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1일 정축
상이 침을 맞았다. 오른쪽 겨드랑이 아래 결핵(結核)이 곪았기 때문이다.
2월 3일 기묘
평안도의 평양 등에 지진이 있었다.
대사간 민시중(閔蓍重)이 추감(推勘)을 받았다는 이유로 피혐하여 면직되었다.
2월 5일 신사
전라도 장흥의 천관산(天冠山) 대장봉(大壯峯)이 갑자기 움직여, 왼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서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기울어졌다가 다시 서기도 하였는데 이렇게 백여 차례나 반복했다. 대개 그 산에 세 개의 석봉(石峯)이 솥발처럼 서 있는데 이른바 대장봉은 그 가운데 있는 것으로서 높이가 수십 장이나 되었다. 그것이 움직일 때 한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목격하였다. 도신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매우 괴이하고 허망한 듯합니다. 수십 장이나 되는 석봉이 어떻게 좌우로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날 리가 있겠습니까. 하물며 그것이 기울어질 때 풀과 나무 그리고 돌들이 반드시 모두 부서졌을텐데, 그 고을의 수령은 직접 그 현지를 살펴보지 않았고 감사는 갑자기 아뢰었으니, 소루함이 심합니다. 그러나 상께서 만약 큰 변괴로 여기셔서 더욱 수성(修省)하신다면, 역시 좋지 않겠습니까?"
하니, 상이 그렇게 여겼다.
2월 6일 임오
두꺼비들이 어영청(御營廳) 북쪽 담장 밖에서 나와 종묘(宗廟)의 서쪽 담장 가에 이르렀는데, 두셋씩 서로 짊어지고 온 도로를 가득메워 사람들이 발을 디딜 곳이 없었다. 사경(四更)에 이르러서도 그랬다.
전라도 부안현(扶安縣)에서 정월 9일에 흰 무지개가 해의 곁을 가로질러 지나갔고, 황색 구름이 해를 가려 마치 일식 때와 같았으며, 서북쪽에서 우레 소리가 크게 났다.
이경억(李慶億)을 우참찬으로, 이민적(李敏迪)을 대사헌으로, 이상진(李尙眞)을 대사간으로 삼았다.
2월 7일 계미
사간 이합(李柙), 정언 이인환(李寅煥)이 아뢰기를,
"남해 현령 임식(任湜)과 경기 수사 이원로(李元老)의 죄상이 어사의 장계에 숱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문서로 드러나지 않았다 하여, 임식은 해사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지 않고 본도로 하여금 조사하게 하셨으며, 원로는 그의 직책만 파면하고 끝내 사실을 캐보지 않았으니, 탐욕스러운 수령들을 장차 어떻게 징계하고 두렵게 할 수 있겠습니까. 모두 잡아다가 문초하여 처리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2월 8일 갑신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전 부사 정한기(鄭漢驥)는 일찍이 장단 부사(長湍府使)로 있을 때, 그 고을의 김씨 성을 가진 집과 혼인을 하였습니다. 강화도에서 산 곡식을 배로 실어나를 때, 그 배를 김씨 성을 가진 사람의 집 앞에 정박해 놓고는 밤에 사람으로 하여금 매 섬마다 쌀을 빼내 김씨 집에 들여다 놓은 다음 5, 6일이 지난 뒤에 그 섬수대로 각 면에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리하여 백성들이 그 쌀을 되어 보면, 한 섬이 겨우 8, 9두에 지나지 않았는데, 가을에 17두를 받아들였습니다. 또 받아들인 뒤에는 다시 관청의 곡(斛)007) 으로 양을 고쳐 나머지를 빼내 자기의 용도로 가져갔습니다. 잡아다 문초하여 죄를 정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다시 자세히 살펴 처리하라."
