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공부/조선왕조실록

현종실록20권, 현종 12년 1671년 12월

싸라리리 2025. 12. 17. 13:02
반응형

12월 1일 무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도 암행 어사 이혜(李嵆)의 서계(書啓)에 따라 남원 부사 나만엽(羅萬葉), 무안 현감 김성구(金聲久)를 파면하고, 진안 현감 윤매(尹梅)를 금부에 내려 고신(告身)을 삭탈하였는데 불법이 많이 있었기 때문이다. 옥과 현감 정수석(鄭洙碩)이 진휼의 정사를 가장 잘하였는데 특별히 명하여 준직(準職)을 제수하게 하였다.
○以全羅道暗行御史李嵆書啓:

 

전라도에서 재해를 가장 심하게 입은 무안(務安) 등 열두 고을의 여러 가지 신역(身役)의 3분의 1을 감면해 주라고 명하였다.

 

12월 2일 기묘

관서(關西)의 쌀 3만 석을 배로 서울에 실어 날라 내년 봄 진휼의 자본에 보태라고 명하였다.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진휼청에 저축된 것이 이미 다하였으므로 다시 관서에서 가져다 써야겠으니 석수(石數)를 미리 정하여 주어 그들로 하여금 요리하여 실어 보내게 하소서."
하니, 상이, 쌀과 좁쌀을 통계하여 모두 3만 석을 내년 봄 이전에 배로 진휼청에 실어 나르라고 명하였다. 또 관서에는 회록(會錄)한 이외의 남은 각종 곡식이 있으니 봄철을 기다렸다가 가져다 쓰자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는데, 그 수도 8천 석이었다. 허적(許積)이, 민유중(閔維重)이 특별히 장만한 은(銀)이 거의 1만 냥이나 되는데 본도에는 긴요하게 쓸 곳이 없으니 진휼청에서 가져다 쓰게 하기를 청하니, 상이 또한 윤허하였다. 드디어 이것으로 공물가(貢物價)를 나누어 주고 선혜청(宣惠廳)의 공물가미(貢物價米)를 바꾸어 썼다.

 

12월 3일 경진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허적이 첫번째 사직의 소를 올렸는데, 상이 승지를 보내어 하유하기를,
"참혹한 기근을 잇따라 당한 끝에 또 섬 오랑캐가 지나친 청을 하고 있으니, 무릇 수응하는 것이 조금도 지체됨이 없어야만 백성을 구제하고 변방 신하를 책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정승 자리가 거의 비게 되어 좌상은 강역을 나가게 되었고 우상은 외방에 있는데 경이 또 물러가려고 하니, 이것이 어찌 평소에 경에게 바라던 것이겠는가. 나의 뜻은 저번 차자에 대한 비답에서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경이 지극한 뜻을 헤아렸을 것으로 여기었는데 이제 또 직임을 사양하려고 하니, 성의가 미덥지 못하였음을 매우 부끄럽게 여긴다. 경과 의논하여 처치할 긴급한 사무가 매우 많으니, 내 뜻을 몸받아 사직하는 글을 보내는 일을 빨리 그만두고 내일 일찍 들어와 면대하여 의논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4일 신사

민종도(閔宗道)를 부교리로 삼았다.

 

청나라의 사자가 함경도에 와서 회령(會寧)·경원(慶源)에다 무역 시장을 열고 소 1백 20두와 소금 9백 20여 석과 가마솥 74개와 보습 9백 78장을 사가지고 돌아갔다.

 

