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일 경진
상이 하교하기를,
"국가가 위태롭고 백성이 구덩이에 굴러 죽는 이때를 당하여 비록 그만둘 수 없는 일일지라도 중지하여야 할 것인데 더구나 낭비이겠는가. 주방(酒房)에서 일차(日次)로 바치는 술은 낭비가 적지 않으니 중지하게 하라."
하였다. 당초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신이 듣건대, 세종 대왕께서는 혜성(彗星)의 변 때문에 특별히 주방을 폐지하셨다 합니다. 그때 세종께서 바야흐로 환약(丸藥)을 드시고 계셨으므로 약방(藥房)이 이를 어렵게 여기니 세종께서 이르기를 ‘내가 물로 약을 먹겠다.’ 하셨는데, 혜성이 이레만에 과연 사라졌다 합니다. 그런데 이제 전하께서는 술을 드시지 못하시는데도 예전대로 놔두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아마도 성상의 생각이 여기에 미치지 못하시는가 봅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었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또 하교하기를,
"지난해에 온갖 것들을 재량하여 줄인 것은 다 근년 흉작이 된 때의 전례에 따라 특별히 줄였을 뿐이다. 오늘날의 민사는 이미 극도에 이르렀으니 담당관을 시켜 대신에게 의논하여 각별히 거행하게 하라."
하였다. 뒷날 허적 등이 탑전에서 품의하여 선혜청(宣惠廳)에서 받아들이는 물선(物膳)은 두 자전께 진공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임시로 5분의 4를 줄였는데, 줄인 가미(價米)가 5백 10여 석이나 되었다. 그 밖에 어공인 각종 진헌과 상방(尙方)에서 받아들이는 향초피(鄕貂皮)와 반사(頒賜)에 쓰는 초서피(貂鼠皮)와 제용감(濟用監)의 수화주(水禾紬)와 내수사(內需司)의 생포(生布)와 내궁방(內弓房)·군기시(軍器寺)의 궁전(弓箭)에 드는 공조 기인(工曹其人)의 소목(燒木)과 여러 상사(上司)의 진배(進排)하는 잡물(雜物)과 종친부(宗親府)의 전약(煎藥)·납약(臘藥) 값과 도감(都監) 군사의 중순 시재(中旬試才) 때의 상격(賞格)과 동지 사신(冬至使臣)의 반전(盤纏) 등을 모두 이듬해 가을까지 혹 전량 감하기도 하고 반을 감하기도 하였고, 이 밖에 각사(各司)에서 재량하여 감한 물건도 많았다.
상이 뜸을 뜨고 파한 뒤에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서필원(徐必遠)이 아뢰기를,
"안팎 공사간의 저축이 모두 바닥이 나 국가의 위급한 형세가 이미 극도에 이르렀는데 외간에서는 조곡(糶穀)을 청하자는 의논이 많이 있으므로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허적(許積)에게 물었다. 허적이 대답하기를,
"지난해 겨울부터 이 의논이 있었습니다만 신의 생각은 이와 다릅니다. 이미 청한 뒤에 저들이 배로 실어나르기 어려운 데의 곡식을 허락한다면, 모르겠습니다만 국가에서는 어떻게 처리할 것입니까? 설사 우리 나라에서 가깝고 편리한 곳의 것을 허락한다 하더라도 이 뒤에 저들이 기근이 들었다고 핑계대면서 실어나르는 일을 우리에게 요구한다면 결코 감당해낼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조곡을 청하자는 의논이 옳은지 신은 모르겠습니다."
하고, 여러 신하도 많이 불가하다 하였으므로 서필원의 의논이 드디어 행해지지 않았다.
6월 2일 신사
이단석(李端錫)을 집의로, 유하익(兪夏益)을 지평으로 삼았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근래 동서 활인서(東西活人署)에 병막(病幕)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숨이 거의 끊어져 가는 허다한 자들이 또 날마다 비가 내리는 때를 만났으니, 특별히 구제하지 않으면 앞날의 염려가 반드시 지난날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그러니 한성부를 시켜 낱낱이 적간(摘奸)하여 마음을 다해서 구완하고 치료하게 하되 게을리 하여 직분을 다하지 않은 자가 있으면 적발하여 죄주게 하소서.
원주(原州) 사람 원인득(元仁得) 등이 목사를 유임시키고자 상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 수령이 정말로 치적이 있다면 본도에다 글을 올려서 조정에 아뢰게 하는 것이 법에 있어서 당연한 것입니다. 그런데 감히 대궐에 곧바로 호소하였으니 이것만도 이미 매우 외람한 짓이었는데 기각을 당한 뒤에는 도리어 정원이 막고 가린다고 하면서 진(秦)나라 조정에서 사슴을 말이라고 한 것처럼 한다는 따위의 말까지 하며 마음대로 배척하였는데 문관·무관·음관(蔭官)의 전조 관원도 그 가운데에 섞여 있었습니다. 이들이 유생(儒生)과 다르고 보면 어찌 감히 도리에 어긋난 언사로 이처럼 조정을 깔볼 수 있겠습니까. 정원의 도리로서는 곧바로 물리쳐야 할 것인데 유생이다 일컫고 배척하였다고 핑계대면서 장황하게 말을 하며 번거롭게 여쭈었으니, 사체를 크게 잃었고 연약한 것이 심합니다. 상소에 앞장선 사람은 본도로 하여금 적발하여 죄주고 당해 승지는 무겁게 추고하소서.
