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심유(沈攸)가 추고당한 것을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등이 차자를 올려 아뢰기를,
"병조 참판 임유후(任有後)에게 형편없는 아우가 있는데, 숙부가 역모하였다고 무고하면서 오히려 뜻대로 되지 못할까 두려워하였으며, 또 간통하였다고 무고하여 마침내 그의 숙부로 하여금 매를 맞아 죽게 하였습니다. 임유후는 아우가 숙부를 모함해 죽인 것을 마음아프게 여겨, 어머니의 명으로 글을 지어 사당에 고한 다음 형제의 의를 끊고 종신토록 만나지 않았습니다. 효행에 있어서도 실로 남보다 뛰어난 점이 있었는데, 부모 상 6년 동안 죽만 먹은 일은 보는 자를 감동케 하였습니다. 조정에서 등용하고 공론이 아울러 허여한 것이지 어찌 글재주 때문이었겠습니까. 늙은 나이에 겨우 등용되었는데 간신(諫臣)이 경솔하게 논핵하여, 억울하게 신상에 누가 되는 불명예를 당했습니다. 정언 윤지선(尹趾善)을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일 정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한재로 인하여 하교를 내려 직언을 구하였는데, 그 하교에 이르기를,
"내가 즉위한 이래로 천재와 시변이 달마다 생기고, 한재와 수해가 서로 잇따라 해마다 없는 적이 없으니, 밤낮으로 걱정하여 편안할 겨를이 없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한재가 더욱 참혹하여 들판이 모두 타버려서 밀 보리가 수확할 수 없게 된데다가 파종도 시기를 놓치게 되었다. 가엾은 우리 백성들이 무슨 죄가 있단 말인가. 아, 허물은 나에게 있는데 어째서 재앙은 백성들에게 내린단 말인가. 생각하면 미칠 것만 같고 가만히 생각하면 몸둘 바를 모르겠으니, 넓은 대궐이 무엇이 편안하겠으며 먹는 것이 무엇이 맛있겠는가. 오늘부터 정전(正殿)을 피해서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도리에 더욱 힘쓸 것이며, 자신을 꾸짖고 반성 경계하여 조금이나마 하늘의 꾸지람에 보답하려 하노라. 승지는 나를 대신해서 교서를 기초하여 널리 직언을 구해서, 나의 미치지 못할 바를 돕게 하라.
나의 박덕 때문에 하늘에 죄를 얻었는데 여러 신료를 면려시키자니 실로 마음이 부끄럽다. 오늘날 인재가 비록 없다고는 하나 어찌 모두 쓸모없는 사람이겠는가. 아, 너희 대소 신료들은 사사로움을 버리고 공도를 따르며, 정성과 마음을 다하여 함께 공경하고 화합하라. 상하가 서로 마음을 닦으면 어찌 조금이나마 도움이 없겠는가. 반찬 수를 줄이고 술을 금지하는 등의 일을 즉시 거행하라. 또한 천관(天官)으로 하여금 인재를 발탁하게 하여 낮은 직위에 침체되는 일이 없도록 하라."
5월 3일 무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정원이 비망기(備忘記) 내용 그대로 널리 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재차 아뢰기를,
"제왕이 일을 행할 때에는 성실에 힘써야 합니다. 사신(詞臣)이 대신 찬술하는 것은 진실로 형식만 갖추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번의 비망기는 한 글자 한 글귀가 모두 간절한 마음에서 나온 것이니, 이치가 한결같은 하늘이 어찌 감격하지 않겠습니까. 신들의 졸렬한 문장으로는 감히 대신해서 기초할 수는 결코 없으니, 훌륭하신 말씀을 그대로 중외에 고유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5월 5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양사가 공주 저택이 제도에 벗어난다는 이유로 힘써 쟁론해 마지 않으면서 아뢰기를,
"한재가 매우 참혹하고 백성의 일이 망극하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걱정하기에 급급할 때입니다. 그런데도 친애하는 자의 사사로운 일 때문에 지나친 일을 하시어, 조종이 정한 제도를 가벼이 고치고 억지로 일국의 공론을 거스르시니, 이 어찌 재변을 만나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감만기(金萬基)를 승지로, 이흥발(李興浡)을 사간으로, 이훤(李藼)을 헌납으로, 이옥(李沃)·박지(朴贄)를 정언으로 삼았다.
