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1일 기유
햇무리가 지고 우이(右珥)가 있었다.
9월 2일 경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치계하였다.
"도내에서 골육지친의 변고가 번번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아비가 아들을 죽이고 형이 아우를 죽인 자가 다섯 사람이나 되어 윤기(倫紀)가 끊어지고 있으니, 실로 작은 근심이 아닙니다."
9월 3일 신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평안 병사 민점(閔點)이 떠나려면서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고 드디어 본도의 성지(城池)·병기(兵器)는 형세를 보아가며 수리하여 못쓰게 되지 않게 하라는 뜻으로 일러서 보냈다.
상이 하교하기를,
"올해 도성 안팎에 전후로 조곡(糶穀)한 것을 거두어 들이는 일은 만부득이하여 한 것이지만 기근 끝이라서 결코 모곡(耗穀)까지 아울러 거두어들일 수 없으니, 특별히 그 모곡을 감면하여 도민이 조금이라도 은혜를 입게 하라."
하였다. 이날 인견 때에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의 말로 인하여 이 명이 있었다. 또 하교하기를,
"기근이 든 끝이라서 경기의 조곡을 원수(元數)대로 받아들일 수 없는 형세이니, 신구(新舊)를 막론하고 나누어 준 원회부(元會付)와 각종 이전(移轉)한 환자(還上)의 원수 안에서 모두 절반만 거두어들이게 하라. 국가에서 이미 참작하여 정한 뒤에 수령이 수량대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중죄를 받을 것이니, 이 뜻도 엄히 신칙하라. 또 다 받아들인 뒤에는 서울의 관리를 보내 적간(摘奸)하게 하여 허위로 기록하는 폐단이 없도록 하라."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경기 고을에 이전한 곡물은 절반만 거두어들이게 하였습니다마는, 강도(江都)와 남한(南漢)의 토민(土民)이 받은 것에 있어서는 원수대로 거두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그 뒤에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경기 여러 고을의 국곡(國穀)은 다 절반만 거두어들이게 하면서 광주(廣州)와 강화(江華)에서만 원수대로 거두어들이게 하였으니 차별없이 하는 정사에 있어서 이미 고르게 하는 도리를 잃은 것이고 또 이 두 곳은 다 중요한 요새지인데 그곳 백성의 원망이 없게 하지 못하면 자못 진념하고 도타이 돌보는 뜻이 아니라고 하여 일체로 절반만 거두어들이자고 청하였다. 여러 번 아뢰니,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강도와 남한은 형세가 같지 않습니다. 강도에 나누어 준 수는 2만 석에 지나지 않고 지난해에 받아들인 것도 3분의 2가 넘으니, 강도의 조곡은 결코 절반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남한에서 받아들여야 할 쌀은 6만 7천여 석인데, 이제 그 주위의 이웃 고을은 모두 절반만 받아들이고 광주에서만 원수대로 바치게 한다면 백성의 원망이 형세상 반드시 일게 되어 있습니다."
하고, 정치화도 광주는 과연 원수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말하고 이어서 남한의 조곡은 신구를 통틀어 계산하여 절반만 거두어들이자고 청하니, 상이 따랐다.
이하(李夏)를 부교리로, 이상경(李尙敬)을 북병사로 삼았다.
9월 4일 임자
영의정 허적이 사직하는 글을 일곱 번이나 올리자 상이 승지를 보내어 전유해 출사하게 하였다. 허적이, 정승 자리에 오래 있는 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맞지 않으므로 병이 나지 않았더라도 몸을 이끌고 물러나 어진 사람이 나아갈 길을 양보해야 마땅하다는 등의 말로 승지 편에 아뢰었다.
9월 6일 갑인
헌부가, 사족(士族)인 홍씨(洪氏) 집에 시체 7구를 묻지 못하였는데 부관(部官)이 해부에 보고하지 않아서 휼전(恤典) 가운데에서 누락되게 하였다 하여 당해 부관을 파직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르고 이어서 해조에 명하여 특별히 휼전을 베풀게 하였다.
