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일 무신
정언 임상원(任相元)이 아뢰기를,
"음관(蔭官)으로서 주부(主府)의 수령이 되는데 있어서는, 차례로 두루 시험하여 성적이 있거나 청렴함과 능력이 본래 뚜렷이 드러난 자가 아닐 경우 함부로 제수해서는 안 됩니다. 그런데 회양 부사(淮陽府使) 권세경(權世經)은 처음 낭관(郞官)에서 곧바로 군수에 임명했다가 별다른 치적의 성과가 없는데도 부사로 옮겼으니, 저 정사를 잘하면 상을 주어야 할 사람들에게 장차 어떻게 대우하시렵니까? 밀양 부사(密陽府使) 임윤석(任允錫)은 성품이 본디 자잘하고 더러우며 글이나 글씨에도 모두 보잘것이 없는데, 발탁하여 큰 고을에 제수하였으므로 여론이 크게 놀라고 있습니다. 청컨대 권세경은 개정(改正)하고, 임윤석은 파직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고 이르기를,
"임윤석만 체차하라."
하였는데, 권세경의 직임을 개정하라는 청은 다음날에야 따랐다.
1월 2일 기유
약방(藥房)에게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도제조 허적(許積)이 아뢰기를,
"근래 일기가 좋지 않은데 성상의 건강이 어떠하십니까? 수라를 자꾸 적게 드신다고 하니, 걱정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오늘 들어와 진찰하라는 것은 증세를 의논해 보려고 한 것이다. 동지(冬至) 후부터 기운이 여전히 위축되어 수습을 할 수가 없으며, 항상 한기(寒氣)가 있어 간혹 창을 열어 놓으면 마치 얇은 옷을 입고 밖에 나간 것과 같다."
하였다. 제조 정지화(鄭知和)가 아뢰기를,
"하천고(霞天膏)를 처음 달일 때는 입에 댈 수 없을 것만 같았는데, 고약이 되고 보니 먹을 만하였습니다."
하였다.
병조 판서 민정중(閔鼎重)이 아뢰기를,
"오늘 성적을 평가할 때, 정초 중군(精抄中軍)인 전동흘(全東屹)이 감기가 매우 심해 아문(衙門)에 나오지 못해서, 중(中)을 맞고 말았습니다. 무사(武士) 한 사람이지만, 인재를 등용하는 데 관계되기 때문에 감히 이렇게 아룁니다."
하고, 허적이 아뢰기를,
"민승(閔昇)도 발탁해 쓰라고 하신 명이 계셨으나, 현재 하등(下等)의 고과를 삭제해 주라는 하교는 없으셨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동흘이 중을 맞은 것과 민승이 하를 맞은 것을 모두 삭제하라."
하였다.
북부(北部) 망원정(望遠亭) 곁에 본래 배를 매두는 크고 작은 두 개의 바위가 있었다. 큰 바위는 애초 강변의 조수(潮水)가 들락거리는 지점에 있어 육지로부터 15보쯤 떨어져 있었는데, 이날 밤에 갑자기 물 아래로 70보쯤 옮겨 갔고, 작은 바위는 애초 큰 바위 옆에 있었는데, 물 아래로 30보쯤 옮겨갔다. 또 애초에는 어느 곳에 있었는지 모를 바위 하나가 물가의 다른 바위 근처로 나왔는데, 그 크기가 항아리만하였다. 허적이 아뢰었다.
"지금 이 바위가 옮겨간 변괴는 놀라움을 금하지 못하겠습니다. 요즈음 인심이 매우 나빠서 혹 뜻밖의 일이 없지 않을까 여겨졌기 때문에 신이 부관(部官)001) 을 불러서 사람의 힘으로 움직일 수 있는지의 여부를 물었더니, 가장 작은 바위도 움직이기가 어렵다고 하였습니다. 지난 을해년간에도 해서(海西)002) 에서 석변(石變)이 있고서 병자년의 병화가 있었으니, 어찌 두렵지 않겠습니까?"
1월 3일 경술
박지(朴贄)를 사간으로, 이민적(李敏迪)을 예조 참판으로, 이우정(李宇鼎)을 병조 정랑으로, 이합(李柙)을 수찬으로, 이지원(李枝遠)을 통제사로 삼았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는데, 양사와 옥당도 입시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수라를 드시기 싫은 증세가 전에 비해 어떠하십니까?"
