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일 경술
대사간 남용익(南龍翼), 사간 신정(申晸), 헌납 정화제(鄭華齊), 정언 윤심(尹深) 등이 아뢰기를,
"외방에 굶주려 죽은 백성의 수가 많고 적은 것과 들판이 황폐하거나 경작되는 것은 비록 재해를 입은 차이에서 말미암은 것이지만 진휼의 정사를 어떻게 했는가에도 달려 있습니다. 소문에 각 고을 가운데에는 미리 요리하여 곡물을 저축해 놓았다가 종자와 양식을 대여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본디 힘써 장만한 것도 없고 또 민생의 일을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보아 넘겨 전혀 돕지 않는 자도 있으며 심한 자는 진휼의 곡식을 나눠 줄때에 덜고 주어서 굶주린 백성이 실망하고 원망이 퍼지게 하기도 하였다 합니다. 신들은 듣는 대로 탄핵해야 하겠으나 먼 외방에서 전하는 말이 다 진실하지는 못할 듯하니, 각도의 감사를 시켜 사실을 살펴서 아뢰게 하소서. 그리하여 마음을 다하여 진구한 자는 각별히 논하여 상을 주고 가장 심하게 게을리 하고 소홀히 한 자와 외람되고 교활한 자는 법에 따라 죄를 주소서. 또 각도에서 진휼을 파한 뒤에 경기에서는 성적에 대해 치계하였으나 다른 도에서는 아직 아뢴 일이 없으니, 모두 일체로 아뢰게 하여 죄는 같은데 벌을 다르게 주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3일 임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좌상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이런 때에 영상이 나오지 않아서 적체된 일이 많습니다. 이 때문에 답답하니, 위에서 권면하는 일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하였다. 상이 묻기를,
"곡식을 팔 때 값을 얼마로 정하였기에 간원이 논계하였는가?"
하자, 정치화가 아뢰기를,
"지금 시장 가격은 쌀 한 섬에 은 6냥을 치고 콩은 3냥을 치는데 각각 1냥을 줄였습니다. 간원이 줄인 값이 시장 가격에 비하여 그리 다르지 않다고 말하였기 때문에 다시 의논하여 시장 가격에 비하여 반으로 줄여 팔기로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아뢴 대로 하라고 하였다.
윤가적(尹嘉績)을 지평으로, 오두헌(吳斗憲)을 정언으로, 민종도(閔宗道)를 수찬으로 삼았다.
7월 4일 계축
영의정 허적(許積)이 또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천재·시변으로 나라의 근심과 백성의 위태함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절로 한심해진다. 경은 나라의 일에 정성껏 몸과 마음을 다하다 병이 들었으니, 이것은 내가 일찍이 염려해 온 바이다. 조그만 병이 있지만 어찌 사직하는가. 나라의 일을 생각하여 다시는 젊은 무리의 당론에 개의하지 말고 빨리 나와서 도(道)를 논하여 내 희망을 저버리지 말라."
하였다.
7월 5일 갑인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우도(右道)의 각 고을은 기근이 더욱 심하여 닭·개를 죄다 잡아 먹고 나자 또 마소까지 잡아 먹고 있는데 사람마다 도살장이 필요없이 직접 도살하고 있습니다. 형세의 급함이 서로 잡아 먹기 직전이고 심지어는 굶주린 창자에 고기를 먹자 설사병이 갑자기 일어나 죽는 자가 잇따르고 있으며 애초에 마소가 없는 자는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금 시장의 가격은 겉보리 한 말로 거친 무명 너댓 단(端)과 바꾸기까지 합니다만, 보리를 가진 사람이 전혀 없습니다. 좌도(左道)의 각 고을은 우역(牛疫)이 크게 치열한데 저절로 죽은 것의 고기는 혹 사람에게 해로울까 염려하여 파묻게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굶주린 백성들이 밤을 틈타 파내어 먹고는 죽은 자가 매우 많습니다. 또 각 고을의 굶주린 백성이 날마다 구름처럼 모이고 있으나 진휼할 밑거리가 이미 떨어져서 보리죽을 먹이고 있으므로 구제되기를 바라기 어려운데 여역·이질이 전염되면 즉시 죽습니다. 게다가 한재와 황재(蝗災)가 매우 참혹하니, 앞날의 농사에는 다시 바랄 만한 것이 없습니다."
