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9권, 현종 12년 1671년 2월

싸라리리 2025. 12. 16. 1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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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 1일 계미

강화부에서 해일이 있었는데 조수가 들이치는 것이 석 자쯤이나 되기도 하였고 각처의 둑도 많이 무너졌다.

 

2월 2일 갑신

상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왕대비와 세자도 같은 날에 옮겼다.

 

밤에 유성이 북극성 위에서 나왔는데 색깔은 하얗고 빛이 땅을 비추었다.

 

집의 이합, 장령 김상, 지평 윤계가 아뢰기를,
"접때 경릉 참봉(敬陵參奉)이,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을 능침의 안산 금지(禁地)에다 묻은 일을 논하여 예조에 보고하였으므로 예조가 낭청을 시켜 부정을 적발하게 하였더니, 낭관이 본릉의 참봉을 대동하고 부정을 조사한 뒤에 형상을 그려 왔습니다. 그런데 그 전의 그림을 무시하고 고쳐 그려서 바쳤다는 말이 자자하게 퍼졌으므로, 신이 참봉이 보고한 서장과 낭관이 그린 산의 그림을 가져다 보니 차이가 많이 있었습니다. 무릇 능침에 관계되는 일은 더없이 엄하고 중대하므로 실상을 명백히 살펴서 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당해 참봉·낭청을 모두 나문하여 사실을 밝혀내고 따로 예관을 보내어 다시 금지의 한계를 살피게 하고 또한 본도의 도사를 시켜 지방관과 함께 그 묻은 곳을 조사하게 하여 법대로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3일 을유

간원이 전에 아뢰던 시관 강백년(姜栢年) 이하를 파직하는 일을 정계하였다.

 

경상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2만 3천 5백 53인이고 함경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4천 8백 69인이었다.

 

전라도에서 정월 8일 이후로 굶주린 백성 중에서 얼고 굶어 죽은 자가 2백 39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52인이었다.

 

제주에서 지난 11월 2일에 큰 바람과 큰 눈이 한꺼번에 사납게 일어 쌓인 눈이 한 길이나 되었다. 산에 올라가 열매를 줍던 자가 미처 집에 돌아오지 못하고 길이 막혀 얼어 죽은 자가 91인이었으며, 기근 중에 여역이 치열하게 발생하여 죽은 자도 많았다.

 

예조 좌랑        이일정(李一井), 경릉 참봉(敬陵參奉)        심시한(沈始漢)을 의금부에 하옥하였는데, 대간의 계사에 따른 것이다.

 

2월 4일 병술

대왕 대비와 중전이 경덕궁(慶德宮)으로 거처를 옮겼다.

 

대사헌 이정기, 장령 김상, 지평 윤계가 아뢰기를,
"양산 군수(梁山郡守) 안후창(安後昌)은 전에 보령 현감(保寧縣監)으로 있을 때, 김해(金海)·영암(靈巖)의 세금을 운반하는 배가 본읍의 포구에 와서 물이 얕아 기울어졌으나 파손된 노가 하나도 없었고 실은 물건도 본디 가라앉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바다 가운데에서 뒤집혔다고 도신(道臣)에게 허위로 보고하였습니다. 도신이 이를 조사하여 실상을 알아 낸 다음 계문하여 죄주기를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하옥된 뒤에 교묘하게 꾸며서 도배(徒配)만 당하였습니다. 세금을 운반하는 배가 처음 닿았을 때에 뱃사람을 공갈 협박하여 달아나 흩어지게 하고는 간사한 서리(胥吏)와 짜고 몰래 1천여 석의 나라 곡식을 훔쳤는데 마침내 둔 곳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보령 백성에게 해마다 거두고 있지만 아직도 액수를 맞추지 못하고 있으므로 온 고을 사람들이 그의 살을 씹어 먹으려 하니, 지나간 일이라 하여 버려둘 수 없습니다. 그를 나문하고 또한 도신을 시켜 엄히 사실을 조사하여 율문대로 처단하게 하소서.
평안 병사 성익(成釴)은 전에 황해 병사로 있었을 때 정방 산성(正方山城)에서 기른 나무가 성첩(城堞)에 바싹 붙어 있다고 핑계대고 마음대로 베어 팔아서 이익을 꾀하였습니다. 그때 산성 별장은 죄를 정하기까지 하였으나 성익만 홀로 면하였으니, 어찌 범죄의 우두머리는 문책하지 않고 그의 명령을 이행한 자만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평안 병사에 제수된 뒤에는 묘당에서 분부하여 벽돌을 많이 장만하여 불시의 수요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성익이 이를 빙자하여 재력(材力)을 모아 사사로이 기와를 굽고 은화를 많이 받아서 죄다 사사로운 용도에 돌려 쓰고 벽돌에 있어서는 약간으로 책임만 메꾸니, 그 간사하고 방자한 것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없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지난 겨울에 사은사로 연경(燕京)에 들어갈 때 안주(安州)에 들러 장막을 요구하였는데 반드시 남색 명주로 만들게 하였습니다. 병사가 처음에는 어렵게 여겼으나 마침내 그의 청에 따라 만들어서 뒤미처 보냈습니다. 이처럼 피폐한 때에 값이 비싼 물건을 억지로 정하여 요구한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고 명주 장막은 상방(尙方)에도 없는 것인데, 상사(上使)가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라 하더라도 어찌 감히 이토록 참람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주고받은 자가 모두 죄를 면할 수 없으니, 상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과 평안 병사 성익을 모두 파직하도록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좌도(左道)의 해방(海防)에 종사하는 군졸에게 이미 번포(番布)를 줄였으므로 의지해 살아갈 길이 없어서 구덩이에 굴러 죽을 걱정이 조석에 닥쳤다 하여 월과미(月課米)를 덜어내 나누어 주어 진구하게 하기를 청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여 월과미 5백 석을 덜어내어 영하(營下)와 소속의 열 군데 진(鎭)에 고루 나누어 주어 죽을 쑤어 구제하게 하였다.