하니, 상이 이르기를,
"마찬가지이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여쭈어서 결정해야 할 일이 매우 많은데, 성상께서 편찮으시어 하루 종일 응수하시기가 어려우니, 긴급한 일부터 먼저 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러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우의정 송시열(宋時烈)의 상소 중에 진술한 일에 대해 일찍이 탑전에서 결정하라는 하교가 계셨으니, 이제 마땅히 여쭈어서 처리해야겠습니다. 그의 소에 ‘재해로 피해를 본 현지를 직접 살필 때 수령을 파면하는 법을 잠시 바꾸어 복심(覆審)하는 관원을 많이 파견하되, 그 기한을 여유있게 주어 한두 곳을 뽑아 살피게 합니다. 그리하여 그들의 간사한 짓을 일체 무겁게 추궁하여 아전들이 뇌물을 받고 농간을 부리는 폐단을 막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마땅히 그의 소에 의해 고을의 대소에 따라 경차관(敬差官)을 세 명이나 또는 네 명을 차출하여 자세히 살필 수 있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다만 수령에게 벌을 시행하지 않는다면, 수령들이 더욱 재해의 실상을 파악하는 데 유의하지 않을 것이니, 신은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하고, 호조 판서 김수흥(金壽興)이 아뢰기를,
"경차관으로 하여금 빠진 것의 다소대로 죽 기록하여 아뢰도록 한 다음 본조에서 그 경중을 참작하여 성상께 여쭈도록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따르고 이르기를,
"수령은 경차관이 직접 파직하지 말도록 하라."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의 소에 ‘대동미(大同米)는 기유년의 결수에 따라 받아들이지 말고 금년의 결수에 따라 받아들이되, 기유년의 결수는 풍년이 들기를 기다렸다가 뒤에 징수하소서.’ 하였는데, 신과 정태화(鄭太和)의 뜻도 이와 같습니다. 소의 말에 따라 시행하는 것이 편리하겠습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그의 소에 ‘한번 흉년을 겪고나자 풍속이 점차 변하여, 부모가 죽었는데도 태연히 곡할 줄도 모르는가 하면 혹은 전혀 시신을 수습하지 않는 자도 있으며, 혹은 술을 마시거나 고기를 먹는 자도 있으니, 조정에서 잘 일깨우고 거듭 밝혀서 여러 고을에 반포해야겠습니다. 그리하여 아직 장사지내지 않은 자는 장사를 지내게 하고, 복(服)을 입지 않은 자는 소급해 복을 입도록 하여 그들과 더불어 새로운 시작을 해야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장사를 지내지 않거나 복을 입지 않고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는 자는 엄히 형법을 시행하여 두려운 바를 알게 함으로써, 인륜을 밝히소서.’ 하였습니다. 기근이 인심을 무너뜨리고 천리(天理)를 상실하게 함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으니, 진실로 한심한 일입니다. 일체 상소의 말에 따라서 각도에 알리어 착실히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승지 맹주서(孟胄瑞)가 아뢰기를,
"엊그제 하교에 윤경교(尹敬敎)를 금수(禽獸)라 하고 여성제(呂聖齊)를 기망(欺罔)했다고 하신 말씀은 너무 지나치신 듯합니다. 전에 인조께서도 정원에 하교하시기를 ‘자기에게 동조하는 자는 행실이 개돼지 같아도 등용한다.’고 하신 적이 있었는데, 그뒤 경연에서 ‘아랫사람을 접할 때는 공손할 것을 생각한다[接下思恭]’는 구절003) 을 강하는 데 이르자 후회하시며 이르시기를 ‘내가 실언을 했다.’ 하시고는 즉시 고치라고 명하였습니다. 대성인(大聖人)께서 잘못을 고치기에 인색하지 않은 훌륭한 덕이 이와 같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성제에 대해서 상께서는 기망한다고 의심하십니다만, 만약 성제가 애초 기망하지 않았는데 억울하게 죄명을 받았다면, 어찌 매우 원통하지 않겠습니까. 오랫동안 가까이 모시던 신하는 진실로 가긍히 생각해 주셔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비망기 가운데 ‘금수’ 두 글자는 고치도록 하라."
하였다. 대사헌 강백년(姜栢年) 등이 아뢰기를,
"통영(統營)은 풍토가 좋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모두 싫어하여 갔다가 곧바로 돌아와서 마치 역사(驛舍)와도 같습니다. 해안 방어의 중요한 곳이 나날이 허술해지고 있으니, 매우 한심스러운 일입니다. 통제사 신여철(申汝哲)은 임지에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병으로 체직되었으니, 오래 맡겨서 효과를 책임지운다는 뜻이 없습니다. 그대로 맡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으면서 이르기를,
"만약 싫어서 피하였다면 마땅히 그 죄를 다스려야 할 것이다. 어찌 그대로 맡기는 것으로 끝낼 일이겠는가. 만약 그의 병세가 위중하다면 임소(任所)에서 죽게 해서는 아니될 것이다."
하였다. 이보다 앞서, 민정중이 ‘여철이 풍토병을 매우 심하게 앓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으니, 젊은 무신(武臣)이 정말 애석하다.’ 하였고, 허적 역시 변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으므로 상이 그의 직책을 갈라고 명하였다. 그래서 헌부가 여러 차례 아뢰었으나, 따르지 않은 것이다.
강도 세 명 이상을 잡은 자에게는 자급(資級)을 올려 주되, 조대립(趙大立)과 같이 큰 죄를 지은 자를 잡았을 경우에는 숫자에 구애받지 말고 올려주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으라고 명하였다. 이는 민정중의 말에 따른 것이다.
