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1일 임자
경기에서 2월 보름 이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1백 47인이었고 굶어 죽은 백성이 13인이었다.
이태서(李台瑞)·이수경(李壽慶)·박천영(朴千榮)을 옥에서 내보내고 박문도(朴文道)를 진해현(鎭海縣)에 충군(充軍)하였다.
박천영의 시권(試券)을 지우고 고친 일에 대하여 이태서·이수경은 ‘박문도가 시권을 맞추어 보았으니 칼로 긁어내고 끼워 써 넣은 것은 아는 바가 아니다.’고 하며 모두 스스로 변명하였고, 박문도는 ‘박천영과 혼인한 사이이다. 조사하여 맞추어 볼 때에 시권 한장이 분명히 박천영의 필적이었는데 초승(超乘)의 ‘초’ 자 반쪽을 잘못 쓰고 상배(相背) 두자 아래에 어(於)자가 있어야 할 것인데 빠뜨렸으므로, 경망한 생각에 한 자 반쪽의 잘못된 것을 고치거나 어조사 하나를 더 써서 넣더라도 크게 지장이 되지는 않을 것으로 여겨 깊이 생각지 않고 경솔하게 조금 고쳤다. 당초에 사정을 행하고 간사한 짓을 할 생각이 아니었는데 스스로 그것이 죄를 범하는 것인 줄 깨닫지 못했다.’ 하고, 박천영은 ‘어 자를 빠뜨리고 반쪽을 잘못 쓴 것은 다 합격의 여부에 관계되지 않으니 의도적으로 지우고 고쳤을 리가 만무하다.’ 하였다. 상이 연석(筵席)에서 하교하기를,
"박천영은 과거 시험의 법이 엄중함으로 인해 과방(科榜)에서 빼냈으나 서로 내통한 자취는 없는 듯하니 반드시 죄줄 것은 없다."
하였다. 금오(金吾)가, 박문도가 이미 솔직하게 공초하였으므로 이태서·이수경에게는 모두 물을 만한 것이 없다 하고는 다 석방하였다. 박문도는 과장(科場)에서 사정을 쓴 데 대한 법으로 논하면 먼 변방에다 충군해야 하나 어머니의 복을 입고 있는 중이고 그 일은 상을 당하기 전에 있었다 하여 속(贖)을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특별히 명하여 그대로 유배지로 보내게 하였다.
3월 2일 계축
헌납 박지(朴贄)는, 간원이 방목에서 빼기를 청한 논계가 전에 자기가 논계한 것과 법 적용은 같지만 내용이 다르니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지평 윤계(尹堦)는,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의 장지(葬地)에 예관과 경기 도사를 보내어 살펴보게 하자고 청한 일에 대하여 미안한 하교가 있었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간 장선징(張善瀓)은 병 때문에 부르는 명에 응하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집의 이합(李柙)은 윤계와 함께 당초 논계에 참여하였으니 혐의가 다를 것이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대사헌 정지화(鄭知和)는 비난하는 물의를 받았으므로 끝내 구차하게 무릅쓰고 있을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사간 이단석(李端錫)은 엄한 비답을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옥당이 처치하여 박지·윤계·이합·정지화·이단석은 출사시키고 장선징은 체차하였다.
3월 3일 갑인
왕세자의 가례(嘉禮) 때에 서울과 지방에서 진전(進箋)·진하(進賀)하고 방물(方物)·물선(物膳)을 봉진하는 규례가 있으므로 예조가 규례에 따라 계품하니, 상이 진전만 하고 방물·물선은 봉진하지 말라고 명하였는데, 흉년이기 때문이었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지평 윤계(尹堦)가 아뢰기를,
"각 아문 중 곡물을 많이 받은 자의 죄를 조사하자는 뜻으로 논계하였는데 각 아문을 시켜 품처하게 하라는 비답이 있었으므로, 품처하는 동안 잠시 정계(停啓)하였습니다. 그 뒤에 어영청·수어청 이외는 다 품지(稟旨)한 일이 없으니, 빨리 계품하게 하여 의거해 처치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각 아문은 써서 들이라고 명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전 주부 정언형(丁彦珩)이 지난 겨울에 굶어 죽었고 그 아들의 딸이 이제 또 굶어 죽었습니다. 이러한 근심이 사대부의 집에도 많이 있으니 그지없이 놀랍고 참담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러한 사람들에게 각별히 양식을 지급하게 하라."
하였다.
3월 4일 을묘
경상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9만 8천 3백 60여 인이었고 죽은 자가 1백 40여 인이었다.
3월 6일 정사
상평청의 진휼한 곳에 월초에 진구받으러 간 자가 6천 70여 인이었고 정월 스무날 이후로 죽은 자가 50여 인이었다.
3월 7일 무오
밤에 유성이 군시성(軍市星) 아래에서 나왔다.
