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9권, 현종 12년 1671년 4월

싸라리리 2025. 12. 16.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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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1일 임오

집의 이단석(李端錫), 장령 윤리(尹理) 등이 아뢰기를,
"‘올해의 전지에 매겨진 세 가지 조세를 받아서 본읍에 두었다가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라는 하교가 계셨습니다. 성상께서 백성의 일을 염려하시는 것은 지극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수령 가운데에는 혹 조정의 뜻에 따라 독촉하여 받는 자도 있고 백성이 바라는 바에 따라 받지 않는 자도 있고 받는 대로 진구에 옮겨 쓰는 자도 있고 이미 받았어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러니, 해조를 시켜 다시 품지(稟旨)하여 명백히 지휘해서 각도에서 준행할 바탕이 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비변사가 회계하기를,
"전세는 법적으로 정해진 세금인데 받아서 본읍에 두었다가 진구에 쓰도록 특별히 허가한 것은 실로 성상께서 백성의 고통을 염려하시는 성대한 뜻에서 나왔습니다. 봄에는 나누어 대여했다가 가을이 되면 상납하게 한 것은 강도(江都)의 쌀을 도로 채우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수령이 혹 받기도 하고 받지 않기도 하며 이미 받았어도 마음대로 쓰지 못하기도 하고 처음에는 받지 않다가 이제 와서 굶어서 죽어가는 백성에게 독촉하여 받는다고 합니다만 그럴 리는 없을 듯합니다. 그러나 대간의 계사는 반드시 들은 것이 있어서 한 것이니, 이왕에 받아 들이지 않은 세금은 잠시 가을 곡식이 성숙하기를 기다리라는 뜻으로 각도에 분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심유(沈攸), 헌납 박지(朴贄), 정언 강석창(姜碩昌) 등이 아뢰기를,
"올해 기근의 참혹은 팔도가 다 같습니다만 함경도 육진(六鎭)이 더욱 심하여, 심지어는 옥수수대를 가루로 만들어 푸성귀 음식에다 섞어 먹으면서 조석에 달린 목숨을 잠시나마 이어 가고 있으니, 열흘을 넘지 못하고 장차 구덩이로 굴러 죽을 것입니다. 육진은 나라의 울타리이므로 각별히 어루만져 돌보아 국가의 은혜로운 뜻을 보이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어사를 보내어 변방 백성을 위로하여 타이르게 하고 이어서 편리할 대로 일을 보게 하여 창고의 곡식을 풀어 굶주린 백성을 진구해 몹시 급한 것을 구제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비국이 회계하기를,
"육진이 당한 기근의 정상은 전해 듣기에 매우 참혹합니다. 그러니 창고에 저축된 것이 있다면 도신(道臣)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도 곡식을 대여하는 것을 막을 리가 없습니다. 이제 어사를 특별히 보내더라도 이미 본도에 곡식이 없고 또 곡식을 옮겨 갈 형세가 못되니 헛되이 갔다가 헛되이 온다면 도리어 국가의 은혜로운 뜻을 펴는 일에 어긋날 것입니다. 그러니 우선 도신에게 창고의 곡식이 있는지 없는지, 혹은 옮겨서 구제할 형세가 되는지를 조사한 뒤에 다시 품처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아뢴 대로 하라. 곡식을 옮길 수 있는 형세가 되면 계문하기 전에 곧 편리할 대로 하라는 뜻으로 분부하라."
하였다.

 

4월 2일 계미

장선징(張善瀓)을 대사헌으로, 홍만용(洪萬容)을 대사간으로, 유혁연(柳赫然)을 형조 판서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고 판서 오정일(吳挺一)의 장지(葬地)로 잡은 곳을 이미 예조에서 적간(摘奸)하여 왔는데도 줄곧 덮어두고만 있으니 매우 미안합니다. 해조를 시켜 빨리 품처하여 나라 사람의 의혹을 풀게 하소서."
하니, 따랐다. 이 뒤 한 달이 넘어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 참판 김만기(金萬基)가 비로소 회계하기를,
"이 도형(圖形)을 보고 상세히 참고해 보니, 경릉(敬陵)의 해자(垓子)가 오정일의 장지에서 14보쯤 떨어져 있으니, 한계의 밖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해자에서 가까운 곳이라 하여 싸잡아 금지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해자와 위전(位田) 안에 들어가지 않았다 하여 그만두라고 명하였다.