1월 4일 신해
경기·충청·전라도에서 올 봄에 거둘 쌀에 대해 1결당 두 말씩을 줄이고, 금년에 식년(式年)으로 시행할 각사의 노비를 추쇄(推刷)하는 일을 정지하도록 명하였는데, 흉년이 크게 들었기 때문이다.
상이 중완혈(中脘穴)에 뜸을 떴다.
1월 5일 임자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상이 편찮았기 때문에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서(勅書)를 영접하는 일과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서를 받는 등등의 예절을 친히 거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상 허적을 홍제원(弘濟院)에 보내 대통관(大通官)을 통해 편전에서 칙서를 받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허락하였다.
청나라가 사신을 보내 조서를 반포하였는데, 천하를 통일한 것을 자랑하기 위해서였다. 이때 상이 편찮았기 때문에 모화관(慕華館)에서 칙서(勅書)를 영접하는 일과 인정전(仁政殿)에서 칙서를 받는 등등의 예절을 친히 거행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영상 허적을 홍제원(弘濟院)에 보내 대통관(大通官)을 통해 편전에서 칙서를 받도록 해 달라고 요청하였는데 청나라 사신이 허락하였다.
대사헌 강백년이, 원양 도사(原襄都事) 유지발(柳之發)이 회양 부사(淮陽府使)의 직임에 제수된 것은 갑작스러운 승진이라고 하여 개정할 것을 청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1월 6일 계축
상이 중완혈에 뜸을 떴다.
경상도가 낼 신해년 조의 공물 50여 조를 감하도록 하였다. 이는 본도가 재해를 특히 심하게 입었기 때문이다.
1월 7일 갑인
청나라 사신이 우리 나라의 오래된 명필(名筆)을 얻고자 하였는데, 도감(都監)이 없다고 답하였다. 또 고 판서 오준(吳竣)의 글씨와 현재 조정 인사 가운데 글씨를 잘 쓰는 사람의 글씨를 요구하자, 오준이 쓴 글씨 몇 장을 얻어서 주고 또 조정 인사 가운데 글씨를 잘 쓰는 8 인으로 하여금 글씨를 쓰게 하여 주었다.
1월 7일 갑인
원양도의 강릉(江陵) 등 세 고을의 각종 곡물 5천 7백 70여 석으로 영남(嶺南)의 이전곡(移轉穀)을 대신 갚게 해 좌도(左道)의 재해 당한 고을을 구휼하라고 명하였다. 이는 영상 허적의 말을 따른 것이다.
1월 9일 병진
사간 박지(朴贄) 등이 아뢰기를,
"진휼의 정사는 반드시 먼저 계획을 짜서 두서가 있게 해야만 때가 닥쳤을 때 궁색하게 서두르는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임기가 다 된 수령들을 오는 가을까지 그대로 유임시키게 한 뜻은 우연한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근래에 들어 혹 내직(內職)에 제수되거나 혹 타도(他道)로 옮기고 있으므로 구휼을 처리하는 계획이 중도에 그쳐버리고 병과 기근에 시달린 백성들이 다시 수령을 맞이하고 보내는 일에 곤욕을 치르고 있습니다. 내직이나 외직으로 옮겨 제수된 수령들을 모두 유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연월을 가리지 않고 모두 유임하라고 청하니, 그 뜻을 모르겠다."
하고, 따르지 않았다.
장령 윤계(尹堦), 지평 김환(金奐) 등이 아뢰기를,
"지난해 기근에 백성들이 죽은 참상은 팔도가 모두 같지만, 그중에서도 삼남(三南)이 더욱 심했는데 영남이 가장 심했습니다. 그런데 이번 조사해 올린 장계에 의하여 혹은 구휼을 잘했다는 것으로, 혹은 별도로 곡물을 마련하였다는 것으로써 옥관자의 상까지 받은 자가 타도에 비해 많습니다. 구휼을 잘하고 별도로 준비한 곡물이 과연 장계와 같았다면, 영남 백성들의 죽음이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겠습니까. 하급 관리들이 농간을 부리는데도 수령들이 그 실정을 살피지 않고 감사들이 기만을 당한 데 대해 남녘의 백성이면 분노하지 않는 사람이 없으니, 뒷날의 폐단이 상을 지나치게 주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것입니다. 청컨대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다시 실적을 조사해서 아뢰게 한 다음 그중에서 뚜렷이 드러난 한두 사람만 가자(加資)하고, 나머지는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1월 10일 정사
정언 임상원(任相元)과 사간 박지(朴贄)가 ‘연한을 가리지 않고 모두 유임하라고 한 뜻을 모르겠다.’는 분부를 받았다는 이유로 인피하여 면직되었다.
1월 11일 무오
햇무리가 지고 양이(兩珥)가 있었다.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청도 군수(淸道郡守) 유비(兪柲)가 행한 구황 정사의 성적이 도내에서 으뜸이었다. 암행 어사 신정(申晸)이 사실을 써서 아뢰고 본도에서 또 포상하자는 장계가 있었으므로 상이 통정 대부의 품계를 추증하라고 특별히 명하였다. 개령 현감(開寧縣監) 이시현(李時顯) 역시 구황을 잘하였다고 하여 준직(準職)을 제수하도록 명하였다. 신정이 또 남해 현감(南海縣監) 임식(任湜)이 불법을 저지른 사실을 아뢰니 해조가 법사(法司)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자고 청하였는데, 상이 일렀다.