12월 5일 임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헌납 윤경교(尹敬敎)가 상소하여 현재 정사의 잘잘못에 대해 극력 말하였는데, 그 뜻은 오로지 영의정 허적을 공박하는 것이었다. 거기에,
"전하께서 약하여 떨치지 못하고 어물어물하다 결단하지 못하시므로 국가의 크고작은 일들을 모두 수상에게만 묻고 스스로 주장하지 못한 채 그가 말한 대로만 따르고 계십니다. 가령 대신이 옛날 대신처럼 했다면 나라의 일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그런데 지금 국가의 계책은 돌아보지도 않고 백성의 근심을 생각지 않은 채 자신을 편하게 하려고만 힘쓰고 지위를 잃을까 걱정하는 마음만 먹은 나머지, 안에 들어가 아뢸 적에는 뜻을 맞추어 총애를 굳히고 밖에 나와 행세할 적에는 두루 엄폐하여 사적인 뜻만 성취합니다."
하고, 또,
"전하께서 현직에 있는 정승이 백성을 괴롭히는 말에 대해서는 어느 것이나 곡진히 따르시면서 어진 선비가 백성을 편안하게 만드는 주청에 대해서는 어찌하여 한결같이 망설이십니까. 나라에 어진 정승이 있다면 무슨 일인들 해결되지 않겠습니까마는, 수상이 정사를 독단하게 하여 나라의 일이 날로 무너지고 있으니 신은 딱하기만 합니다."
하고, 또,
"국가의 오늘날 형세가 마치 크나큰 난리를 치른 뒤와 같으므로 전하께서 월(越)나라 구천(句踐)030)  과 위 문공(衛文公)031)  이 한 일처럼 하셔야 할 것인데 지금 그렇게 하지 않으십니다. 안위(安危)·이해(利害)에 대해 대충대충 넘긴 채 오늘날의 대신과 함께 백성을 괴롭히는 정사만 행하고 계시니, 어지럽고 위태로운 화를 어떻게 구제하겠습니까. 뒤에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소가 들어가니, 상이 크게 노하여 정원에 하교하기를,
"헌납 윤경교는 논사(論思)의 자리에 있었던 날이 많았고 간관의 직책에 제수된 지 오래되었는데도 입시하였을 적에나 등대하였을 때에 나라를 근심하는 말이 일언반구도 없었다. 그런데 이제 여러 날 동안 인피하고 들어가 좌우로 관망하다가 당류를 끌어들이고 남의 뜻에 부합하여 기세를 올리며 팔을 걷어붙이고 몸을 곧추세워 앞장섰다. 아, 인심이 흉악하고 교활하기가 어찌하여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닌데 어떻게 일마다 모두 잘할 수 있겠는가. 그 단점에 대해 말하고 싶으면 어찌 할 말이 없겠는가. 그런데 억지로 거짓말을 만들어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고 감히 말하였으니, 나라의 체통으로 헤아려 보건대 그대로 두어 간교한 꾀를 키울 수 없다. 윤경교를 우선 체차하라."
하고, 이어서 승지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가서 전유하게 하기를,
"나라의 일이 망극할 뿐만 아니라 사체로 헤아려 봐도 손상되는 바가 매우 크다. 괴상하고 흉측한 사람이 억지로 만든 변변치 못한 말을 개의할 것이 뭐가 있겠는가.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야 한다."
하였다. 【허적이 윤경교의 소가 들어갔다는 말을 듣고 곧 성밖으로 나갔다.】  정원이 【도승지 이은상(李殷相), 좌승지 이연년(李延年),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 동부승지 여성제(呂聖齊).】  하교를 돌려보내며 아뢰기를,
"말은 경망하더라도 언론의 직책에 있으니 이번에 진노하신 하교는 윤경교의 본의와는 다르다고 여겨집니다."
하니, 상이 번거롭히지 말라고 답하였다. 또 아뢰기를,
"괴상하고 흉칙하다는 말씀이 대신(大臣)을 우대하시는 지극한 뜻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대각(臺閣)을 대우하는 도리에 부족한 듯합니다."
하고 세 번 아뢰었으나, 들어 주지 않았다. 맹주서가 전유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허적이 ‘신은 임금을 섬기는 것이 변변치 못하여 간관의 배척을 몹시 받았으므로 황급히 도성을 나가 바야흐로 엄한 견책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뜻밖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가 멀리 와서 따스한 분부를 전하니, 성은은 더욱 융숭해지고 신의 죄는 더욱 커졌습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獻納尹敬敎上疏, 極言時政得失, 而其意惠攻領議政許積, 有曰:
殿下委靡不振, 優游不斷, 軍國大小之事, 一聽於首相, 不能自有主張, 惟其言之是從。 若使大臣者, 能如古之大臣, 則國事豈至此極耶? 今乃不顧國家之計, 不念生民之憂, 惟務便身之圖, 只生患失之心, 入告于內, 則迎合順旨, 以固其寵, 出行於外, 則周遮掩蔽, 以濟其私。                                    又曰:                      殿下於時相厲民之言, 則無不曲從, 儒賢安民之奏, 則一何留難耶? 國有賢相, 則何事不濟, 而獨使首相專政, 以致國事日壞, 臣竊悶焉。 又曰, 國家今日之勢, 如承大亂之後, 殿下當以越 句踐、衛文公自處, 而今者不然。 安危、利菑, 架漏度日, 只與今日大臣, 行虐民之政, 則何救於亂亡之禍? 後且悔之, 亦無及矣。                                    疏入, 上大怒, 下敎于政院曰: "獻納尹敬敎, 身居論思之地, 爲日已多, 移拜諫職, 亦已久矣, 入侍、登對之時, 未聞一語半辭, 及於憂國, 今乃引入累日, 左右觀望, 招朋引黨, 符合他意, 盛氣攘臂, 挺身自當。 嘻噫! 人心之凶狡, 何至此極? 人非堯、舜, 安得每事盡善? 欲言其短, 何患無辭? 而勒成虛說, 敢曰縱恣無忌, 揆以國體, 不可仍置, 以長其巧計。 獻納尹敬敎, 姑先遞差。" 因命承旨, 往諭于許積曰: "非但國事之罔極, 揆以事體, 所損甚大。 怪妄凶狡之人, 勒成無狀之言, 何用介懷? 須體至意, 從速入來。"                        【積聞敬敎疏入, 卽出城外。】                     政院                        【都承旨李殷相、左承旨李延年、左副孟冑瑞、右副李枝茂、同副呂聖齊。】                     繳還下敎曰: "言雖狂率, 職是言責, 今此震疊之敎, 恐非敬敎之本意。" 上以勿煩答之。 又啓曰: "怪妄凶狡等敎, 雖出於優待大臣之至意, 而恐有歉於待臺閣之道。" 三啓不聽。 孟冑瑞傳諭還啓曰: "積以爲臣事君無狀, 重被諫臣之斥, 蒼黃出城, 方俟嚴譴, 不意近侍遠臨, 傳宣溫諭, 聖恩愈隆, 臣罪愈大云。"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又曰:
殿下於時相厲民之言, 則無不曲從, 儒賢安民之奏, 則一何留難耶? 國有賢相, 則何事不濟, 而獨使首相專政, 以致國事日壞, 臣竊悶焉。 又曰, 國家今日之勢, 如承大亂之後, 殿下當以越 句踐、衛文公自處, 而今者不然。 安危、利菑, 架漏度日, 只與今日大臣, 行虐民之政, 則何救於亂亡之禍? 後且悔之, 亦無及矣。                                    疏入, 上大怒, 下敎于政院曰: "獻納尹敬敎, 身居論思之地, 爲日已多, 移拜諫職, 亦已久矣, 入侍、登對之時, 未聞一語半辭, 及於憂國, 今乃引入累日, 左右觀望, 招朋引黨, 符合他意, 盛氣攘臂, 挺身自當。 嘻噫! 人心之凶狡, 何至此極? 人非堯、舜, 安得每事盡善? 欲言其短, 何患無辭? 而勒成虛說, 敢曰縱恣無忌, 揆以國體, 不可仍置, 以長其巧計。 獻納尹敬敎, 姑先遞差。" 因命承旨, 往諭于許積曰: "非但國事之罔極, 揆以事體, 所損甚大。 怪妄凶狡之人, 勒成無狀之言, 何用介懷? 須體至意, 從速入來。"                        【積聞敬敎疏入, 卽出城外。】                     政院                        【都承旨李殷相、左承旨李延年、左副孟冑瑞、右副李枝茂、同副呂聖齊。】                     繳還下敎曰: "言雖狂率, 職是言責, 今此震疊之敎, 恐非敬敎之本意。" 上以勿煩答之。 又啓曰: "怪妄凶狡等敎, 雖出於優待大臣之至意, 而恐有歉於待臺閣之道。" 三啓不聽。 孟冑瑞傳諭還啓曰: "積以爲臣事君無狀, 重被諫臣之斥, 蒼黃出城, 方俟嚴譴, 不意近侍遠臨, 傳宣溫諭, 聖恩愈隆, 臣罪愈大云。"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6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3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사법-치안(治安)

 

12월 6일 계미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집의 신정(申晸)이 아뢰기를,
"내리신 전교를 보건대, 흉칙 교활하다는 등의 말씀을 갑자기 대각의 신하에게 하시고 심지어는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까지 있었으니, 두렵고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윤경교는 언론의 자리에 있으면서 현재의 어려움을 목격하고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일어나 상소하여 아뢰었습니다. 대개 국가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고락이란 모두 의지하고 믿는 대신에게 달려 있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제 만일 그 폐단의 근원을 궁구하여 잘잘못에 대해 말한다면 대신을 책망하지 않고 어떤 사람을 책망하겠습니까. 그 본심을 살펴 보면 결코 다른 의도가 없습니다. 어찌 조금이라도 관망하거나 부합할 생각이 있었겠습니까. 전하께서는 말을 들으실 때에 화평한 마음으로 찬찬히 살피시지 못하므로, 상소 중 논한 것이 대신이나 중신에 관계되면 옳고 그른 말이나 곧고 굽은 일을 막론하고 대뜸 진노하여 일체 물리치십니다. 이것은 언로(言路)를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가 아니므로 신은 애석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깊이 생각하여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빨리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여러 날 동안 다시(茶時)에 회좌하는 것은 모두 대행하도록 청하다가 갑자기 오늘에 와서야 서둘러 출사하니, 어찌하여 공과 사를 분별하는 것이 이 지경에 이르렀단 말인가. 내 매우 놀랍다."
하였다. 신정이 ‘지나친 거조를 보고 감히 병을 핑계대고만 있을 수 없었으므로 억지로 일어나 대청(臺廳)에 나가 생각한 바를 대략 아뢰었는데 엄준한 비답이 뜻밖에 나왔다.’는 이유로 인피하였고, 지평 윤가적(尹嘉績), 장령 윤계(尹堦)도 송시열(宋時烈)의 소 가운데에 매우 헐뜯은 말이 있었다는 이유로 잇따라 인피하였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처치하기를,
"임금에게 과실이 있을까 염려하여 바로잡으려는 뜻이 간절한 나머지 억지로 일어나 일을 논하였으니 대간의 체례에 매우 맞았습니다. 그런데 엄한 비답으로 물리치셨으니 사실 실정에 벗어난 일입니다. 언론의 자리에 있는 몸으로 대신에게 배척받았으니, 소의 본의는 완전해지기를 요구하는 데에 있었다 하더라도 사체로 헤아려 보건대 마침내 모른 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정은 출사시키고 윤가적·윤계 등은 체차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윤경교는 언론의 자리에 있으면서 감히 말하여 숨기지 않았는데, 그 뜻은 다만 현재의 어려운 일을 개연히 생각하고 신하가 임금을 섬길 때에 숨김이 없어야 한다는 의리를 스스로 실천해 보려고 한 데에 있습니다. 그런데 하교를 보건대, 말씀이 엄준하여 심지어는 괴상하고 흉칙하다 하여 특별히 그의 벼슬을 체차하셨으니, 매우 놀라워 못 견디겠습니다. 대신도 물론 우대해야 하겠습니다만 대각도 배식(培植)해야 하니, 특별히 체차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김만중(金萬重)을 부교리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삼았다. 윤경교(尹敬敎)를 의령 현감(宜寧縣監)으로 특별히 제수하고, 이어서 하교하기를,
"윤경교는 오늘 안으로 하직하게 하고 말을 주어 보내라."
하였다. 이튿날 양사(兩司)가 외직(外職)에 보임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라고 여러 번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았다.

