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1일 갑신
심재(沈梓)를 좌부승지로, 김휘(金徽)를 대사간으로,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박지(朴贄)·윤리(尹理)를 정언으로 삼았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기를,
"본도의 전결을 한결같이 최하등에 두어 모두 4두를 거두는 데 넣어 주소서."
하니, 비국이 회계하기를,
"영남의 예에 따라 하상(下上) 이상은 한 등급을 낮추고 하중(下中) 이하는 그대로 본래의 등급을 쓰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2일 을유
사간 이합이 배표(拜表)에 불참하였다는 이유로 추문을 받게 되자 인피하여 체차되었다.
12월 3일 병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불러 보았다. 김좌명이 아뢰기를,
"돈을 쓰는 법은 백성들에게 매우 편리하며 또 군문에서 상을 내리는 것도 이보다 좋은 것이 없습니다. 정초청(精抄廳)의 포자(鋪子)에서 시험삼아 먼저 사용해 보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일년에 한하여, 임시로 삼남의 감영·병영·수영과 통영·제주 등지에서 생신날에 올리는 방물 및 경기·원양(原襄) 등도의 호표피(虎豹皮)와 공조의 단오절 부채 등의 물건을 감하라 명하고 또 상의원 내에서 사용하는 수주(水紬)와 설면자(雪綿子) 값의 쌀 2천 6백 70여 석을 감하였으며, 궐내와 제 상사에 진배하는 잡물도 재량하여 줄인 것이 많았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인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했는데, 상에게 절용할 것과 세자의 가례도 절약하는 쪽으로 힘쓸 것을 권하고 또 이담명을 낙방시키라는 계청을 속히 따르는 것이 옳다고 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수십일 만에 계자를 찍어서 내렸다. 그가 체직을 청했기 때문이다.
12월 4일 정해
김세행(金世行)을 지평으로, 이유(李秞)를 사간으로, 서필원(徐必遠)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필원은 자기 의견을 고집하여 법례에 구애받지 않고 몇 년된 의심스러운 송사를 한마디 말로 결정하기도 하였고 때로는 패소한 자의 문건을 불살라 이치에 맞지 않게 소송을 좋아하는 폐단을 방지하려고 하였다. 그가 한 일들이 대체로 이와 같이 이상하였으나 청탁을 행하지 않고 소송이 적체되지 않았는데 이는 그의 장점이다.
12월 5일 무자
지평 김세행이, 이원정을 파직하고 이담명을 낙방시킬 일을 연계하니, 상이 답하기를,
"근거없는 논의를 주워 모아서 남이성의 말을 도와주려고 하니 내 매우 놀랍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정언 박지가, 이원정을 파직하고 이담명을 낙방시킬 것을 연계하면서 그전의 계사를 조금 고쳤는데 말이 다소 가벼웠다.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그것이 근거없는 말임을 이미 알면서 어조를 고쳤으니, 근거없는 말에서 무엇을 취할 게 있다고 끈질기게 지켜 잇따라 아뢰는가. 내 정말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12월 6일 기축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초복(初覆)하였는데, 대신 이하 입시한 자가 28명이었다. 상이 직접 추안(推案)을 열람하고 제신에게 두루 물어 각기 소견을 말하게 하였다. 이날은 해가 저물어서 파하였다.
이경억을 공조 판서로, 이하를 부교리로, 송준길을 좌참찬으로, 송규렴을 헌납으로 삼았다.
경상도에서 아직 거두지 아니한 공물가(貢物價)에 대해서 특히 흉작이 심한 읍은 3분의 2, 그 다음은 반, 다소 여문 읍은 3분의 1을 감하라고 명하였다. 총 1백 90여 동이었다.
대사간 김휘(金徽)가, 배표에 불참하여 응당 추감을 당해야 하고 또 이원정이 그의 누이 아들이라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정언 박지, 지평 김세행이 엄한 비답을 받았다 하여 인피하였다. 집의 이익상, 지평 정적은 처치에서 체직을 청한 것을 상이 특별히 출사시켰으니 무릅쓰고 있기 어려운 형세라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세행과 박지는 출사시키고 김휘·정적·익상은 체직시키게 하니, 상이 따랐다.