전 부사 유정(柳檉)은 요사한 첩에게 매혹되어 본 아내를 원수처럼 여겼으며 그 첩은 반드시 적자손을 죄다 없애려고 방자하게 저주하여 그의 큰 손자가 먼저 병을 앓아 죽었습니다. 일이 발각되자 공모한 여종이 매를 치지 않아도 스스로 자복하였으므로 위문하러 온 손님과 이웃 사람이 모두 다 들어서 알았습니다. 그러므로 유정도 감히 엄폐할 수 없어서 처음에는 모두 다스리려 하였으나 곧 그 첩의 달콤한 말에 빠져 그 종을 산 채로 묻어서 증거를 없애려 하였습니다. 실로 사람으로서 차마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므로 누구나 다 놀라고 분개하고 있습니다. 유정을 나문하여 죄를 정하고 그 첩을 엄히 형신하여 실정을 알아낸 다음 율문을 상고하여 처단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유정의 첩 순업(順業)은 한 해를 넘게 옥에 갇혀 있으면서 형신을 받고도 자복하지 않은 채 형장을 맞다가 죽었고, 유정은 그 종을 산 채로 묻고 그 첩을 구제하려고 한 죄로 형장을 맞고 정배되었다.
6월 3일 임오
부교리 신후재(申厚載)를 접위관(接慰官)으로 삼았다. 이에 앞서 대마 도주(對馬島主) 평의진(平義眞)이 정관(正官) 평성태(平成太) 등을 시켜 예조에 글을 바쳐 왜관(倭館)을 옮겨 주기를 또 요구하였는데, 상이 대신에게 물었다. 영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듣건대, 그들이 배를 정박해 두는 곳을 이제 이미 옮겼다 하니, 왜관을 옮겨 주기를 청한 것은 실상인 듯합니다마는, 웅포(熊浦)의 경우는 결코 허가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손한 말로 와서 청한다면 그래도 괜찮겠으나, 공갈하는 말이 많이 있으니 이게 통탄스럽다."
하였다. 신후재가 이미 동래(東萊)에 갔으나, 평성태가 맡은 일이 아직 강정(講定)되지 않았다 하여 예단(禮單)을 받지 않고 또 음악을 들을 겨를이 없다 하여 여기(女妓)·악공(樂工)을 물리기를 청하고 또 말하기를,
"이는 접위관이 마음대로 결단할 일이 아니니 내가 곧바로 상경하여 조정에 고하겠다. 조정에서 끝내 허가하지 않는다면 곧 강호(江戶)에 알릴 것이니, 그렇게 하면 두 나라가 어찌 서로 좋게 지내던 관계를 보전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신후재가 계문하였는데, 비국이 아뢰기를,
"차왜(差倭)가 음악을 들으려 하지 않고 예단을 받지 않은 것은 이상한 행동을 보인 것에 지나지 않고, 그가 운운한 것도 다 공갈하여 시험해 보려는 뜻이니, 의리로 꾸짖어 그 간사한 계책을 막아야 합니다. 그래도 만일 듣지 않고 끝내 그대로 나간다면 조약을 위반한 잘못이 그들에게 있습니다. 그들이 이처럼 날뛰더라도 결코 들어줄 만한 사리가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계품하지 말게 하여 그들이 바라는 것을 단절해야 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6월 4일 계미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뜸을 뜨고 파한 뒤에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경기도 안의 진휼 정사는 금천(衿川)이 가장 잘하였습니다. 듣건대, 현감 이보(李葆)는 소금·간장·채소 따위 물건을 미리 비축해 두었다가 섞어서 죽을 만들어 굶주린 백성을 먹이고 병을 앓는 사람을 따로 유치해 정성껏 구완하여 치료하였기 때문에 금천 백성은 한 사람도 죽은 자가 없다 하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이보의 치적은 한 도내에서 으뜸가니 진휼의 정사만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하고,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신도 그가 진휼을 잘하였다는 것을 들었습니다마는, 죄인을 놓쳤으므로 장차 파직을 면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하고, 권대운(權大運)·이연년(李延年) 등도 다 칭찬하고, 정치화는 아뢰기를,
"신들의 말이 어사가 칭찬해 올린 장계보다 더 낫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드디어 파직하지 말고 특별히 당상으로 품계를 올려 주라고 명하였다. 이때 이보는 과연 진휼을 잘하였다는 명성이 있었으나 마침내 실효를 보지 못해 양화도(楊花渡)에 사는 백성이 또한 많이 굶어 죽었는데, 대신이 아뢰어 현저한 상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더러 지나쳤다고 평하는 자도 있었다.
황해도 해주(海州) 등 열여섯 고을에서 누리가 크게 치성하여 온 들판에 가득 차 온갖 곡식의 줄기와 잎이 다 없어지고 삼이나 채소까지도 해를 입지 않은 것이 없었다.
우윤 이민적(李敏迪)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진휼을 멈춘 뒤에 밀보리가 크게 흉년이 들어 굶어 죽은 주검이 잇따라 전일보다 심합니다. 해서(海西)는 재력이 본디 넉넉하므로 도신(道臣)을 시켜 나름대로 감영(監營)의 저축된 것을 풀어서 없는 데로 옮기게 하면 혹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겠으나, 경기는 수천 석의 쌀을 얻지 못하면 실로 삶을 이어 갈 수 없습니다. 바라건대, 성상께서는 묘당을 시켜 빨리 헤아려 처치하게 하여 피폐해지지 않게 하소서. 그러면 천만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소 끝에서 말한 일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그 뒤에 등대하였을 때 허적은 남한 산성의 쌀 3천 석으로 소속된 각 고을을 구제하고 또 강도(江都)의 쌀 4천 석과 경청(京廳)의 쌀 3천 석을 내어다 그 나머지 여러 고을을 진구하기를 바랐고, 정치화는 두 곳의 군향(軍餉)을 결코 진구에다 쓸 수 없고 또 진휼청에도 저축한 것이 전혀 없어서는 안 된다 하여 세 곳의 쌀을 합하여 7천 6백 석을 진휼의 용도로 대여해 주기를 바랐는데, 상이 이르기를,
"지금 형세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 전일에 낭비를 한 탓이다. 많이 내어 구제하고 싶지만 저축한 것이 없는데 어찌하겠는가."
