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을묘
경기 포천현(抱川縣)에서 벼랑이 무너져 깔려 죽은 자가 3명이었으며,황해도 배천군(白川郡)에서 어선이 뒤집혀 물에 빠져 죽은 자가 30여명이었다. 상이 모두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9월 2일 병진
권상구(權尙矩)를 동부승지로 삼았다.
경상도 곳곳에서 도적이 일어나, 싣고 오던 각 고을의 세폐 방물(歲幣方物)과 군포(軍布)가 간혹 도적에게 겁탈을 당하였으며, 마을에는 명화적(明火賊), 길가에서는 강도의 변괴가 번번이 일어났다. 감사가 보고하자 상이 토포사를 신칙시켜 더욱 기찰하라고 명하였다.
9월 3일 정사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현재의 급선무는 절약만한 것이 없으므로 다가오는 대례(大禮)에 반드시 쓸데없는 비용을 줄여야 합니다. 더구나 세자께서 지금 성인이 되는 초기이므로 더욱 검소함을 보여주어야 합니다. 국사가 이 지경에 이른 것은 사치의 소치가 아닌 것이 없으니, 내외의 모든 일을 일체 간략히 한다면, 보고 듣는 자가 뉘라서 공경하고 탄복하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답하지 않았다. 이조 판서 조복양(趙復陽)이 아뢰기를,
"해서(海西) 백성은 신역이 가장 고통스러워 원망이 하늘에 닿았습니다. 지금 만약 전부 감해 준다면 살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반드시 재실(災實)을 조사한 보고서가 있어야 처리할 수 있을 텐데, 그러러면 사세상 지체될 것이므로 염려스럽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해서의 베 징수를 평년과 같이 할 수 없습니다. 재실을 조사한 보고가 있을 때까지 잠시 동안 받아들이는 것을 독촉하지 말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평안도 강변 여섯 고을의 각사 노비 신공을 감하도록 명하고, 또 기유년 이전의 받지 못한 것도 연기해 받도록 하였다. 이는 감사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9월 4일 무오
경상도 대구(大丘) 등 27읍에 지진이 있었다.
9월 5일 기미
홍수하(洪受河)를 지평으로,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이유태(李惟泰)를 겸 찬선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9월 6일 경신
서필원(徐必遠)을 총융사로 삼았다.
9월 7일 신유
밤에 달이 남두성(南斗星)에 들어갔다.
함경도 경성부(鏡城府)에서 8월 24일 햇빛이 청명하고 구름도 끼이지 않았는데 우레가 쳤다. 소리가 대포 소리 같았고 한참만에 그쳤다.
9월 8일 임술
함경 북도 무산진(茂山鎭)의 국경을 넘은 죄인 이귀생(李貴生)을 경내에서 처참하였다. 본진 첨사 박필성(朴弼星)을 의금부에 가두고 여러번 형신하였으나 승복하지 않았는데, 뒤에 심리(審理)로 인해 관직을 삭탈하고 놓아 보냈다. 당초 이귀생 등이 국경을 넘어 산으로 갈 때 박필성이 화약을 갖추어 주며 강을 건너도록 허락하고 몰래 이익을 나누어 먹고자 도모하였다. 감사가 그 일을 보고하자 이귀생은 주동자라고 하여 사형으로 논죄하고 박필성은 마침내 풀려났으므로 북로(北路) 사람들이 분하게 여기지 않는 자가 없었다.