 

12월 7일 갑신

승지 여성제(呂聖齊)를 영의정 허적(許積)에게 보내 돈유하여 들어오게 하였는데, 허적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이렇게 된 것은 모두가 신처럼 변변치 못한 자가 과분한 자리에 오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묵은 허물을 뒤미처 생각하면 부끄럽고 뉘우치기에 겨를이 없는데, 더구나 더럽혀진 몸으로 이미 그르친 나라의 일을 거듭 그르칠 수야 있겠습니까."

 

부응교 이혜(李嵆), 부교리 김만중(金萬重), 수찬 최후상(崔後尙), 부수찬 홍주국(洪柱國)도 상차하여 윤경교를 힘껏 구제하고 외직에 보임하라는 명을 빨리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8일 을유

비국의 유사 당상에게 명하여 긴급한 사무는 영의정 허적에게 가 의논한 뒤에 탑전에서 품정하게 하였다.

 

이날 밤에 상이 승지에게 명하여 허적에게 전유하기를,
"아, 오늘날 나라의 일은 참으로 너무나 위태로와서 풍랑이 거센데 물이 새는 배를 타고 있는 것으로도 그 급한 상황을 형용하기에 부족하다. 이게 참으로 무슨 까닭에서인가. 오로지 내가 덕이 박하여 신명에게 죄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 간사한 사람이 때를 틈타 저격하되 말이 매우 괴상하였을 뿐만 아니라 없는 것을 있다 하고 거짓을 진실이라고 하였으니, 이게 참으로 무슨 마음에서인가? 사람의 도리를 가지고는 책망할 수 없다. 경에게 무슨 죄가 있기에 이처럼 인책하는가. 충심으로 왕실을 위해 근로한 것이 경의 죄란 말인가? 사람이 요(堯) 순(舜)이 아닌 이상 참으로 일마다 모두 잘할 수 없는 법이므로 이 일은 옳지 않고 이 일은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괜찮겠으나, 감히 기세를 돋구어 팔을 걷어붙이고 거짓을 꾸미고 없는 일을 만들어내어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는 말로 뒤집어 씌울 수 있단 말인가. 흉칙하고 간사한 꼴은 마치 속이 환히 보이는 듯한데, 경은 어찌하여 혐의하는가. 오늘날 묘당이 텅 비었다. 이때가 참으로 어떠한 때인데 경은 생각지 않는단 말인가. 경이 줄곧 굳이 사직하여 반드시 짐을 벗고 싶겠지만 내 뜻이 굳게 정해졌는데 어찌하겠는가. 반드시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서 내 희망에 따라줘야 할 것이다."
하였는데, 승지 이연년(李延年)·여성제(呂聖齊)가 ‘간사한 사람이 때를 틈타 저격한다느니 사람의 도리로 책망할 수 없다느니 속이 환히 보이는 듯하다느니 한 말씀은 미안하다.’는 이유로 하교를 돌려보냈다. 상이 사알(司謁)을 시켜 힐문하기를,
"어느 승지가 이 의논을 먼저 내어 이 계사를 만들었는가?"
하자, 이연년 등이 ‘합의하여 초안을 꾸몄으므로 실로 먼저 발의한 자가 없다.’고 대답하였다. 상이 또 사알을 시켜 힐문하기를,
"반드시 먼저 발의한 자가 있었을 것인데 이처럼 미루니, 매우 간교하다."
하였으나, 이연년 등이 전처럼 대답하였다. 사알이 세 번이나 왕래하였다. 이윽고 승전색(承傳色)이 나와 상의 분부를 전하기를,
"너희들이 끝까지 미루는 것은 사알이 상세히 전하지 못한 탓인가? 이 계사는 누가 꾸몄는가? 숨김없이 그대로 아뢰라."
하였다. 승전색이 이어서 말하기를,
"위에서 바야흐로 진노하고 계시니, 이름을 들어 대답하지 않아서는 안 되겠다."
하자, 여성제가 아뢰기를,
"붓을 잡은 자는 신이었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하고, 이연년이 아뢰기를,
"상의하여 초안을 꾸몄으니, 죄는 실로 신에게 있습니다."
하였다. 드디어 여성제에게 하교하기를,
"오늘 정원이 아뢴 것은 매우 터무니없으니, 좌승지 이연년을 무겁게 추고하라는 전지(傳旨)를 봉입(捧入)하라."
하고, 그 뒤에 또 이연년에게 하교하기를,
"윤경교의 간교한 꼴은 말만 하여도 놀랍고 분한데 그의 죄가 어찌 체차만 해서 되겠으며 그에 대한 벌이 어찌 외직에 보임만 해서 되겠는가마는 실로 의도가 있었다. 그런데 정원이 아뢴 것은 너무나 터무니없어 임금을 무시하였으니 참으로 매우 놀라웠다. 두세 번 물어보았는데도 끝내 속이고 있으니,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것이 어찌 이러할 수 있단 말인가. 같은 당류에게 편을 든 자취는 마침내 스스로 엄폐할 수 없으며 임금을 속인 죄는 조금도 용서할 수 없으니, 동부승지 여성제를 나문하여 죄를 정하라."
하였다. 이연년이 불안하여 소를 올리고 나갔는데, 밤은 이미 삼경이었다.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와 승지 이지무(李枝茂)를 패초하여 입직하게 하였는데, 이지무가 먼저 들어와서 ‘동료가 죄받는 전지를 결코 요행히 면하였다 하여 봉입할 수 없다.’는 등의 말을 아뢰니, 답하기를,
"말이 매우 놀랍다.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이튿날 정원이, 두 신하를 추고하고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엄하게 비답하고 따르지 않았다. 정원이 또 도로 거두기를 청하기를,
"두 신하는 임금의 지나친 하교를 목격하고서 엄한 위엄을 무릅쓰고 감히 생각한 바를 아뢰었습니다. 그런데 관례에 따라 복역(覆逆)한 것을 깔보았다 하고 사실대로 대답한 것을 속였다 하시며 일을 같이 한 사람을 구별하여 같은 당류에게 편을 들었다고 죄를 주시니, 또한 포용하는 도량이 부족하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이처럼 번거롭히는 것은 모두가 견제하고 막으려는 뜻이니, 참으로 매우 통탄스럽다. 마음대로 하라."
하였다.

 

이지무가 드디어 허적에게 전유하고 돌아와 아뢰기를,
"허적이 ‘간관이 외직에 보임된 것은 이미 성스런 세상의 일이 아닌데 승지가 금부에 내려지기까지 하였으니, 신의 죄가 이에 이르러 더욱 큽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상이 또 맹주서를 보내어 하유하기를,
"내 뜻은 전에 다 말하였거니와, 경은 지극한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서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소망에 부응해야 한다."
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하루 안에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가 두 번이나 왔으니 이것은 실로 천고에 없던 특이한 은혜입니다. 은혜가 더욱 융숭해짐에 따라 두려움만 더욱 깊어집니다."
하였다.

