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1일 신해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윤계(尹堦) 등이 상차하여, 진휼의 정사가 제대로 되지 않아서 주검이 쌓이는 참혹함을 불러왔으므로 자신을 책망하는 교서를 내리고 덕을 닦고 허물을 살피는 도리를 다해야 한다고 극구 말하고, 이어서 어사를 나누어 보내어 출몰하며 진휼의 정사를 살피게 하고 정초청(精抄廳)의 더 뽑은 군사는 상번(上番)을 들지 말게 하고 금군의 별군직(別軍職)과 훈국(訓局)·어영(御營)의 마군(馬軍) 등의 마료(馬料)를 줄이고 10월까지 전교(箭郊)에다 방목(放牧)하게 하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문서가 적체되는 폐단에 대해 전후로 신하들이 번갈아 뵙고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끝내 듣지 않으시고, 소가 성상의 눈에 거슬리면 반드시 여러 날 동안 유중(留中)하여 미안한 뜻을 보이시고, 대간의 계사 중에 성상의 마음에 어긋나는 것이 있으면 불윤(不允) 두 자로 끝내 굳게 물리치시고 맙니다. 접때 내사(內司)의 일 때문에 헌부가 환관들을 죄주자고 청하였으나 끝내 윤허받지 못하였습니다. 궁위(宮闈)가 엄하지 않아서 안팎 여인들의 출입이 무상하여 여역이 또한 궁중에까지 번지고 있다니 듣기에 놀랍고 두렵습니다. 그러므로 더 경계하고 단속하여 미세할 때에 미리 막아야 하겠습니다."
하니, 답하기를,
"아, 나라의 형세가 황급하고 형편없어 기근과 여역으로 백성이 장차 다 죽게 되었다. 허물은 실로 나에게 있는데 백성이 그 재앙을 받고 있으니, 여기까지 말하다 보면 절로 맥이 풀린다. 차자 가운데의 이야기는 뜻이 매우 절실하여 내 감탄하였다. 마음에 두고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차자 가운데 의논하여 처리할 수 있는 일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리하게 하겠다."
하였는데, 그뒤 등대하였을 적에 상이, 진구하는 일이 한창인데 수령을 교체하면 역시 폐단이 크다 하여 염탐하는 일을 잠시 보류하라 하였고, 제주 어사에 있어서는 묘당의 의논이 다 보내야 한다고 하자, 상이 따랐다. 더 뽑은 정초청 군사의 상번을 멈추는 일에 있어서는 서필원(徐必遠)이 불가하다 하였는데,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차자 가운데에 이른바 햇수를 한정하여 곡식이 조금 잘 되는 이전까지 상번하지 말게 하자는 것은 그 말이 매우 옳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허적이 또 전마(戰馬)를 방목하는 일의 편리 여부에 대해 신하들에게 묻기를 청하였는데, 서필원은 그 불가함을 극구 아뢰면서 마료를 조금 줄이기를 청하였고, 유혁연(柳赫然)은 쓸데없는 말을 가려서 방목하고 그 마료는 줄이지 말자고 하였다.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그 가운데에서 쓸데없는 말을 방목하고 그 나머지는 마료를 줄이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하자, 허적이 그 의논이 가장 적절하다고 찬성하니, 상이 또한 윤허하였다.