9월 9일 계해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7월 27일 강풍과 폭우가 일시에 닥쳐, 강물이 터진 듯하였으며 소리가 우레같았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큰물이 갑자기 불어나 수구(水口)의 홍성(虹城)과 누각까지 아울러 무너져 바다 속으로 떠내려갔으며, 침수된 민가가 아주 많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6명입니다. 밝은 대낮이 컴컴해졌고 성난 파도가 포말을 내뿜었는데 비처럼 흩날려 온 산과 들에 가득하였으며, 사람이 그 기운을 호흡하면 꼭 짠물을 마시는 것 같았습니다. 초목은 소금에 저린 것 같고, 서리와 눈에 죽지 않는 귤·유자·소나무·대나무 등이 마르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른바 땅위에 초목이라는 것은 모두 조금의 생기도 없습니다. 각종 나무 열매는 거의 다 떨어지고 서속·콩 등은 줄기와 잎이 모두 말랐습니다. 농민들이 서로 모여 곳곳에서 울부짖고 있으니, 섬안에 인간이 앞으로 씨가 마르게 되었습니다. 이는 실로 만고에 없었던 참혹한 재변이니, 앞으로의 구제를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9월 10일 갑자
밤에 유성이 하나는 북두성 위쪽에서 나왔는데, 모두 색깔이 희고 빛이 땅에까지 비췄다.
군현(郡縣)에 곡식을 바칠 백성을 모집하여 영직(影職)·노직(老職)·증직(贈職) 및 각종 첩문을 주었는데, 양남(兩南) 감사의 요청을 따른 것이다. 이때 민간에 크게 기근이 들었는데 그 대가를 감하여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자가 아주 적었다.
통영의 곡식을 옮겨다 제주의 기민을 구제하고, 또 본도의 각사 노비 신공(身貢)을 견감시켰다. 목사 노정(盧錠)이, 세 고을에 있는 곡식은 8천 석에 불과한데 인민의 숫자는 무려 4만 2천 7백여 명이므로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 결코 구제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연해의 곡물을 얻어 온 섬의 다 죽게 된 목숨을 구제할 것을 청하였는데,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제주 흉년의 참혹함은 옛날에도 듣지 못한 일입니다. 목사 노정이 촌가를 출입하며 백성이 먹을 것이 있는지 없는지를 친히 살피고 기근이 더욱 심한 자는 지성으로 구제하고 있습니다만, 관곡이 매우 적어 이렇게 곡식을 옮겨 줄 것을 요청하였으니, 호남 연해의 각 고을에 있는 통영곡(統營穀)을 보내준다면 거의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각사 노비 신공도 완전히 감해 주어 걱정하는 뜻을 보여야 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쌀 2천 석, 조(租) 3천 석을 배로 실어다 구제하였다.
9월 11일 을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이번 별천(別薦)은 의당 신들도 해야 할 것입니다만, 신들은 정승의 자리에 있으므로 전관(銓官)을 잘 가려서 맡겨 공평하게 선발하도록 책임지울 뿐이며, 처음 벼슬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신들이 선발할 수 있는 바가 아닙니다. 전조(銓曺)에서 정밀하게 잘 가려 뽑는다면 비록 별천이 없더라도 어찌 인재가 모자라는 것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하고, 우의정 홍중보가 아뢰기를,
"소신이 영(令)을 듣고 그 일을 정지하도록 빨리 아뢰려고 하였으나, 미처 하지 못했습니다.
하니, 이조 판서 조복양이 청하기를,
"지난해 별천의 규례대로 이미 천거된 자들을 묘당에 문의하여 그중 쓸 만한 자를 가려 쓰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제주 백성들이 말을 국가의 둔전(屯田)에 바치면 양남(兩南) 목장에 비축된 곡물로 값을 계산해 주는 일을 들어 주었다. 이때 제주에 크게 기근이 들어 다투어 말을 잡아 먹으면서 경각의 목숨을 연명하였는데, 세 고을 백성들이
"말을 잡아 먹느니 차라리 국가의 둔전에 바치고 국가 곡식을 받아먹는 것이 낫다."
고 하였다. 이를 목사 노정이 보고하고 상경한 제주 사람들도 이를 비국에 호소하였으므로, 허적이 상에게 아뢰어 태복시 소속의 양남 둔전의 곡식으로 값을 계산해 주고 사도록 청하여, 상이 허락한 것이다.
이시술(李時術)을 이조 참판으로, 김만기(金萬基)를 이조 참의로, 유헌(兪櫶)을 장령으로, 이우정(李宇鼎)을 지평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삼았다.
