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갑인
별시 전시를 실시하여 정도성(鄭道成) 등 10명을 뽑았다. 대간이 응시자 박천영(朴千榮)의 시권(試券) 가운데 교묘하게 고쳐 쓴 곳이 있다는 이유로 논계하여 제외시켰다.
대사간 심재, 사간 심유, 정언 김덕원이, 전시 시관이 패를 받고도 나오지 않고 임무를 면하려고 꾀한 죄를 논하여 예조 판서 김수항과 참판 강백년을 추고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여 구황의 방책을 조목조목 아뢰었다. 비국이 회계하여 그 가운데 아홉 조항을 시행할 것을 청하였다. 그 내용은,
1. 격포 등의 적곡을 특별히 모곡을 감면하도록 명하여서 작으나마 은혜를 베풀 것,
2. 산성의 적곡을 각기 그 성 아래의 창고에서 거두게 하고 각종 곡식으로 대신 올리는 것을 허락할 것,
3. 각 관사의 노비에게 면천을 허가하여 받은 돈으로 진휼의 비용에 보태 쓸 것,
4. 본도의 전결을 중중(中中) 이하로부터 하상(下上)까지 3등급은 모두 하중(下中)에다 넣고 하중의 전을 하하(下下)에다 넣는 것은 허락하지 말 것,
5. 속오군의 각종 병기는 관비나 자비를 막론하고 관가에서 거두어 모아 명년 가을에 다시 지급하게 하고, 전선(戰船)과 군기도 소속 본관 및 각 진포에 옮길 수 있게 할 것,
6. 진휼할 때 필요한 장을 담글 콩은 통영과 각 아문의 회부 가운데서 3천 섬을 지급할 수 있게 할 것,
7. 가뭄이 든 밭의 목면 가운데 특히 부실한 곳도 급재(給災)를 허락할 것,
8. 호조 소관의 염세 목면을 본영의 은화와 바꾸어 진휼의 자금에 보태 쓰게 할 것,
9. 사망한 군사는 명년 가을까지 대정하지 않은 기간에 한하여 그 번포를 감할 것 등이었는데, 상이 모두 허락하였다.
선혜청이 또 그 장계 가운데 각종 복호(復戶)에 결수를 양감하는 일은 역의 완급에 따라 차례로 감하되, 경기·호서도 함께 시행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효자, 충신, 열녀에 내린 복호는 이와 같은 흉년에는 특별히 진휼함이 옳으니 감하지 않는 것이 좋다."
하였다. 전에 허적이 오시수의 장계를 상 앞에서 조목조목 아뢸 때 노비의 속량에 관한 내용에 이르자 상이 제신에게 두루 물었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1백 구를 속량하면 겨우 5천 섬을 얻으니 소득이 많지 않은데 길을 여는 것은 매우 곤란하니 신은 그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홍중보가 아뢰기를,
"이러한 길이 일단 열리게 되면 서울의 사람들이 싼 값으로 관비를 속량하려 하여 장차 반드시 어지러워질 것이니 절대로 가볍게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진실로 중보의 말과 같습니다. 지금은 외방 각사의 노비만 허락을 하되, 영남에서도 일찍 이러한 청이 있었으니 함께 허락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자, 상이 따랐다. 인하여 다른 도도 아울러 허락하라고 명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오시수가 치계한 많은 조목들은 모두 10월 초에 직접 아뢴 것이다. 민생이 구렁에 떨어지는 때를 맞아 진휼하는 정사에 관한 모든 것은 의당 빨리 강구해야 하는데, 한 번 회계한 뒤에는 덮어두고 세월만 보냈다. 이 때문에 일이 미리 정해지는 것이 없고 명령은 대부분 때를 놓치니, 묘당의 신료들이 어찌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78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군사-군기(軍器) / 군사-군역(軍役) / 정론-정론(政論) / 신분-천인(賤人)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농업-양전(量田)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오시수가 치계한 많은 조목들은 모두 10월 초에 직접 아뢴 것이다. 민생이 구렁에 떨어지는 때를 맞아 진휼하는 정사에 관한 모든 것은 의당 빨리 강구해야 하는데, 한 번 회계한 뒤에는 덮어두고 세월만 보냈다. 이 때문에 일이 미리 정해지는 것이 없고 명령은 대부분 때를 놓치니, 묘당의 신료들이 어찌 그 책임을 떠넘길 수 있겠는가.
○全羅監司吳始壽馳啓, 條陳救荒之策。 備局回啓, 就其中九條, 請施行之。 一曰, 格浦等糴穀, 特令除耗, 以施一分之惠。 二曰, 山城穀, 使之收捧于各其城底之倉, 而且許其代捧各穀。 三曰, 各司奴婢許令免賤, 受價補用於賑資。 四曰, 本道田結宜自中中以下, 至下上三等, 竝置下中, 而下中之田, 則勿許更置下下。 五曰, 束伍軍各樣兵器, 勿論官備與自備, 許令收聚官家, 待明秋還給, 戰船軍器, 亦許移置於所屬本官及各鎭浦。 六曰, 設賑時所用沈醬之豆, 統營與各衙門會簿中, 許給三千石。 七曰, 旱田木綿之尤甚不實處, 亦許給災。 八曰, 戶曹所管鹽稅木, 許以本營銀貨相換, 捕用於賑資。 九曰, 軍士之物故者, 宜限明秋未代定間, 減其番布, 上皆許之。 宣惠廳又以其狀啓中, 各樣復戶量減結數事, 請從役之緊歇, 次第減之, 因令京畿、湖西, 亦一體施行, 上曰: "孝子、忠臣、烈女所給復戶, 如許此凶年, 尤宜軫恤勿減可也。" 先是許積以始壽狀啓, 條陳於上前, 至奴婢贖良事, 上遍問諸臣。 金佐明曰: "許贖一百口, 僅得五千石, 所得無多, 開路甚難, 臣未知其可也。" 洪重普曰: "此路一開, 則京人以賤直, 圖贖官婢, 必將紛紜, 決不可輕許也。" 許積曰: "誠如重普之言。 今當只許外方各司奴婢, 而嶺南亦曾有此請, 似當一體許之耳。" 上從之。 因命竝許他道。
【史臣曰: "始壽馳啓許多條件, 皆是十月初面稟之事也。 當此民生塡壑之日, 凡係賑政, 尤宜速講, 而一番回啓, 輒淹時月。 是以事無前定, 令多後時, 廟堂諸臣, 安得辭其責哉。"】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78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군사-군기(軍器) / 군사-군역(軍役) / 정론-정론(政論) / 신분-천인(賤人) / 재정-역(役) / 재정-잡세(雜稅) / 농업-양전(量田)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구음(具崟)을 정언으로, 오시복(吳始復)을 수찬으로, 정적(鄭樍)을 지평으로, 조형(趙珩)을 우참찬으로 삼았다.
11월 2일 을묘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11월 4일 정사
승지에게 명하여 전옥서에서 죄수를 살피고 죄가 가벼운 자를 풀어 주게 하였다.