 

헌부가 아뢰기를,
"연산(連山) 땅에서 자녀를 삶아 먹은 변은 실로 몹시 굶주림이 절박한 데에서 말미암았으니, 본현(本縣)이 진휼의 정사에 전혀 힘쓰지 않았다는 것을 이것으로 알 수 있습니다. 연산 현감 윤민도(尹敏道)를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논하기를,
"도신이 법에 의하여 그 수령을 죄주기를 청하지 못하였으니, 한 도의 진휼 정사가 허술하였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을 파직하소서."
하니,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그 뒤에 윤민도는 금부의 조율(照律)에 따라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자녀를 삶아 먹은 사람도 곧 죽었다 한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8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3면
【분류】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 인사-임면(任免)

ⓒ 한국고전번역원

 

4월 3일 갑신

상이 숭정전(崇政殿)에 나아가 세자의 초례(醮禮)을 거행하였다.

 

사간 심유(沈攸), 헌납 박지(朴贄), 정언 강석창(姜碩昌)이 아뢰기를,
"지평 이삼석(李三錫)은 고향에 있을 때에 재물을 거두어들인다는 원망을 많이 받았고 조정에 서서는 세력 있는 자에게 빌붙은 자취가 있으므로 세상의 비웃음과 손가락질 거리가 되었습니다. 전에 전라 도사이었을 때 김징(金澄)이 어버이에게 축수하던 날 맨 먼저 뜰에서 절하고 꿇어앉아 태연히 부끄러운 줄을 몰랐고, 그 일이 발각된 뒤에는 감추고 잔소리까지 늘어놓아 이리저리 편리할대로 한 꼴이 뚜렷이 있었습니다. 사대부의 마음가짐이 어찌 이럴 수 있겠습니까. 허물을 다스리고 그른 것을 바로잡는 직임을 결코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였다. 세 번 아뢰자 상이 체차하라고 명하였으므로 정계하였다. 또 아뢰기를,
"경기 도사 조헌경(曹憲卿)은 사람됨이 잔약하고 용렬합니다. 전에 대간이었을 때 거조가 형편없어서 한때에 웃음거리를 끼쳤고, 본직을 제수받아서는 일하는 것이 어두웠으므로 열읍(列邑)에 멸시를 당하였습니다. 이러한 사람을 결코 경기 막부 보좌의 직임에 그대로 둘 수 없으니,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지평 김수오(金粹五)는 사람이 미천하고 명망이 가벼운데 인재가 모자라서 외람되게 제수되었으므로 물의가 비웃고 손가락질한다 하여 체차하기를 청하였는데, 세 번 아뢰어서야 따랐다.

 