민정중(閔鼎重)을 좌참찬으로, 이익(李翊)을 대사간으로, 이단하(李端夏)를 사인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최관(崔寬)을 승지로 삼았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홍중보(洪重普)에게 하유하여 빨리 들어오게 하였는데, 홍중보가 ‘성밖에 달려 나아가 사정을 다시 아뢰겠다.’고 하였다.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아뢰기를,
"스승의 직책은 이끌고 돕는 데에 있는데, 직강 이태서(李台瑞)는 대대로 악행을 해왔으므로 사람 축에 끼지 못합니다. 그가 차비관이었을 때에 음험하고 사악한 자취와 간사하고 외람한 일은 모두 이 사람이 주동이 되어 꾸민 것인데, 두 번 나문하였으나 마침내 면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자자하게 말하고 있으며 공론이 분개하고 있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태서의 아버지 이취인(李就仁)이 광해 때에 폐모론(廢母論)을 주장하였으므로, 대간의 계사에서 대대로 악행을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경상도 밀양부(密陽府)에서 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좌우에 서로 등진 머리가 있어 각각 눈 둘, 입 하나, 코 둘, 뿔이 둘이 있었다.
3월 8일 기미
왕세자의 납채례(納采禮)를 행하였다.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을 정사(正使)로,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을 부사(副使)로 삼았다. 상이 면복(冕服)을 갖추어 입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니 백관이 예를 행하였다. 예가 끝나자 우승지 김우형(金宇亨)이 교지를 선포하고 사자(使者)가 명을 받아 빈(嬪)의 집에 가서 예를 행하였는데 모두 《오례의(五禮儀)》대로 하였다.
헌부가 전에 아뢴 윤경교(尹敬敎)·신명규(申命圭) 등을 파직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한 일을 정계하였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상차하여 사직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는데, 홍중보가 ‘비상한 은전이 변변치 못한 신에게 거듭 내리니 삼가 성상의 뜻을 받들어 병든 몸을 이끌고 성안에 들어가겠습니다.’고 하였다.
겸 병조 판서 김좌명(金佐明)이 죽었다. 김좌명은 영의정 김육(金堉)의 아들이고 왕비의 백부인데, 사람됨이 총명하고 재주가 많으며 모습이 아름다웠다. 젊어서 급제하고 이어서 중시(重試)에 뽑혔으며 집에서는 행실이 있고 부지런하게 직책을 수행하였다. 일에 밝고 익숙하며 잘 살폈으므로 맡은 곳마다 잘 다스려졌다. 호조 판서였을 때에는 서리들이 꾀를 부리지 못하였고 병조 판서였을 때에는 무사가 두려워 복종하였다.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수선 묘도(隨羨墓道)의 제도를 썼으므로 대관 민유중(閔維重)에게 탄핵을 받았고, 또 등대(登對) 때에 번번이 당론(黨論)이 나라를 망치게 될 것이라고 극구 말하고 또 당시 무리들과 기해년004) 의 상복 제도에 대해 논하면서 윤선도(尹善道)의 말이 옳다고 하였는데 이 때문에 당시 의논에 크게 미움을 받았으나 또한 굽힌 적이 없었다. 중요한 일들을 오래 맡아 심력을 기울이다 병이 되어 죽었다. 그러나 성질이 거만하고 자신의 의견대로 하였으며 귀공자의 버릇을 털어버리지 못하였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대례(大禮)가 바로잡힌 뒤에 그가 삼년설(三年說)을 주장하였기 때문에 현종(顯宗)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숙(忠肅)이다.
3월 9일 경신
왕세자의 납징례(納徵禮)를 납채의(納采儀)와 같이 행하였다. 상이 안질이 있어서 친히 참석하지 못하였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비로소 출사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범상한 자질인데다 깨끗한 지조도 모자랐다. 병조를 오래 맡고 있으면서 자못 뇌물을 받았고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라서는 아부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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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범상한 자질인데다 깨끗한 지조도 모자랐다. 병조를 오래 맡고 있으면서 자못 뇌물을 받았고 삼공(三公)의 자리에 올라서는 아부만 하였다.
○右議政洪重普始出仕。
【史臣曰: "重普以庸常之資, 乏淸介之操。 久掌西銓, 頗受賂遺, 及登台司, 只依阿而已。"】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3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편사(編史) /
3월 10일 신유
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인이었고, 2월 27일 이후로 비와 눈이 잇따라 내리고 날씨가 추워서 밭이 얼어붙어 갈 수가 없었다.
전라도에 여역으로 죽은 자가 1천 7백 30여 인이었고 굶주리는 백성이 13만 3천 5백 90여 인이었으며, 죽을 먹이는 곳에서나 도로에서 죽은 자가 1백 40여 인이었고 지난해 10월 이후로 각 고을의 죄수 중에 얼고 굶어 죽은 자가 1백 30인이었다.
함경 감사 홍처후(洪處厚)가 치계하기를,
"지난해에 흉년은 온 도내가 똑같습니다. 조금 곡식이 여물었다는 고을도 여느 해에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고을에 비하여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므로 올 봄의 주리는 것이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니 전세로 낼 쌀·콩과 각사(各司)의 공물 값으로 낼 베와 여러 가지 노비공(奴婢貢)으로 낼 쌀·베 등 부역을 일체 감면해 주소서."
