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7월

싸라리리 2025. 12. 12. 1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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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일 을묘

함경도의 수재가 매우 참혹하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다.

 

7월 2일 병진

지평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유비연(柳斐然)의 추함(推緘)에 대해 즉시 법률을 적용시켜 결단하지 않았던 것은 박이명(朴而㫥)의 일이 결말이 나기를 기다리고자 했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세초(歲抄)할 때에 싸잡아 써 들여 등용하라는 명이 있도록 하였습니다. 병조의 해당 당상을 추고하소서."
하였다. 두 번째 아뢰니, 상이 따랐다.

 

헌납 이하(李夏), 정언 박지(朴贄)가 아뢰기를,
"사옹원 직장 임진화(任震和)가 고기잡는 일을 감독하는 곳에 차출되어 가서 중관(中官)에게 글을 보내고 생선을 실어 보냈는데, 그 편지가 잘못 본원에 전달되었습니다. 그 내용이 비굴하여 꼭 천인이 존귀한 자에게 하는 말과 같았습니다. 환관에게 아첨함으로써 조정 신료를 욕되게 한 일을 덮어 둘 수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비인 현감(庇仁縣監) 송상주(宋尙周)가 부임한 뒤에 오로지 탐욕을 일삼아 품관(品官)의 딸을 첩으로 삼았고 청탁을 마음대로 행하였습니다. 또 경내의 어전(漁箭)에 그의 아우와 종을 보내 공공연히 빼앗았으니, 파직시키소서. 연해에 사는 백성들은 고기잡이로 생업을 삼고 있는데 연변의 각 고을에서 어호(漁戶)에 불법으로 요구하면서, 사수(斜水)라고 핑계대기도 하고 일차(日次)를 정해주기도 하면서 자주 수탈해 간다고 합니다. 본도로 하여금 엄중하게 금지시키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르고, 송상주의 일은 자세히 조사하라고 다시 명하였다.

 

황해도가 올린 사람이 깔려 죽었다는 장계에 대해, 본도에서 휼전(恤典)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7월 4일 무오

간원이 한희설(韓希卨)을 체차하고 송상주(宋尙周)를 파직시킬 것을 연이어 아뢰니, 상이 모두 따랐다.

 

7월 5일 기미

헌납 이하(李夏), 정언 박지(朴贄)가 아뢰기를,
"청주(淸州)는 호서의 큰 고을로서 본래 다스리기 어려운 곳이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목사 윤세교(尹世喬)가 거듭 고질병에 걸려 관청에 출근을 전연 하지 않아, 백성들이 얼굴을 볼 수 없으며 공무는 적체되었습니다. 직임을 폐지하여 백성들에게 폐단을 끼치도록 조금도 버려 둘 수 없으니 윤세교를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규령(李奎齡)을 사간으로 삼았다.

 

7월 6일 경신

헌납 이하, 정언 박지가 아뢰기를,
"선비가 처신하는 데 있어 염치를 중하게 여깁니다. 그런데 우윤 조한영(曺漢英)이 이옥(李沃)에게 탄핵을 당할 때에 앞서는 인피하고 뒤에는 소를 올리면서 이루 말할 수 없이 비방하였습니다. 비록 그 내용이 너무 각박하다고 공론이 비난하였지만, 조한영에게 있어서는 수치가 심한 것입니다. 그런데도 태연하게 나와서 사은 숙배하였으니, 진퇴가 근거없는 것입니다. 체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7일 신유

