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1일 무신
충청도 어사 조위봉(趙威鳳)이 서계(書啓)하기를,
"목천 현감(木川縣監) 황휘(黃暉)는 유임한 뒤로 점점 처음과 같지 않았고, 평택 현감(平澤縣監) 이행하(李行夏)는 진휼의 정사에 마음을 다하고 자봉(自奉)은 간소하게 하였으며, 전 감사 이홍연(李弘淵)은 집이 청주(淸州)에 있는데 왕래하면서 폐단을 끼쳤습니다."
하니, 상이, 황휘는 국가에서 유임시킨 뜻이 자못 없다 하여 특별히 나문하게 하고 이홍연은 추고하게 하고 이행하에게는 표리(表裏) 한 벌을 내리도록 명하였다.
○戊申朔/忠淸道御史趙威鳳書啓:
木川縣監黃暉仍任之後, 漸不如初, 平澤縣監李行夏, 盡心賑政, 自奉簡約, 前監司李弘淵, 家在淸州, 往來貽弊。 上以黃暉殊無朝家仍任之意, 特命拿問, 李弘淵推考, 李行夏賜表裏一襲。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왕실-사급(賜給)
경기 어사 김만중(金萬重)이 서계하기를,
"전 용인 현령(龍仁縣令) 이건(李騫), 전 파주 목사(坡州牧使) 홍무(洪茂) 등은 진휼의 정사를 신중히 보지 않았고, 경기 수사(京畿水使) 이원로(李元老)는 청렴하지 않다는 비방이 많이 있었습니다. 파주 목사 이보(李葆)는 직무를 신중히 보아서 칭찬이 높았고, 삭녕 군수(朔寧郡守) 윤홍거(尹鴻擧)는 진휼의 정사와 치적이 모두 뚜렷이 나타났습니다."
하니, 상이 이보는 진휼의 정사를 잘하여 막 자급(資級)을 높여 주었다 하여 윤홍거에게만 표리 1습을 내렸다. 이건·홍무는 모두 먼저 파직한 뒤에 추고하고 이원로도 파직시키라고 하였다. 김만중이 또 양천 현감(陽川縣監) 여안제(呂顔齊), 장단 부사(長湍府使) 정한기(鄭漢驥), 연서 찰방(延曙察訪) 안명로(安命老)가 원망을 사고 법을 어긴 정상에 대해 아뢰니, 상이 여안제 등은 추생(抽栍)된 바가 아니므로 똑같이 죄를 논할 수 없다 하여 본도로 하여금 살펴서 아뢰게 하였다.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어 여안제 등 세 사람도 모두 나문하기를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자 모두 파직하라고 명하였다.
○京畿御史金萬重書啓:
龍仁前縣令李騫、坡州前牧使洪茂等, 不謹賑政, 京畿水使李元老, 多有不廉之誚。 坡州牧使李葆, 恪謹職事, 聲譽隆洽, 朔寧郡守尹鴻擧, 賑政治績, 俱爲表著。 上以李葆纔以善賑陞資, 只賜尹鴻擧表裏一襲。 李騫、洪茂竝先罷後推, 李元老亦坐罷。 萬重又以陽川縣監呂〈顔〉齊、長湍府使鄭漢驥、延曙察訪安命老斂怨不法之狀, 聞之, 上以顔齊等, 旣是抽栍之外, 不可一體論罪, 令本道査啓。 司諫李柙啓請顔齊等三人, 一倂拿問, 累啓, 竝命罷職。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면
【분류】인사-관리(管理) / 사법-탄핵(彈劾) / 인사-임면(任免)
11월 2일 기유
좌의정 정치화(鄭致和), 예조 참판 이만영(李晩榮), 사예 정적(鄭樍)을 청나라에 보내어 동지(冬至)·정조(正朝)를 축하하고 아울러 사은(謝恩)하게 하였다. 청나라 임금이 복선군(福善君)에게 사사로이 말한 일 때문이다.
11월 4일 신해
이섬(李暹)을 헌납으로, 민시중(閔蓍重)을 대사간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총융사로 삼았다.
11월 6일 계축
전라도 옥구현(沃溝縣)에서 살구 나무가 겨울에 꽃이 피었는데 봄처럼 찬란하였다.
11월 7일 갑인
날씨가 음침하여 대낮이 마치 초저녁처럼 어두웠다.
