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8권, 현종 11년 1670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3. 07:57
반응형

10월 1일 을유

궐내·외 각사(各司), 제궁가(諸宮家) 등에서 수직하는 군사 가운데 긴요하지 않은 자를 명년에 한하여 임시로 감하였다. 이는 우상 홍중보(洪重普)의 말을 따른 것이다.

 

10월 2일 병술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정언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본도에서 금년에 진헌할 호표피(虎豹皮)의 값을 진휼하는 데 보태 쓰게 해주시기를 원한다."
고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0월 3일 정해

제주에 지진이 있었다. 천둥치는 듯한 소리가 나고 많은 민가의 담벽이 무너지거나 기울었다.

 

10월 4일 무자

제주 세 읍의 월령 진헌품과 경각사에 연례에 따라 마땅히 납입해야 할 물건을 특별히 감하였는데, 좌상 허적의 말에 따른 것이다.

 

10월 6일 경인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삼았다.

 

10월 7일 신묘

집의 신명규(申命圭), 장령 박지(朴贄), 지평 이우정(李宇鼎)이 아뢰기를,
"영남 진주의 선정신(先正臣) 조식(曺植)의 서원에 조식의 문집이 있는데, 문집 속의 부록은 모두 적신 정인홍(鄭仁弘)이 선정신 이언적(李彦迪)·이황(李滉)을 비방하거나 혼조(昏朝) 때 흉적들이 인홍을 숭상하는 내용입니다. 수십 년 전에 한 선비가 이를 분하게 여겨 그 문집의 판본을 가져다가 쪼개버렸는데, 이에 이의를 품은 하락(河洛)·하달원(河達源)·윤승경(尹承慶) 등이 도리어 판본이 훼손된 데 대해 깊이 원망을 품고 서원 안에 들어가 공인을 불러 다시 새기고 또 그 판본을 훼손한 선비를 벌하였습니다. 먼 지방의 인심이 진실로 지극히 한심합니다. 도신으로 하여금 조식의 문집 가운데 인홍 등 여러 역적들의 패악한 내용을 속히 잘라내고 아울러 흉적을 받든 하락 등의 죄를 다스리게 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백성의 요역 가운데 백면지(白綿紙) 등이 가장 무거운데, 각읍에서는 모두 승사(僧寺)에 책임지워 마련케 하고 있습니다. 중들의 능력도 한계가 있으니 일방적으로 침탈하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전라 감영이 전례에 따라 바치는 종이도 적지 않은데 근래에 또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일년에 올리는 것이 큰 절은 80여권, 작은 절은 60여권이 되므로 중들이 도피하여 여러 절이 텅 비었습니다. 이런데도 혁파하지 않는다면 그 해가 장차 백성에게 미칠 것입니다. 본도 감사로 하여금 각절에서 이중으로 올리는 폐단을 속히 없애게 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경상도 합천에서 병아리를 두 번 깐 암탉이 수탉으로 변하였다. 도신이 변이로 보고하였다.

 

10월 8일 임진

판윤 서필원(徐必遠)이, 각전(各廛)의 시민들이 견디기 어려운 폐단에 대해 조목별로 진달하기를,
"국가의 필요한 물건을 시민에게서 모두 조달하는 것이 상례인데, 이는 나라의 근본을 보휼하는 일과 관계되므로 서울과 지방이 한가지입니다. 그런데 외방의 민생은 이미 역을 면제받았으나 오직 이 시민만은 그 혜택을 입지 못하였습니다. 지금부터는 절대로 잡역을 지워 독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필원이 마침 평시 제조(平市提調)가 되어 있었기 때문에 시민들의 호소를 듣고 이 청을 올린 것이었다.

 

10월 9일 계사

김익경(金益炅)을 원양 감사(原襄監司)로, 남이성(南二星)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10월 10일 갑오

서울의 서학동(西學洞)에 사는 의원 변영희(邊永熙)의 집에 강도가 뛰어들어 네 사람이 칼에 맞고 영희의 처는 즉사하였다. 한성부가 보고하니 포도청에 명하여 기한을 정해 엄히 체포하라고 하였다.

 

집의 신명규, 장령 박지 등이 아뢰기를,
"포도청을 설치한 것은 오로지 폭력을 금하기 위해서인데 도둑질을 하는 변고가 도성 안에서 빈발하니 어찌 한심스럽지 않겠습니까. 며칠 전에 변영희의 집에 강도가 들어 네 사람을 살해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해당 대장은 무겁게 추고하고 종사관은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후 포도청이 이 도적들을 잡고 보니 일당 네 명이 모두 도감의 포수였다. 상은 마땅히 경계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고 여겨 진치는 것을 연습하는 날에 군중에서 조리돌리고 베도록 명하였다.