하였는데, 비국이 회계하기를,
"해조의 물력으로는 옮겨 채울 길이 없습니다."
하니, 전세로 낼 쌀·콩만 반으로 줄이도록 하였다.
3월 11일 임술
왕세자의 고기례(告期禮)를 납채의(納采儀)와 같이 행하였다. 상이 안질이 있어서 친히 참석하지 못하였다.
경기 양주(楊州) 등 네 고을에 비가 조금 내렸는데 산꼭대기에는 눈이 내려 눈 깊이가 두세 치였다. 수원(水原) 등 스무 고을에 된서리가 잇따라 내리고 찬 바람이 날마다 불어서 우거져 가는 밀보리가 다 상하였다.
3월 12일 계해
이완(李浣)을 병조 판서로 삼았다. 이완은 매우 엄격하고 교만한 병통이 있기는 하나, 관직에 있으면서 법을 지키고 청탁을 받지 않았으므로 감히 무인이라고 깔볼 수 없었다. 일찍이 쇠약하고 병들었다고 하면서 병권(兵權)을 사양하고 나오지 않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상이 다시 쓰고자 이 벼슬을 제수하였다.
3월 13일 갑자
동지 정사(冬至正使) 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 동지 부사(副使) 정익(鄭榏), 서장관(書狀官) 정화제(鄭華齊)가 청나라에서 돌아왔다.
상이 흥정당(興政堂)에 나아가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아뢰기를,
"근래 체통이 엄하지 않아서 환관의 교만하고 방자한 버릇을 장차 억제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식자가 근심한 지 오래되었습니다. 이번 가례에 대해 안팎에서 의절을 익힐 때에 환관이 사자(使者)를 급히 불러 예(禮)를 행하게 하자, 도감 당상과 사자가 다 말하기를 ‘바깥에서 의절을 익히기 전에는 먼저 행하지 않아야 하고 또 사자는 안에서 의절을 익히는 데에 참여하는 규례가 없다.’고 하면서 심지어 낭청을 보내어 두세 번이나 환관에게 말하게 하였으나, 환관이 기를 돋구어 성을 내며 불손한 말로 더욱 독촉하였으므로 사자가 마지 못하여 달려가 예를 행하였습니다. 외조(外朝)의 사체는 지극히 중한데 하찮은 일개 환관이 어찌 감히 이처럼 방자하게 부르거나 물리칠 수 있단 말입니까. 예조는 처음부터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거니와 사자도 예절을 잃은 책임을 면할 수 없으니 모두 추고하고, 차지 내관(次知內官) 윤완(尹完)은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여 그 방자한 버릇을 징계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정사·부사는 추고할 만한 일이 없을 듯하다. 예조 당상을 먼저 무겁게 추고하라."
하였다. 강석창이 또 아뢰기를,
"사자가 가든지 안 가든지 전례가 있건 없건 간에 하찮은 일개 환관이 이처럼 부르거나 물리치는 짓을 하도록 내버려 둘 수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추고하라고 명하고 이르기를,
"함답(緘答)을 보니 그 책임을 누가 져야 할 지 알 수 있다."
하였다. 이때 이미 바깥의 의절 익히는 것을 뒤로 물렸는데 예조가 안의 의절 익히는 것을 아울러 물리기를 청하지 않았으므로, 강석창이 이와 같이 논한 것이다.
3월 14일 을축
충청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6만 6천 4백 20인이었다.
3월 15일 병인
경기에 2월 보름날 이후로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인이었다.
3월 16일 정묘
이익상(李翊相)을 집의로, 이삼석(李三錫)을 지평으로, 이합(李柙)을 부수찬으로, 심유(沈攸)를 사간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삼았다.
장령 윤리(尹理)가 아뢰기를,
"부역을 고르게 매겨 백성을 편하게 하는 것은 왕도 정치 중의 급선무이므로 한 도내에 전세가 가벼운 데와 무거운 데가 있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런데, 경상도의 강에 인접한 고을이 공목미(公木米)를 홀로 담당하고 있으니 참으로 유독 괴로움을 겪고 있는데 산간 고을이 작목(作木)하여 상납하는 수량에 비하면 가볍고 무거운 것이 너무나 차이가 납니다. 이 때문에 원망이 하늘에 사무치고 포탈하는 집이 반을 넘습니다. 상납과 왜공(倭貢)을 막론하고 통틀어 합계하여 피차를 비교하여 고루 정하면 치우치게 괴로움을 겪는 걱정이 없을 것이니, 묘당을 시켜 좋은 방법에 따라 변통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관청에서 물건을 매매하면 반드시 폐단이 있습니다. 근래 영남의 각영(各營)에서 소금을 사서 파는 일이 실로 고질적인 폐단이 되어 바닷가에 소금을 굽는 가구가 모두 생업을 잃었습니다. 각영에서 해마다 판매하여 얻은 재물이 엄청나게 많지만 공공의 용도에 보탰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고 민간의 원망을 초래하는 것만 보았습니다. 그러니 본도의 감사를 시켜 일체 스스로 범하지 말도록 각영에 공문을 보내 알려서 그 폐단을 고치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경기 양근(楊根) 땅에서 어느 사가의 여비가 한 배에 2남 1녀를 낳았다.