하고, 드디어 정치화가 아뢴 의논을 따랐다.
○右尹李敏迪上疏, 其略以爲:
停賑之後, 兩麥大無, 餓莩相望, 甚於前日。 海西則物力素饒, 若使道臣, 使之自出營儲, 推移有無, 則或可自支, 而京畿則非得數千斛米, 實無以保接生道。 伏望聖上, 令廟堂速爲量處, 俾不至於糜爛。 千萬幸甚。 上答曰: "疏末事, 當令廟堂議處焉。" 及後登對, 許積欲以南漢米三千石, 救其所屬各邑, 又出江都米四千石及京廳米三千石, 以賑其餘諸邑。 鄭致和以爲: "兩處軍餉, 決不可賑用, 且賑廳亦不當全無所儲, 欲以三處米合七千六百石賑貸之。" 上曰: "卽今形勢至此者, 莫非前日浪費之致也。 雖欲多出以救, 其於所儲之竭乏何哉?" 遂從致和之奏。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98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군사-병참(兵站)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박지(朴贄), 지평 조위봉(趙威鳳)이 상차하여, 성상의 뜻을 세우고 실지의 덕을 닦아 크게 경계하고 크게 진작하는 것으로써 하늘에 응답하는 의리라 하고 쓸데없는 병사를 도태하여 헛된 비용을 절약하고 내지 못한 세금을 감면해 주어 인심을 복종시키는 것이 시국을 구제하는 일이라 하였다. 또 경술년011) 조 이전 각도의 각색 군보(軍保)와 노비의 제반 신역(身役)과 관조(官糶)의 포납(逋納) 등을 일체 탕척하여 전부 면제하고 이어서 교지를 내려 위로하는 은혜의 뜻을 선포하기를 청하니, 상이 답하였다.
"아,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망극한 재변을 당하여 백성이 장차 죄다 죽게 되어 나라가 나라답지 못하니, 두려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 차라리 내 몸이 그 재앙을 대신 받고 말지언정 백성이 그 화를 당하는 것을 차마 못 보겠다. 이제 차자의 사연을 보건대 모두가 격언이니,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글 끝에 말한 일은 대신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大司憲張善澂、掌令朴贄、持平趙威鳳上箚:
以立聖志、修實德、大警惕、大振作, 爲應天之義; 汰冗兵、節虛費、蠲逋欠、服人心, 爲救時之務。 且請庚戌條以上, 諸道各色軍保奴婢諸般身役官糶逋納等項, 一切蕩滌全蠲, 仍降十行綸綍, 宣布慰恤之德意。 上答曰: "嗚呼! 國家不幸, 値此罔極之災,民將盡劉, 國不爲國, 惶懼隕越, 莫知攸措, 寧以身代受其殃, 不忍見赤子之遘其禍也。 今觀箚辭, 無非格言, 可不佩服焉。 疏末事, 當與大臣議而處之。"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7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698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 신분-천인(賤人)
6월 5일 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가례(嘉禮) 때의 여러 집사(執事)와 도감(都監)의 도제조(都提調) 이하에 대해 상을 논하라고 명하였다. 정사(正使) 청평위(靑平尉) 심익현(沈益顯)과 부사(副使) 판서 김수항(金壽恒)과 도제조 우의정 홍중보(洪重普)에게는 각각 안구마(鞍具馬)를 내리고, 제조 김수항·권대운(權大運)·조형(趙珩)에게는 각각 숙마(熟馬) 한 필을 내리고, 도청(都廳) 사인(舍人) 이단하(李端夏)·정(正) 홍주삼(洪柱三)과 전교관(傳敎官) 우승지 김우형(金宇亨), 보덕(輔德) 김만균(金萬均), 필선(弼善) 이익상(李翊相)에게는 모두 가자(加資)하고, 그 나머지 여러 집사에게는 차등을 두어 상을 주었다.
평안도 각 고을의 누리가 여러 번 큰비를 겪자 그 형세가 더욱 치성하였다. 도신(道臣)이 이를 아뢰니, 본도를 시켜 도내의 중앙에서 포제(酺祭)를 지내어 기도하게 하였다.
6월 6일 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이섬(李暹)·박지(朴贄), 지평 조위봉(趙威鳳) 등이 아뢰기를,
"기근과 여역이 어느 시대인들 없었겠습니까마는 백성이 많이 죽기는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경기와 호서에서 굶어 죽는 자가 잇따랐는데 도신이 아뢴 것은 열 가운데에서 한둘일 뿐입니다. 수령의 보고만을 믿고 더 유의하여 깊이 살피지 않았으니,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와 충청 감사 이홍제(李弘濟)를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무신인 곤수(閫帥)가 총애받는 환관과 체결하여 뇌물을 쓰고 아첨하는 것은 예전 일에서 보고 경계해야 합니다. 통제사 유여량(柳汝𣛀)은 사람됨이 용렬하고 비루하며 또 간사하고 교활하여 전후에 번진(藩鎭)을 맡았을 때 조금도 성적이 없고 오로지 잘 섬기려고만 힘썼으니, 한낱 채수(債帥)012) 일 뿐입니다. 본직에 제수되어서도 고치려고 생각지 않고 절선(節扇)이라고 하면서 벼슬이 높은 내관(內官)에게 보냈으니, 이것은 실로 일찍이 없었던 일입니다. 크게 금해야 되는 것이니 내버려둘 수 없습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충청도 홍산현(鴻山縣)에서 사납게 천둥이 쳐서 벼락맞아 죽은 사람이 있었다.
6월 7일 병술
집의 이단하(李端夏)가 상소하여, 군정(軍政)을 변통하여 나라의 저축을 넉넉하게 하고 백성에게 곡식을 심도록 권장하여 개인의 저축을 늘리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글을 내려 도타이 답하고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였다.
