데, 어째서 삼사의 논의가 하나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그 까닭을 알 수 없다. 정화제와 김덕원은 출사케 하고 나머지는 모두 체직시키라"
경기의 양주(楊州) 등 여덟 고을에 이달 6일 우박이 내려, 밀과 보리가 손상을 입었다.
평안도 위원(渭源)에서 3월 26일에 이틀 밤을 연이어 서리가 내렸고, 영원(寧遠)에서 이달 6일에 서리가 내리고 눈이 왔으며, 평양(平壤)·은산(殷山)·삼등(三登)·성천(成川)·중화(中和)·순천(順川)·순안(順安)·강동(江東) 등의 고을에서 이달 7일에 우박이 내려 싹이 튼 각종 곡식과 삼·목화들이 모두 손상을 입었다.
4월 15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16일 임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윤원거(尹元擧)를 진선(進善)으로, 이광적(李光迪)·경최(慶㝡)를 장령으로, 박세당(朴世堂)을 지평으로 삼았다.
4월 17일 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4월 18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무리가 남두성(南斗星)에 미쳤다.
4월 19일 을사
경상도 의성(義城)·의흥(義興) 등지에서 이달 8일에 서리가 내렸으며, 의흥에는 9일에 우박이 내렸다. 전라도는 가뭄의 참상이 갈수록 더 심해져서 보리가 마르고 모가 누렇게 탔다. 이달 6일에는 금산(錦山)에 서리가 내려 기장과 목화밭이 많은 손상을 입었다.
4월 21일 정미
장령 이광적(李光迪)이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고향에 내려갔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송준길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대체로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고향에 내려간다는 것은 2, 3일 걸리는 일정을 말한다. 교외에 나가거나 강외에 나간 것을 이유로 대각을 교체시킨다면 매우 부당한 일로 뒤 폐단에 관계된다. 지금부터는 가까운 경기 지방에 나간 것을 직함을 갖고 있으면서 고향에 내려갔다고 칭탁하여 인피하는 것은 모두 받아들이지 말라."
하였다.
4월 22일 무신
민점(閔點)을 좌승지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집의로, 유헌(兪櫶)·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윤지선(尹趾善)·정중휘(鄭重徽)를 정언으로 삼았다.
집의 이규령이 일찍이 공주 저택의 일로 탑전에서 논란하던 때에 망령되게 법에 벗어나는 말을 진달하여 대신의 탄핵을 거듭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했는데, 상이 따랐다.
4월 23일 기유
전라도 운봉(雲峰)·장수(長水) 등지에 밤마다 계속 서리가 내려 각종 곡식을 손상시켰다.
4월 24일 경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좌참찬 송준길(宋浚吉)을 인견하였는데, 정원에서도 뵙기를 청하여 입시하였다. 상이 술을 내오도록 명하고 여러 신료들로 하여금 각기 주량껏 마시게 하였다. 신료들이 모두 흠뻑 취해서 나왔다.
4월 25일 신해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아뢰기를,
"병조 참판 임유후(任有後)가 비록 글재주가 있으나, 일찍이 집안의 변괴를 만나 크게 신상의 누가 되었으며, 조정에 나와서도 이력이 없었습니다. 병조의 참판에 제수되었으니 벌써 매우 분수에 지나친 것인데, 성균관과 사간원의 장관에 의망되기까지 하여 사람들이 놀랍게 여깁니다. 체직시키고 이조의 해당 관리를 아울러 추고토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고 이조만 추고하라고 하였다.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김만균(金萬均)을 집의로 삼았다.
4월 26일 임자
대사간 홍만용이 인피하기를,
"본원이 지금 공주 저택의 일을 논핵하고 있는데 신의 아비 집 규모도 국가의 제도를 넘었습니다. 어찌 감히 태연히 동참하겠습니까."
하였다. 홍만용은 곧 선조(宣祖) 때의 부마(駙馬) 홍주원(洪柱元)의 큰 아들이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이 처치하여 체직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4월 27일 계축
다시 중신을 보내어 종묘·사직·북교(北郊)에 기우제를 지냈다.
4월 28일 갑인
남편을 죽인 죄인 애상(愛相)이 자복하였으므로 죽였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 등 여섯 고을에 우박의 재난이 있었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4월 29일 을묘
평안도에서 한재를 치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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