9월 12일 병인
홍수하(洪守河)를 장령으로, 김덕원(金德遠)을 지평으로, 이경억(李慶億)을 지중추부사로 삼았다. 이경억은 김징(金澄)의 사건으로 인해 죄를 얻었는데, 허적이 일찍이 상 앞에서 그의 재능이 아깝다 하면서 등용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이때에 와서 다시 등용된 것이다.
제주에 전가 사변(全家徙邊)한 죄인을 내지(內地)로 옮기도록 명하였다. 조복양(趙復陽)이 상에게 아뢰기를,
"제주에 정배된 죄인은 모두 적도들로서 습성을 고치지 않아, 늘 도둑질하는 피해가 많았습니다. 이런 흉년을 만나서는 그 피해가 더욱 심하여 제주 백성들이 고통을 감당하지 못할 것입니다. 만약 지금 다른 데로 옮긴다면 온 섬의 사람들이 지탱하여 보존될 수 있을 것입니다. "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5일 기사
요망한 이세직(李世直)이 무고죄에 걸려 참형에 해당되었는데, 옥중에서 지레 죽었다. 이세직은 공산(公山) 사람인데, 이달 7일 종각(鐘閣)에 난입하여 발로 종을 차고는 형조에 체포 이속되어 치죄를 받았다. 이세직이 인해서 역변을 고하는 말을 하자 형조가 보고하였는데, 드디어 대신과 원임 대신, 의금부 당상, 양사의 장관을 명패로 부르고 또 문사 낭청(問事郞廳)을 차출했다. 그날 밤 내병조(內兵曺)에서 국문하자, 이세직이 공초하기를,
"본래 풍수(風水)를 업으로 삼았는데 청주(淸州) 남면(南面) 주성(酒城) 근처에 좋은 집터가 있다는 말을 듣고 찾으려고 하였습니다. 8월 15일 청주의 가암(加巖)에 도착하였는데, 그 마을에 사는 배상준(裵尙俊)·배상율(裵尙栗) 등을 실로 우연히 만났습니다. 그때 배상준이 자기 집터를 보아 줄 것을 청했으므로 서로 이야기하던 중 배상준이 ‘연속해서 흉년이 들어 앞으로 백성들이 모두 죽게 되었다.’면서 무도한 말을 많이 하였습니다. 또 말하기를 ‘만약 몇 년이 지나면 초목만 남을 것인데 이러한 같은 때에 지리(地理)를 해서 무엇에 쓰려는가.’ 하였습니다. 또 8월 10일 송 정승(宋政丞)의 집에 갔는데 그곳에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 충청 병사 서 감사(徐監司), 통제사 구씨(具氏)가 와서 모여 있었습니다. 가만히 마루 밑에 엎드려 들으니, 9월 27일 아침에 서로 모여 서울로 들어가자고 약속하였습니다. 그런데 이홍연이 말하기를 ‘9월 25일 새로 번 서는 어영군을 직산현(稷山縣)에서 점고할 때에, 이들을 수합하여 상경하게 되면 군병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 서 감사는 꼭 금천(衿川)에서 기다리라.’ 하였습니다. 이홍연이 또 말하기를, ‘기상을 두고 말한다면 송 정승을 왕으로 세워야 할 것이나 후사가 없고 양손(養孫)이 있을 뿐이며, 송 판서는 친손자가 많이 있으니, 어떻게 해야 되겠는가.’ 하고, 또 도읍을 신도(新都)로 옮길 일을 말하였습니다. 이런 말을 듣고 일의 낌새가 급박하였으므로 올라와서 고한 것입니다."
하였다. 국청이, 그의 말이 혼란하여 문자로서는 진달할 수 없다고 하여, 직접 뵙도록 해 줄 것을 청하였다. 이에 상이 불러 보고 물었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국문할 때에 말이 매우 조리가 없을 뿐만 아니라 어긋나는 단서가 많았습니다. 더구나 공초한 내용 중에 말한 송 정승 집에 모여 의논하였다는 말은 더욱 혼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어제 이 일을 보고 나도 모르게 한심스러웠다. 인심이 이 지경까지 나빠졌단 말인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의 말에 송시열(宋時烈) 집에 모였던 날 몰래 마루 밑에서 들었다고 하였는데, 들으니 송시열 집에는 마루가 없다고 합니다. 그의 말이 허망하다는 것을 여기에서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의 말투를 살펴보건대 혹시 사주한 자가 있지 않은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가령 인사를 아는 사람이 시킨 것이라면 어찌 이 지경에 이르겠습니까. 이는 공을 바라고 갑자기 한 말이 분명합니다."