12월 7일 경인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초복(初覆)을 마쳤다. 6일에 다 보지 못하였기 때문이었다.
12월 10일 계사
정지화를 대사헌으로, 이완을 판윤으로, 신명규를 집의로, 조세환(趙世煥)을 장령으로, 이헌을 지평으로, 이익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12월 11일 갑오
전라도 순천의 민가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한 몸에 머리가 둘이었다.
충청도 홍산(鴻山) 등의 읍에 전염병이 심하게 일어나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이때 기근을 치른 끝에 전염병까지 겹쳤으므로 사망하였다는 보고가 거의 없는 날이 없었다.
12월 12일 을미
충청도 비인(庇仁) 등의 읍에 지진이 있었다.
지평 이헌이 삭사(朔射) 추감 문제로 인피하여 체직되었다.
12월 13일 병신
장령 조세환이 소를 올려 이원정 부자의 일을 극력 말하고 아울러 시관들이 해명한 잘못을 배척하고, 또 아뢰기를,
"일찍이 연경(燕京)에서 들은 풍문에 의하면, 이일선(李一善)이 우리 나라에서 돌아와 관중(館中)의 역관에게 ‘이번에 동쪽에 갔다가 우상을 협박하여 많은 은화를 얻어 가지고 왔다.’고 하였다 합니다. 아,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호조의 은을 가지고 일선의 입을 막았으니, 조정에서 대신을 대접하는 것이 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대신의 마음에 편하겠습니까? 저들이 오면 공용의 물건을 가지고 뇌물을 주고 저들이 가고 나면 태연히 말이 없으니, 한 나라의 백성들이 떠드는 말이야 돌아볼 것이 없다고 하더라도 저놈들이 가서 뽐내며 우리 나라를 업신여기는 것이 어찌 마음 아프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상소가 들어가자 상이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근래에 나라의 기강이 해이해지고 인심이 좋지 못하여 붕당의 사사로운 의론이 마구 떠돌아 이기기만을 위해 힘쓰는 폐단이 날로 심하다. 근래에는 이원정의 일로 대신을 공격하여 이미 그 지리함을 견딜 수 없을 지경이었는데, 이번 조세환의 상소는 억양하며 능멸한 외에 또 풍문으로 들은 말을 가지고 크게 비판하고 있으니, 아, 이것이 진실로 무슨 말인가. 우상에게 원한이 쌓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상은 홍중보이다.】 당초 우상이 대죄하면서 진정한 것은 실로 부득이해서였는데, 부정한 무리들이 이것을 가지고 노여움을 쌓아 공격하고 배척할 것을 깊이 생각하여 끝이 없다 보니 한갓 저들의 말이 귀한 줄만 알고 대신을 경멸하면 죄가 된다는 것을 스스로 모르는 것이다. 그 생각이 지극히 가증스러우며 그의 마음을 헤아릴 수 없다. 장령 조세환은 관작을 삭탈하고 궐문 밖으로 쫓아내 앞으로 저들의 말을 빌어 공경을 견제하는 폐단을 막도록 하라."
하였다. 정원이 다시 아뢰어 하교를 거두어 들일 것을 청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다음날 인대했을 때에 정언 박지가 세환을 삭탈하여 내쫓은 것은 대관을 예우하는 도리가 아니라는 이유로 그 명을 환수할 것을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세환은 감히 일선의 말을 빌어다 상소에 인용하였으므로 그 정상이 매우 가증스럽다. 그래서 벌을 준 것이다."
하고, 또 이르기를,
"일선이 왔을 때 우상을 위해 은을 준 일이 뭐가 있길래 세환이 저들의 말을 빌어 대신을 능욕한단 말인가. 마음 쓰는 것이 바르지 않다. 제대로 벌을 준다면 관직을 빼앗아 내보내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은데 정원이 세 번이나 이의의 상소를 올리니 매우 놀랍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설령 국가가 은을 뇌물로 준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일선 역시 반드시 이를 굳게 숨길 것입니다. 어찌 자랑할 리가 있겠습니까. 이는 필시 역관들이 빈말을 지어내 세환을 속인 것입니다."