○辛亥朔/大司諫南龍翼、司諫李柙、獻納鄭華齊、正言尹堦等上箚, 極言賑政不得其宜, 以致積尸相枕之慘, 宜降罪己之敎, 克盡修省之道, 仍請分遣御史, 出沒看賑, 精抄廳加抄之軍, 勿令上番, 禁軍別軍職、訓局ㆍ御營馬軍等馬料蠲減, 限季秋放牧箭郊。 且曰:
文哲積滯之弊, 前後臣僚, 交謁更陳。而殿下終不動聽, 章疏見忤於睿鑑, 則必留中累日, 以示未安之意, 臺啓有拂於聖心, 則以不允二字,終爲牢拒之地。 頃以內司之事, 憲府請罪內璫, 終不蒙允。宮闈不嚴, 內外女人, 出入無常, 癘氣亦延於深嚴之地, 聞來驚悚。 宜加警飭, 以爲防微杜漸之地焉。 答曰: "嗚呼! 國勢遑遑, 不能成樣, 饑饉癘疫, 民將盡劉。 咎實在予, 民受其殃, 言之至此, 不覺氣短。 箚中說話, 語意切至,予庸歎尙。 可不留心而服膺焉。 箚中可以議處事, 當令廟堂, 議而處之。" 及後登對, 上以賑事方張, 守令遞易, 亦甚有弊, 姑徐廉問之擧, 濟州御史則廟議皆以爲可遣, 上從之。 至於加抄精抄停番一款, 徐必遠以爲不可, 許積曰: "箚中所謂限年穀稍登間, 勿令上番云者, 其言極是, 不可不從也。" 上許之。 積又以戰馬放牧事, 請問便否于諸臣,徐必遠極陳其不可, 而請稍減馬料, 柳赫然欲擇其無用者放之, 而不減其料, 金壽恒曰: "其中無用之馬放之, 其餘則減料何如", 積贊其議最精, 上亦許之。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1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9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호구-호구(戶口) / 왕실-국왕(國王) / 왕실-종사(宗社) / 행정-지방행정(地方行政) / 교통-마정(馬政) / 군사-군정(軍政)
평안도 안주(安州)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쳐서 벼락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5월 2일 임자
경기 양주(楊州) 등 고을에 우박이 내리고 양천(陽川) 등 고을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간원이 아뢰기를,
"도성에서 군사를 거느리는 관원은 그 직임이 매우 중대하므로 결코 잠시도 비울 수 없고 멀리 나가 오래 머물러 있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어영 대장 이여발(李汝發)은 병으로 군무를 폐기한 지 거의 한 해가 되도록 헛되이 직함을 가지게 놔두었으니 이것만도 이미 매우 한심한 일이었는데, 더구나 이제는 휴가를 청하여 외방에 나간 지 또 한 달이 되어 막중한 군으로 하여금 오랫동안 장수가 없는 군졸이 되게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5월 3일 계축
사족의 여인 영선(英善)을 간통한 전 군수 유휘(柳徽)는 죄가 의심스럽다 하여 대신의 의논을 받아들여 참작하여 정배하였고, 이신구(李藎耉)는 형수를 무함한 죄로 특별히 형추하고 유배하게 하였다.
경상도 고령현(高靈縣)에 우박이 내렸다.
5월 4일 갑인
밤에 유성이 직녀성(織女星) 아래에서 나왔는데 빛이 붉고 땅을 비추었다.
황해도 금천(金川) 등지에 우박이 내렸다.
5월 6일 병진
평안도 순천(順川) 등의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크기가 달걀만하였다.함경도 삼수(三水) 등 고을에 눈이 내려 밀보리가 태반이나 얼어 죽었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아뢰기를,
"듣건대, 진휼하는 곳에서 죽을 먹이는 일을 이달 15일에 중지한다고 하니, 세 곳에서 죽을 먹는 백성이 마침내 돌아갈 곳이 없어 죽게 될 것입니다. 특별히 유사에게 명하여 잠시 동안 홍제원(弘濟院)의 진휼하는 한 곳을 그대로 남겨 두고 가을까지 죽을 쑤어 주어 혜택을 끝까지 베푸소서. 그리고 삼남(三南)의 민사도 매우 염려스러우므로 보릿가을을 할 때가 되었다고 진휼의 정사를 중지할 수 없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고을은 빨리 방백(方伯)을 시켜 요리하여 끝까지 구제하게 하는 것이 가까운 데를 미루어 먼 데에 미치고 차별없이 사랑하는 도리에 맞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여 말해 준 정성을 내 아름답게 여긴다.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 인견할 때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진휼의 정사를 중지할 것인지의 여부에 대해 구애되는 점이 많이 있는데, 정유악이 이른바 한 곳만을 남겨 둔다는 것도 매우 어렵습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정유악이 아뢴 바는 대체로 좋으나, 국가의 형세가 결코 지탱할 수 없을 뿐더러 한 곳만 남겨 두는 것도 과연 폐단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지금 밀보리가 전부 흉작이어서 결코 끝까지 구제할 희망이 없으니, 신의 생각으로는 반드시 살릴 수 없을 사람에게 헛되이 쓰는 것보다 조금 저축을 남겨 두어 토착민을 구제하는 것이 나을 것이므로 모두 폐지하는 것만 못하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여러 신하의 의논이 다 폐지해야 한다 하니, 정유악이 드디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각종 마료(馬料)가 한 달에 1천 석에 가깝고 정초청(精抄廳)의 마병(馬兵)은 그리 긴요할 것이 없는데도 일체 폐지하여 진휼에 옮겨 썼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습니다. 이러하고도 백성을 진구할 곡식이 없다고 한다면 믿을 백성이 있겠습니까. 설사 둔위(屯衛)가 성대하고 말이 살쪘다 하더라도 백성이 다 죽어가 나라의 근본이 거꾸러진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그것을 장차 어디에다 쓸 것입니까? 신이 어리석은 소견을 함부로 아뢰어 채용되지 못하였고, 더구나 거둥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바야흐로 추감을 받고 있으니, 갈아서 물리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헌부가 처치하여 추함(推緘)을 아직 감결(勘決)하지 않았다 하여 갈았다.