 

10월 12일 병신

쌍무지개가 동쪽에 나타났다.

 

최일(崔逸)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10월 13일 정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불러 보았다. 호조 판서 권대운이 아뢰기를,
"가을 석 달 동안에 사용한 쌀이 이미 3만 석을 넘었는데, 특별한 용도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용도가 이와 같아 저축이 고갈되게 되었습니다. 백관의 봉록이야 지급하지 않아도 되지만, 군병의 급료마저 잇대기 어렵게 되었으니 앞으로의 나랏일이 망극하다 하겠습니다."
하고, 교리 김석주가 아뢰기를,
"석 달 동안 사용한 쌀이 이미 3만 석을 넘어섰다면, 신은 상께서 절약하지 못해서 그리된 것이라고 봅니다. 만약 궐내에서 먼저 검소한 생활을 하시어 비용을 힘써 줄이시고 지성으로 백성을 구제한다면 백관들에게는 비록 제때에 녹을 주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심한 해는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10월 14일 무술

햇무리가 겹으로 졌다.

 

10월 15일 기해

각도 각읍의 재난을 당한 곳을 경중에 따라 3등으로 나누어서 백성들의 신역을 차등있게 감하도록 명하였다. 당시 팔도에 큰 흉년이 들어 각도에서 신역을 줄여 달라고 하는 청이 거의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좌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오늘날의 급한 일은 신역을 감면하는 일만한 것이 없습니다만 제신의 의견이 각기 다릅니다. 조복양(趙復陽)은, 재해의 경중을 막론하고 일체의 역을 모두 감해야 하며 앞으로 용도를 잇댈 수 있는가의 여부는 논할 겨를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의 어리석은 생각으로는 그렇지 않은 듯합니다. 한 해의 경비에는 반드시 7, 8천 동의 목면이 있어야 용도에 잇댈 수 있는데, 지금 만약 한꺼번에 이를 감한다면 나라의 계책이 또한 어찌할 수가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특히 심한 읍은 전부 감하고 그 다음은 반만 감하는 것이 마땅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우상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도 처음에는 복양의 말이 옳다고 여겼으나 다시 의논하여 보고 비로소 좌상의 견해가 옳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호조와 본조는 재정이 거의 바닥났습니다. 신은, 특히 심한 읍은 한 필을 감하고 그 다음은 한 필만 바치게 하였다가 명년에 또 한필을 바치게 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였다. 유혁연은 좌명의 말을, 권대운과 정지화는 허적의 의견을 옳다고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신역을 전부 감하고도 국용을 이을 수만 있다면 전부 감하는 것이 물론 좋으나 다만 감한 뒤에 나라를 지탱할 수 없을까 염려됩니다. 신 또한 이 때문에 어렵게 여기는 것입니다."
하였다. 대사간 심재(沈梓)가 청하기를,
"경각사의 봉부동(封不動)021)  과 외방 각처의 은포(銀布)를 덜어내어 경상 비용에 보태고 신역을 전부 감하소서."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여러 신료들의 말이 모두 백성을 구제하는 뜻에서 나온 것이니 좋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강도(江都)와 남한 산성에 저축해 둔 목면은 2천여 동에 불과하고 경각사 가운데는 태복시의 비축이 가장 많은데도 1천 동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 해에 올려야 하는 수량은 8천 9백여 동이나 되니 앞으로의 경상 비용은 이 액수만큼 있지 않으면 잇대기 어렵습니다. 설령 강도와 남한 산성과 태복시의 비축을 모두 취한다 해도 나머지 5천 동은 어떻게 마련하겠습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전부 감하는 것이 비록 좋긴 하나 나라의 예산은 어찌한단 말인가. 다만 팔도의 백성들이 굶주려 죽을 지경이니 구별해서 역을 면제하여 이들을 보존하지 않을 수 없다. 재난 피해가 특히 심한 읍은 전부 감하고 그 다음은 반을 감하여 조정의 진휼하는 뜻을 보임이 좋겠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노비 신공을 한 필만 바치는 자도 있는데 이 또한 반을 감해줘야 합니까?"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또한 재난 피해의 경중에 따라 전부 감하든지 반만 감하든지 하여 제반 신역과 똑같이 하는 것이 옳다."
하였다. 후에 김만기의 말에 따라, 다소 곡식이 여문 읍 가운데 세 필을 납부해야 할 읍의 경우에도 한 필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팔도 전체에서 특히 심한 곳이 1백 3읍, 그 다음이 1백 56읍이었고, 나머지 읍들도 명목은 다소 여물었다고 하나 보통의 해에 비하면 역시 특히 심한 경우와 같았다. 아, 이 해의 처참한 기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홍수와 가뭄과 바람 서리의 재변이 팔도가 똑같아서 곡식이 여물지 않아 굶주려 죽은 사람이 길에 널렸다. 목숨을 잃는 재앙이 전쟁보다 심하여, 백만의 목숨이 거의 모두 구렁텅이에 빠지게 되었으니 실로 수백 년 이래에 없었던 재난이었다. 대개 쌓아서 저축하는 것이 천하의 대명이거늘 국가가 평소에 비축한 것이 없이 갑자기 홍수와 가뭄을 만나 이 백성들이 굶어 죽는데도 구제하지 못하였으니, 아, 비통한 일이다.