함경도에 굶주리는 백성이 2만 1천 3백 70여 인이었는데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경상도에서 전후에 굶주리는 백성이 11만 5천 6백 70여 인이었으며, 여역이 매우 치열하여 전염 안 된 곳이 하나도 없고 밀보리가 시들어서 결코 풍성하게 익을 희망이 없었다.
3월 17일 무진
평안도에 봄보리의 파종이 비 때문에 시기를 넘겼고 씨뿌린 뒤에 또 많이 썩었으며 밤마다 서리가 내리고 날씨가 매우 찼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경기에서 2월 보름날 이후로 굶주리는 백성이 4만 5천 6백 인이었고 여역으로 죽은 자가 80여 인이었고 불타 죽은 자가 6인이었다.
3월 18일 기사
전라도에 2월 초엿샛날 이후로 큰비가 잇따라 내려 밀보리가 상하였다.
원양도(原襄道)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가 70여 인이었다.
이때 굶주린 백성이 도성에 모였다가 죄다 죽을 먹이는 곳으로 나아가 밤에는 거리에서 자므로 나쁜 기운이 찌는 듯하여 서로 전염되어 며칠 동안 신음을 하다가 죽고 말았다. 그리하여 문밖으로 실어내는 수레가 날마다 잇따랐는데, 그 중에는 혹 귀신처럼 됐으나 목숨이 아직 붙어 있는 사람도 많이 섞여서 쌓인 시체 가운데에 들어갔다. 귀한 집이건 천한 집이건 독한 여역이 두루 차서 마치 불이 치솟듯 하였으므로 일단 여역이 걸린 자는 열에 하나도 낫는 자가 없고 심지어는 온 가족이 다 죽기도 하였다. 그래서 사람들이 다 놀라고 황급하여 분주하는 것이 마치 병화(兵火)를 피하는 것 같았는데 그 경황의 비참함이 이러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당초 도성 안에 진휼청을 설치하였기 때문에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어지러이 모여서 이런 우환을 빚어내게 되었다.’고 하였다.
사람들로 하여금 버려진 아이를 거두어 기르게 하였다. 이때 굶주린 백성이 쪼들린 나머지 그들의 골육을 보전하지 못하고 길에 버리거나 도랑에 던진 일이 빈번하였다. 어느 날 임금 앞에서 이 일을 말한 자가 있었는데, 상이 듣고 한참 동안 슬퍼하다가 드디어 이 영을 내렸는데 한성부에 정장(呈狀)하여 공문을 받아서 거두어 기르되 아들을 삼든지 종을 삼든지 그들이 하는 대로 하게 하였다.
3월 19일 경오
이경억(李慶億)을 우부빈객으로, 이단석(李端錫)을 집의로, 이익상(李翊相)을 필선으로 삼았다.
3월 20일 신미
평양 교수(平壤敎授)를 흉년이기 때문에 임시 폐지하였다.
3월 21일 임신
헌납 정화제(鄭華齊)가 인피하기를,
"직강 이태서(李台瑞)를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논계에 있는 ‘죄를 지어 버림받고 처신이 변변치 않다.’는 따위 말은 신이 들은 바와 매우 다르므로 구차하게 논계에 같이 참여할 수 없으니 갈아 주소서."
하고, 정언 강석창(姜碩昌)도 인피하기를,
"사판에서 삭제하기를 청한 논계는 조금 징계되는 것이 있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런데 동료가 이 때문에 분쟁을 일으켰으니 모두 신이 가볍게 보인 탓입니다. 갈아 주소서."