7월 6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7일 병진
이은상(李殷相)을 도승지로, 홍주삼(洪柱三)을 동부승지로,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삼았다.
7월 8일 정사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나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내가 경에게 이 직임을 제수한 것이 어찌 우연히 한 것이겠는가. 이런 때에 보필하는 직임을 경말고 누구에게 맡기겠는가. 경은 선조(先朝)에서 인정해 준 은혜를 받았는데, 나라의 일을 어찌할 수 없는 이때에 어찌 예사로 보아 넘기고 구제할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가을철도 가까워졌으니 바로 뜻을 번듯 바꾸어 나오기에 합당하다. 반드시 내 뜻을 몸받아 위태로운 나라의 형세를 구제하여 내 희망에 부응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가서 전유하게 하였다.
7월 9일 무오
경상도 하동현(河東縣)에 지진이 있었고 영산현(靈山縣)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7월 11일 경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초저녁에 검은 구름 한 줄기가 서방에서 일어나 달 아래를 가로 지나 동방까지 뻗었는데 길이는 하늘 끝까지 닿았으며 너비는 두 자쯤 되었고 한참만에 사라졌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전라도에서 노인을 초록(抄錄)하여 아뢴 것을 보니, 해남(海南)에 사는 급제(及第) 윤선도(尹善道)도 그 가운데에 들어 있었습니다. 윤선도는 중죄를 지은 몸이므로 전리(田里)에서 편안히 쉬게 해준 것도 국가에서 너그러이 용서하는 은전에서 나온 것인데, 어찌 아무런 사고도 없는 다른 사람과 함께 노인을 우대하는 은혜를 똑같이 입을 수 있겠습니까. 본도(本道)에서 싸잡아 아뢰었으니 매우 놀랍습니다. 감사 오시수(吳始壽)을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강화부(江華府)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다.
경기 각 고을에서 좀도둑이 사방에서 일어나 날이 저문 뒤에 서넛이 떼 지어 다녔다. 수직(守直)하는 자가 꾸짖어 금지하면 대뜸 낫으로 찔러 즉시 죽기도 하고 매우 다치기도 하였다. 도신(道臣)이 이를 아뢰었다.
황해도 황주(黃州)에서 벼락이 성문루(城門樓)를 치고 평산(平山)·연안(延安) 등 고을의 사람과 가축도 벼락에 맞아 죽은 자가 많았다. 문화(文化) 등 스물아홉 고을에 우박이 내리고 곡산(谷山) 등 여섯 고을에 누리의 재해가 있었다.
7월 12일 신유
경기 남양(南陽)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전라도 임피(臨陂) 사람과 남원(南原) 사람이 벼락에 맞아 죽었고 정읍(井邑) 등 고을에서 지진이 있었다.
