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19권, 현종 12년 1671년 10월

싸라리리 2025. 12. 17. 1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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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3일 신사

밤에 천둥과 번개가 쳤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차왜(差倭)가 함부로 나와 폐단을 저지르고 왜관(倭館)으로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으므로 도주(島主)에게 글을 보내어 책망해야 한다는 조정의 의논이 많았다.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전에 왜관의 왜인이 폐단을 저질렀을 때에 본도(本島)에 글을 보낸다고 말하였더라면 또한 자못 두려워서 움츠러들었을 것입니다. 이제 본도에 글을 보내야 하겠는데 미리 차왜에게 알리면 혹 두려운 마음이 없지도 않을 것입니다. 이어서 그 기색을 보고 처리하는 것이 마땅하겠습니다."
하였는데, 그 뒤에 논의가 한결같지 않아서 점점 미루다가 이듬해 여름에 문위 역관(問慰譯官)이 갈 때 아울러 부쳤다.

 

경상도의 올해 전세 중 반을 뒤로 물려서 받아들이라고 명하였다. 감사 이숙(李䎘)이 아뢰기를,
"왜료(倭料)·공작(公作) 등의 쌀을 왜인에게 준급(準給)하였기 때문에 지난해 전세 중 반을 뒤로 물려 받아들이라는 명이 있었습니다만 여러 고을이 혜택을 골고루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니 올해의 새 세금도 반을 내년 가을로 물려 받아들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0월 4일 임오

밤에 천둥과 번개가 크게 치면서 비가 내렸다.

 

약방(藥房)이 들어가 진찰할 때에 허적(許積)이 나아가 아뢰기를,
"문무 참하관(文武參下官)은 근래에 들어 더욱 사람이 모자라는데 가을 농사가 오히려 이렇게 될 줄은 모르고 경과(慶科)를 뒤로 물렸습니다. 게다가 전부터 해마다 봄·가을에 으레 정시(庭試)를 보였는데 이를 보이지 않은 지 오래되었습니다. 차례로 말하면 이번은 유생(儒生)의 차례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도 그 생각이 있었으나, 근래 농사가 이러하기 때문에 보일 겨를이 없었다."
하고, 이어서 특별히 정시를 보이라고 명하였다.

 

수령이 붙잡은 도둑이 5명에 차야만 비로소 논상(論賞)하라고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강도를 세 명만 붙잡아도 대뜸 가자(加資)를 받고 있으니 공은 작은데 상이 너무 과합니다. 그 수를 더 정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5명으로 한정하여 항식으로 삼았다.

 

정태화(鄭太和)를 영중추부사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이상진(李尙眞)을 경상 감사로, 조수익(趙壽益)을 예조 참판으로, 이훤(李藼)을 이조 좌랑으로 삼고,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로 삼았다.

 

성안의 종루(鍾樓)와 경복궁 앞과 동대문 안 세 곳의 큰 종에서 진액이 흘렀는데 빛은 옅은 황색이고 맛은 조금 짰다.

 

10월 5일 계미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배천 군수(白川郡守) 최상익(崔商翼)은 성미가 급하고 경박하여 본디 취할 만한 것이 없었는데, 논의에 맞장구를 치고 벗들에게 빌붙어 구차하고 요행히도 대간(臺諫)과 시종(侍從)의 반열에 외람되게 끼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명관(名官) 임을 믿고 교만한 짓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관서(關西)로 명을 받들고 나갔을 때와 호남의 부관으로 있었을 때에는 전도되고 경망하여 우스운 일이 많이 있었습니다. 사람됨이 이러하고 보면 청현(淸顯)의 직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보통의 직임일지라도 맡을 수 없습니다. 또 배천은 본디 이름난 고을이고, 더구나 이런 흉년 끝에는 수령의 직임을 더욱 잘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되겠으니,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부제학 이민적(李敏迪), 교리 윤경교(尹敬敎), 수찬 최후상(崔後尙), 부수찬 홍주국(洪柱國)이, 우레가 친 변고로 인하여 자신을 죄책하여 충직한 말을 구하고 요역을 감면하여 백성을 돌보아 하늘의 노여움에 보답하고 시국의 어려움을 구제하기를 청하는 차자를 올리니, 상이 글을 내려 도타이 답하였다.