 

2월 5일 정해

평안도의 굶주린 백성이 2만 1천 6백 48인이었다.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상차하여 구황할 방책을 진달하며 아뢰기를,
"주공(周公)의 완형(緩刑)을 써서 그 경중에 따라 대신에게 명하여 처치하게 하면 해묵은 억울한 원분(冤氛)003)  을 사라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조세환(趙世煥)과 윤경교(尹敬敎)·신명규(申命圭) 등을 힘써 구원하니, 상이 답하기를,
"조세환은 하는 일이 변변치 못한데 오히려 강개하다고 하였다. 사실을 조사하여 처결하지 않는다면 장차 불량배의 구실거리가 될 것이니, 어찌 경솔하게 처결할 수 있겠는가. 금추(禁推)에 관한 일은 그 방자한 버릇을 진정 매우 미워하기 때문이다. 완형에 관한 일은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領府事李景奭上箚陳救荒之策, 且曰:
若用周公之緩刑,隨其輕重, 命大臣處之, 則庶幾消經年鬱抑之冤氣矣。 仍力救趙世煥及尹敬敎、申命圭等。            上答曰: "趙世煥作事無狀, 而猶謂之慷慨。 若不覈實而處決, 必將爲不良輩藉口之資, 其可率爾處決哉。 禁推事, 心甚痛惡其縱恣之習也。 緩刑事, 當與大臣議而處之。" 遣史官傳諭。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7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8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사법-행형(行刑)

 

2월 6일 무자

간원이 박천영(朴千榮)의 일을 연계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양산 군수(梁山郡守) 안후창(安後昌)을 나문하는 일을 연계하니, 상이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전라도 나주(羅州)의 사인(士人) 임상유(林相儒) 등이 본부에 정장(呈狀)하기를 ‘본부 비금도(飛禽島)에 여러 대 동안 전해 온 전장(田庄)을 궁가(宮家)에게 빼앗겼다.’고 하였는데, 대개 궁가가 해숭위(海嵩尉)의 집에서 사들인 것으로서 내사(內司)에서 측량할 때에 백성의 전토가 그 가운데에 섞여 들어갔다고 합니다. 궁가에서 일보는 사람이 제 능력을 뽐내려고 많은 것을 탐내는 일이 있으면 먼 지방 백성이 국가를 원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본도를 시켜 십분 명백히 살펴서 공정하게 가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경기에서 정월 보름 이후 돌림병으로 죽은 자가 1백여 인이었다.