사간 이규령(李奎齡), 헌납 이하(李夏), 정언 박지(朴贄)가 아뢰기를,
"선천(宣川)은 관서의 중요한 곳입니다. 부사 경일회(慶一會)는 사람됨이 경솔하고 행동 거지가 망령스러워, 일찍이 갑산(甲山)의 수령이 되었을 때 한 마리의 매[鷹] 때문에 사람을 장살(杖殺)한 일로 죄를 받았으며, 기타 해괴스러운 정령(政令)도 이와 같지 않은 것이 없었습니다. 이미 등용해 보고 실패당한 사람에게 다시 중요한 진(鎭)을 맡길 수 없습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7월 8일 임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변사의 신료들을 인견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지난번에 총융사의 장계로 인해 해청(該廳) 사목을 의논하여 결정하였는데, 처음에는 수어청을 전례로 삼았습니다. 근래에 들으니 병조가 총융청에 전령했다고 합니다. 각조(各曹)에는 관문(關文)으로 통하고 병조에는 첩정(牒呈)하게 하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경기 병사의 직임에게 순찰사 이하로 하여금 첩정하게 한다면 사체에 어떠하겠습니까?"
하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외부의 의논이 수어청과 일례로 한다는 것은 과중하다고 하나, 그 권한을 너무 가볍게 하면 손을 쓸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북도(北道)의 무사를 내삼청(內三廳)에 소속시키는 일을, 등대하였을 때 여쭈어 결정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삼청에 합당한 자를 식년(式年)마다 뽑아 보내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였다.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선전관은 자체에서 천거하는 규례가 있으니, 강제로 소속시키게 한다면 역시 후일의 폐단이 있을 것입니다."
하고, 정태화는 아뢰기를,
"식년마다 뽑아 보내게 하는 것이 타당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 사람을 넘지 못하게 하라."
하였다.

 

7월 11일 을축

장령 이후(李煦), 지평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형조 정랑 양현망(楊顯望)은 본디 미천한 사람이었는데 외람되게 사송(詞訟)을 맡는 중요한 직임에 제수되었으므로 이미 물의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형조의 서리(書吏)와 한 집에 살면서 그의 개인적인 청탁을 들어주며 뇌물을 거리낌없이 행하여, 여러 동료들이 침을 뱉으며 그와 함께 있기를 부끄럽게 여깁니다.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규령(李奎齡), 헌납 이하(李夏), 정언 박지(朴贄)가 아뢰기를,
"감찰 정후영(鄭後榮)은 사람됨이 어리석고 외람되어, 주장(主將)의 편지를 위조해 절도사에게 구걸하였으며 대신의 말이라고 헛되이 꾸며 정조(政曹)에 벼슬을 얻고자 도모하였습니다. 전후의 자취가 푹로되었으니 결코 관료의 대열에 둘 수 없습니다. 사판(仕版)에서 삭제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도에 지난 6월 큰비와 바람이 불어 각종 곡식이 손상되었으며 같은 달 19일 창성(昌城)에 우박이 내렸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비밀히 치계하기를,
"5월 25일 표류한 한인(漢人) 심삼(沈三)·곽십(郭十)·채룡(蔡龍)·양인(楊仁) 등 머리를 깎은 자 22명과 머리를 깎지 않은 자 43명이, 중국 옷을 입거나 혹은 오랑캐 옷, 혹은 왜인 옷을 입고 있었는데, 정의현(旌義縣) 경내에 도착하여 배가 파손되었습니다. 스스로 말하기를 ‘본래명나라 광동(廣東)·복건(福建)·절강(浙江) 등지의 사람들로 청인이 남경(南京)을 차지한 뒤에 광동 등 여러 성(省)이 청나라에 항복하였으므로 바다밖 향산도(香山島)에 도망나와 장사하면서 살아왔다. 5월 1일 향산도에서 배를 출발시켜 일본의 장기(長崎)로 향해 가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되어 이곳에 도착하였다.’고 하였습니다. 향산도란 지금 어느 성(省)에 속하였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향옥(香澳)은 광동의 바다 밖 큰산인데 청려국(靑黎國)에 인접하고 있다.’라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주관하느냐고 물으니, 대답하기를 ‘본래 남만(南蠻)의 땅으로 남만 사람 갑필단(甲必丹)이 주관하였다. 그 뒤 점점 약해졌으므로 명나라의 유민들이 많이 들어가 살았는데, 대번국(大樊國)에서 유격(遊擊) 가귀(柯貴)를 보내어 주관하였다. 대번국은 융무(隆武) 때에 정성공(鄭成功)이라는 자에게 나라의 성씨를 하사하고 진국 대장군(鎭國大將軍)에 봉하여 청나라 군사와 싸우게 하였는데 청인이 여러 번 패하였다. 얼마 안 되어 그가 죽자 그의 아들 정금사(鄭錦舍)가 계승하여 인덕 장군(仁德將軍)에 봉해져 대번국에 도망해 들어갔는데, 무리가 수십 만명이 있었다. 그 땅은 복건성(福建省) 바다 밖 천여 리에 있는데 영력군(永曆君) 때에는 귀주(貴州)의 옛 촉(蜀) 땅에 있다. 우리들은 여러 나라로 다니며 장사를 하고 있으므로 머리를 깍기도 하고 혹은 깍지 않기도 한다. 장기로 가기를 원한다.’라고 하였으므로, 신이 배를 차비시켜 돌려보냈습니다."
하였다.