 

차왜(差倭) 평성태(平成太) 등이 수행 왜인 50여 명을 거느리고 동래의 온천에 가서 목욕하였다. 신후재(申厚載)·정석(鄭晳)이 역관(譯官)을 시켜 타일러 말렸더니, 답하기를 ‘병을 빨리 치료해야겠다.’ 하고는 잇따라 닷새 동안 가서 목욕하였는데 신후재 등이 치계하여 아뢰었다. 이때 왜인이 날로 더욱 횡포를 부렸다. 평성태가 번번이 이곳에서 늙어 죽겠다고 말하면서 조금도 꺼리는 것이 없었고, 또 도중(島中)에서 말을 가져와 상경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평성태가 또 역관에게 말하기를,
"차왜가 장차 강호(江戶)에서 나올 것인데 그의 호칭은 손우위문(孫右衛門)이라고 한다. 이뿐만이 아니다. 녹이 40, 50만 석이고 관작(官爵)이 가장 높은 사람으로 비전(肥前)·살마(薩摩)·축전(筑前)의 태수(太守) 같은 이도 조만간에 나올 것인데, 귀국에서는 어떻게 할 것인지 모르겠다."
하였다.  【이른바 살마는 왜인 중에서 별다른 종족인데 그 성질이 가장 독하다고 한다.】  그들이 강호를 믿고서 협박하고 공갈하며 못하는 짓이 없었기 때문에 영남에 소요가 일어나 사람들이 다 짐을 꾸려놓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서울의 인심도 어수선하여 다들 변이 조석간에 일어날 것이라고 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차왜가 돌아가지 않았는데 또 나온다는 보고가 있으니, 그 사이의 정상이 참으로 매우 괴이합니다. 어찌 그 협박으로 인하여 허락할 수 없는 청을 허락할 수 있겠습니까. 다만 그들의 왕래가 잇따라서 제공할 것이 다하였으니, 이것이 근심스럽습니다. 더구나 인심이 어수선하여 심지어는 임진년에 이미 경험한 변과 같다고 증거대고 있으며, 또 서울에서 유자(柚子)가 열매를 맺었기 때문에 더욱 놀라고 있습니다."
하였다.

 

10월 6일 갑신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뵙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보고 이르기를,
"근래 잇따라 우레가 치는 변이 있어 실로 무슨 화의 기미가 있는지 모르겠으나, 내 놀랍고 두려운 마음을 이루 말할 수 없다."
하였다. 김수항이 아뢰기를,
"변고가 늘 일어나면 인정이 예사로 여기기 쉽습니다만 혹 성상의 마음에 간단이 있을까 염려됩니다. 성상의 옥후가 조금 편안해질 때에 신하들을 불러들여 재앙을 그치게 할 방책을 아뢰게 하면 또한 어찌 도움이 없겠습니까."
하니, 상이 받아들였다. 김수항이 또 아뢰기를,
"사람이 모자라는 한탄은 근래 더욱 심합니다. 주목(州牧)에 합당한 사람이 전혀 없는데 전일 뽑힌 자가 매우 적으니, 묘당으로 하여금 다시 뽑아 아뢰어 등용할 바탕으로 삼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0월 7일 을유

김환(金奐)을 정언으로 삼고, 홍처대(洪處大)를 발탁하여 평안 감사로 삼고, 김익훈(金益勳)을 수원 부사로 삼았다. 비국이 천거한 사람을 쓴 것이다.