하였는데, 사간 심유(沈攸)가 처치하여 정화제는 체차하고 강석창은 출사하게 하였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이 치계하기를,
"연산(連山)에 사는 사가의 여비 순례(順禮)가 깊은 골짜기 속에서 살면서 그의 다섯 살된 딸과 세 살된 아들을 죽여서 먹었는데, 같은 마을 사람이 전하는 말을 듣고 가서 사실 여부를 물었더니 ‘아들과 딸이 병 때문에 죽었는데 큰 병을 앓고 굶주리던 중에 과연 삶아 먹었으나 죽여서 먹은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합니다. 이른바 순례는 보기에 흉칙하고 참혹하여 얼굴이나 살갗·머리털이 조금도 사람 모양이 없고 마치 미친 귀신 같은 꼴이였다니 반드시 실성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지만 실성하였다 하더라도 이는 실로 예전에 없었던 일이고 범한 것이 매우 흉악하므로 잠시 엄히 가두어 놓았습니다. 해조를 시켜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는데, 정원이 아뢰기를,
"이번에 연산 사람이 아들과 딸을 삶아 먹은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 자애로운 성품은 천부적으로 같이 타고 나는 것인데 그가 흉칙하고 완고하더라도 어찌 지각이 없겠습니까. 심한 굶주림에 부대껴서 이토록 악한 짓을 하였으니, 이것은 교화가 크게 무너진 데 말미암은 것이지만 실로 진휼의 정사가 허술해서 그런 것입니다. 도신(道臣)은 먼저 수령의 죄를 거론해야 할 것인데 면의 책임자들만 다스리고 말았으니 놀라운 일입니다. 감사와 수령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이어서 생각하건대, 국가에서 구황 정책에 대한 강구를 여러모로 극진히 하고 있으나 부고(府庫)는 다 비고 관리는 지쳐서 굶주려 낯빛이 누런 백성이 마치 물고기가 위로 향하여 입을 벌리듯이 갈망하다가 장차 다 죽게 되었는데, 더구나 이제 봄가뭄의 조짐이 이미 있어 밀보리가 점점 말라가고 있으므로 흙처럼 무너지고 기와처럼 깨지는 화(禍)가 훤히 드러나있는 때이겠습니까. 서울 안 진휼청을 설치한 곳에 다시 더 주의시키고 각도의 감사에게 글을 만들어 하유하여 진휼의 정사가 미진한 걱정이 없게 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침에 장계를 보고 놀랍고 슬퍼서 차마 말할 수도 없었으나 말이 명백하지 않아서 상세히 알기 어렵다. 해조에 계하하는 데에는 뜻이 있거니와, 범연히 추고하기를 청한 것은 착실하지 않은 듯하나 계사가 이러하니 우선 추고하라. 마지막에 경계한 뜻은 참으로 절실하므로 매우 감탄하였다. 내가 유념하겠다."
하였다.
3월 22일 계유
상이 원유관(遠遊冠)·강사포(絳紗袍)를 갖추고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김씨(金氏)를 책봉하여 왕세자빈(王世子嬪)으로 삼았다. 그 교명문(敎命文)에 이르기를,
"예로부터 국가에서는 반드시 세자를 미리 세워서 나라의 근본을 튼튼하게 하였고, 또한 깨끗하고 현명한 사람을 널리 구하여 길상(吉祥)을 정하고 배필을 세워서 부인의 일을 잇게 하였다. 이는 인륜이 시작되는 바이매 임금 교화의 바탕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므로 내가 선왕의 큰 명을 이어받아 가르침을 받들어 따르고 아름다운 법을 살피고 삼가서 신명과 백성의 뜻에 맞기를 바랐었다. 내 원사(元嗣)는 총명이 뛰어나서 일찍부터 종묘의 제사를 주관하는 중책을 받아 백성들이 이름을 우러러 보고 있으니, 아름다운 짝을 가려 그 아름다움을 같이 하게 하고 그 법도를 보이게 해야겠다.
아, 너 김씨는 덕스러운 성품을 하늘에서 받아 온순함이 어려서부터 나타났다. 네 조상 때부터 대대로 덕을 쌓아 가르침이 집에서 이루어지고 은택이 후손에 미쳤다. 이에 아름다운 여자를 길러 내가 자나 깨나 찾는 바에 응하였다. 그리하여 두루 간택을 거쳤는데 내 마음에 들었다. 말과 행실을 보고는 궁위(宮闈)가 모두 경하하고 점을 쳐보면 거북점과 시초점이 다 길하다 하였고 외조(外朝)에 물어 보면 사대부들이 모두 동의하니, 휘장(徽章)을 주는 예에 실로 합당하다.
그러므로 정사 심익현(沈益顯)과 부사 김수항(金壽恒)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서 너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게 한다. 내 듣건대, 양(陽)의 덕은 음(陰)이 도와주는 공이 아니면 펴지 못하고 남자의 가르침은 여자가 순종하지 않으면 나타나지 못하는 것이니 이 상복(象服)005) 에 어울리게 하는 것이 모두 너에게 달려 있다. 우리 종사(宗事)를 이어받고 우리 세자를 돕는 것은 효도와 공경, 화목과 순종에 있다. 그러니 너는 성심으로 이것을 생각하여 사치로 의리를 잃거나 방종으로 예의를 무너뜨리지 말고 오직 부지런하고 검소하여 끝까지 한결같이 하라. 그리하여 상제의 누이에 견줄 만한 아름다움이 주(周)나라에만 있게 하지 말라. 아, 공경하고 아름답게 하여 한없이 명예를 전파하는 것은 네가 어질기에 달려 있고 자손이 백세(百世)토록 전하여 우리 국가가 끝이 없게 하는 것도 네가 몸받기에 달려 있으니, 밤낮으로 공경하여 내 가르침을 욕되게 하지 말라."
하였다. 글은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어 바치고 개성 유수 이정영(李正英)이 썼다.