9월 7일 을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전후의 비답에 이미 다 말하였는데 경이 이토록 사양하니, 내 매우 부끄럽다. 아아, 지금이 정말 어떤 때인가. 백성이 구덩이에 굴러 죽은 것이 몇천 몇만 인인지 모르니, 마음이 매우 슬퍼서 참으로 무어라 형용하기 어렵다. 논밭에 벼나 곡식을 심지 못하고 갈지도 못하고 있으니 장래의 일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는 형편에 놓여 있어 믿는 것은 오직 경뿐인데, 경은 어찌 차마 한가로이 살려고 한단 말인가. 더구나 내가 걱정으로 애태우다가 병이 났으니, 정기(精氣)나 심신(心神)이 어찌 평소와 같겠는가. 믿는 것은 오직 경인데, 경은 어찌하여 헤아리지 못하는가. 좌상은 머지 않아 국외로 나갈 것이고, 경은 조섭한 지 이미 오래되었으니, 반드시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나와서 정치의 방도를 논해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충청도 대흥현(大興縣)에 지진이 났는데 소리가 큰 우레와 같아 담벽과 집이 무너질 듯하였다. 면천(沔川) 등 열여덟 고을에서 같은 날에 지진이 있었다.
도성 안 영안위(永安尉)의 집에서 분(盆)에 심은 유자 나무에 열매 여남은 덩이가 맺어서 익었는데 형색이 남방에서 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9월 8일 병진
도성 안 여염집의 살구 나무에 꽃이 많이 피어 찬란하였는데 마치 봄과 같았다.
9월 9일 정사
집의 신정(申晸),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헌(吳斗憲)·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지금 가을 농사는 이미 끝났으나 서울의 굶주림은 갈수록 더욱 심하여 여염의 백성들이 조석을 보전하지 못할 지경입니다. 그런데 전후로 대여한 곡식을 이제 한꺼번에 거두어들일 것이고, 또 진휼청에서는 한결같이 본색(本色)으로 거두어들이기 때문에 시장 쌀값이 갑자기 올라서 백성들이 황급해 어찌할 바를 모른다 하니 국가가 염려하고 돌보는 도리에 있어서 변통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습니다. 그러니 해청(該廳)을 시켜 녹을 먹는 조정 인사의 집 이외는 모두 경기의 환자[還上] 예에 따라 반만 거두어들이게 하거나 은(銀)이나 베로 값을 쳐서 장만하여 바치게 하여 매우 다급한 도성 백성들의 형편을 늦추어 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도성 백성들에게 전후로 대여한 국곡이 무려 2만 6천 5백여 석이나 되는데 만일 빨리 도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점점 더 포탈이 늘어나 그 폐단이 더욱 심해질 것입니다. 또 모곡(耗穀) 2천 6백여 석을 특별히 명하여 감면하게 하셨으므로 도성 백성들이 입은 혜택이 또한 많습니다. 그러므로 반만 거두어들인다는 것은 일의 형세상 시행하기 어렵습니다. 그 가운데에서 끝내 쌀로 장만하여 바치기 어려운 자는 혹 은과 베로 값을 쳐서 대납하게 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헌부가 또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예전에 없던 것이어서 굶주리고 떠돌아 다니다가 죽은 자가 태반이나 됩니다. 팔도 가운데 삼남(三南)이 더욱 심하여 살아남은 백성이 의지하여 살아갈 수 없어, 마치 죽어가는 사람의 실오라기 같은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제때에 어루만져 주더라도 부지하기를 바라기가 어려운데, 더구나 여러 가지 역(役)이 여느 해에 비해 준 것이 없는데다 두 해의 세금을 한꺼번에 아울러 거두고 있으니, 이와 같은 거조는 이미 백성의 신망을 잃은 것입니다. 그런데, 대여했던 곡식을 이제 또 줄이지 않고 받아들인다면 고혈(膏血)이 이미 다하여 살길이 끊어질 것입니다. 경기에 대여해 준 곡식은 이미 반으로 감해 주었는데, 삼남만 달리하는 것은 차이를 두지 않고 똑같이 다스리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아닙니다. 삼남의 환자(還上)도 한결같이 경기의 예에 따라 절반만 거두어들이소서."
하니, 상이 또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기에 나누어 준 것은 무려 22만여 석이나 되어 원수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형세이기 때문에 특별히 절반만 받아들이게 하였습니다만, 다른 도는 이를 예로 삼을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그뒤 등대 때에 정치화(鄭致和)가 또 시행하기 어렵다는 뜻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대간의 계사도 옳지 않은 것은 아니나, 형세에 차이가 있으니 어찌 반드시 시행할 수 있겠는가."