 

10월 8일 병술

상이 우레의 변고 때문에 대신과 육경과 삼사의 신하들을 인견하여 각각 소견을 아뢰게 하였다. 신하들이 차례로 일을 아뢰니, 상이 이르기를,
"신하들이 아뢴 것은 다 나를 경계한 말인데 그 가운데에 또한 처분할 일이 없지 않다."
하였다. 정치화가 아뢰기를,
"이민적(李敏迪)·윤경교(尹敬敎)의 말은 여쭈어서 정해야 할 듯합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이제 모든 관원과 군사(軍士)를 죄다 파하여 나라에 경비를 쓸 일이 없다면 전세(田稅)·신역(身役)을 탕감하게 하더라도 괜찮겠으나, 그렇지도 않고 용도가 다 고갈되었으니 나라가 어찌 지탱할 수 있겠습니까. 또 바치지 않은 자가 대부분 완고하고 사나운 백성인데, 이제 감면해 준다면 먼저 바친 양민만이 혜택을 받지 못할 것이니, 너무나 고르지 못합니다. 더구나 신역은 비록 경술년025)  조도 3등급으로 나누어 면제하기도 하고 감면하기도 하고 받아들이기도 하였는데, 어찌 싸잡아 감면해 줄 수 있겠습니까. 지난해 이전의 것으로 받아들일 곳이 없는 유에 있어서는 조사해내 탕감해 주는 것이 과연 마땅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리하라고 하였다.

 

금부에 죄수가 많이 밀렸기 때문에 상이 친히 참석하여 소결(疏決)하였다. 이날 도배된 자는 2인이고 관직이 삭탈된 자는 8인이고 직위를 파면당한 자는 2인이고 완전히 방면된 자는 1인이었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수령이 도둑을 잡으면 자급(資級)을 마구 올려 주는 폐단에 대해 논하면서 낱낱이 개정(改正)하여 상전(賞典)을 소중히 하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이익상이 또 탑전에서 연이어 아뢰니, 상이 일렀다.
"수령 중에서 혹 붙잡을 때의 일이 허술하였던 자나 두세 명을 붙잡은 것으로 자급이 오른 자는 다시 살펴서 개정하도록 하라."

 

전 사간 박지(朴贄)를 서용하라고 명하였다. 영상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필(李泌)이 국상이 났을 때에 기생을 끼고 풍악을 벌인 죄는 분명하여 엄폐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정(原情) 중에 그럴싸하지도 않은 다른 말을 인용하여 논핵한 대관을 배척하였습니다. 헌부가 그 원정에 따라 지레 죄를 논한 것은 매우 부당한 일이고 또 뒤 폐단에 관계됩니다."
하였으므로, 이 명이 있었다.

 

10월 11일 기축

김덕원(金德遠)·박천영(朴千榮)·오시복(吳始復)·유하익(兪夏益) 등의 벼슬을 삭탈하라고 명하였다. 김덕원 등이 일찍이 헌부의 계사로 인하여 하옥되었을 때에 그들이 공초에서 서로 변명하였고 조정 신하들도 서로 변명해 주었는데, 금부가 아뢰어 위에서 재결하기를 청하였다. 상이 이에 대해 판부(判付)하였다.
"이 사람들이 제각기 공초한 것을 보면 김덕원은 옥사의 문안을 번복한 일이 없으니, 본디 물어 볼 만한 꼬투리가 없다. 그러므로 옥사(獄事)의 체례로 논한다면 분간하는 것이 옳을 듯하다. 그러나 그가 사대부의 신분으로서 일개 기생으로 인하여 거조가 전도되고 경망하였으니 이것만도 매우 놀라운 일인데, 더구나 촉탁한 말은 없었다 하더라도 어지러이 서간(書簡)을 보내어 미치지 못할까 염려하였으니, 더더욱 터무니없는 짓이라 장래의 일을 징계하지 않을 수 없다. 김덕원·오시복·유하익 등은 모두 관직을 삭탈하여 내보내라. 박천영은 아들을 위하여 원수를 갚으려는 지극한 정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방(科榜)에서 뺀다는 말을 보태어 넣었으므로 말뜻이 바르지 못하니, 이 때문에 그 정상을 용서하여 뒷날의 그지없는 폐단의 길을 크게 열어놓을 수 없다. 또한 관직을 삭탈하여 내보내라."

 

10월 14일 임진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이숙(李䎘)을 우승지로, 강시경(姜時儆)·조원기(趙遠期)를 지평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16일 갑오

인정전(仁政殿)에서 관학 유생(館學儒生)을 시강(試講)하였다.