"만약 문서로 뚜렷이 파악된 일이 아닐 경우 잡아다 문초하지 않기로 이미 법에 정해져 있는데, 이제 법사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자고 하니 자못 받들어 이행할 의사가 없다. 해당 당상과 낭관을 무겁게 추고하고 임식은 파직만 하되,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하라."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의 비각(碑閣)을 보자고 청하자, 조정에서 삼전도가 남한 산성과 멀지 않기 때문에 혹 말을 타고 가서 남한 산성을 보지나 않을까 우려하여, 대통관을 시켜 중지하게 하기를,
"얼음이 풀려서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니, 청나라 사신이 성내며 말하기를,
"강의 얼음이 단단하지 않다면 나루터에서 바라보고만 오겠다. 나루터에다 대략 조촐한 음식을 차려야겠고 또 소 한 마리만 주라. 그러면 요기를 할 수가 있을 것이다."
하고는 마군(馬軍) 1백 명을 정비하도록 한 다음 달려가서 비각을 보고 왔다. 대개 청나라 사신이 실은 남한 산성을 가 보려는 생각이 없었는데, 조정에서 지레 걱정을 한 것이다.
1월 12일 기미
광주 부윤(廣州府尹) 이동직(李東稷)이 파면되었다.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에 갈 때 소를 잡는 자를 대기시키지 않았으므로 도감이 죄주기를 청한 것이다.
상이 의관에게 들어와 진찰하라고 명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평안 감사의 장계를 보니, 국경을 넘어 금령을 범한 자에 대해서 앞장선 자는 처참하고, 그 나머지는 귀양보내자고 청하였습니다. 그런데 단지 앞장선 자만 처참한다면 장차 법을 두려워하게 할 수 없고 그렇다고 5, 6인을 효수한다는 것 역시 측은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앞장선 자는 처참하고, 그 나머지는 세 차례 엄히 형신을 가하라."
하였다.
1월 14일 신유
함경도에 재해를 당한 각 고을의 전세·공물 및 노비의 신공(身貢)을 감면해주도록 하고, 황해도에서 가장 재해를 심하게 당한 산간 고을은 모든 신역(身役)을 감해주도록 하고, 해주 등 다섯 고을은 3분의 1을 감해주도록 명하였다.
1월 15일 임술
상이 희정당에서 청나라 사신을 접견하였다.
1월 16일 계해
이합(李柙)을 사간으로, 이옥(李沃)을 지평으로, 오두인(吳斗寅)을 장령으로, 이경억(李慶億)을 대사헌으로, 이인환(李寅煥)을 정언으로 삼았다.
1월 17일 갑자
청나라 사신이 돌아갔다. 호조 판서 김수흥이 아뢰기를,
"상사(上使)는 청나라 황제의 시위(侍衛) 6백 명 가운데서도 엄선한 28명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므로 의례적으로 주는 것 이외에 별도의 선물을 주어 생색을 내야겠습니다."
하니, 상이 허락하였다.
1월 18일 을축
승지 맹주서가 아뢰기를,
"비국의 회계에 대해 판부(判付)하신 것을 보니, 금산(錦山)의 적인(賊人) 우준생(禹俊生) 등 18명과 김예운(金禮云) 등 8명은 마땅히 법에 따라 처단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우준생 등은 이미 여러 곳에서 도적질을 하였고 또 함께 용담(龍潭)에서 변고를 일으킬 모의를 했으니, 전형(典刑)을 분명히 보여주는 것이 법에 있어서 당연합니다. 그러나 예운 등 8명에 있어서는 함께 용담에 가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어떤 일로 가는 것인 줄 모르고 갔으니, 우준생 등과는 실정이 다르며, 박윤산(朴允山) 등과 비교하면 서로가 터럭만큼이나 차이가 날 뿐입니다. 그런데 윤산은 정배되고 예운 등은 효시를 당하게 되었으니, 당초 성상의 분부에 이른바 ‘혹 실정을 미처 알지 못하고 협박을 받아 따른 무리가 없지 않을 것이니, 구별해서 아뢰라.’ 하신 뜻과 크게 어긋난 바가 있습니다. 본도가 등급을 나누어 아뢰고 해조가 엄한 형벌만 주자고 청한 것은 실로 이 때문입니다. 신이 해방(該房)에 있기에 감히 품은 생각을 아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함께 간 것과 가지 않은 것과는 차이가 크다. 윤산 등과 터럭만큼이나 차이가 난다고 한 것은 자세히 살피지 못한 것 같다."
하였다.