정언 김환(金奐)이 아뢰기를,
"괴산 군수(槐山郡守) 김해(金垓)는 나이가 이미 늙었고 성질도 어리석어서 부임 이래로 정사를 하급 관리에게 맡기어 날마다 쓰는 관청의 필수품을 받아들이는 대로 잃어버리는가 하면 또 진휼할 재물을 갈라다가 본군에서 토지를 널리 샀습니다. 나문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1월 9일 병진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윤계(尹堦)를 장령으로 삼았다. 홍처대(洪處大)를 발탁하여 호조 참판으로 삼았는데, 특명으로 제수한 것이다.
충청도 대흥(大興) 땅에서 개가 새끼를 낳았는데 머리 하나에다 다리는 여덟이었으며 허리 아래부터는 몸이 둘이고 꼬리가 둘이었다.
11월 10일 정사
경상 감사 민시중(閔蓍重)이 도내 수령 중에서 진휼을 잘한 자와 별도로 장만한 것이 많고 적은 것 등을 급을 나누어 아뢰었다. 성주 목사(星州牧師) 조성(趙䃏)은 진휼을 잘한 가운데서도 으뜸이었고 또 특별히 장만한 곡물이 무려 3천 40여 석이나 되었는데 가자(加資)하라 명하고 또 숙마(熟馬) 한 필을 하사하였다. 그 다음은 진보 현감(眞寶縣監) 윤명우(尹明遇), 청도 군수(淸道郡守) 유비(兪柲), 영천 군수(永川郡守) 이휘조(李徽祚), 비안 현감(比安縣監) 이민도(李敏道)였는데 모두 가자하였고, 그 다음은 영덕 현령(盈德縣令) 이상정(李象鼎), 함양 군수(咸陽郡守) 남몽뢰(南夢賚)였는데 준직(準職)을 제수하였고, 그 다음은 상주 목사(尙州牧師) 이관(李慣) 등 30명이었는데 승서(陞叙)하고, 각각 차등을 두어 말과 표리(表裏)를 내렸다. 정언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경상도 예순아홉 고을을 반이 넘게 죽 적어서 상을 주기를 바랬으니 자못 상세히 살펴서 분별하는 뜻이 없습니다. 감사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곡물을 장만하고 진휼을 잘한 수령에게 넉넉히 포상하는 것은 본디 격려하는 지극한 뜻입니다마는, 경상도 한 도내에서 상받은 수가 37명이나 되니, 너무나 지나칩니다. 일컬을 만하게 뚜렷이 나타난 자 이외는 상을 주라는 명을 모두 도로 거두소서."
하니, 답하기를,
"별도로 장만한 것의 수량이 적은 경우만을 해조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라."
하였다. 청송 부사(靑松府使) 김정하(金鼎夏) 등 8인은 별도로 장만한 것이 5백 석이 못 되었으므로 상을 주라는 명을 도로 거두었다. 그 뒤에 장령 윤계(尹堦)와 지평 김환(金奐)·권기(權夔) 등이 ‘굶주려 죽은 참상은 영남이 더욱 심하였는데 옥관자(玉貫子)의 상을 받은 자가 가장 많으므로 남녘의 백성들이 모두 분노하고 있다.’ 하여 본도로 하여금 명백하게 다시 살피게 하기를 청하였다. 이휘조·이민도는 이 때문에 가자를 도로 거두었다.
11월 11일 무오
서흥(瑞興) 사람 조대립(趙大立)이 그의 고을 부사 이우주(李宇柱)를 죽였다. 조대립은 면서원(面書員)이었는데 전결(田結)을 속여 숨겼다가 일이 발각되었다. 이우주가 죽이려 하니 조대립이 달아났다. 이달 7일에 이우주가 동지사(冬至使)를 따라 봉산(鳳山)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차유령(車踰嶺)에 이르렀을 때에 조대립이 총을 쏘아 급소를 맞히고 달아났고 이우주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이 일이 알려지자 조정과 재야가 놀랐다. 상이 하교하기를,
"서흥부에서 관장을 죽인 변은 매우 놀랍고 참혹하다. 본부를 강등하여 현(縣)으로 만들고 또 온 고을 사람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게 하라. 그리고 그를 붙잡는 자에게는 후하게 상을 준다는 뜻을 각도에 분부하여 잘 찾아서 기어코 잡게 하고, 부사가 변을 당할 때에 거느렸던 하인은 병영(兵營)에 옮겨 가두어 엄히 다스리게 하라."