 

경상 감사 민시중이 치계하기를,
"진휼한 곡식을 장만할 계책이 없으니, 태복·훈국·호조·상평청 등 각 아문의 소관 곡물을 전량 빌려 쓰게 하고 가을이 되거든 도로 받아서 갚게 하소서."
하였는데, 진청(賑廳)의 회계에 따라 태복 이외 각 아문의 잡곡을 모두 윤허하였다.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치계하여 소금을 얻어서 죽을 쑤어 백성을 구제하는 일을 돕기를 바랐는데, 진청이 관향염(管餉鹽) 50석을 옮겨 주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때 중외의 기근이 매우 심하여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났으므로 무릇 곡식을 얻을 방도에 대해 여러모로 힘을 기울였다. 이에 노직(老職)으로 가선(嘉善)·통정(通政)과, 증직(贈職)으로 지사(知事)·우윤(右尹)·판결사(判決事)·통례(通禮)·좌랑(佐郞)과, 영직(影職)으로 판관(判官)·주부(主簿)와 허통 교생(許通校生)·면강(免講)·보충대(補充隊) 등까지의 첩문(帖文)을 각도에 만들어 보내어 곡식을 모으게 하였다.

 

2월 7일 기축

이만영(李晩榮)을 예조 판서로 삼았다.

 

대사헌 이정기(李廷夔), 지평 윤계(尹堦)가 상차하여 진구할 방책을 아뢰었다. 전세를 탕감하여 민정을 위로하고 어사를 보내어 진휼의 정사를 살피고 마른 양식을 헤아려 지급하여 농사를 폐지하지 않게 하기를 청한 것이었는데, 상이 답하였다.
"아, 지난해와 같은 흉년은 실로 예전에도 없었다. 불쌍한 우리 백성을 장차 어찌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절로 기가 막히고 가슴이 아프다. 이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절실하므로 매우 감탄하였다. 묘당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훈련 도감이 1천여 석의 곡물을 내다 팔고 어영청이 판 것도 수백 석이 넘는데 혹 아문 소속에게 주거나 혹 이익을 꾀하는 사람에게 주기도 하여 사사로이 매매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고 있으며, 수어청(守禦廳)·총융청(摠戎廳) 및 사복시도 곡물을 판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사한 무리가 교묘하게 정장(呈狀)하여 서울과 지방에 유치된 곡물을 내어가고자 꾀하여 한 사람이 많게는 수백 석을 받기도 하고 혹 1천 석에 가까운 자도 있다 합니다. 각 아문을 시켜 많이 받은 자를 엄히 살펴서 무겁게 죄주게 하고, 이 뒤로 파는 곡물이 있으면 모두 진휼청의 예(例)에 따라서 하여 서울 백성에게 혜택을 주는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각 아문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2월 9일 신묘

밤에 달무리가 목성(木星)을 둘렀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헌부의 차자를 좌의정 허적(許積)에게 내어 보이자 허적이 읽고 나서 아뢰기를,
"백성의 일이 급급하여 이 차자가 망극한 뜻에서 나왔습니다마는, 이것은 일을 경험해 본 자의 말이 아닙니다.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는 일은 시행할 수 없을 듯하고 어사는 위에서 참작하여 처치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겠다고 하였다. 허적이 또 아뢰기를,
"윤경교(尹敬敎) 등이 명을 기다린 지 이미 30여 일이 지났으니, 이것은 실로 하옥한 것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신은 처음부터 그 차자를 그르게 여겼으므로 본디 해명하여 줄 생각이 없습니다마는, 일이 확대되어 이 지경에까지 이르렀으니 성상의 덕에 흠이 될까 염려합니다."
하니, 상이 곧 정원에 명하여 그 전지를 다시 품신하게 하였다. 교리 김만중(金萬重)이 나아가 아뢰기를,
"조세환(趙世煥)이 허황한 이야기를 상소 가운데에 끼워 넣은 것은 참으로 터무니 없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끝까지 캐묻더라도 보탬은 없고 사체만 손상할 것으로 여깁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그에 해당된 법으로 죄주고 빨리 끝을 맺는 것만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의금부를 시켜 정배하게 하라."
하였다. 김만중이 다시 아뢰기를,
"당초의 삭출(削黜)하라는 명을 뭇 신하가 다 지나치게 여겼는데, 이번 정배하는 율(律)은 다시 한층 더한 것이니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전대로 삭출로 시행하고 뒷날 수용(收用)하느냐 수용하지 않느냐에 대해서는 위에서 헤아려 처치하시는 것이 옳겠습니다."
하니, 상이 전대로 삭출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대간이, 각 아문에서 곡물을 판 일에 대해 대단히 말하고들 있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것은 군향(軍餉)이므로 계품하고 팔아야 할 듯한데 그런 일이 없었으니 그 까닭을 모르겠다. 각 아문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는데, 어영청은 이미 써서 들였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저자 사람 중에 많이 받은 자가 있으면 형조를 시켜 사실을 조사하여 다스리게 하는 것이 옳을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형조가 어떻게 조사하겠는가. 사체에 손상이 있을 것이다."
하였다.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신이 겸직한 수어청은 별로 판 곡물이 없는데 또한 대간의 계사 가운데에 들어 있었습니다. 원래 수량의 지출과 수입을 별단에 써 아뢰겠습니다."
하고,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대신은 조사할 것을 말하고 있으나, 조사할 때에는 반드시 저자의 사람을 불러서 물어봐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는 실로 사체에 손상이 있고 적발될 리도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그렇겠다고 하였다. 이에 조사하여 다스리는 일이 중지되었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돈유하였다.