하였다.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상소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승지를 보내어 전유하여 올라오게 하였다. 송시열이 말하기를,
"신은 사생의 판가름이 눈앞에 있는데 나아가거나 물러가는 데에 대해 어찌 논할 수 있겠습니까. 바야흐로 내려보내신 약제를 날마다 다려서 먹고 있으니, 성상의 은혜를 입어 생기를 회복할 수 있다면, 감히 나아가 높은 은혜에 사례하지는 못하더라도, 혹 글로 충심을 다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9월 10일 무오
집의 신정(申晸), 장령 정화제(鄭華齊), 지평 오두헌(吳斗憲)·이수만(李壽曼)이 아뢰기를,
"성천 부사(成川府使) 홍석기(洪錫箕)는 벼슬살이 하면서 치적이 없었을 뿐더러 웃음거리를 끼친 일이 많았는데, 더구나 이제는 노쇠하였고 게다가 술병까지 있으니, 체차하소서. 광릉 참봉(光陵參奉) 황숙귀(黃俶龜)는 제 누이와 하나의 사소한 일로 인하여 점점 틈이 났는데 그 사이에 도리를 손상한 일이 하나뿐만이 아니었으며 심지어는 제 어미로 하여금 모녀의 정을 펴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이처럼 윤리에 어긋난 짓을 한 사람을 의관(衣冠)의 대열에 둘 수 없으니, 사판에서 삭제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11일 기미
평안도 영원(寧遠) 등 고을에 8월 27일에 눈이 내리고 가산(嘉山) 등 고을에 우박이 내렸다.
9월 12일 경신
경기·삼남(三南)·원양(原襄) 등도의 지난해 전세(田稅)의 반을 시기를 물려서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조정의 의논 중에 두 해의 전세를 전에 없던 큰 기근 끝에 아울러 받아들일 수 없다 하여 감면하자는 논의가 많이 있었다. 이때에 이르러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지금 민간의 형세로는 두 해의 세금을 실로 한꺼번에 받아들이기란 어렵습니다. 그러니 지난해의 전세는 반만 뒤로 물려서 받아들이게 하면 백성의 힘을 조금이나마 펴지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영상의 뜻도 이것을 옳게 여기자, 상이 이르기를,
"내 뜻도 바로 그러하다."
하고, 드디어 이 명을 내렸다.
9월 13일 신유
원양 감사(原襄監司) 김익경(金益炅)이 도내에서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였다. 원주 목사(原州牧使) 허질(許秩)이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加資)하고 평해 군수(平海郡守) 박재(朴材), 홍천 현감(洪川縣監) 황윤(黃玧), 평강 현감(平康縣監) 조이후(趙爾後), 횡성 현감(橫城縣監) 송광순(宋光洵) 등에게는 모두 표리(表裏)를 내렸다. 함경 감사(咸鏡監司) 홍처후(洪處厚)도 진휼을 잘한 수령을 계문하였다. 정평 부사(定平府使) 권숙(權淑)이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고 북청 판관(北靑判官) 이순선(李循先)에게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다.
9월 14일 임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암행 어사 김만중(金萬重)·신정(申晸)·이혜(李嵆)·조위봉(趙威鳳) 등을 나누어 보내어 경기·삼남의 진휼의 잘잘못을 염찰하게 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의 병이 위독하자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보게 하고 이어서 약물을 내렸다.
9월 15일 계해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9월 16일 갑자
부교리 이하(李夏)를 제주로 보내어 선유하게 하였다. 조정에서 제주 세 고을이 가장 심하게 기근이 들어 백성이 많이 죽었으므로 위로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된다고 하여 이하를 선유 어사(宣諭御史)로 삼아 가서 선유하게 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이 상차하여 아뢰기를,
"신의 조부 김상헌(金尙憲)이 일찍이 신축년020) 에 어사로 본도(本島)에 가서 선유할 때에 선조께서 특별히 명하여 한라산(漢拏山)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또 따로 사목을 만들어 보내셨으니, 전례에 따라 하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비국에 내렸다. 그리하여 응당 거행해야 할 절목 17조(條)를 작정하여 세 고을 백성에게 무명 4천 필과 보리 종자 2천 섬을 내리고 진상하는 토산물과 제사(諸司)의 상공(常貢)과 내사(內司) 및 각사(各司)의 노비 신공(奴婢身貢)도 감면해주고 또 유생·무사를 모아 시재(試才)하여 급제를 내려 고무되게 하였다. 이어서 백성의 죽음을 위문하고 백성의 고통을 묻고 아울러 민간의 효우(孝友)·절행(節行)이 특별히 나타난 자를 찾아서 정표(旌表)하고 발탁하여 임용하는 바탕으로 삼고 또 바닷가 고을의 쌀 30석을 주어 노인에게 잔치를 베풀 거리로 삼게 하였다.