 

왜차(倭差) 평성태(平成太)가 죽었다. 평성태가 나올 때에 반드시 허락받을 것으로 여기고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돌아가지 않을 것이라고 맹서하였는데 전후에 소란을 피운 것이 다 평성태에게서 나온 것이었다. 조정에서 굳게 거절하고 허락하지 않으니, 평성태가 분노하여 병이 나 동래부에서 죽었다. 역관(譯官)들은 혹 약을 마시고 스스로 죽었다고도 한다. 왜인이 그 주검을 궤에다 담고 그 가운데에 소금을 넣어 채웠는데 도중(島中)으로 주검을 돌려보내기 위해서였다. 동래 부사 정석(鄭晳)이 치계하여 아뢰니 상이 예조 판서 정지화(鄭知和)에게 이르기를,
"악당의 우두머리인 왜인이 이제 스스로 죽었으니, 진정될 희망이 있을 법도 하구나."
하니, 정지화가 아뢰기를,
"일의 형편이 전과 다른데 부관(副官) 무리들이 어떻게 동래에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전에 왜관의 왜인이 죽었을 때에는 비록 돌본 일이 없었습니다만 이 왜인은 차사(差使)의 이름을 띠고 왔으니, 상(喪)을 치르는 데 드는 물품을 주어 먼데에서 온 사람을 대우하는 도리를 보여야 하겠습니다."
하였고, 대신의 뜻도 이와 같았다. 상이 드디어 본도에 명하여 쌀 10석과 명주 5필과 무명 15필과 유둔(油芚) 3부(部)와 납촉(蠟燭) 10쌍(雙)과 과실 3종(種)을 주게 하고, 또 내국(內局)의 부용향(芙蓉香) 10개를 보냈다. 왜인은 본디 이 향을 귀하게 여긴다.

 

12월 9일 병술

상이 뜸을 뜰 때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이 여성제(呂聖齊)를 나문하는 것이 지나치다고 힘써 말하였으나, 상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은상이 아뢰기를,
"대신이 있다면 물론 아뢰었을 것인데 지금은 정승 자리가 다 비었고, 또 국기(國忌) 때문에 삼사(三司)도 논하여 아뢰지 못하였습니다. 신들이 아뢰지 않으면 누가 다시금 말하겠습니까."
하니, 상이 큰소리로 이르기를,
"삼사가 일어나기를 기다리는가?"
하자, 이은상이 아뢰기를,
"전하께서 죄주고 싶으면 죄주시면 될 뿐이지 이러한 하교는 또한 매우 거북스럽지 않습니까."
하였다.

 

12월 10일 정해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임상원(任相元)을 지평으로, 윤진(尹搢)을 헌납으로, 김만기(金萬基)를 대사성으로 삼았다.

 

상이 하교하였다.
"내관(內官)이 말미를 받아 내려갔을 때에 폐단을 저지른 일이 있다 하니, 매우 놀랍다. 먼저 파직하고 뒤에 추고하라. 내관이 폐단을 저질렀으면 감사가 아뢰어서 뒷날에 징계가 되도록 해야 할 것인데도 장계로 알린 일이 없으니, 매우 온당하지 못한 일이다. 경기 감사를 추고하라."

 

12월 11일 무자

달이 묘성(昴星)을 범하였다.

 