간원이 또 아뢰기를,
"임금을 섬기는 도리는 본디 마음을 한결같이 하여 사심이 없어야 합니다. 그런데 예조 참판 이만영(李晩榮)은 경릉(敬陵)에서 적간(摘奸)할 당초에 이미 책임을 면하려는 생각을 가졌고, 가서 살핀 뒤에는 이미 원근의 형세를 잘 알고서도 우물쭈물 허튼말을 하며 사사 건건 핑계대어 반드시 피하려고 꾀하였으니, 용의 주도하게 한 꼴이 참으로 매우 놀랍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우승지 김우형(金宇亨)의 상소가 난잡하고 염치없고 구차한데 대한 정상을 논하여 파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박지·심유가 곧 사실과 다르게 논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다. 강석창이 드디어 인피하기를,
"가례(嘉禮) 때 반드시 복(福)을 다 갖춘 궁료(宮僚)를 선택하려던 것이 나라의 체통에 결국 구차한 결과가 되고 말았습니다만, 대신이 이미 발언하여 이조가 다시 차출하기까지 하였고 【필선 권격(權格)은 복을 갖추지 못하였다 하여 이조가 다시 차출하였는데, 대개 그가 아내를 잃었기 때문이다.】  도감의 크고 작은 집사(執事)도 이미 구별하였으니 김우형의 도리로서는 서둘러 인피하고 들어갔다가 잠시 조정의 의논이 정해지기를 기다려 나아가든지 물러가든지 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스스로 처신할 도리를 생각지 않은 채 공론이 매우 시끄러워도 못 들은 체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일이 지난 뒤에 오만하게 상소하여 전교관(傳敎官)을 가려 차출하는 규례가 따로 없다고 핑계대었으니, 어찌 매우 난잡한 짓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물의를 듣자니, 혹 ‘당초에 필선을 교체한 것이 사체를 손상하였으니, 그대로 죄안(罪案)으로 삼은 것이 도리어 난잡한 결과가 된다.’ 하니, 신의 벼슬을 갈아 주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인피하는 일이 뒤바뀌어 말이 되지 않으니, 내가 그 주된 뜻을 모르겠다."
하였다. 헌부가 처치하기를,
"궁관(宮官)을 다시 차출한 일은 풍속의 말단에 얽매인 것일 뿐이고, 승지가 스스로 처신한 것에서는 염치를 잃은 실상이 보이지 않습니다. 당초에 논계한 것이 이미 신중하지 못하였고 마침내 장황히 말하는 것은 더욱 법문을 지나치게 적용하는 것이 됩니다. 박지·심유·강석창을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김우형의 일은 그 뒤에 간원이 잇따라 두세 번 아뢰다가 정계하였다.

 

제주 목사 노정(盧錠)이 치계하였다.
"본도(本島)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무려 2천 2백 60여 인이나 되고 남은 자도 이미 귀신꼴이 되었습니다. 닭과 개를 거의 다 잡아 먹었기에 경내에 닭과 개의 소리가 들리지 않고 이어서 마소를 잡아 경각에 달린 목숨을 부지하고 있으니, 사람끼리 잡아 먹는 변이 조석에 닥쳤습니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였다.
"떠돌며 빌어먹는 백성이 버리는 갓난아이를 이루 손꼽아 셀 수 없는가 하면 심지어는 옷자락을 당기며 따라가는 예닐곱 살 된 아이를 나무에 묶어 두고 가기도 하며 부모 형제가 눈앞에서 죽어도 슬퍼할 줄 모르고 묻어 주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사람의 도리가 끊어져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

 

4월 4일 을유

사시부터 유시까지 사방이 어두워 마치 먼지가 내리는 듯하였으며 햇무리가 졌다.

 

세자빈이 사전(四殿)을 뵈었다.

 

교서(敎書)를 반포하였다. 그 교서에,
"왕은 이르노라. 세자는 한 나라의 근본이므로 세자의 자리가 정해진 것을 오랫동안 기뻐하였고, 큰 혼인은 만세의 바탕인데 욕례(縟禮)의 협길(協吉)을 비로소 보았다. 이에 임금의 고명(誥命)을 내려 기쁜 마음을 편다. 생각건대 내 어진 큰 아들이 일찍부터 종묘 제사의 중임을 받았다. 처를 두었으면 하는 것은 본디 부모의 상정이며, 집안을 다스리는 데에는 반드시 요조 숙녀의 아름다운 짝이 있어야 한다.
왕세자빈 김씨는 좋은 자질을 타고나고 바른 교훈을 가정에서 이어받았다. 그리하여 유순한 법도와 아름다운 계책은 세자의 덕과 짝하기에 마땅하고, 부드러운 목소리와 법도있는 용태는 이미 육궁(六宮)008)  에서 칭찬이 자자하였다. 이에 융숭한 단면(端冕)의 예로 맞아들이고 상복(象服)009)  의 의식을 갖추어 명하였다. 닭이 울 때부터 잠자리를 여쭙는 데서 부부가 수반하는 것을 보겠고 자손을 위한 가르침을 끼친 데에서 자손이 번창하리라는 것을 점칠 수 있다. 어찌 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기쁨일 뿐이겠는가. 너희 뭇 지방과 기쁨을 같이 해야할 것이다. 아, 관저(關雎)·인지(麟趾)의 아름다움에 추구하면 유업을 맡기기에 다시금 근심할 것이 있겠는가. 홍범 구주(洪範九疇)의 복을 내리면 생성(生成)의 덕을 모두 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대제학 김수항(金壽恒)이 지어 바쳤다.
○頒敎:
王若曰, 元良, 一國之本, 久喜儲位之正名, 大(昏)〔昌〕                        萬世之基, 肇見縟禮之協吉。 肆頒澳汗之誥, 庸布欣慶之懷。 念予冡嗣之賢, 夙膺匕鬯之重。 願爲有室, 固是父母之常情, 在齊其家, 必須窈窕之嘉耦。 王世子嬪金氏, 天賦令質, 家傳義方。 柔則芳猷, 宜配德於貳極; 和聲法相, 已騰譽於六宮。 禮隆端冕之迎, 儀備象服之命。 鷄鳴問寢,載覩夫婦之隨; 燕翼貽謨, 可占子姓之衍。 奚但予一人私喜。 嘉與爾萬方同歡。 於戲! 追關睢麟趾之休, 復何憂於付托; 錫洪範龜疇之福, 庶咸囿於生成。                                    大提學金壽恒製進。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1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4면
【분류】왕실-의식(儀式)