6월 8일 정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단석(李端錫)을 집의로, 윤가적(尹嘉績)을 정언으로, 신정(申晸)을 응교로, 조위봉(趙威鳳)을 부수찬으로, 윤진(尹搢)을 지평으로 삼았다.
6월 9일 무자
함경도 안변(安邊) 등 다섯 고을에서 누리가 온갖 곡식을 크게 손상하였다. 날마다 잇따라 큰비가 내려 냇물이 크게 넘쳤으나 누리가 줄곧 치열하게 일어나서 그칠 가망이 없었다.
경상도 선산(善山) 등 고을에서 두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이섬(李暹)·박지(朴贄)가 아뢰기를,
"나라의 기강이 엄하지 않아서 감사와 수령으로서 도내와 경내에서 산을 사서 간계를 부려 해를 끼치고 있는데 이는 일세(一世)의 바로잡기 어려운 고질적인 폐단입니다. 공산 판관(公山判官) 정시형(鄭時亨)은 고을 땅에 풍수쟁이가 일컫는 곳이 있다는 말을 듣고 처음에는 이익으로 꾀어 그 가운데에서 긴요한 한 군데를 먼저 사고 시기를 타서 점점 잠식하여 1백 호에 가까운 촌락을 강제로 반이 넘게 차지하여 대대로 전해 온 양민(良民)의 물건을 자기 묘역의 전장(田庄)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방자하고 법을 업신여기는 정상이 매우 놀라우니,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옥천 군수(沃川郡守) 이민후(李敏厚)는 병으로 관아에 나오지 않고 있으므로 백성이 그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막중한 진휼의 정사를 색리(色吏)에게 넘겼으므로 온 경내가 원망하며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니,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6월 10일 기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저성(氐星)에 들어가고 좌이(左珥)가 있었다.
대사헌 장선징과 장령 이섬·박지가 진휼청 당상을 추고하기를 계청한 것이 물의에 비난받았다 하여 인피하였는데, 그 인피하는 말에,
"일을 맡은 신하가 마음을 다하지 않은 것은 아니나, 불행히 기근이 몹시 들고 여역까지 일어나서 세 군데 진휼하는 곳에서 굶주린 백성이 거의 다 죽었으니, 사람을 임용하는 도리에 있어서 경계와 견책이 없을 수 없습니다."
라는 등등의 말이 있었다. 사간 이합(李柙), 정언 윤가적(尹嘉績)이 처치하기를,
"죄가 아니라고 하여 놓고는 도리어 죄를 주자고 청하여 일을 논한 것이 체례를 잃었으니 물의가 일게 마련입니다. 모두 체차하소서."
하니, 따랐다.
6월 11일 경인
경상도 안동(安東) 등 고을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6월 13일 임진
김수흥(金壽興)을 호조 판서로, 송준길(宋浚吉)을 대사헌으로, 이상(李翔)·강여호(姜汝㦿)를 장령으로 삼았다.
6월 14일 계사
집의 이단석(李端錫)이 아뢰기를,
"여주 목사(驪州牧使) 권상구(權尙矩)는 남한(南漢)의 조곡을 받아 내어 가는 일 때문에 민간에 영을 내려 온 고을의 백성을 일제히 모이게 하고는 시기가 지나도 오지 않아서 굶어 죽은 자까지 있었고 닷새가 지난 뒤에야 술에 취한 몸을 싣고 비로소 왔으나 혼미하여 정신을 못 차려서 나누어 줄 때에 허술한 것이 많았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단천 군수(端川郡守) 홍남립(洪南立)은 사람됨이 용렬한데다 나이도 늙어서 진휼하는 일에 전혀 유념하지 않았습니다. 그리하여 굶어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는데도 서서 보기만 한 채 구제하지 않았으며 아전이 이를 틈타 농간을 부려 나라의 곡물을 훔쳤으니, 하루라도 관직에 두어 민폐를 거듭 끼치게 할 수 없습니다. 모두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모두 특별히 명하여 나문하게 하였다. 그 뒤에 금부의 조율(照律)에 따라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서울의 기근이 심하여 은 8냥으로 겨우 한 섬의 쌀을 바꾸었다. 사대부의 집에서 앞다투어 비단 옷가지를 가지고 저자에 가서 팔려고 해도 사람들이 돌아보지 않았고 여느 해에는 서너 냥 정도의 값이 나가는 완구품으로 두어 되의 쌀을 바꾸려 하여도 되지 않았으므로 모두들 어쩔 줄을 모르고 얼마 안 가서 죽기만 기다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파는 쌀은 많아야 여남은 말에 지나지 않았고 적으면 몇 말의 쌀뿐이었다. 사대부로서 벼슬이 낮아 봉록이 박한 자는 태반이나 굶주렸고 각사(各司)의 원역(員役)들도 거의 다 굶어서 낯빛이 누렇게 떠서 장차 임무를 수행하지 못하게 되었다.
병조 판서 서필원(徐必遠)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정직하며 겉치레가 적고 실속이 많으며 집에서는 검약하고 벼슬살이에는 근신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거칠고 조급하며 또 고집하는 병통이 있어서 일할 때에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예법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아깝게 여겼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9면
【분류】역사-편사(編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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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서필원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정직하며 겉치레가 적고 실속이 많으며 집에서는 검약하고 벼슬살이에는 근신하였다. 그러나 성질이 거칠고 조급하며 또 고집하는 병통이 있어서 일할 때에 자기 뜻대로 결단하고 예법을 따르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자못 아깝게 여겼다.