 

2월 10일 임진

이합(李柙)을 수찬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윤리(尹理)를 장령으로 삼았다.

 

이때 국가의 재정이 바닥이 났다. 호조의 삼창(三倉)에 저축된 것이 4만 석도 채 못되어 두어 달도 버틸 수가 없었으므로 강도(江都)의 군향미(軍餉米) 3만 석과 관서(關西)의 쌀 3만 9천 5백 석을 가져다 경비를 채우고, 또 강도의 쌀 2만 4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5백 석을 가져오고 또 어영청의 보미(保米) 5천 석을 대여하여 진휼의 밑거리를 채웠다.

 

서울의 기근이 날로 심하여 한 섬의 쌀 값이 은으로 3냥이었으므로 진휼청이 쌀 8천 3백여석을 내되 한 섬의 값을 1냥 8전으로 정하고 또 목포(木布)로 계산하여 바치는 것을 허용하여 백성을 편리하게 하되 한 사람이 1냥을 넘지 못하게 하여 때를 타서 이익을 노리는 폐단을 막았다. 또 쌀 1만 2천 8백여 석을 내어 서울 백성에게 대여하되 호수(戶數)를 계산하고 등급을 나누어 주었다. 대호(大戶)는 1석, 중호는 10두, 소호는 5두, 독호(獨戶)는 2두였고, 봉료(俸料)를 받는 군사는 대호·중호·소호를 막론하고 모두 3두를 주었다. 이 때문에 굶주리는 자가 자못 구제되었다.

 

2월 11일 계사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전에 아뢰었던 일을 연이어 아뢰기를,
"조세환(趙世煥)이 한 말이 경망하기는 하였으나 직책은 대간입니다. 경망한 말은 용서할 수 있고 대간은 죄주어서는 안 됩니다. 더구나 그 말이 잘못 들어 했다는 것과 그 일이 사실이 아니었다는 것을 반드시 죄를 주어야만 밝힐 수 있겠습니까."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하교하기를,
"대간이 죄가 없다면 그만이겠으나, 죄가 있는데도 죄주지 않는다는 것은 실로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충청도 옥천(沃川) 등 고을에서 굶주리는 백성으로서 죽은 자가 69인이었고 여역(癘疫)도 점점 치열해졌다.

 

2월 13일 을미

평안도는 여역으로 죽은 자가 5십여 인이었고, 경상도는 전후의 굶주린 백성이 3만 8천 9백 67인이었는데, 굶주려서 죽거나 병이 들어서 죽은 자가 3백여 인이었다.

 

2월 14일 병신

정지화(鄭知和)를 대사헌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15일 정유

월식이 있었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기를,
"지금 섬이 온통 굶주리고 있는 백성이며, 얼거나 굶주리거나 여역으로 죽은 자가 이미 4백 37인에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이제부터는 공사간의 곡식이 다 비어서 구제하여 살릴 방책이 없으니 이전하는 미곡이 때에 미쳐 빨리 들어오지 않으면 수만의 죽어가는 목숨이 장차 눈앞에서 끊어지게 되었습니다. 매우 근심되고 몹시 답답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제주는 멀리 떨어져 있는 섬인데다가 기근이 특히 심하여 민간의 형세가 날로 더욱 위급해지고 있었다. 노정이 조천관(朝天館)에 나와 곡물을 날라 오는 배를 기다렸고 굶주린 백성도 뒤를 따랐다. 배 하나가 멀리서 가까이 오면 급히 가서 보고 곡물을 실은 배가 아니라 노정이 통곡하면서 돌아오자 굶주린 백성도 한꺼번에 울부짖었다. 듣는 자가 모두 슬퍼하였다.

 

2월 16일 무술

경상도에 2월 초부터 비가 내려 열흘 동안 개지 않자, 강물이 불어 넘쳐서 강가 일대의 밀보리가 모두 침수되었다.