이조 판서 김수항(金壽恒)이 아뢰기를,
"안동 부사(安東府使) 이규령(李奎齡)을 교리에 옮겨 임명했는데, 대간이, 구황의 정사가 급하다는 이유로 재해를 입은 고을의 수령 중에 내직이나 외직으로 옮겨 제수된 자들을 전직에 그대로 유임시키자고 청하였습니다. 안동이 비록 특히 심하게 흉년이 든 고을은 아니지만, 땅이 넓고 사람이 많으므로 구황의 조치를 펴야 할 일이 없지 않을 것이니 마땅히 똑같이 유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미 논사(論思)하는 직임에 임명하여 사체에 관계되므로 역시 아래에서 선뜻 요청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니, 상이 규령을 유임시키라고 하였다. 병판 민정중이 아뢰기를,
"들으니, 안흥 첨사(安興僉使) 이정완(李挺完)이 전임지인 양지(陽智)에서 해유(解由)을 제출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해유를 제출하지 않으면 의망할 수 없게끔 법으로 정해져 있습니다. 그러나 변장(邊將)의 경우는 이 법에 구애받지 않고 의망에 넣어 차출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역시 근래의 예입니다."
하니, 허적이 아뢰기를,
"정중이 지금 일정한 규식으로 삼고자 이것을 진달한 것입니다. 그러나 법은 바꿀 수 없습니다."
하니, 상이 정완을 체차하라고 하였다.
1월 19일 병인
큰눈이 내렸는데 한 자 남짓 쌓였다. 서울의 산과 각릉(各陵)의 소나무가 눌려 부러진 것이 매우 많았다.
영상 허적이 병으로 차자를 올려 제사(諸司)의 제조(提調)와 내국(內局)의 직임을 먼저 면직해주기를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0일 정묘
왕세자 가례(嘉禮)에 따른 별시(別試)의 규정은 정묘년의 예에 따라 거행하기로 하였다. 초장(初場)에서는 논(論)·부(賦)로 편을 갖추고, 종장(終場)에서는 책문(策問)과 강경(講經)을 시험 보이되, 강경은 사서(四書) 가운데 일서(一書)을 뽑아 시험보이고, 삼경(三經) 중에서는 본인이 원하는 일경(一經)을 시험보여 6백 명을 뽑기로 하였다. 서울은 양소(兩所)로 나누어 각기 1백 50명을 뽑고, 경기는 40명을 뽑되 전례에 의해 경시(京試)와 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 그 나머지 2백 60명 이내에서 전라도와 충청도는 각 50명을, 경상도는 60명을, 원양도와 평안도는 각 30명을, 함경도와 황해도는 각 20명을 뽑도록 하였다.
장령 정화제(鄭華齊)가 아뢰기를,
"지난번 청나라 사신이 삼전도에 갈 때 소를 잡는 사람을 대기시키지 못하여 부윤 이동직이 파면을 당하기까지 하였습니다. 대개 들으니, 본부(本府)의 감색(監色)으로 각기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물러가 있었고 동직이 거느리고 간 군관(軍官)과 이졸(吏卒)들도 모두 숨어버려 그때에 임해 군색함을 초래했다고 합니다. 고의로 일을 일으킨 자취가 불을 보듯이 훤하니, 청컨대 본도의 감사로 하여금 그 날 감색 이하와 군관·이졸들을 조사하여 무겁게 다스려 징계하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영상 허적이 차자를 올려 면직해 달라고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고, 사관을 보내어 전유하였다. 이 뒤로 잇따라 사양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경상 감사 이숙(李䎘)이 하직 인사를 드리니, 인견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영남 일도가 매년 가뭄이 들고 있으니 원한을 품고 풀지 못한 자가 있지 않겠는가? 경은 찾아서 아뢰어라."
하니, 이숙이 대답하기를,
"감히 명하신 대로 하지 않겠습니까."
하였다.
1월 21일 무진
헌부가 논계하기를,
"훈국의 마병 각초(馬兵各哨)들이 자기의 청에서 외임(外任)으로 가는 자를 전별하기 위해 군졸들을 침탈하여 잔치를 열기까지 하고 있습니다. 청컨대 해당 마병(馬兵) 별장(別將)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특별히 도감으로 하여금 곤장을 치도록 하였다. 별장 정후량(鄭后亮)이 곤장 15대를 맞았다.
어영청이 아뢰기를,
"본청에서 철물(鐵物)을 실어 나르기 위해 쓰는 배가 장연(長淵)에 있습니다. 그런데 신이 들으니, 본 고을에서 소금을 구울 나무를 베어오기 위해 해도(海島)에 들여 보냈다가 바람을 만나 부서지는 바람에 사공 13명이 한꺼번에 물에 빠져 죽고 배 역시 간 곳을 모른다 합니다. 신이 본 고을에 공문을 보내 그 뱃사람을 보내라고 하였더니, 죽은 사람의 형을 대신 보내어 거짓으로 살아 남았다고 하여 죄를 면하려고 꾀하였습니다. 앞뒤로 속이는 정상이 하나 하나가 놀랍습니다. 장연 부사 권논(權碖)을 파직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권논을 잡아다 문초하여 처리하라."