하였다. 당초 이우주의 하인들은 다 조대립인 줄을 알면서도 그 즉시 쫓아가 잡지 않았고 관노(官奴) 태일(太一) 등은 그 곳에서 달아나 버렸다. 태일의 일가붙이 김호선(金好善) 등 다섯 사람은 본관이 심하게 닥달하자 조대립이 달아나 숨은 곳을 은밀히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함께 덮쳐 붙잡아 압송하다가 관문(官門)에서 5리가 좀 못 된 곳에서 김호선이 패도(佩刀)를 뽑아 그의 포박한 줄을 끊고는 큰소리로 죄인이 달아난다고 외쳤는데 그 통에 조대립이 달아나고 말았다. 대개 김호선이 조대립의 모의에 참여하였기 때문에 조대립이 공갈하는 말을 듣고 그의 자취가 드러날까 염려하여 일부러 풀어준 것이다. 드디어 다 엄히 형신하여 끝까지 추궁해 보았으나 끝내 승복하지 않았고 혹 지레 죽은 자도 있었다.
비국이 김호선의 자취는 조대립과 다를 것이 없다 하여 곧바로 처참하기를 청하자, 경상(境上)에서 처참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였다. 이우주가 거느렸던 하인 10여 인도 모두 엄히 형신하라고 명하고, 또 본부의 향소(鄕所) 등이 그 즉시 감영(監營)에 알리지 않았고 또 부사의 상(喪)을 치를 때에 와보지 않았으므로 또한 엄히 형신하게 하였다. 병사 구일(具鎰)은 이런 큰 변을 당하였는데도 붙잡지 못하였다 하여 여러 번 추고하고 겸관(兼官)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홍진(金弘振)은 오로지 향소에다 맡기고 지레 본현으로 돌아갔다 하여 금부에 내리고 그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다. 조대립은 끝끝내 붙잡히지 않았다.
11월 12일 기미
윤경교(尹敬敎)를 헌납으로, 이수만(李壽曼)·조원기(趙遠期)를 정언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두 자전께서 이런 때에 방물(方物)·물선(物膳)을 줄이지 않는 것을 미안하게 여기고 계시니, 내년 정조(正朝)부터 계축년027) 정조까지 각도의 방물을 임시 중지하도록 하라. 그리고 경상·함경 두 도는 흉년이 특히 심하게 들었으니, 물선도 적당히 줄여야 할 것이다."
각사(各司)의 노비가 내야 할 기유년028) 조의 신공(身貢) 중에서 아직 거두어들이지 못한 것은 전부 감해 주라고 명하였다.
금산(錦山)의 도둑 이광성(李光星)을 경상(境上)에서 처형하여 뭇사람을 경계하였다. 이광성은 금산의 좌수(座首)였는데 그의 아우 문성(文星)·두성(斗星) 및 교생(校生) 우명침(禹明侵), 장관(將官) 김영일(金英逸) 등과 함께 도둑질하기로 모의하고 50여 인의 무리를 모아 여러 곳에서 겁탈하였다. 이광성이 ‘인명을 살상하는 것은 무리를 모으는 도리가 아니다.’고 하여 그의 무리들에게 일체 사람을 해치지 말라고 경계하고, 드디어 용담현(龍潭縣)의 군기(軍器)와 무주(茂朱) 적상 산성(赤裳山城) 서창(西倉)의 향곡(餉穀)을 겁탈하고자 덕유산(德裕山)의 깊은 골짜기 속에다 진을 치고 웅거하면서 근처의 사냥하는 포수 및 중들과 결탁하여 그 세력을 폈다. 금산 고을의 아전인 황우룡(黃雨龍)이 그의 사위 권립(權立)을 통하여 적의 동태를 알아내 관가에 고하였는데, 대개 권립이 도둑에게 협박을 당하여 그들에게 들어가기로 약속하고 그 모의를 은밀히 탐지하여 황우룡에게 말한 것이다. 군수 이정(李晸)이 여러모로 책략을 써서 50여 인을 붙잡았는데, 자복한 자가 42인이나 되었다. 이정이 또 권립을 시켜 달아난 도둑을 정탐하게 하였으나, 권립이 곧 도둑의 무리에게 살해되었다.