정적(鄭樍)을 장령으로, 정유악(鄭維岳)·윤가적(尹嘉績)을 지평으로, 조원기(趙遠期)를 정언으로, 최후상(崔後尙)을 수찬으로, 남이성(南二星)을 충청 감사로 삼았다.
9월 17일 을축
대사헌 송준길(宋浚吉)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생각하는 바를 아뢰기를,
"전하께서 신명을 대하는 정성을 다하여 하늘의 뜻에 응하고 애통하게 여기는 교서를 빨리 내려 민심을 위로하며 무릇 사랑하고 돌보는 정사를 행하되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소서. 이욕(理欲)의 큰 한계를 밝히고 백성의 향배(向背)를 알고 자신의 공사(公私)를 가리고 뭇 신하의 사정(邪正)을 살펴서, 한결같은 뜻으로 오래 지속하여 게을리하지 않으신다면, 상제와 귀신이 위엄과 노여움을 도로 거두어 뭇 백성이 다 함께 복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봄 여름 사이의 일을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올해의 농사는 갈지도 못하고 김매지도 못하였으니, 내년 봄의 걱정거리를 생각하면 기가 막힌다. 바라는 바는 오직 경들이 마음을 바꾸는 데에 있는데, 성의가 천박하여 멀리 떨어진 마음을 돌리지 못하니, 참으로 매우 부끄러워서 어떻게 형용해야 할지 모르겠다. 소장 가운데에 부지런히 나라를 위하는 뜻과 누누이 경계를 아뢴 말은 모두가 마음에서 나온 지극한 정성이므로 매우 감복한다. 반드시 나의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올라와야 한다. 본직의 사양에 대해서는 이제 잠시 애써 따른다."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게 하였다.
9월 18일 병인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교리 윤경교(尹敬敎), 부수찬 홍주국(洪柱國)이 상차하여 경술년021) 의 전세와 각년(各年)의 못 거둔 군포(軍布)·신공(身貢)을 죄다 감면하고, 또 도성 백성에게 대여한 곡식을 반으로 줄여 거두어들이기를 청하였다. 그리고 또 아뢰기를,
"옛사람이 학문을 논할 적에 다만 덕성(德性)을 높이고 학문을 쫓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덕성을 높이는 것은 마음을 간직하고 기르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고 학문을 쫓는 것은 학문을 강론하는 한 가지 일에 지나지 않습니다. 옛날에 장재(張載)022) 가 말하기를 ‘움직임에 법도가 있고 말에 교양이 있고 낮에 하는 것이 있고 밤에 얻는 것이 있고 숨쉴 때에 기르는 것이 있고 눈깜짝할 때에도 지키는 것이 있다.’ 하였는데, 이것이 덕성을 기르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정이(程頤)023) 가 말하기를 ‘오늘 한 가지 일을 연구하고 내일 한 가지 일을 연구하여 오래도록 쌓아 익히면 자연히 도리를 잘 알게 된다.’ 하였는데, 이것이 또한 학문의 공효를 말한 것입니다."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나라를 근심하여 말을 다하는 정성을 내 매우 감탄하였다. 차자 가운데에 말한 일은 묘당과 의논하여 처치하겠다. 끝에 경계한 말은 더욱 아름답게 여겼다. 유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丙寅/副提學李敏迪、校理尹敬敎、副修撰洪柱國上箚, 請盡減庚戌田租及各年未收軍布身貢, 且都民糶穀, 半減收捧。 又曰:
古人論學, 只曰尊德性、道問學, 尊德性不過曰存養一事, 道問學不過曰講學一事。 昔張載有言曰: ‘動有法、言有敎、晝有爲、宵有得、息有養、瞬有存,’ 此非尊德性之事乎? 程頤有言曰: ‘今日格一事, 明日格一事, 積習已久, 自然貫道,’ 是亦道問學之功也 上答曰: "憂國盡言之誠, 予深歎賞。 箚中事, 當與廟堂議處。 末端戒誨之言, 尤用嘉之。可不留心焉。"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4장 A면【국편영인본】 36책 706면
【분류】정론-간쟁(諫諍) / 왕실-국왕(國王) / 재정-전세(田稅) / 재정-역(役) / 군사-군역(軍役) /
9월 20일 무진
장선징(張善瀓)을 대사헌으로, 송준길(宋浚吉)을 좌참찬으로, 이훤(李藼)을 부교리로, 이지무(李枝茂)를 우부승지로, 최관(崔寬)을 동부승지로 삼았다.