 

4월 5일 병술

박장원(朴長遠)을 대사헌으로, 남용익(南龍翼)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집의 이단석(李端錫), 장령 이하(李夏)·윤리(尹理) 등이 아뢰기를,
"내사(內司)가 수탈하는 폐단이 그지없습니다. 배천(白川)의 공미(貢米)가 올라온 지 이미 오래되었는데 시간을 끌며 받아주지 않고 먼저 뇌물을 요구하며 원수의 공물을 빼앗는다는 말이 자자하게 떠돌았습니다. 이에 본부에서 본군의 색리(色吏)를 추문하였더니 건건마다 승복하였습니다. 위로는 내관(內官)으로부터 아래로는 이서(吏胥)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이 받는 쌀이 많으면 10여 석이고 적어도 서너 섬에 밑돌지 않으며 은화(銀貨)의 갖가지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습니다. 일정량 이외의 것을 요구하여 거두는 것은 본디 해당되는 죄가 있으니, 엄히 다스려서 뒤폐단을 막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러니 당해 내관을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고 별좌(別坐) 등 관리도 모두 유사를 시켜 가두어 엄중히 다스리고 받았던 물건은 낱낱이 거두어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당해 별좌 이하의 관리를 모두 가두어 엄히 조사하여 실정을 알아 내라."
하였다. 헌부가, 별좌 이하가 이미 사실대로 불었으니 차지 내관(次知內官)도 그 죄가 똑같다고 주장하며 한 달 동안 간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함경도 안변부(安邊府)에서 큰바람이 서남방으로부터 일어나 모래를 날리고 돌을 굴려 몇 리 사이에 산이 보이지 않고 일찍 파종한 갖가지 곡식이 날리는 모래에 죄다 손상되어 남아있는 종자가 없었으며, 덕원(德源) 등 여남은 고을에서도 큰바람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4월 6일 정해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선산부(善山府)의 한 여인은 그의 여남은 살 된 어린 아들이 이웃 집에서 도둑질하였다 하여 물에 빠뜨려 죽이고, 또 한 여인은 서너 살 된 아이를 안고 가다가 갑자기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갔으며, 금산군(金山郡)의 굶주린 백성 한 사람이 죽을 먹이는 곳에서 갑자기 죽었는데 그의 아내는 옆에 있다가 먹던 죽을 다 먹고 나서야 곡하였습니다. 천성으로 사랑하는 관계인데도 죽이기도 하고 버리기도 하며 죽음에 대한 슬픔이 먹을 때에는 나타나지 않으니, 윤리가 딱 끊겼습니다. 이는 실로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4월 7일 무자

밤에 달이 헌원 좌각성(軒轅左角星)을 범하였다.

 

4월 8일 기축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정화제(鄭華齊)를 헌납으로, 윤계(尹堦)를 정언으로 이혜(李嵆)를 부교리로, 이완(李浣)을 판윤으로 삼았다.