11월 5일 무오
도승지 장선징이 아뢰기를,
"사신이 하직할 때 서장관에게 금물(禁物)을 조사 점검하라는 뜻을 본원에서 엄격하게 신칙하여 보낼 일에 대하여 일찍이 전교가 있었습니다. 이번에 사은사가 하직할 때에, 서장관이 대직을 겸하고 있다고 칭하면서 한결같이 평상시에 대관을 대하는 예에 따라 승지 사관에게 대청에 나가 기다리게 하려고 하니, 이는 전례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사체에 있어서도 매우 옳지 못한 일입니다. 앞으로는 서장관이 정원에 들어와 전교를 직접 듣게 하되, 법식을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6일 기미
밤에 하늘 한가운데의 두터운 구름 사이에 유성이 나타났다. 붉은색이었고, 빛이 땅을 비추었으며 소리가 있었다.
이경억(李慶億)을 공조 판서로, 안후태(安後泰)를 주서로, 이하(李夏)를 부교리로, 이수언(李秀彦)을 대교로,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송규렴(宋奎濂)을 헌납으로 삼았다.
11월 7일 경신
사간 심유, 정언 김덕원이, 별대(別隊) 보인(保人)의 신역포(身役布)를 본관에 받아 두는 것은 신군(新軍)을 무휼하는 정치가 아니라는 이유로,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품정하여 명년 가을로 연기하여 받아들이도록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앞서 허적이 아뢰기를,
"훈국 별대에 새로 편입된 자들에 대해서, 마침 흉년을 당하였는데 만약 그 역을 징수하면 틀림없이 지탱하기 어려울 것이니, 명년 가을에 가서 그 신역을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각읍에 받아두게 했다가 그것으로 저들을 구제하면 매우 편리할 터이니, 이렇게 하도록 분부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허적이 아뢰기를,
"별대의 일은 일찍이 상의 하교로 인해 이미 알렸는데 지금 대간의 계사대로 다시 분부한다면 몹시 번잡할 듯하니, 그냥 두는 것이 어떻습니까?"
하니, 상이 또 따랐다.
봉미관(封彌官) 정기태(鄭期泰)를 금부에 하옥시켰다. 기태는 전시 응시자 권규(權珪)의 시권 가운데 두 곳을 몰래 고쳤는데 네 자는 칼로 긁고 고쳐 쓰고, 두 자는 먹으로 지우고 옆에다 썼었다. 일이 탄로나자 권규는 합격되려다가 제외되고 기태는 시관의 보고로 체포되어 심문을 받았다. 스스로 ‘술을 마신 뒤에 경망스러워져, 전편은 매우 좋은데 한두 문자가 미진한 듯한 것이 안타까워 부지불식간에 이런 행동을 하였다.’고 진술하였다. 상이 형을 쓰지 말고 상의하여 처리하도록 하였는데, 승지 이익(李翊)이 아뢰기를,
"만약 기태의 간악한 죄를 술 탓으로만 돌린다면 앞으로 이루 다 말할 수 없는 폐단이 생길 것입니다."
하고, 홍중보도 아뢰기를,
"신이 시권 안의 고친 곳을 보았는데 모두 정밀하게 지우고 써 넣었습니다. 만약 술 탓이었다면 어떻게 정밀히 지울 수 있겠습니까. 행위가 매우 간교합니다."
하니, 상이 다시 형벌로 다스리도록 명하였다. 그 후에 중보가 또 아뢰기를,
"기태의 정상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데 예에 따라 형추만 한다면 실토할 날이 없을까 염려됩니다."
하니, 엄히 형문하여 실정을 알아내도록 명하였는데, 기태가 끝내 자복하지 않았다. 후에 해남현(海南縣)에 충군되었다.
11월 8일 신유
지평 정적(鄭樍)이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형옥이 엄하지 않아서, 승지가 적간을 할 때 옥졸들이 모두 수직하지 않았고 중죄인이 옥쇄를 풀고 있었으니, 대단히 놀라운 일입니다. 전옥서의 해당관을 체포 심문하여 벌하시고 또 해조로 하여금 수시로 낭관을 보내어 적간하도록 하여 형옥이 엄하지 않게 될 근심이 없게 하소서.
이번 전시 때에 명지(名紙) 가운데 사조(四祖)를 쓰지 않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는 간교한 무리가 허명을 적어 넣어 간악한 계책을 쓰려던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막중한 국가 시험에 이처럼 놀라운 일이 있었으니 주관한 관원은 불찰의 책임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정원이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면 해당관의 죄를 청하고 철저히 규명하게 하는 것이 마땅한데 예삿일로 보아 덮어 두었으니 해당 승지 역시 일을 흐릿하게 처리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추고하소서.
백성의 풍속과 국가의 기강에 관한 모든 일을 그때그때 바로잡는 것은 본디 법부의 직무입니다. 자세하게 결정하지 않은 상태에서 형조에 이송하는 것은 법관을 신임하는 도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이니 죄인 박숙(朴肅) 등을 해조로 하여금 조사 처리하게 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이번 법부의 죄인을 해조로 하여금 조사 처리하게 하라는 전교는 실로 온당치 못한 것인데 담당 승지가 법에 의거하여 끝까지 논계하지 않아 일의 체모를 크게 손상하였으니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조사 처리하라는 명을 환수하는 일은 그후 다시 아뢰자 본부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후에 등청하여 대면하니 상이 정적에게 이르기를,
"헌부는 모두 모인 다음에 비로소 조사하여 보고할 수가 있는데 모두 모이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해조로 하여금 속히 조사하여 처리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내 뜻은 법부를 불신한 것은 아니었다."
하고는 그 죄명의 경중을 물으니, 정적이, 사대부를 능욕하였다는 것으로 대답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미 탑전에서 진달하였으니 곧 이것이 조사해서 아뢴 것이다."
하고, 드디어 풀어주라고 명하였다.
집의 신명규가 박숙 등에 대해서 해조로 하여금 조사 처리하게 하라는 명이 있었다는 이유와, 무과 참시 대관으로서 낙서를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지평 이우정도 박숙의 일로 인피하였다. 처치하여 명규는 체직하고 우정은 출사시켰다.
11월 9일 임술
예조가 아뢰기를,
"영릉(寧陵)의 수복방(守僕房)은 능침에서 아주 가까운 곳에 있는데 불을 내어 다 태웠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위안제는 택일하지 않고 오는 11일에 시행해야겠는데, 본조의 당상과 낭청이 나아가 봉심한 후에 품처하겠습니다. 입직했던 수호군 등은 조심하지 않아서 불을 냈으므로 유사로 하여금 가두어 다스리게 하고, 입직한 참봉은 우선 무겁게 추고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심재가 무과 출방시에 참시 대관으로 오서(誤書)를 살피지 못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다 하여 인피하고, 정언 김덕원은 배표(拜表)하는 날 병 때문에 참가하지 못하였으니 마땅히 추고를 받아야 한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처치하여 모두 체직시켰다.
11월 10일 계해
남이성을 대사간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삼았다.