○正言鄭維岳上疏, 略曰:
伏聞賑所設粥, 將以今月十五日停罷云, 三處就粥之民, 終必無所歸而死。 特命有司, 姑爲因留弘濟院賑所一處, 限秋設粥, 以終其惠。 且三南民事, 亦甚可慮, 不可諉以麥秋, 輟其賑政。 其中尤甚之邑, 亟令方伯料理, 終始救活, 允合推近及遠一視同仁之道。 上答曰: "憂國進言之誠, 予用嘉之。 當令廟堂議處焉。" 及後引見時, 許積曰: "罷賑與否, 多有窒礙, 而鄭維岳所謂只存一處者, 亦甚難便。" 閔鼎重曰: "維岳所陳, 大體儘好, 而不但國家形勢, 決難支當, 只存一處, 亦未知其果能無弊也。" 徐必遠曰: "卽今兩麥全失, 決無終始救活之望, 臣謂與其虛費於必不可活之人, 寧留小儲, 以救土着之民。 爲得宜, 不如一倂罷之也。" 諸臣之議, 皆以爲可罷, 維岳遂引避, 略曰: "諸色馬料, 一朔近千, 精抄馬兵, 無甚緊關, 而亦未聞有一切停罷移用賑恤之擧, 如此而謂賑民之無粟, 民誰信之? 假令屯衛雖盛, 馬畜雖肥, 民類將盡, 邦本旣蹶, 則未知國家將焉用之。 臣妄陳愚見, 言不見採, 況以擧動不參, 方被推勘, 請命遞斥。" 憲府處置, 以推緘未勘, 遞之。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5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인사-임면(任免)
5월 7일 정사
경기 양지(陽智) 등 고을의 봄보리에 갑자기 황기(黃氣)가 생겨 거의 다 말라 죽었고 해서(海西) 각 고을의 밀보리도 다 그러하였다. 밭에 거두어들일 것이 없어서 굶주림이 날로 심해졌다.
5월 8일 무오
원양도(原襄道) 평강(平康)·철원(鐵原)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는데 철원의 우박은 크기가 바릿대만하였다.
5월 9일 기미
상이 침을 맞았는데 응어리가 곪았기 때문이다. 정치화(鄭致和)가 약방 도제조로서 입시하였다가 앞으로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이미 매우 위태로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강도(江都)·남한(南漢)에 저축된 것이 하나도 없이 바닥이 났고 백관에게 주는 녹에 있어서는 오로지 관서(關西)에 의지하고 있는데 또한 잇대기 어려운 걱정이 있습니다. 또 듣건대, 영남의 역졸(驛卒)이 거의 다 굶어 죽어서 국가의 명령을 전하지 못하게 되었다 합니다. 더구나 지금 밀보리에 황증(黃蒸)이 들어 시드는 재해는 예전에 없던 것인데 거기다 누리까지 또 뒤따라 치열하게 일었으니, 앞날의 그지없는 염려가 지난날보다 심하게 되었습니다. 지금 바라는 것은 오직 전하의 한 몸에 달려 있을 뿐인데, 조정의 하는 일을 보면 매우 그렇지 않은 점이 있습니다. 대저 국가에서 대간을 두는 것은 그들이 말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인데, 대각의 신하가 논쟁한 것을 시행한 것이 아주 적으니 근일 내사(內司)·내관(內官)의 일에 대해 논한 것이 곧 그 한 가지 일입니다. 전하께서 따르지는 못하시더라도 때때로 또 기를 꺾으시는 것은 또한 무엇 때문입니까. 언로(言路)의 막힘이 근일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고 보면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된 것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없습니다. 또, 삼남(三南)은 본디 국가의 근본이라 하는데 사망하는 우환이 다른 도보다 더욱 심한 데다가 밀보리가 또 여물지 않아서 실로 구제할 방책이 없으니, 간신히 살아 남은 가엾은 백성도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생각하건대, 전하께서는 구중 궁궐에 깊이 계시므로 필시 그 위급한 정상을 죄다 통촉하지 못하고 계실 것으로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날 흉년의 참혹함은 삼남이 더욱 심한데 앞날의 일을 어떻게 꾸려 나가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근년에 혜성(彗星)의 변이 있었을 때 다들 병화가 있을까 근심하였습니다. 그때 천문을 잘 아는 자가 ‘어느 해에 반드시 기근과 여역으로 주검이 쌓이는 참변이 있을 것이다.’ 하였는데, 그 말이 과연 들어맞았습니다. 이 지경에 이르러 존망이 이미 판명되었으니, 전하께서 두렵게 여겨 덕을 닦고 허물을 살펴 분발하여 일으키지 않으신다면 어떻게 천심(天心)을 돌려서 대명(大命)을 잇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5월 11일 신유
정지화(鄭知和)를 예조 판서로, 이하(李夏)를 교리로 삼았다.