영의정 허적(許積)이 상소하기를,
"신이 접때 탑전에서 동료 정승이 상소한 가운데 정승에 대해 논한 것을 보건대, 가부를 아뢰어 보좌하고 세상을 다스리는 일이 이미 신에게 근사하지도 않으니 물리치고 바꾸어야 한다는 말은 참으로 격언이었으므로 상소하여 물리쳐 주시기를 바랬습니다. 그런데 접때 대간의 신하가 나라를 근심하는 뜻이 간절하여 소를 올려 극진히 논하고 신의 죄를 열거하면서 예로부터 말하는 비루한 자의 정태와 소인의 죄목을 모두 신에게 뒤집어 씌우고는 심지어 세상에 주운(朱雲)032)  과 같이 기개가 곧은 사람이 없는 것을 한탄하였으므로 신은 심장이 놀라고 가슴이 떨려서 황급히 도성을 나가 날마다 벌이 내리기만을 기다렸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성명께서 그의 소청을 윤허하지 않고 또 뒤이어 외직에 보임하시고, 또 뒤이어 나라를 그르친 신을 극진히 감싸주셨습니다. 그리고는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를 잇따라 보내어 사흘 동안에 네 번이나 왔는데 심지어는 글을 내려 간곡히 타이르셨습니다. 융숭한 은혜가 한결같이 여기에 이르렀기 때문에 뭇사람이 놀라고 의혹하여 혹 신이 총애를 굳히어서 이렇게 된 것이 아닌가 의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성명께서 신을 사랑하시는 것이 신에게 화를 주시는 것밖에 안 됩니다.
신의 한 몸은 돌아볼 것이 없다고 치더라도 어찌 성상의 깨끗한 덕에 누가 되지 않겠습니까. 신이 진심으로 바라는 것은 오직 빨리 귀양보내도록 명하시어 말한 자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주고 물의를 펼 수 있게 하여 국가가 다시 편안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찌 하찮은 신의 사사로운 다행일 뿐이겠습니까. 신이 거적에 앉아 벌이 내리기를 기다리는 중이므로 감히 군말을 아뢸 수 없습니다마는, 변변치 못한 신으로 인하여 자주 성상이 노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삼사의 관원과 승지가 논집(論執)하고 복역(覆逆)하는 것은 그들의 직분인데, 혹 엄준한 비답을 내리시기도 하고 혹 금부에 죄를 묻게 하였으니, 신의 두려움이 여기에 이르러 더욱 깊어집니다. 바라건대, 성명께서는 모두 양찰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기회를 타고 때를 엿보는 무리와 사람의 얼굴에 귀신의 마음을 가진 무리가 간교한 뜻을 은밀히 품었으나 마음 쓰는 꼴을 엄폐할 수 없다. 아, 어찌 마음이 아프지 않겠는가. 간사한 자가 제딴에는 꾀가 치밀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그 말이 흉악 참혹하고 거짓을 꾸며 못하는 짓이 없었다. 어찌 이것을 깊이 개의해서야 되겠는가. 동료 정승의 상소 말에 대해서는 전에 비답할 때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다시 많은 말을 하지 않는다마는, 오늘날 나라의 형세가 위태로워 조석을 보전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해 경은 필시 생각해 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경이 인피하고 들어간 지 이제 이미 반 달이 되었으니 밀려 있는 급한 사무가 어떠하겠는가. 도리에 어그러지기 짝이 없는 말은 맹자(孟子)가 이른바 ‘금수(禽獸)에게 또한 무엇을 비난하겠느냐.’라고 한 뜻과 이처럼 꼭 들어맞는데, 경은 어찌하여 이토록 인책하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서 상하의 희망에 부응해줘야 할 것이다.
윤경교를 외직에다 보임하는 것으로 그친 것은 실로 경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죄가 어찌 여기에만 그치겠는가. 가까이 있는 신하가 속이는 버릇은 가증스러우므로 국가가 법을 쓰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하고, 승지에게 명하여 전유하게 하였다. 도승지 이은상(李殷相), 우승지 정약(鄭鑰), 좌부승지 맹주서(孟胄瑞), 우부승지 이지무(李枝茂)가 아뢰기를,
"금수 두 자는 경전(經傳)에 있는 말일지라도 대뜸 신하에게 비할 수 없습니다. 임금의 말씀은 관계되는 바가 매우 중대한데, 이번 하교는 말뜻이 박절하여 신하를 대우하는 도리에 어긋납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계사의 뜻은 내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우승지 정약이 가서 전유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성상의 비답을 받아 보건대, 경계하고 가르치심이 지극하셨습니다만 그 가운데에 또한 미안한 말씀이 많이 있었습니다. 변변치 못한 신으로 인하여 성상의 덕에 누를 끼치게 되었으니, 신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더욱 깊어졌습니다."
하였다. 또 정약을 보내어 하유하기를,
"근심거리는 매우 많고 믿을 만한 것은 조금도 없는데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갑자기 닥치니, 민사(民事)를 생각하면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 경이 만일 여기까지 생각해 보았다면 내가 말하지 않아도 경은 반드시 생각을 고쳤을 것이다. 가까이 있는 신하를 다시 보내어 지극한 뜻을 이르니, 빨리 들어와서 애타게 바라는 바에 부응하라."
하였는데, 정약이 돌아와 아뢰기를,
"허적이 ‘밤이 이미 깊어가는데 가까이 모시는 신하가 다시 와서 성유(聖諭)를 받았습니다. 받들어 읽고 나니 속이 탑니다마는, 신의 죄명이 매우 무겁고 공론이 몹시 엄하므로 대궐에 다시 들어가는 것은 실로 감히 할 수 없습니다. 머리를 땅에 두드려 빨리 죽고 싶을 뿐입니다.’ 하였습니다."
하였다.
○領議政許積上疏曰:
臣向於前席, 伏見僚相疏中, 論相一款, 獻替經世, 旣不近似於臣, 則去之易之, 誠是格言, 纔尋長單, 冀蒙退斥。 乃者諫臣, 志切憂國, 投疏極論, 列數臣罪, 自古鄙夫之態, 小人之目, 靡所不加, 而至發歎於世無朱雲, 臣心驚膽慄, 蒼黃出城, 日俟鈇鉞之誅。 不自意 聖明, 旣不允所請, 又從而補外, 又從而曲護, 誤國之臣。 近侍聯翩, 三日四臨, 至賜宸章, 誨諭丁寧。 隆恩殊渥, 一至於此, 此所以群駭衆惑, 或疑臣之固寵, 有以致之也。 然則聖明之所以眷臣, 適足以禍臣。 臣之一身, 縱不足恤, 獨不有累於淸明之德乎? 臣之血祝, 惟在於亟命竄逐, 以快言者之心, 而使物議得伸, 國家再安。 則豈但微臣私幸也哉? 臣於席藁待譴之中, 不敢有所贅陳, 而緣臣無狀, 致勤天怒。 三司之官, 喉舌之臣, 論執、覆逆, 乃其職也, 或下嚴峻之批, 或有廷㷉之問, 臣之悚惕, 到此益深。 伏乞聖明, 竝垂恕察。                                    上答曰: "嗚呼! 乘機相時之類、人面鬼心之輩、陰懷奸巧之志, 難掩用意之態。 嘻噫! 豈不痛心哉? 奸細之人, 自謂謀計甚密。 故其言之凶慘構捏, 無所不至。 豈可以此, 深用介懷? 至於僚相疏辭, 已悉於前者之批, 更不多誥, 而今日國勢之殆哉岌岌, 莫保朝夕之狀, 卿必念及。 卿之引入, 今已半月, 急務之積滯, 當如何哉? 悖理無倫之言, 與《孟子》所謂, 於禽獸又何難焉之意, 若是其襯合, 則卿何引咎至此耶? 須體予意, 從速入來, 以副上下之望。 敬敎之只補外任, 實爲卿地。 不然, 罪豈止此? 近侍欺罔, 其習可惡, 朝家用法, 不得不爾矣。" 命承旨傳諭。都承旨李殷相、右承旨鄭錀、左副孟冑瑞、右副李枝茂, 啓曰: "禽獸二字, 雖是經傳之語, 不可遽加於臣僚。 人君辭令, 所關甚重, 而今此下敎, 辭旨迫切, 有乖待下之道。 上答曰: "啓辭之意, 予未曉也。" 右承旨鄭錀, 遂往諭之, 積以爲: "伏奉聖批, 戒誨備至之中, 亦多有未安之敎。 緣臣無狀, 貽累聖德, 臣之罪戾, 到此益深云。" 又遣鄭錀諭之曰: "憂虞孔棘, 少無可恃之狀, 而客使先聲猝至, 言念民事, 罔知攸措。 卿若念及於此, 不待予言, 卿必幡然改圖矣。 更遣近侍, 諭以至意, 從速入來, 以副如渴之望。" 錀還啓曰: "積以爲, 夜己向闌, 近侍再臨, 伏承聖諭。 奉讀以還, 五內煎灼, 第臣罪名極重, 公議至嚴, 更入脩門, 實所不敢。 以首頓地, 唯願速死云。"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9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5면
【분류】정론-정론(政論)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

 

상이 하교하였다.
"기근이 참혹하여 재력이 바닥났는데 사신이 온다는 소식이 갑자기 닥치니, 민사를 생각하면 어찌할지 모르겠다. 접대하는 예(禮)는 조금도 늦출 수 없고 원접사(遠接使)의 차출은 더욱 긴급하니, 대신에게 의논하여 곧 차출하라."

 

이정영(李正英)을 원접사로, 이경억(李慶億)을 관반(館伴)으로 삼았다.

 

전라도 영암(靈巖) 땅에서 가을갈이를 한 보리가 이삭이 패어서 익고 진달래·복숭아·살구가 곳곳에서 꽃이 피었는데, 도신(道臣)이 아뢰었다.

 

12월 12일 기축

옥당(玉堂)이 또 상차하여 이연년(李延年)을 추고하고 여성제(呂聖齊)를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2월 13일 경인

사간 이합(李柙)이 아뢰기를,
"승지는 왕명을 출납하는 책임을 맡고 있으므로, 명령이 내려왔을 때에 혹 지나친 것이 있으면 봉환(封還)하고 복역(覆逆)하는데 이는 본디 출납을 성심껏 하는 의리입니다. 그런데 좌승지 이연년, 동부승지 여성제 등은 임금을 가까이 모시는 반열에 끼인 신분이므로, 지나친 거조를 보면 시비를 낱낱이 아뢰어 상의 마음을 돌리기를 바라는 것이 그들이 당연히 해야 할 직책입니다. 그런데 성명께서는 이해하지 않고 두세 번 힐문하고 억지로 구별하여 하나는 추고하고 하나는 나문하시니, 보고 들을 때 누가 놀라고 의혹하지 않겠습니까. 성스러운 조정의 거조가 이래서는 안 됩니다. 여성제를 나문하고 이연년을 추고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지평 정유악(鄭維岳)이 아뢰기를,
"임금은 한 마디 말이라도 삼가지 않아서는 안 되는데, 전하께서는 윤경교의 일에 대해 너무나 갑작스레 노하고 너무나 심하게 미워하여 비유하신 뜻이 의리를 상실하였고 말씀이 지나치셨습니다. 그러므로 승지가 제몸을 돌아보지 않고 봉환하고 복역한 것은 그들의 직분일 뿐입니다. 이것이 참으로 무슨 죄이기에 하옥하기도 하고 특별히 추고하기도 한단 말입니까. 순(舜) 같은 성인으로서도 납언(納言)하는 관원에게 경계하기를 ‘아침 저녁으로 내 명을 출납하되 성심껏 하라.’ 하였는데, 이제 전하께서는 ‘네가 어찌 감히 내 전교를 봉환하느냐.’ 하면서 배척하고 죄주어 마치 임금의 명에 대하여 공손하지 않은 자처럼 하시니, 전하께서 신하에게 책망하시는 것이 어찌하여 그리도 순임금과 다르단 말입니까. 이연년을 추고하라는 것과 여성제를 나문하라는 명을 도로 거두소서."
하고, 양사(兩司)가 여러 번 아뢰었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또 승지 정약(鄭鑰)을 허적(許積)에게 보내 전유하여 빨리 들어오게 하였는데, 허적이 말하였다.
"신이 나아가서는 이미 나라의 일을 그르쳤고 물러나서도 성상의 덕에 누를 기쳤으니, 신의 죄가 더욱 많습니다."