9월 21일 기사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최상익(崔商翼)이 아뢰기를,
"지난해의 흉년은 지난 역사에도 없던 것으로서 팔도의 백성이 뿔뿔이 흩어져 죽은 자가 몇천 몇만 사람인지 모릅니다. 올해 각도의 농사는 혹 조금 여문 곳이 있으나 기근과 여역 때문에 갈지도 못하고 김매지도 못한 데가 많이 있었습니다. 밭곡식에 있어서는 대체로 여물지 않아 통틀어 말하더라도 다 흉년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삼남이 더욱 심합니다. 지난해의 전세는 반은 뒷날로 물려서 받아들이라는 명령이 있기는 하였으나, 이 밖의 요역도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백성의 힘이 결코 원수대로 바칠 수 없습니다. 나라의 저축이 바닥이 나서 경비가 절박하다는 것을 신들도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지금 민간에서는 다들 흩어지려고 하니, 흩어져서 끝내 거두어들이지 못할 바에야 일찌감치 은혜로운 뜻을 펴서 너그러이 돌보는 정사를 쾌히 베푸는 것이 더 낫겠습니다.
또 신역(身役)의 명단만 있고 죽은 무리의 수가 매우 많으니, 더욱 이웃이나 겨레붙이에게 대신 징수하여 원망을 더 사게 해서는 안 되겠습니다. 삼남의 지난해 전세와 각종 군병(軍兵)과 각사(各司)의 노비와 장인 등에게 해마다 못 거둔 신역은 특별히 감면해 주고, 각도에 신역의 명단만 있는 죽은 무리에 있어서도 도신(道臣)을 시켜 분명히 살펴서 아뢰게 하여 낱낱이 감면해 주어서 이웃이나 겨레붙이에게 대신 징수하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익상 등이 또 경기·원양(原襄)을 더 넣어서 연이어 아뢰니, 상이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그 뒤 등대 때에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왕에 못 거둔 것은 지난해에 이미 받아들이지 말게 하였거니와, 신역의 명단만 있는 죽은 자를 살펴내어 신역을 감면해주자는 것은 그 말이 참으로 옳으므로 시행해야 할 것입니다. 신은 기유년024) 이전의 것은 다 탕감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니, 상이 따랐다.
경상도 안음현(安陰縣)에 지진이 있었다.
9월 23일 신미
영중추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죽었다.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706면
【분류】역사-편사(編史)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이경석은 집에서 효도하고 우애로웠으며 조정에서 청렴하고 검소하였다. 일찍부터 문망(文望)을 지녔었는데 드디어 정승에 올랐다. 나라를 근심하는 마음은 늙도록 게을러지지 않았으나, 친분이 두터운 사람에게 마음 쓰는 것이 지나쳤고 친지나 당류를 위하여 상의 은혜를 구하되 구차한 짓도 피하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이 이 때문에 비평하였다.
○辛未/領中樞府事李景奭卒。
【史臣曰: "景奭居家孝友, 立朝淸素。 早負文望, 遂陞台司。 憂國之心, 至老不懈, 然過於所厚, 爲親黨干恩, 不避苟且, 人以此譏之。"】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4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706면
【분류】역사-편사(編史)
9월 24일 임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최상익(崔商翼)이 아뢰기를,
"고을에서 소를 잡아 파는 것은 법에 어긋난 짓인데다 더구나 지금 우역으로 소가 거의 다 죽었으니, 기근 끝에 백성이 경작할 희망이 없습니다. 도신(道臣)이 계청(啓請)하여 점포를 설치한 것은 본디 진휼의 밑거리를 위해서이지만, 폐단이 점점 더 퍼져 도살을 마구 하고 있으므로 남아 있는 소도 다 푸주로 끌려 갑니다. 경기 각 고을의 점포를 낱낱이 금지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의정 허적이 네 번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경의 병을 내가 모르지 않지만 줄곧 도타이 권면하는 것은 어찌 다른 뜻이 있어서이겠는가. 지금 정승 자리가 빈 것은 참으로 경의 말과 같거니와, 걱정스럽고 경황하여 무어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영부사는 이경석(李景奭)이다.】 원로 대신으로서 국가에서 중시하고 있는데 뜻밖에 잃었으니, 내 매우 마음이 아프고 슬프다. 아, 국운이 불행하여 원로 대신과 재상을 몇 사람 잃었으니 한밤중에 일어나 탄식하면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경은 내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라."