삼성 죄인(三省罪人)인 가산(嘉山)의 사노(私奴) 김돌(金突)과 양녀(良女) 옥장(玉將)이 처형되었다. 김돌은 옥장의 집 종으로서 옥장과 간통하였는데, 감사의 계문에 따라 삼성에 명하여 국문하게 하였더니, 모두 자복하였다.
비변사가 아뢰었다.
"본사의 낭청을 나누어 보내어 동서도(東西道)의 병이 든 사람을 적간(摘奸)하게 하였더니, 두 활인서(活人署)를 합하여 1천여 인이었고 사막(私幕)에 있는 자가 또 7천 8백 60여 인이었는데 다 진휼청의 쌀로 마른 양식을 계산하여 주었습니다만, 바야흐로 막에서 나간 자가 얼마나 되는지 모르니 죽은 자가 많다는 것을 이것으로 미루어 알 만합니다."
5월 12일 임술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집의 이단석(李端錫), 지평 정적(鄭樍) 등이 아뢰기를,
"접때 홍제원(弘濟院)의 진휼하는 곳에서 굶주린 백성이 고한 바에 따라 도둑 여섯 명을 잡았는데, 흉악한 무기와 훔친 물건이 많았습니다. 포도청에 넘겨주어 엄하게 조사하게 하였더니, 포도 군관(捕盜軍官)이 곧 잡아가지 않고 군졸만 시켜 지키게 하다가 심지어는 그 가운데에서 사나운 자 5명이 달아나 버렸고, 진휼청에 문서로 알릴 때에는 모르는 자 두 사람을 마음대로 채웠으니, 전후 농간하고 조종한 정상이 매우 밉습니다. 또 대장은 엄숙 명료하게 호령하지 못하여 도둑이 방자한 짓을 하도록 버려두었고 진휼청에서 잡은 도둑마저도 놓쳐 막관(幕官)이 마음대로 농간을 부리게 하였으니, 평소에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또한 면할 수 없습니다. 포도 대장을 무겁게 추고하고 종사관(從事官)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전 찰방 임홍망(任弘望)은 사람됨이 치우치고 막혀서 하는 일이 괴이한 것이 많습니다. 일찍이 우승(郵丞)을 맡았다가 이 때문에 파출되었고, 도감의 감조관(監造官)이 되어서는 또 윗관료와 하인이 서로 다툰 일 때문에 말한 것이 더럽고 도리에 어긋났으며 거조가 전도되고 광망하였으므로 듣는 자가 모두 놀라고 웃었습니다. 이러한 사람이 어찌 주서(注書)의 청선(淸選)에 맞겠습니까. 주서로 천거된 가운데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13일 계해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올해에 죽은 수를 각도에서 대부분 사실대로 아뢰지 않았으니, 전하께서 사람들이 장차 다 죽게 되었다는 것을 어떻게 아시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도성 안도 오히려 두루 알지 못하는데, 더구나 외방이겠는가."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경기의 보리가 처음에는 무성하게 되는 듯하다가 또 황증의 재해가 있어서 성숙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 지금 군신 상하가 망극할 뿐 다시금 어떻게 해볼 수 있는 방책이 없습니다. 예로부터 국가가 망하는 것은 혹 말을 달려 사냥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사치하며 놀고 즐기기 때문이기도 합니다만, 신은 전하께서 결코 이러한 일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생각하건대, 임금의 한 마음은 하늘과 일치하는 것인데 전하께서는 강건(剛健)한 덕이 부족하여 분발하고 가다듬어 과단성을 발휘하신 적이 없고, 또 대간의 계사는 반드시 죄다 잘 되었다고는 본디 할 수 없으나, 따를 만한 말이 있더라도 번번이 윤허하지 않는다고 비답하시니, 이것이 또한 신들이 답답하게 여겨 온 것입니다.
