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1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기 장단(長湍) 등 고을에 서리가 내렸다.
제주에 윤2월부터 비가 오지 않다가 5월 그믐께에 와서야 비가 내렸는데, 퍼붓는 듯한 빗발이 여러 달 개이지 않아 높고 낮은 전답이 침수되지 않은 곳이 없으며, 또 풍재가 참혹하다고 목사가 보고하였다.
8월 2일 병술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차자를 올려 재난을 만나 수성(修省)할 도리를 진달하고, 각 아문과 병영, 수영의 토목공사를 혁파할 것을 청하였다. 또 모든 궁가는 우선 살고 있는 집에 거처하다가 풍년들기를 기다려 옮겨 짓도록 하며, 강도(江都)의 곡물을 방출하여 기민을 구제하며, 내탕고(內帑庫)의 비축을 나누어 주어 구제할 밑천에 보충하며, 쓸데없는 군병을 돌려보내 백성의 원망을 받지 말며, 어사를 파견하여 관리들의 정치를 살피고 백성의 병폐를 찾아서 감영과 병영의 비축을 덜어내어 구제에 보충해 쓰도록 시키며, 또 감사로 하여금 종자를 힘써 구하여 기민을 구제할 터전이 되도록 하라고 청하였다. 상이 부드럽게 비답을 내리고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서 처리하게 하였다. 그후 여쭈어 결정하는 때에 이르러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경석의 차자 내용은 별로 여쭙고 결정할 일이 없습니다. 내수사의 비축은 상께서 이미 진휼청에 주었고, 그 나머지의 여러 일도 이미 시행한 것이 많습니다, 어사에 있어서는 오래도록 파견하지 않아 수령들이 대부분 방자하지만, 지금은 그 시기가 아닙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진휼하는 일이 완전히 끝나기를 기다렸다가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8월 3일 정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지금부터 궐내에 들이는 모든 물건은 반드시 관문(關文)을 정원에 경유시켜야 한다고 청했는데, 여러 신료들이 모두 옳다고 하며 그 뒤 대간도 힘써 쟁론하니, 상이 따랐다.
상이 형조에 명하여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은 도적들을 엄하게 다스려 10차 형추 이내에 반드시 자백을 받아내도록 하였다. 대체로 본조의 형장(刑杖)이 상당히 가벼워 포도청에서 자백했던 적도들이 진술을 뒤집으면서 자백하지 않는 일이 많았으므로 이런 명이 있었다.
8월 5일 기축
밤에 유성이 북두성 아래에서 나왔는데, 색깔이 희고 빛이 땅에까지 비쳤다.
정언 조근(趙根)이 그의 딸이 세자빈(世子嬪)의 간택에 들었으나 병으로 참여하지 못하여 가장(家長)을 추고하라는 명이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교체되었다.
8월 6일 경인
도망나온 말이 금호문(金虎門)에서 진선문(進善門)·숙장문(肅章門)·연영문(延英門)을 거쳐 내반원(內班院)의 작은 문까지 돌입하였다. 정원이 파수를 신중히 하지 않은 수문장을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하고 수직한 군사들을 해조로 하여금 곤장을 치도록 청하고, 간원이 잘 검칙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병조의 입직 당상과 낭청을 추고하고 수문장을 잡아다 문초하고 죄를 결정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7일 신묘
장선징(張善瀓)을 도승지로, 윤계(尹堦)를 지평으로, 정창도(丁昌燾)를 정언으로 삼았다.
전라도 익산(益山)·임실(任實) 등 고을에 기민들이 뿔뿔이 흩어져 도로에 쓰러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8월 8일 임진
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아뢰기를,
"팔도에 흉년이 들어 인민들이 굶어 죽었다는 보고가 연속하여 들어오고 있으니, 흉년 구제 정책을 불에 타고 물에 빠진 것을 구원하듯 빨리 해야 할 것입니다. 제도의 감사로 하여금 각 고을에 분부하여 굶주리는 자들을 뽑아내어 먼저 구제하도록 하소서. 또 지금 서리가 너무 일찍 내려서 추수가 결딴났으니, 경차 도사(敬差都事)를 즉시 파견해서 연분(年分)을 속히 마치도록 하여, 시급히 구제 정책을 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8월 9일 계사
함경 남북도에 여러 달 큰비가 내려 곳곳에 전답이 모래가 뒤덮였고 남은 곡식은 또 충재(虫災)를 당하였다. 갑산(甲山) 삼수(三水) 등의 고을에 7월 16일 서리가 눈같이 내렸으며, 나머지의 각 고을에도 모두 서리가 일찍 내렸다. 함흥부(咸興府)에 큰 우박이 내렸는데 계란만하기도 하고 새알만하기도 하였으며 각종 곡식이 쓰러지고 부러졌다. 또 누런 기운과 흰 기운이 일시에 뒤덮였는데 그 기운이 깔렸던 곳에는 싹이 말라 죽었는데 흰 기운이 누런 기운보다 손상이 심하였다.충청도 태안(泰安) 등 연해의 네 고을에 모진 바람으로 배가 침몰하여 죽은 자가 90여명이었다. 두도의 감사가 보고하였으므로,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한납 이하(李夏)가, 집의 최유지(崔攸之)가 고향에 있을 때 삼가지 못한 실상과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언책(言責)의 직임에 합당치 못함을 논핵하려고 하였는데, 대사간 심재(沈梓)가 정창도를 논핵하지 않으려 하였다. 모두 인피하였는데, 이하는 출사시키고 심재는 체차하도록 처치하였다.