 

함경도에 수재가 매우 참혹하며, 삼수(三水)에 6월 5일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비둘기 알만하였고, 황충(蝗虫)이 온 들판에 퍼져 각종 곡식을 빨아먹고 갑충(甲虫)으로 변해 물밑으로 들어가 끊임없이 해를 끼치며, 또 황작(黃雀) 천만 마리가 무리를 지어 들판을 덮고 먹이를 쪼아 먹어서 심지어 상율(橡栗)도 열매를 맺지 못한다고, 감사가 보고하였다.

 

7월 12일 병인

청국 사신이 서울에 들어왔다.

 

7월 13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4일 무진

간원이 연달아 아뢰어 선천 부사(宣川府使) 경일회(慶一會)의 파직을 청하니, 상이 교체시키라고 명하였다.

 

7월 15일 기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우승지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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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6일 경오

장령 이후(李煦)가 아뢰기를,
"대체로 조정의 하례에는 사인(舍人)이 백관의 자리를 정돈하며, 사인이 사고가 있으면 헌부가 대행하는 것이 전례입니다. 지난번 하례드릴 때 신이 잘못 하리(下吏)의 말을 듣고 장령으로서 백관의 자리를 대신 정돈하였는데, 지금 들으니 물의가 비난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양현망(楊顯望)을 논핵하였으나 사람들이 억울하게 여긴다고 합니다. 이런 것들로 볼 때 그대로 직임에 있기는 어렵습니다."
하였고, 지평 김덕원(金德遠)이 아뢰기를,
"양현망이 미천하다고 한 말을 많은 사람들이 억울한 일이라고 하며, 서리와 함께 산다는 것도 실상이 아니라고 합니다. 신이 일을 논함에 사실을 잃은 것은 동료와 다름없으니, 체직하소서."
하였는데, 모두 체직시키는 것으로 처치되었다.

 

사간 이규령(李奎齡)도 하례하는 반열에서 차례를 잃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출사하도록 처치되었다.

 

경상도 동래(東萊)에 지진이 있었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다.

 

김징(金澄)을 배천(白川)의 금곡역(金谷驛)에 도배(徒配)했다. 김징이 탐장죄(貪贓罪)를 범한 것이 낭자하였으나 당시 무리들이 힘써 구원하여 죄가 도배에 그치게 되었고, 또 좋은 곳에 부처되었으므로, 모든 사람들이 분하게 여겼다.