또 명화적(明火賊) 1백여 인이 징을 두드리고 뿔피리를 불면서 관문(官門)과 매우 가까운 곳에서 겁탈하였다. 이때부터 밤 사이에 읍리(邑里)가 자주 놀랐고 본군의 계엄이 거의 대여섯 달에 이르렀다. 조정의 의논은 다들 ‘이 도둑은 보통 강도가 아니므로 우두머리와 부하를 구별하지 않아야 한다.’고 하였는데, 허적(許積)·김만기(金萬基)·유혁연(柳赫然) 등이 그 의논을 극력 주장하였다. 정치화(鄭致和)가 아뢰기를,
"이 도둑은 실로 보통 강도가 아니므로 그 계책이 흉악하다 하겠습니다마는, 사형되어야 할 자가 무려 40여 인이나 됩니다. 이들은 당초에 기근을 구제하려는 생각에서 한 것인데, 이제 즐비하게 처형된다면 이것이 어찌 살리기를 좋아하는 성스러운 조정의 덕이겠습니까. 우리 나라의 흉악한 역적으로는 이괄(李适) 만한 자가 없었으나, 고상(故相) 윤방(尹昉)이 도둑과 서로 주고받은 이서(吏胥)들의 글을 가져다가 죄다 불살랐는데, 인심이 저절로 안정되었을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도 잘 처리하였다고 말들을 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우리 성상께서는 계복(啓覆)할 적에도 한 죄수라도 혹 무고한 자가 있을까봐서 번번이 염려하시었고, 《서경(書經)》에 ‘협박받아 따른 자는 다스리지 않는다.’ 하였으니, 어찌 오늘날 본받아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였고, 형조는 이미 자복한 도둑은 효시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판부(判付)하기를,
"한가지 죄에 대하여 반드시 같이 추고하고 고복(考覆)하고 친히 심문하는 등의 절차가 있는 것은 대개 사형을 신중히 하기 위한 것이다. 큰 도둑에게만 이 법을 쓰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제 40여 인을 한꺼번에 효시한다면 이것이 어찌 형벌을 삼가는 도리이겠는가. 그중에도 혹 미처 정상을 모르고 협박당하여 따른 자가 있을 것이고, 또 권립이 살해된 것을 보면 흉악한 무리들이 필시 많이 누락된 것이다. 도둑의 괴수 이광성·이문성·이두성·우명침·김영일 등은 처형하되, 도둑질을 같이하고 누락된 자와 협박당하여 따른 무리는 다시 더 형신한 뒤에 경상에서 효시하라. 그 나머지는 본도의 감사와 병사로 하여금 충분히 잘 살펴서 그 정상이 용서해줄 만한 자가 있으면 구별하여 아뢰고 달아난 자와 누락된 자를 또한 모두 붙잡게 하라. 권두견(權斗堅)은 당초에 협박당하여 따른 일이 있더라도, 정상을 알고 관가에 고하였고 보면 협박받아 따른 것이라고 하여 사형만 감면해 주고 말면 자못 권장하는 도리가 없으니 분간하여 죄를 묻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권두견은 권립의 종제(從弟)인데 권립과 함께 적의 내막을 탐지한 자이다.】 감사 오시수(吳始壽)와 병사 이집(李鏶)이 먼저 본군으로 가 모여서 함께 다스렸는데, 이때에 이르러 이광성 등 5인을 처참하고 다시 그 무리를 다스려 구별해 아뢰었다. 형조가 묘당을 시켜 품처하기를 청하였는데, 상이 허적 등의 의논을 써서 또 34인을 처참하니 이광성 등까지 합하면 39인이었다.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한 자는 11인이고 완전히 방면한 자는 2인이었다. 이정·황우룡은 공으로 모두 가자(加資)하였다. 그 뒤에 오시수가 제원(濟原)의 역졸 3백 여 인이 다 도둑의 무리로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은밀히 심복으로 하여금 그 무리 속에 들어가 적의 동태를 염탐하게 하고 이어서 그의 부모와 처자를 가두어 도둑들이 의심하지 않게 하였으나, 마침내 그 실상을 알아내지 못하였다.