8월 10일 갑오
사간 이익상과 헌납 이하가 아뢰기를,
"집의 최유지(崔攸之)가 고향에 있을 때 삼가지 않았다는 비방이 많이 있었습니다. 전에 복심(覆審)할 때에 고을 하리가 그가 누락시킨 전결(田結)을 많이 적발한 것에 화를 내어, 급기야 본직에 제수되자 풍헌(風憲)을 핑계하여 자기 집에 잡아다 놓고 형신을 마구 가하였습니다. 임금의 소명(召命)을 빙자하여 자기 사욕을 이루려고 도모하였으니, 그의 법을 업신여기고 방종한 죄를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우선 교체시키고 본도로 하여금 실상을 조사하게 하여 무겁게 죄를 주소서.
정언 정창도(丁昌燾)가 자주 청반(淸班)을 욕되게 하여 놀라고 비웃는 사람이 많습니다. 일찍이 삼척(三陟) 수령이 되었을 때 마침 첨사(僉使)가 교체되어 장수의 직임을 겸임하였는데, 군포(軍布)를 독촉해 받아 본 고을에 실어 들이면서 공용에 보충한다고 하였으나 마침내 자기 사용으로 돌렸습니다. 이같은 사람을 언책(言責)의 자리에 둘 수 없으니 파직시키고 등용하지 마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그 뒤 최유지를 본도의 조사 보고로 인해 의금부에 가두고 고신(告身)을 빼앗았는데,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최유지의 범죄는 호강(豪强)에 관계되는데, 호강을 다스리는 율은 바로 온 가족을 변방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시종에 있는 사람을 이 율로 처단할 수는 없겠으나 고신을 빼앗는 것으로는 너무 가볍습니다."
하였으므로, 최유지가 마침내 도배되었다.
전라도 용담(龍潭) 등 고을에 큰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렸으며 또 서리가 일찍 내렸다. 영하(嶺下)의 여러 고을에 찬 비가 물을 퍼붓듯 하였고 동풍(東風)이 불어 지붕을 날렸으며, 벼가 모두 쓰러졌다가 햇볕을 보자 곧 말라 버렸다. 백성들이 뿔뿔이 흩어졌다가 죽은 시체가 길에 깔렸는데, 무리를 지어 겁탈하기까지 하였다. 조금 익으려는 곡식이 있으면 번번이 전답의 주인을 묶어 놓고 공공연히 베어 가며, 들판에 방목하는 소와 말을 대낮에 잡아 먹지만 감히 물어보지도 못하였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경상도 대구(大丘) 등 고을에 떠도는 백성들이 길에 가득했는데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8월 11일 을미
김우형(金宇亨)을 우승지로, 남이성(南二星)을 대사간으로, 이규령(李奎齡)을 집의로, 홍만종(洪萬鍾)을 정언으로 삼았다.
북도 행영(行營)에 올 가을 방수(防守) 나가는 역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함경 남도 홍원(洪原) 등 여섯 고을에 큰물이 져서 빠져 죽은 사람과 가축이 매우 많았다. 북청부(北靑府)에 바람과 우레가 크게 일어나고, 비와 우박이 번갈아 내렸는데 큰 것은 밥 그릇만하고 작은 것은 주먹만하여 높고 낮은 지대의 전답이 일시에 텅비게 되었으며, 사람이 많이 상했는데 12살된 아이가 이 때문에 죽었으며, 새와 짐승 및 냇가의 물고기까지도 많이 죽었다. 7월 30일에 갑산(甲山)·단천(端川) 등지에 눈이 내렸다. 남북의 각 고을이 모두 가뭄, 수해, 바람, 우박의 재난을 당하여 각종 곡식이 거둘 것이 없게 되었는데, 상수리 열매까지도 익지 않았다. 농민들이 진을 치고 모여서 통곡하는 소리가 들판을 진동시켰다. 방수에 나갈 군인들이 일제히 감영에 호소하였는데, 감사가 이를 보고하면서 방수의 정지를 청했으므로 상이 허락한 것이다.