○癸酉/上具遠遊冠、絳紗袍, 御崇政殿, 冊金氏爲王世子嬪。 敎命文曰:
自昔有國家, 必預樹冡儲, 以固國本, 亦惟博求淑哲, 定祥建配, 以啓纉女之業。 人倫攸始, 王化攸基, 玆惟艱哉。 肆予承寧王休命, 奉若謨訓, 考愼令典, 以祈協于神民。 粤予元嗣, 聰明岐嶷, 夙膺主鬯之重, 名號縶于百姓, 宜采嘉耦, 以儷厥美, 以觀厥刑。 咨爾金氏, 德性稟乎天, 和柔則著於沖年。 自乃祖世種德, 敎成于家, 澤流于後昆。 寔毓碩媛, 以應我寤寐求。 爰玆歷選,惟簡在予心。 迺相言容, 宮闈胥慶, 廼稽于卜, 龜筮協從, 廼詢于外朝, 卿士僉同, 徽章所加, 禮實宜之。 玆遣正使沈益顯、副使金壽恒, 持節備禮, 冊爾爲王世子嬪。 予聞陽德, 非陰功莫宣, 男敎非婦順不章, 稱是象服, 罔不在爾。 承我宗事, 輔我元良, 在孝敬、在和順。 爾忱念玆, 毌以侈滅義, 毌以逸敗禮, 惟勤惟儉, 終始惟一。 罔俾俔天之妹, 專美有周。 於戲! 思齊思媚, 播無窮之聞, 惟爾賢, 本支百世, 俾我邦家無斁, 惟爾體, 敬哉夙夜, 毌忝予訓。 辭大提學金壽恒製進, 開城留守李正英書寫。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2면
【분류】왕실-종친(宗親)
죽책문(竹冊文)에 이르기를,
"소양(少陽)006) 이 이극(貳極)007) 의 자리에 오르니 나라의 근본이 융숭해졌고, 혼인은 만복의 근원이므로 인륜이 비롯되는 바이다. 덕이 있는 자를 선택하는 것은 예절에 있어 당연하다. 누가 세자를 도울 것인가. 고요하고 그윽한 아름다운 짝이어야 한다. 아, 너 김씨는 곧고 엄숙하여 아름다운 모범을 지녔다. 예법이 있는 명문(名門)으로서 충성과 효도를 전해 온 집안이라 들은 바가 좋은 말과 착한 행실이었다. 온순한 규방의 법도가 행동의 사이에 나타났었다. 특별한 간택은 이미 자전의 마음에서 나왔고 모든 사람의 의논도 내 뜻과 맞았으며, 거북점과 시초점도 길하다 하였기에 상복(象服)의 의물을 갖추었다.
이에 정사 심익현(沈益顯)과 부사 김수항(金壽恒)을 보내어 절(節)을 가지고 예를 갖추어 너를 왕세자빈으로 책봉하게 한다. 집안에서 화순(和順)하면 부모의 뜻이 안락할 것이고, 천지에 밝으면 군자의 도(道)가 보존될 것이다. 순한 덕을 오직 온화하게 하고 몸단속을 오직 검소하게 하되 끝까지 삼가고 조심하여 게을리하지 않으면 복록이 한없이 내려질 것이다.
아아, 네 조상의 가르침이 엄한 줄 아니 물론 다시 권면할 것이 없겠으나, 내 종사(宗嗣)의 중대한 것을 생각하면 더욱 공경하기를 매우 바란다. 반드시 공경하고 경계하여 어기지 말고 자손에 이르도록 변하지 말라."
하였는데, 예문 제학 강백년(姜栢年)이 지어 바치고 조위명(趙威明)이 썼다.
○竹冊文曰:
少陽正貳極之位, 國本斯隆; 大婚爲萬福之源, 人倫攸始。 維德是擇, 於禮則然。 疇其左右乎元良, 允矣幽閒之嘉偶。 咨爾金氏, 貞莊懿範。 禮法名門, 忠孝家傳, 所聞者嘉言善行。 婉娩閨則, 乃見於動止周旋。 特簡旣出於慈心, 僉議亦諧於予意。 龜筮協吉, 象服備儀。 玆遣正使沈益顯、副使金壽恒, 持節備禮, 冊爾爲王世子嬪, 宜其室家, 父母之志順矣; 察乎天地, 君子之道存焉。 順德惟和, 飭躬惟儉, 而終始寅畏不怠, 則福祿申錫無彊。 於戲! 知爾祖訓之嚴, 固無待於更勖; 顧予宗嗣之重, 深有冀於益虔。 必敬必戒無違, 之子之孫勿替。 藝文提學姜栢年製進, 趙威明書寫。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5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2면
【분류】왕실-종친(宗親)
빈(嬪)은 문원공(文元公) 김장생(金長生)의 4대손이다. 예법 있는 집에서 태어나 일찍부터 참하고 얌전한 여자의 덕이 드러났었는데 때마침 세가(世家)의 처녀를 뽑는 데에 들어 궁중에 들어갔다. 빈의 나이가 겨우 열 살이었는데도 행동 거지가 예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으므로 사전(四殿)이 모두 사랑하여 드디어 세자빈으로 정하였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례(冊禮)를 행하게 되었는데 마침 비가 내리다가 행사할 때가 되자 비로소 맑아지니 사람들이 다 서로 축하하였다.