이제부터 전하께서 늘 스스로 책려하시되 ‘우리 조종께서 부탁하신 나라가 나에게 달려 있는데 지금 백성이 다 죽으면 나라를 어떻게 보존하겠는가.’ 하시어 한결같이 근심하고 위태롭게 생각하기를 마치 난리 가운데에 있는 듯이 하신다면 위태로움을 바꾸어 편안하게 만들 수 있음은 또한 이때에 쉽게 할 수 있습니다."
하였다.
상이 좌상 허적에게 명하여 복상(卜相)하게 하여, 원임(原任) 정치화(鄭致和)를 좌의정으로, 송시열(宋時烈)을 우의정으로 삼고, 허적을 높여 영의정으로 삼았다. 민희(閔熙)를 형조 판서로 삼고, 이민적(李敏迪)을 발탁하여 우윤으로 삼았는데,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대신이, 종2품은 사람이 가장 모자란다 하여 차례로 높여 쓸 것을 번번이 아뢰었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도성의 습조(習操)와 문신 시사(文臣試射)·월과 삭서(月課朔書)·춘첩(春帖) 등의 일을 멈추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도성의 군사가 병을 앓아 죽은 자가 매우 많으니 초가을까지 습조를 멈추게 하여 소생할 수 있게 해야 하겠습니다. 또 문신 시사·월과 및 춘첩은 모두 겉치레이니 모두 멈추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삼남(三南)의 감사·수령은 모두 가을 곡식이 성숙할 때까지 바꾸지 말라고 명하였다. 영상 허적이, 각도의 수령은 이미 보릿가을을 지냈고 처음에는 부지런히 하지만 나중에는 게을러지는 것이 본디 사람이면 똑같은 것인데 또 잉임(仍任)시키는 것은 마땅하지 않을 듯하다 하여 차례로 차출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삼남은 더욱 심하게 재해를 입었으므로 교체함에 폐단이 있다고 여겼기 때문에 특별히 명을 내린 것이다.
5월 14일 갑자
전라도 무주(茂朱)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사관을 우의정 송시열에게 보내어 제때에 올라와 함께 위급한 시국을 구제하자는 뜻으로 하유하니, 송시열이 말하기를,
"집안에 구기(拘忌)하는 병이 있으니 조금 잠잠하기를 기다렸다가 미미하나마 충심을 아뢰겠습니다"
하고, 드디어 오지 않았다.
고 교리 오달제(吳達濟)의 집에 상(喪)을 치를 때 필요한 물품을 내렸는데, 오달제의 처자가 여역으로 열흘 안에 잇따라 죽었기 때문이다. 김수항(金壽恒)이 말하기를,
"오달제의 어미와 처자는 일찍이 인조 때에 늠급(廩給)의 은혜를 받기까지 하였는데 이제 그의 처자가 한꺼번에 모두 죽었으니 매우 가엾은 일입니다. 돌봐주는 은정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그 뒤에 이단하(李端夏)의 청으로 인하여 3년 동안 늠료(廩料)를 주게 하였다. 진휼 낭청 정수선(鄭壽先)이 진휼의 장소에서 여역에 걸려 죽었는데, 정치화(鄭致和)가 그가 진휼의 일에 마음을 다하였다 하여 휼전(恤典)을 베풀기를 청하니, 또한 해조를 시켜 상을 치르는 데 필요한 물품을 지급하게 하였다.
5월 15일 을축
전라도 태인현(泰仁縣) 사람 이규(李逵)가 갑자기 미친 병을 앓아 스스로 호랑이 귀신이라고 하며 제 아들을 물어 죽였는데, 도신(道臣)이 계문하였다.
평안도 정주(定州) 등 고을에서 바닷물이 넘쳐서 연변의 둑과 밭이 터져 벼와 곡식이 손상을 많이 입었다.