하였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그의 말을 들어 보니 필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발로 종을 찬 것을 보아도 그가 정신 나간 사람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가 혹 배가(裵哥)와 본래부터 원한이 있다가 종을 친 김에 모함하는 꾀를 부리려고 했던 것인데, 일이 중대해지자 갑자기 이 한 가지 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닌가?"
하자, 허적 등이 모두 성상의 하교가 지당하다고 하였다. 급기야 배상준 등을 잡아왔는데 이세직과는 본래부터 모르는 사람이라고 공초하였다. 국청이 먼저 이세직에게 배상준의 용모와 집이 어떻게 생겼느냐고 물었는데, 이세직의 대답이 과연 다 틀렸다. 드디어 얼굴이 비슷한 대여섯 명으로 시험해 보았는데 이세직이 그중 한명을 가리키면서 배상준이라고 하였다. 배상준과 대면시키기에 이르러서는 도리어 진짜가 아니라고 하였다. 배상준이 이에 그가 한 말이 구구절절 사실에 어긋남을 힐난하니, 이세직이 기운없이 머리만 숙인 채 묵묵히 한 마디의 말도 없었다. 여덟 번째 형신을 받은 뒤에야 실토하기를,
"당초에는 배상준의 일 때문에 올라왔습니다. 옥에 갇히던 날 갇혀 있던 죄수 조동지(曺冬之)가 말하기를 ‘이럴 때 역적이라도 일어나면 다행이겠다.’ 하고 또 말하기를 ‘네가 이같이 사소한 일을 가지고 와서 고발하고 죽고 싶느냐. 차라리 대관(大官)을 끌어들여 고발하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죄수 중에 언서(諺書)를 아는 자가 양송(兩宋)020) 및 이홍연 등을 끌어들일 것을 권했기 때문에 비로소 그럴 마음이 생겨 이런 말을 만들어 냈습니다. 8월 10일 여러 사람들이 모여 의논하였다는 말은 모두 거짓말입니다. 배상준의 일에 있어서는 8월 16일 청주를 지나갈 때에 평소 안면이 없는 연주로(延柱路)의 집에 마침 들어갔는데, 연주로가 말하기를 ‘배상준이 임금께 부도한 말을 했으니, 네가 만약 고변(告變)한다면 반드시 이익이 있을 것이다.’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 말대로 와서 고발한 것이지 사실은 배상준에게 직접 들은 것은 아닙니다."
하였다. 무고죄로 논하였는데 미처 사형에 처하기도 전에 죽어버렸다. 조동지는 다섯 번 형신을 받고 김백추(金白秋)는 한 차례 형신을 받았으나 모두 바른 대로 말하지 않았는데, 김백추는 곧 이세직이 끌어들인 언문을 안다는 자이다. 상이, 동지 등에게는 사주한 흔적이 두드러졌기 때문에 꼭 깊이 캐보려고 하였으나 이세직이 이미 죽었고 달리 대면시켜 변증할 사람도 없으므로, 모두 형조에 되돌려 보내 각기 그전의 죄목으로 죄주라고 명하였다. 배상준 등은 모두 풀려났고 연주로에게도 묻지 않았다.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인재를 천거하는 법은 다스려진 조정의 성대한 일입니다. 사대부들 간에 공도(公道)가 없어져 어지럽게 부탁하고 다닌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지고 있습니다. 천거를 받은 사람도 합당하지 못한 자가 많다고 하니, 이같은 천거는 결코 쓸 수가 없습니다. 모두 파직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7일 신미
전라도 고산(高山) 등 30여 고을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광주(光州)·강진(康津)·운봉(雲峯)·순창(淳昌) 등 네 고을이 더욱 심하였는데, 집이 흔들려 무너질 듯했고 담장이 무너졌으며 지붕의 기와가 떨어졌다. 말과 소가 제대로 서 있지 못했으며 길가는 사람이 다리를 가누지 못하여 놀라고 겨를이 없는 가운데 엎어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이런 참혹한 지진은 근래에 없던 일이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원양도의 평해(平海)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큰비가 내려, 지붕의 기와가 모두 날리고 도로가 시내로 변했으며, 벼가 떠내려가서 온 들판이 텅 비었다. 고성(高城)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고, 이달 1일에 금강산의 적설량이 한 자나 되었다. 감사가 보고하였다.