7월 13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영상 허적(許積) 등이 헌부의 차자와 이단하(李端夏)·윤계(尹堦) 등의 소 가운데에 있는 군사에 관한 일을 임금 앞에서 여쭈어 정하였다. 허적은 훈국의 군사 일부를 줄이되 별대(別隊)의 상번(上番)을 잠시 중지하고 정초 도제조(精抄都提調)를 폐지하여 병조가 주관하게 하자고 청하였으며, 김만기(金萬基)는 정초와 별대 두 군사들을 폐지하기를 청하였으며, 김수항(金壽恒)은 김만기의 말이 매우 옳다고 하였으나, 상이 답하지 않았다. 상이 이르기를,
"올해의 농사를 미리 알 수 없기는 하나, 경작하지 못하고 포기한 것이 반이 넘으므로 내년 봄의 염려가 또한 지난날보다 훨씬 더할 것이니, 폐단을 줄여 어루 만지고 돌볼 도리를 먼저 강구하여 정해야 한다. 각도의 수륙 조련(水陸操鍊)과 병사·영장이 순회하여 사방(射放)을 시험하는 일을 모두 내년 가을까지 멈추고 제색 군병(諸色軍兵)의 빈 인원을 세초(歲抄)하여 채워 정하지 말고 각영(各營)과 각읍(各邑)의 월과(月課)하는 군기(軍器)·군량(軍糧)과 각도의 교생(校生)에게 연례(年例)로 보이는 고강(考講)도 내년 가을까지 멈추고 상방(尙方)의 설면자(雪綿子)와 중면자(中綿子)를 아울러 5백 근 중에서 특별히 3백 근을 줄여서 조금이라도 폐단을 줄이라. 또, 상방이 연례로 연경(燕京)에서 무역하는 물건을 지난해에 이미 그 반을 줄였으니 올해에는 특별히 전부를 줄이라."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올해는 영남의 한재가 특히 심합니다. 옛날에 한 아낙이 원한을 품어도 3년의 가뭄을 불러온 일이 있었습니다. 도내(道內)에 혹 의심쩍은 옥사로서 억울한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옥중에 정법(情犯)이 의심스러운 자는 도신(道臣)을 시켜 물정을 참작하여 심사해서 아뢰게 하여 소결(疏決)할 바탕으로 삼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을 유임시켰다. 이때 내외의 저축이 모두 비었으나 관서만이 다른 도보다 조금 나았고 민유중이 여러모로 힘썼으므로 국가의 일상적인 경비를 오로지 관서에 힘입고 있었다. 또 밀보리는 여러 도가 똑같이 큰 흉작이었는데 민유중이 보리 종자가 없을 것을 미리 근심하여 천류고(泉流庫)에 남겨 둔 쌀을 내어 5천여 석을 사서 배로 경창(京倉)에 날라 보내어 종자가 없는 다른 도에 보내게 하였다. 그가 사전에 요리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았다. 민유중의 임기가 찼으므로 갈아야 할 것인데 조정에서 대체할 만한 사람이 없어서 어려워하였다. 이에 허적(許積)·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민유중은 마음을 다하여 직무에 봉사하였으므로 본도의 일이 힘입어 잘 거행되었을 뿐더러 함께 구제하려는 뜻도 있습니다. 앞으로 농사가 어떨지 알 수는 없으나, 모든 일을 요리하여 잘 처리하는 것은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니, 유임시키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바로 그러하다."
하고, 드디어 올해 동안만 유임시키라고 명하였다.
7월 14일 계해
훈국군(訓局軍)의 전부(前部)를 폐지하여 늠양(廩養)의 폐단을 줄였다. 한 부(部)에서 한 해 동안에 줄이는 비용이 쌀 1만 석과 무명 2백 동(同)이나 되고 그 시사(試射)의 상격(賞格)에 드는 것을 아울러 셈하면 줄이는 것이 더욱 많았다.
7월 15일 갑자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박지(朴贄)를 사간으로, 이하(李夏)를 집의로, 민종도(閔宗道)를 헌납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부제학으로, 신정(申晸)을 응교로, 이혜(李嵆)를 부응교로, 신후재(申厚載)를 수찬으로, 이여발(李汝發)을 총융사(摠戎使)로 삼고, 남구만(南九萬)을 발탁하여 함경 감사로 삼았다.
새벽부터 큰비가 사납게 쏟아지다가 아침이 되어서야 그쳤다. 성안의 크고 작은 도랑이 모두 불어 넘쳐서 다리가 무너지고 거리가 내를 이루어 빠져 죽은 사람이 많았는데, 인경궁(仁慶宮) 앞의 다리가 무너져 갑자기 죽은 자가 네 사람이나 되었다. 성안의 수재의 참상은 근고에 없던 것이었다.