좌의정 정치화가 상차하여 갈아 주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국가가 이 지경에 이르렀고 경은 두 조정에서 은혜를 받았으니 아무렇지 않게 보아 넘겨서는 안 될 것이다. 일찍 공무를 행하여 내 희망에 부응해야 한다."
하고, 드디어 사관을 보내어 하유하였다.
각도의 굶주린 백성에게 진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는데 보릿가을 철이 되었고 또 안팎의 저축이 다 떨어졌기 때문이다. 서울의 세 군데 진휼하는 곳의 굶주린 백성이 모두 3만 2천 40여 인이었다. 서울 백성 1만 9천 5백 70여 인을 제외하고 파하여 본토로 돌아가는 외방의 굶주린 백성에게 각자의 여정을 셈하여 돌아갈 때에 먹을 양식을 차등있게 나누어 주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더욱 심한 자에게는 15일 분의 죽거리를 주었다. 병에 전염된 자에게는 각각 양식을 주고 활인서(活人署)를 시켜 치료하게 하고, 의지할 데 없는 어린 무리에게는 따로 양식거리를 지급하되 진휼하는 곳을 설치하였을 때의 감관(監官)에게 주어 그 친속 또는 수양할 사람을 찾아서 구분하여 처리하게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외방에는 혹 보리가 익지 않아서 기한이 지나도록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있고 서울에는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것이 세 군데나 되고 또 중신(重臣)을 가려서 감독하게 하였으니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진구할 때에만 죽는 자가 잇따랐을 뿐이 아니었고 더구나 밀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라는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 텐데 또 죽을 쑤어 구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는 비록 국가의 재정이 다 비었기 때문이겠지만 각 아문에 저축한 것으로 말하면 남은 것이 있으니,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지극한 정성으로 처리하게 하였다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석 달 동안 어렵게 부지런히 구제한 끝이라 다시는 어쩔 수 없다고 핑계대어 먹여 주기를 바라는 저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운(國運)과 관계된 것인가. 비통하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6면
【분류】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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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외방에는 혹 보리가 익지 않아서 기한이 지나도록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곳이 있고 서울에는 진휼하는 장소를 설치한 것이 세 군데나 되고 또 중신(重臣)을 가려서 감독하게 하였으니 지극하다 하겠다. 그러나 바야흐로 진구할 때에만 죽는 자가 잇따랐을 뿐이 아니었고 더구나 밀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었으므로 반드시 죽고야 말 것이라는 상황을 눈으로 보았을 텐데 또 죽을 쑤어 구휼하는 일을 그만두었다. 이는 비록 국가의 재정이 다 비었기 때문이겠지만 각 아문에 저축한 것으로 말하면 남은 것이 있으니, 묘당의 신하로 하여금 지극한 정성으로 처리하게 하였다면 또한 죽는 것을 보고만 있게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석 달 동안 어렵게 부지런히 구제한 끝이라 다시는 어쩔 수 없다고 핑계대어 먹여 주기를 바라는 저 백성으로 하여금 하루아침에 모두 구덩이에 빠지게 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국운(國運)과 관계된 것인가. 비통하다.
○罷各道飢民賑餽, 以節屆麥秋, 且緣內外儲蓄之罄竭也。京城三賑所飢民, 合三萬二千四十餘人。 除都民一萬九千五百七十餘人外, 方飢民之罷歸本土者, 計其道里, 分給歸糧有差, 其中尤甚者, 給十五日粥資。 染病者各給乾糧, 使活人署救療, 兒弱無依之類, 別給糧資, 授諸設賑時監官, 訪問其親屬, 若收養之人, 以爲區處之地。
【史臣曰: "外方則或有麥未熟, 而過限設賑之處, 京中設賑, 至於三所, 而又擇重臣以監之, 可謂至矣。 然不但方賑之時, 死者相續, 況牟麥大無, 目見必死之狀, 又罷設粥。 雖緣國用之匱竭, 至如各衙門所儲, 猶有餘地, 若使廟堂之臣, 至誠料理, 則亦不至於立視其死。 而今乃以辛勤救活於三朔之餘, 而諉之以無復奈何, 使彼仰哺之赤子, 一朝擧顚於溝壑, 此豈國運之所關耶。 痛哉。"】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6면
【분류】역사-편사(編史)
5월 16일 병인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함경도 각 고을에서 마소의 돌림병이 크게 치열하여 개 돼지까지도 전염되어 죽었다. 함흥(咸興)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쳐서 한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5월 17일 정묘
다시 백성으로 하여금 버려진 아이를 수양하게 하였는데 사목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에 반포하였다.