유혁연(柳赫然)이 아뢰기를,
"염초 감관(鹽硝監官) 김만유(金萬裕)는 지난해 재목을 실어 나르기 위하여 울도(鬱島)에 내려가다가 3백여 명이 물에 빠져 죽어 가는 것을 보고 기계를 죄다 버리고 구제하여 살렸습니다. 군령을 어기기는 하였으나 수백 명을 살렸으니,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하니, 상이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게 하였다.
11월 13일 경신
경상도에서 올해에 바칠 풀솜[雪綿子]를 감면해 주고 본도를 시켜 값을 받아 진휼의 자금에 보태어 쓰게 하라고 명하였다.
11월 14일 신유
전라도 만경(萬頃) 등 아홉 고을에서 크게 천둥과 번개가 쳤다.
11월 15일 임술
진휼을 잘한 황해도의 수령을 논상하였다. 서흥 부사(瑞興府使) 이우주(李宇柱)가 으뜸이었는데 특별히 명하여 가자하게 하고 연안 현감(延安縣監) 이민장(李敏章), 신계 현령(新溪縣令) 김홍진(金弘振) 등은 모두 승서(陞敍)하고 평산 부사(平山府使) 조성보(趙聖輔)에게는 숙마(熟馬)를 내렸다. 이때 이우주는 이미 죽었으므로 벼슬을 추증하였다.
11월 17일 갑자
전라도 부안(扶安) 등 고을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짙게 끼어서 지척을 가릴 수 없었다.
평안도 강계(江界) 등 여섯 고을에서 올해 거두어들일 쌀에 대해 1결(結)마다 각각 4두(斗)를, 상원(祥原) 등 열여덟 고을은 각각 1두를 줄이라고 명하였다. 감사 민유중(閔維重)의 청을 따른 것이다.
11월 18일 을축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암행 어사의 사찰은 사체가 막대하므로, 수령의 범죄가 뚜렷하여 이미 장계에 실렸으면 추생(抽栍)된 곳이든 아니든 막론하고 일체로 엄히 살펴서 징계할 바탕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어사의 장계를 보면 장단(長湍)·양천(陽川)·연서(延曙) 등의 관원이 혹 불법을 자행하거나 진휼을 게을리하였는데도 추생된 곳이 아니라고 하여 유사(有司)의 품처(稟處)를 윤허하지 않고 먼저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셨습니다. 공초를 받지 않고 지레 조사한 것은 이미 법례를 어긴 것이고 관차(官次)에 그대로 있으면서 한편으로 조사하는 것도 반드시 방해되는 것이 있을 것이니, 모두 나문하소서."
하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11월 19일 병인
밤에 화성이 저성(氐星)으로 들어갔다.
11월 20일 정묘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11월 21일 무진
상이 뜸을 떴다. 교리 이혜(李嵆)를 불러 암행할 때에 연도에서 보고 들은 것을 묻자 이혜가 아뢰기를,
"나주(羅州)·무안(務安)·해남(海南)·진도(珍島) 등의 지역이 재해를 더욱 혹독하게 입었습니다. 굶주린 백성이 야생한 기장을 훑어다가 껍질을 벗기지 않은 채 죽을 쑤어 끊어져가는 목숨을 구완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목화가 아주 귀하여 사람들이 몸을 가리지 못하므로 보기에 참혹하고 가여웠습니다. 경유한 촌락마다 태반이 비어 있었으니, 죽은 참상을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알 수 있습니다. 남원(南原)으로 말하면 속오(束伍) 12초(哨) 중에서 6초가 죽었습니다. 또, 바닷가 고기잡는 백성은 거의 남은 자가 없는데, 대개 이들은 고기를 잡아 살아가고 있는데 흉년에는 팔리지 않기 때문에 죽은 자가 더욱 많은 것입니다."
하고,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이들은 다 능로군(能櫓軍)의 무리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는 해상의 전쟁을 자주 치르고 있는데 노군(櫓軍)의 죽음이 이 지경에 이르렀다니, 작은 근심이 아니다."
하였다.
11월 22일 기사
무지개가 간방(艮方)에 나타났다. 날씨가 음침하여 대낮인데도 어두웠다.
경상도 대구(大邱) 등 고을에서 짙은 안개가 사방에 크게 끼었다.