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신후재(申厚載)와 동래 부사 정석(鄭晳)을 잡아다 추문하였다. 평성태(平成太)가 정관왜(正官倭)로 병사(病死)하자 부관왜(副官倭) 등이 동래에 그대로 머물러 있었다. 이때 조정의 의론이, 마땅히 접위관을 소환해야 한다고 하였으므로, 이에 후재에게 올라오라고 명하였다. 그러자 여러 왜인이 자기들을 멸시한다고 여겨 성을 내면서 눈을 부릅뜨고 소리를 질렀다. 후재가 그들이 변란을 일으킬까 걱정하여 잠시 행차를 중지하고 장계로 그 상황을 보고하였다. 조정의 의론이 모두 말하기를,
"이미 소환의 명령을 받고서도 왜인에게 붙들려 지체하였으니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잡아오는 것이 마땅합니다."
하였고, 도승지 장선징(張善瀓)이 아뢰기를,
"정석의 죄는 후재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하였으므로 이내 둘 다 잡아오도록 명한 것이다.
2월 9일 을유
영천군(永川郡)에 운석(隕石)이 떨어졌다. 정월 29일 오시에 하늘에 얇은 구름이 끼어 햇빛이 보이지 않더니 갑자기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처음에는 대포소리 같다가 나중에는 우레소리 같았다. 서북방에서 시작하여 서남쪽으로 가더니, 얼마 뒤에 그쳤다. 본군의 촌 백성들이 그때 마침 본군의 남쪽에 있는 자인현(慈仁縣) 경계에서 돌덩어리 하나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는데 소리가 우레와 같았고 땅에 떨어진 뒤에 소리가 그쳤으며 떨어진 곳에는 땅이 한 자 남짓 패였다. 그 돌의 크기는 말[斗]만 하였고 무게는 서른 여섯 근이었으며, 색은 검푸렀고 형체는 거북이가 엎드린 것 같았는데 그 위에 짐승의 발자국 같은 흔적이 있었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성상께서 특별히 사망한 포보(砲保)의 가포(價布)를 감해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각 고을에는 이미 바친 자가 있으니, 저 이미 바친 자의 자식이나 아내 그리고 이웃이나 일가붙이는 유독 무슨 죄가 있단 말입니까. 청컨대 이미 바친 것은 본 고을에 되돌려 보내 그 주인에게 나누어 주게 하여 똑같이 보살피는 덕을 보이소서."
하였는데, 상이 따르지 않다가, 여러 번 아뢴 뒤에야 따랐다.
왕대비의 머리에 독한 종기가 나서, 밤 3경에 약방 도제조 허적·이하를 불러들였다. 4경에 종기가 난 곳에 뜸을 떴다.
이우정(李宇鼎)을 지평으로 삼았다.
2월 10일 병술
자전이 뜸을 떴다. 도제조 이하가 약방에서 숙직하였다.
평안도 양덕(陽德) 등 세 고을이 관리하는 각종 곡식 9천 3백 90석과 원양도 통천(通川) 등 세 고을의 각종 곡식 1천 5백 50여 석을 재해를 당한 북도(北道)의 고을에 옮겨 백성을 구제하도록 명하였다.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죄인 김시현(金時鉉)이 제멋대로 그 형의 임소(任所)인 안성(安城)을 왕래하였습니다. 죄인이 멋대로 유배지를 떠난 것이나, 그 고을을 지키는 수령이 사사롭게 왕래하도록 허락한 것은 불법적인 행위입니다. 본도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하여 아뢰게 한 뒤에 시현과 음죽 현감(陰竹縣監) 이명로(李命老)를 법에 따라 죄주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1일 정해
대사헌 이민적이 아뢰기를,
"해마다 크게 흉년이 들어 사망자가 잇따르고 있는데, 호적(戶籍)을 정리하는 일을 마침 올해에 해야 됩니다. 꼬치꼬치 찾아내고 추적하는데 따른 소요의 폐단을 염려하지 않을 수 없으며, 이때에 호적을 완성하더라도 또한 백성의 숫자를 제대로 얻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니 잠시 동안 중지했다가 추수할 때를 기다려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라고 하였다. 영상 허적이 아뢰기를,
"서울의 호적 단자는 거의 다 거두어 들였으므로 중지하기란 실로 어렵습니다."