도성의 기근이 심하기 때문에 민호(民戶)의 대소에 따라 차등을 두어 분조(分糶)하였다. 강도(江都)·관서(關西)의 쌀과 좁쌀을 전후에 나누어 준 것이 2만 6천 5백여 석이었다.
5월 18일 무진
해에 겹 햇무리가 있었는데 안은 붉은 색이고 밖은 푸른 색이었다.
윤진(尹搢)을 정언으로, 이경억(李慶億)을 판윤으로 삼고, 김만기(金萬基)를 발탁하여 예조 참판으로 삼았다.
5월 19일 기사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 정언 윤계(尹堦) 등이 아뢰기를,
"접때 본원이 직방(直房)에 좌기(坐起)하였을 때에 한 관원이 말을 타고 곧바로 돈화문(敦化門) 앞을 지나갔으므로 괴이하기 그지없어 뒤미처 성명을 물었더니, 내농포 차지 내관(內農圃次知內官) 최흠(崔欽)이었습니다. 그 무식하고 방자한 정상이 매우 놀라우니,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올해에 굶주리거나 병을 앓아 죽은 참상은 실로 만고에 없던 것입니다. 그런데, 양남(兩南)에서 아뢴 수는,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이 24만 2천 5백여 인이고 병으로 죽은 자가 5백 90인이었으며 전라도의 굶주린 백성이 21만 2천 3백여 인이고 병으로 죽은 자가 2천 80인이었습니다. 진휼한 곳에 나아간 수가 이처럼 많다면 죽은 자가 이것뿐일 리 만무합니다. 그런데 도신(道臣)이 수령의 보고만을 따라 범연히 치계하였으니,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를 모두 무겁게 추고하고 각 고을에서 죽은 수를 다시 살펴서 아뢰게 하여 수령을 논죄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5월 20일 경오
한성부가 아뢰기를,
"쓰러져 있는 주검을 묻는 일에 대해 국가에서 신칙을 엄명하게 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마는, 어제 낭청을 보내어 적간(摘奸)하게 하였더니, 남부(南部)에 속한 경내에 쓰러져 있는 주검이 더욱 많아서 성안과 성밖에 있는 것이 77구나 되었는데 혹 머리뼈만 남은 것도 있었습니다. 해부의 관원이 즉시 묻지 않았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것으로 보건대 진휼을 파한 뒤에 부관(部官)이 전혀 마음을 쓰지 않은 정상이 매우 밉다. 해부의 관원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이때 내간(內間)의 궁인(宮人) 중에서 의심스러운 병 때문에 질병가(疾病家)에 내보냈던 자가 잇따라 죽었고, 도성의 사대부로서 전후 죽은 자도 수가 많았으며, 심지어는 온 집안이 모두 전염되어 열 사람 가운데에서 한 사람도 낫지 않았다.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와 각처의 사막(私幕)에서 병을 앓다가 죽은 자와 길에 쓰러진 주검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각부(各部)에서 죄다 묻지 못하고 구덩이에 가져다 두는데 동서교(東西郊) 10리 안에 쌓인 주검이 언덕을 이루고 빗물이 도랑에서 넘칠 때에는 주검이 떠서 잇따라 내려갔다. 도성에서 이처럼 사람이 죽는 참상은 예전에 없던 것이다.
5월 21일 신미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박장원(朴長遠)을 공조 판서로, 이선(李選)을 교리로, 이유태(李惟泰)를 이조 참의로 삼았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연이어 차자를 올려 면직을 청하니, 상이 온화한 말로 타이르고 윤허하지 않자 드디어 출사하였다.
원양도(原襄道) 이천(伊川) 등 고을에 크게 바람이 불고 또 우박이 내렸는데 큰 것은 달걀만하고 작은 것은 새알만하여 하루가 지나도 녹지 않았다.
양서(兩西)의 감사에게 명하여 평안 감영에 저축되어 있는 군목(軍木) 2백 동(同)으로 보리를 사서 관향적맥(管餉糴麥) 4천 석과 함께 배로 서울로 실어나르게 하였다. 경기 안에 보리가 없기 때문에 백성에게 종자로 주기 위한 것이다.