경상도에 큰물이 졌는데 낙동강 일대가 더욱 심하게 침수되었다. 밀양(密陽)의 영남루(嶺南樓) 아래 백 년된 큰 나무들이 거의 다 떠내려갔으며 언양(彦陽) 등 여섯 고을은 수백여 집이 침수되어 무너졌는데 빠져 죽은 자가 50여 명이었으며, 남해(南海), 양산(梁山) 등지에는 언덕이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7명이었다. 상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 14일 무술
여러 도에 금년 가을 합동 조련과 영장(營將)이 순찰하는 등의 일을 정지할 것을 명하였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가을 추수가 가망이 없어 백성들이 허둥지둥 조석도 보전할 수 없는데 군졸들을 모으게 되면 폐단이 적지 않을 것이라 하여, 수군 조련의 예대로 일체 정지시킬 것을 청했기 때문에 비변사의 회계로 인해 여러 도에 아울러 정지시키게 하였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강변의 각 고을이 더욱 심하게 재난을 당하였는데 다른 도의 죄인들을 또 정배시킨다면 주객이 함께 곤궁할 것입니다. 명년 가을까지는 강변 고을에 정배시키지 말게 하시고 또 아직 배소(配所)에 이르지 아니한 자들도 본도에서 다른 고을로 고쳐 보내게 하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치계의 내용대로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5일 기해
인정전(仁政殿)에서 관학(館學) 유생들을 시강(試講)하였다. 장원인 유학(幼學) 유정교(柳廷喬)는 곧바로 회시(會試)에 응시하게 하고, 그 다음은 각각 1 분(分)씩을 주고, 또 그 다음은 각각 지·필·묵(紙筆墨)을 하사하였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여 연분(年分)의 현장 조사를 그만두어 민폐없애기를 한결같이 정미년 경기에서 이미 시행한 전례대로 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경기 각 고을에 된 서리가 연일 내려 벼가 말라 죽었다. 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거의 남은 종자가 없었다. 농가에서는 사람이 소 대신 밭을 갈았는데 9명의 힘으로 겨우 소 한 마리의 일을 해낼 수 있었으므로 가을갈이에 가망이 없게 되었다.
8월 16일 경자
이지무(李枝茂)를 승지로, 신후재(申厚載)를 정언으로 삼았다.
대사헌 박장원(朴長遠)이 신병으로 부름에 나가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교체되었다.
접의 이규령(李奎齡),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인(吳斗寅)·윤계(尹堦)가, 함안 군수(咸安郡守) 김진원(金振元)이 서울 사람에게 방납(防納)을 허락하고 창고의 곡식을 함부로 준 잘못에 대해 논핵하면서 잡아다 문초하고 죄를 결정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감찰 김성일(金誠一)이 거상 중에 창기를 데리고 놀아 행실이 개돼지 같았는데, 전중(殿中)에 제수되자 물정이 놀라워한다는 것으로 논핵하면서 관리 명단에서 없애버릴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8월 17일 신축
상이 재이가 매우 극성스럽다는 이유로 송시열(宋時烈)·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를 불렀는데, 모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상이 송시열 등에게 비록 한 시대의 명망 때문에 자주 사관을 보내어 불렀지만 은총의 마음은 점점 쇠해졌다. 송시열이 이를 알기 때문에 부름에 기꺼이 나오지를 않았고, 송준길은 간혹 올라왔지만 즉시 물러갔다.
백성을 모집하여 버려진 아이들을 거두어 길러 노비로 삼게 하였다. 이때 떠도는 거지들이 길에 가득한 채 황망하여 살곳을 잃어 어린 아이들을 길가에 버리는 일이 잇따랐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신축년의 전례대로 백성을 모집하여 거두어 기르게 할 것을 청하였는데, 비국이 회계 하기를,
"명년 보리 추수 때까지 거두어 기를 것을 허락하고, 또한 자세히 허실을 조사하여 간사한 짓을 막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런 뜻을 아울러 제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삼성(三省)이 추국한 죄인 도치(都致)가 사형되었다. 주인 집의 딸을 간통하여 그 죄가 강상(綱常)에 관계되었기 때문이다.