11월 23일 경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황해 도사(黃海都事) 조창기(趙昌期)가 나라의 형세가 위급하다고 상소하여 뵙기를 청하니 상이 불러보았다. 조창기의 말은 대개 규모를 정하는 것으로 정치의 체제를 세우는 근본으로 삼고 실정을 궁구하는 것으로 규모를 정하는 요체로 삼았다. 흉년을 구제하는 정사에 대해 논하기를,
"곡물을 모집하는 길을 더욱 넓히여 곡물을 많이 바친 자에게는 실직(實職)으로 상을 주고 큰 장사꾼이나 역관 가운데에 혹 많은 재물을 쌓아 둔 자가 있으면 서반(西班) 당상(堂上) 이상의 실직으로 은화(銀貨)를 모집하여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고 경비를 충족시켰으면 합니다. 지난해 이전의 것으로 아직 받아들이지 못한 대동(大同)·관적(官糴)과 노비 신공(奴婢身貢)·군병 수포(軍兵收布)를 탕감해야 하겠습니다. 또 각 고을의 크고 작은 폐단을 수령이 상소하여 죄다 아뢰게 하고 감사가 편리 여부를 헤아려 조정에 올리게 한 다음 묘당에서 강구하여 시행해야 합니다."
하였고, 또 사전(祀典)이 폐지되고 해이된 폐단에 대해 아뢰기를,
"의문(儀文)의 도수(度數)에 관한 절차로 말하면 오로지 수복(守僕)의 말에 의지하고 있고 더구나 제공한 제물이 대부분 정결하지 않으니, 신은 신명이 흠향하지 않을까 염려되고 재앙이 일어나는 것도 반드시 여기에서 말미암지 않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하였는데, 상이 이르기를,
"네가 아뢴 것은 다 나라를 근심하고 임금을 사랑하는 정성에서 나온 것이니, 매우 아름답다."
하였다. 조창기는 언변에는 여유가 있었으나 시국의 병폐에 대해서는 절실하게 지적하지 못하였다. 그가 소를 올려 뵙기를 청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이 다 반드시 곧고 예리한 말을 할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상의 앞에 이르러서는 말한 것이 이러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더구나 실직은 공명첩과 비할 바가 아니고 당상 이상은 또한 덕이 있는 자에게 주는 벼슬인데, 이것으로 은을 모집한다면 후한(後漢) 때에 벼슬을 판 일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 때문에 사람들이 많이 비웃어서 시행할 만한 일까지도 전혀 시행되지 않았으니 아깝다.
지평 윤가적(尹嘉績)이 아뢰기를,
"암행 어사의 사찰은 임무가 막중하므로, 이미 암행이라 하였으면 참으로 누설하지 않아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교리 조위봉(趙威鳳)은 접때 탐문할 때에 친구의 집마다 죽 들러 심지어 누구는 포상할 만하고 누구는 파직할 만하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이 퍼지자 혹 수령이 지레 동요할까 염려하여 다시 친척으로 하여금 말을 전하여 안심하도록 권하였습니다. 그의 처사가 이미 매우 무리하였는데 더구나 추생(抽栍)에 든 고을도 죄다 살피지 못한 곳이 있었으니, 허술히 하여 직분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면할 수 없습니다.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또 아뢰기를,
"기근과 여역이 마음을 놀라게 하고 눈을 슬프게 하며 천재와 괴물이 거듭 나타나는 것이 오늘날보다 더 심한 때가 없었습니다. 위태로움과 멸망이 박두하였으므로 상하가 근심하고 황급하여 경비를 줄이는 방도라면 여러모로 힘을 다 기울였으며 심지어는 상방(尙方)에서 베를 짜는 것이나 장인들이 물건을 만드는 일까지도 특별히 명하여 멈추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차비(差備)에 대령하는 각종 장인이 거의 없는 날이 없다 하니 이는 필시 내관(內官)들이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일을 한 소치일 것입니다. 엄히 살펴서 무겁게 다스리소서."
하니, 상이 정원으로 하여금 상방을 조사하여 아뢰게 하였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아뢰기를,
"장인을 곧바로 차비에서 불러들이고 다시금 확인해 보는 일이 없으면 반드시 빙자하는 폐단이 많을 것이니, 상방으로 하여금 정간(井間)에 써 넣어서 아뢰게 하여 그 폐단을 막으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의 일이 매우 잗닫기는 하나, 장인을 월말에 써서 아뢰게 하는 것은 너무 번거롭지 않은가?"