 

7월 17일 신미

헌납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선천 부사(宣川府使)        김흥운(金興運)이 일찍이 정주(定州)의 수령이 되어 자신을 살찌우기에만 일삼았습니다. 근읍의 창기(娼妓)를 첩으로 삼고는 그의 족속들을 관아에 출입시켜 뇌물을 공공연히 행하게 하였고, 큰 장사꾼과 체결하여 이익을 챙겼으며 송사를 불법으로 결단해 주고 이익을 나누어 먹었습니다. 그뒤 경주 영장(慶州營將)이 되어서는, 남의 청탁을 받고 빚을 받아 주면서 명분이 없는 것을 꺼린 나머지 몰래 붙잡힌 도적의 명단에 기록하였다가, 일이 발각되어 내쫓겼습니다. 이같이 탐욕스런 사람에게 다시 중진(重鎭)을 말길 수는 없습니다. 남원 부사(南原府使)        김명열(金命說)은, 집이 남원 가까이 있고 본디 인망이 가벼운데, 일찍이 이 고을에 제수되었다가 논핵을 당하여 교체되기도 하였습니다. 아울러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고 김흥운만 체직시켰다.

 

7월 18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사간 이규령(李奎齡), 헌납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둔전을 설치하여 백성을 모집하는 것은 외방의 고질적인 폐단인데 여러 도 가운데 해서(海西)가 더욱 심합니다. 토산(兎山)은 아홉 군데에 둔전을 설치하였으며 신계(新溪)의 둔전도 그 숫자가 많습니다. 부역을 회피하는 백성들이 거의다 관가에 투입하여 면모를 갖추치 못하고 있습니다. 두 고을과 도내의 각 고을에 설치되어 있는 둔전의 다소를 모두 조사한 다음 보고하게 해서, 묘당으로 하여금 참작하여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김명열(金命說)의 일을 논핵하였는데, 상이 체직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숙(李䎘)을 승지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지평으로 삼았다.

 

7월 19일 계유

경상도 함양군(咸陽郡)에 11명이 굶어 죽었다고 감사가 치계하였는데, 상이 본도로 하여금 휼전(恤典)을 베풀게 하였다.

 

7월 22일 병자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청국 사신이 돌아갔다.

 

사간 이규령, 헌납 이하가 아뢰기를,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는 수령에게 있고 도내를 살피는 책임은 감사에게 달렸습니다. 그런데 이런 전례없는 한재와 수재를 당했는데도 구제의 대책을 생각지 않아 굶주려 죽는 참상이 있게 되었습니다. 호남의 남원(南原)과 영남의 함양(咸陽)에서 굶주려 죽었다는 보고가 잇따라 있었습니다. 이를 그대로 덮어 둔다면 앞으로의 구제가 소홀해져서 경계시킬 수 없게 될 것입니다. 해당 수령들을 파직시키고 두 도의 감사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똑같이 추고할 것을 명하였다.

 

7월 23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목성(木星)이 금성(金星)과 같은 도수에 있었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침을 맞고,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어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니 진휼청 당상을 빨리 차출해야 구황(救荒) 정책을 강구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녹봉을 더 지급하는 일도 그대로 두기 어려운 형편입니다."
하니, 상이 10월부터 다시 감하도록 명하였다. 정태화가 잇따라 여염집을 빼앗아 들이는 폐단을 진달하고 더욱 금지시킬 것을 청하고, 여러 금령에 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상이 물러가서 조건들을 갖추어 아뢰라고 명하였다. 사간 이규령(李奎齡)이 여염집을 차입(借入)한 일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7월 24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유헌(兪櫶)을 지평으로, 이숙(李䎘)을 우부승지로, 최관(崔寬)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부제학 김만기(金萬基), 교리 이합(李柙), 부교리 홍주국(洪柱國)·윤경교(尹敬敎), 부수찬 이훤(李藼) 등이 차자를 올려 한재와 수재로 인한 기근의 참상을 극력 말하고 청하기를,
"조세와 경비의 평소 액수를 잘 헤아려서 견감시킬 수 있는 조세는 견감시키고 감소시킬 수 있는 경비는 감소시키는 한편, 각도 각 아문의 저축을 헤아려 경비에 옮겨 쓸 수 있는 것과 구제용으로 나누어 줄 수 있는 것을 분명하게 계책을 세우게 한다면, 미리 계획이 서고 백성들은 실제의 혜택을 받게 될 것입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성학을 강론하지 않아 광명(光明)한 공부가 이미 부족하고, 언관(言官)이 직임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해 보필하는 책임을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에 별대(別隊)를 설치한 것은 그 폐단이 매우 많아 민간에서는 심지어 별대가 혁파되어야 하늘이 비를 내릴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각 아문과 여러 궁가(宮家)에서 떼어받은 강변의 시장(柴場)이 달마다 증가하고 해마다 불어났습니다. 그 중에서도 군기시는 사대부들의 묘소가 있는 산까지도 모두 측량하여 숯을 징수하고 있어서 시장의 해독이 이미 골수에까지 미쳤으니 참으로 애석합니다. 신들이 직접 하늘이 내린 심한 재이를 보았기에 감히 구구한 생각을 진달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계시킨 말 뜻이 매우 간절하다. 걱정하고 아끼는 정성을 내 매우 가상하게 여긴다. 차자 끝에 말한 일은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다.