함경도 고원(高原)에 4월 16일 우박이 내렸다.
상이 일렀다.
"한재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애가 탄다. 경옥(京獄)의 죄수들은 이제 막 너그러운 결단을 하였다. 그러나 억울함을 안은 채 뜻을 펴지 못하는 자가 어찌 서울의 죄수에게만 있겠는가. 심리하는 일을 그만 둘 수 없을 것 같으니, 즉시 시행하도록 하라."
경상도 장기(長鬐)의 어부 김수남(金守男) 등 9명이 물에 빠져 죽었다. 상이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5월 6일 신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희정당(熙政堂)에 나아가 대신, 의금부·형조의 소결청(疏決廳) 당상, 삼사의 장관을 인견하고 억울한 옥사를 심리하고 죄수를 관대하게 처리하였다. 형조의 도년(徒年) 죄인으로 석방된 자가 4백 72명이었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현재 만난 재난은 보통 유행하는 재난이 아닌 듯합니다. 국가의 존망이 달려 있으니, 의당 가벼운 죄수들은 모두 석방시켜야 합니다. 외방의 옥사는 간혹 10년씩 지체되기까지 합니다. 억울한 기운이 재앙을 초래하는 것이 어찌 도년의 죄수들에게만 있겠습니까."
하고,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요전에 북방에 가서 들으니, 정배된 자가 매우 많아 주객(主客)이 함께 고생한다고 합니다. 의당 남방으로 옮겨야 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년 안이나 혹은 가을철 안으로 옮기도록 하라."
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소결(疏決) 문서를 읽으면 상이 여러 신료들에게 자문을 구하여, 석방시키기도 하고 그대로 정배시키기도 하였다. 소결이 끝나자 조복양이 아뢰기를,
"양주(楊州)는 남편을 죽인 죄인의 태생지이기 때문에 수령을 파직시키려 합니다. 그런데 변괴는 작년에 일어났고 목사는 올 봄에 부임하였으니,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변괴가 났을 때의 수령을 파직시키되, 앞으로는 이를 정식으로 삼으라."
하였다.
5월 7일 임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죄수의 소결(疏決)을 마쳤다.
평안 감사가 치계하여, 영변(寧邊) 등 다섯 고을에 연일 우박이 내려 땅에 반 자[尺]나 쌓였으며, 한재가 계속 너무 참혹하여 농사가 가망이 없다고 하였다.
5월 9일 갑자
헌납 이훤(李藼)이 신병으로 소명(召命)을 받들지 못하여 응당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체직되었다.
5월 10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집의 김만균(金萬均)이 병유(甁柳)를 설치하지 않았으니017) 응당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상이 일렀다.
"한재가 이토록 혹독하니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다. 8차의 기우제를 대신을 보내 지내게 하라."
5월 12일 정묘
정언 이옥(李沃)이 우윤 조한영(曺漢英)이 상중에 있는 계집을 첩으로 삼은 잘못을 논하려고 하였는데,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모두 인피하였다. 장령 정중휘(鄭重徽)·경최(慶㝡)가 조한영의 일을 듣고나서 즉시 논계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지평 홍수하(洪受河)가 처치하여 모두 출사시키도록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장령 정중휘·경최, 지평 홍수하 등이 직언을 구한 일로 인해 차자를 올려, 내수사(內需司)가 물품을 사사로이 저장하는 폐단과 풍속이 사치를 숭상하는 폐습을 말하면서, 대궐에서부터 검소함을 행하고 먼저 본원을 닦아 하늘과 덕을 합치시켜서 재난을 해소시킬 도리를 다할 것을 원하였다. 상이 부드러운 말로 비답하였다.
황해도 풍천(豊川) 등지에 지진이 있었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권유(權愈)를 주서로, 이규령(李奎齡)을 부교리로, 이익(李翊)을 승지로, 이익상(李翊相)을 헌납으로 삼았다.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이 소장을 올려 사직하였는데,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답하고 허락하지 않았다.
경기 마전(麻田)에 이달 9일 우박이 내렸으며, 교하(交河) 등 아홉 고을에 황충이 극성을 부린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5월 13일 무진
밤에 유성이 저성(氐星) 아래에서 나왔다.