 

2월 17일 기해

장령 김상(金鋿)이, 전에 평안 병사 성익(成釴)을 나문하기를 청하는 논의를 제기했는데, 상신 허적(許積)이 탑전에서 정방 산성(正方山城)에서 나무를 벤 것은 별장(別將)에게 죄가 있고 안주(安州)에서 기와를 구운 것도 묘당이 분부하였기 때문이었다."는 말을 하였다는 것을 듣고는, 드디어 일을 잘 살피지 못하고 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갈렸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에서 정월 스무날 이후 혹은 2월 초부터 모두 죽을 쑤어 구휼하고 있습니다만 얼굴이 누렇게 뜬 무리는 죽을 먹여도 구제되지 않아 진휼하는 곳에서 잇따라 죽고 있습니다. 2월 초에 날마다 크게 바람이 불고 눈이 내리자 굶주린 백성이 모여서 추위와 굶주림에 울부짖고 있는데 그 소리가 몇 리까지 들리고 있으니, 비참한 꼴을 말하자니 목이 메입니다. 죽을 먹는 수는 큰 고을이면 1만여 명이고 작은 고을도 수천 명에 밑돌지 않으니, 한 도에서 받아들인 것을 다 쓰더라도 결코 보리가 나기 전까지 이어서 진구할 수 없습니다. 민간의 형세를 상세히 살펴보면 종자를 비축하여 둔 집이 열 가운데에서 한둘도 안 되고 모두 관가의 대출을 바라고 있는데, 약간 받아 들여 논 것도 종자로 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것은 조정에 보고하더라도 어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통곡도 부족합니다."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치계하여 종자로 쓸 벼와 진구에 쓸 곡물을 얻어 각 고을에 옮겨 보내기를 청하니, 조정에서 강도(江都)의 벼 7천 6백 석과 쌀 8천 석 및 남한(南漢)의 쌀 6천 석을 획급(劃給)하였다. 또 그 계청(啓請)에 따라 남한의 쌀 8천 석과 강도의 쌀 6천 석을 더 주어 백성을 진구하게 하였다.

 

2월 18일 경자

밤에 달이 저수(氐宿)의 둘째 별을 범하였다.

 

간원이 연계하여 조세환(趙世煥)을 삭출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으니, 이때에 이르러 정계하였다.

 

전라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열흘 동안에 80여 인이었는데, 휼전을 베풀라고 명하였다.

 

원양도에 죽을 받아 먹으러 나온 기민이 9천 4백 90명이었으며 여역으로 인해 죽은 자가 1백 19명이었다.

 

함경도 회령(會寧)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5인이었고 강화부(江華府)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50인이었다.

 

충청도 보은현(報恩縣)의 향교에서 증자(曾子)의 위판을 잃어버렸다가 하루가 지나서 도로 찾았다. 이 일을 아뢰자, 태상(太常)에 명하여 위판을 다시 만들어 보내게 하고 본도를 시켜 그날 수직한 교생(校生)과 전복(典僕)의 죄를 다스리게 하였다. 근래 인심이 거칠고 사나워져서 수령을 원망하는 간사한 백성과, 교생에게 죄를 받은 전복이 번번이 이러한 변을 일으키니, 어찌 비통하지 않겠는가.

 

2월 19일 신축

이합(李柙)을 집의로, 윤원거(尹元擧)를 장령으로 삼았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여 낙강(洛江) 일대의 조금 곡식이 잘된 고을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게 재해를 입은 면(面)은 그 부역을 감면해 주자고 청하였다. 이때 다른 도에서도 이런 청이 있었으나 조정에서 구별하여 부역을 감면하는 것은 일이 불편하다 하여 다 따르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낙강 일대의 재해를 입은 것이 가장 심하다 하여 특별히 허가하였다.

 

경상도 안동(安東)·경주(慶州) 두 부(府)의 판관을 임시로 폐지하였는데, 흉년이 들었기 때문이다.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의 장지(葬地)의 일 때문에 예조 참판 이만영(李晩榮)을 보내어 경릉(敬陵) 안산 금지(禁地)의 한계를 살펴보게 하였는데, 대간의 계사에 따른 것이다.

 

2월 20일 임인

경기에서 정월 16일 이후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이 10만 67인이었다.