○兵曹判書徐必遠卒。
【史臣曰: "必遠爲人朴直, 少華多實, 居家儉約, 奉職恪謹。 然性粗率, 且有執滯之病, 作事斷以己意, 不循禮法, 人頗惜之。"】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29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9면
【분류】역사-편사(編史)
6월 15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치계하기를,
"민간에 밥짓는 연기가 끊어진 참상이 봄보다 훨씬 더합니다. 쓰러진 주검이 길에 즐비하고 낯빛이 누렇게 뜬 백성이 수없이 떼를 지어 문을 메우고 거리를 메워 살려 달라고 울부짖고 있으며 맨발에다 얼굴을 가리고 살려 달라고 애걸하는 사족(士族)의 부녀가 날마다 관아 뜰에 가득합니다. 곡물이 떨어지고 나면 이어서 소금과 간장을 주었고 소금과 간장이 떨어지고 나면 또 해초류를 주는 등 관아에 저축된 것으로서 입에 풀칠할 만한 것이면 모두 긁어 썼지만 마침내 속수무책인 채 죽는 것만 보고 말게 되었습니다.
역로(驛路)가 모두 비어서 장차 명령을 전달하지 못하게 되었고 관속(官屬)이 흩어져서 거의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전에 죽은 자는 다 떠돌며 빌어먹는 자들이었는데, 근일 길에 쓰러진 주검은 모두 본토박이 양민입니다. 그러므로 각 아문에서 진휼에 쓰고 남은 곡물과 세 산성(山城)의 군향(軍餉) 관적(官糴)으로서 창고에 약간 남은 것을 털어서 나누어 주면 만분의 일이라도 구제할 수 있을 것이니, 조정에서 급히 허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전세로 받은 콩과 쌀 또한 1백여 석을 남겨 둔 고을도 있을 것이니, 굶주린 백성 가운데에서 가장 심하고 의지할 데 없어서 결코 도로 받아들일 수가 없고 입을 벌리고 먹여 주기를 바라는 무리에게 이것으로 죽을 만들어 먹이게 하였으면 합니다."
하였는데, 상이 다 윤허하였다.
6월 16일 을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17일 병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이완(李浣)을 병조 판서로, 신여철(申汝哲)을 통제사로, 이단하(李端夏)를 동부승지로, 민희(閔熙)를 강화 유수로, 윤증(尹拯)을 진선으로 삼았다.
경기 감사 오정위(吳挺緯)가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보고하였는데, 음죽 현감 이명빈(李明彬)에게는 숙마(熟馬)를, 포천 현감 이형식(李馨植)에게는 표리(表裏)를 하사하고 김포 군수 강욱(姜頊)에게는 준직(准職)을 제수하였다. 그런데 강욱은 이미 준직을 거쳤으므로 별도로 상을 주었으면 하겠다고 허적이 아뢰니, 상이 가자하라고 명하였다.
6월 18일 정유
경기 감사 오정위가 치계하였다.
"도내 각 고을에서 여역으로 죽은 자 이외에 굶어서 도로에 쓰러져 죽은 주검을 묻도록 신칙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굶어서 지친 백성이 실로 거두어 묻기 어려웠으므로 길에서 썩게 되었습니다. 또, 흙을 덮더라도 소나기가 한 번 지나가면 곧 드러나고 있으니 보기에 참혹한 정상을 이루 다 아뢸 수 없습니다."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의 죄수를 살펴 죄가 가벼운 죄수를 풀어 주게 하였다. 좌상 정치화(鄭致和)가 무더운 여름철에 죄수를 지체시키는 데에 대한 폐단을 말하였기 때문에 이 명이 있었다.
서울과 지방에서 소 잡는 것을 금하는 것을 늦추었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당초에 소 잡는 것을 금한 것은 백성을 위하는 데에 뜻이 있었는데, 지금 굶주린 백성에게 혹 송아지가 있어도 나라에서 매우 엄하게 금하고 있으므로 사는 자가 전혀 없어서 소를 가지고도 굶어 죽을 형세에 놓여 있습니다. 또, 금령을 범한 사람은 속(贖)을 거두고 형벌을 받는데, 죽지 않으면 몸을 상합니다. 흉년에는 금령을 늦춘다는 뜻에 어긋나는 듯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소를 잡지 못하게 금령을 더욱 밝힌 것은 실로 농사를 위한 것인데, 사세가 전과 달라서 백성이 다 죽게 되었으니 어찌 이 금령을 부질없이 지켜서야 되겠는가. 이제부터 금령을 범한 자에게는 형벌을 주지 말고 속만 거두게 하라."
하였다.
수령의 재직 연한에 대한 법을 다시 밝혔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무릇 사람은 혈기가 쇠퇴하고 나면 지기(志氣)도 쇠퇴합니다. 그러므로 젊었을 때는 청백하던 자가 늙어서는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더구나 고령이 된 뒤에는 정신이 흐려지지 않는 자가 드뭅니다. 수령의 나이를 제한하는 법은 그 뜻이 있으니, 해조를 시켜 이 법을 더욱 밝히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6월 19일 무술
정언 윤계(尹堦)가 상소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신은 임금의 팔과 다리이고 대간은 임금의 귀와 눈입니다. 옛적 명철한 임금이 대신을 공경하고 대간을 존중한 것은 참으로 이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대간의 벼슬은 날이 갈수록 가벼워지고 재상의 권세는 날이 갈수록 무거워지고 있습니다."
하고, 또,
"임금의 허물은 그래도 감히 말하고 있습니다만 대신의 잘못은 감히 논하지 못합니다."
하고, 또,
"오늘날의 조정에 정권을 휘두르는 신하는 없다고 하나, 상이나 형벌을 주는 것은 임금의 큰 권세이니, 임명하거나 죄주는 것은 상께서 결단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에게 벼슬을 주거나 벌을 줄 적에 반드시 대신을 거치고 있으니, 어찌 총괄하시는 권세에 손상이 되지 않겠습니까."