 

7월 25일 기묘

밤에 화성(火星)이 남두성(南斗星)의 넷째 별을 범하였다. 유성이 오거성(五車星) 위에서 나왔는데 색깔은 희고 빛이 땅에까지 비췄다.

 

평안도 용강(龍岡) 등 바닷가 여섯 고을에 큰 바람으로 배가 뒤집혀 죽은 자가 1백 40여명이었다. 경상도 용궁현(龍宮縣)에 소낙비로 냇물이 범람하여 4명이 빠져 죽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는데, 상이 모두 휼전(恤典)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7월 27일 신사

이익상(李翊相)을 사간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조근(趙根)을 정언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삼았다.

 

삼남(三南)에 올 가을 수군의 조련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다. 이 해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이 떠돌고 흩어졌으므로 정지시킨 것이다.

 

7월 28일 임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어공(御供)하는 각종 공물 및 금년 녹봉에서 임시로 감소시킬 수량을 여쭙고 결정하였는데, 도합 미곡 3만 6천 7백 60석, 목면 98동(同) 40필, 포(布) 7동 30필이었다. 각 아문과 각영 은포(銀布)에서 덜어낸 수량이 은 7천 1백 냥, 미곡 3만 석, 조(租) 1만 석이었는데, 앞으로의 경비를 보충하고 기민을 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

 

간원이 해서(海西) 둔전의 폐단을 연달아 아뢰었는데,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고 처리하게 하였다. 이날 대신을 인견하고 상이 이르기를,
"둔전을 설치한 폐단은 해서만 그럴 뿐 아니라 다른 도에도 반드시 이런 폐단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신들이 제도에 있는 훈련도감·수어청·총융청 등의 둔전 몇 곳을 혁파할 것을 청하고, 또 둔전을 설치한 뒤 더 점유한 것은 본 고을에 되돌려 귀속시킬 것을 청하였다. 이는 대체로 태복시는 대신 자신이 관할하는 곳이고 여러 궁가의 일은 상이 곤란하게 여겼으므로 혁파시킨 것은 책임을 떼운 것에 불과하였다.

 

7월 29일 계미

황해도 서흥(瑞興) 등 여덟 고을에 서리가 내렸고, 강화에서는 고깃배가 전복되어 죽은 자가 14명이었으며, 옥과(玉果)에는 폭우로 냇물이 범람하여 4명이 빠져 죽었다. 상이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7월 30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화성이 남두성(南斗星)으로 들어갔다.

 

평안도 창성(昌成)에 우박이 크게 내렸고,충청도 대흥(大興)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고, 원양도(原襄道) 영서(嶺西)의 여러 고을에 서리가 내렸으며 원주(原州)에는 우박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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