3월 23일 갑술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전후 굶주린 백성을 합하여 셈하면 17만 2천 2백여 인입니다. 3월부터 죽을 먹는 가운데에서 농민을 뽑아 양식을 나누어주기 시작하였습니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는 고을 관아 근처의 죽을 먹여주는 곳에 모여서 먹게 하였습니다만 너무나 얼고 굶주려서 얼굴 가득히 누렇게 뜬 무리는 날씨가 따뜻해진 뒤에 죽은 자가 더욱 많습니다. 토착민은 아침저녁으로 죽을 먹는 틈에 채소도 아울러 맛보므로 다들 소생하는 기운이 있습니다. 그런데 소금을 굽거나 고기잡이 하는 가구가 생업을 그만두고 가족을 데리고 다들 죽을 주는 곳으로 갔으니 어염세(魚鹽稅)를 크게 감면하는 조치가 없으면 앞날의 근심이 매우 절박할 것입니다. 포구나 섬에 사는 백성들은 대체로 관아와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집을 못 잊어서 죽을 먹으러 가지 않기 때문에 온 가족이 죽게 되는 경우가 육지 백성보다 휠씬 많습니다. 주(州)로 통하는 큰 도회지에는 떠돌며 빌어먹는 자가 구름처럼 모여들고 있으므로 쓰러져 죽은 시체가 매우 많습니다. 흉년의 여역(癘疫)은 늘 있는 일이라고는 하나 모든 마을에 전염이 안 된 곳이 하나도 없어 불처럼 더욱 치열해지고 있으므로 편히 쉬게 될 날이 언제 있을지 막막합니다. 죽을 장만하는 것을 감독하는 자 중에 전염되어 앓는 자를 이루 다 셀 수 없고 각 고을의 수령과 아속(衙屬)으로서 전염되어 앓는 자도 많습니다. 혹 관아 사람 전수가 전염되어 앓으면 그 관아의 노비가 관속(官屬)의 일을 대행하기도 합니다. 병을 앓는 백성을 위해 장막을 따로 설치하여 전염될 걱정을 방지하고 있습니다마는, 대엿새 분의 식량을 나누어 주면 한꺼번에 죄다 먹고는 지팡이를 짚고 무릎으로 기어 들어와 입을 벌리고 먹여 주기를 바라는데 쫓아도 안 되고 타일러도 안 됩니다. 비참한 꼴을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3월 24일 을해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 어떤 소가 낳은 송아지가 하나의 몸에 머리가 둘이 달렸는데 눈이 넷이고 코가 둘이고 귀가 둘이고 입이 둘이었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에서 3월 11일에 큰 눈이 내렸는데 그 두께가 거의 두 치나 되어 산과 들을 물론하고 흰 땅으로 변하였다.
황해도에서 3월 안에 잇따라 된서리가 내리고 11일에는 눈이 내려 산들이 다 희어졌는데 종일 녹지 않아 기장과 조가 얼어 상하였다. 2월에는 비가 잇따라 내려 봄갈이의 때를 잃었는데, 이 달에 이르러서는 가뭄이 날로 심하고 사나운 바람이 땅을 쓸어 밀보리가 점점 말라갔다.
함경도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10여 마리였다.
3월 25일 병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아뢰기를,
"병조의 용도가 다 비어서 봉부동(封不動)인 목면(木綿)을 쓰게 되었는데 남은 것이 많지 않으니, 참으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고, 좌의정 허적(許積)이 진휼청을 시켜 4월, 5월의 한 당번(當番)을 요리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나아가 아뢰기를,
"진휼하는 곳에 있던 굶주린 백성의 주검을 수레로 실어내는 일이 잇따라 보기에 참혹한데, 그 가운데에는 혹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는데도 싸잡아 실어내는 일이 있습니다. 이것도 화기(和氣)를 상할 만하니, 진휼청과 각부의 관리를 엄히 경계하여 이런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 뒤로 이런 폐단이 다시 있으면 진휼청의 당상·낭청과 각부의 관리는 그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각별히 엄하게 경계하라."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죽은 사람을 묻을 때에 주검을 염하여 깊이 묻지 않으면 오래지 않아 드러나고야 말 것이니, 더욱 불쌍하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이미 진휼청에서 면포를 주어 몸을 가리고 단단히 묻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듣자니 곧 파내어 염한 것을 벗겨 간다 하니 참으로 매우 놀랍고 참혹합니다만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하였다. 홍중보가 아뢰기를,
"신이 접때 목숨이 아직 끊어지지 않은 사람의 발에 줄을 묶어 논 것을 거리에서 보았습니다. 이것은 동네 사람이 끌어내기 위해 미리 만든 도구인데 매우 불쌍합니다."