하자, 이은상이 아뢰기를,
"정원의 계청에 대하여 엄히 금지하라는 뜻으로 답하신다면, 이것도 대계(臺啓)를 윤허하시는 셈입니다."
하였는데, 이날 저녁에 상이 정원에 답하기를,
"이미 공적인 일을 빙자하여 사적인 일을 한 적이 없는데 정간에 써서 아뢰게 하자고 청하기까지 하였으니 매우 터무니없는 짓이다."
하였다.
11월 24일 신미
상이 하교하였다.
"옛날에도 없던 이러한 기근을 당하여 두 자전의 삭선(朔膳)만을 제외하고는 이미 다 줄였으나, 명일(名日)의 물선(物膳)은 미처 줄이지 못했다. 대전(大殿)·중전(中殿)에게 삼명일(三名日)에 육조(六曹)에서 바치는 물선과 표리(表裏)는 모두 임자년029) 동지(冬至)까지 임시로 줄여야 할 것이다."
경기 풍덕(豊德) 등 고을에 짙은 안개가 사방에 크게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삼성의 죄인인 사노(私奴) 송남(松男)이 처형되었다. 종이 주인을 죽여 강상의 죄를 범하였기 때문이다.
11월 25일 임신
정유악(鄭維岳)을 지평으로, 이선(李選)을 이조 좌랑으로 삼았다.
원양도(原襄道) 원주(原州) 등 고을에 검은 안개가 닷새 동안 짙게 끼었다.
왜관(倭館)에 불이 났다. 이달 16일 밤에 왜관에 불이 나서 부산 첨사(釜山僉使) 이연정(李延禎)이 토병(土兵)을 거느리고 가 구제하였으나, 바람이 거세고 왜관의 지붕도 다 볏집으로 덮었기 때문에 연향 대청(宴享大廳)을 제외하고는 모두 번져 타버리고 왜선(倭船) 7척과 의복·기구도 남김없이 죄다 없어졌고, 왜인들은 알몸으로 벗어났다. 상이 본도에 명하여 쌀 2백 석과 무명 10동을 주게 하였다. 왜관의 왜인이 하사한 물품을 받고 바라던 것보다 많아서인지 매우 기뻐하면서 곧 도주(島主)에게 알려 조정에 거듭 사례하게 하겠다고 하였다.
11월 26일 계유
태백성(太白星)이 낮에 보였다.
문과 정시(文科庭試)를 시행하여 박태상(朴泰尙) 등 8인을 뽑았다.
충청도 아산현(牙山縣)에 해일이 일어 민가 1백여 호가 가라앉았다.
11월 27일 갑술
영중추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상차하여 직임을 사양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원로 대신으로는 경과 이 영부사 【이경석(李景奭)이다.】 뿐이었는데, 영부사가 불행히 죽었으므로 내 매우 슬퍼하고 있다. 이제 내가 믿는 바는 오직 경뿐인데, 경이 어찌하여 이해하지 않고 내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가. 지극한 뜻을 몸받아 안심하고 사직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고, 이어서 사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상이 또 이르기를,
"정 영부사가 다리의 병 때문에 사은 숙배하지 못하므로 오랫동안 만나 보지 못했으니, 마음에 섭섭하다. 오늘 만나 보려 하니, 사은 숙배의 예는 생략하고 들어오게 하라."
하자, 정태화가 대궐 아래로 나왔다. 상이 하교하기를,
"영부사 는 다리에 병이 있으니, 견여(肩輿)를 타고 들어오게 하라."
하였다. 정태화가 대궐의 뜰 안에 이르자, 내시를 명하여 부축하여 나오게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 영부사가 갑자기 죽어서 고사를 들을 수 없으므로, 탄식하고 있다. 경의 기력이 직무를 보기 어렵더라도 혹 때때로 빈청(賓廳)에 나아가 참여하고 이어서 부축을 받고 들어와 나라의 일을 의논하면 어찌 다행한 일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이 뒤로 정태화가 병으로 나오지 못하자, 상도 다시 부르지 않았다.
11월 29일 병자
해에 겹 햇무리가 졌고 안쪽 햇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밤에 목성이 태미원(太微垣)으로 들어갔다.