진선 윤원거(尹元擧)가 사양하고 부름에 나오지 않으면서 세자를 보양하자는 뜻을 소장으로 진달하였는데, 상이 관대하게 답하였다.
황해도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한 달 동안에 죽은 소가 2천 6백여 두였다. 기내(畿內)·원양(原襄)·호서(湖西) 등의 도에서도 전염병이 번져 소가 죽는다는 보고가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8월 18일 임인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홍주국(洪柱國)을 집의로, 유헌(兪櫶)·김세행(金世行)을 지평으로 삼았다.
장령 정화제(鄭華齊)가 장관이 처치할 때 참여하지 못해서 전해오던 대간의 체통이 자기로 인해 실추되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이규령(李奎齡), 지평 오두헌(吳斗憲)·윤계(尹堦)가, 간통(簡通)에 글자를 빠뜨린 것은 바빠서 그런 것이었으나 불찰의 잘못은 면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화제는 출사시키고 이규령 등은 체직시킬 것으로 처치되었다.
경상도 영천군(榮川郡)에 큰 바람이 불어 오래된 큰 나무가 중간이 부러지기도 하고 뿌리째 뽑히기도 했고, 칠원현(柒原縣)에 큰비가 내려 집이 침수되어 무너졌으며 산기슭이 무너져 죽은 자가 7명이었다.전라도 곡성현에 폭우가 내려 빠져 죽은 자가 15명이었다. 상이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8월 19일 계묘
간원이, 천재가 매우 참혹하고 농사가 크게 흉년이 들었는데 두 공주의 저택 공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두 공주 저택을 지으라는 명이 있고, 또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저택 터를 여염집이 즐비한 속에다 잡아 철거된 인가가 30여 호(戶)에 이른다는 이유로 연달아 아뢰고 힘써 쟁론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흉년을 이유로 제도의 군정을 세초(歲抄)하는 일을 멈출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도록 하였다.
경상도 울산부(蔚山府)에 큰물이 져서 집이 떠내려가거나 침수되었으며 빠져 죽은 자가 10여 명이었다. 상이 특별히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사비(私婢) 향춘(香春)의 집에 정문(旌門)을 세웠다. 울산(蔚山)의 사비 향춘이 평소에 시어머니 봉양에 효성을 다하였다. 지난 7월 29일의 큰물에 온 마을이 침수되자 향춘이 그의 시어머니 및 두 아들과 함께 지붕에 올라가 물을 피하였다. 이윽고 집이 무너져 동시에 물에 빠졌는데, 자기 두 아들을 버리고 시어머니를 구출하였다. 정신없는 가운데 모성(母性)을 끊어버리고서 효성을 이루었다. 감사가 보고하였으므로 상이 정문을 세우도록 특별히 명한 것이다.
8월 20일 갑진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호조에서 관할하는 본도의 세염(稅塩)과 화전미(火田米)를 얻어 구제할 밑천에 보충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하였다.
8월 21일 을사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기근의 참혹함이 팔도가 똑같아 백성들의 일이 망극하고 국가의 존망이 결판났습니다. 신이 밤중에 생각해 보니, 성상의 어질고 후덕하심이 결코 망국의 임금이 아니며, 신들도 볼품없으나 어찌 망국의 신하이겠습니까."
하고, 인하여 울먹이면서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였다. 또 아뢰기를,
"상께서 만약 ‘백성이 모두 죽는다면 국가가 어떻게 존재하겠는가.’ 하시면서, 이로써 자책하시고 또한 신들을 채찍질하여 격려하신다면 거의 가망이 있습니다만, 요즈음의 조처를 가만히 살펴보건대 크게 그렇지 못한 바가 있습니다. 공주의 저택을 두고 말하더라도 그 전에 지은 것도 이미 제도에 지나쳤는데 숙경 공주(淑敬公主)의 저택을 이런 때에 새로 짓기까지 한다는 것은 매우 온당치 못합니다. 더구나 병조가 역가(役價)로 갚아준 베가 30동(同)에 이르고 호조의 미곡도 이에 맞게 들어갔는데, 이것으로 구제를 하였다면 백성이 받는 혜택이 어찌 적었겠습니까.