하고, 민정중이 아뢰기를,
"단자는 그대로 계속 받아들이되, 정서(正書)하는 것을 가을을 기다렸다가 하는 것이 편리할 듯합니다."
하니, 상이 윤허하였다.
2월 12일 무자
태백이 낮에 나타났다.
전라도 전주 등 19개 고을에 지진이 일어났고, 해남(海南) 대둔사(大芚寺)의 큰 종이 저절로 울리다가 한 식경 뒤에 멈추었는데, 도신(道臣)이 보고하였다.
상이 동래 부사 이하(李夏)를 인견하였는데, 영상 허적도 입시하였다. 상이 이하에게 이르기를,
"네가 부임한 뒤에 왜인에게 ‘너희들이 비록 집을 천 칸을 짓고 10년을 머무른다 해도, 너희들이 바라는 바가 이로 인해 이루어질 리는 전혀 없다. 너희들의 요청이 허락할 수 있는 것이라면 비록 부산에 있더라도 허락할 수 있지만, 허락할 수 없는 것이라면 비록 동래에 있더라도 허락할 수 없다. 하물며 조정에서 만약 너희들이 여기에 왔다고 해서 허락한다면, 이것은 너희들에게 부대껴서 들어주는 것이 되니, 어찌 그럴 리가 있는가. 차라리 빨리 물러나 조정의 조치를 기다리는 것이 더 나을 것이다.’라는 등의 말로 분명히 깨우치라. 다만 염려되는 것은 통역관이 자세히 전하지 못할까 하는 점이다."
하니, 이하가 아뢰기를,
"동래부의 관속들은 왜인의 심복이 아닌 자가 없어, 모든 행동마다 곧장 누설되어 알려집니다. 인심이 이와 같으니, 이는 작은 걱정이 아닙니다."
하였다. 허적이 아뢰기를,
"한 마디를 알려주면 금 4백 냥을 갚아 주기 때문에 장사치들이 나라의 실정을 누설하면서 오직 늦을까 걱정하는 정도라 하니, 진실로 통분할 일입니다."
하였다.
2월 16일 임진
약방에 술을 내렸다. 자전의 병환이 회복되었기 때문이다.
2월 18일 갑오
김만균(金萬均)을 승지로, 신정(申晸)을 부응교로, 윤심(尹深)을 교리로, 박세당(朴世堂)을 수찬으로, 송창(宋昌)을 보덕으로, 이상(李翔)을 장령으로, 윤계(尹堦)를 제주 목사로 삼았다.
대사헌 이민적이 아뢰기를,
"흉년을 구휼하는 정사는 오직 실지로 힘써야 합니다. 서울과 지방에서 해마다 죽을 쑤어 구휼하고 있으니 그 효과를 또한 말할 만합니다. 그런데 서로 잇따라 죽은 수만의 굶주린 백성이 모두 죽을 먹는 사람들입니다. 대개 한데나 맨땅에서 살므로 쉽게 병에 걸리고, 또 아침 저녁으로 왕래할 때 비바람을 가리지 못해서, 태반이 길에서 쓰러져 죽습니다. 관청에 와서 밥을 얻어 먹는 외방의 백성이나 토착민 역시 농사를 지을 길이 없습니다. 간혹 한때의 죽음은 면하더라도 끝내 떠돌아다니며 빌어먹는 백성이 되고야 마는데 이는 실로 이미 경험해 본 분명한 현상입니다. 진휼청으로 하여금 서울과 지방에 지시하여 원래 거주하는 사람 가운데 특히 가난하고 병든 자를 골라서 마른 양식을 나누어 주게 하고, 죽을 쑤어 주는 곳에서는 떠돌아다니는 걸인들만 와서 먹게 하소서.