전라 감사 오시수가 상소하여 납육(臘肉)을 진상하는 일이 큰 민폐가 되는 상황을 극진하게 논하니, 상이 훌륭하다고 비답하고, 하교하였다.
"이번에 오시수의 상소를 보니 납육의 진상이 한 도의 큰 폐라고 하니, 마음이 몹시 측은하다. 금년의 납육은 양 대비전 외에는 잠시 동안 올리지 않는 것이 좋겠다."
11월 11일 갑자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여 《강목》 제1권을 강하였다. 시독관 김석주가 아뢰기를,
"소대하는 일을 오래 폐하였다가 시작하시니 모든 사람의 마음에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강목》은 권질이 매우 많아 다 읽기가 어렵습니다. 이제 만약 날마다 개강하여 끊임없는 공을 쌓는다면 역대 치란 흥망의 자취를 훤히 살필 수 있을 것이니 어찌 성덕에 큰 도움이 있지 않겠습니까."
하고, 판윤 서필원이 아뢰기를,
"소대의 명을 듣고 심부름하는 천한 아이들도 즐거워하며 서로 이야기하지 않는 자가 없는데 더구나 저희 관료들이겠습니까. 신의 생각은 상께서 수시로 불러보셔서 강론하신다면 또한 이를 통하여 백성들의 사정을 알 수가 있을 것이니 다스리는 도에 어찌 도움이 적겠습니까."
하였다. 사간 심유가 아뢰기를,
"영동에 한 요사스러운 무당이 환술로 무리를 미혹하자 민간에서 신령하다고 칭하면서 서로 받들어 모시고 음사(淫祠)를 많이 지었다고 합니다. 예로부터 풍각(風角)·황건(黃巾)의 변022) 이 이러한 무리에게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들으니, 회양 부사 임규(任奎)가 지금 잡아가두고 다스리는 중이라고 하는데,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엄히 심문하여 ‘요망한 말로 무리를 꾄 죄’로 다스리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도신에게 조사하여 아뢰게 하니, 임규가 이미 장살하였다고 하였다.
11월 12일 을축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여 《강목》을 강하였다. 강이 끝나자 지평 정적이 아뢰기를,
"근래에 연석이 엄하지 않아 언어 행동에 있어서도 간략하고 버릇없는 경우가 있으니 진실로 매우 한심합니다. 지사 유혁연(柳赫然)이 일을 상주할 때에 간략하고 버릇이 없어 예를 잃은 일이 있으니 경계하고 나무라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신은 논한다. 조정의 예모는 엄숙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연석의 엄하지 않음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혹은 상이 대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뒷줄에 있는 자가 사사로이 이야기하기도 하고 상의 분부가 끝나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옆에서 끼어드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끄럽게 잡담을 하여 공경하고 삼가는 태도가 없었으니 어찌 다만 혁연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79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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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조정의 예모는 엄숙하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연석의 엄하지 않음이 이때보다 심한 적이 없었다. 혹은 상이 대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뒷줄에 있는 자가 사사로이 이야기하기도 하고 상의 분부가 끝나지 않았는데 신하들이 옆에서 끼어드는가 하면 심지어는 시끄럽게 잡담을 하여 공경하고 삼가는 태도가 없었으니 어찌 다만 혁연 한 사람뿐이었겠는가.
○乙丑/上御養心閤召對, 講《綱目》畢, 持平鄭樍啓曰: "近來筵席不嚴, 至於言語禮貌之間, 亦或有簡慢之擧, 誠極寒心。 知事柳赫然奏事之際, 有簡慢失儀之事, 不可無警責之道。 請推考。" 上從之。
【史臣曰: "朝廷之禮, 不可以不肅, 而筵席不嚴, 未有甚於此時。 或上方與大臣酬酢, 而在後列者, 私相問答, 或上敎未畢, 而諸臣之言, 從傍互發。 甚至喧譁雜亂, 無復敬謹之容。 豈特一赫然而已哉。"】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79면
【분류】왕실-경연(經筵) / 사법-탄핵(彈劾) / 역사-편사(編史)
예조 당상이 영릉의 화재가 난 곳을 봉심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수복방 세 칸은 모두 다 탔습니다. 능침은 지엄한 곳인데 수복하는 무리들이 들어가 수직할 곳이 없으니 비록 이처럼 추운 계절이지만 제때에 개수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3일 병인
상이 대신과 비국의 여러 재신을 불러 보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신출신이 방비에 나아가는 것은, 이러한 큰 흉년을 당한데다가 그 비용도 적지 않으니, 잠시 풍년이 든 해를 기다려 시행하였으면 합니다. 김좌명은 남방의 수군에 소속시켜 방비케 하려 하는데, 이 역시 좋습니다. 다만 남방은 풍토가 몹시 나쁘니 풍토병이라도 걸리게 된다면 매우 애석할 일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 병조가 풍토 좋은 곳을 골라 보내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근래에 도적이 발생하였다는 보고가 계속하여 들어오는데 한 군데도 잡은 곳이 없으니 이는 필시 병사나 토포사 무리가 착실하게 기회를 보아 잡지 않은 소치일 것인데 매우 한심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병사 등을 무겁게 추고하여 마음을 써서 잡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
하였다.
대사간 남이성이 사직 상소를 통해 과거의 공정하지 못한 폐를 자세하게 논하였는데, 그 내용에,
"이번 전시의 합격자 이담명(李聃命)의 대책문(對策文) 가운데 중두(中頭)와 당금(當今), 편종(篇終)의 세 곳의 성책(聖策) 위에 모두 ‘복독(伏讀)’ 두 자를 빠뜨렸습니다. 여러 시관이 그 문장을 취하려 하다가 규격에 어긋나서 망설이던 차에 시관 이원정(李元禎)이 자기가 과거를 볼 때의 일로 증명하자 여러 의논이 비로소 결정되어 담명이 마침내 합격하였습니다. 설령 이담명이 격식을 어긴 것이 실로 우연한 실수에서 나왔고 이원정이 증거하여 도운 것 역시 별 사심이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아들이 합격하느냐 못하느냐 하는 때에 아버지가 간여한 일이 있으면 인정과 물의가 놀라고 분하게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신이 듣기로는, 선대의 조정에서는 ‘죄가 응시자에게 있으면 응시자를 벌하고 죄가 시관에게 있으면 시관을 벌하라.’는 전교가 있었습니다. 지금 담명 부자는 국법에 있어서 모두 유죄임이 마땅하여 결코 합격자 명단에 둘 수 없는데, 여러 날을 귀를 기울이고 들어도 아직까지 말을 하는 자가 없으니 신은 의아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하고, 또 아뢰기를,
"봉미관 정기태는 여러 지동관(枝同官)·사동관(査同官)과는 각기 맡은 것이 달라서 본래 서로 간여할 일이 아닌데 그 직분을 넘어 침범하였으니 그 마음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친한 사람을 도와준 것이 아니라면 틀림없이 형세가 있는 집안과 교제를 갖고자 하여서일 것입니다. 과거 시험은 일의 체모가 지극히 엄하고 중하여 한 줄기 공도가 여기에 의지하여 유지되는 것인데, 지금 간사한 자에 의해서 무너져버렸으니, 참으로 통분스럽습니다. 더구나 그 시권은 중신 집안 자제의 글이라 하니, 만약 엄히 문책하고 통렬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일반 백성들이 틀림없이 법이 공정하게 집행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구실을 삼아 말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니, 더욱 애통합니다. 신이 생각하기로는 기태는 엄하게 심문하여 실상을 밝혀내고 그 응시자와 함께 벌을 주어야만 비로소 성상께서 사사로움이 없는 정치를 하시는 것을 밝힐 수 있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여러 날이 되도록 답이 없었다. 승지 최일(崔逸)이
"간언하는 신하는 일반 신하와 다른데 오래도록 비답을 내리지 않으시니 자못 거북스럽습니다."