 

10월 16일 경자

집의 신명규, 장령 박지, 지평 이우정이, 기내의 복심이 재난을 입은 곳과 건실한 곳이 분명치 않다는 것으로 경차관과 각도의 도사로 하여금 재난을 입은 곳과 입지 않은 곳을 분명하게 조사하여 미진한 폐단이 없게 하기를 청하고, 또, 관적(官糴)을 독촉하여 받아들이면서 연약한 백성들을 침탈하면 조정이 힘써 백성들을 구휼하는 덕의에 어그러짐이 있다는 이유로, 묘당으로 하여금 깊이 헤아려 액수를 정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그 후에 허적이 아뢰기를,
"농사의 풍흉을 복심하는 일은 지금 이미 때가 늦었으니 그냥 두는 것이 마땅하며, 또 액수를 정하여 적곡(糴穀)을 거두어들이는 것은 재난을 입은 경중에 따라 나누어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하니,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헌부가 또 영광 군수 심구(沈玖)가 술에 빠져 일을 돌보지 않은 잘못을 논하고 파직을 청하니, 상이 체포 심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명하였다.

 

복녕군(福寧君) 이유(李栯)가 죽었다. 상이 예장(禮葬)을 명하였다. 복녕군은 인평 대군의 아들이다. 상이 하교하였다.
"복녕의 상을 당하니 놀랍고 슬퍼서 마음을 가눌 수가 없다. 선조께서 감싸고 아끼며 무휼하여 친애하게 하시던 가르침을 거슬러 생각하니, 눈물이 끊이지 않으며 슬픔을 금할 수가 없다. 격외의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예장 등의 일은 전례를 떠나 거행하고 쌀과 베 등 장례 물품을 넉넉하게 지급하라."

 

양호(兩湖)는 금년 가을의 실지로 확인해 본 새 결수로 대동미를 징수하고 아울러 경기와 양호의 금년 수미(收米)의 반을 감하도록 명하였다.

 

10월 18일 임인

교리 김석주(金錫胄), 부교리 최후상(崔後尙), 부수찬 이훤(李藼)·신후재(申厚載)가 상차하기를,
"국가가 이미 세입액을 크게 감하였으니 또한 반드시 세출의 액수를 크게 절감해야 합니다. 당초피 무역과 공주가 사는 집의 개수 공사를 중지하소서."
하니, 상이 너그럽게 답하고, 이어 명년에 상방(尙方)에서 무역할 초피를 전부 감하라고 명하였다.

 

10월 19일 계묘

달무리가 목성을 에워쌌다.

 

대사간 심재 등이 논하기를,
"이인 찰방(利仁察訪) 조원양(趙元陽)은 광주(廣州)의 건달로 장관(將官)의 임기가 다 찬 것을 인하여 동반의 정품직을 제수받았습니다. 사람과 관직이 맞지 않으면 관방이 어지러워질 것이니 도태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조 판서 조복양이 원양을 들어 쓴 일로 소를 올려 자신의 잘못을 말하고, 원양을 비호하니, 상이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심재가, 한 건달을 논하였다가 사람에게 말을 들어 국체를 크게 손상하였다 하여 인피하니, 정언 김덕원이 처치하여 출사시킬 것을 청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정언 오두헌(吳斗憲)과 사간 심유(沈攸)가 당초의 논계에서 자세히 살피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복양은 연달아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원양은 복양의 가까운 일가이다. 본래 한 건달로 문관도 무관도 아니었는데 복양이 육품 정직에 앉혔으니 어찌 사심을 부렸다는 비난을 면할 수 있겠는가. 심재가 이를 들어 바로잡은 것은 진실로 대간의 체통을 얻었다. 그런데 오두헌·심유 등이 도리어 원양을 위해 인피한 것은 대개 복양을 두려워한 까닭이다.