7월 16일 을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17일 병인
집의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접때 대간의 신하가 올린 소 가운데에 궁위(宮闈)가 엄하지 않은 폐단에 대해 언급하였는데, 이것은 상례에 따라 경계의 말씀을 아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종척(宗戚)의 도리로서는 조심하여 자신을 경계하고 공경히 삼가서 자처(自處)하여 그런 일이 있으면 고치고 없으면 더 힘써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복창군(福昌君) 이정(李楨) 등은 감히 상소하여 스스로 변명하되 기세를 올리고 장황하게 써서 버젓이 깔보는 것이 마치 대각(臺閣)과 승부를 겨루는 듯하였으니, 사체로 헤아려 보면 매우 미안합니다. 복창군 정·복선군(福善君) 이남(李柟)·복평군(福平君) 이연(李㮒)을 모두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였으나, 따르지 않았다. 이튿날 ‘자신의 귀함을 믿고서 기염을 부리고 대각을 깔보는 버릇을 길러 줄 수 없다.’는 등의 말을 보태넣어 논하였는데, 세 번 아뢰어서야 따랐다. 또 아뢰기를,
"신참 급제자를 간택함은 사체가 매우 중하므로 파좌(罷坐)하지 못하게 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니, 취하거나 버릴 때에 한결같이 공론에 따라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괴원(槐院)의 자리는 논의가 들쑥날쑥하여 하나로 돌아가지 못하고 사흘 동안 끌다가 마침내 파좌하기에 이르렀으니, 조정의 명령을 업신여기고 사사로운 뜻을 고집하는 버릇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괴원의 행수 장무관(行首掌務官)을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19일 무진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이합(李柙)을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0일 기사
사간 박지(朴贄),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기아가 급함은 보릿가을 이후에 더욱 심하였는데 경기 백성 중에 그래도 살아 남은 자가 있는 것은 실로 접때 7천 석의 곡물을 나누어 준 데에 힘입은 것입니다. 덕의(德意)가 미친 바에 누군들 감복하여 떠받들고 송축하지 않겠습니까. 지금 추수가 멀지 않아서 수수·조가 점점 익어가므로 산골짜기 백성은 이삭을 따고 나락을 훑어 혹 죽을 쑬 밑거리로 삼을 수 있으나, 바닷가 여러 고을에는 수수·조도 없는데다가 벼가 익을 때도 아직 멀었으므로 사람들이 다 굶주림에 괴로워 하루를 연명하는 것이 한 해를 지내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때에 다시 몇 말이나 몇 되의 곡물을 얻는다면 가을 곡식이 익을 때를 기다릴 수 있고 살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니, 호조의 콩 수천 석을 내어 구제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지금 분부하더라도 필시 이달 안에는 미치지 못할 것이고 다음달에 들어서면 온갖 곡식이 잇달아 익을 것입니다. 8월 초기에 나누어 주는 것은 급한 것을 구제하는 방도가 아닐 듯하니, 시행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임기가 찬 수령을 올해에 한하여 유임시킨다는 것은 대개 각 고을에서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는 폐단을 염려해서입니다. 다만 생각하건대, 내년 봄 진휼의 정사는 올해에 비해 더욱 심할 것인데, 올 겨울에 갈릴 관원은 필시 내년 봄 일을 근심하지 않을 것이고 내년 봄에 부임할 관원은 새로 도임하여 생소하므로 사세 상 주선하기 어려울 것이며 가을 곡식이 성숙한 뒤에는 맞아들이고 떠나보내는 데 대한 폐단도 봄·여름과 같지는 않을 것이니, 임기가 찬 수령은 모두 가을 곡식이 성숙한 뒤에 교체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전에 이미 유임시킨 자는 갈고 올 가을에 임기가 차는 자는 모두 내년 보릿가을까지 유임시키도록 하라."