 

대사헌 장선징(張善瀓), 장령 윤계(尹堦)가 김덕원·오시복·유하익 등이 서찰로 촉탁한 죄를 한결같이 인조(仁祖) 때의 법에 따라 처리하기를 청하였는데, 다섯 번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아뢰기를,
"평안 감사 홍처대(洪處大)는 본디 번잡하고 어려운 일을 처리할 만한 훌륭한 그릇이 아닌데 발탁하여 중대한 변방의 직책을 맡겼으니, 너무나 터무니없습니다. 개정하소서. 수원은 경기의 중요한 곳이어서 전부터 극진히 가려서 차출하였으니 우연한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부사 김익훈(金益勳)은 음관(蔭官)으로 발신하여 별로 특이한 성적이 없는데 갑자기 중임에 발탁되었으므로 여론이 쾌하게 여기지 않고 있으니 개정하소서."
하였다. 홍처대는 세 번 아뢰자 갈았고 김익훈은 네 번 아뢰어서야 개정하였다. 이조가 홍처대는 이미 그 벼슬에서 갈렸다 하여 가자(加資)를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특별히 명하여 그대로 주게 하였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 헌납 김환(金奐)이 이어서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홍처대에게 그대로 자급(資級)을 주라고 하신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는지 신은 알겠습니다마는, 대간(臺諫)이 반드시 도로 거두기를 청하는 것도 법을 지키고자 하는 말입니다. 그러니 지금 그들의 청을 따라 주고 뒷날에 발탁하는 것이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간원의 계청을 따랐다.

 

10월 17일 을미

남관 왕묘(南關王廟)의 소상(塑像)에 물기가 젖어 흘러내린 자국이 있었다. 서울 백성이, 피눈물이 흘러내렸다고 앞다투어 전하였다.

 

서울 백성이, 홍제동(弘濟洞)의 석미륵(石彌勒)이 저절로 움직였다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

 

성균관의 구일 제술(九日製述)에서 으뜸을 차지한 진사 이만봉(李萬封)에게 바로 전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특별히 내리고 그 나머지에게는 차등을 두어 점수를 주었다.

 

10월 18일 병신

개성 유수 박장원(朴長遠)이 죽었다. 박장원은 어미를 효성으로 섬겼다. 일찍이 월과(月課)로 인하여 까마귀가 어미에게 먹이를 물어다 먹이는 것 [反哺烏]에 대해 글을 지었는데, ‘선비에게 어버이가 살아 계시나, 가난하여 맛진 음식 해드리지 못하네. 하찮은 저 새도 사람을 감동시키니, 까마귀의 효도에 눈물을 흘렸네.[士有親在堂 貧無甘旨具 微禽亦動人 淚落林烏哺]’라는 대목이 있었는데, 인조대왕이 크게 감탄하고 칭찬하기를,
"이 절구(絶句)를 보건대 효성이 보통사람보다 뛰어나서 사람을 감동시킨다. 어버이가 돌아가시어 봉양하지 못하는 것을 옛사람이 상심하였다. 쌀과 베를 넉넉히 주게 하라."
하였으므로, 세상 사람들이 모두 영예롭게 여겼다. 전형(銓衡)을 두 번 맡았는데 정사에 혐의스럽거나 사사로운 것이 없었고, 지위가 판서에 이르렀으나 집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그러나 지나치게 근신하여 모난 데가 전혀 없었고 일을 할 만한 재능이 없었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

 

10월 19일 정유

천둥이 치면서 우박이 내렸는데 모양이 큰 콩만하였다.

 

이준구(李俊耉)를 개성 유수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삼았다.

 

종루(鍾樓)의 큰 종이 또 진액을 흘렸는데 전보다 많았다.

 

전라도 전주 등의 고을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쳤으며 충청·원양 등의 도에도 우레가 친 변이 있었는데, 세 도의 도신(道臣)이 잇따라 아뢰었다.