응교 홍주삼(洪柱三) 등이 유지에 응하여 차자를 올려, 경연을 오래 폐지한 것과 금원(禁苑)에 자주 나가시는 잘못을 힘껏 진달하고, 또 아뢰기를,
"내수사의 죄인으로 정배된 자들은 사면을 받지 못하였고, 수군의 신역은 가장 고통스러운데도 변통할 일을 생각지 않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 몇 가지의 일들은 재난을 부르기에 충분할 것들이니, 이를 변통시켜 재난을 없애는 데 도움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한재의 참혹함이 한결같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백성의 일을 언급하면 그 아픔이 내몸에 있는 듯하다. 지금 차자의 내용을 살펴보고 그지없이 가상히 여겼다. 경계시킨 말은 내 마땅히 마음에 새기겠다. 의논하여 처리할 일도 여쭈어서 처리하게 하라."
하였다.
5월 14일 기사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수재와 한재가 해마다 없는 때가 없으니, 잘못된 것을 인습하다가 정치가 피폐되고 구차하게 동조하다가 세도(世道)가 무너짐으로써 백성들이 그 피해를 받아 원망이 쌓이고 답답한 기운이 올라가서 하늘의 화기를 감동시킨 것이 아니겠습니까. 대궐의 용도 가운데 줄일 만한 것이 있더라도 늘 고사(故事)라고 말하고, 여러 궁가(宮家)가 가진 재산 가운데 줄일 만한 것이 있더라도 늘 고사라고 말하며, 백사(百司)가 수탈하는 일 가운데 비록 없앨 만한 것이 있더라도 역시 늘 고사라고 말합니다. 심지어 감독하고 관장하는 자들의 못된 짓과, 서리(胥吏)들의 징수하고 요구하는 짓도 모두 고사라고 핑계대면서 괴이하게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이게 어찌 백성을 보호하는 정치라고 하겠습니까?"
하고, 인해서 각 아문과 여러 궁가의 둔전(屯田)·시장(柴場), 어염(魚塩) 등의 폐단을 말하고, 또 호적에 누락되었다 하여 변방에 옮겨 원망을 산 잘못을 언급하면서, 큰 뜻을 분발하여 쌓인 폐단을 없애고, 신료들이 구차스럽게 비위를 맞추려는 풍조를 경계시키며 백성들의 고통을 크게 구제하여, 하늘의 위엄과 노여움에 답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였다.
경상도에 큰 가뭄이 들어 모가 다 말랐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5월 15일 경오
헌납 이익상(李翊相)이 일찍이 이조의 낭관을 맡았을 때 임유후(任有後)를 청직에 의망한 일과 이석번(李碩藩)을 경차관으로 차출해 보낸 일로 탄핵과 추고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대사간 강백년(姜栢年)이 병 때문에 명패를 받들지 못하여 응당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집의 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이 아뢰기를,
"조한영(曺漢英)이 첩으로 삼은 상중의 여인은 역적의 후예로 두 번이나 시집을 간 사람인데다가 그 어미의 소상(小祥)을 지난 뒤였으니, 사족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송사에 진 자가 퍼뜨린 말을 가지고 지레 탄핵을 가하게 되면 장래의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언 이옥(李沃)을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체차하라고 하였다. 또 지평 홍수하(洪受河)가 잘못 처치한 것을 논핵하여 아뢰기를,
"일에 따라 논핵한 이옥이 옳았다면 신중을 기하면서 논핵하지 않은 강백년·경최 등이 어찌 옳을 수 있겠으며, 강백년 등을 옳다고 하였으면 또 어떻게 이옥을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주된 의사가 모호하여 이랬다저랬다 하였는데, 처치의 규례가 어찌 이같을 수 있겠습니까.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의정 허적이 차자를 올리기를,
"국가의 옥사에서 죄를 의논함에는 으레 법이 있는데 유사의 신료가 마음대로 법을 적용 하였으니, 이목이 있는 자라면 그 누가 한심하게 여기지 않겠습니까. 김징(金澄)의 공초 내용은 오로지 엄호하기를 일삼아, 조사서를 보니 크게 틀리는 점이 있었는데도 두루 가리고 엄호하면서 극진히 관대하게 하였습니다. 신의 생각에는, 이런 의금부의 관원으로 하여금 그대로 이번 옥사를 결단하게 해서, 사정(私情)을 따라 속이고 가리는 습관을 계속하게 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의금부가 죄를 잘못 논의한 것을 내가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끝내 어떻게 일을 처리하는가 살펴보고 죄를 주고자 하였다. 경의 말이 사체와 규례에 참으로 합당하다. 의금부의 해당 당상을 모두 체직시키고 추고하라."