 

동지사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부사 정익(鄭榏) 등이 돌아오다가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러 치계하였다.
"정월 초하룻날 청나라 황제가 성황사(城隍祠)에 가서 분향하려 할 때에 동서반이 오문(午門) 밖에 늘어 섰는데 신들도 하반(賀班)에 참여하였습니다. 예(禮)가 끝나자 도로 들어가고 뭇 관원들은 다 파하여 나갔습니다. 신들도 나오려고 하는데 예부랑(禮部郞) 한 사람이 황제의 명으로 신들을 부르기에 서둘러 건청궁(乾淸宮)으로 들어갔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문의 한 중앙 평상에 앉아서 신들을 계단으로 올라오라고 명하였습니다. 평상 앞에서 두어 걸음 떨어진 곳에 나아가 꿇어앉으니, 청나라 황제가 먼저 신 남의 나이를 묻고 다음에 국왕과 몇 촌의 친척인지를 묻고 다음에 길을 떠날 날짜를 묻고 다음에 글을 읽었는지를 묻고 다음에 이름 자를 묻고 또 신 정익의 성명을 물었는데 묻는 대로 대답하였습니다. 청나라 황제가 또 말하기를 ‘너희 나라 백성이 빈궁하여 살아갈 길이 없어서 다 굶어 죽게 되었는데 이것은 신하가 강한 소치라고 한다. 돌아가서 이 말을 국왕에게 전하라.’ 하기에, 신들이 대답하기를 ‘어찌 신하가 강하여 이렇게 백성이 굶주리게 되었을 리가 있습니까. 근년 이래로 저희 나라에 홍수와 가뭄이 잇달아서 연이어 흉년을 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국가의 재정이 바닥나고 백성이 도탄에 빠졌으므로 임금과 신하가 밤낮으로 황급해 하고 심지어는 대내에 진공하는 물건까지도 모두 줄여 가면서 죽어가는 백성을 구제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도 사대(事大)의 예를 폐기하지 않고 이번 진헌(進獻)에 힘을 다해 장만하여 겨우 거르는 것을 면하였는데, 어찌 신하가 강하여 백성의 빈궁을 가져오는 일이 있겠습니까.’ 하였습니다. 황제가 곧 빙그레 웃고 시랑 중 한 사람을 돌아보며 말하고 또 말을 전하기를 ‘정사(正使)가 국왕의 가까운 친척이므로 말한 것이다.’ 하였습니다. 말이 끝나자 물러가게 하므로 신들이 이일선(李一善)을 따라 나오는데 그 시랑도 나오면서 서로 이야기하고 갔습니다. 그가 무슨 말을 하더냐고 물었더니, 이일선이 말하기를 ‘황제의 물음에 사신이 대답한 말이 매우 좋았다고 시랑이 말하더라.’ 하고, 또 말하기를 ‘오늘 사신을 불러보면서 본국 백성의 일까지 염려하셨고 또 돌아가 국왕에게 고하라고 명하신 것은 다 국왕을 친근히 여기고 사신을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인데, 사신도 이것이 특별한 은총인 줄 아는가.’ 하였습니다. 대개 그가 신들을 불러보고 위로한 것이 있으니 우대하는 뜻인 듯합니다. 그런데 갑자기 군말을 백성이 빈궁하다는 말에다 붙였다가 신들이 변명한 말을 듣고는 또 웃고 돌아가 고하라고만 하였으니, 깊은 뜻이 없다는 것을 즉시 알 수 있습니다.
신들이 관외(關外)에 이르러 한 한인(漢人)을 만나 청나라 임금이 너그러운지 사나운지를 물었더니 답하기를 ‘한인 관원들은 매우 두려워한다.’ 하였고, 또 ‘관외의 부역이 무겁고 좋은 전지는 다 고산(高山)에게 점유당하였다 하는데 그러한가?’라고 물었더니 그 사람이 머리만 끄덕이고 말았습니다. 역관이 얻은 통보(通報)에 ‘지난해의 수재는 백수십 년 동안 없던 재난이었다.’ 하였고, 또 상으로 쓸 비단과 어의(御衣)의 밑천도 부족하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한 해의 군량을 빌리려 하였으나 의논하는 자들이 다 어려운 일이라고 하였다 합니다. 이처럼 국가의 재정이 모자라고 기강이 무너졌는데도 문화의 정치를 해보려고 하여, 운남(雲南) 사람이 70세 된 어머니가 있기 때문에 돌아가 봉양하겠다고 청하자 허가하였고, 또 상중(喪中)에 있는 자에 대해 윤달을 계산에 넣지 않고 스물넉 달이 되어서 복관(復官) 의논이 있었고 또 만주위(滿洲衛)의 삼년상(三年喪) 논의가 있어 ‘사람들이 다 삼년의 제도를 행하고 있는데 그들만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효도로 천하를 다스리는 도리가 아니다.’ 하였습니다."