9월 18일 임신
집의 신명규(申命圭)가 아뢰기를,
"양전(量田)은 국가의 대사이니 한번 잘못되면 그 피해가 적지 않습니다. 전 목사 이하악(李河岳)이 일찍이 충주 목사로 있을 때 향임(鄕任) 이만재(李萬栽)를 신임하여 양전을 위임한 채 그가 하는 대로 맡겨 두었습니다. 이만재는 자기와 친하고 소원한지를 따져 마음대로 등급을 높히고 내렸으므로 온 고을 백성이 통분해 하지 않는 자가 없어 감사에게 가 호소하였습니다. 감사가 조사하도록 하자 이하악은 또 심리(審理)하지 않아, 충주의 백성이 앞으로 살아갈 수 없다고 합니다. 이하악과 이만재를 모두 잡아다 문초한 다음 죄를 결정하시고 양전은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면서 이르기를,
"이만재는 해도로 하여금 가두고 치죄하게 하라. 다만 양전하는 일은 이제 와서 다시 한다면 다른 고을에서도 이를 본받게 되어 반드시 그지없게 될 것이다."
하였다. 신명규가 또 탑전에서 연계(連啓)하자 상이 대신들에게 문의하였는데,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충청도의 양전은 모두 현편없는데, 청주(淸州)가 더욱 심합니다. 충주만 다시 할 일이 아닙니다."
하였다. 신명규가 인하여 청주 및 기타 균등치 않게 된 곳을 다시 측량할 것을 청하니, 상이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하라고 명했다. 이하악은 의금부의 조율(照律)로 인하여 고신(告身)을 빼앗겼다.
동부승지 권상구(權尙矩)가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과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에게 유지(諭旨)를 전하고, 서계하기를,
"송시열이 말하기를 ‘신은 어제 길에 떠도는 말을 듣고 혼백이 달아났습니다. 죄수의 복장으로 밤에 출발하여 고을의 감옥으로 나아가고 있었습니다. 마침 길에서 측근의 신하를 만나 성상의 최유지를 전해받고 피눈물을 흘리며 감격하는 마음 외에는 다시 진달할 말이 없습니다.’ 하였습니다. 송준길이 말하기를 ‘신의 행동이 볼품없어 남에게 공경과 신임을 받지 못하였으므로 이런 망극한 변고를 당하였습니다. 다행히 자애스러운 성상께서 특별히 승지를 보내 유시하시고 위안해 주시니 감동의 눈물을 흘리는 외에는 진달할 말을 모르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당초에 상이 두 신하가 이세직의 무고 때문에 마음이 반드시 편치 못할 것이라고 여겨, 마침내
"세도(世道)가 나날이 사라지고 인심이 좋지 않게 되어, 요사한 사람들이 때를 틈타 흉계를 부렸다. 방금 엄중히 국문하여 그 죄를 바로잡았으니 경은 안심하라."
는 내용으로써 정원으로 하여금 말을 만들어 유시하게 하였는데, 권상구가 명을 받고 갔다가 이때 돌아온 것이다.
전라도 장흥(長興)에서 어선이 뒤집혀 죽은 자가 12명이었다.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9월 21일 을해
신후재(申厚載)를 부수찬으로 삼았다.