하고, 또,
"성스런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모두 자애와 밝음으로 시작하였으나 착실하게 해 나가려면 굳센 의지가 필요하였습니다. 그런데 전하께서는 자애롭고 밝은 자질이 지나치게 유화(柔和)하여 일에 임할 즈음에 과감하게 결단하는 일이 드무십니다."
하고, 또,
"지금의 고질적인 병폐는 군사를 양성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고, 이어서 훈국(訓局)과 수어(守禦)·총융(摠戎)·정초(精抄)·호위(扈衛) 제청(諸廳)의 폐단과 각 아문의 둔전(屯田)을 여러 궁가(宮家)에게 떼어주는 것, 병사가 가족을 데리고 부임하는 것, 영장(營將)을 설치하고 관향(管餉)을 나누지 않는 것들의 폐해에 대해 두루 말하고, 또 호조와 다른 아문에서 수결(手決)하는 잘못에 대해 말하고, 마지막에 세자를 보도하는 방도를 말하면서 검소한 덕을 삼가고 사치를 없애고 궁금(宮禁)을 엄하게 하고 억울한 죄수를 살피고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는 등의 말로 임금에게 청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누누이 경계한 말을 내 아름답게 여긴다. 마음에 두고 조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 가운데에 변통할 만한 일은 묘당을 시켜 의논하여 처치하게 하겠다."
하였다.
○戊戌/正言尹堦上疏, 其略曰:
大臣人主之股肱也, 臺諫人主之耳目也。 古之明王, 敬大臣, 而重臺諫, 誠以此也。今則臺諫之職日益輕, 宰相之權日益重。 又曰: 君上之過, 猶敢言之, 而大臣之非, 莫敢論之。 又曰: 今日朝廷, 雖曰無專顓之臣, 爵賞刑罰, 人主大柄, 天命天討, 宜加睿斷。 而官人罪人, 必關大臣, 豈不損於摠攬之權乎。 又曰: 聖王之治天下, 莫不自仁明始, 而做得實着, 必要剛毅。 殿下仁明之姿, 過於柔克, 臨事之際, 鮮能果斷。 又曰: 卽今膏肓, 養兵是也。 因歷言訓局、守禦、摠戎、精抄、扈衛諸廳之弊, 各衙門屯田諸宮家折受, 兵使挈眷, 營將設置管餉不分之害, 又言地部太僕及他衙門手決之非, 末言 世子輔導之方, 而以愼儉德、去奢侈、嚴宮禁、審冤獄、進人才等語, 責之上躬, 上答曰: "縷縷誡誨之言, 予用嘉之。可不留心而惕念焉。 疏中可以變通事, 當令廟堂議處。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9면
【분류】정론-간쟁(諫諍)
又曰:
君上之過, 猶敢言之, 而大臣之非, 莫敢論之。 又曰: 今日朝廷, 雖曰無專顓之臣, 爵賞刑罰, 人主大柄, 天命天討, 宜加睿斷。 而官人罪人, 必關大臣, 豈不損於摠攬之權乎。 又曰: 聖王之治天下, 莫不自仁明始, 而做得實着, 必要剛毅。 殿下仁明之姿, 過於柔克, 臨事之際, 鮮能果斷。 又曰: 卽今膏肓, 養兵是也。 因歷言訓局、守禦、摠戎、精抄、扈衛諸廳之弊, 各衙門屯田諸宮家折受, 兵使挈眷, 營將設置管餉不分之害, 又言地部太僕及他衙門手決之非, 末言 世子輔導之方, 而以愼儉德、去奢侈、嚴宮禁、審冤獄、進人才等語, 責之上躬, 上答曰: "縷縷誡誨之言, 予用嘉之。可不留心而惕念焉。 疏中可以變通事, 當令廟堂議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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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정론-간쟁(諫諍)
又曰:
今日朝廷, 雖曰無專顓之臣, 爵賞刑罰, 人主大柄, 天命天討, 宜加睿斷。 而官人罪人, 必關大臣, 豈不損於摠攬之權乎。 又曰: 聖王之治天下, 莫不自仁明始, 而做得實着, 必要剛毅。 殿下仁明之姿, 過於柔克, 臨事之際, 鮮能果斷。 又曰: 卽今膏肓, 養兵是也。 因歷言訓局、守禦、摠戎、精抄、扈衛諸廳之弊, 各衙門屯田諸宮家折受, 兵使挈眷, 營將設置管餉不分之害, 又言地部太僕及他衙門手決之非, 末言 世子輔導之方, 而以愼儉德、去奢侈、嚴宮禁、審冤獄、進人才等語, 責之上躬, 上答曰: "縷縷誡誨之言, 予用嘉之。可不留心而惕念焉。 疏中可以變通事, 當令廟堂議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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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정론-간쟁(諫諍)
又曰:
聖王之治天下, 莫不自仁明始, 而做得實着, 必要剛毅。 殿下仁明之姿, 過於柔克, 臨事之際, 鮮能果斷。 又曰: 卽今膏肓, 養兵是也。 因歷言訓局、守禦、摠戎、精抄、扈衛諸廳之弊, 各衙門屯田諸宮家折受, 兵使挈眷, 營將設置管餉不分之害, 又言地部太僕及他衙門手決之非, 末言 世子輔導之方, 而以愼儉德、去奢侈、嚴宮禁、審冤獄、進人才等語, 責之上躬, 上答曰: "縷縷誡誨之言, 予用嘉之。可不留心而惕念焉。 疏中可以變通事, 當令廟堂議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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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정론-간쟁(諫諍)
又曰:
卽今膏肓, 養兵是也。 因歷言訓局、守禦、摠戎、精抄、扈衛諸廳之弊, 各衙門屯田諸宮家折受, 兵使挈眷, 營將設置管餉不分之害, 又言地部太僕及他衙門手決之非, 末言 世子輔導之方, 而以愼儉德、去奢侈、嚴宮禁、審冤獄、進人才等語, 責之上躬, 上答曰: "縷縷誡誨之言, 予用嘉之。可不留心而惕念焉。 疏中可以變通事, 當令廟堂議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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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정론-간쟁(諫諍)