하고, 부교리 최후상이 아뢰기를,
"세환의 말이 비록 경솔하였다고는 하나 대각의 직책을 갖고 있는데 곧 삭출의 법률을 적용하는 것은 너그럽게 포용하는 도량에 어긋납니다."
하였다. 그러자 상이 소리를 높여 이르기를,
"대간이라는 이름만 가지고 있으면 대단히 간악한 자라도 너그럽게 포용해야 된다는 말인가? 또 국가가 대간을 둔 뜻이 어찌 이처럼 근거없는 말을 만들어 내게 하려고 한 것이겠는가."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 상이 조정 신하들의 붕당을 매우 싫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원정의 일은 오로지 다른 파벌을 공격하는 데서 비롯되었다고 여겨 엄하게 꾸짖는 말이 여러 번 비답에서 나왔었다. 세환의 상소가 마침 이때를 당하였으므로 상의 노여움이 갑자기 나오게 되었고 점점 격화되어서 잡아다 심문하기에 이른 것이었다.12월 14일 정유
상이 희정당에 나아가 서울과 지방의 사형수를 삼복(三覆)하였다. 대신 이하 입시한 자가 모두 30명이었다. 수안(遂安)의 죄수 이지휼(李枝恤)이라는 자는 병신년023) 봄에 그의 처형 김애격(金愛格)의 집에서 물건을 추심하여 돌아오던 길에 도주하였는데, 그의 아비 승립(承立)이 ‘애격이 재리(財利)를 가지고 서로 다투다가 몰래 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는 말로 관에 고발하여 소송을 걸었다. 지휼의 숙부인 호림(豪林)이 또 길가의 시체를 지휼이라고 하고 지휼의 처 선합(先合)이 또 이를 시인하였다. 애격이 해명하지 못하고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었다. 애격의 처 봉생(奉生)이 비명에 간 남편을 애통해 하여 원수를 갚고자 이리저리 종적을 찾기를 14년이나 하다가 비로소 지휼을 찾았다. 지휼과 그의 처 선합은 모두 살인 음모죄로 다스려지게 되어 있었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휼이 무단 도주한 것은 매우 의심스럽고 그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하게 죽은 사람이 다섯 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선합은 애격과 친동기 간인데 다른 사람의 시신을 남편의 시신이라고 시인하였는가 하면 온갖 방법으로 단련하여 마침내 곤장을 맞다가 죽게 하였습니다. 선합의 속셈은 재물을 차지하려는 것으로서 음모 살해하기 위해 못하는 짓이 없었습니다. 인정과 법으로 논해 보건대 절대로 용서할 만한 단서가 없습니다."
하고, 서필원과 정치화가 모두 아뢰기를,
"봉생은 먼 시골의 촌 부인으로 그 절개가 옛사람에 부끄럽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지휼과 선합을 법대로 처단하라고 명하였다. 이날 사형에 처해진 자가 2인, 등급을 감한 자가 6인이었다.
12월 15일 무술
밤에 달무리가 목성을 에워쌌다.
12월 16일 기해
부교리 윤경교, 부수찬 신명규가 상차하여 이원정 부자의 일을 극력 말하고 또 힘써 조세환을 구원하여 삭출의 명을 거두도록 청하니, 상이 진노하여 이르기를,
"세환은 언로에 있는 몸이니 생각하는 것이 있으면 말하면 되는데 지금 그렇지 않고 대신을 공격 배척하면서 이미 저들의 말을 인용하였고 이어 길거리에서 떠도는 말을 끌어다가 마치 이러한 일이 정말로 있어 어지럽게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는 것처럼 하니, 그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 헤아릴 수가 없다. 이는 작은 잘못을 과장하여 대신으로 하여금 그 자리에서 편안하게 있지 못하게 하려는 데 불과한 것이니, 그 계책이 교묘하고 치밀하다고 하겠다. 지금 옥당의 차사를 보니 세환을 죄준 본의는 전부 묻어 둔 채 오직 원정의 일만을 들어 반복 억양하여 세환이 죄를 입은 것이 오로지 여기에서 말미암았다고 여기니, 나는 실로 알지 못하겠다. 비록 붕당의 사사로움에 급급한다고 하여도 어찌 감히 군상을 멸시하고 견제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를 수 있단 말인가."