지난해 농사가 흉년이 든 것은 일기가 불순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실은 사람의 힘이 제때에 미치지 못한 데에서 말미암은 것입니다. 더구나 올해의 형세는 또 전과 달라서, 굶주림으로 죽고 난 끝에 향리에 살아남은 토착민은 열에 너댓도 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조정에서 곡식을 빌려주어 농사를 짓게 도와주지 않는다면, 전야(田野)의 황폐가 필시 지난해보다 더 심할 것입니다. 청컨대 묘당으로 하여금 별도로 사목(事目)을 만들어 각도에 거듭 당부하여 그 수령들로 하여금 직접 전야를 순행하면서 종자가 없는 자에게는 종자를 지급하고 식량이 없는 자에게는 식량을 지급하게 하소서. 그리고 가을의 추수를 조사할 때에도 경작의 다소를 가지고 수령의 상벌을 결정하는 근거로 삼도록 하소서."
하니, 상이 묘당으로 하여금 여쭈어 처리하게 하라고 하였다.
상이 대신과 비국의 신하들을 인견하였다. 접위관(接慰官) 신후재(申厚載)를 잡아오도록 명한 뒤에 그의 대임으로 사람을 뽑아 보낼 것인가의 여부에 대해 의논이 일치하지 않았다. 혹은 뽑아 보내야 한다고도 하고, 혹은 불가하다고도 하는 등 결정이 나지 않았었다. 이때에 이르러 여러 신하들이 탑전(榻前)에서 논란하다가 결국은 본도의 도사(都事)를 뽑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영의정 허적이 아뢰기를,
"원주(原州)에서 수상한 자를 잡아 가두었는데, 오늘 청나라 사신이 이미 돌아갔으니 이제 여쭈어 처리해야 하겠습니다. 그 사람의 이름을 보니 박기상(朴起相)이었습니다. 그의 아비 예남(禮南)은 내노(內奴)로 문천(文川)에 살고 있으며, 그는 갑산(甲山)에 있는 숙부의 집에서 자랐다고 했는데, 공문을 보내 물어보았더니, 과연 사실이었습니다. 그의 어미는 수월(受月)인데, 동래 사람으로서 서울 양반집의 비녀였습니다. 그러니 이 사람은 결코 외국인이 아니고 사로잡혀 갔다가 도망쳐서 돌아온 자입니다. 비록 본토(本土)로 보내더라도 도망쳐 숨을 걱정이 없지 않으며, 비록 잡아서 청나라로 보낸다 하더라도 도망쳐 돌아올 폐단 역시 매우 염려됩니다. 그러니 제주와 같은 절도(絶島)에 보낸다면 될 듯합니다."
하니, 상이 그렇게 하라고 하였다.
정언 이인환 등이 ‘제용감 정(濟用監正) 조사기(趙嗣基)가 대포(袋布)를 남용하여, 공물 주인(貢物主人)들이 그 고통을 견디다 못해 원망하는 소리가 길에 자자하다.’고 탄핵하면서 파직하고 서용하지 말 것을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19일 을미
헌납 민종도(閔宗道)가 인피하기를,
"어제 동료가 조사기의 일로 의논을 제기할 때 신은 더 자세히 실정을 살피고자 재삼 곤란하게 여기다가 끝내는 동참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여론을 들어보니, 대목(袋木)008) 을 끌어다 쓰는 잘못된 관례는 이미 오래 전부터 있어 왔고 그 죄를 범한 자가 한둘이 아닌데, 사기만을 논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신이 제용감의 아전을 불러 물어보니, 끌어다 쓰는 규정은 과연 계묘년부터 시작되었다 합니다. 사기가 그릇된 전례를 그대로 따른 죄는 실로 있습니다만, 끌어다 쓴 잘못을 한 사람에게만 책임을 지우니 여론이 그르게 여기는 것이 당연합니다. 체차하소서."