 

4월 10일 신묘

비변사가 아뢰기를,
"죄수를 즉시 처결하지 않기 때문에 사나운 기운이 치열하게 일어나 죄수가 잇따라 전염되어 앓고 있으니 일하는 것이 매우 태만합니다. 형조의 좌이관(佐貳官)을 모두 추고하소서. 그리고 판서 유혁연(柳赫然)을 곧 패초하여 소결(疏決)하도록 명하여 옥에서 지체되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좌윤 이정기(李廷夔)가 죽었다. 이정기는 당시에 명망이 있기는 하였으나 다른 재능이 없고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청렴하다는 명성이 없었다. 일찍이 수원부를 맡았을 때에 어사에게 탄핵받았는데,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4월 12일 계사

집의 이단석(李端錫), 장령 이하(李夏)·윤리(尹理) 등이 아뢰기를,
"회령 부사 이두진(李斗鎭)은 사람됨이 탐오하여 가는 곳마다 실패를 보았는데 발탁하여 중진(重鎭)에 제수하였으니 이미 매우 난잡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임한 이후에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였습니다. 해마다 흉년이 들고 육진(六鎭)은 더욱 심한 이때에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는 책임을 결코 이 사람에게 맡길 수 없습니다. 또 지난 겨울 무역 시장을 열었을 때에 장사꾼을 쫓고 잡인을 금한다고 큰소리를 치고는 청나라 차인(差人)을 몰래 끌어들여 사사로이 물화를 무역하였는데 매우 낭자하였답니다. 그래서 북방에서 오는 사람이면 다들 말하고 있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였다. 네 번 아뢰어서야 상이 따랐다. 이두진은 그 뒤에 본도에서 조사하여 올린 장계에 따라 금부가 고신(告身)을 삭탈하는 것으로 의율(擬律)하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파직시켰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올해 진휼하는 곳에서 떠돌이들의 주검이 날로 늘어나 도성 문 안팎에 주검을 나르는 수레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청(該廳)에서는 으레 월말에 서계(書啓)하고 있으므로 날짜가 이미 오래 지나서 죽은 자의 수를 제대로 알 수가 없습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닷새에 한 번 아뢰도록 하여 허술한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해골을 묻어 주는 정사는 성스런 왕들이 중히 여기었습니다. 지금 길에서 굶어 죽은 사람이 잇따라 누워 있으니 더욱 유념하여 거행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미 신칙하였는데도 대부분 거두어 묻지 않아서 파리들이 빨아먹도록 버려두고 있으니, 보기에 처참합니다. 해부로 하여금 날마다 살펴보게 하여 혹 한데에 버려두고 일찍 묻지 않은 것이 있으면 당해 부관(部官)을 나문하여 처리하게 하소서.
요즈음 팔도의 장계를 보면 굶거나 여역을 앓거나 불에 타거나 물에 빠져 죽은 사람이 거의 없는 날이 없지만, 겁탈하고 살상하는 도둑의 사건에 대해서만은 원래부터 아뢰는 일이 없습니다. 이것은 대개 도신(道臣)이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따르는 소치이지, 본디 홍수나 가뭄이나 도둑을 아울러 아뢰어야 하는 의의가 아닙니다. 더구나 이제 살상하고 약탈하는 걱정이 곳곳에 일어나고 있어서 앞날의 염려를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해도의 감사를 시켜 열읍(列邑)에 신칙하여 곧 알리게 하고 또 토포사(討捕使)를 엄히 주의시켜 각별히 계략을 써서 붙잡아서 널리 퍼지는 걱정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4월 13일 갑오

정적(鄭樍)을 지평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수찬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좌부승지로 삼았다.

 

4월 16일 정유

이연년(李延年)을 좌승지로, 박지(朴贄)를 장령으로, 조위봉(趙威鳳)을 지평으로 삼았다.