하고, 마침내 경교와 명규 등을 먼저 파직하고 나중에 추고하도록 명하였다. 상이 다시 하교하기를,
"조세환은 대신을 공격 배척하면서 저들의 말을 빌어왔으므로 심술이 음흉하기 때문에 삭출의 벌을 내린 것이다. 그런데 지금 옥당 차사를 보니 진실로 놀랍다. 만약에 명백하게 징계하지 않으면 장차 이러한 폐단을 막을 수 없을 것이다. 잡아다 추문하여 저들의 말의 실상을 캐내어 징계의 바탕으로 삼으라."
하고, 세환을 옥에 가두게 하였다.
정원이, 세 신하를 벌하라는 전교는 성세의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거두어 들일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듣지 않았다.
상이, 정원이 즉시 전지를 받들지 않고 무엇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행동하였다 하여, 당해 승지를 추고케 하였다.
12월 17일 경자
장령 이하(李夏)가 소를 올려 아뢰기를,
"양사에서 논한 이원정 부자의 일은 여러 이야기가 필요없이 그 귀추를 따져보면 공의를 엄하게 하고 과거를 중시하자는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하고, 또 조세환의 일에 대해 극력 말하였다. 상소가 들어간 지 오래도록 답이 없다가 신하들이 여러 차례 상에게 아뢰자, 비로소 답하기를,
"상소 가운데서 말한 것은 심히 근거가 없는 일이다."
하였다.
○庚子/掌令李夏上疏曰:
兩司所論李元禎父子事, 除却許多說話, 原其歸趣, 不過欲嚴公議也, 重科體也。 又極言趙世煥事。 疏入久不報, 諸臣累白上, 始答曰: "疏中所言, 殊甚無據矣。"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 인사-선발(選拔) / 사법-탄핵(彈劾)
12월 18일 신축
경기에 전염병이 심하게 발생하여 1백 20여 명이 사망하고 소에 전염병이 돌아 죽은 수가 또한 1백 20여 마리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옥당의 차자로 인하여 성밖으로 물러나니, 상이 승지를 보내 유시하여 속히 들어오도록 하였다.
12월 19일 임인
햇무리가 지고 양이가 있었다. 흰 기운이 양이에서 나왔는데, 그 길이가 각각 한 자 남짓 되었으며 한참 있다가 없어졌다.
경상도 사량(蛇粱) 지방의 민가에 불이 나서 집 2백여 채를 태웠는데, 사람도 사상자가 있었다.
12월 20일 계묘
정언 박지가 이하에게 비판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심유가 처치하여, 긴요한 말을 모조리 빼버려 언관의 풍모를 손상하였다 하니, 체직하였다.
김휘(金徽)를 도승지로, 정륜(鄭錀)을 우승지로, 홍처량(洪處亮)을 대사헌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이하(李夏)를 사간으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윤리(尹理)를 지평으로, 이정영(李正英)을 개성 유수로, 이선(李選)을 부수찬으로, 홍주국(洪柱國)을 부응교로, 김덕원(金德遠)을 문학으로, 장선징(張善瀓)을 병조 참판으로, 이정기(李廷夔)를 예조 참판으로, 이휴징(李休徵)을 장령으로, 이후(李煦)를 정언으로, 윤가적(尹嘉績)을 사서로 삼았다.
12월 21일 갑진
집의 심유가 아뢰기를,
"조세환을 삭출하여 체포 심문하라는 명과 윤경교와 신명규 등을 파직 추문하라는 명을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모두 따르지 않고 하교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벌할 것이 없고 물을 것이 없다는 등의 말을 하면서 앞장서서 구하고 있는데 실로 매우 놀랍다."
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차자를 올려 사직하니, 상이 너그럽게 비답하고 아울러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의금부에 윤경교와 신명규를 추고하라는 전지를 내렸다.