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정언 이인환 역시 인피하기를,
"신이 사기를 논박한 것은 잘못된 전례를 그대로 답습했기 때문이 아니라, 그 용도가 무절제하여 원성을 초래하였기 때문입니다. 동료가 이미 물의가 있다고 피혐했으니, 신 역시 편안히 있기 어렵습니다. 체차해 주소서."
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처치하여 모두 출사하도록 청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2일 무술
헌납 민종도가 이인환의 피혐한 글 가운데 침척(侵斥)하는 말이 있고 또 출사하게 하자고 청한 처치가 불가하다는 이유로 또 인피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지평 김환(金奐)도 처치를 잘못한 사람으로서 감히 다시 처치를 할 수 없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정언 이인환 역시 동료에게 배척을 당했다는 이유로 또 피혐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황해도 해주 등 고을에 지진이 있었다.
2월 23일 기해
황해도 곡산(谷山)의 민가에 황소가 있었는데 수십일 남짓 꼴과 곡식을 먹지 않고 자주 누웠다 일어났다 하다가 뱀 한 마리를 낳았다. 그 길이는 한 자 다섯 치였는데 머리와 꼬리며 비늘이 진짜의 뱀과 다름이 없었다. 감사가 계문하였다.
사간 이합(李柙) 역시 전일 처치를 할 때 이미 동참했으니 이제 다시 처치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인피하고 물러가 기다렸다.
대사헌 이민적이 처치하되, 민종도는 그르므로 체직하고, 이인환은 옳으므로 출사하게 하고, 집의 박지, 지평 김환, 사간 이합은 별로 혐의가 없으므로 출사하게 하자고 하니, 상이 따랐다.
2월 24일 경자
목내선(睦來善)을 형조 참의로, 윤심(尹深)을 헌납으로, 조근(趙根)을 지평으로, 김수흥(金壽興)을 지경연(知經筵)으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때 상이 항상 조용히 요양하고 있는 중이어서 경연에 나오지 않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래서 경연청은 하나의 쓸모없는 한산한 곳이 되었고 그 관원도 인원 수만 채워 놓을 뿐이었다. 수흥 역시 문학하는 선비가 아닌데 의례적으로 이 직임에 제수되었고, 옥당의 유신(儒臣) 가운데는 왕왕 은(銀)과 근(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호구-호적(戶籍)
ⓒ 한국고전번역원
사신은 논한다. 이때 상이 항상 조용히 요양하고 있는 중이어서 경연에 나오지 않은 지 이미 여러 해가 되었다. 그래서 경연청은 하나의 쓸모없는 한산한 곳이 되었고 그 관원도 인원 수만 채워 놓을 뿐이었다. 수흥 역시 문학하는 선비가 아닌데 의례적으로 이 직임에 제수되었고, 옥당의 유신(儒臣) 가운데는 왕왕 은(銀)과 근(根)을 구분하지 못하는 자도 있었다.
○庚子/以睦來善爲刑曹參議, 尹深爲獻納, 趙根爲持平, 金壽興爲知經筵。
【史臣曰: "時上常在靜攝中, 不御經筵, 已累歲矣。 經筵廳作一冗散地, 官亦備員而已。 壽興亦非文學之士, 而例授是任, 玉堂儒臣, 往往有不辨銀根者。"】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1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호구-호적(戶籍)
지평 김환(金奐)이 또 금년 호적을 가을 추수가 끝나기를 기다려 작성하자고 논집하며 여러 번 아뢰었으나, 끝내 따르지 않았다.