라고 아뢰었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또 여러 날이 지나서야 사직하지 말고 직무를 보라고 답하였다.
○大司諫南二星因辭疏, 極陳科事不公之弊, 有曰:
今殿試入格人李聃命對策中, 中頭與當今篇終三處聖策之上, 皆落伏讀二字。 諸試官欲取其文, 而疑其違格, 試官李元禎, 以自己做業時事證之, 諸議始定, 聃命終至入格。 設令聃命之違格, 實由於偶失, 元禎之證援, 亦出於無情, 當其子立落之際, 有其父干預之事, 則人情物議, 宜致駭憤。 臣聞先朝, 有罪在擧子, 則罪擧子, 罪在試官, 則罪試官之敎。 今此聃命父子, 其在國法, 俱應有罪, 決不可仍置於榜列, 而側聽累日, 尙未有言之者, 臣竊訝焉。 又曰: 封䌤官鄭期泰與枝査同官, 各有攸分, 元不相干, 而其所以越職相侵者, 其情斷然可知。 非欲以市德於親厚之人, 則必欲以納交於形勢之家也。 科場事體, 至嚴且重, 一線公道, 惟寄於此, 而乃爲奸鬼所壞弄, 誠可痛心。 況聞其試券, 乃重臣家子弟之文云, 若不嚴問痛懲, 則街談巷議, 將必以江左之法, 不行於右族, 爲藉口之資, 尤可痛也。 臣以爲期泰不可不嚴鞫, 鉤得實狀, 竝與其擧子, 而罪之, 方可以昭聖朝無私之治矣。 疏入累日不報。 承旨崔逸以諫臣與庶僚有異, 久不賜批, 殊涉未安爲言, 上不答。 又過累日, 以勿辭察職答之。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79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又曰:
封䌤官鄭期泰與枝査同官, 各有攸分, 元不相干, 而其所以越職相侵者, 其情斷然可知。 非欲以市德於親厚之人, 則必欲以納交於形勢之家也。 科場事體, 至嚴且重, 一線公道, 惟寄於此, 而乃爲奸鬼所壞弄, 誠可痛心。 況聞其試券, 乃重臣家子弟之文云, 若不嚴問痛懲, 則街談巷議, 將必以江左之法, 不行於右族, 爲藉口之資, 尤可痛也。 臣以爲期泰不可不嚴鞫, 鉤得實狀, 竝與其擧子, 而罪之, 方可以昭聖朝無私之治矣。 疏入累日不報。 承旨崔逸以諫臣與庶僚有異, 久不賜批, 殊涉未安爲言, 上不答。 又過累日, 以勿辭察職答之。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46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79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사간 심유가, 조원양의 일을 논할 때에 잘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였다. 지평 정적이 처치하여 아뢰기를,
"한 가지 일로 두 번씩 인피하는 것은 성상을 번거롭게 하는 일인데 지금에 와서야 여러 말을 늘어놓으니 매우 구차합니다. 체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4일 정묘
우의정 홍중보, 부호군 김우형(金宇亨)·이단하(李端夏), 교리 김석주가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듣건대, 대사간 남이성이, 이원정이 자기 아들의 시책을 고시하는 일에 간여하였다는 일로 장계를 올려 논열하면서, 심지어는 담명의 시권이 실로 크게 격식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시관이 경솔히 수취한 것은 결국 옳은 일이 아니라고 말하였다 하니, 신들은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담명의 대책 가운데 세 곳의 성책 위에 과연 복독이라는 두 자를 쓰지 않았는데, 신 중보가 말하기를 ‘성책 위에 어찌 복독 두 자가 없는가.’ 하니, 신 우형·단하·석주 등이 말하기를 ‘성책 밑에 쌍경궤독(雙擎跪讀)이라는 넉 자가 있는데, 성책 위에 또 독 자가 있으면 독 자가 중복된다. 이전에 이미 고과한 답안에도 이러한 형식이 있었다. 만약 한 사람만이 이러한 형식을 취했다면 두드러지게 보이려는 점이 있겠지만 다른 글에서도 이미 사용하였으니 별로 의심할 것이 없다.’ 하였습니다. 또 문장이 우등에 들기 때문에 등급을 쓰지 않고 따로 두었습니다. 한 축(軸)의 고과를 다 마친 뒤에 원정이 밖에서 들어왔는데 신 중보가 묻기를 ‘이러한 형식의 답안이 하나 있는데 어떨지 모르겠다.’ 하니, 원정이 ‘내가 등제할 때의 글도 역시 이러한 형식이었다.’고 하였습니다. 얼마 후 또 한 답안이 역시 ‘복독’ 두 자를 쓰지 않아 담명의 답안 형식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신들은 그러한 문제에 더 이상 의문을 두지 않았습니다. 합고(合考)할 때에 많은 의견이 담명의 것을 제일에 두고자 하였으나 그 첫머리 말이 온당치 못하였기 때문에 결국 제이에 두었습니다.
그간의 곡절은 이와 같은 데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에 담명의 글이 크게 격식에서 벗어나고 좌중에서 논의한 것에 모순되는 것이 있었다면 신들이 어찌 감히 억지로 취하여 상위에 두었겠습니까. 또 신들이 물러나서 들으니, 《진영수어(震英粹語)》의 간행은 오로지 과장(科場)의 정식을 위한 것인데 김홍도의 두 책문과 남근(南瑾)의 한 책문에 모두 ‘신복독(臣伏讀)’ 세 자가 없고 성책의 아래에 비로소 ‘봉독(奉讀)’ 두 자가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것으로 보아도 그것이 격식을 어긴 것이 아님을 증거할 수 있습니다.
신들은 명을 받아 고시하면서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고 심지어는 간신의 비난하는 상소까지 받았으니 어찌 스스로 잘못이 없다고 여겨 태연히 있겠습니까. 이에 감히 궐 아래에 나와 엎드려 벌을 기다립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지금 경들의 계사를 보고 그동안의 전말을 내 이미 다 알았다. 사직할 게 뭐가 있는가. 안심하고 벌을 기다리지 말라."
하였다.
11월 15일 무진
경기 적성현에서 무뢰배 십여 명이 밤에 떼를 지어 옥문을 부수고 살인범을 탈취하여 달아났다. 도신이 아뢰었다.