하였다.
1월 22일 기사
조원기(趙遠期)를 장령으로 삼았다.
1월 23일 경오
호판 김수흥(金壽興)이 병으로 상소를 올려 면직을 청하였으나, 상이 허락하지 않았다.
1월 24일 신미
우상 송시열(宋時烈)이 소를 올려 사직하였다. 그 대략에,
"대간(臺諫)이 매양 ‘전하께서 대신을 신임하여 대신의 자임(自任)이 무겁다.’고 한다는데, 이는 성현(聖賢)의 교훈을 강구하지 않고 세속의 견해에만 이끌려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의 상소에서 이른바 ‘곧바로 그 잘못을 말해야 한다.’고 하고 그 아래에 ‘대신을 바꾸어야 한다.’고 운운하였는데 이는 가설적인 말로서 대개 대신이 적임자가 아닐 경우 대간이 왜 곧바로 배척하여 바꾸자고 청하지 않고, 말할 듯하다가 말하지 않으면서 마치 입에 아교나 옻칠을 머금은 것처럼 우물쭈물하는 습관을 가지고 있느냐는 것입니다. 이는 간신(諫臣)의 대체를 개략적으로 말한 것이지 대신이 꼭 적임자가 아니라고 여겨 반드시 바꾸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비록 가설적인 말이라 하더라도 역시 말할 수 없는 것인데 끝내 감히 말하고 만 것은 연유가 있었습니다. 고 판서 서필원(徐必遠)은 지금 상신(相臣)의 지기지우(知己之友)입니다. 【상신은 곧 허적을 지목한 것이다.】 그가 빨리 닮기를 원하는 마음을 심지어 도부(桃符)004) 의 축문에 드러내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의(義)를 사모함이 무궁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그가 불충하다고 상소를 올려 배척하고 말았습니다. 대체로 불충이란 신하의 큰 죄입니다. 보통 인정으로 말한다면, 지기지우가 이런 말로 뒤집어 씌웠을 경우 그 유감스러움이 필시 다른 사람보다 더 심할 것인데, 상신(相臣)은 유연한 얼굴빛과 태연한 마음으로 조금도 개의치 않고 편안히 받아들였습니다. 신이 일찍이 그의 넓은 도량에 감복하여 대신의 체통은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때문에 감히 상소 끝에 언급하면서 조금도 고려하지 않고 마음 속으로 말하기를 ‘비록 내가 그의 결점을 공박하더라도 필시 마음에 두지 않을 것인데, 하물며 이 운운한 말은 그리 크게 비판하는 것이 아니니, 말할 것이 있겠는가.’ 하고는 솔직하게 써서 올렸던 것입니다. 신의 상소가 들어갔다고 들은 지 이미 여러 날이 되었으나 과연 아무 말이 없기에 신은 스스로 예상했던 바가 빗나가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뒤에 들으니, 그가 인피하고 들어간 일이 있었고 성상께서는 이는 사실 신이 망령된 말을 한 것에서 말미암은 것으로 여기신다고 하니, 신의 죄는 이미 말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거기다가 윤경교(尹敬敎)의 상소가 틈을 타고 나와 그를 이루 말할 수 없이 공격 배척하였는데, 이는 실로 신이 아는 바가 아니었고 또 신이 예상한 바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성상께서 또 그 말이 신의 뜻과 부합되며 또 신이 ‘입에 아교나 옷칠을 머금은 것처럼 우물쭈물한다.’고 비난한 데서 격발된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죄는 경교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실로 신에게 있는 것입니다.
지금 의논하는 자들이 성상의 말씀을 빌미삼아 비난이 고슴도치 털처럼 일어나, 신은 뿌리이고 경교는 가지라고 하는데, 그 형적을 따져 보면 진실로 그렇습니다. 그렇다면 성상의 분부에 이른바 경교의 흉악하고 교활함은 바로 신의 흉악하고 교활함이고, 경교의 간사함은 바로 신의 간사함이고 경교가 금수(禽獸)와 같다 함은 바로 신이 금수가 되는 것입니다. 지금 신을 욕하는 자들은 심지어 신이 은밀히 경기도 부근에 와서 경교와 서로 약속을 하고 돌아갔다고들 합니다. 이와 같이 하였다면 이는 신이 경교와 함께 물여우와 같은 짓을 한 것이니 실로 차마 입에 담을 수도 없는 것입니다.
신의 말이 과연 어리석고 망령되어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분란만을 만들 뿐이라면, 성상께서는 마땅히 불가하다는 뜻을 보이셔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짐짓 너그럽게 봐주고 총애해 주시니, 대성인(大聖人)이 아랫사람을 이와 같이 대해서는 안 됩니다. 빨리 신을 체직하시고, 이어 신의 죄를 다스려 편안히 죽게 함으로써 생성(生成)해 주신 은혜를 끝까지 하소서."