 

2월 21일 계묘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동지사의 장계 가운데에 이른바 ‘신하가 강하다.’는 말은 참으로 괴이하다. 전에는 조참(朝參) 때에 차[茶]를 돌리고 파하는 것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제는 두어 걸음 안으로 불러들인 것은 우대하는 뜻인 듯하나, 돌아가 국왕에게 말하라 하고 사신의 말을 듣고는 빙그레 웃고 곧 나가게 한 것은 반드시 이 말을 하기 위해서 한 것일 것이다. 혹 뒷날의 근심이 없지도 않을 것이니 음험 간사하여 헤아릴 수 없는 것이 심하다."
하자, 좌의정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신의 생각으로는 어쩌면 우대하는 뜻에서 나온 것으로서 깊이 근심할 것이 아니라고 여겨집니다."
하고,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아뢰기를,
"불러서 만나보고 왕실의 가까운 친척이기 때문에 말하였다고 한 것은 은근한 뜻인 듯합니다마는, 신들은 다 신하인데 신하가 강하다는 말에 어찌 깊은 우려가 없겠습니까."
하고, 지중추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신하가 강하다는 말은 그 유래가 대개 오래되었습니다. 전에 칙사가 왔을 때부터 주상은 어질고 슬기로운데 신하는 불량하다는 말이 또한 있었습니다."
하였다.

 

팔도의 관찰사와 개성(開城)·강화(江華) 두 부(府)의 유수에게 하유하였다.
"나라가 의지하는 것은 백성이고 백성이 하늘처럼 우러르는 것은 먹는 것인데, 근년 이래로 참혹한 기근을 여러 번 만나 공사 간에 텅텅 비어서 굶어 죽는 자가 줄짓고 있으니 불쌍한 우리 백성이 장차 하나도 남지 않게 되었다. 한밤중에 생각하면 아픔이 내 몸에 있는 듯하다. 아아, 가뭄과 홍수가 재해를 가져오는 것은 농사의 운세가 불행하기 때문이기는 하나, 도랑이 수리되지 않은 것은 또한 사람이 힘을 다 들이지 않아서이니, 식량을 넉넉히 할 방법에 힘을 다할 것을 생각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날씨가 점점 풀려서 봄의 경작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으니 이때가 바로 온갖 곡식을 파종하는 시기이다. 그러므로 권장하는 정사를 조금도 늦출 수 없으니, 사방을 순행하면서 들판을 살펴보되 종자와 식량이 있는가 묻고 경운(耕耘)과 파종이 늦지 않은가를 살피라. 그리하여 무릇 백성의 힘이 모자라는 것이 있거나 묵정밭이 일구어지지 못한 것이 있으면 그들의 궁핍을 도와 주고 그들의 경운을 권해야 할 것이다. 그 책임이 경에게 있으니, 경은 내 지극한 뜻을 몸받아 도내에 알리라. 그리고 수령도 반드시 하인을 간단히 거느리고 친히 다니며 살펴 종자와 식량을 도와 주고 경작과 개간을 권하여 파종이 시기를 잃어 농토가 황폐해지지 않게 하고 인사가 미진한 것이 없도록 힘써서 농삿일에 부족한 것이 없기를 기필하게 하라."

 

2월 22일 갑진

경상도에서 여역이 점점 치열해져 죽은 자가 2백여 인이었다.

 

2월 23일 을사

북평사(北評事)를 임시로 폐지하였다. 좌의정 허적(許積) 등이 아뢰기를,
"북평사는 반드시 이조의 낭관을 차출하여 보내야 합니다. 그런데 북관(北關)의 수령은 다 무인이므로 분주하며 접대하는 것이 감사나 병사를 접대하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그 폐단이 적지 않습니다. 북로(北路)에 흉년이 든 이때에 변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윤계(尹堦)·김수오(金粹五)를 지평으로 삼았다.