11월 16일 기사
지평 이우정이, 일찍이 영광 군수 심구(沈玖)를 논핵하였는데 심구의 원정(原情)에 침척하는 말이 많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지평 정적과 집의 이익상은 남이성의 상소 가운데 말없이 있었던 것을 배척하는 말이 있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정언 구음(具崟)은 시관 이단하와 사촌간인 혐의가 있고 또 정언 오두헌을 처치했다가 물의에 비난을 받았기 때문에 여러 관리들을 감히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우정과 정적과 익상을 출사시키게 하고, 또 아뢰기를,
"정언 구음은 일찍이 대헌을 맡았을 적에 한 일들이 전도되었고 본직을 제수받아서는 벌써 물의가 있었습니다. 지난번에 오두헌이 인피하면서 추함 이외에 또 말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이 있었다고 말하였으니, 두헌이 혐의하는 바는 구음에게도 있는데, 스스로 인피하지 않고 태연히 처치하였다가, 헌부에서 처치하기에 이르러 비로소 사촌의 혐의를 끌어댔으니 전후로 한 짓이 모두 매우 근거가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하(李夏)를 사간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이 계청하기를,
"본도의 전결을 한결같이 호남의 예에 따라 그 등수를 내려 주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본도는 호남과 다르니 지금 만약에 모두 하중(下中)에 넣는다면 실로 너무 과하니 청컨대 하상(下上) 이상은 한 등급을 낮추고 하중(下中) 이하는 그대로 본등급을 쓰게 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랐다.
전라도 나주에 크게 천둥과 번개가 치면서 비가 왔는데 개천이 넘치고 도로가 막혔다. 도신이 계문하였다.
문·무과의 방방(放榜) 때에 어사화가 부족하여 방방이 지체되었다. 간원이 해당 진배관을 도태시킬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17일 경오
영의정 정태화가 37차에 걸쳐 사직소를 올리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11월 18일 신미
정태화를 행 판중추부사로, 송시열을 행 지중추부사로, 조근(趙根)을 정언으로 삼았다.
11월 19일 임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였다. 《강목》의 강이 끝나자 상이 이르기를,
"진(秦)나라의 율령은 매우 엄하였으므로 사정이 누설되지 않을 법도 한데 장의(張儀)와 무왕 사이에 갈등이 있다는 사실을 열국이 모두 알고 있었으니 어찌된 일인가?"
하니, 홍중보가 아뢰기를,
"전국 시대에 유사(遊士)가 왕래하였으니 어찌 적정을 알기 어려울 리가 있었겠습니까."
하고, 김만기(金萬基)가 아뢰기를,
"적정을 모르는 것으로는 우리 나라보다 심한 나라가 없습니다. 일을 해보고자 한다면 적정을 몰라서는 안 됩니다."
하고, 서필원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가 적정을 모르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사대부는 모두 명절을 아끼고 역관들은 모두 재화를 아낍니다. 이렇게 하고도 적정을 알 수 있겠습니까. 가령 밀탐하여 왔다고 해도 한 마디라도 사실과 맞지 않으면 중죄가 따르니 우리 나라의 일은 어렵다고 하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고개를 끄덕였다.
집의 이익상이 인피하기를,
"형조 참판 이원정(李元禎)은 자신은 시관이 되고 아들은 거자가 되었는데도 말을 삼가지 않고 혐의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 아들의 당락이 비록 여기에서 반드시 말미암지는 않았다고 하더라도 경솔하게 함부로 행동한 잘못을 면하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거기다 사람들의 말이 얽혀 시끄러운데도 전혀 거리끼는 것이 없었으니 그의 진퇴가 또한 방자합니다.
정기태(鄭期泰)는 장옥(場屋)에서 사사로운 정을 써서 시권을 고쳐 썼고 등록관(謄錄官) 이태서(李台瑞)는 부화 뇌동하여 간사한 짓을 하여 오로지 거자를 위해서 일을 했고 보면 거자도 아마 몰랐을 리가 없을 듯합니다. 옥정(獄情)으로 보건대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기에, 신이 오늘 이원정을 파직하고 이태서와 해당 응시자 및 정기태를 모두 구금하여 엄하게 조사하고 처치하자는 뜻을 좌중에서 발언하였더니, 지평 이우정이 처음에는 따르는 척하다가 끝에 가서는 이의를 제기했습니다. 신이 경시당해서 일어난 일이니 신을 체직하소서."
하였다. 지평 정적도 이 일로 인피하였다. 지평 이우정이 아뢰기를,
"이원정은 대신의 질문에 비록 경솔하게 대답한 잘못은 있으나 이미 고시에 간여한 사실이 없으니, 단지 말이 조금 지나쳤다고 하여 재신을 논핵하는 것은 실로 타당하지 못합니다. 정기태가 시권을 고쳐 쓴 일은 너나없이 통분해 하는 것으로서 의금부에서 죄상을 아뢸 때 틀림없이 그 실상이 밝혀질 것이니, 미리 논계하는 것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또 그 선비에게는 본래 서로 통한 증거가 없는데 기태의 함부로 행동한 죄를 선비에게 씌우는 것은 또한 무슨 뜻이란 말입니까. 의견이 달라 끝내 합의에 이르지를 못하였습니다. 이태서에 이르러서는 단지 등록관이 부화 뇌동해 간사한 짓을 하였다는 말만 하고 따로 논한 일은 없었습니다. 동료가 인피한 말에 이것을 가지고 소란을 일으킨 것처럼 한 말이 있으니 신이 경시를 당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일이 이렇게 되었습니다. 체직하소서."
하였고, 정적이 인피한 말도 이익상과 같았다. 옥당이 처치하여, 익상과 정적은 출사시키고 우정은 체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20일 계유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소대하고 《강목》을 강하였다.
강원 감사 김익경(金益炅)의 장계에 따라 춘천·횡성·낭천·원주 등 4개 읍의 콩 1백 73석과 양구·인제·홍천·정선·평해·울진·고성 등 7개 읍의 콩을 작목(作木)한 것 3동(同) 30필을 본도에 지급하여 진휼에 보태게 하였다.
11월 21일 갑술
집의 이익상이 탑전에서 논계하여, 형조 참판 이원정을 파직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한때 말을 함부로 하였다는 잘못으로 재신이 파직당한다면 심한 듯하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또 이태서와 응시자 권규에 대한 일을 논하면서, 정기태와 일체로 모두 체포하여 엄하게 조사하고 법률에 따라 벌할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태서와 권규가 마침내 하옥되었다. 권규는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의 아들이다. 태서가 스스로 진술하기를 ‘기태와 권규 및 권규의 부형과는 평소 알고 지내는 사이가 아닙니다.’ 하고, 조문하러 갔을 때 대운이 그가 예모를 잃은 것을 대신에게 말한 것으로 인하여 자기가 힐책을 당한 일이 있음을 들어 증명하였다. 권규는 ‘기태와는 평소에 아는 사이가 아닙니다.’ 하고, 또 기태가 정장한 문제로 자신의 아비에게 배척받은 연유를 말하여 그의 억울함을 밝혔다. 금부가, 모든 일이 기태가 어리석고 실정을 몰랐던 때문이라 하면서 두 사람을 풀어줄 것을 청하여, 태서와 권규가 마침내 풀려났다.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유헌(兪櫶)을 정언으로, 윤지선(尹趾善)을 지평으로, 윤경교(尹敬敎)를 문학으로 삼았다.