옛날 우리 선왕께서는 자문(紫門)의 터에 만수전(萬壽殿)의 담장을 뒤로 물려 쌓으려고 하면서도 난처하게 여기시어 조정 신료들에게 물어 모두 옳다고 말한 뒤에야 넓혔는데 하물며 공주의 저택에 있어서이겠습니까. 숙휘 공주(淑徽公主)의 집터는 비록 공공의 땅이라고는 하나 철거시킨 집이 많았고, 숙경 공주의 집터에 있어서는 바로 여염의 소유입니다. 개인적으로 서로 계약하여 사들였다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어떻게 어디서 어디까지 널리 점령하고는 억지로 사들일 수 있겠습니까. 신이 들으니, 대원군 사우(大院君祠宇)의 앞이 매우 좁았는데 근처에 감종친(監宗親) 집의 빈 터가 있었습니다. 선조(宣祖)께서 5, 6칸[間]의 땅을 사려고 여러번 별감을 시켜 달랬으나 끝내 듣지 않았다 합니다. 사우란 지극히 중요한 것이고 그 땅은 매우 적은 것이었는데도, 선조께서는 억지로 사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또 진안위(晋安尉)의 집을 짓기 위해 사대부의 집터를 사려고 하였는데, 옛날부터 전해온 터라고 거절하자 마침내 사헌부의 옛터에다 지었습니다. 그것도 그 앞에 한 채의 상놈 집이 있었는데, 시끄러움을 방지하기 위해 앞쪽의 담장을 높이 쌓도록 하였습니다. 인조께서도 잠저(潛邸)에 계실 때 옹주의 집을 찾아갔는데 터가 너무 좁은 것을 민망히 여겨, 즉위하신 뒤에 공공의 땅을 배로 주고 바꾸어 주었습니다. 이는 모두 근대의 일입니다. 이번 공주 저택의 집터를 상께서 자세히 모르시고 이렇게 억지로 사들인 것입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옛날 선왕(先王)께서 여러 신료들에게 의논하여 네 궁을 인경궁(仁慶宮) 옛터에 지어 주셨으나, 편히 살 수가 없어 이번의 역사가 있게 된 것이다. 하나의 저택을 다시 짓는 폐단이 과연 어떠한가? 완원군(完原君)과 한산백(韓山伯)의 사우가 있다는 말은 대간의 계사에서 처음으로 알았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인경궁의 옛터에서 편안히 살 수가 없었다면 성상의 동기간의 지극한 정리로 어찌 다시 지어 주고 싶지 않겠습니까. 다만 숙휘 공주의 집터는 인가를 철거시킨 것이 매우 많았으나 그래도 그곳은 공공의 터였습니다. 그런데 이번 숙경 공주의 집터는 억지로 사들였으므로 듣는 자들이 모두 놀라워하며, 모두 ‘나라가 망하지 나라가 망하지.’ 합니다. 그리고 이른바 완원군은 바로 성종(成宗)의 왕자입니다. 어찌 현 공주의 저택 때문에 옛 왕자의 사우를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성덕에 크게 누될까 두렵습니다. 한산백 이색(李穡)은 태종 대왕(太宗大王)의 친구로서 대단한 은총을 받았는데, 지금 그의 화상이 있는 사우가 그 속에 들어있으며, 인목(仁穆)·인렬(仁烈) 두 왕후와 왕대비는 모두 한산백의 후예입니다. 어떻게 공주의 저택을 짓기 위해 그의 사우를 철거할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 터는 쓸 수 없는 형편이구나."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당초에는 부득이 하여 빚어진 일이었으나 곡절을 자세하게 아신 뒤에 이렇게 쓰지 않겠다는 하교가 계시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하였다.
간원이, 풍문 때문에 대간을 조사하고 추문하는 일을 도로 거둘 것을 여러 달 고집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상이 비로소 조사하지 말라고 명했으므로, 대간의 논계가 드디어 정지되었다.
8월 22일 병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이 치계하기를,
"강변의 각 고을에 기근이 더욱 심하니 금방 다 죽게 된 자들에게 먼저 죽을 꿇여 주어야 하겠습니다. 정배된 죄인들도 살 수가 없어 죽음이 눈앞에 있으니, 모두 청천강 남북의 어염(魚塩)이 나는 곳으로 옮기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전주 판관(全州判官) 박신규(朴信圭)를 파직시키지 말고 빨리 직임을 되돌려 주라고 명하였다. 박신규는 본래 치적이 드러났는데 중한 죄수를 놓친 일에 연좌되어 파직을 당하게 되었다.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민심이 그가 떠남을 아깝게 여긴다는 것으로 치계하였으므로, 이명이 있게 된 것이다.