 

12월 14일 신묘

약방(藥房)에 명하여 들어와 진찰하게 하였다. 상이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에게 이르기를,
"영상에게 이제 다시 하유해야 하겠는데, 경이 가서 전하되 글 이외에 백성의 근심과 나라의 형세가 이처럼 극한 지경에 이르렀으니 빨리 들어오지 않아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말을 만들어 일러야 할 것이다."
하고, 드디어 이은상을 보내어 전유하여 빨리 들어오게 하였다. 허적이 말하기를,
"특별히 승정원의 장관을 보내셨는데 따뜻한 말씀이 더욱 간절하였고 구두로 전한 성상의 뜻이 매우 간곡하였습니다. 감격할 뿐더러 황공하고 민망하기가 더욱 심합니다."
하였다.

 

12월 15일 임진

승지 맹주서(孟胄瑞)를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어 전유하기를,
"임금과 신하 사이에는 서로 마음을 아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것이다. 윤경교의 말처럼 총애를 빙자해 교만하고 방자한 신하는 임금이 반드시 매우 미워하여 몹시 배척할 것이다. 어떻게 가식적으로 우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날의 일은 실로 경을 모함하여 못하는 짓이 없는 것이다. 혹 방자하여 꺼리는 것이 없다고도 하고 세상에 주운(朱雲)과 같이 기개가 곧은 사람이 없다고도 하는 등 한 글자 한 구절마다 모두가 때를 틈타 저격하여 경으로 하여금 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다. 그들의 간사한 정상이 이러한데 경은 인책하여 마치 천지 사이에 용납될 수 없는 자처럼 하고 있으니, 이는 모두가 내 성의가 미덥지 못하여 경을 감동시키지 못하는 때문이니, 부끄러운 마음을 스스로 금할 수 없다. 아, 오늘날의 나랏일이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놓여 있는데, 평소에 나라를 근심하던 경의 마음으로 끝내 대수롭지 않게 보고 나라의 일을 잊어버릴 수 있단 말인가. 말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도 그 만분의 일도 형용할 수 없다. 경은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나의 뜻을 몸받아 빨리 들어와서 애타게 바라는 바에 따르라."
하였는데, 허적이 말하기를,
"성상께서 간절히 일깨워 주시고 여러모로 도타이 권유하셨습니다. 황급하여 어찌할 바를 모르시겠다는 하교를 받들어 읽으니 마음이 무너지고 눈물이 솟아나서 아뢸 바를 모르겠습니다."
하였다.

 

12월 16일 계사

상이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는데, 허적에게 가 의논할 일을 어전에서 품정(稟定)하기 위해서였다. 신하들이 한 가지 일을 아뢸 때마다 상이 번번이 영상과 상의하였는지를 묻고 미처 의논하지 못한 것은 또 뒷날을 기다리게 하고 이미 의논한 것도 다시 의논하여 시행하게 하였으므로, 이날은 의논하여 정한 일이 하나도 없었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나아가 아뢰기를,
"전하의 말씀 사이에 지나친 것이 많이 있는데 이것이 어찌 대신을 위안하는 도리이겠습니까."
하고,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전하께서는 전부터 말씀하시는 사이에 혹 지나칠 때가 있었습니다마는, 이번에는 더욱 심하셨습니다. 금수(禽獸)라는 등의 하교는 크게 미안한 것이 있으니, 이것이 어찌 신하에게 대뜸 할 말이겠습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금수라는 등의 말을 미안하게 여긴다면 고치겠다."
하였다.

 

경기 안산(安山)에 지진이 있었다. 장단(長湍)에서 날마다 짙은 안개가 끼어 지척을 분간할 수 없었다.

 

12월 17일 갑오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밤에 달이 헌원성(軒轅星)을 범하였다.

 

상이 하교하였다.
"여성제(呂聖齊)는 당초 하문하였을 때에 사실대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 버릇이 가증스러웠기 때문에 나문하였으나, 대신이 이것을 더욱 미안하게 여기므로 위안하는 도리에 있어서 참작하여 조처하는 일이 없어서는 안 되겠으니, 동부승지 여성제를 내보내라."

 

상이 도승지 이은상(李殷相)을 불러 이르기를,
"나라의 일이 망극한데다 칙사의 행차도 임박하였으니 영상이 반드시 빨리 들어와야 접대하는 모든 일들을 미리 요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불안한 정세가 있기는 하지만 억지로라도 나오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전번에 전유한 것이 한두 번 뿐만이 아니다마는, 글로는 혹 다하지 못한 뜻이 없지 않을 것이니, 도승지가 또 가서 애써 일러서 반드시 들어오겠다는 승낙을 받되 서계(書啓)하지 말고 합문(閤門) 밖으로 나오게 하라. 그러면 앉아서 기다리겠다."
하자, 이은상이 아뢰기를,
"이번에 성상께서 정성을 들여 권유하신 것은 실로 국조(國朝) 이래로 없었던 성대한 일입니다. 대신이 불안한 마음이 있다 하더라도 어찌 감히 나오지 않겠습니까. 신이 삼가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반복하여 타이르겠습니다."
하였다. 이은상이 돌아오니, 상이 곧 불러들였다. 이은상이 아뢰기를,
"신이 성상의 분부를 말로 전하였더니, 허적이 감동해 울며 ‘가까이 모시고 있는 신하가 와서 돈유한 것이 이미 열한 번이나 되었으니, 실로 예전에 듣지 못한 성전(盛典)입니다마는, 신이 끝내 공경히 받들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구구한 염치 때문일 뿐만 아니라 참으로 이미 그르친 나라의 일을 다시 그르칠까 염려해서입니다. 이제 승정원의 장관이 직접 성상의 분부를 받들어 전유한 것이 정성스러웠으며 심지어는 앉아서 기다리겠다는 하교까지 있었습니다. 돌아보건대 신이 어떤 사람이기에 이처럼 망극하여 감히 감당할 수 없는 특이한 은혜를 받는단 말입니까. 신이 정세를 돌아보지 않고 황급히 들어가 사례하여 신하의 분의(分義)를 조금이라도 펴야 할 것입니다마는, 미천한 신의 병이 갑자기 심해져서 곧 명을 받들어 달려가지 못하겠으니, 병이 뜸하기를 조금 기다렸다가 무릅쓰고 나아가겠습니다.’ 하였습니다."
하니, 상이 어의(御醫)를 보내어 병을 보게 하였다. 이에 앞서 승지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위에서 상규(常規)를 탈피하고 마루에 나아가 재촉하여 부르시되 하루에 열 번 사자를 보내신다면, 저 고락을 같이 해야 할 의리가 있는 대신이 어찌 감히 이처럼 예사로 보아넘기겠습니까."
하였는데, 상이 그 말을 옳게 여겼기 때문에 이처럼 전에 없던 특이한 은수가 있었다.

 

12월 18일 을미

밤에 달무리가 목성을 둘러쌌다.

 

윤계(尹堦)를 장령으로, 김환(金奐)을 지평으로 삼았다.