9월 22일 병자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이 상소하기를,
"옛부터 억울하게 무고를 당한 자가 어찌 한이 있겠습니까마는 오늘날 신이 당한 것 같은 일이야 어찌 있었겠습니까. 오직 일월처럼 지극히 밝고 천지처럼 지극히 인자하시어, 이미 너그러운 용서를 내렸고 다시 위로의 덕스러운 말씀을 내리셨습니다. 일족이 몰락하더라도 씻을 수 없는 죄목을 진 신이, 오히려 뼈가 가루가 되어도 갚기 어려운 은총을 받았으므로 북쪽 대궐을 바라보며 스스로 슬피 울부짖을 뿐입니다. 다만 염려되는 것은 필시 온 중외에 소문이 그치지 않고 있을 것인데, 신이 집집마다 가서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다시 유사의 신료에게 명하여 신으로 하여금 옥리(獄吏)를 대면하여 변명할 수 있도록 해 주신다면, 사람들에게 할 말이 있게 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생각이 이에 미치면 가슴과 뼈속이 써늘해진다. 흉인이 승복하여 간사한 흔적을 숨김이 없었는데, 국법으로 다스렸다. 국민들이 이미 알고 있으니 경이 변명할 일이 뭐 있겠는가. 아무쪼록 나의 뜻을 이해하고 다시는 개의하지 말라."
하였다.
대사헌 송준길도 상소하여, 일찌감치 형법대로 벌을 받아 국민에게 사죄함으로써 신하로서 불충하는 자의 경계가 되겠다고 청하였다. 상이 송시열에게 답한 것으로 답하였다.
9월 23일 정축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에워쌌다.
9월 24일 무인
평안도 정주(定州)에서 어선이 뒤집혀 죽은 자가 7명이었다. 휼전을 베풀도록 명하였다.
9월 25일 기묘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기를,
"본도에 정배된 죄인이 그 가속을 합하면 무려 2천 50여명이나 되는데 이들을 육진(六鎭)과 삼수(三水)·갑산(甲山)에 나누어 두었습니다. 그런데 전에 없던 이런 큰 흉년을 당하여, 정배된 죄인들이 잇따라 도망하고 보수(保授) 토졸(土卒)들도 죄받을까 두려워 흩어지고 있습니다. 전가 도류 죄인(全家徒流罪人)을 모두 함흥(咸興) 이남으로 옮겨서 주객이 다 도망하는 근심을 면하도록 하소서."
하였다. 비국이 평안도의 전례대로 죄명이 조금 가벼운 자를 옮기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강계부(江界府)의 국경을 넘은 죄인 하득명(河得明) 등 6명을 경내에서 처참하고 따라갔던 20여 명은 모두 본도로 하여금 정배하게 하였다. 그리고 만포 첨사(滿浦僉使) 윤창형(尹昌亨)을 파직시켰는데, 잘 검칙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9월 28일 임오
집의 신명규(申命圭), 장령 박지(朴贄)·홍수하(洪受河)가, 충주목(忠州牧)의 지난해 양전이 고르지 못했다는 이유로 파기하고 풍년이 들기를 기다려 다시 양전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무과 시험장의 시관이 감찰을 죄줄 것을 혼동하여 청한 실수를 논하면서, 해당 시관들을 중한 율에 따라 추고할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지평 김덕원(金德遠), 정언 홍만종(洪萬鍾)이 감찰에게 죄줄 것을 계청할 때 동참했으므로 응당 추감(推勘)을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9월 29일 계미
모든 도의 임기가 만료된 수령을 명년 보리 추수 때까지 유임시킬 것을 명하였다. 이때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수령을 맞이하고 전송하는 일이 고을 백성들의 큰 폐단인데다 진휼을 처리하는 정사를 솜씨가 서툰 자에게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한국사 공부 > 조선왕조실록' 카테고리의 다른 글
|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11월 (0) | 2025.12.16 |
|---|---|
|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10월 (1) | 2025.12.13 |
|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8월 (0) | 2025.12.12 |
|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7월 (0) | 2025.12.12 |
|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6월 (0) | 2025.12.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