금년 서울과 지방의 연례적인 세초(歲抄)와 각 아문 각종 군병을 초정(抄定)시키는 등의 일을 정지하고, 죽었거나 늙어 역에서 면제될 자는 스스로 한정(閑丁)을 얻어서 그대로 대신 역을 정하도록 명하였다. 이때 좌의정 허적이 간원의 계사로 인해 세초를 정지할 것을 청하였는데,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말하기를 ‘죽었거나 늙은 자를 대신 역을 정하는 따위는 아울러 정지시킬 수 없다.’고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호군 민정중(閔鼎重)을 불렀으나 오지 않았다. 민정중이 김징(金澄) 사건 이후로 고향으로 물러가 있었는데, 소명이 있을 때마다 허물을 들어 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다. 이때에 와서 조복양(趙復陽)이 민정중을 불러 구황정책을 주관토록 할 것을 청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김징이 일찍이 솜옷을 이유로 권집(權諿)을 무겁게 탄핵했으면서 자신은 표피(豹皮) 갖옷을 남에게 주기까지 했으니, 이것이 바로 김징이 형편없는 점입니다. 민정중에게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더구나 길 떠나는 자에게는 반드시 선물을 줍니다. 서로(西路)에는 으레 은과 삼을 사신의 노비로 삼기 때문에 신들도 일찍이 받았습니다. 다만 민정중은 김징을 아주 현인으로 여기고 그의 선물을 받았습니다. 이 때문에 마음이 편치 못한 것입니다. 국사가 위급한 이 때를 만나 올라올 뜻이 없다면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다시 불러도 오지 않으면 추고해야 됩니다."
하니, 상이 정원에 명하여 별도로 효유하였으나, 민정중이 또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8월 23일 정미
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이하(李夏), 정언 신후재(申厚載)·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들으니, 별궁(別宮)을 수리할 때에 상께서 ‘호조와 병조의 당상은 내관(內官)의 말을 듣고 하라.’는 하교가 있었다고 하는데, 놀랍기 그지없는 일입니다. 모든 건축의 일은 유사의 신하가 스스로 봉행해야 합니다. 어찌 내관으로 하여금 해조에 분부하도록 하여 꼭 지시하는 것처럼 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실로 전에 없는 일로서 후일의 폐단을 크게 여는 것입니다. 전교의 문자는 관계됨이 매우 중대하니 그대로 전파해서는 안 됩니다. 출납을 맡고 있는 신하는 이치를 근거로 복역(覆逆)하여 임금에게 잘못된 일이 없도록 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입다물고 한 마디의 말도 없이 봉행하기에만 급급하였으니, 진실되게 출납한다는 의의가 어디에 있습니까. 전교를 도로 거두시고 승지는 종중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뒤 허적이 상에게 아뢰기를,
"중관(中官)이 비록 상의 명령을 받드는 자이나 호조와 병조의 당상이 어떻게 중관의 분부를 듣겠습니까. 성상의 하교는 체통의 상실을 면치 못한 것입니다. 더구나 들으니 중관이 참의를 물리쳐 보내고 꼭 판서가 와서 분부를 듣도록 하였다고 하는데, 더욱 한심스런 일입니다."
하였다. 뒤에 대간의 계사로 인해 상이 이르기를,
"내관에게 전교를 하게 한 것일 뿐이지 애초부터 지휘 통솔시키려는 뜻은 아니었다. 그러나 대간의 계사가 이같으니 우선 따르는 것이다."
하였다.
영의정 이정립(李廷立)에게 문회(文僖)의 시호를 내리고, 병조 판서 김응하(金應河)에게 충무(忠武)의 시호를 내렸다.
이정기(李廷夔)를 이조 참판으로, 김수흥(金壽興)을 강화 유수로, 박장원(朴長遠)을 우참찬으로, 심재(沈梓)를 대사간으로, 신명규(申命圭)를 집의로, 박지(朴贄)·정중휘(鄭重徽)를 장령으로, 최후상(崔後尙)을 교리로, 송규렴(宋奎濂)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경기 교동진(喬桐津)에 배가 뒤집혀 죽은 자가 36명이었다.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평안도 의주(義州) 등 여섯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서울 서부(西部)에 사는 여자가 굶어 죽었다고 한성부에서 보고하였는데,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진휼청에 강도의 미곡 3만 석을 배로 운반해다가 용도에 보충해 쓰라고 명하였다. 허적 등이, 도하(都下)에 크게 기근이 들었는데 각사의 공물가를 은포(銀布)로만 주게 되면 지탱하기 어려운 형편이니 강도의 미곡을 옮겨다 계산해 주고 은포는 각 아문에 맡겼다가 풍년이 되거든 미곡으로 바꾸어 그 수량을 채우게 하라고 청해서, 상이 허락한 것이다.