2월 26일 임인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임진년 병란 뒤에 궁궐이 불타버린 까닭에 선조(宣祖)께서 서울로 돌아오시어 월산 대군(月山大君)의 옛집에 머무르셨으니, 이는 실로 중흥(中興)의 유기(遺基)로서 비유하자면 소흥 사택(紹興使宅)과 같은 것입니다. 인조조에서 정침(正寢)으로 쓴 옛집만 특별히 봉(封)하고, 그 나머지 빈터는 모두 그의 자손에게 나누어 주셨으니, 이 어찌 종족을 돈독히 대하시는 지극한 사랑의 혜택이 아니겠습니까. 지금 그의 손자 이찬(李纘)이 내사(內司)와 분쟁하고 있는 것은 이 빈터입니다. 그전부터 내사에서 금지의 한계를 두지 않았고 그 자손들 역시 자기 소유로 여겨 수십년 동안 분쟁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미약한 자손들이 사체를 모른 까닭에 단지 내사의 하인들이 조종하는 폐단만 알고, 내사 역시 승전 직첩(承傳直帖)을 받는다는 요즈음의 규례를 몰라, 망령되이 ‘난대(鸞臺)009) 를 경유하지 않았으니 어찌 어명이라 할 수 있느냐.’는 옛말을 빙자하여 이치에 닿지도 않는 말을 계속하다가 스스로 죄에 빠진 것입니다. 그러니 이것은 실로 불쌍히 여기셔야지, 죄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특별히 석방하라 명하소서."
하였으나, 상이 따르지 않았다. 민적이 여러 번 간쟁하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충청도 공산(公山) 지역에 땅이 꺼져 구덩이가 되었는데, 항아리 모양처럼 위는 좁고 가운데는 넓었다.
2월 27일 계묘
대사헌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안주(安州)의 교생(校生) 양계장(梁繼璋)이 그의 노비가 상의원(尙衣院)의 공천(公賤)이 되었다고 본부에 억울함을 하소연하였습니다. 신들이 그 문서를 가져다 살펴보니, 본국인인 이진원(李珍元)이 중국에 뽑혀 가서 태감(太監)010) 이 되었다가, 중종(中宗) 정덕(正德)011) 무진년(戊辰年)012) 에 흠차 정사(欽差正使)로 우리 나라에 왔을 때, 특명으로 덕주(德州)에 사는 장례원(掌隷院)의 노비 4명을 주었습니다. 그때 교지(敎旨)에 찍힌 어인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고, 당시 관반(館伴)과 낭청(郞廳)이 증명의 글을 써서 이진원의 아들 수남(秀男)에게 영원히 주도록 하였고, 또 그의 누이 오씨(吳氏)에게 이전해 주도록 하였습니다. 이 뒤로부터 대대로 서로 전해 계장에게 이르기까지 전수한 문기(文記)가 매우 명백합니다. 그런데, 형조에서는 단지 수남과 오씨 간의 숙질 사이에 이전해준 문기에 관청의 증명서가 없다는 이유만으로 공천을 삼아버렸으니, 그가 억울하다고 한 것이 당연합니다. 정덕 연간의 교지가 완연히 새것과 같습니다. 명나라 태감이 우리 나라에 사신으로 와서 노비를 하사받기까지 한 일을 어찌 다시 볼 수가 있겠습니까. 성상께서도 필시 측은하시어 백 년을 전후한 사태의 변화에 대해 개연(慨然)한 마음이 드실 것입니다. 두셋의 노비를 주거나 뺏는 것이 공사간에 무슨 큰 관계가 있겠습니까마는, 사체에 관계된 바는 매우 큽니다. 그러니 장례원으로 하여금 분명히 조사한 다음 여쭈어서 처리해 그 주인에게 돌려주게 하소서."
하니, 상이 해조로 하여금 조사하여 아뢰게 했다.
2월 29일 을사
대사간 이민적 등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전라 감사의 장계를 보니, 천관산의 바위가 기울어졌다가 일어난 것과 대둔사의 종이 저절로 울린 일을 모두 괴탄(怪誕)한 일이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이상한 일을 모두 괴탄으로 돌려버린다면, 태양에 무지개가 꿰뚫거나 별이 낮에 보이는 것들이 어느 것이나 그렇지 않겠습니까. 훗날의 폐단에 관계되므로 그대로 방치할 수 없습니다. 감사 오시수(吳始壽)를 추고하소서."