11월 30일 정축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이 우레의 변고로 인하여 수천여 마디나 되는 소를 올렸고 또 주자(朱子)가 정승에 대해 논한 말을 인용하여 일을 맡고 있는 대신을 비평하였다. 또 한 책자를 바쳤는데, 그 가운데에 있는 10여 조는 다 스스로의 잘못을 말한 것이었다. 거기에,
"원로 대신을 함부로 저촉하였으며, 부마(駙馬)의 저택을 옮기고 정초(精抄)를 설치하고 추직(騶直)을 폐지하고 안민창(安民倉)을 설치하고 공상(供上)을 변통하고 서얼(庶孽)의 벼슬길을 열어 주고 중들을 몰아내어 환속(還俗)시키고 동성(同姓) 사이에 혼인하지 말게 하고 사민(士民)에게서 베를 거두는 등등의 일을 청하였는데, 이는 모두 함부로 말한 잘못을 스스로 뉘우치고 있으나 소용이 없는 것들입니다."
하고, 또
"정릉(貞陵)을 부묘(祔廟)할 때에 눈썹을 치켜 올리고 팔을 휘두르며 탑전에서 크게 배척하려 한 자까지 있었는데 신이 그 일을 논하는 말석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어찌 그처럼 심하게 되기야 하였겠습니까. 또 김징(金澄)의 옥사 때에 신이 장편의 소를 지어 구하려고 하였다는 말이 있었는데, 신은 본디 흠이 많아서 여전히 비방을 받고 있었고 영남 선비들의 비방을 받은 뒤로부터 황연(黃壖)·이석복(李碩馥)·이태양(李泰陽)의 소가 잇따라 일어났으니, 옛사람이 이른바 천 사람이 손가락질하면 병을 앓지 않아도 죽는다고 한 말과 거의 같은 형편에 놓여 있었습니다."
하였다. 상이 뒷날 연중(筵中)에서 그 책자를 대신에게 내어 보였는데, 정태화가 아뢰기를,
"이는 모두 스스로의 잘못을 말한 것입니다. 동성과 혼인하지 않아야 한다는 데 대하여 사대부로서 누가 감히 비방하겠습니까. 아마도 그가 잘못 들은 성싶습니다."
하고,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정릉에 대한 의논은 모든 사람이 다 같이 말하여 이의가 없었습니다. 연중에서 배척하려 하였다는 말은 더욱 들어보지 못한 말입니다."
하였다. 정태화가 아뢰기를,
"김징의 일은 상소가 도착하기 전인데 그가 구원하려고 한 것을 예측할 수 있겠습니까. 또 서얼에게 벼슬길을 열어 주는 것은 본디 이이(李珥)가 주장한 의논으로서 송시열이 제창한 일이 아니었으니, 또한 어찌 욕한 자가 있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대개 그때 의논한 일에 대해 다 비방받았다고 여기어 스스로의 잘못을 들어 말하였을 것이다."
하였다. 허적이, 원소(原疏) 가운데에 정승을 논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불안하게 여기어 오랫동안 의논해 처리하지 못하다가 이듬해 정월에 상이 비로소 그 소에 대해 대신을 명하여 어전에서 품정(稟定)하게 하였는데 실행한 것도 있고 시행하지 않은 것도 있다.
영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면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나 그래도 믿고 있는 것은 오직 경들 두세 대신이다. 그런데 경이 지금 병을 핑계대고 있으니, 이것이 어찌 경에게 바라는 것이겠는가. 그전에 앓았던 병이 잠깐 도져서 그러는 것인가, 또는 마음에 불안한 것이 있어서 그런 것인가? 글로 보면 경이 불안한 것은 사세상 그렇겠지만, 끝에 말한 뜻으로 보면 과격한 듯하다. 이미 말한 바가 있는데 경이 줄곧 병만 핑계대고 있으니 너무 지나친 것도 같다. 경의 관대한 도량으로 어찌하여 나라의 일이 매우 어려운 것을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빨리 나와서 정사의 도리를 논하여 지극한 희망에 부응해야 한다."
하였다. 【송시열의 소 가운데에 비평한 말이 있었기 때문에 스스로 편안하지 않아 인피하고 물러갔으므로 비답이 이러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5장 B면【국편영인본】 37책 3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한국고전번역원
박지(朴贄)를 장령으로 삼았다.
이달에 각도에서 보고한 염병으로 죽은 수가 모두 1천 4백 70여 인이었다. 삼남(三南)과 원양·함경 등의 도에서 우역이 더욱 치열하여 죽은 소가 매우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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