 

간원이 아뢰기를,
"인평위(寅平尉)의 장지를 다른 곳으로 옮길 때에 예장(禮葬)으로 거행하고 묘막을 옮겨 지으라고 하교가 있었습니다만, 생각건대 장지를 옮길 때에 예장하는 것은 본디 법으로는 거행할 일이 아니니, 인평위를 예장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그 뒤에 잇따라 아뢰니, 상이 답하기를,
"이 집에서 장지를 옮기려고 하였으나 이미 주간할 사람이 없어서 일을 시작하지 못하였는데, 만일 이러한 관례의 법이 없다면 또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있겠는가."
하니, 대간이 계사를 정지하였다.

 

4월 17일 무술

삼성 죄인(三省罪人) 이애립(李愛立)이 처형되었는데 전패(殿牌)를 훔쳐 내어 악역(惡逆)을 범하였기 때문이다. 연천(漣川)은 죄인이 그때 살고 있던 곳이기 때문에 혁파에 해당되었다. 이에 대해 허적(許積)이 상에게 아뢰기를,
"고을을 혁파하는 폐단은 끝이 없습니다. 예전에 대간의 계사로 인하여 이미 혁파하였던 고을을 회복하기까지 하였으니, 이제는 혁파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이 뒤로 이러한 변이 있으면 본도에서 잡아 다스려 죄를 주고 아뢰지 말게 해야 할 것입니다."
하고, 김만기(金萬基)는 본도에서 처단하는 것은 사체에 있어서 마땅하지 않으므로 이제부터 다시 혁파하지 말도록 하여 일정한 법으로 정하기를 청하니, 윤허하였다.

 

4월 18일 기해

좌의정 허적이 병 때문에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운 이때에 경은 어찌하여 물러나기를 청하는가. 몸과 마음을 바쳐 일한 끝에 그 노고로 병이 되었으니, 내 염려가 또한 어떠하겠는가. 묘당의 긴급한 문서는 경에게 가서 의논하여 복계(覆啓)하게 할 것이니, 경은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상이 먼저 이미 의원을 보내어 병을 보살피게 하였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였다.

 

4월 19일 경자

장선징(張善徵)을 대사헌으로 삼았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 정언 윤계(尹堦) 등이, 해조를 시켜 서울과 지방에 여역이 가시게 기도하는 제사를 빨리 지내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예조가 무신년010)  의 전례에 따라 날을 잡지 말고 서울과 지방의 여러 곳에 경건하고 정성스럽게 제사를 지내게 할 것을 청하니, 드디어 중신(重臣)을 보내어 북교(北郊)와 민충단(愍忠壇)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외방의 험천(險川)·쌍령(雙嶺)·금화(金化)·토산(兎山)·강화(江華)·진주(晋州)·남원(南原)·금산(錦山)·달천(㺚川)·상주(尙州)·원주(原州)·울산(蔚山) 같은 곳에는 향(香)과 축판(祝版)과 폐백만을 보내고 본도에서 제관(祭官)을 가려 차출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4월 20일 신축

우의정 홍중보(洪重普)가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성품이 너그럽고 넓어서 남과 거슬리는 일이 없었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지내면서 성적이 많았었으나, 정승에 제수되어서는 시세에 맞추어 행동하였을 뿐이고 건의한 바가 없었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9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홍중보는 성품이 너그럽고 넓어서 남과 거슬리는 일이 없었고 내직과 외직을 두루 지내면서 성적이 많았었으나, 정승에 제수되어서는 시세에 맞추어 행동하였을 뿐이고 건의한 바가 없었다.
○辛丑/右議政洪重普卒。
【史臣曰: "重普性寬弘, 與物無忤, 歷職內外, 多有聲績, 及拜相, 與時浮沈而已, 無所建明。"】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0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94면
【분류】역사-편사(編史)

 