하였다. 김징의 옥사에서 죄를 논의할 적에, 지의금(知義禁) 이경억(李慶億)이 김징과 인척간인데도 동참하여 두드러지게 엄호한 자취가 있었기 때문에, 대신의 차자가 이와 같았다.
5월 16일 신미
대사헌 이정기(李廷夔)가 휴가를 받아 기한을 넘긴 일로 인피했을 적에 출사시키기를 청한 처치는 잘못된 것이라는 이유로, 심지어 두 번이나 인피하였다. 집의 신명규(申命圭), 지평 유헌(兪櫶)도 처치가 전례에 어긋났다는 이유로 역시 인피하였다. 옥당이 모두 출사케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전교하기를,
"모든 관직에 있는 자들은 그 직임을 다하여야 한다. 이번 이경억 등의 행위는 전례를 따르다가 조금 잘못한 것과는 참으로 비교할 바가 아니다. 사정을 따르고 공도를 멸시한 그들의 죄는 체직하고 추문하는 것으로 끝날 수 없다. 모두 파직시켜 훗날 사정을 따르는 자들의 경계가 되게 하라."
하였다. 도승지 장선징(張善瀓) 등이 이경억을 구제하려고 두 번이나 아뢰어 쟁론하였으나, 상이 들어주지 않았다.
경상·전라 두 도에는 한재가 참혹하고,강원도 원주(原州) 등 고을,황해도 황주(黃州) 등 고을에는 우박의 재난이 있었다고 감사들이 계문하였다.
5월 17일 임신
대사헌 이정기가 응당 체직되어야 하는데 출사시키도록 청했으나 신병 때문에 소명(召命)을 따르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이에 헌부가 처치하기를,
"휴가를 받아 기한을 넘긴 것은 애당초 인혐할 것이 없었으나, 소명을 따르지 않은 죄는 응당 추고해야 합니다. 체차하도록 명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김수흥(金壽興)을 판윤으로, 김수항(金壽恒)을 우참찬으로,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박세당(朴世堂)을 헌납으로, 이상(李翔)·오상(吳尙)을 장령으로, 최상익(崔商翼)을 정언으로, 유연(柳㝚)을 지평으로, 김수항·박장원(朴長遠)을 좌우빈객으로, 민정중(閔鼎重)을 좌부빈객으로, 이훤(李藼)을 부수찬으로, 김우형(金宇亨)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평안도 평양(平壤)에 이달 9일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오리알만 하였고 땅에 반 자[尺]나 쌓였으며, 네살 된 아이가 우박에 맞아 즉사하고, 꿩·토끼·까마귀·까치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강서(江西)·중화(中和)·선천(宣川)·곽산(郭山)·증산(甑山) 등 고을에 같은 날 우박이 내려 벼가 남김없이 피해를 받았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의금부 당상을 특별히 파직하게 한 명령을 도로 거둘 것을 청했는데,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5월 18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지평 유헌(兪櫶)이 소장을 올려 공주의 저택에 관한 논계를 오래도록 윤허하지 않은 실수를 극구 말하고, 또 김징(金澄)을 구원하였는데, 상이 부드럽게 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5월 19일 갑술
지평 유헌이 신병으로 명패를 받들지 않아 응당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김수항(金壽恒)을 대사헌으로, 이완(李浣)을 형조 판서로, 박세당(朴世堂)·김만중(金萬重)을 이조 좌랑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삼았다.
5월 20일 을해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가만히 입다물고 말하지 않아서 대신에게 논척을 당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면서, 김징과 의금부 당상을 힘껏 구원하고 대신이 차자를 올린 잘못을 매우 공격했다. 상이 조목마다 분별하여 엄한 비답으로 준렬히 배척하였다. 옥당이 신명규를 체직시킬 것으로 처치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5월 21일 병자
이하(李夏)를 부수찬으로, 정적(鄭樍)을 지평으로, 최유지(崔攸之)를 집의로 삼았다.