물에 빠져 죽은 자가 경상도에 5명, 전라도에 20명, 함경도에 4명이었는데 감사들이 보고하였다. 모두 휼전을 베풀었다.
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이하(李夏), 정언 신후재(申厚載)·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현재 하늘이 경계를 보이고 농사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사망하고 있다는 보고서가 연속하여 올라오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미곡과 베를 들여 크게 토목 공사를 일으키시니, 이게 어찌 수양하고 반성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옮겨 지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숙휘 공주의 저택 짓는 역사를 그만두소서"
하니, 따르지 않았다.
8월 26일 경술
어영군의 상번(上番)을 정지하라고 명하였다. 이때 상이 뜸을 뜨고서 대신들을 인견하고 이르기를,
"팔도의 흉년이 이 지경에 이르렀는데 어영군을 입번(立番)시키면, 본인은 늠료를 받아 먹겠지만 그들이 상번한 뒤에 부모 처자들은 살 수가 없을 것이다. 금년 10월부터 명년 9월까지 특별히 상번을 정지시키고, 먼 도에서 받는 보인(保人)의 미곡은 본도에 비축시켰다가 구제할 밑천으로 삼도록 하라."
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인견할 때에 삼사가 관례대로 모두 입시해 왔습니다. 그런데 근래에는 머물러 기다리고 있는 당상에게만 입시하라고 명하시니 매우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일차(日次)019) 외에 삼사의 관원은 입시할 필요가 없다. "
하였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외간에서 한두 명의 내관이 상당히 방자할 조짐이 있다고 걱정합니다. 이는 반드시 상께서 신임하는 환관일 것입니다."
하니, 장선징(張善瀓)이 아뢰기를,
"비록 고인의 글을 읽은 선비라 하더라도 대부분 총애와 신임을 받으면 점차 교만해지는데, 더구나 이런 자들이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성명께서 깊이 경계하실 일입니다."
하였다. 상이 모두 답하지 않았다.
진휼청의 미곡 2천여 석을 꺼내어 도성 백성들에게 팔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강도의 곡식을 옮기고자 하였던 것은 대체로 도성 백성까지 구제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현재 도성이 황망하여 하루도 버티지 못하게 되었으나, 값을 감하여 판매한다면 백성이 소생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달리 구제할 대책이 없으니 군량이 비록 중요하나 어찌 돌아볼 수 있겠는가."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강도의 미곡을 갑자기 운반해 오기는 어려우니 진휼청의 미곡을 먼저 발매하여 다급함을 해결하도록 청하였는데, 상이 허락한 것이다.
8월 27일 신해
전라도 화순현(和順縣)에 큰 바람이 불어 9세 된 아이가 바람에 날렸다가 떨어져 죽었다. 노인들이 을해년 이후에는 없었던 악풍이라고 하였다. 부안(扶安) 등의 고을에도 큰 바람이 불어 변산(邊山)의 금송(禁松) 수백 그루가 일시에 부러지고 뽑혀 나갔다.
전 판서 오정일(吳挺一)이 죽었다. 오정일은 용의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하였으며 사람됨이 온화하고 또한 재능과 국량도 있었다. 만년에 투기하는 첩을 두어 사람들의 말썽을 많이 초래하였으므로, 식자들이 애석하게 여겼다.
8월 28일 임자
서울에 사는 선비 중 굶어 죽은 자가 있었다. 한성부에서 보고하니, 상이 하교하기를,
"매우 놀랍고 참혹한 일이다. 특별히 휼전을 베풀고 그의 처자에 대해서는 진휼청으로 하여금 양식을 주어 구제하도록 하라."
하였다.
황해도에 소의 전염병이 크게 번져 한 달 동안에 죽은 소가 8천여 두(頭)였다. 또 된서리가 연달아 내렸고 큰 바람에 나무가 부러지고 뽑혔으며, 남아 있던 곡식도 하나도 남은 것이 없어 백성들이 곳곳에서 울부짖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8월 29일 계축
맹주서(孟胄瑞)를 황해 감사로, 김석주(金錫胄)를 교리로 삼았다.