 

죽은 포보(砲保)로서 대신 정하지 못한 자의 올해 거두어들일 베를 특별히 감면하였다. 상이 유혁연(柳赫然)에게 묻기를,
"포보에게 거두어들일 베는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하자, 대답하기를,
"죽은 자에 대해 대신 정하기 전에는 전례대로 거두어들이고 있기 때문에 억울하다고 호소하는 폐단이 없지 않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처럼 전에 없던 큰 기근을 당하였으니, 죽은 자에게 거두어들이는 베는 특별히 감면해 주되 훗날에는 예로 삼지 말아야 할 것이다."
하였다.

 

12월 19일 병신

해에 겹 햇무리가 졌고 안쪽 햇무리에 양이(兩珥)가 있었다.

 

12월 20일 정유

정언 이수만(李壽曼)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생각하는 바를 아뢰었다. 거기에,
"요즈음 정시(庭試)를 시행하기 전에 이미 조제(詔制)를 출제할 것이라는 말이 있으므로 과거를 볼 선비들이 서로 알려주어 다들 옛날에 익혀오던 학업을 버리고 앞다투어 새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신이 처음 듣고서 의심하다가 다시 사람에게 물어 보았더니, 대신이 등대하였을 때 아뢰었다 합니다. 며칠이 지난 뒤에 또 들으니, 대신이 심지어 선비들이 다 조제를 짓고 있다고 다시 아뢰었다 합니다. 애석하게도 어찌 깊이 생각지 않고 이토록 번거로움을 꺼리지 않은 채 아뢰었단 말입니까. 전후에 말한 것이 다 공심(公心)에서 나왔다 하더라도 과장(科場)에 임하여 글의 제목을 명하는 것은 오직 성상의 재량에 달려있고 보면, 누누이 아뢴 일이 옳은지를 신은 모르겠습니다. 참으로 말세의 천박한 버릇을 진정시킬 수 없고 뒷날의 폐단을 열어놓을까 염려됩니다. 또, 생각건대 국가가 불행하여 잇따라 재상을 잃어 육경을 주의(注擬)할 때에 인재가 부족하다고 한탄하고 있으니 특별히 글을 내려 발탁하신 것은 물론 성상의 뜻이 어디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마는, 사람의 타고난 재질이 만 가지로 다르고 글의 문법은 그 쓰임이 각각 다른데, 어찌 다만 문예(文藝)의 명망이 한때 있다는 것으로 대뜸 옥사를 처결하는 직임을 맡길 수 있단 말입니까. 【새 형판 남용익(南龍翼)을 말하는 것이다.】  성상께서 선발하는 판단이 어렵게 여기고 삼가는 방도에 도리어 부족한 것이 있는 듯합니다. 더구나 백성을 기르는 직책을 맡은 자가 관청의 일에 마음을 다하는 것은 그들의 직분이므로 진휼을 잘하였다는 칭찬이 있다 하더라도 모두 포상의 은전을 주는 것은 너무나도 혼잡스러운 것인데, 한 주(州)를 맡은 지 수년 사이에 차서를 뛰어넘어 2품의 벼슬에 오르기까지 하였으니 【원주 목사(原州牧使) 허질(許秩)을 가리킨다.】  조정에서 덕있는 사람에게 명하는 관직을 어찌 이처럼 쉽사리 준단 말입니까."
하였는데, 소가 들어갔으나 답하지 않다가 이때에 이르러 계자(啓字)를 찍어서 내렸다. 이에 앞서 허적이 아뢰기를,
"정시(庭試)의 글 제목을 사륙문(四六文)으로 내면 시골 선비는 붓을 놓을 것이고, 사륙문으로 내지 않으면 서울 선비는 서운해 할 것입니다. 보통 쓰는 문체와 사륙문을 아울러 쓸 수 있는 것으로는 조제만한 것이 없으니, 조제 가운데에서 글 제목을 명한다면 서울과 시골의 선비가 다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고, 그 뒤에 허적이 또 아뢰기를,
"접때 신이 아뢴 말이 곧 퍼져서 과거 공부하는 선비들이 앞다투어 조제를 익히고 있답니다. 신의 경망한 말 때문에 막중한 과거의 일이 이렇게 되고 말았으니, 위에서 미리 유의하셔야 할 것입니다."
하였기 때문에 이수만이 언급한 것이다.

 

집의 신정(申晸)이 상소하여 사직하고 이어서 윤경교(尹敬敎)·여성제(呂聖齊) 등을 변호하였는데, 소가 들어가자 계자를 찍어서 내렸다. 정원이 아뢰기를,
"두 신하는 【이수만과 신정을 가리킨 것이다.】  언론의 책임을 맡고 있는 몸이므로 각각 생각하는 바를 아뢰었는데, 사직하는 상소로 인하여 대뜸 그 벼슬을 갈았으니 대각을 너그러이 용납하는 도리에 어긋나는 듯하므로, 황공하게도 감히 아룁니다."
하니, 상이 답하기를,
"갈 만하면 갈고 그대로 둘 만하면 그대로 두었다. 계사의 뜻은 이해가 안 간다."
하였다.

 

12월 21일 무술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영의정 허적이 상차하여 병을 이유로 파직을 청하니, 상이 답하기를,
"내 뜻은 열두 번의 비답에 이미 다 말하였으므로 나라의 일이 급급하고 내 마음이 당황함을 경이 반드시 헤아렸을 것인데, 경은 어찌하여 이토록 사양하는가. 경의 병을 내 매우 염려하거니와 시골은 황량하고 의약이 갖추어져 있지 않을 것이니, 여러 번 하유한 비답을 체득하여 안심하고 들어와 희망에 따르라."
하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12월 22일 기해

원양 감사(原襄監司) 안진(安縝), 전라 수사(全羅水使) 민섬(閔暹)이 조정을 하직하니, 직접 만나보고 타일러 보냈다.

 

승지 맹주서(孟胄瑞)를 영의정 허적에게 보내어 전유하기를,
"아, 나라의 일이 이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할 바를 모르는 내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 있겠는가. 경이 이미 조정에 나오겠다고 허락하였는데 요즈음 신병으로 인하여 아직도 들어오지 못하고 있으니, 내 근심이 또한 어떠하겠는가. 더구나 이제 사신이 강을 건넜으므로 모든 일도 반드시 세밑 전에 의논하여 정해놓아야 눈앞의 급한 것을 구제할 수 있을 것인데, 오늘 내일 점점 지체하게 되면 일을 반드시 해내지 못할 것이니, 어찌 한단 말인가. 여기까지 생각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놀라고 기가 막힌다. 경은 애타게 기다리는 뜻을 몸받아 내일 일찍 들어와 나라의 일을 구제하라."
하였는데, 이튿날 허적이 들어왔다.

 

도목정(都目政)을 행하였다. 이혜(李嵆)를 발탁하여 동부승지로 삼았는데, 아장(亞長)의 예로 인하여 의망한 것이다. 이유상(李有相)을 응교로, 임규(任奎)를 정언으로, 이하(李夏)를 교리로, 윤증(尹拯)을 진선으로, 이숙(李䎘)을 경상 감사로, 이정(李晸)을 능주 목사로 삼았다. 이정은 금산 군수로서 그 고을의 도둑 이광성(李光星) 등 50여 인을 붙잡았는데 조정에서 그의 공과 능력을 아름답게 여긴 것이다. 허적이 아뢰기를,
"금산 도둑의 남은 무리 중에 수령을 살해하려는 자가 있다 하는데 대개 이정이 마음을 다하여 뒤쫓아 붙잡았으므로 도둑들이 다 미워하고 원망하기 때문입니다. 신은 다른 고을로 옮겨 제수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하고, 민정중(閔鼎重)도 말하니, 상이 옳게 여겨 이 벼슬로 옮겨 제수하였다.