 

집의 신명규, 지평 이우정·윤지선(尹趾善)이 우역(牛疫)이 심한 것을 이유로 도살장을 혁파하자고 청하니, 상이 다시 묘당으로 하여금 의논해 처리하라고 명하였다. 후에 등대하였을 때,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의 아룀이 지극히 옳으나 조복양이 차자를 올려 개진한 뒤에 바로 완화시켰다가 지금 대간의 아룀에 따라 또다시 통렬히 금하신다면 국체에 있어서 번잡한 듯합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은 금할 것을 청하고, 홍중보는 완화하자고 하는 등 신료들의 의견이 한결같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더욱 신칙하여 지나치게 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

 

10월 22일 병오

집의 신명규, 지평 이우정이 복녕군 이유를 예장하라는 명을 정지하도록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후에 인대하였을 때 명규가 다시 거두어 들일 것을 청하고 허적도 외부 의논이 대부분 불가하게 여긴다고 말하자, 상이 이르기를,
"금년은 예년과 다르니 생군(生軍)은 내 마땅히 소요되는 숫자를 헤아려 간소하게 지급하고, 그 밖의 백성을 부리는 일도 줄이겠다."
하니, 마침내 대간의 논계가 그쳤다.

 

10월 23일 정미

이익(李翊)을 좌부승지로, 이후(李煦)를 장령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지평으로 삼았다.

 

고려 태조의 능을 개수하고 제사를 베풀어 고한 다음 수묘군 세 사람을 두고 수직관의 월급을 주도록 명하였다. 수직관은 왕씨의 후예였다. 그 밖의 여러 능도 소재의 읍에서 각기 세 사람을 정하여 수호하도록 하였다. 개성 유수 홍처량(洪處亮)의 말에 따른 것이다.

 

10월 24일 무신

밤에 화성이 토성과 같은 위치에 있었는데, 서로의 거리가 7, 8촌 정도였다.

 

영의정 정태화가 사직서를 26차에 걸쳐 올리니 상이 사관을 보내어 전유했는데, 그 내용이 매우 간절하였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우역이 심하다는 이유로 도살장을 파하고 단속을 엄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형조 판서 정지화가 속죄의 재물을 징수하지 말고 삼차의 형을 베풀어 중법으로 금할 것을 청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형을 삼차에 걸쳐 가하면 생명을 잃을까 염려되고 돈만 받고 죄를 용서해 주면 금령이 반드시 해이될 것이니, 엄형 한 차례로서 금령을 범한 죄를 징계하고 또 속죄의 재물을 내게 하여서 전가 사변의 율을 대신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25일 기유

상이 하교하였다.
"날씨가 이처럼 추우니 홑옷 입은 군사에게 유의(襦衣)를 지급하라."

 

10월 27일 신해

밤에 유성이 북하성 아래에서 나왔는데 붉은 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상이 몸소 소결에 임하니 소결청 당상 김좌명 등이 문안을 가지고 아뢰었다. 상이 이르기를,
"옥사의 실정은 자세히 알기가 가장 어려우니 함부로 처결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한 사람의 죄를 상주할 때마다 대신과 본청의 당상, 양사, 옥당에 자문하여 각각 소견을 말하게 한 뒤에 상이 직접 결정하였다. 죄가 강상, 강도, 강간, 문서위조, 사리에 맞지 않은 일로 소송을 좋아하는 경우, 주인을 배반한 노비를 제외하고 본도로 하여금 다시 조사케 한 자가 5명, 등급을 감한 자가 2명, 완전히 풀어준 자가 29명이었다.

 

정초군과 도감 포수 각 10인이 매일 밤 성안을 특별히 순찰하여 도적에 대비하였다. 당시 도적의 환난이 도성 안에서 많이 일어났으나 포도군이 금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상 홍중보의 청을 따라 상이 허락한 것이었다.

 

10월 28일 임자

상이 다시 소결에 친히 임하여 본도에 다시 조사하여 아뢰도록 한 자가 6명, 감등한 자가 4 명, 완전히 풀어준 자가 20명이었다.

 

대사헌 송준길이 현도 정장(縣道呈狀)하여 병을 핑계로 체직을 청하니, 허락하였다.

 

10월 29일 계축

상이 하교하기를,
"어제 대신과 형조 판서의 말을 듣고 마음이 몹시 참담하였다. 큰 기근 뒤에 추운 절기를 만났으니, 얼어 죽는 자가 틀림없이 많을 것이다. 해조와 해청으로 하여금 한성부에 분부하여 특히 그 중 심하여 의지할 데가 없어 얼어 죽게 된 자에게는 동옷을 주거나 옷감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허적·정지화 등이 경연에서 도로에 얼어 죽은 자가 많다고 아뢰었기 때문에 이러한 명이 있었다.

 

우참찬 박장원을 파직하라고 하였다. 장원은 전시 독권관에 의망되어 패를 받고 대궐 밖에 이르러서는 그의 노복이 상스럽지 못한 병에 걸렸다 하여 감히 들어오지 못하자 정원이 계청하여 재차 불렀으나 끝내 들어오지 않았다. 상이, 장원이 엄동에 독권하는 역을 면하려 한다고 여겨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문케 하여 다른 사람의 경계가 되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