5월 22일 정축
큰비가 내렸다.
정평(定平)의 갑사(甲士) 박대유(朴大有), 문천(文川)의 향리(鄕吏) 전무적(全茂績)이 효행이 있었는데, 대신의 건의로 인해 그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라고 명하였다.
김덕원(金德遠)을 사서(司書)로, 이익(李翊)·남이성(南二星)·이동직(李東稷)을 승지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삼았다.
평안도 이산(理山)에 이달 5일 우박이 내렸는데, 감사가 보고하였다.
5월 23일 무인
비가 내렸다.
5월 24일 기묘
큰비가 내렸다. 이때 크게 가물어 곡식들이 자라지 못하였는데, 팔도가 마찬가지였다. 이제 비로소 비가 내렸으나 절기가 이미 늦어 농사가 마침내 큰 흉작이 되었다.
5월 25일 경진
대사간 심재(沈梓),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아뢰기를,
"안흥창(安興倉)의 군량미가 근래에 더욱 줄어들어 혹 10두가 채 못되는 섬도 있고 많아야 10여 두에 지나지 않았는데, 연해의 여러 고을에 나누어 해마다 개색(改色)하고 봄 가을로 조적(糶糴)하여 해를 적지 않게 끼치고 있으므로, 백성들이 모두 원망하고 있는데 앞으로 지탱하여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강도(江都)의 예에 의거하여 별도로 경관(京官)을 파견하여 다시 헤아려 나누어 주어서 백성들의 폐단을 없애고, 모자라고 축나게 한 죄는 주관한 자가 받아야 할 것이니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적발해서 죄를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서 처리하게 하였다. 또 아뢰기를,
"각사(各司)의 노비는 신공(身貢)이 편중된 고통을 겪고 있어 특별히 줄여서 받아들이게 하였으니, 매우 큰 혜택이었습니다. 그런데 각사들이 간혹 은혜로운 뜻을 따르지 않고 마음대로 지나치게 받아들인다고 하니, 제도의 감사로 하여금 자세히 조사해 보고하게 하여 해당 관리를 중하게 죄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양심합(養心閤)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여러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창평(昌平) 사람 우유일(禹惟一)은 일찍이 관관(館官)으로 종사하였는데, 아비의 병환을 듣고 돌아가다가 중도에서 부음(訃音)을 듣자 다다라 아버지의 죽음을 보지 못한 것을 한스럽게 여기고 어미를 받들고 고향에 살면서 벼슬에 뜻을 끓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급제한 지 30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참하(參下)에 있습니다. 효행과 겸손한 마음이 모두 숭상받을 만하니 6품에 승진시켜 등용하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따랐다. 조복양이 또 아뢰기를,
"신이 요전에 김덕함(金德諴)과 정홍익(鄭弘翼)의 일을 진달하여 시호(諡號)를 내리라는 명이 있게 되었습니다. 고 참판 이신의(李愼儀)도 혼조(昏朝)에서 모후(母后)를 폐하던 날 논핵하여 절조를 세운 점에 있어서는 두 사람과 다름이 없습니다. 역시 시호를 내리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마찬가지로 시호를 내리라고 일렀다.
5월 26일 신사
장령 오상(吳尙)이 지평 정적(鄭樍)이 의금부 당상을 파직시키게 한 명령을 도로 거두라는 논계를 혼자 정지했다는 이유로 그의 직임을 교체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일렀다.
"사람의 소견이란 각자가 다른 것이다. 저 사람이 이미 혼자 정지하였는데 이 사람이 또 혼자 논계하였으니, 나는 참으로 이해할 수가 없다."
남편을 죽인 죄인 율옥(栗玉)이 자복하였으므로 사형을 시켰다.
5월 27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인 이단하(李端夏)를 의금부에 내렸다. 처음에 이단하가 소장을 기초하여 김징(金澄)을 구원하려 하였는데, 김징이 그 소장 중에 은수저를 받지 않았다는 말이 있음을 듣고 사실과 틀릴 것을 염려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이때에 와서 상이 김징의 처음 공초 내용이 숨긴 것이 많아 조사 보고서와 서로 틀렸기 때문에 다시 김징에게 물었는데 김징이 또 이단하가 상소하려던 일을 그만두게 한 것을 인용하여 숨김이 없다는 것을 변명하였다. 상이 이단하가 죄인과 서로 내통하였다 하여 마침내 하옥한 것이다.