하니, 상이 따랐다.
함경도에서 정월 보름 이후에 굶어죽은 사람이 12명, 돌림병으로 죽은 사람이 6백 90명, 병들어 죽은 소와 말이 1백여 두였다.
2월 30일 병오
이연년(李延年)을 승지로, 이수만(李壽曼)을 장령으로, 신익상(申翼相)을 설서로, 이상(李翔)을 집의로 삼았다.
사신은 논한다. 이상은 배운 게 없고 문장 실력도 없어 과거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산림(山林)의 선비인 양 굴어 허명(虛名)을 낚았으며 형세를 믿고 이익을 탐해 향리에서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조정에서 비록 어진이로 대우했으나, 선비들의 여론은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상은 단지 하나의 용렬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사는 곳이 양송(兩宋)013) 이 사는 곳과 가까웠기 때문에 자주 찾아가 인사를 해 그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시비(是非)를 의논할 때마다 한결같이 양송을 따랐다. 또 그 두 아우인 이숙(李䎘)과 이익(李翊)이 모두 삼사(三司)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형세를 끼고 드디어 아장(亞長)에 앉게 되었으니, 명기(名器)014) 를 매우 욕되게 하였다.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註 013] 양송(兩宋) : 송시열과 송준길.[註 014] 명기(名器) : 관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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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신은 논한다. 이상은 배운 게 없고 문장 실력도 없어 과거 시험을 볼 수가 없었다. 이에 산림(山林)의 선비인 양 굴어 허명(虛名)을 낚았으며 형세를 믿고 이익을 탐해 향리에서 의롭지 못한 일을 많이 저질렀다. 조정에서 비록 어진이로 대우했으나, 선비들의 여론은 그를 비루하게 여겼다.
삼가 살피건대, 이상은 단지 하나의 용렬한 사람이었으나 그가 사는 곳이 양송(兩宋)013) 이 사는 곳과 가까웠기 때문에 자주 찾아가 인사를 해 그들의 인정을 받았다. 그래서 시비(是非)를 의논할 때마다 한결같이 양송을 따랐다. 또 그 두 아우인 이숙(李䎘)과 이익(李翊)이 모두 삼사(三司)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형세를 끼고 드디어 아장(亞長)에 앉게 되었으니, 명기(名器)014) 를 매우 욕되게 하였다.
○丙午/以李延年爲承旨, 李壽曼爲掌令, 申翼相爲說書, 李翔爲執義。
【史臣曰: "翔不學無文, 不能爲擧子業。 乃假容林下, 以釣虛名, 而恃勢耽利, 多行不義於鄕曲。 朝廷雖以賢者待之, 士論鄙之。"】 【謹按翔特一庸闒底人耳, 其居近於兩宋之居, 頻頻拜見, 乃得其許與。 凡論議是非, 一祖於兩宋。 且其兩弟䎘、翊, 皆翺翔於三司, 挾其形勢, 遂忝亞長, 其辱名器大矣。】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史臣曰: "翔不學無文, 不能爲擧子業。 乃假容林下, 以釣虛名, 而恃勢耽利, 多行不義於鄕曲。 朝廷雖以賢者待之, 士論鄙之。"】
【謹按翔特一庸闒底人耳, 其居近於兩宋之居, 頻頻拜見, 乃得其許與。 凡論議是非, 一祖於兩宋。 且其兩弟䎘、翊, 皆翺翔於三司, 挾其形勢, 遂忝亞長, 其辱名器大矣。】
【태백산사고본】 20책 20권 22장 A면【국편영인본】 37책 11면
【분류】인사-임면(任免) / 역사-사학(史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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