 

12월 23일 경자

상이 대신과 비국의 재신들을 인견하였다. 상이 허적에게 이르기를,
"인심이 좋지 않아서 나라의 형세가 위급한 이때에 경으로 하여금 자리에 편안히 있지 못하게 하였다. 나라의 일을 생각할 때 매우 답답하기만 하였는데 경이 이제 들어오니 병중의 마음이 크게 위안된다."
하자, 허적이 아뢰기를,
"신이 재주와 덕은 없으나 원하는 것은 오직 정성을 다하여 나라에 보답하는 데에 있는데 문서의 업무도 받들어 이행하지 못하여 간관의 탄핵을 받기까지 하였으므로 일찍 물리치어 고향에 돌아가 죽게 하셔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이번 잘못 내린 은혜는 실로 예전에 없던 것이므로 신하 분수에 있어 다른 것을 돌아볼 겨를이 없어서 무릅쓰고 들어왔습니다. 다만 생각건대 변변치 못한 신으로 인하여 성상의 덕에 누를 끼쳤습니다. 간관을 외직에다 보임한 것만도 이미 지나쳤는데 금수(禽獸)라는 등의 말씀에 있어서는 더욱 미안한 바가 있습니다. 간관이 논한 것이 혹 사실과 어긋났다 하더라도 너그러이 용납하셔야 됩니다. 벌을 주신다면 만약 신이 참으로 범한 것이 있더라도 필시 말하는 자가 없을 것이니, 이는 참으로 언로에 방해되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경이 말하지 않아도 내가 경의 마음을 이미 알고 있다."
하였다.

 

온 가족이 죽어서 휼전(恤典)을 거행한 무리를 조사해내어 올해에 준 적곡(糴穀)을 특별히 감면해 주라고 명하였다. 당초에 조정에서 서울이나 지방에 온 가족이 모두 죽은 자를 뽑아내어 휼전을 베풀었다. 이윽고 묘당의 의논들이, 온 가족이 죽은 자 가운데에도 이웃이나 겨레붙이나 전토가 있는 자가 있으므로 그들이 먹은 적곡은 탕감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날 인견 때에 사간 이합(李柙)이 일체로 감면해 주자고 청하고 민정중(閔鼎重)이 이미 휼전을 베푼 무리를 살펴 조사해내어 탕감해 주자고 청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영남에 기근이 심하여 어영군(御營軍)으로서 뿔뿔이 흩어진 자가 많이 있기 때문에 스스로 입번(立番)하기를 바라는 것을 받아들였다. 영부사 정태화(鄭太和)가 아뢰기를,
"영남 좌도(左道)는 기근이 더욱 심하므로 어영군 중에서 굶주리는 자는 반드시 스스로 입번하기를 바랄 것이니, 이제 올라오도록 허락하여 봉료(俸料)를 주어 구제해야 하겠습니다."
하고, 허적도 옳다고 하였는데, 민정중이 아뢰기를,
"구제하려면 어찌 좌우도를 구별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니, 상이, 영남 좌우도에 아울러 분부하고 또 호남의 군사도 혹 소문을 듣고 올라오는 자가 있으면 일체로 받아서 구제하라고 명하였다.

 

전라도 연해안 각 고을의 수미(收米) 2천 석으로 제주(濟州)의 굶주린 백성을 진구하라고 명하였다. 이에 앞서 이하(李夏)가 본도(本島)에서 돌아와 말하기를,
"나올 때에 온 섬의 백성이 통곡하며 전송하면서 ‘우리들이 이제까지 살아 있는 것은 모두가 국가의 그지없는 혜택인데, 이제는 국가에서도 우리들을 살릴 힘이 없으니, 우리들은 장차 모두 죽음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하였는데, 허적이 이 말을 상에게 보고하여 아뢰기를,
"지금 제주 백성의 형세는 한 시각이 급하니, 쌀을 빨리 실어보내야 구제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김수흥(金壽興)은 호남에 있는 훈국(訓局)의 둔전(屯田)과 태복(太僕)의 목장(牧場) 등 여러 곳의 겉곡식으로 진구하기를 바라고, 민정중은 연해안 각 고을의 수미를 덜어서 구제하기를 청하였는데, 허적이 아뢰기를,
"먼저 수미를 보내어 서둘러 구제하고 이어서 겉곡식을 실어보내 종자의 밑거리를 도와주는 것이 낫겠습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양서(兩西)의 쌀과 콩 모두 2만 석을 배로 실어다가 경비에 보태라고 명하였다.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경비가 바닥이 났으므로 반드시 미리 요리해야만 떨어질 걱정을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양서가 아니면 달리 가져다 쓸 곳이 없는데, 관서(關西)는 진휼청에 계하(啓下)된 것이 이미 3만 석이나 되니, 해서(海西)의 쌀과 콩 각각 5천 석과 관서의 쌀 1만 석을 얻어서 보태쓰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12월 24일 신축

제주 선유 어사(濟州宣諭御史) 이하(李夏)의 서계(書啓)에 따라 특별히 명하여 노정(盧錠)에게 가자(加資)하고 전 판관(判官) 최진남(崔鎭南)에게 준직(準職)을 제수하였는데, 노정은 정성으로 백성을 구제하고 최진남은 백성에게 사랑을 끼쳤기 때문이다. 정의 현감(旌義縣監) 이송로(李松老)에게도 진휼을 잘하였기 때문에 아마(兒馬)를 내렸다. 전 대정 현감(大靜縣監) 정태주(鄭台周)는 진휼의 정사를 간사한 아전에게 일임하였으며 또 탐욕을 부려 법을 어긴 죄가 많았으므로 금부에 내려 30여 차례 형추하고 사형을 감면하여 정배(定配)하였다. 이하가 또 본도의 갖가지 폐단과 내사 노비의 신역(身役)이 무거워서 지탱하기 어려운 정상에 대해 조목조목 아뢰었는데, 변통하고 감면한 일이 자못 많았다.

 

12월 27일 갑진

이민적(李敏迪)을 도승지로, 권기(權愭)를 지평으로, 신정(申晸)을 부교리로 삼고, 맹만택(孟萬澤)에게 신안위(新安尉)의 작호를 내렸다. 맹만택은 맹주서(孟胄瑞)의 아들인데 장차 상의 딸 명선 공주(明善公主)에게 장가가기로 되었기 때문이다. 그 뒤에 공주가 미처 시집가기 전에 죽었으나 상이 차마 그 작호를 파하지 못하였다. 대간이 육례를 행하지 않았다 하여 도로 그 작호를 거두기를 힘껏 청하였는데 여러 번 아뢰어서야 따랐다.

 

12월 29일 병오

이때 겨울철이 이미 다가고 날씨도 항상 따뜻하여 강의 얼음이 얼려다가 도로 풀렸기 때문에 동빙고와 서빙고에서 저장하는 얼음을 다 강의 그늘진 곳에서 배로 가져오니 물력이 여느 해보다 배나 들었다.

 

12월 30일 정미

태백성이 낮에 나타났다.

 

제주(濟州)의 유생(儒生) 김계륭(金繼隆)·김계창(金繼敞)에게 곧바로 전시를 볼 수 있는 자격을 주었다. 이하가 시취(試取)하여 온 입격자(入格者)가 이 두 사람 뿐이었으므로 이러한 명이 있었다.

 

이달에 각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자의 수가 모두 1천 1백 60여 인이었으며 물에 빠지거나 범에게 물리거나 도둑에게 해를 입어 죽은 자도 많았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