5월 28일 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경억(李慶億)을 의금부에 내렸다. 상이 이단하의 공초 내용을 살펴보고, 이경억이 두 사람 사이에서 서찰을 통한 것은 사정을 따르고 공도를 멸시한 것이라고 여겨, 마침내 이경억을 하옥하라고 명하였다. 김징의 공초 내용이 기세를 돋구어 큰소리를 치는 등 말씨가 매우 거만하였다는 이유로 특별히 형추할 것을 명하였다.
특별히 장령 오상(吳尙)을 체직시켰다. 상이 이경억의 죄상이 환히 드러났는데도 오상이 과감히 몸을 던져 구원하였다 하여 교체시키도록 명한 것이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차자를 올려 이경억 등을 하옥한 것을 취소하라고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였다.
"오늘날의 일이 어찌 한심스럽지 않은가. 옥문(獄門)을 큰 길같이 여기면서 스스로 옳다고 생각하니, 나는 참으로 알 수가 없다. 이경억은 남의 말을 통해 주고 죄인으로 하여금 그 사이에서 주선하도록 했으니, 조정에서 어떻게 처리해야 하겠는가. 김징의 일에 있어서는 경의 말이 자세하지 못하다. 다시 공초한 뒤에 형추하여 사실을 캐는 것은 본디 일반적인 규례이다. 이것이 어찌 말의 잘못을 꼬투리잡는 것이겠는가. 경은 깊이 생각해 보라."
대사간 심재(沈梓),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이경억을 잡아다 국문하라는 명과, 이단하를 그대로 가두어 두라는 명과, 김징을 형추하라는 명과, 오상을 특별히 체직시키라는 명을 도로 거둘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비록 극력 구원하려고 하나 말이 근거없고 어긋난 것을 어찌 가릴 수 있겠는가."
하고, 모두 따르지 않았다.
5월 29일 갑신
정언 최상익(崔商翼)이 이미 엄한 비답을 받았고 또 대신의 논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대사간 심재도 역시 이 때문에 인피하자, 헌납 정화제(鄭華齊)가 모두 출사시키도록 처치하였는데, 상이 다시 엄한 비답을 내리고 허락하지 않았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약방으로 하여금 입진(入診)하게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장선징(張善瀓) 등이 여러 의관들을 거느리고 입진하였다. 장선징이 아뢰기를,
"근래 김징이 서찰을 주고받은 일로 상께서 거듭 진노하셨는데, 신들도 일찍이 범한 일이 있어 지금 매우 황송스럽습니다. 신이 들으니, 임진년 이전에는 부자가 서로 만날 수 없게 하였으나, 중간에는 출입하는 데에 장애가 없다가 선조(先朝) 때로부터 금령을 거듭 밝혔고, 요즘에는 이상익의 일로 인해서 더욱 신칙시키게 되어서, 지금은 사람이 출입할 수 없는데 서찰에 있어서는 금지시키지 않는다고 합니다. 김징의 아들은 참으로 출입하지 않았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김징의 아들을 가두고 치죄하지 않는 것은 부자간에 서로 만났기 때문이다. 이경억에 있어서는 비록 친척이지만 이미 죄가 드러났으니, 만약 죄주지 않는다면 후일의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다."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형추하라는 명이 일단 내려진 뒤에 대간이 쟁론하여 고집하는 일이 없으면 의금부는 즉시 거행해야 한다. 그런데 늑장을 부려 저녁에 이르러 재촉한 뒤에야 비로소 개좌(開坐)했으니, 사체가 어찌 이같을 수 있겠는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김징을 구원하는 것은 사론(士論)이기 때문에 금부가 물의를 두려워하여 그런 것입니다."
하였다. 마침내 끝내고 나갔다.
5월 30일 을유
정언 최상익은 출사시키도록 청한 처치의 말 뜻이 모호하여 결코 그대로 무릅쓰고 있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물론을 기다렸고, 헌납 정화제는 진정시키려는 데에 의도가 있었는데 도리어 시끄러운 단서를 일으켰으며, 엄한 비답을 받은데다가 동료의 논척을 당하였다 하면서 역시 인피하였다. 헌부가 정화제는 체직시키고 최상익은 출사시키도록 처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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