영의정 허적(許積)이 윤계의 소 가운데에 배척한 말이 있다 하여 상차해 면직을 청하기를,
"신이 듣건대, 간관의 상소에서 대신의 권세가 중한 것을 배척하고 태복에서 재물을 늘리는 것을 허물한 것이 전편의 주된 뜻이라 하니, 신은 그지없이 두렵습니다. 대저 이른바 ‘곧은 말이 아뢰어지지 않고 아첨하는 버릇이 날로 늘고 임명하거나 죄주는 것이 성상의 결단을 거치지 않고 사람에게 벼슬을 주거나 죄주는 일이 반드시 대신을 거친다.’는 것은 무슨 일을 가리킨 것인지는 모르겠고 이런 말이 있는 것도 반드시 신만을 가리킨 것이라고는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전부터 정승 자리를 맡아 온 자는 신 한 사람뿐이니, 죄책을 당하여 어찌 감히 내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은 실로 늙고 혼미하여, 어떤 곧은 신하가 곧은 말을 아뢰었는데 대신 때문에 성상에게 전달되지 않았으며 어떤 간사한 신하가 아첨하는 말을 아뢰었는데 대신에게 힘입어 성상의 마음에 들 수 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사형수를 결정지을 즈음에는 여러 신하가 각각 소견을 아뢰어 성상의 결정을 여쭈었고, 재신(宰臣)의 직질을 올려 줄 때에는 묘당이 조정의 의논을 참작하여 감히 의망을 갖추었습니다. 그렇게 하면서도 형벌이나 상을 주는 권세는 임금이 잡아야 하고 버리거나 취할 즈음에는 시기나 혐의가 생기기 쉽다고 여겨 번번이 하문하실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연중(筵中)에서 여러 번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심지어 치우치게 듣고 전적으로 맡겨서 어지러워질까 염려하였으니, 대신으로서 누구인들 마음이 싸늘하고 가슴이 떨리지 않아서 감히 일해 볼 생각을 할 수 있겠습니까. 대간의 신하가 들은 것이 과연 논한 것과 같다면 잘못을 부지런히 공박하는 것은 본디 아름다운 일이니 어찌 이 때문에 퇴직을 청하겠습니까마는, 신의 병세를 돌아보건대 조석을 보전하지 못하게 되었으므로 감히 위급하고 간절한 마음을 성상께 번거롭게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근일 말하는 자가 ‘임금의 과실을 말하는 것은 쉽고 대신의 허물을 말하는 것은 어렵다.’ 하였으나,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말하기 어려운 것은 오로지 당론을 일삼는 사람에게 있을 뿐이다. 이미 당론을 일삼았으면 그의 말이 어찌 공평할 수 있겠는가. 경이 인혐하는 것은 너무 지나쳐서 도리어 사체를 손상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의 일이 날로 급해지고 있으니 경이 인퇴해서는 안 된다.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 내 희망에 부응하라."
하였다. 윤계가 드디어 인피하였는데 그 대략에,
"대신이 불안하여 상차하기까지 하였고 성명께서도 당론이라 의심하니, 신의 죄가 큽니다. 파직하여 물리치도록 명하소서."
하였는데, 사직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헌납 정화제(鄭華齊) 등이 처치하기를,
"윤계의 소는 시국의 어려움을 개탄하다가 들은 바를 다 아뢴 것이므로 성상께서 이미 경계하여 가르친 것이라고 칭찬하셨고 상신(相臣)도 그가 과감히 말한 것을 칭찬하였으니, 말씀을 드린 신하에게는 혐의할 것이 별로 없습니다. 출사시키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領議政許積以尹堦疏中, 有所指斥, 上箚乞免曰:
臣聞諫官封事, 斥大臣之權重, 罪太僕之殖貨, 乃一篇主意云, 臣不勝瞿然也。 夫所謂: "讜論之不徹, 謟風之日長, 天命天討之不由睿斷, 官人罪人之必關大臣" 者, 雖未知指某事, 而有此言, 亦未必其專指臣身。 然向來當鼎軸者, 獨臣一人, 臨當罪責, 豈敢曰非我也。 臣實老昏, 不省何樣直臣, 進讜言, 而緣大臣未徹於宸聽; 何樣奸臣, 進諂言, 而賴大臣得槪於聖心也。 死囚臨決, 則諸臣各陳所見。 仰稟睿斷, 宰臣進秩, 則廟堂參以朝議, 乃敢備擬。 而猶念刑賞之柄, 人主當操, 取舍之際, 猜嫌易生, 以不必每每下詢之意, 屢陳於筵中。 而今乃至以偏聽獨任, 成亂爲慮, 爲大臣者, (熟)〔孰〕 不心寒膽慄, 敢生其猷爲也。 諫臣所聞, 果如所論, 則勤攻闕失, 自是美事, 豈敢以此乞退, 顧臣病勢, 不保朝夕, 敢將危懇, 仰瀆天聽。 上答曰: "近日言者以爲: ‘言人君過失則易, 而言大臣之過則難,’ 予以爲不然。 所難言者, 惟在於專事黨論之人。 旣事黨論, 則所言何能公乎? 卿之引嫌, 無乃太過, 而反損事體。 國事日急, 卿不可引入。 安心勿辭, 以副予望。" 尹堦遂引避, 略曰: "大臣不安, 至於陳箚, 聖明又以黨論致疑, 臣之罪戾大矣。 請命罷斥。" 答以勿辭。 大司諫南龍翼、獻納鄭華齊等處置曰: "尹堦之疏, 慨念時艱, 竭陳所聞, 聖上旣褒以誡誨, 相臣又奬其敢言, 進言之臣, 別無所嫌。 請出仕。" 上從之。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30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69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6월 21일 경자
이정영(李正英)을 형조 판서로, 신정(申晸)을 사간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홍만용(洪萬容)을 이조 참의로, 이유태(李惟泰)를 찬선으로 삼았다.