12월 22일 을사
부응교 홍주국(洪柱國)이 상차하기를,
"부교리 윤경교와 부수찬 신명규를 파직하여 법을 맡은 관리에게 내리게 한 것과 전 장령 조세환을 삭출하여 잡아다 추문하게 한 명을 거두소서."
하였는데, 상이 모두 따르지 않았다.
○乙巳/副應敎洪柱國上箚:
請還收副校理尹敬敎、副修撰申命圭罷職下吏、前掌令趙世煥削黜拿問之命。 上皆不聽。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83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선발(選拔) / 인사-임면(任免) / 사법-탄핵(彈劾)
집의 심유가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지평 김세행이 처치하여 출사시키게 하였다.
12월 24일 정미
달이 심성좌(心星座)의 큰 별을 범하였다.
상이 양심합에 나아갔는데 약방이 들어와 진찰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난번 차자에서 대략 말씀을 올렸으나 상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부득이 또 말씀드립니다. 조세환이 저들의 허망된 말을 함부로 아뢴 것에 대하여 체포 심문하라는 명까지 있었습니다. 일찍이 인조 때에 조경(趙絅)이 홍서봉(洪瑞鳳)을 묵상(墨相)이라고 비난하였다는 이유로 체포 심문하라는 하교가 있었는데, 당시 조정의 의논이 대간을 체포 심문하는 것은 불가하다고 하여 끝내 체포하지 않았습니다. 지금 성상께서 말의 근원을 규명하고자 하심은 생각이 있어서이겠지만 잡아다 추문하는 것은 온당하지 않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이 일은 우상을 비난하려는데 그 단서를 얻지 못하자 먼저 일선의 말을 하고 이어서 우리 나라 민간의 의논을 내세웠으니 매우 불미스럽다. 저들의 말은 세환이 필시 직접 일선에게서 듣지 않았을 것이며 일행 제신 모두가 들은 적이 없다. 그런데 오랑캐의 말을 빌어 공격할 계책으로 삼았으니 그 마음이 어찌 금수와 다르겠는가. 이후로 만약에 거짓말을 지어내 남을 곤경에 빠뜨리는 자가 있게 되면 그 폐단이 어떠하겠는가?"
하니, 김좌명이 아뢰기를,
"상께서 이미 통촉하셔서 이러한 처치를 하셨는데 어찌 다시 세환을 본받는 자가 있겠습니까."
하고, 치화가 또 참작하여 벌을 시행할 것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경들의 차자가 이와 같았기 때문에 헤아려 처리하라고 비답한 것이다."
하였다.
우의정 홍중보가 다시 상차하여 사직하고, 또 옥당의 두 신하를 파직하여 의금부에서 심문하는 것과 조세환을 체포 심문하라는 명을 거두도록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세환 등이 벌을 받는 것은 모두 스스로 지은 일에서 연유한 것인데 경에게 무슨 혐의가 있단 말인가. 조정에서 처치하는 것이 어찌 다만 경의 처지만을 위해서이겠는가. 실로 앞으로의 무궁한 폐단을 염려해서이다. 경은 안심하고 속히 들어오도록 하라."
하고, 이어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12월 25일 무신
평안도에서 이번 달 4일과 6일에 천둥이 쳤다.
전라도 진산군 북방에 지진이 있었는데 천둥 소리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소리가 매우 흉하였다.
황해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청하기를,
"도내 전세의 쌀과 콩을 도저히 거두어 올릴 길이 없으니, 해조가 강도(江都)에서 그 대용을 취하여 쓰고 본도로 하여금 가을에 강도에 비납케 하여 주소서. 또 곡식을 얻어 진휼의 자본으로 쓰기를 청합니다."
하였는데, 진휼청에서 회계하기를,
"그 말대로 하소서. 그리고 진휼 자금은 여러 가지 관향 환자곡 4천 석을 지급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2월 26일 기유
세자빈을 세 번 간택한 후에 상이 빈청에 하교하기를,
"지금 참의 김만기 집 아이를 빈으로 정하려 하는데 어떠한가?"