11월 22일 을해
이조 판서 조복양이 면직되었다. 복양은 조원양의 일이 있은 뒤에 연이어 소를 올려 체직시켜 줄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부드러운 말로 달래고 허락하지 않았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복양이 당한 일은 염치에 크게 관련됩니다. 본직을 체직시켜 진휼의 정무에 전념하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니, 상이 비로소 허락하였다.
통제사 김경(金鏡)을 남해현에 유배하였다. 김경은 통영에 있으면서 진상할 조총(鳥銃)의 제조를 감독하였는데 상이 정교하지 못하다고 노하여 체포 심문하도록 특명을 내려 충군(充軍)의 율로 다스렸다.
11월 23일 병자
사간 이하, 정언 조근이 아뢰기를,
"과장(科場)의 일은 매우 엄중한 것이어서 조금이라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다면 공정하게 인재를 취한다는 의미가 어디에 있겠습니까. 새로이 급제한 이담명은 시관 이원정의 아들입니다. 담명의 대책에 ‘신복독(臣伏讀)’ 세 자를 쓰지 않았으니 격식에 매우 어긋나고 표식을 한 것이 분명합니다. 시관들이 의문을 품고 결정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 원정은 자신이 등제하였던 글을 가지고 감히 증명하여 자신의 아들을 마침내 합격자 속에 들게 하였습니다. 탁호(拆號)한 뒤에는 ‘시권을 처음 읽었을 때 이미 우리 아이의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물러나 피하고 참여하지 않았다.’고 하였습니다. 만약 원정이 모르고 증거댔다면 혹시 용서할 수도 있지만 이미 알고 피하여 나갔으면서 또 어찌 감히 가깝다는 혐의를 피하지 않고 몸소 당락의 사이에 말을 하였단 말입니까. 격식을 어긴 것이 발각된 후에는 내용의 좋고 나쁨을 논할 수가 없는 것인데 그 아비의 말로 인하여 결정을 하였으니 더욱이 사사롭다는 혐의에 저촉됩니다. 시관 이원정을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시고 급제한 이담명을 합격자 명단에서 제외하소서.
시권에 어인을 찍는 것은 간사한 짓을 막기 위한 방법이기 때문에 한 자 한 획이라도 고친 곳이 있으면 반드시 하나하나 어인을 찍는 것이 실로 바꿀 수 없는 규식입니다. 이번에 전시의 시권 가운데 한두 자 고친 곳에 모두 어인을 찍지 않아서 차비관들로 하여금 그 간세한 술수를 부릴 수 있게 하였으니, 해당 승지를 중하게 추고하소서. 함창 현감 한공필(韓公佖)은 잡기(雜技) 출신으로 본래 백성을 다스리는 임무에는 맞지 않습니다. 그리고 본향의 유생 권황(權愰)이 평소에 문장을 잘한다고 소문이 났었는데 그는 형의 상을 당하여 졸곡(卒哭)도 마치지 않았고 또 유벌(儒罰)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근래에 실시한 향시에서 공필이 그로 하여금 이름을 고치게 하고는 몰래 과거 시험장에 데리고 들어갔다가 여러 선비들에게 발각되었는데도 공필은 태연하고 부끄러운 줄을 몰랐습니다. 이처럼 염치없는 자를 의관의 대열에 있게 할 수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정에서도 이미 알고 있는 일을 과거 시험장의 체모 문제를 칭탁하여 이제 와서 꼭 소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의도가 아름답지 못하며 논리가 서지 않는다. 내 몹시 놀랍다. 추고하는 일은 아뢴 대로 하고, 한공필의 일은 다시 자세하게 살펴서 처리하라."
하였다. 비답이 내려지자 정언 조근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이튿날에는 사간 이하도, 엄한 유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24일 정축
부교리 최후상을 감금 심문하였는데, 패초를 받고도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정언 유헌이, 관직을 띤 채 하향한 잘못을 이유로 인피하였으나, 정원이 올리지 않았다. 유헌이 인피의 초고를 고쳐 써서 정원을 비판하며 아뢰기를,
"조정의 의논이 셋으로 나뉘어 이미 고질화되어 치료할 수가 없는 지경입니다. 셋 이외에도 네 갈래 다섯 갈래로 나뉘어 각기 문호를 세우고 서로 반목하여 나랏일은 아예 잊어버리고 돌보지 않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정치의 근본을 논의해야 할 곳이 단지 문서 장부나 처리하는 장소가 되었고 공정해야 할 두 전조(銓曹)의 인재 선발이 반은 친구가 청탁하는 사사로운 것으로 되어버렸는가 하면 척리(戚里)가 행세하는 조짐이 있고 환관에게 교만한 풍습이 있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인피하는 말을 보니 정말로 가소롭다. 생각이 있다면 상소로써 생각을 말하는 것이 일반적인 일인데, 억지로 부당한 혐의를 끌어다가 쓸데없는 말을 어지럽게 늘어 놓아 정원을 공격 비난하였으니 그 행동이 매우 괴이하고 망령스럽다."
하였다. 유헌의 생각이 난잡스러운 것이 갑자기 인피하는 말에서 나왔는데, 받들어 아뢰지 않은 것에 노하여 오로지 정원을 공격하였으나 말이 귀추가 없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웃었다. 허적이 사람들 앞에서 크게 웃으며 말하기를,
"이 사람의 인피하는 말은 필시 꿈 속에서 나온 것일 것이다."
하였다.
11월 25일 무인
김수항(金壽恒)을 이조 판서로, 조복양(趙復陽)을 예조 판서로, 민희(閔熙)를 공조 판서로, 강백년(姜栢年)을 대사성으로 삼았다.