하였다. 또 아뢰기를,
"궁금(宮禁)을 수직(守直)하는 것은 사체가 매우 중대하므로 도망간 군사에 대한 처벌의 법이 매우 엄한데도 불구하고 올 7, 8월 두 달에 궁금을 수직하는 군사로 도망간 수가 거의 1백여 명이나 됩니다. 이들은 다 외방에서 상번한 자인데, 남의 집에 기숙하다가 양식이 떨어져 스스로 보존할 수 없게 되자 심지어 이런 죽을 생각을 하고 달아나 돌아가고 있습니다. 그 정상을 논하면 매우 불쌍하기는 하나, 굶주림을 핑계로 제멋대로 달아나게 버려둔다면 뒤 폐단을 막기 어려울 것이니, 해조를 시켜 조사해 무겁게 다스리소서. 이번에 달아난 군사들은 매우 완고하고 어리석기는 하나, 달아난 군사의 죄가 무겁다는 것을 그들도 스스로 알 것입니다. 이 짓을 어찌 즐거워서 하였겠습니까. 이로 미루어 보면 기숙하며 굶주리는 정상은 모두 다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달아나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 형세상 반드시 오게 되어 있으니 그 가엾은 것이 어찌 일반 백성 정도뿐이겠습니까. 당초에 향군(鄕軍)으로서 입번(立番)을 자원한 자가 2백 명에 가까웠는데 도망가거나 죽은 자를 제외하면 지금 남아 있는 자가 40명도 채 못됩니다. 진휼청을 시켜 날마다 됫쌀을 주어 연명하여 번 서는 기한을 마칠 수 있게 하소서.
조정 인사들의 삭료(朔料)를 시기에 앞서 나누어 준 것은 실로 가난한 걱정을 염려하신 것입니다마는, 약간의 무록관(無祿官)에게는 두어 필의 무명만 주었을 뿐입니다. 여느 때에는 녹과(祿科)에 한정이 있어서 녹을 줄 수는 없지만 이번에 봉료(俸料)를 준 뒤에는 이서(吏胥)와 같은 천한 자도 봉료를 받았는데, 관직이 있는 사람이 봉료를 받지 못하였으니 매우 부당한 일입니다. 해조를 시켜 일체로 봉료를 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그 뒤에 대신이, 무록관에게 봉료를 주는 것은 조종조에서 행하지 않은 법이므로 이제 갑자기 바꿀 수는 없다고 말하였으므로 그 일이 중지되고 말았다. 또 아뢰기를,
"충청 병사 이필(李泌)은 일찍이 기해년014) 국상 3년 안에 해미 영장(海美營將)으로서 순행차 아산현(牙山縣)에 이르러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였는데 그 기생은 본현의 사인(士人) 신인립(愼仁立)의 여종이었습니다. 신인립이 놀라움과 분함을 금치 못하여 그 여종을 매우 치고 악기(樂器)를 부숴버렸기에 도리에 어긋난 이필의 행실에 대해 사람들이 모두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벼슬길을 타고 군수의 직임에 제수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체차하라고 답하였다. 그 뒤에 탑전에서 연이어 아뢰니, 특별히 명하여 나문하게 하였는데, 다섯 차례 형추하고 정배(定配)하였다.
7월 21일 경오
평안도 강계부(江界府)에서 벼락이 객사(客舍)의 기둥을 쳤다.
경상도 경주 등 여남은 고을이 가물었다.
사간 박지(朴贄),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양지 현감(陽智縣監) 이정완(李挺完)은 조곡(糶穀)을 많이 내어 사사로이 은(銀)을 사서 이웃 고을에다 전장(田庄)을 샀고 선혜청(宣惠廳)에서 지급한 쇄마가미(刷馬價米)를 다 사적인 용도로 돌려 쓰고 여러가지 쇄마를 백성에게 내라고 요구하였으므로 온 경내가 원망하여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7월 22일 신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7월 23일 임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집의 이하(李夏)가 아뢰기를,
"경상 병사 정영(鄭韺)은 사람됨이 용렬하므로 본디 군사를 거느릴 재목이 아닙니다. 도임한 뒤로는 정사를 하급 관리에게 맡겼고 성질도 탐욕스러워서 오로지 자기를 살찌우는 일만 하였습니다. 군졸을 수탈하여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가득 차고 집이 관아와 매우 가까운 거리에 있는데 짐바리가 잇따르고 있다 합니다. 그대로 두어 군사의 마음을 거듭 잃어서는 안 되겠으니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석성 현감(石城縣監) 이진(李晋)이 행한 더럽고 잗단 일들은 하나뿐만이 아닙니다. 아동(衙童) 두어 사람이 각각 푸주를 세워 장사하여 이익을 꾀하고 있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합니다. 파직하여 서용하지 마소서."