하니, 좌의정 허적, 행 판중추부사 정치화, 예조 판서 조복양, 참판 이정기, 참의 홍만용이 아뢰기를,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아보건대 참으로 신민의 소망에 흡족하고 실로 종묘 사직의 무한한 복입니다. 신들은 큰 기쁨을 금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세자빈이 정하여지자 그날로 궁궐에서 나와 어의동(於義洞) 별궁으로 나아갔다.
12월 27일 경술
민정중(閔鼎重)을 좌참찬으로, 이은상(李殷相)을 호조 참판으로, 이합을 교리로, 윤가적(尹嘉績)을 정언으로, 김만중(金萬重)을 수찬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설서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은상은 일찍이 탐욕 비루하여 거듭 대간의 탄핵을 받았는데 오래지 않아 거두어 서용하여 다시 조정에 서게 하니 식자가 한심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유악의 아비 뇌경(雷卿)이 소현 세자를 따라 심양에 들어갔다가 화를 만나 오랑캐에게 해를 당하였는데 유악이 오랑캐의 사신이 왔을 때 말[馬]을 들이고 그 값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바치고 아비를 잊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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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은상은 일찍이 탐욕 비루하여 거듭 대간의 탄핵을 받았는데 오래지 않아 거두어 서용하여 다시 조정에 서게 하니 식자가 한심하게 생각하였다. 그리고 유악의 아비 뇌경(雷卿)이 소현 세자를 따라 심양에 들어갔다가 화를 만나 오랑캐에게 해를 당하였는데 유악이 오랑캐의 사신이 왔을 때 말[馬]을 들이고 그 값을 받았으므로 사람들이 모두 침을 뱉고 욕하였는가 하면 심지어는 말을 바치고 아비를 잊었다는 비난이 있었다.
○庚戌/以閔鼎重爲左參贊, 李殷相爲戶曹參判, 李柙爲校理, 尹嘉績爲正言, 金萬重爲修撰, 鄭維岳爲說書。
【史臣曰: "殷相曾以貪鄙, 重被臺彈, 未久收敍, 復齒朝端, 識者寒心。 維岳之父雷卿, 從昭顯世子, 入瀋陽遭禍變, 爲胡人所害, 維岳嘗於胡差之來, 納馬而受其價, 人皆唾罵, 至有納馬忘父之譏。"】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4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제주의 세 읍이 태풍의 피해를 심하게 입어 기근의 참상이 다른 곳에 비해 특히 심하였다. 조정에서 전라도로 하여금 미조(米租) 5천 석을 이전하여 구제케 하고 또 각종 씨앗 1천 5백 석을 주었다.
평안도 강계(江界)의 토병(土兵) 최연(崔連)이 어떤 일로 나갔다가 집으로 돌아 오면서 집 앞의 강을 건너다 얼음이 엷어 빠지자, 그의 처 계생(界生)이 손을 뻗쳐 구하려고 하다가 함께 익사하였다. 이를 보고하자 특별히 명하여 정문(旌門)을 내렸다.
12월 28일 신해
상이 양심합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제신을 불러 보았다. 좌상 허적이 아뢰기를,
"진휼청의 당상관이 지금 모두 입시하였으니 각자의 생각을 말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예조 판서 조복양, 좌참찬 민정중이 아뢰기를,
"삼남의 전세는 지금 거두어 바치기 어려우니 감면하심이 마땅합니다. 관서의 쌀을 진휼에 옮겨 쓰소서."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6도의 전세를 감면한 후에 관서의 쌀을 옮겨 쓴다면 후에 무엇으로 그 수를 채우겠습니까. 전세는 전부 감할 수 없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권대운이 아뢰기를,
"정중이 아뢴 것은 백성들의 진휼을 위한 것이나 경비를 장차 무엇으로 감당하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이 아뢰기를,
"금년의 수미 상납은 예년에 비하여 10분의 1입니다. 여기에서 또 감면한다면 국가의 비용은 의지할 곳이 없게 됩니다. 전세는 절대로 감할 수 없고 관서의 곡식을 가져오는 것이 옳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년의 풍흉은 비록 알 수 없으나 진휼청은 다른 곡식을 옮겨 쓰라. 전세는 전부 감하기는 어려우니, 내 생각으로는 올릴 수 있는 것은 올리고 올릴 수 없는 것은 올리지 말게 하되 참작하여 받아들여 본도에 두게 하여 내년 봄에 가져다 쓸 수 있는 바탕으로 하는 것이 실질적인 혜택이 될 듯하다."