하였다. 허적이 정고(呈告)한 뒤로 승지를 보내어 돈유한 것이 세 번이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또 사관을 시켜 전유하니, 허적이 드디어 출사하였다.
9월 25일 계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목성을 범하였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무릇 바깥에 있는 대간(臺諫)에 대해서는 반드시 하유하기를 청하여 감히 하루도 지체하지 않는 것은 사체를 중히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접때 지평 윤가적(尹嘉績)에게 하유하기를 청한 계본(啓本)을 헌납 최상익(崔商翼)이 대궐에 나아가기 싫어서 나흘 동안 머물려 두었다가 비로소 인편을 이용하여 계청하였으니, 사체를 업신여기고 대각의 규례를 어지럽힌 것이 심합니다. 체차하소서.
근일 관리가 국법을 따르지 않은 채 자기의 기분에 따라 사람을 가두거나 사람을 벌주고 있으니 법관은 이런 것들을 엄히 금하여 국가에서 돌보는 뜻을 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장령 정적(鄭樍)은 출사하기도 전에 사사로운 일로 사람을 가둔 것은 그 사람에게 죄가 있고 없고는 잠시 논하지 않더라도 아직 출사하지도 않은 법관이 사사로이 사람을 가두었으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다 따랐다.
차왜(差倭)가 동래로 온 뒤로는 왜관(倭館)의 왜인이 계속 오가며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다. 그리고 혹 문을 지키는 병졸이 꾸짖어 금하면 노하기도 하고 찬거리가 약소하면 노하기도 하여 손으로 때리지 않으면 대뜸 칼을 뽑기까지 하였다. 이달 17일에 왜관의 한 왜인이 어가미(漁價米)가 좋지 않은 것에 성을 내어 좌자재(左自材) 앞까지 창고지기를 쫓아가서 칼을 뽑아 머리를 쳤다. 이에 부산 첨사 이연정(李延禎)이 곧 군관을 보내어 칼을 빼앗고 묶어서 왜관으로 보내고, 부사 정석(鄭晳)이 엄중히 처단하여 징계하라는 뜻으로 왜관의 왜인에게 말을 전하였더니, 답하기를 ‘자기의 일 때문에 칼을 뽑기까지 하였다면 그 죄가 물론 무겁겠으나, 이번에는 잡물(雜物)을 즉시 들여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다툰 것이었으니, 창고지기가 죽지 않았으면 실로 엄중히 다스릴 것이 없다.’ 하였는데, 정석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비국이 아뢰기를,
"창고지기가 죽지 않았더라도 칼을 뽑아 쳐서 상처를 입힌 죄는 다스려야 할 것인데 다스리려 하지 않으니 정상이 매우 밉고 또한 뒤폐단에 관계되니, 차역(差譯)이 갈 때에 도주(島主)에게 말하여 엄중히 처단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9월 26일 갑술
전라도 함열(咸悅) 등 스물 여덟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9월 27일 을해
허적(許積)을 내의원 도제조(內醫院都提調)로, 홍처대(洪處大)를 좌승지로, 윤계(尹堦)·이상(李翔)을 장령으로, 이유(李濡)를 헌납으로, 김휘(金徽)를 황해 감사로 삼았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논계(論啓)하여 아문의 돈과 곡식을 장사꾼에게 대여하여 이식을 얻게 한 데 대한 잘못을 극력 아뢰기를,
"전 호조 판서 권대운(權大運)이 양향은(糧餉銀) 3천 냥을 대여하라고 허락하였는데 대여한 지 1주년이 되었으나 조금도 갚은 것이 없었으므로 마침내 송사를 일으키고 의혹과 비방을 불러오고야 말았습니다. 설사 이익이 있고 손실이 없더라도, 천승(千乘)의 나라로서 시장에서나 하는 일을 하여 작은 이익을 꾀하는 것만도 부끄러운 일인데, 더구나 손실이 있고 이익이 없는 것이겠습니까. 각 아문에서 대여하고 이식을 얻는 일을 일체 금지하여, 백성에게서 이익을 꾀하다가 도리어 국가의 재정을 손실하는 폐단을 없애소서."