하니, 상이,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또 아뢰기를,
"토산 현감(兔山縣監) 임가재(林可材)는 오로지 탐오를 일삼고 있으므로 백성이 다 원망합니다. 관속(官屬)의 이름을 빌려 조곡을 많이 내어 비싼 때를 타서 팔기 때문에 밥집의 문에 시장처럼 사람이 모입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경원(慶源) 등 고을에서 소가 벼락에 맞아 많이 죽었다.
도성 안에서 굶고 병을 앓아 죽은 자가 5백 5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죽은 자를 보고한 것을 합하면 6천 4백여 인이며, 경상도에서 조사한 것에 따라 아뢴 수가 또한 3천 6백 50여 인이었다.
7월 24일 계유
이연년(李延年)을 좌승지로, 김만균(金萬均)을 동부승지로, 윤진(尹搢)을 수찬으로, 이원정(李元禎)을 양주 목사로 삼고, 민점(閔點)을 발탁하여 평안 병사로 삼았다. 이원정은 대간의 논핵을 거듭 받았는데 이때에 이르러 외직(外職)으로 나가기를 청하였다.
집의 이하(李夏), 지평 유하익(兪夏益)이 아뢰기를,
"접때 승문원이 잘잘못을 평가하는 자리에서 전 저작(著作) 이국방(李國芳)과 제원 찰방(濟源察訪) 이선원(李善源)이 감히 강(講)에 응해야 할지의 여부에 대해 대신에게 물었습니다. 사체를 알지 못하고 거조가 괴이하였으니, 모두 파직하소서. 또 사관을 새로 천거할 때에 선생에게 두루 물어 보지도 않고 지레 분향(焚香)하였으니, 당해 사관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상이 승지를 보내어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에게 가서 전유하여 올라오게 하였으나 송시열이 또 병이 위독하다 하고 오지 않았다.
7월 25일 갑술
지평 윤가적(尹嘉績)이, 전 양천 현감(陽川縣監) 박원개(朴元開)의 죄상에 대해 의논해 아뢴 것이 마땅하지 못하였다 하여 소를 올려 금부를 배척하였다. 이에 판의금(判義禁) 김수항(金壽恒), 동의금(同義禁) 강백년(姜栢年)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였으나, 윤허하지 않았다.
전라도에서 6월에 염병으로 죽은 자가 3천 5백 34명이었고 굶주려 죽은 백성이 7백 25명이었고 함평(咸平) 등 고을에서 우역(牛疫)으로 죽은 소가 1백 47두였다.
7월 26일 을해
이섬(李暹)을 장령으로, 조위봉(趙威鳳)을 부교리로 삼았다.
7월 26일 을해
제주로 들여보낸 종자용 곡식을 실은 배 15척이 한꺼번에 풍랑에 표류하여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뒤에 11척은 표류하여 바닷가 여러 고을에 닿았고 2척은 제주에 도달하였으나, 2척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으므로 다시 신칙하여 찾게 하였다.