지평 정적과 집의 익상이, 자신들의 의견이 간원과 달라 처치할 수 없고 또 유헌이 인피하면서 아뢴 말에 공격하는 말이 많았다고 하여 모두 인피하고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11월 26일 기묘
교리 김석주가 사직 상소를 올렸다. 그 대략에,
"신은 외람되게도 대독(對讀)의 끝줄에 서게 되어 처음에는 정례(程例)에 어둡고 또 어묵(語默)을 잘못하였으며 끝내는 사람들의 말이 시끄럽게 일어나고 간관들이 소를 올리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더구나 지금 이담명을 낙방시켜야 한다는 논계는, 첫째는 격식에 위배된다는 것이고 둘째는 표식을 썼다고 했으며 셋째는 그 아비의 한 마디 말에서 결정하였으니 특히 사적인 혐의에 저촉된다는 것입니다. 단지 이 세 가지 문제만으로도 두려움을 금할 수 없을 지경인데 정언 조근의 인피하는 말에서는 또 신 한 사람만을 들어 증인을 삼았는데, 대체로 이것들은 모두 신이 승지 이익과 주고받은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신이 이익에게 말할 때는 ‘담명의 시권을 처음 읽을 때에 이원정이 즉시 일어나 나갔다.’라고 했을 뿐인데, 지금 떠도는 소문을 듣고 낙방시켜야 한다고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원정이 잠깐 피하였다.’고 합니다. 그 잠깐 피하였다는 말은 대개 반드시 원정이 곧 들어와 고과에 참여하였다고 하려는 것입니다. 또 신이 이익에게 말할 때는 ‘담명의 대책문을 다른 곳에 둔 것은 우등이라고 적으려던 것이며 원정이 들어와 이야기할 때에 이르러서는 그 글이 눈앞에 있지 아니한 지 이미 오래였다.’고 하였는데, 지금 떠도는 소문을 듣고 낙방시켜야 한다고 논하는 자들은 반드시 ‘논란하는 때였다.’고 하고, 또 반드시 ‘당락의 관건이 달려 있었다.’고 하고, 또 반드시 ‘격식을 어긴 것의 여부가 정해지지 않았었다.’고 합니다. 이른바 위와 같은 말들은 반드시 담명이 사사로운 과정으로 급제한 자라고 말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 이들이 서둘러 큰 꼬투리로 삼는 것은 원정이 ‘내 우리 아이의 글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 말입니다. 이는 전시의 탁호(拆號)하는 날에 저와 여러 사람이 원정에게 축하하면서 ‘공께서는 어찌 아드님의 글인 것을 알아보셨습니까?’ 하니, 원정이 ‘아들의 글은 아버지가 평상시에 가르치는 것인데 어찌 모를 리가 있겠습니까. 처음에 그대들이 몇 줄 읽었을 때 나는 일어나 나갔습니다.’고 하였습니다. 원정은 자신이 그의 아들의 당락에 간여하지 않았다고 자신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런 말을 어렵지 않게 한 것이었고, 신들 역시 그 아버지의 말이 있어서 그 아들을 뽑은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 말을 듣고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인데, 실로 사람들이 원정을 의심하기를 마치 쇠를 잃은 자가 이웃을 의심하는 것처럼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지금 말하는 자들은 단지 자취에 집착하는 의견만 고수하고 본정은 따져보지도 않은 채 논하고 있으니 신은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사세에 구애되었다는 말은, 생각하건대 신이 원정을 비호하였던 것으로 의심하는 것인데 이는 실로 매우 부끄러운 말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신을 체직하고 신의 죄를 밝게 논하여 사람들의 말에 답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심이 좋지 않음을 내 이미 알고 있다. 너는 사직하지 말고 속히 직무를 살피도록 하라."
하였다.
○己卯/校理金錫冑辭職上疏。 其略曰:
臣猥忝對讀之末列, 始昧於程例, 且失於語默, 終致人言喧沓, 諫臣陳章。 況今李聃命拔榜之啓, 一則曰違格, 一則曰有表, 一則曰取決於其父之一言, 尤涉嫌私。 只此三關節, 已不勝悚慄之至, 而正言趙根之避辭, 又復單擧臣身, 以爲證援, 大抵皆由於臣之與承旨李翊酬酢之語。 臣之語翊則曰: "當聃命試券之初讀也, 李元禎卽起出而已", 今之得於傳聞, 而爲拔榜之論者, 則必曰: "元禎乍避。" 其所謂乍避者, 蓋必欲謂元禎旋入, 而參考者也。 臣之語翊則曰: "聃命之策, 旣置別處, 將書優等, 而及乎元禎入來答話之時, 則其文已不在眼前久矣", 而今之得於傳聞, 而爲拔榜之論者, 則必曰: "橫難之際", 又必曰: "立落之關", 又必曰: "違格之未定。" 其所謂際也、關也、未定也, 蓋必欲謂聃命因私, 而獲第者也。 且其衆所急持, 以爲大欛柄者, 在於元禎吾知吾子之文。 一語此, 則殿試拆號之日, 臣與諸人, 賀元禎, 仍問元禎曰: "令公豈果能猜出令子之作乎?" 元禎曰: "子之文, 父之所常敎也。 夫豈不知。 當初君輩讀過數行, 吾果起出矣。" 元禎旣自恃其無所干預於其子之立落, 故爲此言, 而不以爲難, 臣等亦未嘗有待於其父之言, 而取其子, 故聞此言, 而不見可疑, 實不料今人之疑元禎, 有若亡鐵者之疑隣人也。 今之言者, 徒守執迹之見, 而不爲原情之論, 臣竊以爲太激矣。 其所謂拘於事勢等語意, 蓋疑臣以庇遮元禎, 此實可恥之甚者也。 伏乞遞臣職名, 明議臣罪, 以謝人言。 上答曰: "人心之不淑, 予已知之。 爾其勿辭, 從速察職。"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우의정 홍중보가 상차하기를,
"신이 엊그제 간관들의 상소로 인하여 과거 시험의 일에 대한 전말을 대략 말씀드렸는데, 논의가 더욱 격하게 일어나고 대간이 다투어 아뢰어, 심지어는 격식을 어기고 표식이 있었다는 등의 말로 의논거리를 삼기까지 하였습니다. 이미 격식을 어겼거나 표식을 했다고 한다면 당시의 시관을 모두 논죄해야 옳습니다. 어찌 이원정 한 사람만 파직하자고 청해야겠습니까. 그리고 이른바 ‘독(讀)’ 자는 성책의 위에 쓰기도 하고 성책의 아래에 쓰기도 하여 그 규식이 한결같지 않기 때문에 근래의 과거보는 선비가 보통으로 호용하여 왔습니다. 만약에 담명이 처음으로 이러한 규식을 사용하였다면 규식을 어겼다느니 표식을 하였다느니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날의 시책 가운데 이러한 유형이 또한 많았으므로 의심을 하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표식한 일을 어찌 생각이나 하였겠습니까.
인심이 점차 투박해지고 습속이 불미하여져 길에서 전해들은 말은 믿으면서 시험장에서 목격한 말은 믿지 않으니, 지금의 세도가 또한 어렵다 하겠습니다. 대관이 이미 낙방시켜야 한다고 논계하였으니 시관으로서 직무에 충실하지 못한 죄는 당연히 홀로 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삼가 바라건대, 속히 신의 직명을 파하여 들뜬 의논을 안정시키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의 인심은 어떠하다고 하겠는가. 입참하였던 여러 시험관의 말은 범연히 스스로 변명하는 말이라 하며 믿지를 아니하고, 들은 말을 잘못 전한 사람의 얘기는 믿어 의심치 않아 사람을 들어 증거대지만 그 말이 사실과 틀리다. 남이성의 상소를 풍문이 아니라고 하는 사람을 나는 이해하지 못하겠다. 원정의 부자에게 참으로 사사로이 한 실상이 있다면 논죄함에 있어 어찌 파직하고 낙방시키는 것으로만 책임을 메꾸고 말아서야 되겠는가. 아, 같은 무리끼리 붕당을 맺어 다른 무리를 비난하는 것이 이미 고질처럼 되어 오늘날의 간원의 계사는 사사로움에서 나왔으니 경에게 무슨 손상이 있겠는가. 지나치게 혐의치 말고 체통을 지키도록 하라."