하였다. 대운이 아뢰기를,
"성상의 분부가 진실로 옳습니다. 마땅히 받아서 저장해 두고 훗날의 쓰임에 대비해야 되겠습니다만, 미리 감면한다는 의논이 있으면 외방의 사람들이 관망하고 납입하지 않게 될 폐단이 없지 않을 것입니다."
하니, 조복양이 나아가 아뢰기를,
"기근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만 어찌 금년처럼 심한 때가 있었겠습니까. 외방에서 굶주리고 얼어 죽는 상황이 끊임이 없으며 또 추위에 얼어 죽는 것으로는 감옥보다 심한 곳이 없습니다. 중죄수가 아니라면 어찌 한결같이 지체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이제 새해가 다가오는데 각도에 특별히 하유하는 글을 내리시면 틀림없이 크게 생각하는 일이 있게 될 것입니다. 서울 옥중의 죄수 가운데 심하지 않은 자도 역시 속히 처결하는 것이 옳습니다."
하자, 상이 이르기를,
"정원으로 하여금 문안을 만들어 각도에 유시하게 하라."
하였다.
팔도 감사와 개성부·강화부의 유수에게 유시를 내렸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러한 큰 흉년을 만나 불쌍한 우리 백성들이 모두 구렁텅이에 떨어지게 되었으니, 나의 마음이 슬퍼 밥상을 앞에 두고도 먹을 것을 잊으면서 구제의 방법을 한껏 써보지 않은 것이 없다. 이제 해가 바뀌려는데 엄한 추위는 풀리지 않아 언 감옥의 적체된 죄수가 더욱 염려된다. 나의 지극한 뜻을 본받아 착실하게 진휼하는 외에 죄수 가운데 죄가 무거운 자는 계문하여 재가를 받고 가벼운 자는 바로 소결하되, 속히 거행하여 감옥에서 적체되는 근심이 없게 하라."
사관(史官)을 보내 행 판중추부사 송시열, 세자 찬선 송준길·이유태에게 유시하여, 올라와 당시의 환난을 함께 처리하도록 하였다. 이는 조복양의 말에 따른 것이었다.
황해도에 은율현(殷栗縣)을 다시 두었다. 현이 혁폐되어 그 기한에 차지 않았으나 흉년에 진휼을 베푸는 데 장애가 많았으므로 백성들이 원하여 이 명을 내렸다.
조정 신하로 휴가를 받아 하향한 자 가운데 대신 이외는 공궤하지 말라고 하였다. 김좌명의 말에 따른 것이다.
12월 29일 임자
충청도 임천(林川) 등의 읍에 전염병으로 죽은 자가 2백 20여 명이었다.
경상도에 소의 전염병이 심하여 전후로 죽은 수가 3백여 두에 이르렀다.
청주 목사 남구만(南九萬)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전세 및 대동미 여분을 받아 두었다가 진휼의 자금으로 충당하고, 속오군의 복호 문제는 그대로 주어서 그들의 마음을 잃지 말고, 훈국 별대(訓局別隊)의 보인에게 미포를 징수하여 올리라는 명을 거두어 정지하셔서 그들에게 신의를 잃지 마소서."
○淸州牧使南九萬上疏略曰:
田稅及大同餘米, 願捧留以充賑資, 束伍復戶, 願仍給毌失其心, 訓局別隊保人處, 徵捧米布之令, 願還停毌失其信。 上下其疏于備局議啓, 束伍給復一事外, 皆從其言。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卷之十八終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4면
【분류】재정-역(役)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군사-군역(軍役) /
上下其疏于備局議啓, 束伍給復一事外, 皆從其言。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卷之十八終
【태백산사고본】 18책 18권 56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4면
【분류】재정-역(役) / 재정-전세(田稅) / 재정-공물(貢物) / 군사-군역(軍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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