하니, 상이 답하기를,
"아, 내가 경의 일에 대해, 도움이 되지는 못하고 분란만 만든다고 여겼다면, 어찌 너그럽게 봐주고 총애만 한 채 성심으로 말하지 않고, 경교로 하여금 이런 잘못된 행동을 하게 하였겠는가. 이는 절대 그럴 리가 없는데 경은 어찌하여 헤아려 보지 않고 이렇게까지 의심한단 말인가? 경에 대해서 조금도 의심하는 바가 없는데, ‘그 말이 부합한다.’든가 ‘바로 신을 이른다.’는 등의 말로 깊이 자책하여 피혐하고 있으니, 이게 어찌 내가 경에게 바라는 바이겠는가? 모름지기 내 뜻을 체득하여 마음을 가라앉혀 사양하지 말고 뜻을 바꾸어 올라 오라."
하고, 사관을 보내 전유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시열은 자부심이 매우 높아서 옛날의 어진이로 자처하였는데 당류의 추앙이 정자(程子)나 주자(朱子)에 못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상소에 간사한 꾀를 부려 올렸다 내렸다 늘렸다 줄였다 하는가 하면 심지어는 서필원의 말을 끌어다가 상신의 넓은 도량으로는 반드시 노여워하지 않을 것으로 여겨 이 말을 했다고 하면서 한편으로는 임금을 속이고 한편으로는 필원을 공격 배척하였으니 그 교묘한 말솜씨와 아첨하는 본 모습이 이에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이 때문에 공자가 아첨하는 자를 미워한 것이다.
○辛未/右相宋時烈上疏辭職, 略曰:
臺諫每以殿下信任大臣, 而大臣, 自任之重爲言, 此則不講乎聖賢之訓, 而徒牽乎世俗之見也。 故臣疏所謂正言其非, 而其下易去大臣云云者, 是乃假說之辭, 蓋曰, 大臣非其人, 則臺諫何不直斥請易, 而顧乃似說不說, 爲口含膠漆之習也。 此乃槪言, 諫臣之大體也, 非以大臣爲定非其人, 而必可改易也。 然此雖假說之辭, 似亦不敢言, 而終於敢言者, 有由然矣。 故判書徐必遠, 乃今相臣之知己友也。 【相臣卽指許積也。】 其速肖之願, 至形於桃符之祝, 則其慕義, 可謂無窮矣。 然而不忠之斥, 乃發於章疏。 夫不忠, 人臣之大罪也。 自常情言之, 則知己之友, 以此而加之, 其憾恨之意, 必有甚焉者, 而相臣乃悠然於色, 泰然於心, 略無芥滯, 安而受之。 臣嘗服其弘量, 以爲大臣之體, 當如是也。 以故敢於疏末及之, 略無顧慮, 而心口相語曰, 雖使我直攻其闕, 必不以爲意, 況此云云之說, 無甚譏切? 於是率意寫出而封進矣。 竊聞臣疏之入, 已多日矣, 而果無所言, 則臣自幸所料之不妄矣。 其後乃聞, 有引入之擧, 而聖明以爲, 寔由於臣之妄言, 臣罪已不可言。 而尹敬敎之疏, 闖然而發, 攻斥之言, 無所不至, 此實非臣之所知, 而亦非臣之所料也。 然聖明又以其言, 爲符合臣意, 且意其激於膠漆之刺。 然則其罪不在於敬敎, 而實在於臣也。 今之議者, 旁緣聖敎, 詆訶蝟起, 謂臣爲本根, 而敬敎爲枝葉, 究其形跡, 誠不然矣。 然則聖敎所謂, 敬敎之兇狡, 卽臣之兇狡, 敬敎之奸狀, 卽臣之奸狀, 而敬敎之禽獸, 卽臣之所以爲禽獸也。 今之罵臣者, 至謂臣潛詣近畿, 與敬敎相約而歸。 如此則是臣與敬敎, 爲鬼爲蜮之狀, 實不忍掛諸齒牙。 臣言果若騃妄, 不足有補, 而適以生亂, 則聖明當示不可之意。 而乃反假借褒寵, 大聖人待下, 不當如是也。 乞亟遞臣職, 仍治臣罪, 俾得安意沒齒, 終始生成之恩也。 上答曰: "噫! 予之於卿事, 有不足有補, 而適以生亂, 則豈用假借褒寵, 不以誠心以誥, 而使敬敎有此無狀之擧哉? 是必不然之理, 卿胡不量, 疑之至此? 少無相疑於卿, 而以其言符合卽臣之謂等語, 深加引嫌, 此豈予之所望於卿者哉? 須體予意, 安心勿辭, 幡然上來。 遣史官傳諭。 【謹按時烈, 自許甚高, 以古賢者自居, 其黨推仰之, 不下於程、朱。 而今此疏語, 闔闢回譎, 抑揚申縮, 至引徐必遠之言, 以爲相臣弘量, 不必怒, 而發此言, 一以欺罔天聰, 一以攻斥必遠, 其巧令本色, 於是畢露。 此夫子之所以惡夫佞者也。】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上答曰: "噫! 予之於卿事, 有不足有補, 而適以生亂, 則豈用假借褒寵, 不以誠心以誥, 而使敬敎有此無狀之擧哉? 是必不然之理, 卿胡不量, 疑之至此? 少無相疑於卿, 而以其言符合卽臣之謂等語, 深加引嫌, 此豈予之所望於卿者哉? 須體予意, 安心勿辭, 幡然上來。 遣史官傳諭。
【謹按時烈, 自許甚高, 以古賢者自居, 其黨推仰之, 不下於程、朱。 而今此疏語, 闔闢回譎, 抑揚申縮, 至引徐必遠之言, 以爲相臣弘量, 不必怒, 而發此言, 一以欺罔天聰, 一以攻斥必遠, 其巧令本色, 於是畢露。 此夫子之所以惡夫佞者也。】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17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9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정론-간쟁(諫諍) / 사법-탄핵(彈劾)