6월 22일 신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3일 임인
상이 하교하기를,
"이런 흉년을 당하여 백성이 다 구덩이에 굴러 죽고 있으니, 음식을 대하면 두렵고 자나깨나 놀라고 있다. 서울 안의 물건은 이미 줄였으나 각도에서 진상하는 것도 그 폐단이 적지 않으니, 두 대비전(大妃殿) 이외의 각전(各殿)에 바치는 것은 모두 내년 가을까지 특별히 멈추게 하라."
하자,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위에 바치는 약간의 물건까지 모두 멈출 수 없으니 적당히 줄이소서."
하니, 드디어 별도로 기록하여 바치게 하여 매월마다 3분의 2를 줄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전하께서 백성에게 폐를 끼친다고 하여 각도의 삭선(朔膳)을 폐지하셨으니 무릇 보고 듣는 자이면 누구인들 감동하지 않겠습니까마는, 상방(尙方)에서 베를 짜는 것과 궐내(闕內)에서 남색을 물들이는 일 같은 것은 모두 긴요하지 않은 것이니 폐지하더라도 어찌 옷이 부족할 걱정이야 있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공장에게 별로 시킨 일이 없다."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그런 일이 없더라도 이는 성상께서 늘 힘쓰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6월 24일 계묘
상이 하교하였다.
"국가가 불행하여 이런 흉년을 당하였는데, 상방의 여러 가지 사역과 베를 짜는 등의 일만 존속시킬 수 없으니, 수년 동안 폐지하여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이도록 해야 할 것이다."
역관 정신남(鄭信男)의 딸의 마을에 정문을 세워 표창하였다. 정신남의 딸은 처녀로서 정축년013) 병란을 피할 때에 나룻배가 언덕을 막 떠나 그가 미처 배에 오르지 못하였는데 어떤 사람이 손을 잡아 당기려 하자 정신남의 딸이 말하기를 ‘내가 손을 너에게 준다면 피난할 게 뭐가 있겠는가.’ 하고 스스로 물에 빠져 죽었다. 정치화(鄭致和)·민정중(閔鼎重)이, 그가 얌전히 죽은 절의가 가상하다 하여 정문을 세워 표창하자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6월 25일 갑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박장원(朴長遠)을 개성 유수로 삼았다. 박장원은 집이 가난한데 늙은 어미가 있으므로 봉양하기 위하여 외직을 청한 것이다.
국가의 재정이 모자라기 때문에 임시로 백관의 반록(頒祿)을 폐지하고 달마다 산료(散料)하는 제도로 개정하고 아래로는 잡직(雜職)·군사 등의 월름(月廩)까지도 모두 줄였다. 이에 앞서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어공(御供)도 거의 다 줄였으니, 백관의 일정한 녹만 그대로 둘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 신하들의 봉록은 본래부터 박한데 이런 때에 줄인다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
하였으나, 뭇 신하도 산료하는 것이 옳다고 하는 자가 많았으므로 상이 이르기를,
"잠시 산료로 마련하되 8, 9품은 녹이 박하니 다시 줄일 필요는 없다."
하였다. 드디어 정축년의 전례에 따라 품계별로 산료하였는데 일정한 녹에 비해 줄인 것이 쌀 6백 6석과 콩 1천 8백 84석이었고, 잡직 이하 녹을 받는 자와 군사 등은 그 받는 것이 많고 적음에 따라 차등을 두어 줄였는데 줄인 쌀이 또한 2백 80여 석이었다.
6월 26일 을사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6월 28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옛 정승 홍중보(洪重普)에게 3년 동안 녹봉을 내리라고 명하였다.
6월 29일 무신
벼락이 후원(後苑)의 고목을 쳐서 조각조각 쪼개졌고 또 신문(新門) 밖의 해묵은 홰나무와 왕십리(往十里)의 밤나무에 벼락이 쳤다.
민정중(閔鼎重)을 병조 판서로, 이완(李浣)을 공조 판서로 삼았다.
6월 30일 기유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신정(申晸),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윤계(尹堦)가 아뢰기를,
"접때 인대했을 때에 묘당이 국곡(國穀)을 내어 값을 줄여 팔기를 청하였으므로 바라는 백성이 날로 손꼽으며 고대하는데, 지금 해청이 줄인 값을 보면 아주 적은 것에 지나지 않아서 당초 급한 것을 구제하려던 뜻과 크게 다르니,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지금 도성 백성들이 재산이 이미 다하여 그 형세가 참으로 급합니다. 거저 줄 수는 없다 하더라도 어찌 차마 그 값의 많고 적음을 논할 수 있겠습니까. 해청을 시켜 다시 값을 줄여서 굶주린 백성이 실망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홍원 현감(洪原縣監) 허려(許穭)는 나이가 젊은 미천한 신분으로서 경력이 적거니와 명성 또한 없는데 문득 백성을 다스리는 벼슬을 차지하였으므로 물정이 놀라워하니 체차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윤허하지 않았다. 네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이달에 도성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는 1천 4백 6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수는 1만 7천 4백 90여 인이었다. 그 밖에 불에 타고 물에 빠지고 범에게 물렸다는 보고가 잇따랐으며 도둑이 살해하고 약탈하는 우환이 없는 곳이 없었는데 호남·영남이 가장 심하였고 두 도에서 돌림병으로 죽은 소도 이루 헤아릴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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