하였다.
○右議政洪重普上箚曰:
臣頃因諫臣之疏, 略陳試事顚末, 而論議愈激, 臺啓竟發, 至以違格有表等語, 爲執言之地。 旣謂之違格有表, 則其時試官, 皆可論罪。 何獨請罷李元禎一人而止乎? 所謂讀字, 或書於聖策之上, 或書於聖策之下, 其規不一, 故近來科儒, 尋常互用。 若使聃命, 創用此規, 則雖謂之違格有表, 容或可也, 而伊日試策中, 類此者亦多, 旣不致疑, 則至於有表, 何嘗念及。 人心漸偸, 習俗不美, 道路傳聞之言, 則信之, 而試所目擊之言, 則不信, 今之世道, 其亦難矣。 臺諫旣以拔榜論啓, 則試官不職之罪, 理難獨免。 伏乞亟罷臣職名, 以定浮議。 上答曰: "今日人心, 可謂何如也。 入參諸考官之言, 則謂之泛然自明而不信, 聞言誤傳之人言, 則信之無疑, 擧人以證, 而其言不實。 二星之疏, 謂非風聞者, 予所未曉也。 元禎父子, 苟有循私之實狀, 則其所論罪, 何可以罷職、拔榜、塞責而止哉。 噫! 黨同伐異, 已成痼弊, 今日諫院之啓, 出於循私, 於卿有何所歉。 毌用過嫌, 以存體例。"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8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11월 27일 경진
대사간 남이성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신은 저번날 여러 시관들이 올린 장계에 대하여 의혹이 없을 수 없습니다. 가까이 과거 시험장에서 지켜야 할 규정이 있는데 이를 버리고 멀리 백년 전 김홍도의 일과 임진년 이전 남근의 일을 인용하여 억지로 예를 삼으려고 하니 될 법이나 한 일입니까."
하고, 또,
"김석주가 상소하여 극력 해명을 하였는데, 김석주의 의도를 생각하건대, 이미 일을 담당하였던 신하로서 또 대죄의 장계에 참여하였으니 지금의 말은 응당 이와 같이 해야 할 것이므로 신은 깊이 따지고 싶지 않습니다. 옥당이 헌관을 처치한 말에 이르러서는 석연치 못한 점이 있습니다. 신의 상소가 막 들어가 비답을 미처 받지 않은 때이므로 옥당의 신료들을 볼 길이 없었는데 어떻게 그것이 떠도는 소문을 근거로 한 잘못이라는 것을 미리 알아서 사실과 어긋난다는 비판을 억지로 뒤집어씌울 수 있단 말입니까? 공론의 마당에 이처럼 남의 말을 견제하는 풍습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이번의 대간의 계사는 단지 낙방시키자고만 청하였으니 대개 말감하자는 주장인데, 비답이 매우 엄하여 아름답지 않다느니 근거가 없다느니 하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신의 상소와 대간의 계사가 비록 자세하고 간략한 차이는 있으나 대의는 같은데 어찌 홀로 편안하게 있을 수 있겠습니까. 또 정언 유헌의 인피한 말을 보니 언관이 입을 닫고 있었던 잘못을 크게 비판하였는데, 말을 하지 않았다는 비난은 사실 신이 받아야 합니다. 신을 체직하라고 명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 인피한 상소를 보니 정말로 애석하다. 대간이 풍문을 듣고 소를 올리는 것이 불가한 것은 아니지만 만약에 그것이 사실과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면 그간의 시비는 자연히 공론에 맡겨야 하는데, 어찌 이처럼 이기려고 애를 쓴단 말인가. 오늘날의 일은 한 마디로 판가름낼 수 있다. 이담명이 지은 글의 형식이 사실 우리 조정의 수백 년 동안에 없었던 일이라면 원정이 사사로움에 따랐든가 그렇지 않았든가를 막론하고 표식을 했다고 할 수 있으니, 엄한 벌을 가하여 장래 과거 시험장의 폐단을 막는 것이 진실로 옳다. 만약에 그렇지 않다면 백년이니 임진이니 하는 말과 깊이 따지고 싶지 않다는 등의 말은 또 무슨 말인가? 빈청에서 대죄하는 장계에서 이미 그대의 상소를 들어 상세하게 설파하였는데, 도리어 어떻게 잘못 전해 들은 것임을 미리 알았겠느냐는 말로 옥당을 비판하였으니 나는 실로 이해하지 못하겠다. 대각의 신하들이 사사로이 이기기에만 힘쓰고 교묘한 말로 잘못을 얼버무려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 몹시 놀랍다.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정원이 비답을 그대로 되돌려 "교묘한 말로 잘못을 얼버무렸다."는 등의 문자를 고쳐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성이 그대로 물러나 물론을 기다렸다.
옥당이 양사를 처치하여 【응교 홍주삼(洪柱三)이 혼자서 처치하였다.】 차자를 올리기를,
"성상의 비답이 엄하여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이 자못 부족하였으나, 선동하는 뜬소문에만 의거해 사심을 썼다고 의심하였으며, 정식(程式)의 유무를 알지 못하고서 격식을 어겼다고 단정하여 심지어는 낙방시키기를 청하였으니 일을 전도시켰습니다. 【조근과 이하를 가리킨 것이다.】 일을 앞에 두고서는 인피하지 않는 것이 분명한 정식인데 억지로 인피하였으니 이미 구차함을 범하였고, 언관의 지위에 있으므로 일에 따라 논할 수 있는데 도리어 다른 사람에게 책임을 씌웠으니 또 대간의 체통을 잃었습니다. 【유헌을 가리킨 것이다.】 낙방시키자는 논의는 실로 근거가 없으며 사람마다 제각기 의견이 있으므로 구차히 동조할 필요가 없습니다. 간관의 인피는 전혀 근거가 없으니 입을 다물고 있었다는 비난도 자신에게 무슨 혐의가 되겠습니까. 【이익상과 정적을 가르킨 것이다.】 처음 말을 전해 듣고 실상이라고 여겼다면 소를 올리는 것이 불가하지는 않으나 격식을 어겼다는 의논이 이미 거짓임이 드러났는데 억지로 사설을 늘어놓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동료의 비난은 논할 필요도 없습니다. 【남이성을 가리킨 것이다.】 조근·이하·유헌·남이성은 체차하고 정적·이익상은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병조 판서 김좌명이, 유헌의 인피하는 말 가운데 ‘두 전조(銓曹)가 사사로이 청탁하는 곳이 되었다.’느니 ‘척리가 용사하는 조짐이 있다.’느니 하는 말이 있었다 하여, 물러나게 하여 달라고 청하였다. 상이 답하기를,
"황당한 망언을 혐의할 것이 있는가."
하였다. 이조 참판 이시술(李時術), 참의 김만기 역시 소를 올리고 사직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1월 30일 계미
되돌아 내려갈 차사원들을 불러 보고 본읍의 폐해에 대하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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