우윤(右尹) 권시(權媤)가 죽었다. 권시는 젊어서부터 몸가짐이 구차하지 않고 언론이 편벽되지 않아 벗들에게 추앙을 받았다. 병자 호란 뒤에는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문경(聞慶)의 산중에 살면서 경서와 사기를 즐기며 노년을 마치려고 하였는데, 효종조에 이르러 산림의 선비로 부름을 받아 수 년 내에 참판의 지위에 이르렀으니, 임금과의 만남이 융성하다고 하겠다. 기해년 예론(禮論)이 일어났을 때 양송(兩宋)005) 과 대립하였고, 소를 올려 윤선도(尹善道)를 구원하다가 당시 사람들의 비위를 거슬려 폐고(廢錮)당한 채 죽었다.
1월 25일 임신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고, 구황하는 정사의 편리 여부에 대해 각기 소견을 말하게 하였다. 혹은 ‘죽을 쑤어 주는 곳을 설치하는 것이 편리하다.’고도 하였고, 혹은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는 것이 편리하다.’고도 하였는데, 결국 죽을 쑤어 주는 곳을 설치하기로 결정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돌아다니는 걸인들을 돌려보내는 일에 대한 의론도 논의하여 결정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서울과 외방은 차이가 있는데 어떻게 그들의 본고장이 아니라는 이유로 강제로 돌려보낼 수가 있겠는가."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건장한 자는 그들의 본고장으로 돌려보내 농사를 짓도록 권장하고, 노약자나 질병이 있는 자들은 그대로 머물러 있게 하여 구제해야 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이세화(李世華)를 광주 부윤(廣州府尹)으로 삼았다. 세화는 낭료(郞僚)로 있을 때부터 능력이 있다는 명성이 있었는데 이에 이르러 발탁 임명된 것이다.
지금부터 서북변(西北邊)에서 법을 어기고 국경을 넘어간 자를 따라간 무리들에 대해서는 본영(本營)에 잡아다 놓고 엄한 형벌을 세 차례 시행하고, 재범의 경우는 엄한 형벌을 다섯 차례 시행한 다음 본진에다 두고, 삼범(三犯)의 경우는 효시하게 하는 것을 일정한 규식으로 삼도록 명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전 승지 강호(姜鎬)의 부부와 부자가 염병으로 잇따라 죽었습니다. 강호의 청백한 절개는 온 조정이 모두 알고 있는 바인데 죽은 뒤에 상여를 운반하고 무덤을 지을 길이 없다 하니, 그 실정이 매우 가련합니다."
하니, 상이 상여를 멜 군사와 상례 물품을 지급하라고 하였다.
1월 26일 계유
나주 목사 소두산(蘇斗山), 태인 현감 김수일(金壽一), 광주 목사 오두인(吳斗寅), 장성 부사 김세정(金世鼎)에게 자급을 올려 주었다. 이는 전라 감사 오시수(吳始壽)가 이들이 구황을 잘했다고 아뢰었기 때문이다.
1월 27일 갑술
정언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본도(本道)006) 로 하여금 등급을 나누어 아뢰도록 하되, 으뜸가는 사람 1명을 제외하고 그 나머지는 구휼한 정사의 우열에 따라 각자 알맞게 상을 베푸소서."
하니, 상이 따르지 않았다. 여러 번 아뢴 뒤에야 답하기를,
"경상도의 예에 따라 조사하여 아뢴 뒤에 처리하겠다."
하였는데, 그 뒤 김수일 등에게 올려준 자급을 환수하였다.
1월 28일 을해
박지(朴贄)를 집의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오정창(吳挺昌)을 정언으로, 이하(李夏)를 동래 부사로 삼았다.
1월 29일 병자
각 도에서 염병으로 죽은 사람 수를 보고하였는데, 2천 90여 명이었다.
낭선군(朗善君) 이우(李俁)가 북경에서 돌아왔다.
이하(李夏)가 새로 동래부사에 임명되었는데, 부임하기 전에 전 부사 정석(鄭晳)과 혼인을 맺었다. 혼인한 집과는 서로 직임을 넘겨주고 물려받을 때 상피(相避)하는 법이 있었으므로 허적이 이를 아뢰었는데, 상이 특명을 내려 파격적으로 부임하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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