하니, 상이 슬퍼하였다. 승지 성후설(成後卨)이, 한성부의 죽을 먹이는 곳이 시어소(時御所)와 자못 가까운데 여역의 기세가 더욱 성하다고 하여 옮겨 설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이르기를,
"운반할 즈음에 반드시 끼니를 잃을 걱정이 있을 것인데, 굶주린 백성이 혹 이 때문에 죽게 된다면 또한 매우 불쌍하다."
하였다. 김만기(金萬基)가 세자의 가례(嘉禮) 사흘 전에 잠시 부근의 죽먹이는 곳에다 합하여 설치하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이단석이 이원정(李元禎) 부자의 일을 잇따라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 얼마 안 가서 정계하였다. 이단석이 또 각영(各營)에서 매매하는 일을 폐지할 것을 잇따라 아뢰었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병영(兵營)·수영(水營)에서는 이 일을 완전히 폐지할 수 없습니다만, 감사에 있어서는 은택을 받아 교화만 펴면 되는데 먼저 스스로 재리에 간여한다면 또한 어떻게 남을 금지할 수 있겠습니까. 이 폐단은 고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살펴 처치하게 하였다. 그 뒤에 비국의 회계에 따라 감영의 매매만 폐지하였다.
경상·원양(原襄)·함경 세 도의 올 신해년 조로 상반기에 납부할 세폐(歲幣)를 특별히 감면하고 진휼청에 명하여 그 값을 요리하여 호조에 보내게 하였다.
3월 26일 정축
교리 신정(申晸)·민종도(閔宗道), 부수찬 이합(李柙) 등이 상차하여 진구하는 정사에 대해 극구 말하고 이어서 책례(冊禮) 때에 낭비를 줄이고 감옥에 지체되어 있는 죄수를 빨리 처결할 것 등을 아뢰니, 상이 답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황급하기가 마치 중류(中流)에서 노(櫓)를 잃어 어떻게 건너야 할지를 모르는 것과 같다. 아, 허물이 실로 내게 있다. 백성에게 무슨 죄가 있겠는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음식을 대하여도 입맛이 없고 앉으나 누우나 편안하지 않다. 더구나 연산(連山)의 일은 말하기도 참혹하다. 교화가 행해지지 않는 것이 매우 부끄러워서 내 절박한 마음이 병중에 더욱 간절하다. 예를 행할 일이 있더라도 어찌 호화롭게 할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이제 상차한 내용을 보건대, 경계한 것이 매우 절실하니, 가까이 두고 보지 않을 수 있겠는가."
3월 27일 무인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전시(殿試) 때의 당해 승지를 파직할 것과 직강(直講) 이태서(李台瑞)를 사판에서 삭제할 것과 가례(嘉禮) 때의 차지 내관(次知內官)을 파직할 것 등등의 일로 잇따라 아뢰었으나, 상이 다 따르지 않자 차례로 정계하였다. 또 아뢰기를,
"근일 도성 안에서 혹독한 여역이 치열하게 일어나 서로 전염되어 죽은 자가 날마다 잇따르고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외방에서 모여든 굶주린 백성은 오로지 진휼의 죽을 먹기 위해 온 것인데 겨울부터 봄까지 뼈에 사무치도록 얼고 굶주린데다가 밤낮으로 한데에 거처하다 보니 바람과 서리에 시달려서 조금만 흔들려 넘어져도 곧 죽고 말므로 시체가 줄을 잇고 도랑이 다 찼습니다.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절로 마음이 놀라고 눈물이 글썽입니다. 해부(該府)와 진휼청은 이러한 상황을 빨리 아뢰어야 할 것인데도 여전히 까닥도 아니하고 있으니, 참으로 놀랍습니다. 한성부와 진휼청의 당상·낭청을 무겁게 추고하소서. 또 진휼청에서 죽을 장만하는 곳을 문밖의 적당한 곳으로 옮기고 그 가운데에서 병이 전염된 무리 또한 구별하여 거처하게 한 다음 각별히 구완하고 치료할 것에 대해 유사를 시켜 여쭈어 정하여 시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3월 27일 무인
행 판중추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상소하여 치사(致仕)할 것을 청하였는데 나이가 일흔에 찼기 때문이다. 상이 도타이 답하고 윤허하지 않았다.
3월 28일 기묘
서필원(徐必遠)을 병조 판서로, 박장원(朴長遠)을 판윤으로, 이정기(李廷夔)를 대사헌으로 삼았다.
평안도 이산(理山) 등 네 고을과황해도 수안(遂安)과 경상도 창녕(昌寧)과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와충청도 영춘(永春)과전라도 운봉(雲峰) 등 두 고을에 다 눈이 내렸는데 서너 치 또는 한두 치씩 땅에 쌓여 녹지 않았다. 여섯 도의 감사가 잇따라 아뢰었다.
3월 30일 신사
이달에 서울에서 굶주리고 앓다가 죽은 수가 1백 50여 인이었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도내에 여역이 날로 치열해지고 있어서 그칠 가망이 없다 하여 향축(香祝)을 얻어 도내의 중앙에서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겠다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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