 

대마도(對馬島)에서 또 차왜(差倭) 평성지(平成之)를 보내어 예조에 글을 바쳐 왜관(倭館)을 옮기는 일에 대해 거듭 여쭈었는데, 조정에서 또 참판의 이름으로 된 글로 답하였다.
"서신이 잇따라 이르니 깊이 위안이 됩니다만 왜관을 옮기겠다는 청에 대해서는 저번에 답한 글에 매우 상세하게 하였는데 첫 사자가 돌아가기도 전에 또 이렇게 자주 서신을 보내시니 마치 강박하는 듯합니다. 생각건대, 귀주(貴州)에서 혹 깊이 생각하지 못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다소의 내용은 여기에 온 차사(差使)가 자세히 전할 것으로 사료되어 다시 낱낱이 말하지 않습니다."

 

10월 22일 경자

영의정 허적(許積)이 재이로 인하여 면직을 청하였다. 그 끝에 아뢰기를,
"신의 마음에 불안한 것이 또 있습니다. 헌부의 계사는 오로지 신이 사람을 잘못 등용한 과실을 배척한 것입니다. 홍처대(洪處大)를 논한 데에는 ‘일찍이 황해도 관찰사에 제수되었을 때에 대신이 아뢰어 갈았었는데 이제 와서 발탁하여 맡긴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다.’ 하였고, 김익훈(金益勳)을 논한 데에는 ‘체차하고 제수하기 전에 사람들의 말이 이미 퍼졌다.’ 하였습니다. 방악(方岳)026)  ·기진(畿鎭)은 얼마나 큰 직책입니까. 그런데 사사로운 뜻으로 체차하고 제수를 공평한 도리로 하지 않았다고 하였으니, 신하에게 이런 일이 있으면 중벌을 받아 마땅합니다. 바라건대 빨리 면직을 허락하여 사람들의 말에 사례하소서."
하였는데, 상이 답하기를,
"천재와 시변이 거듭 이르고 있으니, 생각이 여기에 미치면 저절로 마음이 싸늘하고 뼛속까지 놀란다. 아아, 이러한 재이를 불러온 것은 실로 내가 덕이 없기 때문인데, 경은 어찌 그리도 굳이 사양한단 말인가. 사람들이 한 말은 실없는 것인데 또한 깊이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개의하지 말고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라."
하였다.

 

좌의정 정치화(鄭致和)도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였는데, 상이 또 안심하고 사양하지 말라고 답하였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를 문안사(問安使)로 차출하여 심양(瀋陽)에 가서 표문(表文)을 올려 문안하게 하고 또 토산물을 바치게 하였다. 청나라 임금이 능(陵)을 참배하러 간다고 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의 경내에 이르렀을 때에 청나라 임금이 이미 돌아갔으므로 우가 연경(燕京)으로 들어갔다.

 

10월 23일 신축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에 합당한 사람을 얻기가 가장 어려우니, 염려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근래에 국가에서 도움받고 있는 데는 오로지 관서(關西)에 있으니, 마음을 다하여 직무에 봉사하는 자가 아니면 맡길 수 없다."
하였다. 허적이 육경 중에서 차출하여 보내고자 하니, 상이 이르기를,
"판서 중에서 차출하여 보내는 것보다 민유중(閔維重)을 유임시키는 것이 났겠다."
하고는 판서의 자급(資級)을 주었다. 진구하는 동안만 유임시킨 것은 마땅한 사람을 얻기가 어렵기 때문이었고 인하여 판서의 자급을 준 것은 장차 올려 쓰려는 것이었다.

 

강백년(姜栢年)을 대사헌으로, 박지(朴贄)를 정언으로, 성후설(成後卨)을 수원 부사로 삼고, 남용익(南龍翼)을 발탁하여 형조 판서에 제수하였는데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충청 감사 이홍연(李弘淵)의 벼슬을 파면하라고 명하였다. 당초 조정에서 간원의 계사에 따라 각도의 감사로 하여금 그 도내 수령이 진휼의 정사를 부지런히 하였는지 게을리 하였는지에 대해 살펴서 아뢰게 하였는데, 이홍연이 끝내 살펴서 아뢰려고 하지 않았다. 허적이 아뢰기를,
"이홍연을 이미 추고하고 다시 살펴서 아뢰게 하였는데도 끝내 거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조정의 사체에 있어서 또한 번번이 추고할 수 없겠습니다."
하니, 상이 매우 놀라운 일이라 하여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10월 24일 임인