하고 세 번 아뢰니, 묘당을 시켜 품처하게 하였다. 뒷날 상이 허적에게 이 일에 대해 묻자 허적이 아뢰기를,
"우리 나라의 군문(軍門)은 달리 재물을 만들 방도가 없으므로 대여하여 이식을 얻는 방도는 전부터 있었습니다. 대여할 때에는 반드시 능력이 있어 갚을 수 있는 사람을 가립니다마는, 인심이 간사하여 혹 거두어들이기 어려운 폐단이 있으니, 대신(臺臣)의 말이 옳다 하겠습니다. 그러나, 이른바 국가가 재물을 만드는 도리가 아니라고 한 말에 있어서는 신이 그 말이 옳은지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그뒤에 비국의 복계(覆啓)에 따라 모두 금지하게 하였으나, 군기시(軍器寺)에 대해서만은 본디 재물이 모자라고 이것에 의지하여 보태어 쓰는 것이 없지 않다 하여 그냥 두었다.
9월 28일 병자
해에 겹햇무리가 있었다.
9월 30일 무인
고상(故相) 이경석(李景奭)에게 3년 동안 녹봉을 내리라고 명하고 또 해조를 시켜 제수(祭需)를 넉넉히 주게 하였다.
도성 근처의 주인이 없는 고장(藁葬)된 주검을 교외의 10리 떨어진 곳에 묻게 하고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올해 죽은 무리를 외남산(外南山)과 모화관(慕華館) 뒤 여러 곳에 묻은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일가붙이가 있어서 다시 장사지낼 수 있는 것을 제외하고는 관가에서 거두어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유혁연(柳赫然)으로 하여금 그 일을 관장하게 하되, 삯을 받고 주검을 묻을 자 수십 인을 구하고 또 경기 고을의 승군(僧軍) 2백 명을 징발하여 힘을 합해 옮겨 묻게 하고, 또 호조에 있는 헌 무명을 가져다가 얼굴을 가리게 하소서. 그리하여 다 묻었으면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단(壇)을 설치하고 제사지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드디어 동서남 세 곳의 교외에다 거두어 묻었는데, 임자없는 주검이 모두 6천 9백 69구이었고, 이 밖에 구덩이에 굴러 죽어 거둘 수 없는 해골이 또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었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이훤(李藼)이 아뢰기를,
"중신(重臣)이 직접 성상의 은혜로운 뜻을 받들어 거두어 묻는 일을 맡아서 하였습니다. 그런데 임자가 있고 없는 것을 가리지 않고 한꺼번에 파내었기 때문에 아들이 아비의 주검을 잃어버리고 아내가 지아비의 주검을 잃어버린 것이 또한 많아서 원통함을 호소하는 소리가 비참하여 차마 들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파낼 즈음에 너무나 급하게 했기 때문에 시체의 친척이 갖가지로 애걸하였는데 역부(役夫)들이 뇌물을 받고서야 비로소 천천히 하였다 하니 매우 놀라운 일입니다. 그러므로 그 일을 맡아서 한 신하는 살피지 못한 죄를 면할 수 없으니 무겁게 추고하고 그 가운데에서 친척이 있는 주검은 기한을 늦추어주어 거두어 묻게 함으로써 뒤섞여져 원한을 품는 폐단이 없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 온성(穩城) 등 고을에 큰 바람이 불고 길주(吉州) 등 고을에 크게 우박이 내렸다.
이달에 서울에서 병을 앓아 죽은 자가 4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굶고 돌림병을 앓아 죽은 수를 보고한 것이 모두 1천 8백 40여 인이었으며 그 밖에 범에게 물리거나 물에 빠지거나 도둑에게 살해되어 죽은 자도 많았다. 삼남(三南)과 경기·원양·황해 등도에서 우역이 크게 치열하였는데 전염되어 죽은 소의 숫자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아서 백성이 경작할 기약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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