대사간 심재(沈梓), 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이하(李夏), 정언 신후재(申厚載)·홍만종(洪萬鍾)이 아뢰기를,
"각 아문의 군관이 정해진 수효가 없어서 신역을 모면하려는 자들이 대부분 투신하고 있습니다. 군액(軍額)을 채우기 어려운 것은 주로 이 때문입니다.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바로잡도록 하여 그 수효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아뢰고 처리하게 하였다. 그 뒤 등대했을 때 좌의정 허적(許積)이 상 앞에서 수효를 여쭙고 결정하려 하고, 또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일은 그 폐단이 늘 천천히 하는 데에 있는데 결국엔 시일을 끌다가 대부분 폐지되고 맙니다. 의당 상의 뜻이 굳게 결정되었을 때 속히 도태시켜야 합니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명년 가을을 기다렸으면 한다고 하였는데 김좌명(金佐明)이 그 말이 옳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그 뒤에 청풍 부원군(淸風府院君) 김우명(金佑明)이 뵙기를 청하고 이 일의 불가함을 힘써 말하니, 상의 뜻이 마침내 변하여 일이 끝내 시행되지 않았다.
사신은 논한다. 각청 군관의 폐단은 참으로 간원의 계사와 같다. 대신이 기어이 제때에 바로잡으려고 했던 것은 대체로 상의 뜻이 혹 변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가 이른바 우리 나라의 일은 그 폐단이 우선 천천히 하자는 데에 있다고 한 것은 근일의 병폐를 적중시킨 것이었는데, 우선 천천히 하자는 의논이 또 뒤따라 일어났다. 김만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내년을 기다리자고 청하였으나, 이는 끝내 바로잡을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급기야 김우명의 말이 한번 들어가자 상의 뜻이 과연 변하여, 바로잡는 조치가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3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74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군사-군정(軍政) / 역사-편사(編史)
사신은 논한다. 각청 군관의 폐단은 참으로 간원의 계사와 같다. 대신이 기어이 제때에 바로잡으려고 했던 것은 대체로 상의 뜻이 혹 변할까 염려했던 것이다. 그가 이른바 우리 나라의 일은 그 폐단이 우선 천천히 하자는 데에 있다고 한 것은 근일의 병폐를 적중시킨 것이었는데, 우선 천천히 하자는 의논이 또 뒤따라 일어났다. 김만기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폐단이 있을까 염려하여 내년을 기다리자고 청하였으나, 이는 끝내 바로잡을 날이 없게 되는 것이다. 급기야 김우명의 말이 한번 들어가자 상의 뜻이 과연 변하여, 바로잡는 조치가 마침내 시행되지 않았으니, 애석한 일이다.
내수사의 목면 20동(同)과 베 10동을 내어다가 구제할 밑천에 보충하였다. 이때 상소하는 자들이 대부분 내탕고를 열어야 한다고 말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호군 민정중(閔鼎重)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해마다 사신 행차에 팔도가 물자를 갖추어 보내는 것은 하나의 공공연한 규례가 되었습니다만 선물로 주는 갖옷에 있어서는 규례 밖의 것인데 신이 어리석게도 받았으니, 어찌 죄가 없겠습니까. 지금 들으니 호남의 감영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모두 대동 절정(大同折定) 속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다섯 장의 표피는 실로 관부의 중요한 저장물이니, 신이 만 번 죽음을 당하더라도 어떻게 스스로 해명할 수 있겠습니까. 은혜로운 유시를 받들 때마다 낯이 부끄러웠는데, 특별히 부르신 명령이 또 내릴지는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길에서 방황하며 명령에 태만한 죄만 더하고 있으니 빨리 신의 본직과 겸직을 면직시키시어, 신으로 하여금 시골에 물러나 있으면서 허물을 반성할 수 있도록 해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굳이 사양할 필요 없다. 속히 올라오라."
하였다.
8월 30일 갑인
작고한 공신 이시백(李時白)·이후원(李厚源)·이해(李澥)의 집에 월름(月廩)을 주라고 명하였다. 도승지 장선징(張善瀓)이 말하기를
"인조(仁祖) 때에 흉년으로 인해, 작고한 공신의 처자를 걱정하여 다달이 늠료를 주도록 명령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번 세 공신의 집은 본래 가난한데 이런 흉년을 당했으니, 의당 돌보아주는 은전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경상 감사 민시중이 치계하기를,
"다른 도의 유민들이 진주(晋州)·함양(咸陽) 등 10여 고을에 가득하여 꼭 굶주린 까마귀 떼 같은데 도둑질이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노약자는 구렁에 엎어져 죽을 것이며 건장한 자는 도적이 될 것이니, 제때에 구제해서 다른 근심이 없도록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진휼청이 회계하기를,
"조금이나마 농사가 된 영남 고을에 나누어 보내 스스로 살길을 찾도록 하되, 특히 의지할 곳이 없는 자들은 현재의 그곳에서 죽을 끓여 주어 구제하게 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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