5월 22일 임신
이완을 수어사(守禦使)로 삼았다.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 포민(浦民)의 어염세(魚鹽稅) 3분의 1을 줄이라고 명하였다.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여러 가지 신역은 다 감면하였는데 포민만이 혜택을 입지 못하였다 하여 그 세를 줄이기를 청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5월 24일 갑술
진휼청이 아뢰기를,
"서울에서 진휼을 파한 뒤에 의지할 데 없어 빌어먹는 무리에게는 각소(各所)에서 혹 양식을 주기도 하고 죽을 먹이기도 하면서 그 족속과 수양할 사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근일 진휼을 파한 지 꽤 오래 되었는데도 굶주린 백성이 본토로 돌아가지 않고 항간에서 빌어먹다가 굶고 병을 앓아서 장차 죽게 된 자가 자못 많습니다. 듣건대, 홍제원(弘濟院)에는 아직도 병을 앓는 백성을 머물러 두고 먹이고 있으므로 또 다시 슬피 부르짖으며 살려 주기를 바라고 있는 수가 이미 2백을 넘었습니다. 이제 진휼을 파하였다 하여 일체 물리친다면 물러가도 돌아갈 곳이 없어서 반드시 다들 구덩이에 굴러 죽을 것이니, 구분하여 처리하는 방도가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본청에서 세 곳에 남아 있는 굶주린 백성을 거두어 모은 다음 따로 강창(江倉)을 설치하고 이어서 죽을 먹이다가 다시 사세를 보아 파하여 보내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5월 25일 을해
경기·수원 등 고을에서 지진이 있었다.
5월 26일 병자
단천감(丹川監) 이양헌(李良憲) 등 네 사람에게 먹을 것을 내렸다. 양헌 등은 상복을 입고 있는 중이었으므로 녹(祿)을 잃고 죽을 먹으러 나아가 목숨을 이어가다가 진휼을 멈춘 뒤에는 빌어먹게 되었는데, 종친부(宗親府)의 계사로 인하여 상이 하교하기를,
"매우 불쌍한 일이다. 해조를 시켜 먹을 것을 지급하여 굶어 죽을 걱정이 없게 하라."
하였다.
5월 28일 무인
경상도 대구(大丘)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는데 그 크기가 술잔만하기도 하고 큰 주먹만하기도 하여 농민이 맞아 중상을 입은 자가 매우 많았다. 그리고 한 노파가 이 때문에 죽었으며 까마귀·까치·꿩·비둘기 등이 다쳐서 무수하게 죽었고 나무가 꺾이였으며 우박이 지나간 밭은 죄다 헐벗은 땅이 되었다. 감사가 이를 계문하였다.
경기 양천(陽川) 등 고을에서 검정색 누리가 비 때문에 번성하여 갈수록 더욱 치열해져서 갖가지 곡식을 크게 손상시켰다.
구문치(具文治)를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5월 29일 기묘
상이 뜸을 떴다. 정치화(鄭致和)가 나아가 아뢰기를,
"오늘날 성상께서 만약 인조 대왕께서 남한 산성에서 포위당할 때의 심정처럼 마음가짐을 가져 종묘의 향사 이외에는 온갖 것들을 멈추신다면 어찌 간신히 살아 남은 이 백성을 구제할 수 없겠습니까."
하고,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임진란 뒤에는 국가의 사전(祀典)도 행하지 않은 지 오래였습니다. 사전이 중하기는 하나 또한 어찌 변통할 도리가 없겠습니까."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흉년이 들어 곡식이 여물지 않으면 제사에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다 하였는데, 여기서 흉년이라 한 것은 반드시 오늘날과 같지는 않았을 것인데도 묘악(廟樂)을 오히려 연주하지 않았으니, 오늘날 온갖 것들을 멈추는 일 또한 어찌 조금이라도 늦출 수 있겠습니까."
하였다.
임유후(任有後)를 도승지로, 이선(李選)을 이조 정랑으로 삼았다.
함경도 경성(鏡城) 장백산(長白山)에 눈이 한 자쯤 내리고 날씨가 매우 추워 농사를 크게 손상하였다. 남도(南道) 각 고을의 밀보리가 또 황모가 드는 재해를 입어 거의 다 말라 죽었다.
이달에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수가 서울은 3천 1백 20여 인이었고 팔도에서 보고한 것은 모두 1만 3천 4백 20여 인이었는데, 그 가운데에서 삼남(三南)이 가장 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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