우부승지 이단하(李端夏)가 연로(沿路)에서 본 바에 따라 상소하여 폐단을 아뢰고, 지평 윤가적(尹嘉績)도 시폐(時弊)에 대해 소를 올리니, 상이 모두 도타이 답하고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사간 박지(朴贄), 헌납 민종도(閔宗道),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제주관(題主官)은 예장(禮葬)만 맡은 관원입니다. 그런데 심유(沈濡)는 형신을 남용하였으니 이것만도 이미 이를 데 없는 짓을 한 것인데 심지어는 관리를 결박하여 배 꼬리에 매어 놓았으니 더욱 놀랍습니다. 더구나 어공(御供)도 줄인 이때에 다담(茶啖)을 내도록 요구하여 본관이 논핵하는 보고까지 있게 하였으니 사체로 논하면 곧 체포하여 구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해조가 범연히 발함(發緘)하기를 청하였으니, 자못 법을 지키는 뜻이 없습니다. 심유는 나문하고 형조의 당해 당상과 낭청은 무겁게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이때 심유가 우의정 홍중보의 제주관으로 여주(驪州)에 가서 관리에게 형벌을 남용하였다. 목사 최일(崔逸)이 이를 치보하였기 때문에 또 목사 최일이 논핵한 보고가 체례를 잃은 데 대한 죄를 논하여 파직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는데, 두 번 아뢰고는 곧 정계하였다. 또 사복시의 마초가(馬草價)가 너무 지나친 것을 논하여 본시와 해청을 시켜 내년 가을까지 적당히 줄이게 하고 그 밖에 각사의 공물가미(貢物價米)가 지나치게 많은 곳도 마찬가지로 변통하기를 청하고, 또 각사의 관원이 공물 하인(貢物下人)을 부리는 폐단을 논하여 공물 각사(貢物各司)의 제조와 당상을 시켜 엄히 금단하게 하되 만일 예전 버릇을 그대로 계속할 경우에는 낱낱이 적발하여 논죄하기를 청하니, 상이 다 따랐다.
경상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가 2천 6백 92명이었다.
7월 27일 병자
칠석 과제(七夕課製)를 고시하였는데 물려 행한 것이다.
집의 이하(李夏), 지평 유하익(兪夏益)이 아뢰기를,
"전 해운 판관(海運判官) 이광적(李光迪)은 각창(各倉)에서 관례로 바치는 구가(丘價)에 대해 새로운 규례를 만들어 한 단(端)의 무명을 쌀 두 섬으로 쳐 놓고는 미처 거두어 들이지 못하고 그 직임에서 체차되었습니다. 그러자 자기가 친하고 믿는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을 보내어 각창에서 거두어들이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추징할 즈음에 정도에 지나친 일이 많이 있었으며 가난한 조졸(漕卒)이 일제히 장만하여 바치지 못하자 도리어 김씨가 훔쳐 먹었는가 의심하고 형조에 정장(呈狀)하여 그 수량을 독촉해 거두어들였으므로 사람들의 말이 자자하여 깨끗하고 밝은 조정을 욕되게 하였습니다. 시종(侍從)으로 출입한 신하가 이런 놀라운 일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하였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고, 또 아뢰기를,
"아산(牙山)에 정배된 죄인 박형(朴泂)은 큰 장죄를 범하였으므로 법으로는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데도 서쪽 변방에서 가까운 내지(內地)로 유배지를 옮겨 주었습니다. 그러나 조금도 악행을 고치지 않고 방자하게 의롭지 못한 짓을 하였습니다. 마음대로 유배지를 떠나 안성(安城)에 오래 있으면서 전장(田庄)을 장만하고 집을 짓고 주민을 부렸으니, 국법을 업신여기고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는 정상을 징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법에 따라 처치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박형은 그때 마침 죽었으므로 벌을 받지 않았다.
강화부에서 이달 20일에 큰바람이 불어 곡식을 손상하였다.
원양도(原襄道)에 장마가 져서 곡식을 손상하였다.
평안도에는 풍재(風災)가 있었고 충청도에는 큰물이 져서 부여 등 고을에서 빠져 죽고 눌려 죽은 자가 38인이었다.
7월 28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함경도에 장마가 져서 곡식을 손상하였다.
경상도의 굶주린 백성이 13만 2천 8백 97인이었고 죽은 자가 3백 72인이었다.
7월 29일 무인
정화제(鄭華齊)를 장령으로, 이합(李柙)을 겸 사서로, 이하(李夏)를 부수찬으로, 이숙(李䎘)을 우부승지로, 신정(申晸)을 집의로 삼았다.
지평 윤가적(尹嘉績)은, 동료가 상회례(相會禮)를 약속하고서 병을 핑계대고 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지평 유하익(兪夏益)은 범죄에 대해 법을 적용하는 공사에 살피지 못한 잘못이 있었고 병으로 상회례에 나아가지 못하였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간원이 처치하여 유하익은 체차하고 윤가적은 출사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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