4월 21일 임인

대사간 남용익, 사간 이합, 정언 윤계가 아뢰기를,
"전에 헌부가, 각 아문에서 곡물을 팔 일이 있으면 혹 호구에 팔거나 또는 저자의 사람에게 주어 도성 백성들에게 조금이라도 혜택을 베풀고 간사한 자가 이익을 독차지하는 폐단을 막을 것에 대해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접때 탑전에서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훈국의 곡물을 팔려 하는데 전에 대간의 계사가 있었으므로 여쭈지 않을 수 없다는 뜻으로 아뢰었더니, 상께서 대간의 계사는 대개 이익을 탐내는 무리 때문에 나온 것인데 또 여쭈어야 할 필요가 뭐가 있겠느냐고 하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한결같이 대간의 계사에 따라 저자에 내어 주어 값이 폭등하는 걱정을 조금이라도 늦추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양향청(粮餉廳) 곡물 6백여 석을 수결(手決)을 핑계삼아 당상과 낭청이 나누어 차지하고 그 값을 반으로 줄여 한꺼번에 죄다 흩어 주어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게 되었습니다. 당초 대간의 계사는 이익을 독차지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것이었을 뿐이니, 탑전에서 다시 여쭌 것도 이미 매우 잗단 행동이었고, 친히 성상의 분부를 받은 뒤에도 사체를 돌보지 않고 여전히 예전의 버릇을 따른 것은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고, 다섯 번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2일 계묘

집의 이단석(李端錫), 장령 이하(李夏)·박지(朴贄) 등이 아뢰기를,
"여름에 지내는 종묘의 대제(大祭) 때 헌관(獻官)이 대부분 병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는데 혹 추고하자고 청한 뒤에야 비로소 와서 참여한 자도 있고 집에 있으면서 끝내 나아가지 않은 자도 있으니, 사체로 보건대 매우 놀랍습니다. 당해 헌관으로서 실지로 차정된 자나 예비로 차정된 자를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무겁게 추고하라고 명하였다.

 

4월 23일 갑진

이익(李翊)을 우부승지로, 정치화(鄭致和)를 내의원 도제조로, 오시복(吳始復)을 부수찬으로 삼았다.

 

4월 26일 정미

사간 이합(李柙),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윤계(尹堦)가 아뢰기를,
"경상 우병사 정영(鄭韺)은 본디 성품이 거칠고 야비하여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고 있는데 집이 가까운 곳에 있어 짐바리가 잇따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포(軍布)는 여러 가지로 점검하여 물리치고는 반드시 곱게 짜고 척수가 긴 것만을 받으며 심지어는 제 집 사람을 시켜 바쳐야 할 사람에게 되팔게 하고 있으므로 군졸들이 원근을 헤아리지 않고 가서 사는데 마치 저자나 같습니다. 그 밖의 수탈도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겸사복 장(兼司僕將) 양일한(楊逸漢)은 문벌이 비천하고 성질과 행실이 어리석고 도리에 어긋납니다. 일찍이 수령으로 있을 때에 그의 외할아버지 상을 당하였는데 장사를 치르는 날에 외할아버지가 비천한 것을 부끄럽게 여겨 끝내 들르지 않고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지나갔으므로, 그 고을 사람들이 모두 침뱉고 욕하였으며 동료들이 같이 있기를 부끄러워하고 있습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4월 28일 기유

상이 경덕궁(慶德宮)에서 옛 거처인 창덕궁(昌德宮)으로 옮기고, 왕대비·세자·빈궁도 이날 옮기었다.

 

4월 29일 경술

대왕 대비와 중전이 옛 거처인 창덕궁으로 옮기었는데 28일은 구기(拘忌)가 있기 때문이었다.

 

서울 안에 진휼하는 곳이 세 군데인데 한 곳에 죽을 먹으러 가는 굶주린 백성이 혹 1만여 인 또는 7, 8천 인 또는 5, 6천 인이었다. 이 달에 죽은 자가 무려 5백여 인이나 되었고 길에 쓰러져 죽은 무리도 매우 많았다. 한데에다 버려둔 채 거두지 않았다 하여 비국의 계사에 따라 하옥되어 논죄받은 부관(部官)이 전후로 한둘이 아니었으나, 죽은 자가 잇따라서 각부(各部)가 즉시 매장하기에는 힘이 미치지 못하였다. 각도에서 굶주려 죽거나 병을 앓아 죽은 자에 대해 보고한 것도 1만여 인이었다. 경상·전라 등 도의 각 고을에서 죽을 먹으러 간 굶주린 백성의 수는 한 도를 합할 때 많으면 20여 만이었고 적어도 18, 19만에 밑돌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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