 

2월 24일 병오

간원이, 이원정(李元禎) 부자의 일과 민점(閔點)을 파직하는 일을 잇달아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하교하기를,
"이 계사를 보니 매우 놀랍다. 나에게도 지각이 있는데 어찌 틈을 타서 사이를 벌리는 말에 흔들려 안 따르기로 마음먹을 수 있겠는가. 나를 능멸하여 마치 전혀 지식이 없는 자차럼 여기고 있으니, 이게 무슨 뜻인가?"
하였다. 대개 대간의 계사 가운데에 ‘지금 구원하는 말을 하는 자는 반드시 그 정상이 용서해 줄 만하다고 하면서 틈을 타서 사이를 벌려 위로 성상의 마음을 현혹함으로써 과방(科榜)에서 빼자는 논의를 마치 과격한 것인 양 만들고 있습니다. 성상의 마음이 이에 움직이지 않을 수 없어서 줄곧 굳게 거절하고 계십니다.’라고 말하였으므로, 이 하교가 있었다.

 

2월 25일 정미

승지를 전옥(典獄)에 보내 죄가 가벼운 죄수를 석방하게 하였다.

 

황해 감사 맹주서(孟胄瑞)가 치계하여, 굶주리는 백성은 날로 늘어나고 있는데 보릿가을은 아직도 멀었으니 곡물을 얻어 진구를 계속하였으면 한다고 하였다. 본도는 고을 수가 가장 적었기 때문에 조정에서 처음에 4천 석을 주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진구하고 남은 첩가(帖價)와 월과 군기(月課軍器)를 쌀로 바꾼 것 등의 곡물 수천 석을 계속하여 쓰도록 또 허가하였다.

 

황해도의 굶주리는 백성이 1만 5천 5백여 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고 굶거나 얼어 죽은 자도 많았다.

 

2월 26일 무신

함경도에서 여역이 더욱 치열하여 죽은 자가 자못 많았다.

 

형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상소하여 매음(煤音)·자연(紫燕) 두 섬의 목장(牧場)을 폐지하고 백성을 모아서 경작하기를 청하니, 상이 도타이 비답하고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2월 27일 기유

평안도에 굶주려 죽은 백성이 33인이었다.

 

2월 29일 신해

강석창(姜碩昌)을 정언으로, 이훤(李藼)을 이조 좌랑으로, 이익상(李翊相)을 응교로, 윤진(尹搢)을 수찬으로 삼았다.

 

경상도에서 전후 굶주린 백성이 7만 4천 8백 50여 인이었고 죽은 자가 90여 인이었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기근이 이미 극에 달하여 살해하고 약탈하는 변이 없는 곳이 없습니다만 무덤 도둑에 있어서는 전에 듣지 못하던 일입니다. 보성군(寶城郡)의 교노(校奴) 일명(日命)과 사노(寺奴) 최일(崔日)과 남원부(南原府)의 어영군(御營軍) 김원민(金元民)과 사노(私奴) 철석(哲石) 등이 남의 고장(藁葬)을 파 옷을 벗겨서 버젓이 팔다가 시신의 친척에게 발각되었는데 추위에 다급하였기 때문이라 하며 군말없이 자복하였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그 계본(啓本)을 형조에 내렸다. 대신에게 의논하니, 다들 ‘추위에 다급하여 그랬다 하더라도 그 정상을 따져 보면 강도보다 더 심하니 그 죄는 죽어 마땅하고 법에 있어서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진휼청에서 2월 달에 돌본 굶주린 백성이 2만 인이었고 죽은 자가 60인이었다. 이때 굶주린 백성 2만 인에게 먹이는 죽을 서른 또는 마흔 가마를 쑤어서 썼는데 닭이 울 때 시작하여 한낮에 이르러 끝나고 한낮부터 다시 쑤어서 밤이 깊어서야 파하였다. 그런데, 마지막에는 너무나도 붐벼서 혹 먹지 못하는 자도 있는가 하면 거듭 먹는 자도 있었다.

 

팔도에 기아와 여역과 마마로 죽은 백성을 이루다 기록할 수 없는 정도였는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였다. 그리고 물에 빠지고 불에 타서 죽고 범에게 물려 죽은 자도 많았다. 늙은이들의 말로는 이런 상황은 태어난 뒤로 보거나 들어본 적이 없는 것으로서 참혹한 죽음이 임진년의 병화보다도 더하다고 하였다. 그러나 수령이 보고한 것은 죽을 쑤어 먹이는 곳에서 죽은 자만 거론하였을 뿐이고 촌락에서 굶어 죽고 도로에서 굶어 죽은 자는 대부분 기록하지 않았다. 심한 자는 진구를 잘하였다는 이름을 얻으려고 서로가 경쟁하여 덮어 두고 사실대로 보고하지 않았으므로 계문한 숫자는 겨우 열에 한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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