함경 감사 남구만(南九萬)이 임지로 떠나면서 조정에 하직 인사를 드리니, 상이 불러 보았다. 남구만이 아뢰기를,
"본도가 올해에 입은 재해는 남도·북도가 다 같아서 도리어 지난 해보다 못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육진(六鎭)으로 말하면 본디 중요한 지역이니, 더욱 진구에 유념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폐단이 없게 해야 한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원양도의 곡물 8천 석을 영남에다 갚지 말라고 한 것은 바로 북방의 백성을 먼저 구하려고 한 것입니다마는 이것도 적습니다. 그러니 관서의 산간 고을로서 북로(北路)와 접한 곳에 혹 관에서 대여했던 곡물을 원수(元數)대로 받아들인 고을이 있을 것이니, 이 곡물을 옮겨서 진구하면 매우 편리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남구만이 이어서 북로의 변방 방비가 허술한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북로는 서관(西關)처럼 소문이 나는 곳이 아닌데 성지(城池)·군기(軍器)를 전연 보수하지 않았으니, 신이 형세를 보아 점차로 보수하려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무역 시장을 여는 근처는 필시 소문이 날 것이다만 그 나머지 각처는 수리하지 않아서는 안 된다."
하였다. 허적이 각 군문(軍門)에서 만든 조총(鳥銃)과 활을 본도에 내려보내어 변진(邊鎭)의 병기를 보충하기를 청하니, 상이 따랐다.

 

대사간 이익상(李翊相)이, 어제 탑전에서 민유중(閔維重)의 가자(加資)를 그대로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청하지 않아 물의에 비난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였는데, 처치하여 체차하기를 청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출사시켰으나, 이익상이 다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정언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명철한 임금이 삼가고 아끼는 것으로는 벼슬보다 더 큰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평안 감사 민유중(閔維重)을 자헌(資憲)의 품계로 높여 주라고 명하신 것은 형조의 장관을 삼기 위한 것입니다만 이미 전직에 유임시켜 놓고 새 자급을 지니게 하는 것은 실로 명분이 없습니다. 도로 거두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민유중의 일은 다른 일과 같지 않으니, 모두 도로 거두는 것은 타당하지 못한 일이다."
하였다.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0월 25일 계묘

이여발(李汝發)을 어영 대장(御營大將)으로 삼았다.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대장은 다른 벼슬과 다르니, 성상께서 가리지 않아서는 안 되겠습니다."
하니, 상이 옳게 여기어 특별히 제수한 것이다.

 

10월 26일 갑진

장선징(張善瀓)을 대사간으로, 정유악(鄭維岳)을 정언으로 삼았다.

 

10월 29일 정미

밤에 유성이 천원성(天苑星)으로 들어갔는데 모양은 바릿대와 같았고 긴 꼬리에다 붉은색이었다.

 

상이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다 하여 상번군(上番軍)에게 동옷을 주라고 명하였다. 이어서 승지를 보내어 전옥서(典獄署)에 가서 죄수를 살펴 죄가 가벼운 자는 석방하게 하였다.

 

이 달에 서울에서 여역이 조금 가라앉았다. 서울에서 죽은 자가 10여 인이었고 각도에서 보고한 사망자도 5백 40여 인이었다. 그러나 각도의 우역(牛疫)은 점점 치성해지고 있는데, 양남(兩南)과 원양도(原襄道)가 더욱 심하였다.
○是月京中癘疫稍息。 京中死者十餘人, 各道死亡之報, 亦五百四十餘人。 但諸路牛疫轉熾, 兩南及原襄道尤甚。
顯宗純文肅武敬仁彰孝大王實錄卷之十九終

【태백산사고본】 19책 19권 49장 B면【국편영인본】 36책 709면
【분류】호구-호구(戶口) / 의약-수의학(獸醫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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